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장항리사지(獐項里寺址)는 토함산 동쪽의 한 능선이 끝나는 기슭에 있는 절터로서, 동서는 길고 남북은 좁은 대지에 조성된 절터다. 전면인 남쪽과 동쪽은 큰 계곡으로 둘러싸고 있어서 터의 상당부분이 절개 유실되어 협소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장항리(獐項里)마을 앞산의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노루목, 장항이라 불렀다. 절 이름은 오랫동안 유실되어 알 수 없어 마을을 따서 장항리사지(獐項里寺址)라 부르고 있다.

절터에는  서 5층 석탑, 1층 탑신 위에 옥개석 5개만 올려놓은 동 5층 석탑과 갑석이 결실된 동 5층탑 기단 부재, 원형주좌초석,  금당지와 함께 석조불상의 대좌가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가람배치에 있어 쌍탑과 금당의 관계는 쌍탑이 금당 앞 좌우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장항리사지는 탑과 금당이 같은 선상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1923428일 오전 11시경 도굴범이 오층석탑 속에 있는 사리장치를 탈취하기 위해 파괴한 것을 1932년 서 오층석탑을 복원 및 보수하여 현재의 자리에 세웠고 동 오층석탑은 절터의 붕괴로 인하여 무너져 북쪽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19662월에 옮겨 현재의 자리에 또한 세워졌기 때문이다.

좁은 절터에 쌍탑을 세우고 뒤쪽 중앙에 금당을 배치한 쌍탑 1금당으로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보고 있으나 강당이나 회랑의 존재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금당 터의 기단 규모는 동서 15.8m, 남북 12.7m이며, 남아 있는 초석을 볼 때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으로 원형주좌초석과 가운데는 팔각 석조불상의 대좌가 남아 있다.

금당 터 기단 규모는 동서 15.8m, 남북 12.7m이고, 남아 있는 초석을 볼 때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의 규모로 추정된다.

한편으로는 전후(남북)가 좁고 좌우(동서)가 넓은 지형으로 보아 좌전 우탑(左殿 右塔) 가람배치도 추정할 수 있지만 동탑의 위치가 불확실하다.

금당 터 중앙에 있는 석조불상의 대좌

금당 터 중앙에 있는 석조불상의 대좌는 2단으로 아랫단은 팔각형으로 조각이 새겨져 있고 윗단은 연꽃을 조각한 원형대좌이다.

석조불상의 대좌는  2단으로 아랫단은 팔각형이고 윗단은 연꽃을 조각한 원형대좌이다.

석조불상의 대좌를 세세히 살펴보면 대좌 아랫부분은 높이 600이며 팔각형으로 조성하였는데, 각 면마다 안상을 마련한 다음 그 속에 신장(神將)과 신수(神獸)를 부조(浮彫)로 처리하였다. 윗부분은 높이 53이며, 복련을 조각한 원형연화대좌이다. 석조불상의 대좌 최대 폭은 2.4m이다.

석조불상의 대좌 아랫부분 안상 속의 신수(神獸)
안상 속의 신장(神將)

이 대좌 위에 놓여 있던 석조불상은 석조여래입상으로 1923년 서 오층석탑이 파괴될 때 같이 피해를 입었으나 1932년 서탑을 복원할 때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옮겨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북쪽 정원에 전시되어 있다. 불상은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었던 것을 두 팔이 잘리고 허리 위부분과 광배만 복원하였으나, 뒷부분의 광배 일부와 무릎 이하는 결실되었다.

머리와 얼굴모습 그리고 광배에 새겨져 있는 작은 부처인 화불 등의 새긴 수법을 볼 때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여래입상으로 판단되며 현존 높이는 3m이나 실제로는 4m이상 되는 장육상으로 추정된다.

서 오층석탑 (西 五層石塔, 국보236)과 동 오층석탑 (東 五層石塔)

서 오층석탑 (西 五層石塔, 국보236호)

서 5층석탑은 높이 9.5m로 경주지역에서는 나원리 5층석탑, 경주 남산 늠비봉 5층석탑과 함께 3기가 있다. 탑 기단부의 상,하층 갑석은 결실부분이 많아서 시멘트로 보수하는 등 전반적으로 부재의 훼손이 심하다.

서 오층석탑의 기단부는 이중기단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갖추었고 비교적 넓게 만들어져 안정감이 있다. 이중기단 중 1층 기단은 지대석 1매석과 면석 7매석으로 면석 양쪽에 우주를 두고 가운데는 탱주 2주로 총 8매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석 위에 갑석부연과 갑석을 올려놓았는데 총 4매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갑석 위에는 호각형(弧角形) 2단 받침으로 2층 기단을 받치고 있다.

