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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7대 일성왕릉(逸聖王陵)은 남산 서북쪽 산기슭 송림 가운데 있으며 남간사지 동편에 있다. ()은 높이 5.3m, 직경 15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규모가 소형이고 서남쪽 방향으로 약간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였다. 봉분 자락의 서편에는 화강암 괴석으로 된 호석일부가 노출되어 있고 묘제 양식은 통일기의 횡혈식석실분(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능 앞의 표석은 박씨 문중에서 고종 8(1871)에 세웠으며 상석은 1953년 박익현(朴益鉉)이 설치를 하였다. 능 앞 2단 축대는 능을 보호하기 위해 197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의 능은 문헌기록에 없고 확인되지 않음에도 조선 영조6년에 박씨 일족이 일성왕릉(逸聖王陵)이라고 주장하며 지정하였다.

일성왕의 장지에 대한 남아 있는 기록은 없다. 그래서 일부학자들은 삼국사기에 경애왕의 장지가 해목령이라 기록하고 있어 현재 일성왕릉을 경애왕릉으로 추정한다.

신라 7대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 재위 134 ~ 154)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일성(逸聖), 왕호는 이사금(尼師今)으로 나이 여든에 왕위에 올랐다. 왕비는 지소례왕의 딸 박씨이다. 삼국사기에는 제3대 유리왕(儒理王)의 맏아들이라 기록되어있고 삼국유사에는 유리왕의 조카 혹은 제6대 지마왕(祗摩王)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유리왕(儒理王)의 맏아들로 보고 있다.

일성왕(逸聖王)은 늦게 왕위에 올랐으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 유리왕이 사망할 즈음 그는 어린 애기라서 그의 고모부 석탈해가 신라 4대 왕이 되었다. 그리고 석탈해왕이 죽을 당시에 왕자가 있었으나 너무 어렸다. 그래서 왕위 계승의 1순위는 일성(逸聖)이였다.

그러나 그의 이복 동생 파사(波娑)에게 왕위가 돌아갔다. 이유는 파사의 부인인 사성부인이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김알지의 손녀였기 때문이다. 이에 일성(逸聖)은 파사왕과의 관계 등 정치역학 구도를 고려한 끝에 왜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였다. 당시 분위기는 일성(逸聖)에게 불리했으며 강압적이거나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판단된다. 신라를 떠날 때 여러 도공과 노비들이 그를 따랐다.

신라 초기 왜국과의 관계를 보면 왜인들은 꾸준히 신라에 침범하여 노략질을 하였는데 이들은 대마도에서 활동하는 왜구로 추정된다. 4대 석탈해왕 즉위 3년(서기 60년) 5월에 비로서 왜국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했고 6대 지마왕 즉위 12년(서기 124년) 3월에 왜국과 강화하였다.

일성(逸聖)이 왜국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하는 중에 본국 신라로부터 조카 6대 지마왕이 후계자 없이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귀국해달라고 요청을 받고 서기 134840년 만에 신라로 돌아와 신라 7대 일성왕(逸聖王)이 되었다.

일성(逸聖)의 망명에 관한 기록은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 수인천황 3(서기 93) 3월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이 내귀하였다. 가지고 온 물건은 우태옥 1, 족고옥 1, 조록록의 적석옥 1, 출석의 작은 칼 1, 출석의 창 1, 일경(日鏡 : 거울) 1, 태의 신리(神籬) 1구 등 일곱 가지였다. 그것들을 단마국(但馬國)에 모셔 놓고 항상 신보(神寶)로 삼았다.

또 다음과 같은 다른 내용도 있다.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이 내귀하였다. 처음에 천일창이 배를 타고 파마국(播馬國)에 정박해 육속읍에 있었다. 그러자 천황이 삼륜군의 선조 대우주(大友主)와 왜직의 선조 장미시(長尾市)를 파마에 보내 천일창(天日槍)에게 그대는 누구이며,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천일창(天日槍)저는 신라국의 왕자입니다. 일본국에 성황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나라를 아우 지고(知古 : 파사왕)에게 주고 왔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바친 물건이 엽세주(), 족고주, 조록록의 적고주, 출석의 칼, 출석의 창, 일경(日鏡), 태의 신리(神籬), 담협천의 큰칼 등 모두 여덟 가지였다.

