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55대 왕 경애왕릉(景哀王陵)은 경주시 배동 산73-1번지로 서남산의 삼릉 남쪽에 있다. 원형봉토분으로 봉분 높이 4.20m, 봉분 직경 13m이며, 발굴조사는 하지 않았으나 묘제는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 : 굴식돌방무덤)일 것으로 추정된다.
봉분자락에는 아무런 시설이 발견되지 않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경애왕의 시신을서쪽 대청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시호를 올려 경애라 하고, 남산 해목령(蟹目嶺)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해목령(蟹目嶺)은 남산신성 내 남쪽 서측의 봉우리를 말하며, 그 아래 게의 눈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부연된 명칭으로 높이는 265m이다. 그러나 해목령 (蟹目嶺)주변에서 왕릉급의 고분은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의 능은 조선영조 6년 박씨 일족에 의해 지정된 것이다. 박씨 일족이 이처럼 삼릉과 인접한 곳에 비정한 이유는 그가 신덕왕의 아들이자 경명왕의 동생이기 때문이다. 즉 삼릉을 박씨 왕족의 능이라고 지정할때 같이 지정하였다.
해목령(蟹目嶺)은 경애왕릉에서 떨어져 있어서 맞지 않으며, 해목령(蟹目嶺) 가까이에 있는 지금의 일성왕릉을 경애왕릉으로 보아야 한다는 일부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일성왕릉 위치는 嶺이라기보다는 산사면 말단부에 있다.
신라 55대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 8월 ~ 927년 11월, 3년 3개월)
성은 박씨(朴氏), 이름은 위응(魏膺)이며, 53대 신덕왕(神德王)의 둘째 아들이자 54대 경명왕(景明王)의 동복동생이고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다. 경애왕 재위기간에는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은 잠시 휴전상태에 들어갔고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군사를 보내어 고려를 도왔다. 927년 11월에 포석사(鮑石祠)에서 제사를 지내는 중 그곳을 기습한 후백제의 견훤(甄萱)에게 사로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포석사(鮑石祠), 또는 포석(鮑石)은 길례(吉禮)를 행하는 장소로 나라의 안녕을 비는 행사가 치르는 곳이었고 제사를 행하는 사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노(文努, 538년~606년)를 비롯한 나라의 중요 인물들의 화상이 모셔져 있었다.
1999년 4월 ~ 5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포석정 동남쪽 70m 지점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하였고 그 과정에서 포석(鮑石)이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 몇 점과 기와무지를 확인했다. 이는 포석정이 단순히 유상곡수를 하는 놀이터가 아니라 포석사와 같은 사당이었음을 뜻한다.
문노(文努)는 가야 출신으로 가야 구형왕의 아들인 김무력 장군을 따라 전쟁터에 나아가 백제군을 섬멸하는데 앞장서는 등으로 많은 공을 세웠다.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진평왕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는 실질적인 일등공신이었다. 가야 출신이라는 신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걸출한 실력을 인정받아 화랑의 우두머리인 8대 풍월주와 재상까지 올랐다.
즉위 원년(924년) 9월, 고려 태조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고 10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즉위 2년 10월, 고울부 장군 능문이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태조가 그를 위로하고 타일러서 돌려보냈다. 왜냐하면 그 성이 신라의 서라벌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11월, 후백제 견훤이 그의 조카 진호를 고려에 인질로 보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견훤은 변덕스럽고 거짓말을 많이 하므로 그와 화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태조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3년 4월,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견훤은 고려 사람들이 고의로 죽였다고 생각하고 분개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웅진까지 진군하였다. 태조가 모든 성에 명령하여 방비를 굳게 하고 나가지 않도록 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견훤은 약속을 위반하고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하늘이 반드시 돕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이 진격하여 위풍을 보인다면 견훤은 반드시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태조는 사신에게 “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악이 넘쳐서 자멸하기를 기다릴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4년 봄 정월, 태조가 직접 백제를 공격하자,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를 도왔고 2월, 병부 시랑 장분 등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후당에서는 장분을 검교공부상서로 임명하고, 부사인 병부 낭중 박술홍을 겸어사중승으로, 판관인 창부 원외랑 이충식을 겸시어사로 임명하였다.
3월, 황룡사 탑이 흔들리다가 북쪽으로 기울었다. 태조가 직접 가서 근암성을 격파하였다. 후당 명종이 권지강주사 왕봉규를 회화 대장군으로 삼았다. 4월, 지강주사 왕봉규가 사자 임언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명종이 중흥전에서 그를 접견하고 선물을 주었다. 강주 관하의 돌산 등 네 고을이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9월, 견훤이 고울부(경북 영천)에서 신라 군사를 공격하므로,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장수에게 명령하여 정병 1만 명을 출동시켜 구원하게 하였다. 견훤은 이 구원병이 도착하지 않은 틈을 이용하여, 겨울 11월에 신라 서라벌을 습격하였다.
이 때 왕은 왕비 및 궁녀, 종실들을 데리고 포석사에서 제를 올리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는데 그때 견훤의 군대가 밀어닥쳤다. 왕은 당황하여 왕비와 함께 달아나 도성 남쪽 별궁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견훤의 군대 포위망에 걸리자 살해당할 것을 염려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때가 927년 11월 이였다. 그러나 고려의 사가들은 신라멸망의 당위성을 역설하기 위해 국가의 위태로운 상황에서 음력 11월 겨울날씨에도 불구하고 왕이 춤추며 즐기고 놀았다고 표현하였다.
견훤은 경애왕의 외종제김부(金傅)를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맡게 하였는데 이가 경순왕(敬順王)이다. 견훤은 왕족 효렴을 비롯하여 재상 영경과 그 외에 종실의 자녀들과 각종 기술자들, 병기, 보배 등을 빼앗아 돌아갔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 경애왕(景哀王)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이 즉위한 동광(同光) 2년 갑신(甲申; 924) 2월 19일에 황룡사(皇龍寺)에서 백좌(百座)를 열어 불경(佛經)을 풀이했다. 겸해서 선승(禪僧) 300명에게 음식을 먹이고 대왕(大王)이 친히 향을 피워 불공(佛供)을 드렸다. 이것이 백좌(百座)를 설립한 선교(禪敎)의 시작이었다.」
경주 남산은 금오봉과 고위봉의 2개의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는 산으로 등산코스 매우 다양하다. 특히 많이 애용하는 코스가 초입의 송림이 아름다워서 배동 삼릉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배동 삼릉(拜洞 三陵)은 남산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기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피장자(被葬者)는 동쪽에 있는 능은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154~184 재위), 중앙에 있는 능은 제53대 신덕왕(神德王, 912~917 재위), 서쪽에 있는 능은 제54대 경명왕(景明王, 917~924 재위)이다. 모두 박씨 왕들이다.
