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은 금오봉과 고위봉의 2개의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는 산으로 등산코스 매우 다양하다. 특히 많이 애용하는 코스가 초입의 송림이 아름다워서 배동 삼릉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배동 삼릉(拜洞 三陵)은 남산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기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피장자(被葬者)는 동쪽에 있는 능은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154~184 재위), 중앙에 있는 능은 제53대 신덕왕(神德王, 912~917 재위), 서쪽에 있는 능은 제54대 경명왕(景明王, 917~924 재위)이다. 모두 박씨 왕들이다.
3기의 왕릉은 규모가 비슷한 원형봉토분으로 신덕왕릉(神德王陵)이 궁륭형 횡혈식석실분으로 미루어 볼 때 그리고 신덕왕릉(神德王陵)의 내부구조가 경주 노서동에 있는 3기의 석실분과 충효리고분, 서악리석실분 등과 같은 묘제 형식으로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 중엽에 조성 된 귀족 묘로 추정된다.
현재의 능은 조선 영조 6년에 이르러 박씨 일족이 지정한 것이다. 최근에 조선 왕릉의 혼유석 형태의 상석이 경명왕릉(景明王陵) 남쪽에 나란히 설치되었다.
아달라왕릉(阿達羅王陵)은 봉분 높이 5.2m, 봉분 직경 20.4m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장지와 위치와 관련한 기록은 없다.
신덕왕릉(神德王陵)은 봉분 높이 5.7m, 봉분 직경 20.4m로 1935년과 1963년 7월 19일에 걸쳐 두 번이나 도굴을 당했다. 1963년 도굴 계기로 내부조사를 한 결과 횡혈식석실분(굴식돌방무덤)으로 피장자(被葬者)는 2인이 합장된 것이었다. 내부구조는 할석(割石)으로 쌓은 석실분으로 평면이 정방형에 가깝고 천정은 궁륭형(穹窿形)이었다.
이 능에서 주목되는 점은 북벽과, 동, 서벽 일부에 연속해서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을 칠함으로서 마치 병풍을 둘서 세운 채색된 벽화가 있었다. 입구에서 볼 때 정면인 북쪽 벽면에 6폭, 그리고 그 좌우 동, 서 벽면에 3폭으로 모두 12폭이 채색되었다.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이었다.
신덕왕(神德王) 사망 후 죽성(竹城)에서 장사지냈다. 유물은 도굴로 인해 발견되지 않았다.
경명왕릉(景明王陵)은 봉분 높이 4.5m, 봉분 직경 15.9m로 봉분자락에는 괴석을 쌓은 호석과 괴석의 받침석이 2~3개 확인된다. 경명왕(景明王) 사망 후 황복사 북쪽에서 장사지냈다.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 154년 2월 ~ 184년 3월 재위, 30년 1개월)
성은 박씨(朴氏), 그는 일성의 맏아들이다. 그는 키가 일곱 자였으며 풍채가 훌륭하고 얼굴 모양이 기이하였다. 어머니는 박씨인데 그녀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내례부인(內禮夫人)이고 6대 지마왕의 딸이다. 8촌 사이의 족내혼으로 박씨 왕족의 힘을 규합하려는 세력연합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즉위 원년(154년) 3월, 계원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군무와 정사를 맡겼고 즉위 2년 봄 정월, 왕이 시조 묘에 직접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고 흥선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3년 4월, 계립령(鷄立嶺: 경북 풍기에서 충북 단양으로 통하는 조령 동쪽 20리 지점, 지금의 문경새재 동쪽고개)에 길이 개통되었다.
4년 2월, 감물현(충북 괴산 감물면)과 마산현(충남 보령 남포면) 두 현을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3월, 왕이 장령진에 행차하여 주둔하는 병사들을 위로하고 각각의 군사들에게 군복을 하사하였다. 5년 3월, 죽령(竹嶺:풍기 북쪽고개)이 개통되었고 왜인이 예방해왔고 7년 4월, 폭우로 알천이 넘쳐서 집이 떠내려가고, 금성 북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11년 2월, 서울에 용이 나타났고 12년 10월, 아찬 길선(吉宣)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처형을 두려워하여 백제로 도망갔다. 왕이 글을 보내 그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백제가 응하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는 성을 닫고 수비하며 나오지 않았고 신라 군사는 식량이 떨어져 돌아왔다.
14년 7월, 백제가 서쪽의 두 성을 격파하고, 주민 1천 명을 잡아 갔다. 8월, 일길찬 흥선으로 하여금 군사 2만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게 하고, 또한 왕은 기병 8천을 거느리고 한수로부터 그 곳에 도착하였다. 백제는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를 돌려주고 화친을 요구하였다.