천황이 천일창(天日槍)을 불러 심미국의 육속읍과 담로도의 출천읍 두 읍을 줄 테니 네 마음대로 살아라.”고 했다. 천일창(天日槍)만일 천은을 내리시어 신이 원하는 곳을 주신다면 신은 직접 제국을 돌아다녀 보고 살 곳을 정하겠으니 신의 마음에 드는 곳을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부탁하자 허락했다.

천일창(天日槍)은 토도하(菟道河)를 거슬러 올라가서 북쪽인 근강국(近江國)의 오명읍에 들어가 잠시 살았다. 다시 근강에서 약협국을 거쳐 서쪽인 단마국(但馬國)에 가서 거주지를 정하였다. 근강국(近江國) 경촌 골짜기의 도기쟁이들은 천일창(天日槍)을 따라온 자들이다.

천일창(天日槍)은 단마국(但馬國)의 출도 사람 태이(太耳)의 딸 마다오(麻多烏)에게 장가를 들어 단마제조(但馬諸助)를 낳아다. 제조(諸助)는 단마일유제(但馬日楢杵)를 낳았고 일유제(日楢杵)는 청언(淸彦)을 낳았다. 청언은 전도간수(田道間守)를 낳았다고 한다.

왼쪽 보이는 저수지는 금강저수지이다.

일성왕(逸聖王)은 즉위 원년(134) 9,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고 즉위 2년 봄 정월에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즉위 42,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여, 장령 지방의 다섯 곳의 책을 불태웠다. 즉위 52, 금성에 정사당(政事堂) 을 설치하여 중요한 국정을 논의했다. 그해 10, 왕이 북쪽으로 순행하고, 태백산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다.

보광사를 지나서 본 일성왕릉이 위치하고 있는 송림

즉위 112, 왕이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요, 먹는 것은 백성들에게 하늘처럼 귀중한 것이다. 모든 주와 군에서는 제방을 수리하고 밭과 들을 개간하여 넓히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민간에서 금주옥(金銀珠玉)의 사용을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보광사를 지나서 만나는 금강저수지

즉위 12,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남쪽 지방이 가장 심하여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식량을 운반하여 그들에게 공급하였다즉위 13년 겨울 10, 압독(押督 :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지방의 부족국가)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풀어 평정하고, 남은 무리들을 남쪽 지방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일성왕릉 초입에 있는 보광사

즉위 182, 이찬 웅선이 사망하자, 대선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즉위 2010, 궁궐 대문에 불이 났고 212, 왕이 별세하였다.

경덕사
경덕사는 금산 가리촌장 배지타와 후손 고려 개국공신 무열공 배현경을 모신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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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30대 문무대왕비의 비편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비는 무너져 파괴되었던 것을 조선 정조 때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서 두 개의 비편이 발견되었다. 당시 문인 홍양호(洪良浩)의 『이계집(耳溪集)』에 의하면, 정조 20년(1796년)에 경주지방 사람이 이 비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그 비문의 탁본 네 장이 청나라 고증학자 유희해(劉喜海)에게 들어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실렸다. 유희해(劉喜海)는 네 장의 탁본을 제1, 2, 3, 4석으로 호칭하여 4개의 비편으로 파악하였으나, 실제는 2개의 비편의 앞, 뒤 면에 새겨진 것이었다.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 중인 문무대왕비편

그런데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에서 비편 하나가 다시 발견되었는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1796년에 발견되었던 비편 중 비신 하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해동금석원』의 제1석과 제4석은 비의 상부 앞면과 뒷면에, 제2석과 제3석은 비의 하부 앞면과 뒷면에 해당함을 알게 되었다.
비의 석질은 적갈색 화성암(火成岩)으로 글씨는 가로 3.2cm, 세로 3.3cm로 구획된 네모칸 안에 자경(字徑) 2cm 정도로 새겨져 있다. 서체는 구양순체의 해서(楷書)이며, 문장은 사륙변려체이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급찬 국학소경(國學少卿) 김모이며 이름은 글자가 마멸되어 알 수 없다.