3기의 왕릉은 규모가 비슷한 원형봉토분으로 신덕왕릉(神德王陵)이 궁륭형 횡혈식석실분으로 미루어 볼 때 그리고 신덕왕릉(神德王陵)의 내부구조가 경주 노서동에 있는 3기의 석실분과 충효리고분, 서악리석실분 등과 같은 묘제 형식으로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 중엽에 조성 된 귀족 묘로 추정된다.
현재의 능은 조선 영조 6년에 이르러 박씨 일족이 지정한 것이다. 최근에 조선 왕릉의 혼유석 형태의 상석이 경명왕릉(景明王陵) 남쪽에 나란히 설치되었다.
아달라왕릉(阿達羅王陵)은 봉분 높이 5.2m, 봉분 직경 20.4m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장지와 위치와 관련한 기록은 없다.
신덕왕릉(神德王陵)은 봉분 높이 5.7m, 봉분 직경 20.4m로 1935년과 1963년 7월 19일에 걸쳐 두 번이나 도굴을 당했다. 1963년 도굴 계기로 내부조사를 한 결과 횡혈식석실분(굴식돌방무덤)으로 피장자(被葬者)는 2인이 합장된 것이었다. 내부구조는 할석(割石)으로 쌓은 석실분으로 평면이 정방형에 가깝고 천정은 궁륭형(穹窿形)이었다.
이 능에서 주목되는 점은 북벽과, 동, 서벽 일부에 연속해서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을 칠함으로서 마치 병풍을 둘서 세운 채색된 벽화가 있었다. 입구에서 볼 때 정면인 북쪽 벽면에 6폭, 그리고 그 좌우 동, 서 벽면에 3폭으로 모두 12폭이 채색되었다.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이었다.
신덕왕(神德王) 사망 후 죽성(竹城)에서 장사지냈다. 유물은 도굴로 인해 발견되지 않았다.
경명왕릉(景明王陵)은 봉분 높이 4.5m, 봉분 직경 15.9m로 봉분자락에는 괴석을 쌓은 호석과 괴석의 받침석이 2~3개 확인된다. 경명왕(景明王) 사망 후 황복사 북쪽에서 장사지냈다.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 154년 2월 ~ 184년 3월 재위, 30년 1개월)
성은 박씨(朴氏), 그는 일성의 맏아들이다. 그는 키가 일곱 자였으며 풍채가 훌륭하고 얼굴 모양이 기이하였다. 어머니는 박씨인데 그녀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내례부인(內禮夫人)이고 6대 지마왕의 딸이다. 8촌 사이의 족내혼으로 박씨 왕족의 힘을 규합하려는 세력연합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즉위 원년(154년) 3월, 계원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군무와 정사를 맡겼고 즉위 2년 봄 정월, 왕이 시조 묘에 직접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고 흥선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3년 4월, 계립령(鷄立嶺: 경북 풍기에서 충북 단양으로 통하는 조령 동쪽 20리 지점, 지금의 문경새재 동쪽고개)에 길이 개통되었다.
4년 2월, 감물현(충북 괴산 감물면)과 마산현(충남 보령 남포면) 두 현을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3월, 왕이 장령진에 행차하여 주둔하는 병사들을 위로하고 각각의 군사들에게 군복을 하사하였다. 5년 3월, 죽령(竹嶺:풍기 북쪽고개)이 개통되었고 왜인이 예방해왔고 7년 4월, 폭우로 알천이 넘쳐서 집이 떠내려가고, 금성 북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11년 2월, 서울에 용이 나타났고 12년 10월, 아찬 길선(吉宣)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처형을 두려워하여 백제로 도망갔다. 왕이 글을 보내 그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백제가 응하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는 성을 닫고 수비하며 나오지 않았고 신라 군사는 식량이 떨어져 돌아왔다.
14년 7월, 백제가 서쪽의 두 성을 격파하고, 주민 1천 명을 잡아 갔다. 8월, 일길찬 흥선으로 하여금 군사 2만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게 하고, 또한 왕은 기병 8천을 거느리고 한수로부터 그 곳에 도착하였다. 백제는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를 돌려주고 화친을 요구하였다.
15년 여름 4월, 이찬 계원이 사망하자 흥선을 이찬에 임명하였고 17년 2월, 시조 묘를 중수하였고 10월, 백제가 변경을 약탈하였다. 19년 봄 정월, 구도를 파진찬에 임명하고 구수혜를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20년(서기 173년)여름 5월, 왜국 여왕 비미호(卑彌乎, 히미코)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왔다. 21년 봄 정월, 흙비가 내렸고 2월, 가뭄이 들어 우물과 샘물이 말랐다.
31년 3월, 아달라왕은 아들 없이 별세하였고 9대 벌휴왕 등극으로 석탈해왕 이후 본격적인 석씨 왕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삼국사기 아달라왕 즉위 20년(서기 173년)에 등장하는 왜국 여왕 비미호(卑彌乎, 히미코)는 일본 사학계에서는 그녀의 존재를 부정하고 대신 신공황후라고 주장하며 『일본서기』에도 관련 기록이 없다. 그러나 『삼국지 위지동이전 倭 편』에 여왕 비미호(卑彌乎)는 등장하며 남편 없이 남동생이 보좌하며 재위 기간 74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고 정초 2년(238년)에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자기 나라에 조공할 것을 요구했다. 비미호(卑彌乎)와 그녀의 후계자 일여 여왕은 약 120년 동안 일본을 통치했다.