15년 여름 4월, 이찬 계원이 사망하자 흥선을 이찬에 임명하였고 17년 2월, 시조 묘를 중수하였고 10월, 백제가 변경을 약탈하였다. 19년 봄 정월, 구도를 파진찬에 임명하고 구수혜를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20년(서기 173년) 여름 5월, 왜국 여왕 비미호(卑彌乎, 히미코)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왔다. 21년 봄 정월, 흙비가 내렸고 2월, 가뭄이 들어 우물과 샘물이 말랐다.
31년 3월, 아달라왕은 아들 없이 별세하였고 9대 벌휴왕 등극으로 석탈해왕 이후 본격적인 석씨 왕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삼국사기 아달라왕 즉위 20년(서기 173년)에 등장하는 왜국 여왕 비미호(卑彌乎, 히미코)는 일본 사학계에서는 그녀의 존재를 부정하고 대신 신공황후라고 주장하며 『일본서기』에도 관련 기록이 없다. 그러나 『삼국지 위지동이전 倭 편』에 여왕 비미호(卑彌乎)는 등장하며 남편 없이 남동생이 보좌하며 재위 기간 74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고 정초 2년(238년)에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자기 나라에 조공할 것을 요구했다. 비미호(卑彌乎)와 그녀의 후계자 일여 여왕은 약 120년 동안 일본을 통치했다.
일본 역사에서 왕이 여왕인 경우는 비미호와 일여 이외에도 추고, 황극, 효명 등 있었다. 그런데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세운 나라는 신무천황 계통의 종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비미호(卑彌乎)가 왜의 초대 천황(덴노)인 신무(神武) 왕실이 혼란인 틈을 노려 왕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세운 것이다.
그래서 일본 사학계에서는 비미호와 일여 여왕 통치기간을 부정하고 있다. 대신 신공, 응신, 인덕천황 등의 재위 기간을 늘려서 120년 공백을 메웠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천황이 하나의 종족이라고 주장하며, 신격화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황후는 201년부터 269년까지 왜를 통치하면서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다스렸고, 신라를 정벌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자기보다 21살 많은 중애천황한테 시집을 갔다고 하며 269년 100세로 죽었다고 하니 이 무렵이 신라 아달라왕 즉위 19년(서기 173년) 무렵이다.
삼국유사 권제1 제2 기이 상(紀異 上)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4년 정유(丁酉; 157)에 동해(東海) 바닷가에는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조(海藻)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가 나타나더니 연오랑을 등에 업고 일본(日本)으로 가 버렸다.
이것을 본 나라 사람들은, “이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하고 세워서 왕을 삼았다[<일본제기日本帝紀>를 상고해 보면 전후(前後)에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이는 변읍(邊邑)의 조그만 왕(王)이고 참말 왕(王)은 아닐 것이다].
세오녀(細烏女)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바닷가에 나가서 찾아보니 남편이 벗어 놓은 신이 있었다.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그 바위는 또한 세오녀를 업고 마치 연오랑 때와 같이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그녀로 귀비(貴妃)를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에 광채(光彩)가 없었다. 일자(日者)가 왕께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우리나라에 내려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생기는 것입니다”했다.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서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은 말한다.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데 어찌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비단을 주니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을 보고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런 뒤에 해와 달의 정기가 전과 같았다. 이에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수하고 국보(國寶)로 삼으니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한다. 또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한다.」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설화 당시 신라 상황을 살펴보면 아달라왕 재위기간 동안에 문경새재, 충북 괴산 감물면, 충남 보령 남포면, 풍기 까지 영토를 넓게 확장했다. 이러한 과정에 근기국(현재 포항)을 신라에 복속시켰고 이때 나라가 신라에 정복당하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는 일본으로 정치적 망명을 한 것이다.
연오랑(延烏郞) 이름을 풀이하면 “까마귀를 끌어들이는 남자”라는 뜻이다. 까마귀(烏)는 태양의 정기를 세발 달린 까마귀(삼족오)로 형상화시킨 새로 고대부터 태양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그래서 연오랑은 이름이 아니라 소임을 나타내는 직업 명칭이다. 즉 일식 때 까마귀를 잡아서 생초비단에 감싸다가 태양을 향해 날아가도록 풀어주는 소임인 것이다. 이때 세오녀(細烏女)는 까마귀를 감싸는 생초비단 보자기를 짜는 일을 한 것이다.
