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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암곡(列岩谷, 새갓골) 마애불상(磨崖佛像,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산119번지)은 2007년 5월 22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근처 석불좌상 복원을 위해 주변을 조사하다가 발견되었다. 석불좌상의 축대 아래쪽에서 축대 상부로 출입하던 당시의 동선(動線)이 불분명하여 이를 조사하기 위해 축대 중심으로 주변을 면밀히 살피다가 발견한 것이다.

새갓골주차장에서 약 700~800m를 소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면 마애불상과 석불좌상을 만날수있다.

당시 석불좌상에서 남동쪽으로 약 30m 떨어져 있으며, 30°정도 경사진 산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면을 바닥으로 향한 채 엎어져 있었고 왼쪽 다리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흙에 덮인 상태였던 것을 한 달 동안 흙을 파냈다. 마애불상이 발견되기 전 이곳은 잡목들이 많이 우거지고 등산로에서 떨어진 경사진 곳으로 사람들의 접근이 없었다.

마애불상 발견 당시 모습

학계에서는 마애불상 얼굴이 풍화된 흔적이 거의 없어 마애불상이 제작 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지진 등 천재지변으로 현 위치에서 앞으로 그대로 넘어졌던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상태에서 바로 세웠을 때 1,300년 전 당시 마애불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보호각이 마애불상을 둘러싸고 있다

마애불상이 위치한 곳은 산 사면과 능선에 노두(露頭)가 발달되어 있으며, 이러한 노두에서 풍화되어 떨어져 나온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너덜겅을 이루고 있다. 다행스럽게 넘어졌을 때 돌출되어 있는 마애불상 머리카락(나발)이 돌에 먼저 닿으면서 손상이 없었고 불상의 허벅지 부분과 머리 부분만 암반과 괴석(塊石)에 닿아 마애불상을 지탱하고 있다. 돌과 얼굴과의 거리는 5cm이다.

마애불상은 화강암(약 250×190×620㎝, 무게 약 80톤)의 한 면을 고부조(高浮彫)한 것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460㎝, 발아래 연화대좌가 100㎝로, 전체 높이가 560㎝에 이르는 대형 마애불이다.

육계(肉髻)가 높고 민머리[소발(素髮)]이며, 타원형의 얼굴에는 오뚝하게 솟은 코와 아래로 내리뜬 길고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도톰하고 부드럽게 처리된 입술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어깨는 넓고, 가슴은 펴고 있어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아래로 내려올수록 옷 주름 간격이 넓어져 9단을 형성하면서 발목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두발은 발끝이 밖으로 향하게 벌리고 있으며, 연화대좌는 5장의 앙련(仰蓮)을 얕게 조각하였다.

스케치한 마애불상

특히 이 마애불상에서 주목할 것은 세 가지가 이다.
한 가지는 귀가 발제선(髮際線: 머리털이 난 끝선)에서 어깨에 이를 정도로 매우 크며, 평면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또 한 가지는 불상의 수인(手印)으로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이라 하여 한 손바닥으로 밖으로 해서 어깨높이까지 올리고, 다른 손바닥은 아래로 늘어뜨려 손바닥이 보이게 하는 수인이다.
그런데 여기 마애불상은 왼쪽 손등을 바깥으로 하여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서 가슴 위에 얹었으며, 오른손 역시 손등이 밖으로 향하고 엄지손가락을 안으로 감싼 채 네 손가락을 가지런히 하복부에 대고 있는 특이한 형식의 수인이다. 마지막은 마애불상이 약 4등신(等身)으로 몸에 비하여 머리 부분이 크게 표현되어 있어 예불하는 사람이 마애불을 우러러 볼 때의 시각적인 효과를 고려한 것이다.
열암곡 마애불은 8세기 후반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삼화령 삼존불, 배리 삼존불, 석굴암 본존불로 이어지는 신라 불상의 큰 흐름을 이어가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하루속히 1,300년 전 신라 원형의 모습을 간직한 마애불상을 온전히 볼 수 있는 날을 기다려본다.

석굴암 본존불을 연상케 하는 열암곡(列岩谷) 석불좌상(石佛坐像)
열암곡 석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3호)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경주시와 함께 보수·정비계획에 따라 2007년 4월부터 발굴조사와, 정비 및 복원을 마친 결과, 2009년 1월 29일 높이 4m, 남향(南向)으로 정좌한 장대한 모습으로 갖추었다. 본래 열암곡 석불좌상은 8~9세기경 통일신라시대에 상대, 중대, 하대를 갖춘 3단 대좌 위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조선시대 전기까지 유지되어 오다가 이후 누군가에 의해 파괴되었다.
불상은 도괴되어 불두(佛頭)는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졌으며 광배(光背)는 불상 뒤편으로 넘어져 크게 파손되었고 중대석(中臺石)은 결실되고 없으며 상대석도 깨어져 일부분이 없었고 하대석은 부분적으로 파손된 상태였다.

