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사지(念佛寺址)는 양피사지에서 칠불암 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약 600m 떨어진 곳으로 통일신라시대 1금당 2탑식의 전형적인 사찰이다. 절의 규모는 경주시 남산동 1130번지 일원(면적 : 총 2,175㎡)이고 『삼국유사』 권 제5, 피은(避隱) 제8 「염불사(念佛師)」조에 기록된 절이다.
삼국유사 염불사(念佛師)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산(南山)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避里村)이 있고, 그 마을에 절이 있는데 피리사(避里寺)라 했다. 그 절에 이상한 중이 있었는데 성명은 말하지 않았다. 항상 아미타불을 외어 그 소리가 성(城) 안에까지 들려서 360방(坊) 17만호(萬戶)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소리는 높고 낮음이 없이 낭랑하기 한결같았다. 이로써 그를 이상히 여겨 공경치 않는 이가 없었고, 모두 그를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다. 그가 죽은 뒤에 소상(塑像)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 안에 모시고 그가 본래 살던 피리사(避里寺)를 염불사(念佛寺)로 이름을 고쳤다. 이 절 옆에 또 절이 있는데 이름을 양피사(讓避寺)라 했으니 마을 이름을 따서 얻은 이름이다.」
여기에 나오는 염불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알려진 내용이 없으나 삼국유사 5권 피은(避隱)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를 보면 정토신앙(淨土信仰)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따라서 염불은 관음신앙과 정토신앙이 관련된 것으로 추정 된다.
창건 시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기록을 살펴보며 당(唐) 천보(天寶) 4년(745) 이전으로 추정되므로 최소한 8세기 초에는 창건된 것으로 생각된다. 폐사 시기는 『삼국유사』<皇龍寺九層塔>조와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의 내용을 참조할 때, 고려 고종 25년(1238)의 원의 침입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폐사된 이후 조선시대 마을이 들어서면서 삼층석탑을 무너뜨리고 탑 부재를 석재로 이용하였다.
절 주위를 살펴보면 동편은 칠불암 진입로가 지나가고 서편에는 산자락이 산길을 사이에 두고 접해 있으며, 남편은 밭과 분묘가 분포하고 있다. 북편의 금당이 위치하는 곳에는 사찰과 민가가 들어서 있다. 2003년과 2008년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2009년 1월에 동·서 삼층석탑은 모두 복원되었다. 2003년 발굴조사 이전의 동 삼층석탑은 북쪽으로 넘어진 상태로 일부 부재만 잔존하고 있었고, 서 삼층석탑은 서쪽으로 넘어진 상태로 각 부재가 남아 있었는데 주변으로 와편과 토기편이 산재하고 있었다.
불국사역 앞 삼층석탑은 염불사지의 동 삼층석탑의 탑재를 사용하여 1962년 복원하였고 1층 옥개석만 이거사지의 탑재를 사용했다. 2009년에 이루어진 복원작업에 따라서 원래 자리인 전 이거사지(傳移車寺址)로 옮겨졌다.
동 삼층석탑
2003년에 이루어진 발굴 조사 당시 옥개석편 3매와 하층기단면석 1매만 남아 있었고, 나머지 부재들은 1962년에 불국사역 앞으로 옮겨져서 1963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복원 당시 1층 지붕돌(옥개석)의 파손 정도가 심하여 부근의 이거사지(移車寺址) 석탑의 부재로 대신하였고, 원래의 1층 옥개석은 이설된 석탑의 뒤에 묻었다. 또한 현재의 노반석은 이설 당시에 새로 만들었다.
염불사지(念佛寺址) 동 삼층석탑이거사지(移車寺址) 석탑의 지붕돌(옥개석)
동 삼층석탑은 이층기단에 3층의 탑신부(塔身部)를 갖고 있는 석탑으로 상·하층기단면석에 탱주(撑柱) 각 2개, 지붕돌(옥개석)의 옥개받침 5단 등 전형적인 8세기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석탑이다. 하층기단면석은 8매의 돌로 결구되었는데, 탱주 1주는 별석(別石)으로 만들어졌다. 상층기단면석 역시 8매의 돌로 결구되었는데, 그 형식은 하층기단면석과 같다. 그 위의 상층기단갑석에는 각형2단으로 탑신받침이 있다. 몸돌(탑신석)은 양쪽에 우주(隅柱)가 조각되어 있고, 옥개석은 5단의 옥개받침과 2단 괴임이 있는 갑석과 갑석부연이 탑신석을 받치고 있다.
그러나 1층 옥개석 옥개받침의 최하단이 1층 탑신석의 폭보다 훨씬 넓은 것은 1층 옥개석의 부재가 이거사지에서 옮겨온 데 따른 것이다. 또한 상륜부(相輪部)는 노반석(露盤石)만 남아 있는데 노반석이 작은 이유는 복원 당시 잘못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1963년에 불국사 역 앞으로 이전된 동 삼층석탑의 복원된 전체 높이는 588㎝이었지만, 염불사지로 옮겨서 복원된 석탑의 높이는 583.7㎝이었다. 이는 새로 복원하면서 1층 옥개석과 노반석을 원래 형태에 맞춰서 새롭게 교체하면서 높이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여겨진다.
서 삼층석탑
염불사지(念佛寺址) 서 삼층석탑
서 삼층석탑은 2003년 조사 당시 탑재가 도괴되었으나 하층기단면석 2매, 하층기단갑석 1매, 상층기단면석 3매, 1·2·3층탑신석, 2·3층옥개석이 남아 있었다. 기단면석과 지대석은 1매석으로 처리되었고 각 부재의 크기는 동 삼층석탑과 비슷하여 같은 크기의 쌍탑으로 만들어졌다. 동 삼층석탑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던 사리공을 서 삼층석탑이 3층 탑신석에서 확인 되었는데 방형으로 너비 18㎝, 깊이 10.5㎝이다. 복원된 전체 탑 높이는 545㎝이다.
염불사지 동, 서 삼층석탑은 경주지역 삼층석탑의 시원이었던 감은사지 삼층석탑의 기본구조를 따라 세워진 후대 삼층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동남산에서 현존하는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보리사(배반동 산 66-2)는 비구니 사찰로 『三國史記』에 헌강왕릉(憲康王陵)과 정강왕릉(定康王陵)의 위치가 설명되어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이곳에 8세기 불상인 보물 제136호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보리사는 『三國史記』기록 이전부터 있었으며, 9세기에도 사찰은 존속해 있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보리사는 여러 차례에 걸친 공사로 창건 당시의 가람 형태를 알 수 없다.
보리사 대웅전보리사 삼성각과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36호)
보리사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장소에 위치하고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경주 남산에서 신체, 광배, 대좌 모두를 갖추고 있는 불상으로 통일신라 중기를 대표하고 있다. 불상의 크기는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 대좌 높이 1.22m이다. 석재(石材)는 광배석 1매, 신체석 1매, 대좌 4매(지대석 1매, 상대복련좌 1매, 간주 1매, 하대앙련좌 1매)로 총 6매의 별석(別石)으로 되어 있다.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36호)은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 대좌 높이 1.22m이다.
석조여래좌상의 육계(肉髻)는 이중(二重)으로 표현된 나발(螺髮)이 덮여있는데 머리와 얼굴 경계의 윤곽이 매우 뚜렷하다. 적당한 살이 오른 얼굴은 다소곳이 아래를 향한 눈과 미소를 머금은 입 등과 함께 평온하면서도 조화를 이루어 신비로운 표정을 한 부처의 모습이다. 비대하지 않은 단정한 신체는 목에 삼도가 있으며 수인은 항마촉진인을 하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서 옷 주름은 층 단(層 段)을 이루며 신체 각 부위를 감싸고 있다.
나룻배 모양의 광배(光背)는 화려하고 아름다운데 이중주형(二重舟形)으로 만들어 졌다. 광배의 내부 문양은 연꽃, 보상화(寶相華) 등 화문(花紋)과 화염문(火焰紋) 그리고 화불(化佛) 등으로 꾸며져 있다. 본존의 신체에 따라 굵은 선이 이중으로 돌려졌는데 선과 함께 큼직한 보상화 등 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선의 외부에는 불꽃 모양의 화염문, 내부에는 6구의 화불과 화문이 장식되었고 광배 상단 끝에도 하나의 화불이 표현되어 있다. 광배의 뒤 모습을 보면 상단이 반파(半破)되었음 알 수 있다. 최근 보존처리하여 복원되었다.
화불(化佛)과 화불사이에는 연꽃과 당초가 새겨져 있고 본존의 신체에 따라 굵은 선이 이중으로 돌려졌는데 선과 함께 큼직한 보상화 등 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대좌는 지대석 위에 복판연화대좌(複辦蓮華臺座)를 놓았고 그 위는 팔각받침을 3단으로 마련한 후 우주(隅柱)가 각출된 팔간 간주(竿住)를 세운 후 앙련(仰蓮)의 상대석(上臺石)을 얹어 놓은 구조이다. 이 상대석 역시 아래에서 간주와 만나는 부분에는 2단의 팔각 받침석을 마련했는데, 앙련(仰蓮)의 연화문은 단판(單瓣)이면서 중층(重層)으로 각출시켜 넉넉하게 마련하였다.
석가여래좌상은 수인을 보면 항마촉지인으로 석가여래로 불 수 있는데 광배 뒷면에 약사여래를 조성하였기 아미타여래로도 볼 수도 있다. 사방불을 조성한 바위를 보면 약사여래 맞은편에 아미타여래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당시 석공만이 알 수 있으리.
