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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7대 일성왕릉(逸聖王陵)은 남산 서북쪽 산기슭 송림 가운데 있으며 남간사지 동편에 있다. ()은 높이 5.3m, 직경 15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규모가 소형이고 서남쪽 방향으로 약간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였다. 봉분 자락의 서편에는 화강암 괴석으로 된 호석일부가 노출되어 있고 묘제 양식은 통일기의 횡혈식석실분(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능 앞의 표석은 박씨 문중에서 고종 8(1871)에 세웠으며 상석은 1953년 박익현(朴益鉉)이 설치를 하였다. 능 앞 2단 축대는 능을 보호하기 위해 197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의 능은 문헌기록에 없고 확인되지 않음에도 조선 영조6년에 박씨 일족이 일성왕릉(逸聖王陵)이라고 주장하며 지정하였다.

일성왕의 장지에 대한 남아 있는 기록은 없다. 그래서 일부학자들은 삼국사기에 경애왕의 장지가 해목령이라 기록하고 있어 현재 일성왕릉을 경애왕릉으로 추정한다.

신라 7대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 재위 134 ~ 154)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일성(逸聖), 왕호는 이사금(尼師今)으로 나이 여든에 왕위에 올랐다. 왕비는 지소례왕의 딸 박씨이다. 삼국사기에는 제3대 유리왕(儒理王)의 맏아들이라 기록되어있고 삼국유사에는 유리왕의 조카 혹은 제6대 지마왕(祗摩王)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유리왕(儒理王)의 맏아들로 보고 있다.

일성왕(逸聖王)은 늦게 왕위에 올랐으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 유리왕이 사망할 즈음 그는 어린 애기라서 그의 고모부 석탈해가 신라 4대 왕이 되었다. 그리고 석탈해왕이 죽을 당시에 왕자가 있었으나 너무 어렸다. 그래서 왕위 계승의 1순위는 일성(逸聖)이였다.

그러나 그의 이복 동생 파사(波娑)에게 왕위가 돌아갔다. 이유는 파사의 부인인 사성부인이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김알지의 손녀였기 때문이다. 이에 일성(逸聖)은 파사왕과의 관계 등 정치역학 구도를 고려한 끝에 왜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였다. 당시 분위기는 일성(逸聖)에게 불리했으며 강압적이거나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판단된다. 신라를 떠날 때 여러 도공과 노비들이 그를 따랐다.

신라 초기 왜국과의 관계를 보면 왜인들은 꾸준히 신라에 침범하여 노략질을 하였는데 이들은 대마도에서 활동하는 왜구로 추정된다. 4대 석탈해왕 즉위 3년(서기 60년) 5월에 비로서 왜국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했고 6대 지마왕 즉위 12년(서기 124년) 3월에 왜국과 강화하였다.

일성(逸聖)이 왜국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하는 중에 본국 신라로부터 조카 6대 지마왕이 후계자 없이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귀국해달라고 요청을 받고 서기 134840년 만에 신라로 돌아와 신라 7대 일성왕(逸聖王)이 되었다.

일성(逸聖)의 망명에 관한 기록은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 수인천황 3(서기 93) 3월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이 내귀하였다. 가지고 온 물건은 우태옥 1, 족고옥 1, 조록록의 적석옥 1, 출석의 작은 칼 1, 출석의 창 1, 일경(日鏡 : 거울) 1, 태의 신리(神籬) 1구 등 일곱 가지였다. 그것들을 단마국(但馬國)에 모셔 놓고 항상 신보(神寶)로 삼았다.

또 다음과 같은 다른 내용도 있다.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이 내귀하였다. 처음에 천일창이 배를 타고 파마국(播馬國)에 정박해 육속읍에 있었다. 그러자 천황이 삼륜군의 선조 대우주(大友主)와 왜직의 선조 장미시(長尾市)를 파마에 보내 천일창(天日槍)에게 그대는 누구이며,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천일창(天日槍)저는 신라국의 왕자입니다. 일본국에 성황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나라를 아우 지고(知古 : 파사왕)에게 주고 왔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바친 물건이 엽세주(), 족고주, 조록록의 적고주, 출석의 칼, 출석의 창, 일경(日鏡), 태의 신리(神籬), 담협천의 큰칼 등 모두 여덟 가지였다.

천황이 천일창(天日槍)을 불러 심미국의 육속읍과 담로도의 출천읍 두 읍을 줄 테니 네 마음대로 살아라.”고 했다. 천일창(天日槍)만일 천은을 내리시어 신이 원하는 곳을 주신다면 신은 직접 제국을 돌아다녀 보고 살 곳을 정하겠으니 신의 마음에 드는 곳을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부탁하자 허락했다.

천일창(天日槍)은 토도하(菟道河)를 거슬러 올라가서 북쪽인 근강국(近江國)의 오명읍에 들어가 잠시 살았다. 다시 근강에서 약협국을 거쳐 서쪽인 단마국(但馬國)에 가서 거주지를 정하였다. 근강국(近江國) 경촌 골짜기의 도기쟁이들은 천일창(天日槍)을 따라온 자들이다.

천일창(天日槍)은 단마국(但馬國)의 출도 사람 태이(太耳)의 딸 마다오(麻多烏)에게 장가를 들어 단마제조(但馬諸助)를 낳아다. 제조(諸助)는 단마일유제(但馬日楢杵)를 낳았고 일유제(日楢杵)는 청언(淸彦)을 낳았다. 청언은 전도간수(田道間守)를 낳았다고 한다.

왼쪽 보이는 저수지는 금강저수지이다.

일성왕(逸聖王)은 즉위 원년(134) 9,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고 즉위 2년 봄 정월에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즉위 42,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여, 장령 지방의 다섯 곳의 책을 불태웠다. 즉위 52, 금성에 정사당(政事堂) 을 설치하여 중요한 국정을 논의했다. 그해 10, 왕이 북쪽으로 순행하고, 태백산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다.

보광사를 지나서 본 일성왕릉이 위치하고 있는 송림

즉위 112, 왕이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요, 먹는 것은 백성들에게 하늘처럼 귀중한 것이다. 모든 주와 군에서는 제방을 수리하고 밭과 들을 개간하여 넓히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민간에서 금주옥(金銀珠玉)의 사용을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보광사를 지나서 만나는 금강저수지

즉위 12,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남쪽 지방이 가장 심하여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식량을 운반하여 그들에게 공급하였다즉위 13년 겨울 10, 압독(押督 :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지방의 부족국가)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풀어 평정하고, 남은 무리들을 남쪽 지방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일성왕릉 초입에 있는 보광사

즉위 182, 이찬 웅선이 사망하자, 대선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즉위 2010, 궁궐 대문에 불이 났고 212, 왕이 별세하였다.

경덕사
경덕사는 금산 가리촌장 배지타와 후손 고려 개국공신 무열공 배현경을 모신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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