일본 역사에서 왕이 여왕인 경우는 비미호와 일여 이외에도 추고, 황극, 효명 등 있었다. 그런데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세운 나라는 신무천황 계통의 종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비미호(卑彌乎)가 왜의 초대 천황(덴노)인 신무(神武) 왕실이 혼란인 틈을 노려 왕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세운 것이다.
그래서 일본 사학계에서는 비미호와 일여 여왕 통치기간을 부정하고 있다. 대신 신공, 응신, 인덕천황 등의 재위 기간을 늘려서 120년 공백을 메웠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천황이 하나의 종족이라고 주장하며, 신격화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황후는 201년부터 269년까지 왜를 통치하면서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다스렸고, 신라를 정벌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자기보다 21살 많은 중애천황한테 시집을 갔다고 하며 269년 100세로 죽었다고 하니 이 무렵이 신라 아달라왕 즉위 19년(서기 173년) 무렵이다.
삼국유사 권제1 제2 기이 상(紀異 上)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4년 정유(丁酉; 157)에 동해(東海) 바닷가에는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조(海藻)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가 나타나더니 연오랑을 등에 업고 일본(日本)으로 가 버렸다.
이것을 본 나라 사람들은, “이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하고 세워서 왕을 삼았다[<일본제기日本帝紀>를 상고해 보면 전후(前後)에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이는 변읍(邊邑)의 조그만 왕(王)이고 참말 왕(王)은 아닐 것이다].
세오녀(細烏女)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바닷가에 나가서 찾아보니 남편이 벗어 놓은 신이 있었다.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그 바위는 또한 세오녀를 업고 마치 연오랑 때와 같이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그녀로 귀비(貴妃)를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에 광채(光彩)가 없었다. 일자(日者)가 왕께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우리나라에 내려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생기는 것입니다”했다.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서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은 말한다.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데 어찌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비단을 주니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을 보고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런 뒤에 해와 달의 정기가 전과 같았다. 이에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수하고 국보(國寶)로 삼으니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한다. 또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한다.」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설화 당시 신라 상황을 살펴보면 아달라왕 재위기간 동안에 문경새재, 충북 괴산 감물면, 충남 보령 남포면, 풍기 까지 영토를 넓게 확장했다. 이러한 과정에 근기국(현재 포항)을 신라에 복속시켰고 이때 나라가 신라에 정복당하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는 일본으로 정치적 망명을 한 것이다.
연오랑(延烏郞) 이름을 풀이하면 “까마귀를 끌어들이는 남자”라는 뜻이다. 까마귀(烏)는 태양의 정기를 세발 달린 까마귀(삼족오)로 형상화시킨 새로 고대부터 태양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그래서 연오랑은 이름이 아니라 소임을 나타내는 직업 명칭이다. 즉 일식 때 까마귀를 잡아서 생초비단에 감싸다가 태양을 향해 날아가도록 풀어주는 소임인 것이다. 이때 세오녀(細烏女)는 까마귀를 감싸는 생초비단 보자기를 짜는 일을 한 것이다.
연오랑 세오녀가 살았던 곳은 포항시 남구 오천읍 세계리(世界里)이다. 마을이름은 세오녀가 짠 비단으로 일월지에 제사를 지냈더니, 그 빛이 고지대인 이곳에 제일 먼저 비쳐 온 세계가 환하게 되었다고 하여 유래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가 나타낸 배경은 박씨 왕조가 아달라왕 시대로 막을 내리고, 석씨 왕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렸다는 것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인데 해와 달의 기운이 사라졌다는 것은 박씨 왕조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제53대 신덕왕(神德王 : 912년 4월 ~ 917년 7월 재위, 5년 3개월)
성은 박씨(朴氏)이며, 이름은 경휘(景暉)이고, 제8대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다. 아버지는 예겸(乂兼)이고 정강왕 때 대아찬을 지냈다. 어머니는 정화부인(貞和夫人)이다. 왕비는 김씨이고 헌강대왕의 딸인 의성왕후(義成王后)이다. 효공왕이 별세하였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후에 승영(昇英)은 경명왕(景明王), 위응(魏膺)은 경애왕(景哀王)이 된다. 이 시대에 신라는 실제로 경주지역을 다스리는 정도였고, 국토의 대부분이 궁예와 견훤의 세력안에 있었다. 즉위5년(서기916) 견훤은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였고 신라는 더 이상 궁예나 견훤의 공격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원년(912년) 5월, 선친을 선성대왕으로 추존하고, 정화 태후, 왕비를 의성왕후라 하고, 아들 승영(昇英)을 왕태자로 삼았다. 이찬 계강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즉위 3년 3월, 궁예가 연호 수덕 만세를 정개로 고쳤다. 이 해가 정개 원년이다.
5년 가을 8월, 견훤이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6년 봄 정월, 금성이 달을 범하였고 7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신덕이라 하고, 죽성에 장사지냈다.
제54대 경명왕(景明王, 917년 7월 ~ 924년 8월 재위, 7년 1개월)
성은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승영(昇英)이고아버지는 신덕왕,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황후다. 경명왕 때 신라 지방은 궁예와 견훤에게 거의 다 점령당한 상태였다. 원년(916년) 8월, 왕의 아우 이찬 위응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대아찬 유렴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즉위 2년 2월, 일길찬 현승이 모반하다가 처형되었고 6월, 궁예의 부하들의 인심이 갑자기 변하여 태조를 추대하자, 궁예가 도주하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태조가 즉위하여 연호를 새로 정하고, 이 해를 원년으로 하였다. 7월, 상주의 도적 두목 아자개가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3년, 사천왕사의 소상이 잡고 있던 활줄이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에 그려진 개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그 개가 짖는 것 같았다. 상대등 김 성을 각찬, 시중 언옹을 사찬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가 송악군으로 도읍을 옮겼다.
4년 봄 정월, 왕이 태조와 사신을 교환하고 수호 관계를 맺었고 2월, 강주 장군 윤웅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10월, 후백제 군주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 진례로 진군하였다. 왕이 아찬 김율을 태조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게 하니, 견훤이 이 말을 듣고 물러갔다.