마애약사여래좌상(磨崖藥師如來坐像)
마애약사여래좌상은 석조여래좌상의 광배 뒷면에 얕은 돋새김(양각)과 선각으로 조각되어 있는 불상으로 마멸이 심하여 얼굴 등의 세부 모습은 확인하기 어렵다. 불상 높이 1.3m로서 연화문이 이중(二重)으로 된 앙련연화대좌 위에 여래상이 결가부좌하고 있다.
머리에 육계가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늘어뜨려져 있고, 목에는 삼도가 있으며 얼굴은 둥글다. 얇은 법의는 신체를 드러내 보여주며, 수인은 왼손에 둥근 약합(藥盒)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가슴 높이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광배는 석조여래좌상과 거의 동일하게 조각했으나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렵다. 외곽의 화염문은 어렴풋이 보인다.
정리되지 않은 석재가 모퉁이에 쌓여있다.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 유형문화재 제193호)
보리사 주차장에 있는 안내표지판마애불좌상 찾아가는 길. 마애불좌상은 보리사에서 남쪽 미륵골 기슭을 따라 50m 가량 오르면 동쪽을 향해 절벽을 이루는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마애불좌상은 보리사에서 남쪽 미륵골 기슭을 따라 50m 가량 오르면 동쪽을 향해 절벽을 이루는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바위는 넓적한 반원형으로 높이와 폭은 약 2.4m이다. 바위를 감실형(龕室形)으로 광배를 움푹하게 파서 부조(浮彫)했는데 신체 높이는 1.2m이며 어깨 너비는 60㎝이다. 바로 앞에는 제단석이 놓여 있다.
보리사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 유형문화재 제193호)마애불좌상 바로 앞에는 제단석이 놓여 있다.
머리는 낮은 육계로 표현되었고 두 귀는 옷깃에 닿을 듯 내려왔고 삼도가 있는 목은 짧다. 살이 올라 퍼진 얼굴은 사각에 가깝고 궁(弓)形 눈썹에 가는 눈, 넓적한 코와 꽉 다문 입술 등의 표정 속에는 친근한 표정을 느낄 수 있다. 법의는 통견인데 수인은 옷 주름이 덮고 있어 알 수 없으며 결가부좌한 하체 역시 상체에서 내려온 옷 주름이 덮여 있다. 대좌는 3잎의 중판연화가 앙련(仰蓮)인 상태로 표현되어 있다.
조성연대는 석가여래좌상 보다 후대로 보고 있으며 통일신라후기 불상으로 추정된다.
마애불좌상을 조성한 바위뒤 끝부분에는 홈이 파여져 있는데 조성 당시 추가 공사를 하다가 중단된 것 같다.마애불좌상에서 바라 본 들판
경주남산 탑골 신인사지(神印寺址, 배반동 산69번지)에는 보물 제201호로 지정된 마애조상군이 있다. 또는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이라고도 부른다.바로 옆에는 옥룡암(玉龍庵)이 위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학자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가 이 부근에서 神印寺라 새겨져 있는 기와명문을 발견했다고 하여 신인사지로 전해지고 있다. 마애조상군 남면에서 많은 기와조각과 무늬막새가 발견되어 이곳에 목조건축물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옥룡암 앞 안내표지판. 탑골은 길이가 약 2km로서 동남산에서는 두번째로 긴 계곡이다. 탑골마을에서 개울을 거슬러 약 40m쯤 들어가면 옥룡암이라는 절이 있고 절 뒤에 부처바위와 삼층석탑이 서 있다.옥룡암 입구. 옥룡암은 1924년 박일정 스님에 의해서 창건됐다고 한다. 옥룡암이라고 불린 것은 옛날 이곳에 푸른색 옥이 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은 암자의 명칭이 불무사(佛無寺)로 변경됐지만 옥룡암으로 더 알려져 있다.
신인종의 창시자인 명랑법사가 당나라 수군을 물리치기 위해 사천왕사에서 오색비단을 이용하여 절 모양을 만들고 풀로써 동, 서, 남, 북, 중앙의 오방신장을 만들어 신인비법인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한 것처럼 사천왕사지를 바라보고 있는 이곳 신인사에서도 바위에 사방불(四方佛) 즉 마애조상군을 조성하고 창건하여 삼한통일을 위해 문두루비법을 또한 하였으리라 추정된다. 또한 바위에 새겨진 조각수법을 보아 제작연대도 7세기중엽으로 판단된다.
마애조상군, 부처바위와 삼층석탑
마애조상군은 바위의 동, 서, 남, 북 사방(四方)에 여래(부처)를 새겨 조성하였기 때문에 사방불암(四方佛巖)이라고 하고 이곳 마을에서는 부처바위라고 부른다. 신라시대 사방불암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내용도 다양하다. 1988년 마애불상군에 대한 탁본 및 실측조사를 하여 여래상, 보살상, 비천상, 탑상 등 35구가 새겨져 있음이 확인되었고 2006년 10월 9월에 바위 동면에 비천상과 스님상이 추가로 발견되어 총 37구가 새겨져 있다. 만다라(蔓茶羅)적인 조각이 회화적으로 묘사 된 한 폭의 불화를 보는 느낌인데 밀교의 불경 내용을 요약한 삽도그림 변상도(變相圖)인 것 같다.
부처바위에 새겨진 상(像)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옷자락이 손을 가리고 있는 것, 연꽃잎이 넓게 표현된 것, 신라시대 불교 초기의 모습인 천진난만하고 친근감 있는 모습, 아미타여래의 눈이 하현달 모양으로 새겨져 화사한 웃음을 나타낸 것, 상현좌를 한 것, 금강역사가 금강저를 들고 무장한 것 등 이다.
사방불암(四方佛巖), 부처바위의북면
부처바위 북측 입면도
부처바위 중 가장 높은 높이 9m, 폭 6m의 북면 바위에는 여래 1구, 탑 2구, 비천(飛天) 2구, 사자 2구 등 7구가 새겨져 있다. 가장 눈에 띤 것은 탑으로 9층탑과 7층탑의 목탑이다. 9층탑은 기단부(基壇部)가 이중기단으로 높이 2m, 너비 2.m이고 탑신부(塔身部)의1층 탑신에는 출입문이, 2층부터는 창문이 2개씩 있다. 옥신(지붕)의 층이 올라갈수록 추녀의 넓이와 옥신의 높이는 조금씩 축소되어 3m 높이에서 삼각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옥신의 추녀 끝마다 풍경이 달려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높이가 2m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등 있다.
부처바위 북면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7층탑도 층수만 다를 뿐 모양이나 조각수법은 동탑과 유사하다. 신라 때 새겨진 이 탑들을 통하여 몽고군의 침입 때 불타 없어진 황룡사 9층 목탑(645)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9층탑과 7층탑 사이 위쪽 중앙에는 연화대좌 위에 좌상을 하고 있는 석가여래가 있다. 두 손은 무릎 위에 선정인을 표시한 듯 옷자락에 두 손이 가려져 있기 때문에 정확한 수인은 알 수 없다. 둥근 두광은 햇살 같은 연꽃을 새겨서 밝고 생기가 넘치는 것 같다. 연화대좌는 꽃잎이 네 개로 되어있는데 두 개의 꽃잎은 날개처럼 뻗어 있어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느낌을 준다.
9층목탑과 석가여래9층목탑의 풍경석가여래와 천개7층목탑과 훔사자
여래 머리 위에는 부처의 권위를 표현코자 햇빛을 가려주는 천개가 있는데 보통 절 법당 안에서 볼 수 있다. 마름모를 한 줄로 투각한 넓은 천개 위에 두 겹으로 연꽃잎을 장식하였고, 밑으로는 헝겊으로 접은 수실을 늘인 다음 포장을 늘여 놓았다. 이 또한 바위를 통해 신라시대 천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9층 목탑과 7층 목탑 앞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있는데불국정토를 지키는 성스러운 짐승이다. 9층탑 앞 사자는 입을 벌리고 오른쪽 발은 힘차게 땅을 딛고 왼발은 들어 올렸으며, 꼬리는 깃발처럼 세 갈래로 나뉘어 날리고 있다. 목에 털이 없어 암사자로 보인다. 7층탑 앞사자는 입을 다물고 오른발을 들고 있으며, 꼬리가 아주 복잡하다. 목에 긴 털이 많아 숫사자로 보인다. 입을 벌린 사자는 ‘아사자’라 하고 입을 다문 사자는 ‘훔사자’라 하는데, 닫힌 세계와 열린 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음과 양을 합친 모든 세계를 부처님이 다스린다는 뜻이다.
9층목탑 아래 아사자7층목탑 아래 훔사자
천개 위로 비천(飛天)두 구가 날고 있는데 아름다운 천녀들이 하늘을 날면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꽃을 뿌리는 모습이다. 마멸이 심하여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렵다.