연오랑 세오녀가 살았던 곳은 포항시 남구 오천읍 세계리(世界里)이다. 마을이름은 세오녀가 짠 비단으로 일월지에 제사를 지냈더니, 그 빛이 고지대인 이곳에 제일 먼저 비쳐 온 세계가 환하게 되었다고 하여 유래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가 나타낸 배경은 박씨 왕조가 아달라왕 시대로 막을 내리고, 석씨 왕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렸다는 것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인데 해와 달의 기운이 사라졌다는 것은 박씨 왕조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제53대 신덕왕(神德王 : 912년 4월 ~ 917년 7월 재위, 5년 3개월)
성은 박씨(朴氏)이며, 이름은 경휘(景暉)이고, 제8대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다. 아버지는 예겸(乂兼)이고 정강왕 때 대아찬을 지냈다. 어머니는 정화부인(貞和夫人)이다. 왕비는 김씨이고 헌강대왕의 딸인 의성왕후(義成王后)이다. 효공왕이 별세하였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후에 승영(昇英)은 경명왕(景明王), 위응(魏膺)은 경애왕(景哀王)이 된다. 이 시대에 신라는 실제로 경주지역을 다스리는 정도였고, 국토의 대부분이 궁예와 견훤의 세력안에 있었다. 즉위5년(서기916) 견훤은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였고 신라는 더 이상 궁예나 견훤의 공격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원년(912년) 5월, 선친을 선성대왕으로 추존하고, 정화 태후, 왕비를 의성왕후라 하고, 아들 승영(昇英)을 왕태자로 삼았다. 이찬 계강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즉위 3년 3월, 궁예가 연호 수덕 만세를 정개로 고쳤다. 이 해가 정개 원년이다.
5년 가을 8월, 견훤이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6년 봄 정월, 금성이 달을 범하였고 7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신덕이라 하고, 죽성에 장사지냈다.
제54대 경명왕(景明王, 917년 7월 ~ 924년 8월 재위, 7년 1개월)
성은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승영(昇英)이고 아버지는 신덕왕,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황후다. 경명왕 때 신라 지방은 궁예와 견훤에게 거의 다 점령당한 상태였다. 원년(916년) 8월, 왕의 아우 이찬 위응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대아찬 유렴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즉위 2년 2월, 일길찬 현승이 모반하다가 처형되었고 6월, 궁예의 부하들의 인심이 갑자기 변하여 태조를 추대하자, 궁예가 도주하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태조가 즉위하여 연호를 새로 정하고, 이 해를 원년으로 하였다. 7월, 상주의 도적 두목 아자개가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3년, 사천왕사의 소상이 잡고 있던 활줄이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에 그려진 개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그 개가 짖는 것 같았다. 상대등 김 성을 각찬, 시중 언옹을 사찬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가 송악군으로 도읍을 옮겼다.
4년 봄 정월, 왕이 태조와 사신을 교환하고 수호 관계를 맺었고 2월, 강주 장군 윤웅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10월, 후백제 군주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 진례로 진군하였다. 왕이 아찬 김율을 태조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게 하니, 견훤이 이 말을 듣고 물러갔다.
5년 봄 정월, 김 율이 왕에게 “제가 지난해 고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려왕이 저에게 묻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으니, 소위 장륙 불상과 9층탑과 성대가 그것이라고 들었다. 불상과 탑은 지금도 있는 줄 알거니와 성대가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구나.’라고 하므로, 제가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성대란 어떠한 보물인가?” 그러나 이를 아는 자가 없었다.
이 때 황룡사에 중이 있었는데 나이 90세가 넘었다. 그가 말하였다. “그 보배로운 허리띠는 진평대왕이 사용하던 것인데, 여러 대를 전해 내려오면서 남쪽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왕이 즉시 창고를 열어 찾게 하였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날을 정하여 치성을 드리고 제사를 지낸 뒤에야 그것이 발견되었다.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되었고 매우 길어서 보통 사람은 맬 수가 없었다.
2월, 말갈의 일부인 달고의 무리가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이 때 태조의 장수 견권이 삭주를 지키고 있다가, 기병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여 대파하니,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태조에게 사신을 통해 편지를 보내어 사례하였다.
6년 봄 정월, 하지성 장군 원봉과 명주 장군 순식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의 귀순을 기념하여 원봉의 본 성을 순주라 하였으며, 순식에게 왕씨 성을 내려 주었다. 이 달에 진보성 장군 홍 술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7년 가을 7월, 왕이 지성 장군 성달과 경산부 장군 양문 등에게 명령하여 태조에게 항복하게 하였다. 왕이 창부 시랑 김낙과 녹사 참군 김유경을 후당에 입조시키고 토산물을 바쳤다. 장종이 정도에 따라 선물을 주었다.
8년 봄 정월,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천주 절도사 왕 봉규가 역시 후당에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6월, 왕이 조산대부 창부시랑 김악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니, 장종이 그에게 조의대부시위위경의 관직을 주었다. 8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경명이라 하고, 황복사 북쪽에 장사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케 하였다.
삼국유사 제 2권 기이 하(紀異 下) 제 2 경명왕(景明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 때인 정명(貞明) 5년 무인(戊寅; 918)에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壁畵) 속의 개가 울었다. 이 때문에 3일 동안 불경을 외어 이를 물리쳤으나 반일(半日)이 지나자 그 개가 또 울었다.
7년 경진(庚辰; 920) 2월에는 황룡사탑(皇龍寺塔) 그림자가 금모사지(今毛舍知)의 집 뜰 안에 한 달 동안이나 거꾸로 서서 비쳐 보였다.
또 10월에 사천왕사(四天王寺)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으며, 벽화 속의 개가 뜰로 달려 나왔다가 다시 벽의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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