2층 기단 면석의 양쪽에는 우주를 두고 가운데는 탱주 2주로 총 7매석으로이루어져 있다. 면석 위에 갑석부연과 갑석을 올려놓았는데 총 4매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위에는 각형(角形) 2단 받침으로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기단부에는 총 23매석의 부재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부는 옥개와 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층의 옥개와 옥개석이 각각 1매석으로 총 10매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 탑신 네 면에는 문비(門扉)를 모각(模刻)하고 가운데 한 쌍의 도깨비 문양 문고리가 부조(浮彫)되어 있으나, 가운데 문짝 분할 선은 표현되어 있지 않다. 문비 양쪽에는 연화대좌를 한 인왕상(仁王像, 금강역사상)1구씩 정교하게 조각했는데 8세기 전반기에 처음 나타나는 양식이다. 2층 이상 탑신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2층 이상 탑신은 1층 탑신에 비해서 현저하게 줄어들어서 급격한 체감을 나타내고 있다.

서 5층석탑 1층 탑신 면석에는 문비(門扉)를 모각(模刻)하고 가운데 한 쌍의 도깨비 문양 문고리가 부조(浮彫)되어 있다.
문양의 도깨비는 신라의 도깨비 모습 아닐까?
문비(門扉) 가운데 문짝 분할 선은 표현되어 있지 않다.
문비 양쪽에는 연화대좌를 한 인왕상(仁王像, 금강역사상)이 1구씩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밑면에 5단의 옥개받침을 두고 있고,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한 편이며, 처마의 앙곡은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부의 네 귀퉁이는 뚜렷하게 치켜 올려져 경쾌함을 더하고 있다네 귀퉁이에는 풍령(風鈴) 등 장식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상륜부는 노반 1매만 남아 있고 찰주를 포함한 다른 부재는 모두 결실되었다. 노반은 방형 육면체로 가운데에 원형으로 찰주공이 뚫려 있고, 상단(上端)2단으로 돌출된 돌림띠를 두르고 있다.

서 5층석탑의 부재 수는 모두 34매로 구성되어 있는데 감은사지 3층석탑과 비교해 볼 때 층수는 높아도 부재 수는 1/3이 조금 넘는다. 이 또한 초기 석탑과 비교해 볼 때 시대적 차이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전체 비례가 아름답고 조각수법도 우수한 8세기의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동 5층석탑은 1층 탑신(塔身)5층까지의 옥개석만 남아 있는 석탑으로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19662월에 현재의 자리에 세웠다동 5층석탑 뒤편에 갑석이 결실된 동탑 기단 부재 일부가 있다.

동 5층석탑은 1층 탑신(塔身)과 5층까지의 옥개석만 남아 있는 석탑이다.
동 5층석탑 뒤편에 갑석이 결실된 동탑 기단 부재 일부가 있다.
동 5층석탑 1층 탑신(塔身)의 연화대좌를 한 인왕상(仁王像, 금강역사상)과 문비 (門扉)의 도깨비 문양 문고리
국립경주박물관 내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 된 도깨비얼굴 기와
주차장에서 본 장항리사지(獐項里寺址)

반응형
반응형

불광산((佛光山))과 시명산은 장안사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고 옛부터 '봉우리 8개로 이루어진 산'이란 뜻으로 팔기산이라고 불렀다. 불광산과 시명산 사이의 거리 20m로 지척이다. 두 산은 육산, 흙산으로 정상은 주위 나무로 인해 조망을 보는 멋은 없다. 하지만 등산로가 나무들이 하늘을 덮고 있어 삼림욕에도 좋고 대운산과 더불어 등산객이 꾸준히 찾아오는 산이다.

불광산과 시명산 정상을 가는 산행코스는 다양하다. 코스 중 장안사 능선(장안사 부도 밭 방향) 불광산 시명산 박치골 장안사 코스의 소요 시간은 5시간 정도이다.

장안사 우측 부도 밭 가는 길

불광산(660m)은 대동여지도(1861)에 기장현 장안의 주산으로 표기돼 있고, 조선 후기에 지어진 '차성가'에도 불광산 솟았으니 사문법계 없을 손가(이하 생략)라고 이곳의 경관을 노래하고 있다.

