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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복사지 삼층석탑 (皇福寺址 三層石塔, 경주시 구황동 103번지)는 경주 낭산(狼山)의 북동편 기슭에 있는 석탑으로 마을 이름은 황복또는 탑거리이며 석탑은 마을 초입 좌측 밭 가운데 있다.

이 석탑은 신라 31대 신문왕이 사망 후 그 아들인 32대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효소왕 1(692)에 세운 탑으로, 이중기단에 높이 7.3m의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다. 33대 성덕왕이 즉위 5(706)에 사리와 불상 등을 추가하여 탑 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탑 서쪽은 산으로 막혀서 건물이 들어설 만한 공간이 없고 동편과 남편은 넓은 경작지와 마을이다. 지형으로 보아 장항리사지와 같이 탑을 서쪽에, 금당을 동쪽에 둔 소위 좌전우탑(左殿右塔) 가람배치로 추정된다. 탑 동남편에는 목이 잘리는 등 훼손이 심한 귀부 한 쌍이 나란히 남아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으나 사적비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 동남편에는 목이 잘리는 등 훼손이 심한 귀부 한 쌍이 나란히 남아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으나 사적비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20178월에 발굴 조사를 하였고 조사결과, 통일신라시대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 대석단 기단 건물지와 부속 건물지 그리고 회랑 터, 담장 터, 배수로, 도로, 연못 등 신라왕실 사찰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규모의 유구를 발견했다.

이 절터가 황복사지(皇福寺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든 근거는 1937년경에 낭산 동쪽 기슭에서 일본인이 수집한 명문기와(銘文瓦)이다. 이 기와는 당시 부산에 거주하였던 일본사람이 수집하여 소장하였던 것으로 기와 뒷면에는 황복사(皇福寺)’  또는 왕복(王福)’이라는 명문이 음각(陰刻)되어 있었다.

황복사의 창건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삼국유사 제4권 의해(意解5 의상전교(義湘傳敎) 기록에 의하면,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대사(625~702)‘29세에 서울의 황복사로 가서 출가하였다고 되어 있다. 29세는 진덕여왕(眞德女王) 7(653)에 해당되어 황복사는 진덕여왕 때 또는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황복사지(皇福寺址)에는 목탑지로 볼 수 있는 유적은 없으나, 삼국유사 제4권 의해(意解) 5 의상전교(義湘傳敎) 기록을 보면 창건 당시 목탑이 세워졌을 가능성을 알려주는 내용이 있는데 의상대사가 중국으로 유학한 뒤 귀국하여 황복사에 있을 때 여러 스님들과 탑을 돌 때면 언제나 허공을 밟고 올라갔으며 층계를 밟지 않았으므로 그 탑에는 사닥다리가 없었다고 한다는 내용이다.

이때 의상대사의 나이는 46세로 문무왕 10(670)이다. 당시 신라 왕경에는 아직 석탑이 건립된 적이 없는 시대로 679년에 창건된 사천왕사와 692년의 망덕사에 목탑을 건립하였고 처음 완성되는 석탑은 682년의 감은사 삼층석탑이다. 이에 허공을 밟고 올라갔다는 탑은 목탑으로 추정된다.

7세기 중엽 황복사(皇福寺) 창건과 동시에 목탑이 세워졌으며, 효소왕 원년에 삼층석탑이 추가 건립된 것이다. 그 후 목탑은 복합적인 원인에 의해 사라졌고 석탑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또는 익산왕궁리오층석탑과 같이 목탑이 화재로 소실된 후 그 자리에 석탑을 세웠을 가능성도 있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4264일부터 착수된 탑 해체수리 과정에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다.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치와 불상 등 일괄유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중 금동 사리함의 뚜껑내부에서 조탑명문(造塔銘文)을 확인되었는데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명문에는 효소왕 원년(692)에 신문왕비인 신목태후와 그녀의 아들 효소왕과 함께 같은 해 72일에 돌아가신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삼층석탑을 건립하였음을 기록되어 있다. 706년에는 성덕왕이 신목태후와 효소왕의 죽음을 슬퍼하여 부처 사리 4, 6촌 크기의 순금제 미타상 1, 무구정광대다리니경 1권을 석탑 내에 봉안하였음도 기록되어 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 (皇福寺址 三層石塔)은 기단부가 이중기단으로 높이 7.3m의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으로 옥개(지붕)가 두꺼운 반면 옥개받침은 세밀하여 중후한 느낌을 준다.

기단부의 1(하층) 기단은 면석의 양쪽 모서리에 우주(隅柱)를 두고 가운데 탱주(撑柱) 2주로 구성하여 3()로 구분되어 있다. 감은사지삼층석탑에 비해 탱주가 1주가 줄어들었다. 갑석 위에는 2단의 호, 각형 받침(괴임)이 2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2(상층) 기단은 1층 기단처럼 면석의 양쪽 모서리에 우주(隅柱)를 두고 가운데 탱주(撑柱) 2주로 구성되어 있다. 면석은 각 면에 3매씩 하여 총 12개 면석이 사용되었고 갑석은 2단의 갑석에 4매가 사용되었다. 갑석 위에는 2단의 각형 받침(괴임)이 1층 탑신(몸돌)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전체적으로 1층 탑신(몸돌)에 비해 2, 3층 탑신(몸돌)의 체감률이 급격히 떨어져있다탑신(몸돌)과 옥개(지붕)는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탑신의 각 면에는 우주만 모각되어 있고 문비 등 다른 조각은 없다. 옥개가 두꺼워서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게 되어있고 옥개의 네 귀퉁이는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옥개받침은 5단으로 되어 있다. 옥개의 전각 양면에는 풍령 등 장식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1개씩 있다.

탑의 꼭대기인 상륜부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방형의 노반(露盤)만이 남아있고 노반 가운데에는 찰주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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