천개 위로 비천(飛天) 두 구가 날고 있는데 마멸이 심하여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렵다
사방불암(四方佛巖), 부처바위서면
부처바위 서측 입면도
높이 6m, 폭 6m의 서면 바위에는 여래 1구, 비천 2구, 수목 2구 등 5구가 새겨져 있다. 연화대좌 위에 약사여래가 앉아 있고 오른쪽에 神樹가 늘어져 있고 왼쪽에는 대나무로 추정되는 나무가 있다. 약사여래는 네모에 가까운 갸름한 머리에 자그마한 육계가 솟아 있고, 귀는 어깨에 닿아 있으며, 가는 눈은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길고 입을 꼭 다물고 있는데 근엄한 표정이다. 머리에 비해서 조금 작은 몸체는 반듯하고 두 무릎은 연화대좌 위에 평행으로 놓여 있고 두 손은 선정인 같은데 옷자락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다. 두광은 연주문으로 둥글게 연꽃을 새기고 그 가장자리에 구슬을 늘어뜨려 있고 두광 주위에는 화연문모양으로 불길이 새겨져 있어 화려하다.
약사여래
여래 위에 있는 비천상은 피리를 불면서 날아가고 있고 여래 왼쪽의 비천상은 마멸이 심하여 식별이 어렵다.
약사여래 위의 비천상으로 마멸이 심하다.약사여래 왼쪽의 비천상으로 식별이 안된다.
사방불암(四方佛巖), 부처바위의동면
부처바위 동측 입면도2006년 10월 9월에 바위 동면에 비천상과 스님상이 추가로 발견된 위치
북쪽으로부터 첫 번째 바위 면에는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아미타여래가 있다. 머리 위에 나지막한 육계가 솟아있고, 눈은 하현달 모양으로 새겨져 화사한 웃음을 나타내고 있다. 둥근 두광에는 연꽃이 이중으로 새겨져 있고 두광의 외곽은 연주문(連珠紋)으로 둘러져 있다. 두 팔은 경사를 이루면서 연결되어 삼각형에 가까운 몸체를 이루고 있다. 풍성한 두 무릎은 연화대좌 위에 편안하게 놓여 있다. 여래 왼쪽에는 관세음보살로 추정되는 보살이 연꽃에 앉아 있는데 양 어깨에는 천의가 덮여져 있고 두 손을 들어 가슴 앞에 합장하고 얼굴은 여래를 향하고 있다. 또한 둥근 두광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첫번째 바위의 삼존불과 가릉빈가, 비천아미타여래와 관세음보살
보살 아래에는 네모난 방석에 앉은 스님이 향로를 받들고 여래를 향하여 염불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여래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로 추정되나 마멸이 심하여 그 모습을 전혀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삼존불인 경우 중앙의 주불 중심으로 좌우 협시보살이나 또는 주불에 따라 좌우에 여래를 배치한다. 여기서는 왼쪽에 관세음보살로 추정되는 보살이 배치됨에 따라 오른쪽은 대세지보살로 여겨진다.
여래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로 추정되나 마멸이 심하여 그 모습을 전혀 알 수 없다.네모난 방석에 앉은 스님이 향로를 받들고 여래를 향하여 염불하는 모습
이 외에 여래 둘레와 위에는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하고 있다는 상상의 새 가릉빈가 1구,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천상 6구가 새겨져 있는데 꽃을 뿌리며 혹은 꽃 접시를 들고 혹은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찬미하는 모습들이다. 비천들의 옷자락은 춤을 추며 나부끼니 같이 생동감이 있다.
아미타여래 오른쪽 위의 가릉빈가와 비천관세음보살 위쪽의 비천 3구왼쪽 끝부분의 비천
두 번째 바위 면에는 보리수와 사라수로 보이는 두 그루의 나무아래 결가부좌로 앉아 명상에 잠겨 앉아있는 스님이 있고, 왼쪽에도 스님이 있는데 육안으로는 식별이 안 된다. 그리고 맨 위쪽에도 비천상이 있는데 이 또한 육안으로는 식별이 안 된다.
보리수와 사라수로 보이는 두 그루의 나무아래 결가부좌로 앉아 명상에 잠겨 앉아있는 스님2006년 10월 9월에 발견 된 스님상이나 식별이 안된다.
세 번째 바위 면은 높이 4m 가량 되는 기둥바위인데 동쪽을 바라보며 삼지창을 든 신장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금강역사상으로 추정되나 마멸이 심하여 식별이 안 된다. 초기에는 맞은편에도 돌기둥이 있어 금강역사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초기 옛날에는 이곳이 절의 입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지창을 든 금강역사이나 식별이 안된다.
사방불암(四方佛巖), 부처바위남면
부처바위 남측 입면도마애조상군, 부처바위 남면에서 기와조각과 무늬막새가 발견되어 이곳에 목조건축물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높이 2.72m, 폭 6.06m의 남면 바위는 가운데가 갈라져서 두 개의 벽면으로 병풍처럼 놓여 있는데 여래 1구, 보살 2구, 스님 2구, 수목 2구 등 7구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 바위 앞에는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왼쪽 바위에는 큰 연화대좌 위에 여래가 결가부좌 하여앉아 있고 좌우에 협시보살이 앉아 있다. 옷자락이 무릎 아래로 내려와 대좌를 덮고 있는상현좌를 하고 있다. 얼굴은 마멸이 심하여 알 수가 없다. 둥근 두광에는 햇살처럼 연꽃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과 수목인 보리수나무보리수나무
좌우 협시 보살들은 연꽃송이에 앉아 두 손을 마주 합장하고 있다. 오른쪽 보살과 달리 왼쪽 보살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깨가 여래 쪽으로 기울여진 자세다. 두 보살의 얼굴은 마멸이 심하여 그 방향을 알 수 없는데 보살들의 두광이 갸름하게 타원형으로 되어 있어 얼굴을 여래 쪽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존불 왼쪽에는 보리수나무가 있다.
오른쪽 바위 중앙 아랫부분에 얕은 감실을 파고 그 안에 좌상이 새겨져 있는 스님이 있는데 선정에 든 것 같다. 얼굴은 갸름하고 몸체는 작은 편이며 무릎은 넓어 편안해 보인다.
좌상을 하여 선정에 든 스님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오른쪽 바위에 새겨져 있는 스님 상을 가리고 1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한눈에 허리가 매우 잘록함을 느낄 수 있고 마애상과는 시대적 차이가 뚜렷하다.대석(臺石)과 신체석(身體石) 2개로 이루어졌는데 전체 길이는 2m, 방형 대석의 높이 25㎝, 길이 1.3m이다. 대석에는 발만 새기고 발목 이상은 한 돌로 신체석에 조각하였다. 제작연대는 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석조여래입상
얼굴은 윤곽이 거의 안보일 정도로 파손되었고 광배 상단 역시 유실되었으나, 신체는 거의 완전하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수인은 좌상에만 나타나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데 왼손은 배 위에 오른손은 허벅지 앞에 가지런히 놓아두게 표현하였다. 어깨는 넓고 가슴은 풍성하고 허리는 가늘다. 가는 허리에서 곡선을 그리며 풍성한 엉덩이를 이룩하고 기둥 같은 두 다리로 선은 이어진다. 두 팔에 새겨진 옷주름들도 근육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데 얼굴, 가슴, 엉덩이, 허리는 여성적이고 팔은 남성적이다.
통견인 법의는 볼륨감 있는 신체의 특성을 그대로 살려줄 정도로 얇은 주름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지역 마을에서는 여래의 왼손이 배에 대고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안산불(安産佛)로 신앙되어 왔고 여기서 기도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하여 많은 여인들이 찾았다고 한다.
석조여래입상에서 정면으로 12m 밖에 석등(石燈)을 세웠던 흔적이 자연바위 위에 남아있다. 크기는 230㎝, 너비 185㎝, 높이 60㎝, 간공 지름 15㎝, 간공 깊이 12㎝이다. 석등 바로 동남쪽에 삼층석탑이 서있고 삼층석탑과 삼존불 사이에 큰 바위들이 가로로 놓여 있는데, 그 중간 바위벽면에 명상에 잠겨 있는 스님이 남쪽으로 앉아 합장하고 있다.
자연바위 위에 석등(石燈)을 세웠던 흔적명상에 잠겨 있는 스님
삼층석탑은 단층기단 위에 서 있는 석탑인데, 옥개받침이 3단으로 되어 있고 새긴 솜씨도 둔박하여 통일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한다. 낙수면 모서리에 추녀마루가 새겨져있고 그 끝머리에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여기에 풍경을 달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높이가 4.5m밖에 안 되는 작은 탑이나 높은 언덕 위에 솟아 있으므로 멀리서도 보인다. 이에 이곳 동네사람들은 이 계곡을 탑골이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옥룡암(玉龍庵)과 민족 저항시인이육사
이육사 문학관(경북 안동) 자료에 의하면 이육사가 1936년(32세)과 1942년(38세)에 경주 옥룡암에 찾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옥룡암은 1924년 박일정 스님에 의해서 창건됐다고 한다. 옥룡암이라고 불린 것은 옛날 이곳에 푸른색 옥이 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은 암자의 명칭이 불무사(佛無寺)로 변경됐지만 옥룡암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육사는 1936년에 8월에 오랜 감옥 생활로 쇠약해진 몸을 옥룡암에서 잠시 휴양하였고 이때 8월 4일에 신석초에게 엽서를 썼는데 7월 20일 서울을 떠나 대구를 거쳐 29일 포항에 도착하여 머물다가 8월에 옥룡암으로 온 것이다. 이육사에게 옥룡암을 소개 한 이는 고암 박곤복(경주 건천읍 화천리 출신)으로 당시 욕룡암 주지 스님과 잘 아는 사이였다. 고암 박곤복은 육사보다 8살이나 많았지만 육사를 각별하게 대했다. 1942년 7월에 폐질환으로 이육사는 다시 옥룡암을 찾아 요양을 하였다. 그는 옥룡암에 3개월 정도 머물 예정이었으나 백형 이원기의 타계로 서둘러 귀향하였다.