박치골의 박치는 박천(朴川)으로 삼각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천으로 박천(朴川)은 밝내 로서 예부터 신선한 곳으로 인식해왔다. 옛날 이 삼각산 아래 박천물에서 삼각산의 산정으로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숭배하는 제사를 올린 이야기가 전해진다.

불광산 정상 표지석
시명산 정상 표지석

200년 전에 작성된 차성가에는 삼각산의 발원지로부터 불광산의 계곡까지를 박천(朴川)이라고 하였고, 백련암계곡과 박천계곡의 쌍계가 합류하여 기룡리 앞까지를 금천(錦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각산(425m)는 장안사 서쪽에 있는 산으로 전형적인 노년산지로 산봉우리는 왕릉처럼 둥그스레하나 산기슭은 가파른 편이다. 삼각산이란 삿갓모양의 3개의 봉우리가 동서로 나란히 솟아 있는데서 비롯되며, 기우제를 지내던 산이라고 한다. , 이 삼각산을 삼신산으로 삼아 인근마을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고 그러면 꼭 단비가 내려 해갈이 되었다고 한다.

반응형
반응형

경주시 문무대왕면 안동리 함월산 자락에 있는 골굴암(骨窟庵)은 석굴로써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신이 그린 골굴석굴의 주인공인데 그림에는 목조건물로 그려져 있으나 지금은 바위에 흔적만 남아 있다. 골굴(骨窟) 뼈처럼 생긴 바위굴이라는 뜻이다.

기림사 사적기에 의하면 골굴암(骨窟庵)은 기림사에 딸린 암자로 석굴암 보다 약 200년 먼저 조성되었다.
숙종 12년(1686년)에 정시한이 쓴 “산중일기”에 목조 기와집에 고운 단청을 하여 무척 화려하며 석굴들이 많아서 마치 마을을 이룬 듯하다고 묘사되어 있다.

숙종 12(1686)에 정시한이 쓴 산중일기에도 석굴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데 석굴 앞면은 목조 기와집에 고운 단청을 하여 무척 화려하며 석굴들이 많아서 마치 마을을 이룬 듯하고 석굴도 법당굴과 설법굴로 구별이 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석굴은 감실을 파서 높이 4m, 2.2m의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을 조성한 법당굴로 마애불은 오랜 풍화에 의해 마멸이 심하고 떨어져 나간 부분도 많다. 마애불의 훼손을 막기 위해 둥근모양의 투명한 보호각이 설치되어 있다.

인근에 있는 기림사 사적기에 의하면 기림사에 딸린 암자로 함월산 반대편에 천생 석굴이 있으며 거기에는 굴이 12곳으로 구분되어 각기 이름이 붙여 있다고 되어 있다. 골굴암은 석굴암 보다 약 200년 먼저 조성되었다.

삼국유사 의해(意解) 5 원효불기(元曉不羈)에 원효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설총이 그 유해(遺骸)를 부수어 소상(塑像)으로 진용(眞容)을 만들었고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이 살던 집터가 있다는 기록이 있어 원효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골굴암 마애여래좌상(骨窟庵 磨崖如來坐像, 보물 제581)은 높은 암벽 꼭대기에 있는 자연굴을 이용하여 만든 마애불로 바라보는 방향이 동짓날 해 뜨는 방향으로 추정된다.

골굴암 마애여래좌상(骨窟庵 磨崖如來坐像, 보물 제581호)은 867년에 조성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와 유사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있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가늘어진 눈·작은 입·좁고 긴 코 등의 표현에서 이전 보다 형식화가 진전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얼굴에 비해 평면적인 신체는 어깨가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게 표현되었는데, 목과 가슴 윗부분은 손상되었다. 옷 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겨드랑이 사이에는 팔과 몸의 굴곡을 표시한 V자형 무늬가 있다.

감실을 파서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을 조성한 법당굴은 마애불의 훼손을 막기 위해 둥근모양의 투명한 보호각이 설치되어 있다.

암벽에 그대로 새긴 광배(光背)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머리광배와 불상 둘레의 율동적인 불꽃무늬를 통해 흔적을 살필 수 있다.

평면적인 신체와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의 옷 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U자형 옷 주름 등이 867년에 조성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와 유사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북 동해안지질공원의 지질 명소에 경주에 3개소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골굴암 타포니(Tafoni)이다. 나머지는 남산 화강암, 양남 주상절리이다골굴암 일대는 신생대에 폭발적인 화산분화로 나온 뜨거운 화산재가 쌓여 만들어진 응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응회암은 뜨거운 화산재 상태에서 점차 식어가면서 갈라진 틈이 생기는데, 이 틈을 절리(節理, Joint)라고 한다.