복원 전 초기 모습
정비 및 복원 전 모습

2005년 10월 9일 우연히 남산을 답사하던 한 시민에 의해 불두가 극적으로 발견된 후, 이를 계기로 발굴조사, 정비 및 복원이 시작 되었다. 또한 2005년 11월 20일 상대석 일부분도 시민이 발견하였다. 석불좌상의 불두, 깨진 광배 및 하대석 편(片)들에 대한 접합 복원 그리고 대좌 부재 중 유실된 중대석(中臺石)을 신재(新材)로 만들어 재현하였다.

열암곡   석불좌상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13 호 )

대좌는 지대석(地臺石)과 하대석(下臺石)이 한 몸돌로 되어 있는 3단의 팔각 연화대좌(蓮花臺座)이다. 떨어져 나간 불두는 보존처리 후 불신(佛身)에 접합하고 10여 조각으로 깨진 광배는 구조 보강 작업을 거쳐 완전하게 접합하였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아우르는 거신광(擧身光)으로서 연화문(蓮華文), 화불(化佛)과 불꽃무늬(火焰文) 새김 등으로 하였고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였으며 몸체의 양감과 자연스럽게 늘어뜨려진 법의 차림새 및 조각수법 등 통일신라시대 전성기 양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모습이다.

열암곡은 경주 남산의 고위봉(해발 494m)과 봉화대봉(해발 476m), 천왕지봉(해발 433m)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능선들에 의해 형성된 여러 골짜기 중 하나이다. 이 중에서 백운암으로 향하는 백운계가 본류이며, 백운계 오른편으로 열암곡, 양조암곡, 심수곡이라는 세 개의 골짜기가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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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군 서생면 용연길 160에는 버려진 자동차, 자전거, 오토바이 등 폐 고철을 이용한 정크아트작품을 야외에 전시하고 있는 Fe01 카페를 만날 수 있다. 카페 이름이 특이한데 의미는 철의 원소기호인 ‘Fe와 정크아트 작품의 첫 번째 공간이라는 뜻으로 숫자 01이라고 한다. 철은 정크아트의 원자재 의미인 것 같다.

석양 때의 카페 Fe-01

‘junk’는 폐품·쓰레기·잡동사니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를 활용한 미술작품을 정크아트라고 한다. 전통적 의미의 미술이나 갖가지 폐품을 만들어내는 현대도시 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아내고자 하는 것으로 현대미술의 특징 하나로 1950년대 산업 혁명과 함께 활성화되었다.

카페 Fe01 안내도
1층 카페 입구
카페 Roof

현대도시의 파괴되고 버려진 폐품을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한편으로는 자원 보존을 강조하는 의미로 녹색환경의 개념을 강조하는 의미를 띠기도 한다.

앞에 위치하고 있는 건물에는 햄버그와 아프리카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뒤에 있는 건물에는 지역 청년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야외 전시공간에 전시 된 작품은 카페 대표이자 설치예술가인 김후철의 작품이다. 카페 옆 공장에서 4년여의 준비기간을 가졌다고 한다. 주요 작품으로는 트랜스포머, 아이언맨, 건담, 공룡, 프로데터, 에일리언, 범블비, 미니어즈, 태권브이 등 다양하다. 원래 공장은 부산인데 작업 활동에 따른 소음 발생 민원으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갤러리 1층 공간에는 김후철 대표가 아프리카 가봉에서 수집한 유물을 상시전시 하고 있고 뒤 건물에는 향후 지역 청년 작가들을 위한 기획전과 대관 전시를 한다고 한다.

김후철 대표는 부산 출신으로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가족과 함께 아프리카 가봉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돌조각을 배웠고 조각과 창작활동에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정크아트 작품 활동하기 전에는 쥬얼리 제작과 유통 사업을 하여 금전적인 성공을 하였다.

김후철 대표가 아프리카 가봉에서 수집한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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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랑(林浪) 해수욕장의 멋은 월호추월(月湖秋月)이라!

임랑해수욕장에서 바라본 월래와 고리원자력발전소

예로부터 호수처럼 맑고 잔잔한 바다에 떠오르는 달을 월호(月湖)라 하고 그 월호에서의 가을 달맞이가 경승(勝景)이라 하였고 병풍처럼 펼쳐진 송림 위에 달이 떠오르면 조각배를 타고 달구경을 하면서 뱃놀이를 즐겼던 곳으로 차성팔경 중 하나가 임랑해수욕장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옛 문헌에서는 동산(東山) 위에 달이 떴으니 월호(月湖)에 선유(船遊)한다 라고 예찬하였다.

