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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자락 남산동에 수백 년 된 배롱나무와 연꽃 그리고 정자가 어울러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서출지(書出池, 경주시 남산117)라고 불리는 신라시대 연못이 있다. 특히 배롱나무 꽃이 만발한 7~ 9월과 연꽃이 피는 7~ 8월에는 장관을 이루어 경주를 찾는 관광객이며 꼭 찾는 곳이다. 서출지에 있는 정자는 이름은 이요당(二樂堂)으로 팔작지붕의 정면 3, 측면2칸의 자형 건물로 조선 현종 5(1664) 풍천 임씨 임적이라는 사람이 지었다. 석조기둥을 사용하여 최대한 연못 가까이 세웠기 때문에 정자가 마치 연못에 떠있는 같이 보인다.

늦가을날 서출지의 이요당

서출지라는 연못의 이름 유래는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 사금갑(射琴匣)과 관련 있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21대 소지왕(炤智王) 또는 비처왕(毗處王) 즉위 10(戊辰, 488) 정월 15일남산 기슭에 있는 천천정(天泉亭)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나타나서 그중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보시오하였다.

이때 왕이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따르게 했다. 기사가 남쪽 피촌(避村; 지금의 남산 동쪽 기슭 壤避寺村) 이 못에 이르러 보니,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다. 이것을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잃어 버려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한 노인이 못 속에서 나와 봉투를 기사(騎士)에게 건네줘 그것을 돌아와 왕에게 올렸다.

왕이 봉투를 살펴보니 겉봉에 이 봉투를 떼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떼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왕은 두 사람을 죽게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떼어 보지 않아 한 사람만 죽게 하는 것이 낫겠다.하여 봉투를 뜯지 않았다. 이때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라 한 것은 서민(庶民)을 말한 것이요, 한 사람이란 바로 왕을 말한 것입니다.하여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떼어 내용을 보니 금갑(琴匣)을 쏘라(射琴匣]) 고 적혀 있었다. 왕은 곧 궁중으로 들어가 거문고 갑()을 쏘았다. 그 거문고 갑 속에는 내전(內殿)에서 분향수도(焚香修道)하고 있던 중이 궁주(宮主)와 은밀히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발각되어 두 사람을 사형(死刑)에 처했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왔다 하여 못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오곡밥을 조금씩 담 위에 놓는데, 까마귀를 위함이다. 그리고 매년 정월 십이지일(十二支日) 중 첫 돼지날(上亥日), 첫 쥐날(上子日), 첫 말날(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고 피하여 함부로 출입하지 않았다. 이언(俚言)에 이것을 달도(怛忉)라고 하였다.

신라의 불교 공인은 법흥왕 때 이루어졌다. 사금갑(射琴匣)을 통하여 불교 공인 이전부터 왕실에서는 불교를 믿고 궁궐 내에 절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화랑세기에 의하면 소지왕(炤智王)에게는 부인이 2명 있는데 정비 선혜부인과 후비 벽화부인이다. 여기에 등장한 궁주는 선혜부인이고 중은 묘심이다. 벽화부인은 당시 신라 사회에서 미모가 출중했으며 소지왕이 5009월 날이군(경북 영주)에 행차했을 때 후비로 맞이했고 그녀의 나이는 열여섯 살 이였다. 2개월 후 11월에 소지왕은 생을 마감했다. 벽화부인은 섬신공 파로와 벽아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남동생은 화랑의 시조인 위화랑이다.

소지왕은 20대 자비왕의 맏아들로 어릴 때부터 효성스러웠고, 겸손함과 타인을 공경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즉위 9(487)에 각 지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관도(官道)를 개척하였다. 또한 즉위 12(490)에는 도읍인 경주에 처음으로 시장을 열어 각 지역의 물자를 유통시킴으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강화, 확립하려했다. 또한 고구려 침입에 대비하여 즉위 15(493)에 백제 동성왕의 결혼요청을 받아들여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힘든 상황은 가뭄, 우박 등 천재지변과 고구려, , 말갈 등의 외침이었다. 말년에는 경국지색의 벽화에 마음이 사로잡힌 것이 그의 치세에 흠결 이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3 소지 마립간에 벽화와의 만남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2년 봄 3, 왜인이 장봉진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여름 4,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났다. 서울 사방에 누런 안개가 끼었다.

가을 9, 왕이 날이군에 행차하였다. 이 군에 살고 있는 파로라는 사람에게 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벽화라고 하였다. 나이는 열 여섯 살인데 실로 일국의 미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비단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채색비단을 덮어 왕에게 바쳤다. 왕이 음식을 진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열어 보니 얌전한 어린 소녀였다. 왕은, 이는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여겨 받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대궐에 돌아오자 그녀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왕은 두 세 차례 평복으로 갈아입고 그 집으로 찾아가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 어느 날은 도중에 고타군을 지나다가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다. 왕이 노파에게 물었다.