5년 봄 정월, 김 율이 왕에게 “제가 지난해 고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려왕이 저에게 묻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으니, 소위 장륙 불상과 9층탑과 성대가 그것이라고 들었다. 불상과 탑은 지금도 있는 줄 알거니와 성대가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구나.’라고 하므로, 제가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성대란 어떠한 보물인가?” 그러나 이를 아는 자가 없었다.
이 때 황룡사에 중이 있었는데 나이 90세가 넘었다. 그가 말하였다. “그 보배로운 허리띠는 진평대왕이 사용하던 것인데, 여러 대를 전해 내려오면서 남쪽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왕이 즉시 창고를 열어 찾게 하였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날을 정하여 치성을 드리고 제사를 지낸 뒤에야 그것이 발견되었다.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되었고 매우 길어서 보통 사람은 맬 수가 없었다.
2월, 말갈의 일부인 달고의 무리가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이 때 태조의 장수 견권이 삭주를 지키고 있다가, 기병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여 대파하니,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태조에게 사신을 통해 편지를 보내어 사례하였다.
6년 봄 정월, 하지성 장군 원봉과 명주 장군 순식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의 귀순을 기념하여 원봉의 본 성을 순주라 하였으며, 순식에게 왕씨 성을 내려 주었다. 이 달에 진보성 장군 홍 술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7년 가을 7월, 왕이 지성 장군 성달과 경산부 장군 양문 등에게 명령하여 태조에게 항복하게 하였다. 왕이 창부 시랑 김낙과 녹사 참군 김유경을 후당에 입조시키고 토산물을 바쳤다. 장종이 정도에 따라 선물을 주었다.
8년 봄 정월,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천주 절도사 왕 봉규가 역시 후당에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6월, 왕이 조산대부 창부시랑 김악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니, 장종이 그에게 조의대부시위위경의 관직을 주었다. 8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경명이라 하고, 황복사 북쪽에 장사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케 하였다.
삼국유사 제 2권 기이 하(紀異 下) 제 2 경명왕(景明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 때인 정명(貞明) 5년 무인(戊寅; 918)에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壁畵) 속의 개가 울었다. 이 때문에 3일 동안 불경을 외어 이를 물리쳤으나 반일(半日)이 지나자 그 개가 또 울었다.
7년 경진(庚辰; 920) 2월에는 황룡사탑(皇龍寺塔) 그림자가 금모사지(今毛舍知)의 집 뜰 안에 한 달 동안이나 거꾸로 서서 비쳐 보였다.
또 10월에 사천왕사(四天王寺)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으며, 벽화 속의 개가 뜰로 달려 나왔다가 다시 벽의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신라 7대 일성왕릉(逸聖王陵)은 남산 서북쪽산기슭 송림 가운데 있으며 남간사지 동편에 있다. 능(陵)은 높이 5.3m, 직경 15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규모가 소형이고 서남쪽 방향으로 약간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였다. 봉분 자락의 서편에는 화강암 괴석으로 된 호석일부가 노출되어 있고 묘제 양식은 통일기의 횡혈식석실분(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능 앞의 표석은 박씨 문중에서 고종 8년(1871년)에 세웠으며 상석은 1953년 박익현(朴益鉉)이 설치를 하였다. 능 앞 2단 축대는 능을 보호하기 위해 197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의 능은 문헌기록에 없고 확인되지 않음에도 조선 영조6년에 박씨 일족이 일성왕릉(逸聖王陵)이라고 주장하며 지정하였다.
일성왕의 장지에 대한 남아 있는 기록은 없다. 그래서 일부학자들은 삼국사기에 경애왕의 장지가 해목령이라 기록하고 있어 현재 일성왕릉을 경애왕릉으로 추정한다.
신라 7대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 재위 134 ~ 154년)은박씨(朴氏)이고 이름은 일성(逸聖), 왕호는 이사금(尼師今)으로 나이 여든에 왕위에 올랐다. 왕비는 지소례왕의 딸 박씨이다. 『삼국사기』에는 제3대 유리왕(儒理王)의 맏아들이라 기록되어있고 『삼국유사』에는 유리왕의 조카 혹은 제6대 지마왕(祗摩王)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유리왕(儒理王)의 맏아들로 보고 있다.
일성왕(逸聖王)은 늦게 왕위에 올랐으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 유리왕이 사망할 즈음 그는 어린 애기라서 그의 고모부 석탈해가 신라 4대 왕이 되었다. 그리고 석탈해왕이 죽을 당시에 왕자가 있었으나 너무 어렸다. 그래서 왕위 계승의 1순위는 일성(逸聖)이였다.
그러나 그의 이복 동생 파사(波娑)에게 왕위가 돌아갔다. 이유는 파사의 부인인 사성부인이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김알지의 손녀였기 때문이다. 이에 일성(逸聖)은 파사왕과의 관계 등 정치역학 구도를 고려한 끝에 왜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였다. 당시 분위기는 일성(逸聖)에게 불리했으며 강압적이거나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판단된다. 신라를 떠날 때 여러 도공과 노비들이 그를 따랐다.
신라 초기 왜국과의 관계를 보면 왜인들은 꾸준히 신라에 침범하여 노략질을 하였는데 이들은 대마도에서 활동하는 왜구로 추정된다. 4대 석탈해왕 즉위 3년(서기 60년) 5월에 비로서 왜국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했고 6대 지마왕 즉위 12년(서기 124년) 3월에 왜국과 강화하였다.
일성(逸聖)이 왜국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하는 중에 본국 신라로부터 조카 6대 지마왕이 후계자 없이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귀국해달라고 요청을 받고 서기 134년 8월 40년 만에 신라로 돌아와 신라 7대 일성왕(逸聖王)이 되었다.