임랑해수욕장은 정관에서 흘러온 좌광천(임랑천)이 유입하여 모래톱을 형성하면서 생긴 해수욕장으로 모래사장 길이가 1km이다. 예전에는 백사장 주변이 노송으로 병풍처럼 푸른 숲을 이루었고 좌광천이 맑아 쏘가리 천렵(川獵)을 했다고 한다. 현재는 정관 신도시로 인하여 수질이 좋지는 않고 송림도 많이 사라졌지만 요즈음 문화에 맞는 볼거리와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임랑교 아래 정관에서 흘러온  좌광천의 모습
임랑해수욕장 방파제 사이를 지나  동해로 유입하는 좌광천
임랑교 상부
임랑교에서 바라 본 좌광천

임랑해수욕장은 울주군 서생면과 경계를 두는 기장군 장안읍에 위치하고 있는 해수욕장으로 여름철이면 피서객이 많이 찾는 해수욕장이다. 특히 최근에는 캠핑 붐으로 인해 사계절 내내 여행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또한 부산 갈맷길의 출발점이기에 중년의 부부, 중장년층 단체 관광객 등 트레킹을 찾는 이들과 정관과 임랑 사이에 흐르는 좌광천을 따라 달리는 MTB 및 사이클 동호회 인으로 분주하고 역동적인 해수욕장이다.

청암 박태준 기념관

여행에 여유가 있다면 기업가이자 정치가인 청암 박태준 기념관을 둘러보는 것도 솔솔한 재미가 있다.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의 고향이 임랑이고 생가가 여기에 있다. 임랑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기념관에서 60 ~ 70년대 대한민국의 경제적 상황, 시대모습 그리고 포항제철(포스코) 창립, 성장과정을 엿 볼 수 있다.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의 젊음 때의 모습
기념관 옆에 위치하고 있는 박태준 전 회장의 생가
임랑해수욕장 민박주변의 골목길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잔에 파도를 감상하고자 하면 가수 정훈희가 운영하는 카페 Garden Flowers(꽃밭에서)를 찾는 곳도 좋을 듯하다. 카페 이름 "꽃밭에서는" 그녀가 불렸던 노래 제목이다. 최근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애잔한 심금을 울리는 노래 안개”는 정훈희와 송창식이 듀엣으로 불렀던 노래로서 최근 방문객의 발길이 잦다. 사실 정훈희는 70년대를 대표하는 여자가수로 몇 차례 국제음악대회에서 수상을 했다.

가수 정훈희가 운영하는 카페 Garden Flowers(꽃밭에서)

임랑(林浪)의 옛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당시 임계안(林溪岸) 뒷산에 왜적들이 성을 쌓고 이 성을 임성(林城)이라 하였는데 그 후 유(), (), (), (), ()씨 등이 정착하여 이들 다섯 성씨가 본 마을의 숲이 울창하고 물결이 아름답다 하여 수풀 임()자와 물결 랑()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임랑(林浪)의 옛 이름은 임을랑(林乙浪)’이며 임랑으로 바뀐 것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마을에 숲이 우거지고 바다 물결이 아름다워, ‘수풀 림()’ 자와 물결 랑()’ 자를 따서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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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해발 469m)은 기장군 장안읍 명례리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이름은 삿갓 모양의 3개의 봉우리가 동서로 나란히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산은 옛날부터 영험한 산이라서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고 그러면 비가 내려 해갈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영험한 산이 명당으로 인식되어 암장(暗葬)을 하기도 했다. 대동여지도에 삼각산은 원적산(양산 천성산)에서 백운산을 거쳐 이어지는 줄기로 바다로 유입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일반적인 삼각산 등산로는 박치골 따라 조성 된 길을 따라서 가다가 좌측으로 빠져 산길을 이용하여 삼각산 능선까지 올라가는데 보통 2곳에서 올라간다. 능선에 도착한 후에는 동쪽 방향으로 해서 삼각산 정상으로 이동한다. 아래의 등산코스로는 소요시간이 3시간 30분정도 걸린다.

장안사 주차장 박치골 임도, 트레킹 로드 석은덤 삼각산 전망바위 장안사 주차장

삼각산 등산로는 박치골 따라 조성 된 길로 매우 잘 되어있다. 길 폭도 넓으며 바닥은 초입부는 포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비포장 길이다.
불광사 약수터는 장안사산장 옆 소로 길을 따라 가면 계곡아래에 있는 약수터를 만날수 있다.
반딧불이 공원 입구
반딧불이 공원에는 방문객을 위한 산책 길을 계곡 따라 일부 구간을 Deck 길로 조성하였다.