2004년 7월에 옥룡암에서 「옥룡암에서 신석초에게」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육사의 미발표 시조 2편이 발견되었다. 이육사와 신석초는 형제처럼 가까이 지낸 이로 알려져 있다.
경주 동남산의 오산골과 국사골 사이에는 “탑말” 또는 “탑촌(塔村)” 이라고 불리는 마을에 형식을 달리하는 삼층석탑이 동·서에 나란히 서 있다. 동 삼층석탑은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고 서 삼층석탑은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새겨져 있는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다. 탑의 조성 시기는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옛날부터 오산골 어귀 일대를 피리(避里)또는 피촌(避村)으로 불렀는데 일제 강점기 때부터 행정구역 이름이 남산리로 되는 까닭에 이들 탑을 남산리(남산동) 쌍탑으로 부르게 되었다. 또한 절터이름도 남산사터로 알려져 있다.
이곳 동, 서 삼층석탑 동쪽에 연못이 하나 있는데 마을사람들은 양기못이라고 부른다. 옛 기록에는 양피못((讓避堤)이라고 적혀있다. 이에 삼국유사 피은(避隱) 염불사(念佛師)에 의거하여 절터 이름은 양피사지로 추정된다. 그리고 『삼국유사』 사금갑에 나오는 서출지가 이곳 양피못인데 일제 강점기 때 이요당이 있는 연못이 서출지로 바뀌어졌다.
왼쪽이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동 삼층석탑이고 오른쪽은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새겨져 있는 서 삼층석탑
삼국유사 4권 피은(避隱) 제8 염불사(念佛師)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산(南山)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避里村)이 있고, 그 마을에 절이 있는데 피리사(避里寺)라 했다. 그 절에 이상한 중이 있었는데 성명은 말하지 않았다. 항상 아미타불을 외어 그 소리가 성(城) 안에까지 들려서 360방(坊) 17만호(萬戶)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소리는 높고 낮음이 없이 낭랑하기 한결같았다. 이로써 그를 이상히 여겨 공경치 않는 이가 없었고, 모두 그를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다. 그가 죽은 뒤에 소상(塑像)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 안에 모시고 그가 본래 살던 피리사(避里寺)를 염불사(念佛寺)로 이름을 고쳤다. 이 절 옆에 또 절이 있는데 이름을 양피사(讓避寺)라 했으니 마을 이름을 따서 얻은 이름이다.」
피리촌(避里村)은 ‘세상을 피하여 숨어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양피(讓避)’와 같은 뜻이다. 또한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 사금갑(射琴匣)에 나오는‘피촌(避村)’도 모두 같은 마을을 가리킨다.
민장사(敏藏寺)는 삼구유사 제3권 탑상(塔像) 敏藏寺에 등장하는 사찰로 그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745년 이전에 창건된 사찰로 관음신앙과 관련된 곳으로 판단된다. 상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금리(盃金里)의 가난한 여자 보개(寶開)에게 장춘(長春)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바다의 장삿꾼을 따라다녔는데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민장사(敏藏寺 - 이 절은 민장각간(敏藏角干)이 집을 내놓아 절로 삼은 것이다.)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7일 동안 정성을 다하여 기도드렸더니 장춘이 갑자기 돌아왔다.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서 회오리 바람을 만나 배가 부서져 동료들은 모두 죽음을 면하지 못했습니다만, 저는 널판 쪽을 타고 오(吳)나라 해변에 가서 닿았습니다. 오나라 사람들이 저를 데려다가 글에서 농사일을 짓게 했습니다. 고향에서 온 듯한 이상한 스님이 은근이 위로하고 저를 데리고 동행하는데, 앞에 깊은 개천이 있어서 스님은 저를 겨드랑이에 끼고 뛰었습니다. 정신이 희미한 가운데 우리 말소리와 우는 소리가 들리므로 살펴보니 벌써 여기 와 있었습니다. 초저녁 때(佯時) 오나라를 떠났는데 여기에 이른 것은 겨우 술시 초(戌初))였습니다.」 고 하였다.
곧 천보(天寶) 4년 을유(乙酉 : 745년) 4월 8일이었다. 경덕왕(景德王)이 이 소식을 듣고 절에 밭을 주고 또 재물과 폐백을 바쳤다.』
삼국유사의 두 기록을 살펴볼 때, 염불사의 창건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염불 스님의 입적 이후, 그 초상을 민장사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염불사와 민장사는 동 시기에 존재했으며, 천보 4년에 민장사 관음보살의 기적과 관련된 기록으로도 염불사의 창건연대는 745년 이전으로 추정되므로, 최소한 8세기 초 ~ 중엽 경에 염불사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민장사의 경우 민장각간이 자택을 희사하여 사찰로 바뀐 점을 고려한다면 염불사는 8세기 초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현재 염불사지로 추정되는 곳은 오산골 어귀 일대로 양피사지로부터 남쪽으로 약 600m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경주시 남산동 1130번지 일원(면적 : 총 2,175㎡)에 해당되며 2003년과 2008년 2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의 2탑 1금당의 가람배치가 확인되었다. 동·서 삼층석탑은 일찍이 무너졌지만 부재가 양호하게 남아 있어서 발굴조사 후 2007년 6월 13일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09년 1월 16일에 동, 서 석탑 복원작업을 완료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염불에 대하여 알려진 내용은 없으나 삼국유사 5권 피은(避隱)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를 보면 정토신앙(淨土信仰)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따라서 염불은 관음신앙과 정토신앙이 관련된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동, 서 석탑사이에 있는 석등연화하대석과 기타 석재들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는동 삼층석탑
동 삼층석탑은 이형탑(異型塔) 범주로 분류될 수 있는데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는 탑이다. 노반(露盤)까지 남아 있어 그 원형(原型)을 확인할 수 있다.
탑의 토대가 되는 기단부의 바닥돌인 지대석(地臺石)을 넓게 2중으로 깔려있고, 지대석일부는 지하에 묻히고 지상에는 15㎝가량 노출되었다. 그 위에 기단부(基壇部)는 잘 다듬은 돌 여덟 개를 한 단처럼 짜 맞추어 상하 각 네 개 씩 배치하였다. 기단부와 탑신부의 몸돌사이에는 3단의 괴임석을 다듬었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탑신석)과 지붕돌(옥개석)이 각각 돌 하나로 세 개를 사용하여 3층을 만들었다. 1층 지붕돌은 5단의 옥개받침을 두었고, 낙수면은 7단의 계단형으로 되어있다. 지붕돌의 처마선 모퉁이부분은 앙곡(仰曲)을 표현하지 않고 일직선의 수평을 두었다. 각 모퉁이에는 풍탁(風鐸)을 매어 달기 위한 구멍이 상하로 뚫려 있다. 2층 지붕돌은 5단의 옥개받침, 낙수면은 6단, 3층 지붕돌은 4단의옥개받침, 낙수면은 4단을 두어 체감율을 크게 하였다.
상륜부(相輪部)의 노반석 윗면은 2단의 역계단 모양으로 다듬었고, 노반석 중앙에는 찰주를 세우기 위한 구멍이 관통되어 있는데 3층 지붕돌까지 뚫려 있다. 찰주구멍은 노반 중간을 지나면서 점차 병목같이 좁아져 있다. 지붕돌 낙수면에 나타난 계단형 모형은 전탑(塼塔)에서 그 유사성(類似性)을 찾아 볼 수 있는데 경주지역에서 유사한 석탑은 서악동(西岳洞) 3층 석탑이 있다. 단지 서악동 3층 석탑의 경우 1층 탑신에는 문비형(門扉形)으로 새겨 마련하고 문비입구 좌우에 인왕상(仁王像)을 1구(軀)씩 배치한 점만 차이가 있다.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새긴서 삼층석탑
서 삼층석탑은 2층 기단의 면에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새겨져 있고 상륜부(相輪部)는 노반석(露盤石)만 남아 있는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신장(神將)이라 하면 수미산 위에 사는 모든 신들을 통틀어 말하며, 불법(佛法)을 옹호하고 불경(佛經)을 수지 독송(受持讀誦)하는 사람들을 외호하는 신으로 종류로는 금강역사(인왕상), 팔부신장(팔부중상), 십이신장(십이지신상) 등이 있다. 우리나라 신장신앙의 기원은 삼국 초기 불교가 전래될 때 함께 시작되었다고 추측되고 현존하는 예를 볼 때는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부터 유물에서 나타나고 있다. 팔부신중과 십이지신상이 탑에 조각으로 나타난 것은 8세기 이후다.
팔부신중(八部神衆)은 법을 수호하는 8종의 신으로서 석가모니 10대 제자와 함께 부처의 설법을 호위하는 역할을 하는데 무장을 한 모습이 많고 손에 들고 있는 지물들도 갖가지다. 원래는 고대인도 신들로 악마나 구신에 해당하지만, 석가에게 교화된 뒤 불법을 수호하는 선신으로 재구성되었다. 종류는 천, 용, 야차, 아수라, 건달바, 긴나라, 가루라, 마후라가 등 이다.