일성(逸聖)의 망명에 관한 기록은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 수인천황 3년(서기 93년) 3월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이 내귀하였다. 가지고 온 물건은 우태옥 1개, 족고옥 1개, 조록록의 적석옥 1개, 출석의 작은 칼 1기, 출석의 창 1기, 일경(日鏡 : 거울) 1면, 태의 신리(神籬) 1구 등 일곱 가지였다. 그것들을 단마국(但馬國)에 모셔 놓고 항상 신보(神寶)로 삼았다.」
또 다음과 같은 다른 내용도 있다.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이 내귀하였다. 처음에 천일창이 배를 타고 파마국(播馬國)에 정박해 육속읍에 있었다. 그러자 천황이 삼륜군의 선조 대우주(大友主)와 왜직의 선조 장미시(長尾市)를 파마에 보내 천일창(天日槍)에게 “그대는 누구이며,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천일창(天日槍)이 “저는 신라국의 왕자입니다. 일본국에 성황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나라를 아우 지고(知古 : 파사왕)에게 주고 왔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바친 물건이 엽세주(珠), 족고주, 조록록의 적고주, 출석의 칼, 출석의 창, 일경(日鏡), 태의 신리(神籬), 담협천의 큰칼 등 모두 여덟 가지였다.
천황이 천일창(天日槍)을 불러 “심미국의 육속읍과 담로도의 출천읍 두 읍을 줄 테니 네 마음대로 살아라.”고 했다. 천일창(天日槍)이 “만일 천은을 내리시어 신이 원하는 곳을 주신다면 신은 직접 제국을 돌아다녀 보고 살 곳을 정하겠으니 신의 마음에 드는 곳을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부탁하자 허락했다.
천일창(天日槍)은 토도하(菟道河)를 거슬러 올라가서 북쪽인 근강국(近江國)의 오명읍에 들어가 잠시 살았다. 다시 근강에서 약협국을 거쳐 서쪽인 단마국(但馬國)에 가서 거주지를 정하였다. 근강국(近江國) 경촌 골짜기의 도기쟁이들은 천일창(天日槍)을 따라온 자들이다.
천일창(天日槍)은 단마국(但馬國)의 출도 사람 태이(太耳)의 딸 마다오(麻多烏)에게 장가를 들어 단마제조(但馬諸助)를 낳아다. 제조(諸助)는 단마일유제(但馬日楢杵)를 낳았고 일유제(日楢杵)는 청언(淸彦)을 낳았다. 청언은 전도간수(田道間守)를 낳았다고 한다.」
일성왕(逸聖王)은 즉위 원년(134년) 9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고 즉위 2년 봄 정월에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즉위 4년 2월,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여, 장령 지방의 다섯 곳의 책을 불태웠다. 즉위 5년 2월, 금성에 정사당(政事堂)을 설치하여 중요한 국정을 논의했다. 그해 10월, 왕이 북쪽으로 순행하고, 태백산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다.
즉위 11년 2월, 왕이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요, 먹는 것은 백성들에게 하늘처럼 귀중한 것이다. 모든 주와 군에서는 제방을 수리하고 밭과 들을 개간하여 넓히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민간에서 금․은․주옥(金銀珠玉)의 사용을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즉위 12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남쪽 지방이 가장 심하여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식량을 운반하여 그들에게 공급하였다. 즉위 13년 겨울 10월, 압독(押督 :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지방의 부족국가)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풀어 평정하고, 남은 무리들을 남쪽 지방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즉위 18년 2월, 이찬 웅선이 사망하자, 대선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즉위 20년 10월, 궁궐 대문에 불이 났고 21년 2월, 왕이 별세하였다.
신라 제30대 문무대왕비의 비편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비는 무너져 파괴되었던 것을 조선 정조 때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서 두 개의 비편이 발견되었다. 당시 문인 홍양호(洪良浩)의 『이계집(耳溪集)』에 의하면, 정조 20년(1796년)에 경주지방 사람이 이 비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그 비문의 탁본 네 장이 청나라 고증학자 유희해(劉喜海)에게 들어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실렸다. 유희해(劉喜海)는 네 장의 탁본을 제1, 2, 3, 4석으로 호칭하여 4개의 비편으로 파악하였으나, 실제는 2개의 비편의 앞, 뒤 면에 새겨진 것이었다.
그런데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에서 비편 하나가 다시 발견되었는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1796년에 발견되었던 비편 중 비신 하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해동금석원』의 제1석과 제4석은 비의 상부 앞면과 뒷면에, 제2석과 제3석은 비의 하부 앞면과 뒷면에 해당함을 알게 되었다. 비의 석질은 적갈색 화성암(火成岩)으로 글씨는 가로 3.2cm, 세로 3.3cm로 구획된 네모칸 안에 자경(字徑) 2cm 정도로 새겨져 있다. 서체는 구양순체의 해서(楷書)이며, 문장은 사륙변려체이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급찬 국학소경(國學少卿) 김모이며 이름은 글자가 마멸되어 알 수 없다.
비문의 전체적인 내용은 파손된 부분이 많아 알기 어렵지만, 남아 있는 비편을 보면 한당류(漢唐流)의 명문장을 모방하였고, 중국의 경전이나 고사성어에서 따온 미사여구가 많이 들어 있다.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 신라 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의 사적, 문무왕의 사적, 백제 평정 사실 등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문무왕의 유언, 문무왕의 장례 사실, 비명(碑銘) 등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의 건립 연대에 대해서는 유희해(劉喜海)는 681년(신문왕 1)으로 추정하였고, 동양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은 직명과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국학설치(國學設置) 기사를 관련시켜 682년(신문왕 2년) 6월 이후로 보았다. 한편 김창호(金昌鎬)는 682년(신문왕 2년) 7월 25일로 보았다. 비의 받침돌인 귀부는 사천왕사터의 서귀부인 것을 확인하였다. 서귀부는 도로변에 있는 귀부로 원래 방향은 능지탑을 바라보는 북쪽방향인데 일제강점기 때 철도공사에 따라 남쪽방향으로 바뀌어졌다.