삼각산 등산로는 박치골 따라 조성 된 길로 매우 잘 되어있다. 길 폭도 넓으며 바닥은 초입부는 포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비포장 길이다. 특히 높이 뻗은 큰 감나무를 길에서 자주 접하는데 지나가는 객에게는 풍요로움과 아늑함을 느끼게 한다. 장안사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맞이하는 것이 장안사산장 뒤 계곡아래에 있는 불광산 약수터이다. 안내문이 없어 놓치기 쉽다. 약수 한 바가지 들이 키고 나서 길을 재촉하여 가다 보면 반딧불이 공원을 만난다. 반딧불이 공원은 산책을 위해 계곡 따라 일부 구간을 Deck 길을 조성하였다.

조성된 길을 따라 보면 높이 뻗은 큰 감나무를 길에서 자주 접하는데 보는 이에게 풍요로움과 아늑함을 느끼게 한다.

굽이굽이 절경 속에 길을 따라가다 보면 쉽게 석은덤까지 갈 수 있다. 가히 팔기산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하는 길이다. 병산마을 방향으로 가기 전 동쪽방향 능선으로 가는 산길을 이용하여 동쪽으로 이동한다. 산길이 양호하지는 않다. 능선을 따라 가다보면 까마귀 떼도 만나고 길 바닥에는 도토리가 많이 떨어져 있어 자칫 미끄러져 넘어지 지기가 쉽다.

등산로에서 좌측으로 빠져 산길을 이용하여 삼각산 능선까지 올라가는 첫 번째 갈림길 입구이다.
두 번째 갈림길로  좌측으로 빠져 산길을 이용하여 삼각산 능선까지 올라갈수있다. 이곳부터 비포장 된 흙길이다.
이곳 갈림길에서 좌측 길로 계속 석은덤까지 올라간다.

삼각산 정상에는 2개의 정상 표지석이 있는데 흰색 바탕의 표지석과 검정색 바탕의 표 지석이 각각 연이서 다른 곳에서 세워져 있다.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다. 잠시 가파른 길을 지나서 완만한 능선 길을 계속 가다 보면 장안사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바위를 만난다. 바로 아래는 천길 절벽이다. 조심하여 전방 절경을 감상해야 할 것 같다. 여기서부터 장안사 화장실 뒤편까지 경사가 80도가 되는 험난하고 위험한 길을 완주해야 한다. 추락사고가 우려되는 곳으로 삼각산 산행의 절정이 여기 하산길이다.

삼각산 정상에는 정상 표지석이 2개가 있는데 흰색 바탕의 표지석과 검정색 바탕의 표 지석이 각각 따로 연이서 다른 곳에서 세워져 있다. 이중 흰색 바탕의 정상 표지석
삼각산 정상에서 본 전경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장안사 원경
장안사 주차자에서 바라 본 전망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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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하면 떠오르는 풍광이 경포해수욕장, 경포대, 오죽헌 등 이고 인물은 신사임당, 율곡 이이, 허균과 허난설헌이다. 음식은 초당두부이고 두부를 만들 때 소금물 대신 바닷물을 간수로 사용하기 때문에 맛이 뛰어나기도 유명하다.

거울처럼 맑다하여 이름이 붙은 경포호(鏡浦湖)에는 달이 네 개가 뜨는데 하늘에 뜬 달 하나, 바다에 하나, 호수에 하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술잔에 하나이다. 여기서 추가로 커피 한잔을 마시는 연인들의 모습이 아닐까한다최근 강릉은 커피향으로 가득하다. 카페나 카페 형태로 영업 중인 곳이 400~500여 개에 이른다. 이에 매년 커피축제 열리고 카페 문화의 중심지로 우뚝 솟고 있다.

강릉 사천의 보헤미안 로우스터즈(Bohemian Roasters) 박이추 커피공장 전경

여기 강릉 사천에 국내 1세대 바리스타 박이추(朴利秋)가 운영하는 보헤미안 로우스터즈(Bohemian Roasters) 박이추 커피공장이 있다. 그는 핸드 드립 커피의 대가로 같은 1세대 커피 전문가인 고() 서정달, 박원준, 박상홍 씨와 함께 ‘13으로 불리던 실력파 바리스타였다. 1950820, 일본 규슈 오이타의 작은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재일교포 2세였다.

서울대 공과대에 다니던 형의 영향을 받아 1974년 부모와 함께 한국에 왔다. 처음 정착한 곳은 경기도 포천에서 목장을 운영하였고 1986년 도일하여 도쿄에서 주경야독을 하며 커피를 배웠다. 그 후 1년 반 만에 커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1988년 혜화동에 가배 보헤미안을 열었고 한국에서의 그의 커피 인생이 시작되었다.

2004년 이곳 강릉 바닷가로 옮겼다. 18여 년이 되어간다는 보헤미안 로스터즈 박이추 커피공장은 3층 건물로 카페와 로스팅공장이 연결되어 커피 로스팅 과정을 직접 볼 수 있고 머무는 내내 커피향도 가득하다. 아담한 건물의 1층은 자택으로 쓰고, 3층이 카페다.