왼쪽부터 팔부신중(八部神衆) 중 아수라와 건달바왼쪽부터 팔부신중(八部神衆) 중 천과 가루라
기단부(基壇部)는 지대석과 2층 기단으로 되어있다. 1층 기단은 2단 괴임이 있는 갑석이 2개로 조립되었는데, 지대석과 면석은 한 돌로 조성되어 있다. 모퉁이에 우주(隅柱), 가운데에 탱주 2조가 모각되어 있다. 2층 기단은 모퉁이에는 우주(隅柱), 중앙 탱주사이의 면석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2단 괴임이 있는 갑석과 갑석부연이 탑신석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개로 구성되어 있고 몸돌(탑신석)과 지붕돌(옥개석)이 각각 돌 하나로 세 개를 사용하여 3층을 만들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지붕돌의 옥개받침은 각 층마다 5단(段)으로 되어있다.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하고,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 전각에 이르러 경쾌한 반전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 처마면 밑 양쪽 모서리에는 풍탁을 매어달 수 있도록 구멍이 있다. 상륜부(相輪部)의 노반석은 1개로 만들었으며 외형상 동탑의 것과 거의 비슷하다. 기단부 면석에 팔부신중을 새긴 삼층석탑은 경주지역에서 창림사지 3층 석탑이 있다.
경주 동남산 불곡(佛谷, 부처골)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보물 제198호)은 자연바위를 파서 감실을 만든 후 조성한 불상으로 흔히 감실부처 또는 할매부처라고 부른다. 이 감실부처의 조성연대는 7세기(약 1300~1400년 전)로 감실불(龕室佛)의 원조이자 석굴사원의 시초이고 선덕여왕 재위기간(632 ~ 647)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남천로를 따라 도지동 탑골 마애불상군을 지나면 만나는 이정표
부처골(佛谷)은 남산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하는 감실여래좌상으로 인해 계곡명이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원래 3곳의 절터가 있었다고 하나 감실여래좌상이 있는 절터를 제외한 나머지 2곳은 흔적이 거의 없다.
부처골 감실부처님 만나러 가는 길
감실 부처는 자연바위를 파서 조성한 불상으로 그 감실 좌, 우와 앞뒤로 큰 바위인 화강암군(花崗巖群)이 계속 연결되어 있다. 주위에 흩어져 있는 기와편과 바위의 가구(架構)흔적으로 불상 앞과 뒤의 2곳에 약간의 공간에 당시 목조전실(木造前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감실부처의 본 절터는 이곳의 약 30m 아래 오른편 길목 어귀에 있다. 지형을 이용해 쌓은 ㄱ자형 축대로 2단(段)으로 확인되었고 밑 축대의 높이는 1.2m, 위 축대 높이 2m, 길이는 12m이다.
감실부처의 본 절터로 감실부처의 약 30m 아래 오른편 길목 어귀에 있다. 지형을 이용해 쌓은 ㄱ자형 축대로 2단(段)으로 확인되었고 밑 축대의 높이는 1.2m, 위 축대 높이 2m, 길이는 12m이다.
불상이 조성(造成)된 바위는 자연암반 중 제일 두툼한 바위를 이용하여 높이 2.3m, 너비 3.5m, 깊이 0.9m의 굴을 파서 감실(龕室)을 마련하고 내부에 불상을 조성했다. 조각 수법으로는 불상 얼굴은 높은 부조(浮彫)로 하고 신체와 대좌는 낮은 부조로 1.5m 높이로 조성하였다. 앞으로 다소곳이 숙여진 신체는 그 표정이 조용한 주변과 어우러져 명상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주위에 흩어져 있는 기와편과 바위의 가구(架構)흔적으로 불상 앞과 뒤의 2곳에 약간의 공간에 당시 목조전실(木造前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두에서 머리에 두건을 귀까지 덮고 쓴 것으로 보면 보살이 되고 소발(素髮)의 머리로 귀를 덮어 어깨 위로 흐르는 것으로 보면 여래의 모습이다. 둥근 얼굴에 내려감은 눈, 얌전한 입술에 깊이 판 입가 등으로 부드럽고 우아하고 내면적인 미소이나 한편으로 엄숙함과 깊은 명상에 잠긴 듯한 정적인 분위기도 연출되고 있다.
신라시대 불교가 초기에 전파 될 때 대부분 불상은 천진난만하고 친근감 있는 평민의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보는 이에 따라 해석이 다양하다. 신라화랑의 미소년 모습, 한국 여인, 자애로운 어머니, 할머니 모습 등으로 보여 지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없으며 각이 진 어깨는 넓게 결가부좌한 무릎과 함께 안정된 구도를 이루고 있다. 법의는 통견(通肩)이며 앞가슴은 사각형으로 표현되었고, 무릎을 덮은 옷 주름은 상현좌(裳懸座)를 이루고 있다. 두 손은 모아서 소매 속에 넣고 배 앞에 대고 있어 수인 형태는 파악되지 않으나 선정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릎은 낮고 수평적이며 오른발이 유난히 크다. 법의와 대좌 및 주위에 붉은 색 흔적이 있어 조성 당시 채색했을 가능성도 있다.
감실불상은 정남(正南)에서 30。서쪽으로 향해 앉아 있어 동짓날 아침 해가 솟아오르면 붉은 햇빛이 부처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고 있다.
감실부처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일 때가 동짓날 오전 중에 보는 것이 가장 잘 보이는데 특히 오전 10시 ~ 11시경 햇빛이 부처님 얼굴에 비칠 때의 모습은 자비로운 표정의 동안을 볼 수가 있다.
1986年 여름 어느 날 「용왕(龍王)이 찾아온 길(용왕(龍王)の來た道」이라는 책을 쓰는 장곡천(長谷川)라는 일본인이 감실불상(龕室佛像)을 찾아 왔다. 이유는 감실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이 동짓날 해 뜨는 방향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였다.옛날부터 일본 사람들은 설날보다 동짓날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왜냐하면 낮이 자꾸 짧아져가다가 동짓날부터 낮이 조금씩 길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짓날 해 뜨는 방향으로 서 있는 신사(神社)와 절이 많다고 한다. 확인 해 본 결과 감실불상은 정남(正南)에서 30。서쪽으로 향해 앉아 있어 동짓날 아침 해가 솟아오르면 붉은 햇빛이 부처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고 있다. 그는 장항리사지(獐項里寺止) 대좌(臺座)와 골굴암 불상이 동짓날 해 뜨는 방향으로 앉아 있다고 한다. 또한 문무대왕암(文武王陵)도 동짓날 해 뜨는 방향에 문무대왕을 모신 것일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마애여래좌상의 조성에 정치적 배경을 살펴보면 신라 성골왕실에서는 왕즉불 사상을 지배자의 권위를 신성화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덕만공주의 성골 여왕 왕위계승에 대한 염려와 반발을 차단위한 방편으로 진평왕 말년에 마치 하늘이 덕만공주를 장래의 왕으로 인정했음을 나타내는 신기한 표적처럼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당시 신라에서는 석가모니 이전에 출현했다는 소위 과거칠불의 가람 터가 신라 땅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보통의 남성 부처님상과는 다르게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듯한 한국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있다. 고고한 기품을 갖추고도 인자함과 넉넉함이 보이는 30~40대 초반 여인의 모습인 것이다.
감실 부처는 자연바위를 파서 조성한 불상으로 그 감실 좌, 우와 앞뒤로 큰 바위인 화강암군(花崗巖群)이 계속 연결되어 있다.
감실부처는 삼화령 석조미륵여래삼존상(미륵삼존불), 윤을곡 삼존불과 함께 고신라를 대표하는 화랑형 애기미륵으로 부른다. 또한 동짓날 해 뜨는 방향 위치와 고부조의 조각 , 채색여부, 부처와 보살 여부 등 다양한 수수께끼와 신비로움을 현재 남겨 놓고 있다.
열암곡(列岩谷, 새갓골) 마애불상(磨崖佛像,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산119번지)은 2007년 5월 22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근처 석불좌상 복원을 위해 주변을 조사하다가 발견되었다. 석불좌상의 축대 아래쪽에서 축대 상부로 출입하던 당시의 동선(動線)이 불분명하여 이를 조사하기 위해 축대 중심으로 주변을 면밀히 살피다가 발견한 것이다.
새갓골주차장에서 약 700~800m를 소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면 마애불상과 석불좌상을 만날수있다.
당시 석불좌상에서 남동쪽으로 약 30m 떨어져 있으며, 30°정도 경사진 산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면을 바닥으로 향한 채 엎어져 있었고 왼쪽 다리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흙에 덮인 상태였던 것을 한 달 동안 흙을 파냈다. 마애불상이 발견되기 전 이곳은 잡목들이 많이 우거지고 등산로에서 떨어진 경사진 곳으로 사람들의 접근이 없었다.
마애불상 발견 당시 모습
학계에서는 마애불상 얼굴이 풍화된 흔적이 거의 없어 마애불상이 제작 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지진 등 천재지변으로 현 위치에서 앞으로 그대로 넘어졌던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상태에서 바로 세웠을 때 1,300년 전 당시 마애불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보호각이 마애불상을 둘러싸고 있다
마애불상이 위치한 곳은 산 사면과 능선에 노두(露頭)가 발달되어 있으며, 이러한 노두에서 풍화되어 떨어져 나온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너덜겅을 이루고 있다. 다행스럽게 넘어졌을 때 돌출되어 있는 마애불상 머리카락(나발)이 돌에 먼저 닿으면서 손상이 없었고 불상의 허벅지 부분과 머리 부분만 암반과 괴석(塊石)에 닿아 마애불상을 지탱하고 있다. 돌과 얼굴과의 거리는 5cm이다.