문무대왕비문 내용 중 논란이 된 것은 ‘秺侯祭天之胤傅七葉와 十五代祖星漢王 글귀다. 「한서(漢書) 김일제전(金日磾傳)」에따르면투후(秺侯)는 한(漢)나라 7대왕무제(武帝)가 김일제(金日磾 :B.C. 134~86)에게 내린 작위다. 김일제(金日磾)는 흉노(匈奴) 휴도왕(休屠王)의 태자로서 자(字)는 옹숙(翁叔)이고 곽거병(霍去病)의 흉노 토벌 시 포로가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14세였고 동생 윤(倫)과 어머니 알씨(閼氏)도 포로가 되었다.그 뒤 한나라 마감(馬監) 등을 하였고, 망하라(莽何羅)의 난(亂) 때 무제(武帝)를 구한 공으로 투후(秺侯 : 지금의 중국 하남성 일대인 「투」지방을 다스리는 제후 벼슬)에 봉해졌다. 김일제 성(姓)인 김씨(金氏)는 무제(武帝)로부터 사성(賜姓)을 받은 것이다.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休屠)’가 흉노의 왕으로 살고 있던 땅은 지금 서안 북쪽 땅인 무위(武危)의 언지산 (焉支山)과 돈황(敦煌) 삼위산(三危山)이 있는 감숙성(甘肅省) 지역이다.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힌 곳은 삼위산이다.
이 지대는 오초령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신강에 이르기까지 길이가 1000km에 이르며, 그 폭은 40∼100km나 되는 광활한 땅이다. 중국 사람들은 황하의 서쪽을 달리고 있는 긴 복도라는 뜻으로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고 부른다. 한족(漢族)이 「흉노 공포증」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41년 한(漢) 무제(武帝)가 즉위하면서부터였다. 기원전 200년 고조 유방(劉邦)이 32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묵특(冒頓) 선우가 거느린 30만명의 기마 궁병(弓兵)에게 참패한 이후 매년 흉노에 막대한 조공을 바치며 살아왔었다. 김일제의 묘는 무제(武帝·141∼87 BC)가 묻혀 있는, 중국 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 남위향(南位鄕) 도상촌(道常村)에 있다. 무제가 묻혀 있는 무릉의 들머리에서 동쪽으로 1km나 떨어진 곳이다. 묘의 높이는 12m, 동편의 길이는 41.2m, 서편이 41.9m, 남편이 35.5m, 북편이 36.3m로 경주의 천마총 규모와 비슷하다. 김일제의 묘 꼭대기는 잔디가 벗겨져 있고 도굴 된 흔적도 있다.
김일제가 투후 작위를 받은 후 아들 상(賞)도 투후가 되나 일찍 죽고, 후에 5대손인 성(星)까지 투후 벼슬을 받아 제후국의 왕이 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 의하면 유방(劉邦)이 세운 한나라는 13대 200여년 만에 왕망(王莽·BC 45∼AD 23년)에게 나라를 뺏긴다. 왕망(王莽)은 한나라 10대 원제(元帝·BC 49∼33년)의 황후 왕씨(王氏) 가문 출신으로 나라이름을 신(新)이라 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 후 15년 만에 한나라 황족 유수(劉秀)에 의해 멸망하고 후한(後漢)이 건국되었다. 역사에서는 이전을 전한(前漢)이라고 하여 구별하고 있다.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당(當)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의 남편으로 당에게는 이모부이다. 즉 왕망은 투후 김일제 계열과는 외가 사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김일제의 후손들은 왕망이 新(신)나라를 세우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이유로 신나라 멸망과 함께 김일제 후손도 역사에서 사라졌다. 신나라가 망한 후 발해연안 또는 산동 반도 지방에서 항거 세력을 형성하다가 완전히 무너졌고 이 때 김일제 후손들이 멸문의 지경에 이르자 한반도로 유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쪽 김해 및 제주도, 바다를 건너 일본 규슈와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왕망 때 만든 화폐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되는 것은 왕망과 같이 참여했던 세력이 대륙 밖으로 이동한 흔적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十五代祖星漢王에서 성한왕(星漢王)은 누구인가? 신라 56명의 왕 중에는 성한왕이라는 왕은 없고 경주 김씨 족보에도 성한왕 관련 내용이 없다. 신라 42대 흥덕왕릉 비편 중 일부에서 흥덕왕이 태조(太祖) 성한(星漢)의 24대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932년 서악서원 영귀루 보수 때 축대석으로 발견 된 김인문 묘비에는 절반이상이 훼손되었으나 태조(太祖) 한왕(漢王)이라고 기록이 있어 일부 학자는 성한왕의 약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에 성한왕(星漢王)에 대해서는 김알지(金閼智)로 보는 견해, 알지의 아들인 세(열)한(勢(熱)漢)으로 보는 견해, 알지의 7세손으로김씨 중 최초로 왕위에 오른 미추왕(味鄒王)으로 보는 견해, 등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그럼 고고학적 유물로써 북방기마민족의 흔적을 찾아보자.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돌무지덧널무덤)은 4세기 중반 때 경주에서 출현한 묘제양식으로 바닥에 냇돌을 깔아 그 주위에 통나무로 상자모양의 목곽, 즉 방을 만들었는데 구성은 주곽과 부곽을 조성하여 설치하였고 주곽에는 목관을 안치하였다. 부곽에는 부장품을 매장하였다. 그리고는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리고 바깥에는 흙을 부어 거대한 봉분을 조성하는 방식이다.이 적석목곽분은 흉노족(匈奴族)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이 조성했던 무덤과 매우 유사한 방식이다. 백제와 고구려의 묘제양식은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 정상부에 시신을 안치하는 적석총(돌무지무덤)이다.
신라의 묘제양식은 목관묘 → 목곽묘 → 적석목곽묘(분) → 횡혈식석실분의 단계로 시대별 발전시켜 나갔다. 경주 대릉원 內에 있는 황남대총(皇南大塚, 옛 98호 고분)은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형식의 고분으로 73년 7월에 발굴하였는데 지름 80m, 높이 23m의 고분 둘을 연결시킨 쌍분(雙墳)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신라 17대 내물왕 부부로 추정하고 있는데 내물왕은 재위 46년간 신라의 기틀을 확립한 왕이었고 김씨(金氏) 왕족 시대를 열었다.
즉 남분(南墳)은 내물왕, 북분(北墳)은 내물왕의 부인인 보반(保反)인 것이다. 능을 조성할 때 먼저 남분(南墳)을 만들고 나중에 그 고분의 일부를 파내고 북분(北墳)을 연결하였다. 즉 왕이 왕비보다 먼저 사망한 것이다.