절리 면에서 한쪽의 암석이 떨어져 나가면 절벽이 만들어지고 크고 작은 구멍들이 수없이 뚫려있다. 응회암 표면이 풍화에 의해 일부분 떨어져 나가면서 크기가 다양한 오목한 구멍이 생기고 오랜 풍화에 의해 점점 커지게 되는데 이를 타포니(Tafoni)라고 한다. 골굴암은 이러한 타포니를 활용하여 12곳의 법당굴과 설법굴을 조성하였고 마애여래좌상(骨窟庵 磨崖如來坐像)을 새겼다.

골굴암은 선무도(禪武道) 수련 및 공연으로 유명한 절이다. 선무도(禪武道)는 불교무술로 1960년대에 범어사의 양익 대종사(2006년도 입적)가 승군들의 무예와 관법수행법을 발굴하고 체계화하여 정립한 한국 불교의 전통수행법이다.

골굴암 대적광전 앞에서 매일 오후 3시에 월요일, 화요일 제외한 날에 선무도 공연을 하는데 무척 인기가 많다. 특히 외국인의 위한 선무도 수행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어 다양한 국적을 가진  선무도 수행자가 많다.

골굴암 대적광전 앞에서 매일 오후 3시에 월요일, 화요일 제외한 날에 선무도 공연을 한다.
외국인의 위한 선무도 수행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어 다양한 국적을 가진 수행자가 많다.

안동리(安洞里)는 조선중엽에 강찬성(姜讚成)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지형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어 장차 이 마을이 평온하고 부유한 마을이 되라는 뜻에서 안동, 안골로 불렀다고 한다.

골굴암 앞 노부부가 운영하는 보리수 나무 카페의 커피가 맛이 좋다.

반응형
반응형

영지(影池)

외동읍 괘능리(괘릉리 1297-1번지)에 있는 영지 석불좌상(影池 石佛坐像, 유형문화재)은 광배 일부와 머리 부분은 심하게 닳아서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석불이다. 광배는 불상과 한 돌로 조각했고 조성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형적인 조성연대를 고려하면 8세기 후반이나 9세기 초로 추정된다.

조성연대가 8세기 후반이나 9세기 초로 추정되는 영지 석불좌상(影池 石佛坐像)

일제 강점기 때, 발행한 경주유적 및 조사서 제2(1917)”에 따르면 부근에 와편이 산재해 있고 초석 등이 보인다.는 것으로 보아 석불을 모신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東京通志 7 고려시대 편에 의하면 불국사 서남쪽 십리 되는 곳에 영지가 있는데, 그 못가에 석조불상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이미 폐사되어 석조여래좌상만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지 석불좌상(影池 石佛坐像)광배는 주형거신광으로 3단의 팔각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대좌는 상, , 하대석이 모두 별석으로 구성되었다. 전체적으로 손상이 심하며 불안이나 어깨 등 일부에는 인위적으로 보인 훼손 흔적도 보이고 장항리절터 석조여래입상(8세기)처럼 불신을 광배와 한 돌로 조각하였다.

이런 형식의 조각은 경북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통일신라시대), 전남 영암 도갑사 석조여래좌상과 동일하다. 또한 불신을 마애불 형태로 고부조한 특이한 조형방식이다.

주형거신광의 광배는 두 줄 융기선으로 두광과 신광이 구획되고 광배 외연에는 화염문(火焰文), 내부는 초엽문(草葉文), 융기선 위에 단독 화불을 두광 정상에는 삼존화불로 새겨져 있다.

석불(石佛)의 불신을 살펴보면 촉지인으로 판단되는 오른손, 선정인한 왼, 편단우견의 착의, 길상좌자세는 전형적인 항마촉지인 석불 좌상으로 불신의 1/3에 해당하는 불두 높이, 중대석이 길어지면서 전체적으로 높아진 대좌, 하대석 상부 4단 층단 받침, 불신과 대좌의 높이 비례에서 불신 높이가 대좌보다 높은 점 등 석굴암 본존불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대좌의 상대석은 원형으로 화문(花文)장식의 중판앙련이 8개씩 2단으로 모두 16엽이 새겨지고 아랫부분에 2단의 층단 받침이 표현되어 있다. 중대석은 팔각으로 안상이 크게 음각되었고 하대석은 복판 복련으로 윗부분에는 4단 팔각층단받침 그리고 아랫부분에는 면마다 화문이 조식된 팔각기대(基臺)가 한 돌로 이어져 있다.