국내 1세대 바리스타이자 커피 명인의 커피 맛 조언은 핸드 드립 한 잔을 위해 필요한 원두 양은 15~20g, 추출 시간은 약 130, 추출하는 커피의 이상적인 양은 약 150ml이고 그 이상 커피를 추출하면 쓴맛과 카페인이 과해져 드립을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보헤미안 로스터즈 박이추 커피공장은 카페와 로스팅공장이 연결되어 커피 로스팅 과정을 직접 볼 수 있고 머무는 내내 커피향도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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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법성포에서 영광굴비 정식을 맛보다.

맛 기행 2022. 10. 2. 21:54 Posted by 추야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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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굴비는 3월 중순경 곡우 때 영광 칠산 앞바다에서 잡은 참조기를 가리키는 말인데 요즈음은 토사와 해저융기로 바다가 개펄로 메워지는 기후환경 변화와 무분별한 남획에 따른 어획량 감소로 이곳에서 잡히는 영광 굴비는 거의 없다. 조기(助氣)라고 부른 이유는 3월에 잡은 고기의 뼈를 골라내고 산모의 미역국을 끓이거나 병약자를 위해 죽을 쑤어 주면 기운이 낸다고 해서 불렀고 한자로는 "도울 조()", "기운 기()"자를 쓴다. 또는 봄이 되면 이동을 시작한다 해서 유수어라고도 한다.

법성포는 토사와 해저융기로 바다가 개펄로 메워지는 기후환경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조기를 소금에 절여서 말린 것을 굴비(屈非) 라고 하는데 현재 까지 영광굴비가 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조기를 말리는 기법이다. 칠산 바다의 해풍과 적절한 온도, 천일염을 사용한 소금 등 세 가지의 조합에 의해 맛있는 영광굴비가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비싼 영광굴비는 알이 통통 밴 조기로 한 두름에 다섯 마리가 있는 것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그 지역에서의 유명한 특산품 또는 음식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관련 맛 집을 찾게 되고 가장 좋은 방법은 지역 지인을 통해 추천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알게 된 곳이 007 식당이다. 상호명이 특이한데 법성포에서 영광 로터리 방향의 도로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굴비백반전문 식당이다. 주 메뉴는 굴비백반과 정식이고 개인 혼자이면 굴비백반이 무난하다.

007식당에서 주문한 굴비정식

오늘날 법성포에서 팔고 있는 영광굴비는 대부분 법성포가 아닌 다른 연안이나 더러는 중국에서 수입해 온 조기를 단지 법성포에서 말렸다 해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조기는 민어과에 속하는 고기로 황조기, 흰조기, 수조기, 꽃조기 등으로 구분되는데 문헌에 따라 석수어라고 하는 것은 조기 머리속에 흰 돌 같은 이석 두 개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자겸(?~1126)과 굴비(屈非)의 유래

굴비란 이름의 유래는 고려 17대 인종(1109~1146) 때로 올라간다이자겸은 현재의 인천광역시를 세거지로 했던 인주 이씨(仁州 李氏) 출신으로 고려 전기 대표적인 외척(外戚)세력이었다. 음서(蔭敍, 공신이나 전·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 제도를 통해 벼슬에 오른 그는 인종(仁宗)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으로 1126(인종 4) 인종을 독살하고 왕위를 찬탈하려고 난을 일으켰다. 당시 도참설에서 유래된 파자점이 유행했는데 내용인 즉 십팔자(十八子)가 왕이 된다는 것으로 이자겸 자신이 성씨가 李氏 이기에 자신이 왕이 된다는 것을 믿었든 것이다.

이자겸의 난이 실패 후 이자겸과 그의 처는 영광으로 귀양 갔고 아들 셋인 이지미는 협주로, 이공의는 진도로, 이지언은 거제로 각각 유배되었다. 왕비가 되었던 이자겸의 두 딸 역시 모두 폐위되었다. 이자겸은 귀양지인 영광에서 죽었으며 인주 이씨(仁州 李氏)도 몰락하였다.

이자겸은 귀양지인 영광 법성포에서 소금에 절여 토굴에 돌로 눌러 놓았다가 해풍에 말린 조기를 먹어보고 그 맛에 반했었다. 그래서 인종에게 진상하였는데 조기 맛이 일품이라서 진상한 것이지 비굴(卑屈)하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굴비(屈非)’라는 이름을 붙여 보냈다고 한다. 이때부터 말린 조기를 굴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굴비라는 이름을 얻기 전에는 소금에 절인 조기를 엮어 매달면 모양이 구부러지기 때문에 구비(仇非)조기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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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 베르사유와 함께 프랑스 3대 관광지 중 한 곳인 몽생미셸은 프랑스 북부 영국해협을 마주하고 있는 바스노르망디 망슈(Manche) 주의 생미셸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수도원이다. 생미셸 산은 92m 높이의 화강암으로 된 바위산으로 산의 형태에 따라 수도원을 아래에서 조금씩 지어 올렸고 수도원의 구성은 예배당(Chapelle)과 라 메르베유(La Merveille, 불가사의)로 나누어져 있다.