남분(南墳)에서는 환두대도, 금동관, 은제 잔, 상감 팔찌, 유리제품, 갑옷 등 유물이 출토되었고 60세 전, 후의 남자 턱뼈도 나왔어 피장자는 남자로 확인된다. 그리고 주곽에서 순장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15세 전후의 소녀 뼈가 나왔고 말 순장도 발견되었다.
북분에서는 금관, 반지, 부인대(夫人帶)라고 쓰인 허리띠 장식이 나왔으며 갑옷은 출토되지 않았고 피장자는 키 150m의 여자로 추정된다. 부장품과 적석목곽분의 형식을 보면 남분은 4세기 후반~5세기 초반, 북분은 5세기 전반 중엽 이전에 속한다. 3세기 중엽 13대 미추왕(261년 ~ 284년) 이후 23대 법흥왕 사이에는 석씨를 포함하여 10명의 왕이 있었다.
22대 지증왕(500년 ~ 514년)은 재위 3년(502년)에 순장을 금지시켰고 재위 4년에는 국호를 신라로 확정했다.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칭호를 했고 묘호는 지증이라고 했는데 이때부터 신라에 시호법이 사용되었다. 23대 법흥왕(514년 ~ 540년)은 처음으로 중국처럼 연호를 정하고 사용했는데 건원(建元)이였다. 능은 애공사 북쪽 봉우리로 평지에서 산자락으로 매장되었는데 묘제는 횡혈식 석실분(굴식돌방무덤)이고 출토 된 유물은 황금유물이 아닌 토기 류가 주를 이룬다.
황남대총에서 출토 된 금관이 지금까지 신라의 금관 중 가장 아름답다. 금관이 나온 곳은 황남대총을 포함하여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 부부총이다. 금관의 장식은 출자(出字) 형 나무모양에 좌, 우 사슴뿔 모양의 형상을 하고 있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에는 나무가 하늘로 통하는 길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고 유라시아에는 사슴뿔모양의 모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하늘로 인도하는 전령사 역할을 한다. 고구려에서 왕은 금관이 없고 비단 모자를 사용하고 백제왕도 금관이 없고 금꽃 장식을 한 모자를 사용한다. 중국에서는 비단으로 만든 관을 사용한다.
신라 고분만큼 황금 세공품이 많이 나오는 유적도 세계적으로 드물다. 흉노 등 유목 민족의 황금 숭배 사상은 유명하다. 신라금관은 중국식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스키타이로 상징되는 북방 유목 민족들이 사용한 양식인데 로마의 관(冠)을 상당 부분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 1924년 경주 노동동 금령총에서 발굴된 국보인 도기 기마인물상(국보 91호) 명기(明器)는 전형적인 유목민의 차림이다. 말잔 등에 실려 있는 동복(청동솥)도 같은 형태다. 동복은 유목민의 상징적인 유물로 스키타이식과 흉노식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흉노의 동복이 스키타이식과 구별되는 것은 화려한 문양이 있고 손잡이의 형태가 다르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동복은 북한과 중국 길림지역에서 발견되었고 북부중국 초원과 내몽고 오르도스지방, 남부소련, 헝가리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경주고분과 김해의 가야고분인 대성동에서 발견되는 동복은 북방계 흉노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유물이다.
동북의 용도는 유목민 족장들이 사용하든 용기로 제례의식에 사용하는 고기를 삶을 때 쓰는 용기다. 말 탄 기마인물이 말잔등에 동복을 싣고 있는데 그 주인공은 족장의 지위에 있는 실제 피장자의 모습일 수도 있다.
신라 적석목곽분의 주인공들은 반도 서북부를 거쳐 동남진(東南進)을 한 북방기마민족( 스키타이-흉노 계통)으로시베리아-오르도스계의 대형 적석목곽분과 철기, 승석문(繩蓆文) 토기, 금세공기술을 그대로 갖고 남하한 것이다 흉노(匈奴)는 대체로 몽골 고원의 서쪽 알타이 지역, 즉 지금의 중앙아시아와 가까운 곳에 살았다. 알타이 산맥의 그 알타이가 금(金)이란 뜻이다. 마립간(麻立干)이란 말은 여러 부족들의 대표자란 뜻인데 유목민족의 칸(칭기즈칸의 칸)과 같은 어원이다. 이들의 행동반경 안에는 중앙아시아, 러시아, 흑해 연안도 들어 있고 이 지역은 로마 문명권과 겹쳐 있다.
스키타이族은 기원 전 7세기경부터 지금의 이란, 러시아,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를 누볐던 인류역사상 최초의 유목기마 군사 집단이었다. 이들이 만든 기마(騎馬)문화가 동쪽으로 확산되어 흉노, 선비(鮮卑), 투르크, 위구르, 거란, 몽골로 이어지는 북방기마문화의 원류(源流)가 되었다. 스키타이 계통의 문화는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는 흉노에게 전해졌다. 부여 계통의 고구려와 백제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중국의 영향을 일찍부터 받았는반면 스키타이-흉노 계통의 신라는 북방 초원 루트를 통해 들어오는 서방문화, 로마 문화를 많이 수입했을 것이며 신라 금관 등 유물은 스키타이 계통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북방기마민족(스키타이-흉노계통)이 한반도 남쪽에 어떻게 유입 했을까? 고구려, 백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북방기마민족의 유적과 유물이 어찌하여 한반도의 동남단 신라, 가야에서만 나타나고 있는지는 고대사의 오랜 수수께끼였다. 중국 진(晋)나라 학자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을 보면 3세기 후반까지 한반도 남부에는 삼한(三韓)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쪽에 마한 50개국이 있고 동쪽에 진한과 변한 24개 나라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한(三韓) 74개 부족국가를 영도하는 것은 마한의 목지국(目支國)이라고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2세기 중반인 서기 167년에 신라가2만8천명의 대군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반해 진수의 삼국지(三國志)에는 3세기 후반까지도 百濟, 新羅라는 국호는 보이지 않고 마한에서 백제국(伯濟國)이, 변․진한에서 斯사로국(斯盧國)이란 소규모 부족 국가의 이름이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 기록과 달리 한반도 남부에 자리 잡고 있던 삼한(三韓)이 3세기 후반까지 부족국가 연맹체 단계였다는 것이다. 즉 4세기 이후 한반도에서 三韓은 사라지고 백제와 신라, 가야연맹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백제의 급속한 발전 배경에 대해서는 기마 문화에 익숙했던 부여계의 진출과 관련 있어 보인다. 가야는 문헌 기록이 부족하지만 고고학적 발굴 결과 변한의 옛터에서 북방 기마민족風(풍)의 무기류와 마구류가 출토되어 강력한 기마군단을 보유한 정치 집단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낙랑과 대방군이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무너지고(서기 313년 경) 백제 근초고왕이 활발한 정복 전쟁을 펼치자 경상도 지역의 소규모 부족국가들이 위기의식을 느껴 통합이 가속화되었고 특히 신라가 그 중심세력이 되었는 것이다.