대좌의 팔각 중대석과 복판복련 하대석

740년에 쓰인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영지(影池)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백제 석공 아사달이 불국사 석가탑(또는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함)을 만들고 있었다. 아내 아사녀가 남편이 그리워 서라벌까지 찾아왔지만, “지금은 만날 수 없으며, 탑이 완공되면 연못에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는 말만 전해 듣는다. 몇 달이 지나도 탑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아사녀는 아사달의 이름을 부르며 연못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영지(影池) 방문객을 맞이하는 조형물
1740년에 쓰인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영지(影池)와 관련된 불국사 석가탑(또는 무영탑[無影塔])전설이 전해진다.

반응형
반응형

활성리 석불입상(活城里 石佛立像)은 외동읍 활성리(외동읍 활성리 385-2번지)에 있는 석불(石佛)로 연지암(蓮池庵) 대웅전에 있는 석조 여래입상(石彫 如來立像, 문화재자료)이다.

사찰이름은 김연지화(金蓮池花)’ 라는 보살이 밭 가운데서 목탁 소리가 들려오는 꿈을 꾸고 그곳에 직접 가서 땅을 파서 보니 이 석불이 나왔으므로 암자를 지어서 연지암(蓮池庵)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외동읍 활성리(외동읍 활성리 385-2번지) 연지암(蓮池庵) 대웅전

석불입상(石佛立像)의 광배(光背)는 배 모양이고, 앞면에 돋을새김으로 조각한 여래입상으로 얼굴이 심하게 마모되어 근래에 다시 만들었다. 광배는 머리둘레 2중으로 선을 돌린 두광(頭光)과 몸 둘레에 역시 2중으로 선을 돌린 신광(身光)을 표현하였는데 그 주위에 화려한 불꽃을 조각하였다.

활성리 석불입상(活城里 石佛立像)

불상의 머리에는 나선형 머리카락을 표현하였고 귀는 길게 표현하였으며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를 조각하였다. 옷은 목에 테를 두르고 양쪽 어깨에 걸치는 모습을 하였는데 허리까지는 반원형으로 하고 그 아래에는 Y자형으로 갈라지고 있다.

양 다리에는 타원형으로 옷 주름을 표현하였고 양 팔에 걸쳐진 옷 주름은 상당히 굵고 두텁게 조각하였다. 왼손은 들어 올려 약그릇과 같은 것을 들고 있으며, 오른손도 배에 들어 올려 둘째손가락은 펴고 나머지 손가락은 서로 붙여 밖을 향하였다. 다리 아랫부분부터 그 아래는 확인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김연지화(金蓮池花) 비(碑)

외동읍은 신라(新羅) 육부촌(六部村) 중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에 속하며 조선시대 말기 경주부(慶州府)의 남산(南山) 및 마석산을 중앙으로 양분하여 서쪽은 내남면(內南面), 동쪽은 외남면(外南面)이라 칭하고 190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외남면(外南面)의 북부(北部) 일부를 제외하고 불국사(佛國寺)에서 경상남도 경계까지를 외동(外東)이라 칭하게 되었다.

활성리(活城里) 지명은 장이영(長以英)이라는 이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이곳에 장군수(長軍水)인 활수(活水)가 솟아났다 하여 활성이라 불렀다.

반응형
반응형

안강읍(安康邑) 육통리(六通里) 회화나무(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14283)는 수령이 약 400년으로 높이 19.1m, 둘레 6.2m로 줄기의 많은 부분이 상해서 나무 모습이 좋지 못하다. 오랜 세월동안 마을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살아 왔으며, 음력 정월 보름날에 이 나무 앞에 모여서 새해의 풍작과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동제를 지낸다.

육통(六通)의 유래는 옛날 대표적인 6개 자연부락(능골, 원당, 존당, 못밑, 학지, 거리마을)을 통칭하여 육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활엽수인 회화나무는 생명력이 강하고,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그늘 밑에서 쉬어 가는 마을의 정자나무로도 쓰였고 향교나 사찰 등에 심었다. 활엽수 중 공해에 가장 강한 나무로 가로수나 공원수로도 이용된다.

나뭇가지의 자유로운 뻗음이 학자의 기개를 상징한다 하여 학자수(學者樹)’라고도 하며, 영어 이름도 이와 같은 뜻인 스콜라 트리(scholar tree)’이다.