멀리 옥수수밭 위에 떠 있는 몽생미셸

조수간만의 차이가 유럽에서 가장 크고 10 ~ 15m의 수면 차이로 밀물 때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이다. 특히 노을이 질 때 매우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한다.

밀물 때도 상관없이 몰생미셸로 갈수 있는 다리

708년 이곳에서 아브랑슈의 오베르 주교의 꿈에 대천사 미카엘 계시를 3번이나 받고 바위산에 수도원을 짓기 시작했고 유럽인의 성지 순례지로 유명해졌다. 966년 미로처럼 꾸며진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원이 세워졌고 그 아래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14세기에는 마을이 바위산 바로 아래까지 확장되었다.

12세기 수도원 주변에 성벽을 쌓으면서 백년전쟁 때 난공불락의 요새로 사용되어 영국군의 총공세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수도원은 프랑스 대혁명 때 해산되었고 1863년 까지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1874년에 사적기념물로 되면서 대대적인 복원공사가 시작되었다.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등록되었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성 미카엘(Michael) 대천사 숭배

오베르 주교

천사 군단의 수장인 성 미카엘은 중세의 중교적 감수성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 미카엘은 신약성경 요한 묵시록에 악마의 상징인 용과 맞서 싸워 무찌르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내세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던 중세인들에게 성 미카엘은 최후의 심판일에 죽은 자를 인도하고 인간의 영혼을 저울에 다는 인물이다.

708년 아브랑슈의 오베르 주교가 꿈에 대천사 미카엘부터 계시를 받는 모습

성 미카엘에 대한 숭배는 492년 몬테 가르가노(이탈리아)에 최초의 성소가 건립되면서 5세기말에 등장하게 된다. 1,000년 경에는 성 미카엘을 기리는 교회와 예배당이 유럽 전역에 확산되면서 주로 언덕이나 갑()의 상단에 세워졌다. 백년전쟁 후에는 몽생미셸이 영국군에 저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서 성 미카엘에 대한 숭배가 새로운 차원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숭배는 반종교개혁과 함께 새롭게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교회의 입장(구교)에서 볼 때 오직 군대를 이끄는 천사만이 프로테스탄트 이단(신교)에 맞서 싸울 수 있다고 믿었다.

천사 군단의 수장인 성 미카엘

기독교의 도상에서 성 미카엘은 흔히 칼과 저울을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전통과 민간종교는 성 미카엘을 무기와 저울에 관련된 모든 직종의 사람들과 기사들의 수호성인으로 만들었다.

수도원은 프랑스 대혁명 때 감옥으로 1863년 까지 사용되었다.

현재 몽생미셸 수도원 안에는 상업시설이 있어 식당에 들러 나폴레옹도 즐겨 먹은 굴 요리를 먹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또한 노르망디 지방에서 나는 치즈 또한 유명하니 식당에서 주문할 때 참고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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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군청 뒤 해발 60m의 작은 봉우리 남북 주 능선 및 서쪽 가지능선 2km에는 대형고분 37기를 비롯하여 113기의 고분이 능선 위를 수놓고 있다. 이름 하여 말이산 고분군(末伊山 古墳群)으로 가야시대 고분유적으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고분과 더불어 능선 위는 봄, 여름 가을 다양한 야생화와 들풀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또한 고분의 겨울 설경은 제주도 오름의 아기 모습처럼 보여 사시사철 각각의 풍광을 선사한다.

말이산 고분군(末伊山 古墳群)은 함안군 가야읍 말이산 일대에 있는 고분군이다. 행정구역 기준으로 도항리 고분군(사적 제84)과 말산리 고분군(사적 제85)으로 관리하여 오다가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동일한 시대와 성격의 무덤들이 조성되어 있다 하여 2011728일 사적 제515호로 하나의 고분군으로써 통합재 지정되었고 가야시대 고분유적으로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봉토분으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113기이고 봉토가 삭평되어 원형을 잃어버린 것까지 포함하면 1,000기 이상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말이산의 봉토분은 아라가야의 전성기인 5세기 후반~6세기 초에 집중 조영되었으며, 그 분포는 남-북으로 이어진 주능선과 서쪽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가지능선의 정부(頂部)에 대형의 봉토분이, 사면부에 중소형의 고분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말이산의 북쪽 일대에는 아라가야의 전신인 삼한시대 안야국(安邪國)의 목관묘와 목곽묘가 밀집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말이산고분군은 기원 전후부터 아라가야 멸망 때까지 약 550년간의 고분들이 누대로 조영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출토유물은 토기 2,010, 철기 2,479, 장신구 3,381, 기타 91점 등 총 7,961점의 다종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토기는 주로 통모양굽다리접시와 불꽃무늬굽다리접시, 손잡이잔, 문양뚜껑, 각종 항아리와 그릇받침 등으로 4~5세기대 아라가야 양식의 특유의 토기들이다. 철기는 철의 왕국이라 일컬어지는 아라가야답게 수준 높은 철기들이 출토되는데, 둥근고리큰칼을 비롯한 쇠창, 화살촉 등의 무기와 투구와 판갑옷, 비늘갑옷 등의 무구, 말투구와 말갑옷을 비롯한 재갈, 안장 등의 말갖춤, 새모양장식을 붙여 만든 미늘쇠 등이다. 이러한 철기유물을 통해 고대 아라가야의 철() 생산력이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분군 75호분인 대형돌덧널무덤 에서는 5세기 중국 남조의 최고급청자인 연꽃문양 청자가 출토되어 남조와 교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라가야(阿羅伽倻)의 성장, 발전과 멸망