비문의 전체적인 내용은 파손된 부분이 많아 알기 어렵지만, 남아 있는 비편을 보면 한당류(漢唐流)의 명문장을 모방하였고, 중국의 경전이나 고사성어에서 따온 미사여구가 많이 들어 있다.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 신라 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의 사적, 문무왕의 사적, 백제 평정 사실 등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문무왕의 유언, 문무왕의 장례 사실, 비명(碑銘) 등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의 건립 연대에 대해서는 유희해(劉喜海)는 681년(신문왕 1)으로 추정하였고, 동양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은 직명과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국학설치(國學設置) 기사를 관련시켜 682년(신문왕 2년) 6월 이후로 보았다. 한편 김창호(金昌鎬)는 682년(신문왕 2년) 7월 25일로 보았다.
비의 받침돌인 귀부는 사천왕사터의 서귀부인 것을 확인하였다. 서귀부는 도로변에 있는 귀부로 원래 방향은 능지탑을 바라보는 북쪽방향인데 일제강점기 때 철도공사에 따라 남쪽방향으로 바뀌어졌다.

사천왕사터의 동귀부와 서귀부

문무대왕비문 내용 중 논란이 된 것은 秺侯祭天之胤傅七葉十五代祖星漢王 글귀다. 한서(漢書) 김일제전(金日磾傳) 따르면 투후(秺侯)는 한()나라 7대왕 무제(武帝)가 김일제(金日磾 :B.C. 134~86)에게 내린 작위다. 김일제(金日磾)는 흉노(匈奴) 휴도왕(休屠王)의 태자로서 자()는 옹숙(翁叔)이고 곽거병(霍去病)의 흉노 토벌 시 포로가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14세였고 동생 윤()과 어머니 알씨(閼氏)도 포로가 되었다. 그 뒤 한나라 마감(馬監) 등을 하였고, 망하라(莽何羅)의 난() 때 무제(武帝)를 구한 공으로 투후(秺侯 : 지금의 중국 하남성 일대인 지방을 다스리는 제후 벼슬)에 봉해졌다. 김일제 성()인 김씨(金氏)는 무제(武帝)로부터 사성(賜姓)을 받은 것이다.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休屠)’가 흉노의 왕으로 살고 있던 땅은 지금 서안 북쪽 땅인 무위(武危)의 언지산 (焉支山)과 돈황(敦煌) 삼위산(三危山)이 있는 감숙성(甘肅省) 지역이다.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힌 곳은 삼위산이다.

사천왕사터 서귀부

이 지대는 오초령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신강에 이르기까지 길이가 1000km에 이르며, 그 폭은 40100km나 되는 광활한 땅이다. 중국 사람들은 황하의 서쪽을 달리고 있는 긴 복도라는 뜻으로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고 부른다.
한족(漢族)흉노 공포증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41년 한(漢) 무제(武帝)가 즉위하면서부터였다. 기원전 200년 고조 유방(劉邦)32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묵특(冒頓) 선우가 거느린 30만명의 기마 궁병(弓兵)에게 참패한 이후 매년 흉노에 막대한 조공을 바치며 살아왔었다.
김일제의 묘는 무제(武帝·14187 BC)가 묻혀 있는, 중국 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 남위향(南位鄕) 도상촌(道常村)에 있다. 무제가 묻혀 있는 무릉의 들머리에서 동쪽으로 1km나 떨어진 곳이다. 묘의 높이는 12m, 동편의 길이는 41.2m, 서편이 41.9m, 남편이 35.5m, 북편이 36.3m로 경주의 천마총 규모와 비슷하다. 김일제의 묘 꼭대기는 잔디가 벗겨져 있고 도굴 된 흔적도 있다.