옛 선비들은 이사를 가면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선비가 사는 곳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마을 입구에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모양이 둥글고 온화하여 높은 관리의 무덤이나 선비의 집에 즐겨 심었다.

이 회화나무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600년 전인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이 마을에 살던 젊은이가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면서 이 나무를 심어놓고 부모님께 자식처럼 키워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 후 젊은이는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부모는 아들의 뜻대로 이 나무를 자식같이 여기며 가꾸어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한다.

안강읍(安康邑)은 경주시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읍이다. 남쪽으로는 현곡면, 동쪽으로는 강동면과 천북면, 북쪽으로는 포항시의 기계면, 서쪽으로는 영천시의 고경면과 접해 있다. 원래 안강은 무인 하천 지역이었으나 칠평천(七坪川) 유수의 변천으로 민가가 형성되었고 759신라 경덕왕 때 주민의 평안함을 염원하는 뜻에서 '안강(安康)'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칠평(七坪)이라는 지명은 옛날 큰 홍수가 나서 안강 전역이 물에 잠겼을 때, 이곳의 일곱평 정도의 땅이 물에 잠기지 않았는데 그 물에 잠기지 않은 땅모양이 칠()자 모양이었다고 하여 그 넓이와 모양을 따서 칠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칠평천(七坪川)은 안강읍 두류리에서 발원하여 안강읍을 관통하고 형산강에 합류되는 하천이다. 동남북의 산지로부터 흘러내린 많은 지류들이 안강읍 지역에 넓은 들을 만들어 옛날 안강현(安康縣)의 중심지가 들어설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삼국사기에 원래 비화현(比火縣)이었는데, 759(신라 경덕왕 16)에 안강현(安康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비화현에서의 ()’는 신라지역에서()’을 의미하는을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102(신라 파사니사금 23) 음즙벌국(音汁伐國)을 취하여 음즙화현(音汁火縣)을 만들었는데 후에 안강현에 합해졌다는 기록도 나온다. 음즙화현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알려져 있지 않다.

 

반응형
반응형

은현리 적석총(銀峴里 積石塚, 울산 울주군 웅촌면 은현리 산 207-5번지)은 돌무지무덤(積石塚)으로 은현리 서리마을의 남쪽 야산에 있다. 이곳은 정족산(해발 748m)에서 동북쪽으로 발달한 보골봉의 끝자락에 해당하는데, 적석총이 있는 지점은 경사가 10˚ 이내로 완만한 곳에 축조되어 있다.
적석총(積石塚)은 시신을 묻기 위해 구덩이를 파거나 땅 위에 시신을 놓은 다음 돌을 쌓아서 만든 무덤을 말한다. 총(塚)은 발굴된 무덤의 출토 유물로 미루어 볼 때, 피장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어 묘라고 부르기는 곤란한 무덤을 말한다.

은현리 적석총(銀峴里 積石塚)은 사람머리 크기의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무덤으로 붕괴로 말미암아 확실한 구조는 알 수 없다. 남아있는 적석총의 규모는 전체길이 약 20m내외, 높이 6m 정도로 추정된다. 적석총의 석재는 대부분이 자연석으로 큰 것은 65×60×20㎝, 중간 것은 55×40×23㎝, 작은 것은 23×14×7㎝ 정도로 다양하며, 무덤의 전체모습은 원형이다.
적석총의 최하단 기단부의 형태, 함몰되어 있는 적석의 상태 및 높이 등으로 미루어보면 원래는 위쪽으로 오를수록 좁은 형태를 이루는 피라미드형으로 추정된다.

원래 기단부에는 계단으로 쌓은 흔적이 남아 있으나 현재는 확인하기 어렵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인근 저수지 축조 시 적석총의 돌을 사용했다 한다. 적석총에서 약 3m정도 떨어진 주변에는 돌담을 쌓아 묘역을 구분하고 있어 마을 사람들은 마고할미가 쌓은 당이라 하여 해당울, 성산이라 부르고 있다.

적석총에서 약 3m정도 떨어진 주변에는 돌담을 쌓아 묘역을 구분하고 있어 마을 사람들은 마고할미가 쌓은 당이라 하여 해당울, 성산이라 부르고 있다.