마애불상은 화강암(약 250×190×620㎝, 무게 약 80톤)의 한 면을 고부조(高浮彫)한 것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460㎝, 발아래 연화대좌가 100㎝로, 전체 높이가 560㎝에 이르는 대형 마애불이다.
육계(肉髻)가 높고 민머리[소발(素髮)]이며, 타원형의 얼굴에는 오뚝하게 솟은 코와 아래로 내리뜬 길고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도톰하고 부드럽게 처리된 입술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어깨는 넓고, 가슴은 펴고 있어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아래로 내려올수록 옷 주름 간격이 넓어져 9단을 형성하면서 발목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두발은 발끝이 밖으로 향하게 벌리고 있으며, 연화대좌는 5장의 앙련(仰蓮)을 얕게 조각하였다.
스케치한 마애불상
특히 이 마애불상에서 주목할 것은 세 가지가 이다. 한 가지는 귀가 발제선(髮際線: 머리털이 난 끝선)에서 어깨에 이를 정도로 매우 크며, 평면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또 한 가지는 불상의 수인(手印)으로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이라 하여 한 손바닥으로 밖으로 해서 어깨높이까지 올리고, 다른 손바닥은 아래로 늘어뜨려 손바닥이 보이게 하는 수인이다. 그런데 여기 마애불상은 왼쪽 손등을 바깥으로 하여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서 가슴 위에 얹었으며, 오른손 역시 손등이 밖으로 향하고 엄지손가락을 안으로 감싼 채 네 손가락을 가지런히 하복부에 대고 있는 특이한 형식의 수인이다. 마지막은 마애불상이 약 4등신(等身)으로 몸에 비하여 머리 부분이 크게 표현되어 있어 예불하는 사람이 마애불을 우러러 볼 때의 시각적인 효과를 고려한 것이다. 열암곡 마애불은 8세기 후반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삼화령 삼존불, 배리 삼존불, 석굴암 본존불로 이어지는 신라 불상의 큰 흐름을 이어가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하루속히 1,300년 전 신라 원형의 모습을 간직한 마애불상을 온전히 볼 수 있는 날을 기다려본다.
석굴암 본존불을 연상케 하는 열암곡(列岩谷) 석불좌상(石佛坐像) 열암곡석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3호)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경주시와 함께 보수·정비계획에 따라 2007년 4월부터 발굴조사와, 정비 및 복원을 마친 결과, 2009년 1월 29일 높이 4m, 남향(南向)으로 정좌한 장대한 모습으로 갖추었다. 본래 열암곡 석불좌상은 8~9세기경 통일신라시대에 상대, 중대, 하대를 갖춘 3단 대좌 위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조선시대 전기까지 유지되어 오다가 이후 누군가에 의해 파괴되었다. 불상은 도괴되어 불두(佛頭)는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졌으며 광배(光背)는 불상 뒤편으로 넘어져 크게 파손되었고 중대석(中臺石)은 결실되고 없으며 상대석도 깨어져 일부분이 없었고 하대석은 부분적으로 파손된 상태였다.
복원 전 초기 모습정비 및 복원 전 모습
2005년 10월 9일 우연히 남산을 답사하던 한 시민에 의해 불두가 극적으로 발견된 후, 이를 계기로 발굴조사, 정비 및 복원이 시작 되었다. 또한 2005년 11월 20일 상대석 일부분도 시민이 발견하였다. 석불좌상의 불두, 깨진 광배 및 하대석 편(片)들에 대한 접합 복원 그리고 대좌 부재 중 유실된 중대석(中臺石)을 신재(新材)로 만들어 재현하였다.
열암곡 &nbsp; 석불좌상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13 호 )
대좌는 지대석(地臺石)과 하대석(下臺石)이 한 몸돌로 되어 있는 3단의 팔각 연화대좌(蓮花臺座)이다. 떨어져 나간 불두는 보존처리 후 불신(佛身)에 접합하고 10여 조각으로 깨진 광배는 구조 보강 작업을 거쳐 완전하게 접합하였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아우르는 거신광(擧身光)으로서 연화문(蓮華文), 화불(化佛)과 불꽃무늬(火焰文) 새김 등으로 하였고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였으며 몸체의 양감과 자연스럽게 늘어뜨려진 법의 차림새 및 조각수법 등 통일신라시대 전성기 양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모습이다.
열암곡은 경주 남산의 고위봉(해발 494m)과 봉화대봉(해발 476m), 천왕지봉(해발 433m)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능선들에 의해 형성된 여러 골짜기 중 하나이다. 이 중에서 백운암으로 향하는 백운계가 본류이며, 백운계 오른편으로 열암곡, 양조암곡, 심수곡이라는 세 개의 골짜기가 연결되어 있다.
1990년 중반 문화유산답사가 유행하였고 모 출판사의 경주문화유적 안내책 표지에 장엄한 감은사지 삼층석탑으로 장식하였다. 이로 인해 감은사지와 추령고개 넘어 동해구(東海口)로 가는 왕의 길은 경주문화유산답사 방문객에게는 필수 방문코스가 되었다. 감은사지는 해발 240m의 나지막한 연대산(蓮臺山)에서 서남쪽을 향해 뻗은 지맥(支脈)의 용당산(龍堂山)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대종천변(大鐘川邊)의 평지보다 9m정도 높은 지점에 있다. 그리고 절터가 위치한 마을은 속칭 탑곡(塔谷) 또는 탑동네로 부른다.
또한 풍수지리측면에서 살펴보면 대종천 하구에서 육지 쪽을 바라보면 마치 용이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으로 대종천(大鐘川) 양옆의 용당리, 봉길리 일대 산들이 용의 이빨에 해당되고 감은사지 삼층석탑 2기는 용의 이빨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기 위한 어금니 또는 송곳니에 해당되니 신라 서라벌로 침입하려는 왜구를 막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종천은 양북면 장항리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감은사지를 지나 동해로 흘러가는 하천이다. 예전에는 봄이면 이곳 동해구에서 어린 뱀장어와 은어가 바다에서 대종천으로 올라왔었다. 대종천의 유래는 1238년(고려 고종 25)에 몽골군의 약탈로 황룡사 9층목탑 등이 완전히 불타 없어질 때, 몽골군이 49만근의 장항리 절터의 대종을 가져가려 배에 싣고 대종천에 띄우자 폭풍우가 불어 가라앉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실제로 대종천과 관련된 조선시대 기록을 찾기 어렵다. 하천 이름이 처음으로 나오는 『대동지지』, 『동여도』, 『대동여지도』에는 동해천(東海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해천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동해면에 있는 내라는 뜻이며, 일제강점기 시대에 들어 이 하천에 전해지는 전설을 따서 대종천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하루속히 대종천을 원래 이름인 동해천으로 정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동해천을 대종천으로 바꾼 것은 식민사관의 일환으로 실행된 식민사학의 타율성론(반도사관), 지정학적으로 반도국가인 한국 역사는 대륙과 해양세력, 즉 중국과 일본에 의하여 좌지우지되었다는 사학으로 우리나라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친일잔재청산이 곧 일제 식민사관과 식민사학이다.
감은사지의 창건은 신라 30대 문무대왕이 왜구의 상륙지점인 동해구에 부처의 힘을 빌러 왜구를 막겠다는 뜻으로 국찰을 착공하였고 사찰이름은 진국사(鎭國寺)로 불렸으나 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재위21년 56세에 세상을 떠났다. 진국은 진호국가의 준말로 왜구를 물리치려는 의미인 욕진왜병(欲鎭倭兵)의 뜻과 잘 맞는다.
이후 신라 31대 그의 아들 신문왕이 682년에 절을 완공하여 感恩寺(은혜를 느끼는 절, 또는 은혜에 감사하는 절)로 개명하였고 사명을 고친 이유는 대왕의 별세 후 동해구 바다에 장사 지냈기에 대왕의 은혜에 감축(感祝)하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또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부왕의 명복을 비는 효심의 발로로 생각된다.
감은사지 선창장으로 신문왕이 감은사지에 오기 위해 서라벌에서 수레를 타고 출발하여 추령고개를 넘어 기림사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배를 타고 이곳까지 왔었다. 당시에는 대종천의 수위가 지금 보다 1m10cm 높았고 배를 이용하였다.