가야는 서기 300년 무렵 변한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된 여러 집단세력으로 가야(加耶), 가라(加羅·加良), 가락(駕洛), 임나(任那) 등으로 기록되어 왔다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가야사가 전개 되었던 무대를 해인사의 가야산에서 남해까지, 낙동강 서쪽 지리산(섬진강)까지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는 낙동강 동쪽의 동래·양산·창녕 및 섬진강 서쪽의 진안·장수·임실·남원 등지에서도 가야문화의 흔적들이 확인되고 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낙동강 유역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가야는 기원후 2세기 무렵에는 12개의 소국으로 발전하였다. 고려 말에 편찬된삼국유사5가야조(五加耶條)에서는 아라가야(阿羅加耶), 고령가야(古寧加耶), 대가야(大加耶), 성산가야(星山加耶), 소가야(小加耶), 금관가야(金官加耶), 비화가야(非火加耶) 등 일곱 가야의 이름을 확인해 볼 수 있다.

3~4세기에는 김해 가락국 중심의 전기 가야연맹이 번성하였으며, 5~6세기에는 함안의 아라가야를 거쳐 고령 대가야국 중심의 후기 가야연맹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전기 가야의 몰락과 후기 가야의 등장은 400년에 이루어진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391~413)의 남정(南征)과 그에 따른 정세변동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아라가야는삼국지(三國志)』「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전하는 변진 안야국(弁辰 安邪國)을 기반으로 함안지역에서 성장, 발전한 나라이다. 광개토왕릉비문일본서기에 안라(安羅), 삼국유사에 아라(阿羅) 혹은 아야가야(阿耶伽倻)로도 불렸으며, 가야 전기부터 멸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남아 있었던 세력이다. 교통의 요지인 함안지역은 가야의 모든 지역들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곳으로, 통치자들의 거대한 무덤을 따로 만들고,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남쪽으로 내려와 전쟁을 할 때 이에 대항하여 싸울 만큼의 힘을 갖추고 있었던 큰 세력이었다.

안야국은 삼한소국들 중에서도 김해의 구야국 등과 더불어 주변 소국들을 이끄는 주도국 중 하나였다. 안야국은 그 형성시기 또한 다른 지역의 소국들보다 빨라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조그마한 나라의 형태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야국(安邪國)에서 안라국(安羅國)으로 발전한 것은 대략 4세기로 추정되고 있다. 안야국은 내부 성장을 거쳐 주변의 소국들을 연합 또는 연맹체로 결합하면서 지역연맹체 단계로 성장해 간다. 안라 지역연맹체의 경우 함안(현 가야면)과 군북(현 군북면)의 정치세력이 연합한 세력으로 인구는 당시 삼한 대국의 수준인 4~5천가로 추정된다.

안라국이 가야제국 중 비교적 강력한 국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포상팔국(浦上八國 : 골포국(骨浦國), 칠포국(柒浦國), 보라국(保羅國), 고자국(古自國), 사물국(史勿國) 8개의 소국)의 일원이었던 칠원의 칠포국(함안군 칠원면) 등을 병합하고, 진동만(현재 창원 마산합포구 진동면에 있는 만)을 통한 해안으로의 진출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국호도 안야국에서 안라국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칠원지역의 장악과 진동만으로의 진출은 안라가 바다를 통해 해외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지역연맹체의 단계에서 고대국가의 성격을 띤 단계 즉 지역 국가로 성장·발전하게 된다.