적석총(積石塚)은 우리나라에서는 삼한시대 초기에 확인되는데, 이때의 적석총은 대부분 한반도 중부와 북부 지방에 분포한다. 삼국시대가 되면 고구려에서 적석총을 많이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강돌을 사용하여 무질서하게 쌓아 올렸지만, 점차 다듬은 돌을 계단처럼 쌓아 올려 웅장하게 만들었다. 백제에서도 적석총을 만들었는데, 백제의 적석총은 첫 수도였던 한강 유역에서만 확인된다.
웅촌면(熊村面)에 있는 은현리 적석총(銀峴里 積石塚)은 검단리 유적지, 대대리 유적지와 더불어 삼한시대의 우시산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울산지역의 최초 국가인 우시산국이 이 지역으로 은현리 적석총(銀峴里 積石塚)의 존재는 강력한 지배층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우시산국은 신라 탈해이사금 때 멸망하기 전까지 반 독립성을 유지한 소국이였다.

은현리 적석총(銀峴里 積石塚)의 피장자는 과연 누구일까?
은현리 적석총은 아직 발굴 조사가 진행되지 않아 구체적인 구조와 연대 등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여러 가지 추론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고구려인의 무덤으로 우신산국의 지배층이 고구려계통이라는 것이다. 고구려인이 남하하여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보는 견해다.
또 하나의 추론은 우시산국은 소국 형태의 가야국으로 경남 산청군에 있는 전 구형왕릉(가락국 제10대 구형왕의 돌무덤)과 비슷한 구조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탑으로 보는 견해인데 안동 석탑리 방단형 적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3호)과 비슷한 구조라는 것이다.

은현리(銀峴里)는 은하(銀下)의 은(銀)과 덕현(德峴)의 현(峴)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은하(銀下)’의 순우리말은 ‘은알’로, 음달의 아화(雅化)로 빚어진 말이다.
은현리(銀峴里)는 웅촌면의 서쪽에 위치하여 북쪽은 삼동면 출강리, 작동리와 지경을 이룬다. 동쪽은 대복리와 검단리, 남쪽은 고연리와 접한다. 정족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능선이 보골산에서 골짜기를 만들고, 은현리의 뒤산 능선을 따라 한 맥이 남진한 것이 운암산이다.

은현리의 들판은 매우 넓고 저수지가 많아 비옥하다. 서남쪽에는 무제치늪이 있으며 수반저수지, 담뒤저수지, 상보저수지, 덕산저수지 등의 저수지가 있고 곡천천이 여러 갈래로 흐르고 있다.
웅촌면(熊村面)은 진산(鎭山)인 운암산(雲岩山)의 모양이 곰과 닮아서 ‘웅촌’이라 이름하였다고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곰을 신성시하는 원시 신앙을 가졌던 예맥족(濊貊族)의 주처에는 곰의 터라 하여 ‘웅(熊)’ 자가 붙는데, 이로 미루어 웅촌은 고마족이 세운 우시산국(于尸山國)의 왕읍(王邑)이 있었던 곳이라 이름 한 지명으로 보인다.

은현리 서리마을의 은현리적석총 안내표지판
안내표지판을 따라 가는 길에 만난 공사현장
반응형
반응형

신라 6대 지마왕릉(祇磨王陵, 경주시 배동 산30번지)은 서남산 포석정 남쪽 200m 지점에 있다. 능은 계단식 지형을 이용하여 조성하였고 원형봉토분으로 직경 12.7m, 높이 3.3m이다. 남쪽아래에는 배동 석조여래삼존불상이 있다. 지마왕릉(祇磨王陵)의 위치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기록에는 없다. 

신라 6대 지마왕릉(祇磨王陵)은 서남산 포석정 남쪽 200m 지점에 있고 계단식 지형을 이용하여 조성하였으며 원형봉토분으로 직경 12.7m, 높이 3.3m이다.

지마이사금(祇磨尼師今)성은 박씨(朴氏)이며 지미(祇味) 또는 지마(祇磨)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이고, 어머니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사성부인(史省夫人)이며, 비는 갈문왕 마제(摩帝)의 딸 애례부인 김씨(愛禮夫人 金氏)이다.

서기 112년에 즉위하였고 치적은 가야와 왜와 말갈의 침입을 격퇴한 것이다. 기록을 보면 즉위 4(115)5(116)에는 친히 병력을 이끌고 황산하(黃山河: 낙동강 하류)를 건너 가야를 공격하였다. 즉위 14(125) 말갈군이 대령책(大嶺柵:대관령)으로 쳐들어 왔으나 물리쳤다. 재위 23년에 아들이 없이 죽었다.