감은사지 관련 역사 문헌을 들여다보면 삼국유사 만파식적조(萬波息笛條) 기록에는 제31대(第31代) 신문대왕(神文大王)의 휘(諱)는 정명(政明)이며 성(姓)은 김씨(金氏)로서 개요 원년(開耀 元年) 신사(辛巳) 七月七日에 즉위(卽位)하였고 아버지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하여 동해변(東海邊)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創建)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만파식적조하(萬波息笛條下)의 주(註)에 인용(引用)되어 있는 감은사 사중기(感恩寺 寺中記)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고 하여 이 사찰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붕어(崩御)하여 해룡(海龍)이 되었는데,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하여 개요開耀 二年(唐 高宗 年號, A.D.682)에 공사를 마쳤다. 금당 밑의 섬돌을 파고 동쪽으로 향하도록 하나의 구멍을 내었으니 이 구멍으로 용이 금당으로 들어와 서리게 하였다. 대개 왕이 내린 유조(遺詔)로써 뼈를 묻은 곳을 「大王岩」이라 하였고, 절의 이름을 「感恩寺」라 하였다. 뒤에 용의 현형을 본 곳을 「利見臺」 라 이름 지었다』
또한 왕력조(王曆條)에는 제30대 문무왕이 신유년(辛酉年, A.D. 661)에 즉위하여 20년간 다스렸으며, 능(陵)은 감은사 앞 東海 中에 있다고 적혀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 문무왕 21년조(文武王21年條)에는 가을 7월1일 왕이 죽자 시호를 문무라 하고 군신(群臣)이 유언에 따라 동해구(東海口)의 대석(大石)위에 장사하였으며, 속전(俗傳)에는 왕이 변하여 용이 되었다하니, 이에 그 돌을 가리켜 대왕암(大王岩)이라 한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혜공왕(惠恭王) 12년(A.D 777)과 경문왕(景文王 4년(A.D 864)에는 각각 한 차례씩 왕이 직접 감은사로 행차하여 동해를 바라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외에 성덕대왕 신종에 보면, 역관(役官)의 직명에 해당하는 검교감은사사(檢校感恩寺使)라는 명문이 있다.
조선 초기 예종(睿宗) 때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는 감은촌(感恩村) 혹은 감은리(感恩里라는 지명이 언급되어 있어서 이때에는 이미 감은사가 폐사(廢寺)되었던지, 아주 미미한 상태로 간신히 그 명맥만 유지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중기 성종(成宗) 때 편찬 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불우조(佛宇條)에는 ‘감은사 부동오십리(感恩寺 府東五十里)’라는 기록이 있고 임진왜란 이후 경주부(慶州府)에서 간행 된 동경잡기(東京雜記) 불우조(佛宇條)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이때까지는 어떤 형태이든 감은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정조초(正祖初)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의하면 당시에 폐사(廢寺)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 감은사가 반드시 폐사(廢寺)되었다기보다는 국가시책에 영향을 받아 지명화(地名化)한 기록으로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며, 존재의 미미함에 비추어 중요시하지 않은 까닭으로 불우(佛宇)로만 남겼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고대(古代)의 가람배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된 것은 탑(塔)이었다. 탑이 금당보다 높은 격에 있다는 것은 기단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지금까지 조사한 유적에서는 탑기단이 금당 기단보다 한 층씩 높게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같은 가람에서 금당이 단층기단(單層基壇)이면 탑은 이중기단(二重基壇)이고, 금당이 이중기단(二重基壇)이면 탑은 삼중기단(三重基壇)인 것이다.
초기(初期) 사찰(寺刹에서는 부처님의 사리(舍利)가 봉안되어 있던 탑이 예배의 주 대상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부처의 형상이 금당으로 옮겨지고 나서는 탑의 규모가 차츰 작아지고 양식도 약화되는 반면, 부처를 안치한 금당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웅장하고 커진 것으로 보인다. 감은사는 통일직후에 가람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초기에서 중기로 들어가는 과도기에 해당하므로 아직은 탑이 건물에 비하여 크게 쇠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감은사지 배치도
우리나라 고대 사원의 가람배치(伽藍配置) 형식은 남쪽으로부터 중문(中門), 탑(塔), 금당(金堂), 강당(講堂)의 순서로 남북 일직선상에 나란히 배치하는 단탑식 가람(單塔式 伽藍)과 금당 전면(金堂 前面)에 탑을 양쪽으로 배치하는 쌍탑식 가람(雙塔式 伽藍)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탑을 중심으로 3면에 금당을 배치하는 일탑삼금당식 가람(一塔三金堂式 伽藍, 분황사, 황룡사)이라는 특수한 형식도 있다. 또한, 미륵사지처럼 중문과 탑, 금당을 하나의 구역으로 하여 일원(一院)을 구획하고, 이렇게 구획된 3개소의 원을 횡으로 병렬한 삼원식 가람(三院式 伽藍)이라고 하는 매우 독특한 가람배치도 있다.
감은사의 가람배치는 금당 이탑(金堂 二塔)의 쌍탑식으로서 통일신라시대에 경주지방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던 가람배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文武王 11년(A.D.671)에 창건된 망덕사(望德寺)와 同王 19년(A.D.679)에 창건된 사천왕사(四天王寺)가 그 始原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이후에는 불국사, 천군리절터 등이 대표적인 유적에 속한다. 통일신라 초기에 세워진 망덕사와 사천왕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木造 雙塔이 세워졌던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그 이후에 재료적으로 변형이 나타난 첫 번째 石造 雙塔이 바로 감은사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기단부와 탑신부 등 각 부분이 한 개의 통돌이 아니라 수십 개에 이르는 부분 석재로 조립되었는데 모두 82점의 각종 석재로 이루어져 있어 목조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상‧하층기단 각 면에 우주와 탱주를 배치하고 탑신 모서리에 우주를 조각한 것과 옥개받침을 층급으로 표현하고 옥개 낙수면은 층급이 없는 경사를 이루고 있는 점, 전각에서 반전이 뚜렷한 점 등 목조건축양식을 모방한 것이다.
석탑의 재질은 화산재가 쌓여서 만들어진 응회암이고 二重基壇 밖에 탑구(塔區)를 돌려 三重基壇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여기서 塔區를 제외한 이중기단은 감은사 창건 이후의 한국 석탑에 있어서 하나의 규범(規範)을 이루는 전형(典型)을 보여주고 있다. 지표(地表)에서 노반(露盤)까지의 높이는 9.85m인데, 노반 위의 상륜뷰(相輪部)는 없어지고 3.49m 높이의 철제 찰주(鐵製 擦柱)만 남아 있다. 찰주의 높이까지 합하면(전체 높이 13m) 국내의 현존하는 탑 중에서 가장 큰 석탑이다.
감은사지 동 삼층석탑감은사지 서 삼층석탑
금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기단은 2중 기단으로 되어 있고 초석 아래에는 특이한 석조유구(石造遺構)가 있어 건물바닥 밑에 일정한 높이의 공간을 두기 위하여 마련된 것으로 다른 건물에서 보기 드문 구조이다. 이것은 문무왕이 화한 동해 大龍이 금당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하였다는 寺中記의 내용과 일치한다.
금당터 초석 아래 석조유구(石造遺構)의 공간은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준비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상징적인 龍穴이자 건축적으로 공기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일종의 환기장치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금당터 초석 아래의 특이한 석조유구(石造遺構)의 공간은 《三國遺事》에 인용된 寺中記의 「排金堂砌下東向開一穴, 乃龍之入寺旋統之備」에서 金堂砌下(금당의 섬돌 아래)에 東으로 향한 구멍을 한군데 열어 둠으로써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준비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상징적인 龍穴이자 건축적으로 공기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일종의 환기장치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금당이 이중기단으로 구성된 건물터를 살펴보면 고구려 지역에서는 평양 청암리 폐사지가 있으며, 백제 지역에서는 부소산성의 건물터와 절터, 금성산의 절터, 정림사터, 미륵사 금당터 등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신라 지역에서는 황룡사 금당터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주목할 것은 2점의 태극무늬 장대석으로 한 점은 1959년도 1차 발굴조사 시, 금당지 기단 동남모서리 전면에서 발견된 것이고, 다른 한 점은 1979~1980년도에 걸쳐 이루어진 2차 발굴조사 시, 곽외 남측 석축 앞 연못에서 출토된 것으로 용도는 “內部 佛壇 밑 周圍에 깔아 받친 地臺石”으로 추정하는 견해와 금당의 용혈입구 구성 등에 사용된 석조부재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이견대의 명칭이 『주역』의 비룡재천(飛龍在天) 이견대인(利見大人)에서 취해졌던 것처럼, 감은사지 출토 장대석의 태극무늬 역시 『주역』 에서 취해진 것으로 그 배경이 학계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태극무늬가 새겨진 장대석
중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 3칸에 모두 문이 달려 있고 문과 연결되는 계단이 3칸 전 후면에 모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문 앞 낭떠러지에는 중문으로 이어지는 큼직한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강당은 정면 8칸, 측면 4칸 건물일 것으로 추정되고 강당 정면을 8칸의 등 간격으로 분할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가람에서 강당에 흔히 사용된 기둥배치 방식으로 후대에는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바뀐다.
강당좌우의 건물배치는 각각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는 경우와 회랑을 배치하여 연결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감은사지 강당은 좌우에는 별도의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였다가 후대에 회랑형 건물로 바뀌었음을 확인되었으며 강당 좌우에 독립된 건물을 배치한 예는 황룡사터와 황룡사서편 폐사지에서 각각 확인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강당 양쪽에 독립된 건물이 배치되었다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회랑으로 연결되는 것인지, 아니면 가람의 평면이 정방형이나 정방형에 가까운 평면일 때는 독립된 건물이 배치되고, 남북으로 긴 장방형 평면일 때는 회랑으로 연결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회랑은 동‧서‧남‧북 회랑이 모두 접속되어 있었으며, 익랑(翼廊)이 금당의 양쪽에 마련되어 있다. 즉 회랑안쪽 중심에 위치한 금당 양쪽에는 翼廊이 있다. 회랑(廻廊)은 남회랑, 동회랑, 서회랑, 동익랑, 서익랑 등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伽藍 南北中心線을 기준으로 東西로 나누었을 때, 각각 하나의 기단으로 처리된 2개소의 회랑으로 大別된다. 즉, 동회랑을 비롯하여 중문 동쪽의 동남회랑, 금당 동쪽의 동익랑이 하나의 통합된 기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동쪽이 「F」자를 180도 회전한 모양이고 서쪽은 「F」자의 아래위를 뒤집어 놓은 모양이 되어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남회랑은 중문 동‧서쪽으로 각각 10칸씩, 모두 20칸의 도리칸으로 되어 있으며, 동회랑과 서회랑은 남회랑과 접속되는 칸을 포함하여 각각 20칸의 도리칸인데, 南端으로부터 12칸째 도리칸에서 금당 좌우의 동‧서익랑이 직각으로 연결되어 각각 7칸의 도리칸으로 되어 있다. 翼廊은 금당 좌우에서 동회랑과 서회랑에 직각으로 이어지는 동서 방향으로 길게 놓인 회랑을 말하며, 일부에서는 中廻廊이라고도 한다.