김일제가 투후 작위를 받은 후 아들 상()도 투후가 되나 일찍 죽고, 후에 5대손인 성()까지 투후 벼슬을 받아 제후국의 왕이 되기에 이른다그런데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 의하면 유방(劉邦)이 세운 한나라는 13200여년 만에 왕망(王莽·BC 45AD 23)에게 나라를 뺏긴다.
왕망(王莽)은 한나라 10대 원제(元帝·BC 4933)의 황후 왕씨(王氏) 가문 출신으로 나라이름을 신()이라 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 후 15년 만에 한나라 황족 유수(劉秀)에 의해 멸망하고 후한(後漢)이 건국되었다. 역사에서는 이전을 전한(前漢)이라고 하여 구별하고 있다.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당()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의 남편으로 당에게는 이모부이다. 즉 왕망은 투후 김일제 계열과는 외가 사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김일제의 후손들은 왕망이 ()나라를 세우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이유로 신나라 멸망과 함께 김일제 후손도 역사에서 사라졌다.
신나라가  망한 후 발해연안 또는 산동 반도 지방에서 항거 세력을 형성하다가 완전히 무너졌고 이 때 김일제 후손들이 멸문의 지경에 이르자 한반도로 유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쪽 김해 및 제주도, 바다를 건너 일본 규슈와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왕망 때 만든 화폐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되는 것은 왕망과 같이 참여했던 세력이 대륙 밖으로 이동한 흔적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十五代祖星漢王에서 성한왕(星漢王)은 누구인가?
신라 56명의 왕 중에는 성한왕이라는 왕은 없고 경주 김씨 족보에도 성한왕 관련 내용이 없다. 신라 42대 흥덕왕릉 비편 중 일부에서 흥덕왕이 태조(太祖) 성한(星漢)24대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932년 서악서원 영귀루 보수 때 축대석으로 발견 된 김인문 묘비에는 절반이상이 훼손되었으나 태조(太祖) 한왕(漢王)이라고 기록이 있어 일부 학자는 성한왕의 약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에 성한왕(星漢王)에 대해서는 김알지(金閼智)로 보는 견해, 알지의 아들인 세()(())으로 보는 견해, 알지의 7세손으로 김씨 중 최초로 왕위에 오른 미추왕(味鄒王)으로 보는 견해, 등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문무대왕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

그럼 고고학적 유물로써 북방기마민족의 흔적을 찾아보자.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돌무지덧널무덤)4세기 중반 때 경주에서 출현한 묘제양식으로 바닥에 냇돌을 깔아 그 주위에 통나무로 상자모양의 목곽, 즉 방을 만들었는데 구성은 주곽과 부곽을 조성하여 설치하였고 주곽에는 목관을 안치하였다. 부곽에는 부장품을 매장하였다.
그리고는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리고 바깥에는 흙을 부어 거대한 봉분을 조성하는 방식이다. 이 적석목곽분은 흉노족(匈奴族)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이 조성했던 무덤과 매우 유사한 방식이다. 백제와 고구려의 묘제양식은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 정상부에 시신을 안치하는 적석총(돌무지무덤)이다.

신라의 묘제양식은 목관묘 목곽묘 적석목곽묘() 횡혈식석실분의 단계로 시대별 발전시켜 나갔다.
경주 대릉원 에 있는 황남대총(皇南大塚, 98호 고분)은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형식의 고분으로 737월에 발굴하였는데 지름 80m, 높이 23m의 고분 둘을 연결시킨 쌍분(雙墳)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신라 17대 내물왕 부부로 추정하고 있는데  내물왕은 재위 46년간 신라의 기틀을 확립한 왕이었고 김씨(金氏) 왕족 시대를 열었다.

경주 대릉원

즉 남분(南墳)은 내물왕, 북분(北墳)은 내물왕의 부인인 보반(保反)인 것이다. 능을 조성할 때 먼저 남분(南墳)을 만들고 나중에 그 고분의 일부를 파내고 북분(北墳)을 연결하였다. 즉 왕이 왕비보다 먼저 사망한 것이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 된 유리병

남분(南墳)에서는 환두대도, 금동관, 은제 잔, 상감 팔찌, 유리제품, 갑옷 등 유물이 출토되었고 60세 전, 후의 남자 턱뼈도 나왔어 피장자는 남자로 확인된다. 그리고 주곽에서 순장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15세 전후의 소녀 뼈가 나왔고 말 순장도 발견되었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 된 금제 관식