지마왕릉(祇磨王陵)의 묘제 양식은 6세기 중엽부터 통일신라 때의 횡혈식석실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지마왕릉(祇磨王陵)은 조선 영조 6(1730)에 박씨 일족이 주장하였고 능 앞의 표석은 박씨 문중에서 고종 8(1871)에 세웠다박씨 일족이 주장하여 제()를 지내는 신라 박씨 왕릉은 ,지마왕릉, 일성왕릉, 아달라왕릉, 신덕왕릉, 경명왕릉, 경애왕릉 등 모두 6기이다.

혼유석 형태의 상석은 1955년 박응수씨가 설치하였다. 묘제 양식은 6세기 중엽부터 통일신라 때의 횡혈식석실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혼유석 형태의 상석은 1955년 박응수씨가 설치하였고 표석은 박씨 문중에서 고종 8년(1871년)에 세웠다.

능 앞에 있는 상석(床石)의 변천 및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상석(床石)은 제수(祭需)를 진설하는 곳이자 능의 정면을 가리키는 역할을 하는데 신라 왕릉에서 상석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무열왕릉이고 흥덕왕릉 이후에는 설치되지 않았다.

상석의 형태는 여러 개의 장대석을 조립한 초기의 상석(무열왕릉, 신문왕릉)과 두꺼운 큰 판석 6매를 이용한 탁자형 상석(성덕왕릉, 원성왕릉, 경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으로 구분된다. 특히 탁자형 상석에는 전면 또는 후면에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의 왕릉에서는 정자각(丁字閣)이 등장하여 이곳에서 제수(祭需)를 진설하였고, 능의 앞의 상석은 혼유석(魂遊石)이라 하여 영혼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의미와 명칭이 바뀌어졌다. 따라서 신라 왕릉에 설치된 혼유석 형태의 상석은 조선후기 또는 일제 강점기 때 김씨 일족과 박씨 일족, 석씨 일족이 설치한 것이다.

신라 6대 지마이사금(祇磨尼師今, 재위 112~134, 2110개월)

어느 날 5대 파사왕이 태자 지마를 데리고 유찬의 연못으로 사냥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지부에 들렀다. 이때 이찬 허루가 왕 일행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모두들 취했을 무렵 허루의 아내가 한 처자를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다. 그러자 마제의 아내도 자신의 딸을 불렀는데 태자의 마음에 들었다.

이것을 본 허루가 질투를 하자 파사왕이 허루에게 이 곳 땅 이름이 대포(큰 부엌)인데, 공이 이곳에서 훌륭한 음식과 좋은 술을 차려 잔치를 베풀어 즐겁게 하니, 직위를 주다(酒多:술이 많음)라고 하여 이찬 위에 두어야 마땅하겠다.”라고 벼슬을 내려 무마하고, 마제의 딸을 태자의 배필로 삼았다. 주다는 뒤에 각간이라고 불렀다.

지마이사금(祇磨尼師今)의 주요 일대기를 보면, 즉위 22,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창영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옥권을 파진찬으로, 신권을 일길찬으로, 순선을 급찬으로 임명하였다.

3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왔고 여름 4월에 홍수가 났다. 죄수들를 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42, 가야가 남쪽 변경을 약탈하였고 7, 왕이 가야를 직접 공격하였다.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 낙동강 하류)를 지나는데 가야인들이 숲 속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기다렸다. 왕은 이를 모르고 곧바로 전진하였는데, 복병이 나와 왕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왕은 군사를 지휘하여 맹렬히 싸워 포위를 뚫고 퇴각하였다.

58, 장수를 보내 가야를 공격하게 하고, 왕은 정병 1만을 거느려 뒤를 이었다. 가야는 성을 닫고 굳게 수비하였다. 그 때 마침 비가 오래 내렸으므로 왕은 되돌아 왔다.

10년 정월, 익종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흔련을 파진찬으로 임명하고, 임권을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2, 대증산성을 쌓았고 4,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11년 서울 사람들이 왜병이 크게 몰려온다는 헛소문을 듣고 앞 다투어 산골짜기로 피난하였다. 왕은 이찬 익종 등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123, 왜국과 강화하였다.

14년 정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크게 공격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가을 7월에 그들은 다시 대령 책을 습격하고 이하를 넘어왔다. 왕은 백제에 글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고, 백제는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돕게 하였다. 적은 이 소식을 듣고 물러갔다.

8, 이찬 창영이 사망하자, 파진찬 옥권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에 참여시켰다. 212, 궁궐 남문이 불탔다. 238, 왕이 별세하였으나 아들이 없었다.

배동 석조여래삼존불상에서 지마왕릉 방향으로 오솔길을 따라 출발하여 만나는 태진지라는 작은 연못을 만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