내물왕 26년, 즉 서기 381년 신라는 북중국의 유목민족 국가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낸다. 전진(前秦)은 351년 티베트계 저족출신 부건(符健)이 세운 나라로 381년에는 부건의 조카 부견(符堅)이 황제가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전진의 황제 부견(符堅)과 신라 사신 위두(衛頭) 간의 대화가 기록돼 있다. 「부견이 위두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에 海東(해동: 신라)의 형편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을 말함이냐』고 하니, 위두가 대답하기를 『이는 마치 중국의 시대변혁(時代變革)․명호개역(名號改易)과 같은 것이니 지금이 어찌 예와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符堅問 衛頭曰, 卿言海東之事, 與古不同, 何耶, 答曰, 亦猶中國 時代變革 名號改易, 今焉得同]」
이 기록을 보면 내물왕 들어 나라가 크게 발전했음을 알 수 있고 시대변혁(時代變革)․명호개역(名號改易)은 단순히 나라의 체제가 정비된 수준을 넘어선다. 내물왕 이후 석(昔)씨는 신라 역사의 주류에서 사라졌다. 석(昔)씨가 사라지는 것과 위두(衛頭)가 밝힌 시대변혁이라는 문구를 통해 이 시기에 강력한 군사력에다 선진적 국가체계를 경험한 새로운 세력임을 의미 할 수 있다. 위의 기록대로 위두(衛頭)가 신라에 중국의 시대변혁․명호개역과 같은 큰 변화가 이뤄졌다고 답한 것이다. 이 기록의 원래 출처는 중국 역사서인 진서(秦書)이다. 그렇다면 4세기에 일어난 중국의 시대변혁․명호개역은 무엇을 말하는가? 4세기에 흉노(匈奴)와 갈, 강(羌), 저, 선비(鮮卑) 등 다섯 유목민족은 중국 북방을 정복하고 호족(胡族)의 나라 16개를 차례로 세우기 시작했다.이른바 「5胡 16國 시대」다. 이를 두고 훗날 한족(漢族) 역사가들은 「다섯 오랑캐의 폭정 시대」로 규정했지만 당사자인 「5胡」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名號改易」이 이뤄진 「변혁의 시대」인 것이다. 자신들의 전통에 부합되는 정치체제를 갖게 되었고 천대받던 오랑캐에서 한족(漢族)을 지배하는 귀족․장군이 되었으니 시대변혁․명호개역으로 부른 것이다. 위두와 부견의 대화에서 당시 북중국에서는 기마족의 중원(中原) 정복과 그에 따른 정치, 사회적 변화를 「시대변혁․명호개역」으로 표현하며 정당시했음을 알 수 있고 신라에서도 그와 유사한 사건, 즉 기마 족의 정복과 왕위 찬탈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추정 할 수 있다.
중국 진나라 사람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의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과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종합하면 변한과 진한 땅에는 네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첫째는 선사시대부터 농경을 하며 살고 있던 사람들로 묘제로는 지석묘(고인돌)를 사용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출현을 가능케 한 것은 BC 1,000년경부터 시작된 청동기 문화이다. 농경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정착생활로 안정을 찾게 되고 부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서 계급이 발생하여 군장사회가 형성된다. 군장은 부와 권력을 지닌 자를 뜻하며 이 같은 군장사회는 초기국가로 발전하는 과도기적 역할을 했다. 둘째는 BC 221년 진(秦)의 통일로 시황제(始皇帝)의 만리장성, 궁궐 등 노역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변방민족과 연나라 망명객들로 고조선과 마한의 동쪽, 진한에 살았다. 전국시대 7웅 중에서 진(秦)만이 유목국가였고 나머지는 농경국가로 진이 통일한 데는 유목민 특유의 기마전술이 컸다. 셋째는. BC 194년 연나라 망명객 중 위만세력이 고조선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이 고조선의 왕(위만 조선)이 됨에 따라 쫓겨난 준왕세력이 이동해 온 사람들이다. 넷째는 BC 108년 고조선(古朝鮮)이 한 무제에 의하여 망하자 이동해 온 고조선유민(遺民)들이다. 다섯째는 고구려 3대 무신왕(武神王: 무휼)이 가 낙랑군을 멸망시키자 낙랑군 유민 5,000명이 신라에 투항하자 당시 3대 유리왕 14년(38년) 이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변한은 신라1대 박혁거세 즉위 19년(BC 38년)에 나라를 바쳐 항복하였고, 9년 백제 온조왕이 마한을 멸망 및 병합시키자 마한 장수 맹소가 부흥세력과 함께 신라4대 탈해왕 5년(48년)에 투항하였다. 이후 신라는 백제와 본격적으로 영토분쟁을 하였고 이전에는 왜, 낙랑군과 전쟁을 하였다. 한국 고대사의 지배민족은만주를 원류로 하는 부여계통 북방민족의 고구려-백제와 고대 유라시아 초원 지대을 누비는 북기마민족(스키타이-흉노계통)의 고조선-신라-가야의 2가지 부류로 생각할 수 있다. 부여계는 만주 동쪽에 살았고 인종적으로는 퉁구스계이며 순수 유목민이 아니고 수렵과 농업도 함께 했다. 북방기마민족은 알타이 산맥-내몽골(오르도스) 등 북방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기마민족으로 단계적으로 한반도에 유입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