북분에서는 금관, 반지, 부인대(夫人帶)라고 쓰인 허리띠 장식이 나왔으며 갑옷은 출토되지 않았고 피장자는 키 150m의 여자로 추정된다. 부장품과 적석목곽분의 형식을 보면 남분은 4세기 후반~5세기 초반, 북분은 5세기 전반 중엽 이전에 속한다3세기 중엽 13대 미추왕(261~ 284) 이후 23대 법흥왕 사이에는 석씨를 포함하여 10명의 왕이 있었다.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 된 금반지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 된 은잔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 된 고배

22대 지증왕(500~ 514)은 재위 3(502)에 순장을 금지시켰고 재위 4년에는 국호를 신라로 확정했다.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칭호를 했고 묘호는 지증이라고 했는데 이때부터 신라에 시호법이 사용되었다.
23대 법흥왕(514~ 540)은 처음으로 중국처럼 연호를 정하고 사용했는데 건원(建元)이였다. 능은 애공사 북쪽 봉우리로 평지에서 산자락으로 매장되었는데 묘제는 횡혈식 석실분(굴식돌방무덤)이고 출토 된 유물은 황금유물이 아닌 토기 류가 주를 이룬다.

서봉총 금관

황남대총에서 출토 된 금관이 지금까지 신라의 금관 중 가장 아름답다금관이 나온 곳은 황남대총을 포함하여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 부부총이다금관의 장식은 출자(出字) 형 나무모양에 좌, 우 사슴뿔 모양의 형상을 하고 있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에는 나무가 하늘로 통하는 길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고 유라시아에는 사슴뿔모양의 모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하늘로 인도하는 전령사 역할을 한다.
고구려에서 왕은 금관이 없고 비단 모자를 사용하고 백제왕도 금관이 없고 금꽃 장식을 한 모자를 사용한다. 중국에서는 비단으로 만든 관을 사용한다.

천마총 금관

신라 고분만큼 황금 세공품이 많이 나오는 유적도 세계적으로 드물다. 흉노 등 유목 민족의 황금 숭배 사상은 유명하다. 신라금관은 중국식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스키타이로 상징되는 북방 유목 민족들이 사용한 양식인데 로마의 관(冠)을 상당 부분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
1924년 경주 노동동 금령총에서 발굴된 국보인 도기 기마인물상(국보 91) 명기(明器)는 전형적인 유목민의 차림이다. 말잔 등에 실려 있는 동복(청동솥)도 같은 형태다. 동복은 유목민의 상징적인 유물로 스키타이식과 흉노식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흉노의 동복이 스키타이식과 구별되는 것은 화려한 문양이 있고 손잡이의 형태가 다르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동복은 북한과 중국 길림지역에서 발견되었고 북부중국 초원과 내몽고 오르도스지방, 남부소련, 헝가리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경주고분과 김해의 가야고분인 대성동에서 발견되는 동복은 북방계 흉노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유물이다.

기마인물상(국보 91호) 명기(明器) 주인상

동북의 용도는 유목민 족장들이 사용하든 용기로 제례의식에 사용하는 고기를 삶을 때 쓰는 용기다. 말 탄 기마인물이 말잔등에 동복을 싣고 있는데 그 주인공은 족장의 지위에 있는 실제 피장자의 모습일 수도 있다.

기마인물상(국보 91호) 명기(明器) 하인상

신라 적석목곽분의 주인공들은 반도 서북부를 거쳐 동남진(東南進)을 한 북방기마민족( 스키타이-흉노 계통)으로 시베리아-오르도스계의 대형 적석목곽분과 철기, 승석문(繩蓆文) 토기, 금세공기술을 그대로 갖고 남하한 것이다
흉노(匈奴)는 대체로 몽골 고원의 서쪽 알타이 지역, 즉 지금의 중앙아시아와 가까운 곳에 살았다. 알타이 산맥의 그 알타이가 금()이란 뜻이다. 마립간(麻立干)이란 말은 여러 부족들의 대표자란 뜻인데 유목민족의 칸(칭기즈칸의 칸)과 같은 어원이다. 이들의 행동반경 안에는 중앙아시아, 러시아, 흑해 연안도 들어 있고 이 지역은 로마 문명권과 겹쳐 있다.

