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55대 왕 경애왕릉(景哀王陵)은 경주시 배동 산73-1번지로 서남산의 삼릉 남쪽에 있다. 원형봉토분으로 봉분 높이 4.20m, 봉분 직경 13m이며, 발굴조사는 하지 않았으나 묘제는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 : 굴식돌방무덤)일 것으로 추정된다.
봉분자락에는 아무런 시설이 발견되지 않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경애왕의 시신을 서쪽 대청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시호를 올려 경애라 하고, 남산 해목령(蟹目嶺)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해목령(蟹目嶺)은 남산신성 내 남쪽 서측의 봉우리를 말하며, 그 아래 게의 눈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부연된 명칭으로 높이는 265m이다. 그러나 해목령 (蟹目嶺)주변에서 왕릉급의 고분은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의 능은 조선영조 6년 박씨 일족에 의해 지정된 것이다. 박씨 일족이 이처럼 삼릉과 인접한 곳에 비정한 이유는 그가 신덕왕의 아들이자 경명왕의 동생이기 때문이다. 즉 삼릉을 박씨 왕족의 능이라고 지정할때 같이 지정하였다.
해목령(蟹目嶺)은 경애왕릉에서 떨어져 있어서 맞지 않으며, 해목령(蟹目嶺) 가까이에 있는 지금의 일성왕릉을 경애왕릉으로 보아야 한다는 일부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일성왕릉 위치는 嶺이라기보다는 산사면 말단부에 있다.
신라 55대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 8월 ~ 927년 11월, 3년 3개월)
성은 박씨(朴氏), 이름은 위응(魏膺)이며, 53대 신덕왕(神德王)의 둘째 아들이자 54대 경명왕(景明王)의 동복동생이고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다. 경애왕 재위기간에는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은 잠시 휴전상태에 들어갔고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군사를 보내어 고려를 도왔다. 927년 11월에 포석사(鮑石祠)에서 제사를 지내는 중 그곳을 기습한 후백제의 견훤(甄萱)에게 사로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포석사(鮑石祠), 또는 포석(鮑石)은 길례(吉禮)를 행하는 장소로 나라의 안녕을 비는 행사가 치르는 곳이었고 제사를 행하는 사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노(文努, 538년~606년)를 비롯한 나라의 중요 인물들의 화상이 모셔져 있었다.
1999년 4월 ~ 5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포석정 동남쪽 70m 지점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하였고 그 과정에서 포석(鮑石)이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 몇 점과 기와무지를 확인했다. 이는 포석정이 단순히 유상곡수를 하는 놀이터가 아니라 포석사와 같은 사당이었음을 뜻한다.
문노(文努)는 가야 출신으로 가야 구형왕의 아들인 김무력 장군을 따라 전쟁터에 나아가 백제군을 섬멸하는데 앞장서는 등으로 많은 공을 세웠다.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진평왕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는 실질적인 일등공신이었다. 가야 출신이라는 신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걸출한 실력을 인정받아 화랑의 우두머리인 8대 풍월주와 재상까지 올랐다.
즉위 원년(924년) 9월, 고려 태조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고 10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즉위 2년 10월, 고울부 장군 능문이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태조가 그를 위로하고 타일러서 돌려보냈다. 왜냐하면 그 성이 신라의 서라벌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11월, 후백제 견훤이 그의 조카 진호를 고려에 인질로 보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견훤은 변덕스럽고 거짓말을 많이 하므로 그와 화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태조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3년 4월,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견훤은 고려 사람들이 고의로 죽였다고 생각하고 분개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웅진까지 진군하였다. 태조가 모든 성에 명령하여 방비를 굳게 하고 나가지 않도록 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견훤은 약속을 위반하고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하늘이 반드시 돕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이 진격하여 위풍을 보인다면 견훤은 반드시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태조는 사신에게 “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악이 넘쳐서 자멸하기를 기다릴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4년 봄 정월, 태조가 직접 백제를 공격하자,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를 도왔고 2월, 병부 시랑 장분 등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후당에서는 장분을 검교공부상서로 임명하고, 부사인 병부 낭중 박술홍을 겸어사중승으로, 판관인 창부 원외랑 이충식을 겸시어사로 임명하였다.
3월, 황룡사 탑이 흔들리다가 북쪽으로 기울었다. 태조가 직접 가서 근암성을 격파하였다. 후당 명종이 권지강주사 왕봉규를 회화 대장군으로 삼았다. 4월, 지강주사 왕봉규가 사자 임언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명종이 중흥전에서 그를 접견하고 선물을 주었다. 강주 관하의 돌산 등 네 고을이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9월, 견훤이 고울부(경북 영천)에서 신라 군사를 공격하므로,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장수에게 명령하여 정병 1만 명을 출동시켜 구원하게 하였다. 견훤은 이 구원병이 도착하지 않은 틈을 이용하여, 겨울 11월에 신라 서라벌을 습격하였다.
이 때 왕은 왕비 및 궁녀, 종실들을 데리고 포석사에서 제를 올리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는데 그때 견훤의 군대가 밀어닥쳤다. 왕은 당황하여 왕비와 함께 달아나 도성 남쪽 별궁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견훤의 군대 포위망에 걸리자 살해당할 것을 염려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때가 927년 11월 이였다. 그러나 고려의 사가들은 신라멸망의 당위성을 역설하기 위해 국가의 위태로운 상황에서 음력 11월 겨울날씨에도 불구하고 왕이 춤추며 즐기고 놀았다고 표현하였다.
견훤은 경애왕의 외종제 김부(金傅)를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맡게 하였는데 이가 경순왕(敬順王)이다. 견훤은 왕족 효렴을 비롯하여 재상 영경과 그 외에 종실의 자녀들과 각종 기술자들, 병기, 보배 등을 빼앗아 돌아갔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 경애왕(景哀王)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이 즉위한 동광(同光) 2년 갑신(甲申; 924) 2월 19일에 황룡사(皇龍寺)에서 백좌(百座)를 열어 불경(佛經)을 풀이했다. 겸해서 선승(禪僧) 300명에게 음식을 먹이고 대왕(大王)이 친히 향을 피워 불공(佛供)을 드렸다. 이것이 백좌(百座)를 설립한 선교(禪敎)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왕의 사찰행(寺刹幸)은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을 위한 것이다.
'신라왕릉의 빛과 그림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짧은 치세의 신라 50대 정강왕(定康王)과 그의 능(陵) (2) | 2024.10.06 |
---|---|
신라 마지막 태평성대를 이룩한 49대 헌강왕(憲康王)과 그의 능(陵) (4) | 2024.10.03 |
7세기 중엽 횡혈식석실(굴식돌방무덤)의 경주 배동 삼릉(慶州 拜洞 三陵) (4) | 2024.09.22 |
왜국에서 40년 망명생활을 마치고 왕이 된 일성왕(逸聖王)과 그의 능(陵) (2) | 2024.09.18 |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 온 북방기마민족 후예임을 알려주는 신라 문무대왕비(文武大王碑) (6) | 2024.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