감은사지를 답사를 하면 반드시 탑마을(동네) 뒷산인 용당산(龍堂山)에서 이견대까지 답사를 하여야 감은사지 답사가 마무리가 된다. 가는 길은 마을 뒤편에 난 소로를 따라 20분 정도 가면 용당산(龍堂山)동편 끝자락을 맞이하게 되는데 여기서 문무대왕릉을 바라다보면 그 옛날 신문왕의 마음을 살펴 볼 수가 있다.
탑마을에 세워진 이견대 길안내 이정표마을 뒤편에 난 소로를 따라 20분 정도 가면 용당산(龍堂山) 동편 끝자락을 맞이하게 되는데 여기서 문무대왕릉을 바라다보면 그 옛날 신문왕의 마음을 살펴 볼 수가 있다.이곳 마을에서는 용당산(龍堂山) 동편 끝자락을 뜸북재로 부른다.
공업도시 울산에는 옛 부터 군사적으로 전략요충지로써 조선시대의 성곽유적인 경상좌도수군절제사영성과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성(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城)이 있다. 특히 왜와 거리상으로 가까운 지역으로, 고려 말·조선 초 이후 지속된 왜구의 침탈에 대비하여 해안 지방의 철저한 방어선이 필요했다. 이곳 개운포성지 남쪽으로는 외황강 하류를 접하고 서북에서 동남으로 흘러 동해로 들어간다. 이런 입지 조건이 일찍부터 수군이 주둔할 수 있게 했고 조선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과 경상좌도 수군 절제사영(慶尙左道水軍節制使營)의 진·영성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개운포성지 표지석과 우측에 보이는 환경처리시설 굴뚝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태종 7년의 최초 기록을 통해 보면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수군과 관련된 기지가 이곳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1425)에 개운포에 만호진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세조(世祖) 5년, 1459년에 좌수영이 개운포로 이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개운포성은 용도와 목적, 규모의 변화를 여러 차례 겪으면서 몇 번의 증·개축과 보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최초 축조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의 영성(營城)으로 사용된 시기는 조선 전기 세종 5년(1459)부터 선조 25년(1592)까지 이며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자기들은 개운포성의 사용시기인 15세기 초∼17세기에 제작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기록상의 성 운용시기와 부합된다.
개운포성지 남쪽 성벽
온산만 처용암 옆을 오가는 뱃길은 천 년 전 신라 헌강왕의 눈길이 머문 곳이고, 조선초기에는 지금으로 치면 해군사령부(개운포영성)의 군함이 정박하던 곳이다. 개운포 8경의 하나인 전함홍기(戰艦紅旗)로 도열한 군함의 붉은 깃발이 아름답고 하여 붙여졌다.
오늘날 개운포성터는 황량하고 쓸쓸하지 못해 마치 폐허처럼 변해 있다. 지난 강 건너편에 온산 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섰고 마을 뒤에는 울산시 환경처리시설이 있어 뿜어대는 악취로 숨쉬기조차 곤란하다. 성안 주민들은 지금 두 세 가구만 남아 있고 외지로 떠났다. 부근의 하개마을과 염전은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석유화학단지 개발로 없어졌고, 선수마을을 비롯한 세죽, 성외 등의 마을도 1990년대 중반 이후 다운동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다.
현재 개운포성을 돌아보면 성안 대밭과 남문 터 좌우 긴 석축만이 옛 성터임을 말해준다. 남문 터를 지나 들어가 북문 터까지 이어지는 S자형의 길은 본래 성안 길이 아니고 고압선 전신주 설치를 위해 한전 측이 넓힌 길이다. 예스런 멋은 없지만 이 길로 북문 터 가까이 언덕배기를 올라가면 성안마을의 옛 정취는 느껴볼 수 있다. 그러나 성벽 주변과 성 내부는 밭농사로 인해 경관과 성체 훼손이 심하다. 하루속히 시에서 매입하여 복원이 아니더라도 단정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 밖에서 외성을 따라 돌아보면 전체 윤곽을 짐작할 수 있다.
개운포성지 남쪽 성벽 주변
임진왜란 이후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이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으로 옮겨가고 그 장소에는 효종(1656년) 때 전선소(戰船所)가 설치되었다. 당시 학성공원 아래 있던 전선창이 옮겨왔다. 전선창은 군선을 건조하는 시설을 뜻하고 일명 ‘선소(船所)’라고 하였다. 성안 마을 웃각단 아래각단 등이 철거되기 전 ‘선수마을’이라고도 불리었다. ‘선수’는 ‘선소’에서 전이된 발음이다. 군사 전략거점에서 지원병참시설로 그 기능을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선창도 1895년(고종 32) 수군 해산 때 문 닫게 되었다.
개운포성은 강변에 솟은 야산의 골짜기를 감싸며 구릉부를 따라 쌓은 포곡식(包谷式)으로 둘레는 1,270m 면적은 102,919㎡ 정도이다. 2003년과 2005년 두 차례의 발굴 조사 결과 북문지, 동문지, 서문지, 4곳의 성벽, 남쪽과 북쪽에 해자가 확인되었다. 성벽은 돌로 쌓았으며 바깥 쪽에 해자[도랑]를 둘렀다. 돌로 쌓은 성벽은 일정한 간격으로 큰 돌덩이를 세워 구조적으로 안정되게 하였는데, 이러한 축조 방법은 울산 경상좌도병영성, 언양읍성 등 울산 지역의 성에서는 흔히 보이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어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남쪽 성벽과 해자
성벽 관련 주요 시설물로는 체성, 문지, 치성, 옹성, 수로 시설, 해자 등이 있고 건물지도 조사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성벽의 최대 너비는 4.0~4.7m, 잔존 최대 높이는 2.4m 정도다. 동문지의 경우 1회 중축한 것이 확인되었다. 만호진성이 수영성으로 바뀌면서 중축된 것으로 보인다. 성문지 주변에 기와편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상부에 누각이 있었을 것이다. 성벽 축조는 기초 부분을 판 다음 3~4단의 할석으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기단석을 눕혀서 쌓았다. 기단석 끝에서 20㎝ 정도 물려서 대석으로 세워쌓기를 하고 2단은 눕혀서 쌓았다. 내벽은 작은 할석으로 다지고 상부에는 흙을 여러 겹 쌓았다.
성벽 주변과 성 내부는 밭농사로 인해 경관과 성체 훼손이 심하다. 하루속히 시에서 매입하여 복원이 아니더라도 단정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운포성의 문은 동·서·남·북 4개의 문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출입을 위한 문은 동문과 북문으로 확인되었다. 동문은 성지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한다. 구조는 외측에 반원형의 옹성이 협축 방식으로 축조되어 있고 문지의 내측에는 확돌 2개가 입구부를 사이에 두고 대칭되게 확인되었다. 옹성은 남쪽 체성의 기단석에 잇대어 쌓은 형태이고 축조방법은 체성과 동일하다. 옹성의 면석은 체성의 면석에 비해 큰 편이다.
동문지 방향의 성벽동문지 방향의 성벽 흔적
해자는 남쪽, 북쪽을 비롯하여 성벽 전체를 둘러싸고 설치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남문지)해자는 체성과의 이격 거리가 약 500㎝이고 해자의 폭은 450㎝, 최대깊이는 110㎝ 내외이다. 북쪽(북문지) 해자는 자연 경사면을 이용하여 일정 깊이의 토사를 파내어 외성을 축조함으로 해자의 깊이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축조되어있다. 체성에서 약 10∼15m 이상 떨어져 있으며 폭은 10m 정도이고 깊이는 600㎝ 이상이다.
동문지에서 바라본 외황강과 공단모습
개운포성지(開雲浦城址)는 1997년 10월 9일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고 ‘개운포(開雲浦)’라는 이름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의 처용랑 망해사조와 『삼국사기(三國史記)』 헌강왕 5년[879] 3월 기록에 보인다. 『삼국유사』에는 왕이 울주 고을 포구에 와서 쉬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서 길을 잃었는데, 일관이 말하기를 동해용의 조화이니 좋은 일을 하여 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절을 세워 주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져서 ‘개운포’라고 이름 지었다고 적고 있다.
동문지와 북문지 사이의 치성북문지북문지와 서남지 사이의 치성추정 서문지에서 바라본 영서곶(營西串)추정 서문지 가는 길추정 서문지와 남체성 사이
개운포성지(開雲浦城址) 남쪽 강가에서 서쪽 끝으로 가면 영서곶(營西串) 또는 영시끝이 있다. 개운포영성(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성) 서쪽 곶으로 동해에서 외황강으로 침입하는 적선을 감시하거나 개운포영성을 방어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