금관총에서 출토 된 금제 허리띠

스키타이기원 전 7세기경부터 지금의 이란, 러시아,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를 누볐던 인류역사상 최초의 유목기마 군사 집단이었다. 이들이 만든 기마(騎馬)문화가 동쪽으로 확산되어 흉노, 선비(鮮卑), 투르크, 위구르, 거란, 몽골로 이어지는 북방기마문화의 원류(源流)가 되었다.
스키타이 계통의 문화는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는 흉노에게 전해졌다. 부여 계통의 고구려와 백제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중국의 영향을 일찍부터 받았는 반면 스키타이-흉노 계통의 신라는 북방 초원 루트를 통해 들어오는 서방문화, 로마 문화를 많이 수입했을 것이며 신라 금관 등 유물은 스키타이 계통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금관총에서 출토 된 금제 관식

북방기마민족(스키타이-흉노계통)이 한반도 남쪽에 어떻게 유입 했을까?
고구려, 백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북방기마민족의 유적과 유물이 어찌하여 한반도의 동남단 신라, 가야에서만 나타나고 있는지는 고대사의 오랜 수수께끼였다.
중국 진(晋)나라 학자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을 보면 3세기 후반까지 한반도 남부에는 삼한(三韓)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쪽에 마한 50개국이 있고 동쪽에 진한과 변한 24개 나라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한(三韓) 74개 부족국가를 영도하는 것은 마한의 목지국(目支國)이라고 나온다.

부부총에서 출토 된 금귀걸이

삼국사기에는 2세기 중반인 서기 167년에 신라가 28천명의 대군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반해 진수의 삼국지(三國志)에는 3세기 후반까지도 百濟, 新羅라는 국호는 보이지 않고 마한에서 백제국(伯濟國), 진한에서 斯사로국(盧國)이란 소규모 부족 국가의 이름이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 기록과 달리 한반도 남부에 자리 잡고 있던 삼한(三韓)3세기 후반까지 부족국가 연맹체 단계였다는 것이다.
4세기 이후 한반도에서 三韓은 사라지고 백제와 신라, 가야연맹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백제의 급속한 발전 배경에 대해서는 기마 문화에 익숙했던 부여계의 진출과 관련 있어 보인다. 가야는 문헌 기록이 부족하지만 고고학적 발굴 결과 변한의 옛터에서 북방 기마민족()의 무기류와 마구류가  출토되어 강력한 기마군단을 보유한 정치 집단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낙랑과 대방군이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무너지고(서기 313년 경) 백제 근초고왕이 활발한 정복 전쟁을 펼치자 경상도 지역의 소규모 부족국가들이 위기의식을 느껴 통합이 가속화되었고 특히 신라가 그 중심세력이 되었는 것이다.

천마총에서 출토 된 유리잔

내물왕 26, 즉 서기 381년 신라는 북중국의 유목민족 국가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낸다. 전진(前秦)351년 티베트계 저족출신 부건(符健)이 세운 나라로 381년에는 부건의 조카 부견(符堅)이 황제가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전진의 황제 부견(符堅)과 신라 사신 위두(衛頭) 간의 대화가 기록돼 있다.
부견이 위두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에 海東(해동: 신라)의 형편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을 말함이냐고 하니, 위두가 대답하기를 이는 마치 중국의 시대변혁(時代變革)명호개역(名號改易)과 같은 것이니 지금이 어찌 예와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符堅問 衛頭曰, 卿言海東之事, 與古不同, 何耶, 答曰, 亦猶中國 時代變革 名號改易, 今焉得同]