일명 포상팔국(浦上八國) 전쟁이라 하는 것은 남해안 일대에 있었던 8개의 소국이 가야를 침략하여 일어났던 전쟁으로 포상팔국은 삼국사기2 신라본기의 내해니사금 14년조와 같은 책 권48의 물계자전, 삼국유사5 물계자조에 등장한다. 8국이라 하여 여덟 나라이겠지만 사료 상 보이는 나라는 골포국(骨浦國, 창원시 마산합포·회원구), 칠포국(柒浦國, 함안군 칠원면), 보라국(保羅國, 전남 나주), 고자국(古自國, 고성군 고성읍), 사물국(史勿國, 사천시 사천읍) 등 다섯 나라이다. 이들이 힘을 합하여 가라(加羅) 또는 아라(阿羅)를 침범하니 신라가 도와 팔국의 병사들을 물리친 내용이다. 포상팔국의 분포 범위는 전라남도 해안까지 되고 나머지 3국의 위치는 알 수 없다.

남제서(南齊書)의 동남이열전 (東南夷列傳)에 가라국왕 하지가 남제(南齊, 479~502)에 사신을 파견해 조공하고 보국장군 (輔國將軍) 본국왕(本國王)의 작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대가야를 지칭한 것으로 알려진 있던 가라왕 하지(加羅王 荷知)를 아라가야 왕으로 해석할 수 도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안라국은 520~540년대에 걸쳐 가야 남부제국의 실질적인 리더로 활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서기 529년에 개최된 것으로 기록된 안라고당회의(安羅高堂會議)는 왜, 안라, 백제, 신라가 함께 참석했던 회의로 가야지역을 잠식해오는 백제와 신라를 외교력으로 물리치고자 했던 노력의 일환이었다. 541년과 544년 백제성왕(聖王)이 개최한 사비 회의에 참가도 하였다. 아라가야를 비롯한 가야 제국은 백제에 부용해서 신라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554년 관산성 전투가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벌어졌고, 가야 제국은 백제와 연합하였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성왕이 전사하고 전쟁에 패배함으로써 백제는 가야 지역을 포기하였고, 신라는 가야 지역으로 본격 진출하였다.

삼국사기지리지함안군은 법흥왕이 대군(大軍)으로써 아시량국(阿尸良國)-일설에는 아나가야(阿那加耶)라고 한다-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군으로 삼았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 이를 그대로 쓰고 있다.”라고 하고 있어 신라 법흥왕대에 멸망되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일본서기』 「흠명기(欽明紀)23(562)정월에 신라가 가야 제국을 쳐서 멸망시켰다.[어떤 책에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하였다 한다. 총칭하여 임나이고 개별적으로는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손국(乞飡國), 임례국(稔禮國) 등 모두 10국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아라가야는 대가야가 멸망하기 전 560년에 멸망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신라가 561년에 아라가야의 파사산에 성을 쌓았다는 등의 기록으로 보아 이 시기를 신라가 안라지역으로의 진출시기로 볼 수 있다.

일본속의 아라가야(阿羅伽耶) 사람과 문화.

일본서기』 「흠명기(欽明紀)15(554) 12월 기사에는 백제성왕과 안라[아라가야]의 여러 왜신, 임나의 여러 나라 한기들이 신라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왜왕에게 군사를 요청하고 이에 왜가 군사를 파병해 신라에 대항해 연합군이 전쟁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가야와 왜가 특히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 제국이 왜와 가야 멸망 시기까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일본의 지명 전승에 아라가야 사람들이 일본 열도로 이주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기비 지방 등에는 아라가야와 관련된 많은 지명이 보이는데, ‘안나군이나 아나군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교토 동쪽의 거대 호수 비파호(琵琶湖)[673.9] 남단 시가[滋賀] 현에도 아라가야 사람들이 이주해 신앙생활을 하던 아라 신사[安羅神社]가 남아 있다. 구사츠[草津] 역 인근 5이내에는 아라 신사라는 이름을 가진 신사가 무려 3개나 있다. 신사의 대문 격인 도리이[鳥居]에는 안라 신사(安羅神社)’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고, 신관(神官)은 분명히 아라진자라고 되어 있어 아라가야와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심지어 이곳 신사의 유래를 알려 주는 안내판에도 함안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 신사들이 위치한 현재 마을 이름도 아나무라[穴村]’라 하여 아나라는 아라가야를 칭하는 말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 많은 아라가야계 사람들이 살았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일본과 아라가야와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물질적 증거가 토기이다. 그중에서도 아라가야의 대표적 토기 양식인 굽다리에 불꽃무늬 구멍이 뚫려 있는 불꽃무늬 굽다리 접시(화염문 토기)’이다. 나라 현가시하라 시청 소속 발굴단이 신도우 유적에서 파손된 상태로 발견한 토기 조각을 복원하자 아라가야의 대표적 토기인 불꽃무늬 굽다리 접시로 드러났다. 이것은 현재 함안 지역을 중심으로 출토되고 있는 불꽃무늬 굽다리 접시와 전체적인 모양, 색깔, 재질 등이 똑같다. 이로 보아 아라가야에서 제작된 토기가 이곳 나라 현까지 전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당시 나라 현과 아라가야의 교류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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