금귀걸이

이 기록을 보면 내물왕 들어 나라가 크게 발전했음을 알 수 있고 시대변혁(時代變革)명호개역(名號改易)은 단순히 나라의 체제가 정비된 수준을 넘어선다. 내물왕 이후 석()씨는 신라 역사의 주류에서 사라졌다석(昔)씨가 사라지는 것과 위두(衛頭)가 밝힌 시대변혁이라는 문구를 통해 이 시기에 강력한 군사력에다 선진적 국가체계를 경험한 새로운 세력임을 의미 할 수 있다.
위의 기록대로 위두(衛頭)가 신라에 중국의 시대변혁명호개역과 같은 큰 변화가 이뤄졌다고 답한 것이다. 이 기록의 원래 출처는 중국 역사서인 진서(秦書)이다.
그렇다면 4세기에 일어난 중국의 시대변혁명호개역은 무엇을 말하는가?
4세기에 흉노(匈奴)와 갈, (), , 선비(鮮卑) 등 다섯 유목민족은 중국 북방을 정복하고 호족(胡族)의 나라 16개를 차례로 세우기 시작했다. 이른바 516시대. 이를 두고 훗날 한족(漢族) 역사가들은 다섯 오랑캐의 폭정 시대로 규정했지만 당사자인 5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名號改易이 이뤄진 변혁의 시대인 것이다. 자신들의 전통에 부합되는 정치체제를 갖게 되었고 천대받던 오랑캐에서 한족(漢族)을 지배하는 귀족장군이 되었으니 시대변혁명호개역으로 부른 것이다.
위두와 부견의 대화에서 당시 북중국에서는 기마족의 중원(中原) 정복과 그에 따른 정치, 사회적 변화를 시대변혁명호개역으로 표현하며 정당시했음을 알 수 있고 신라에서도 그와 유사한 사건, 즉 기마 족의 정복과 왕위 찬탈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추정 할 수 있다.

신라 30대 문무대왕릉

중국 진나라 사람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의 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과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종합하면 변한과 진한 땅에는 네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첫째는 선사시대부터 농경을 하며 살고 있던 사람들로 묘제로는 지석묘(고인돌)를 사용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출현을 가능케 한 것은 BC 1,000년경부터 시작된 청동기 문화이다. 농경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정착생활로 안정을 찾게 되고 부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서 계급이 발생하여 군장사회가 형성된다. 군장은 부와 권력을 지닌 자를 뜻하며 이 같은 군장사회는 초기국가로 발전하는 과도기적 역할을 했다.
둘째는 BC 221년 진()의 통일로 시황제(始皇帝)의 만리장성, 궁궐 등 노역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변방민족과 연나라 망명객들로 고조선과 마한의 동쪽, 진한에 살았다. 전국시대 7웅 중에서 진()만이 유목국가였고 나머지는 농경국가로 진이 통일한 데는 유목민 특유의 기마전술이 컸다.
셋째는. BC 194년 연나라 망명객 중 위만세력이 고조선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이 고조선의 왕(위만 조선)이 됨에 따라 쫓겨난 준왕세력이 이동해 온 사람들이다.
넷째는 BC 108고조선(古朝鮮)이 한 무제에 의하여 망하자 이동해 온 고조선유민(遺民)들이다.
다섯째는 고구려 3대 무신왕(武神王: 무휼)이 가 낙랑군을 멸망시키자 낙랑군 유민 5,000명이 신라에 투항하자 당시 3대 유리왕 14(38)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해변가에서 바라 본 문무대왕릉

변한은 신라1대 박혁거세 즉위 19(BC 38)에 나라를 바쳐 항복하였고, 9년 백제 온조왕이 마한을 멸망 및 병합시키자 마한 장수 맹소가 부흥세력과 함께 신라4대 탈해왕 5(48)에 투항하였다. 이후 신라는 백제와 본격적으로 영토분쟁을 하였고 이전에는 왜, 낙랑군과 전쟁을 하였다.
한국 고대사의 지배민족은 만주를 원류로 하는 부여계통 북방민족의 고구려-백제와 고대 유라시아 초원 지대을 누비는 북기마민족(스키타이-흉노계통)의 고조선-신라-가야의 2가지 부류로 생각할 수 있다. 부여계는 만주 동쪽에 살았고 인종적으로는 퉁구스계이며 순수 유목민이 아니고 수렵과 농업도 함께 했다. 북방기마민족은 알타이 산맥-내몽골(오르도스) 북방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기마민족으로 단계적으로 한반도에 유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대릉원의 벌초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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