오늘날 백성들은 국왕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노파가 대답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소. 왜냐 하면, 내가 듣건대 왕은 날이군에 사는 여자와 관계하면서 자주 평복을 입고 다닌다 하오. 무릇 용의 겉모습이 고기와 같이 생겼다면 어부의 손에 잡히는 것이라오. 지금의 왕은 만승의 지위에 있는데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니 이런 사람이 성인이라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소?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하여, 즉시 남모르게 그녀를 맞이하여 별실에 두었다.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다겨울 11, 왕이 별세하였다.

연꽃이 피는 7월 ~ 8월의 서출지와 이요당

서출지라는 연못은 강원도 강릉에도 있다. 강릉 남대천 남쪽 연화봉 아래에 있는 연못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다음과 같다.

신라 진평왕 때 무월랑이라는 풍류남아가 강릉에 고을살이로 왔고, 그때 강릉 땅에 연화라는 젊은 처녀가 있었다. 연화와 무월랑이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무월랑이 경주로 되돌아가서 헤어졌을 때, 연화가 키운 잉어가 대신 편지를 전해주었다고 하여 서출지 또는 양어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을 하여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요당지(二樂堂池)에게 서출지 자리를 빼앗긴 양피제(讓避堤)

삼국유사사금갑에 나오는 피촌(避村), 피리사촌(壤避寺村)은 삼국유사 4권 피은(避隱) 8 염불사(念佛師)에 따르면 양피사지(讓避寺) , 서 삼층석탑 옆에 있는 양피저수지가 바로 서출지(書出池)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이요당이 있는 연못, 이요당지(二樂堂池)가 서출지(書出池)로 바뀌어졌다.

양피사지(讓避寺) 동 삼층석탑과 산수당(山水堂)
산수당과 양피저수지

동경잡기(東京雜記)에도 이요당(二樂堂)서출제(書出堤)에 대하여 지()와 제()로 구분하여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요당(二樂堂) 금오산 동쪽 기슭에 있다. 그 고을 사람 임적(任勣)이 지은 객당(客堂)이다. 앞쪽은 연못을 대하고 있는데 돌을 쌓아 층계를 만들고 인하여 누정(樓亭)을 지었다. 그 위에 올라가 보면 완연히 물 가운데 서있는 것 같다. 연못에 연꽃을 가득 심어 놓았는데 가을이면 무성하게 피어 만 떨기의 붉은 꽃이 찬란히 난간까지 비친다.

서출제(書出堤) 금오산 동쪽 기슭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1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7섬의 볍씨를 뿌린다.

양피저수지이자 서출제

양피저수지 옆에는 풍천 임씨(豊川 任氏) 소유의 산수당(山水堂)이 있다. 산수당은 풍천 임씨(豊川 任氏) 후손들이 1941년에 지어진 것을 2007년에 5칸 팔작지붕으로 증축했다. 3월에는 벚꽃, 7~ 10월에는 연꽃, 배롱나무 꽃이 절경을 이루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풍천 임씨(豊川 任氏) 시조는 임온(任溫)으로 중국 소홍부 자계현 사람이다. 임온의 6세손 임주(任澍)1275년 고려 충렬왕의 왕비이자 원나라 황녀인 제국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귀화하여 대장군을 지내고 풍천(豐川)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풍천은 황해도에 있었던 옛 지명이다. 임적은 풍천 임씨 19세손이다.

산수당과 양피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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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암곡(列岩谷, 새갓골) 마애불상(磨崖佛像,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산119번지)은 2007년 5월 22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근처 석불좌상 복원을 위해 주변을 조사하다가 발견되었다. 석불좌상의 축대 아래쪽에서 축대 상부로 출입하던 당시의 동선(動線)이 불분명하여 이를 조사하기 위해 축대 중심으로 주변을 면밀히 살피다가 발견한 것이다.

새갓골주차장에서 약 700~800m를 소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면 마애불상과 석불좌상을 만날수있다.

당시 석불좌상에서 남동쪽으로 약 30m 떨어져 있으며, 30°정도 경사진 산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면을 바닥으로 향한 채 엎어져 있었고 왼쪽 다리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흙에 덮인 상태였던 것을 한 달 동안 흙을 파냈다. 마애불상이 발견되기 전 이곳은 잡목들이 많이 우거지고 등산로에서 떨어진 경사진 곳으로 사람들의 접근이 없었다.

마애불상 발견 당시 모습

학계에서는 마애불상 얼굴이 풍화된 흔적이 거의 없어 마애불상이 제작 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지진 등 천재지변으로 현 위치에서 앞으로 그대로 넘어졌던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상태에서 바로 세웠을 때 1,300년 전 당시 마애불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보호각이 마애불상을 둘러싸고 있다

마애불상이 위치한 곳은 산 사면과 능선에 노두(露頭)가 발달되어 있으며, 이러한 노두에서 풍화되어 떨어져 나온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너덜겅을 이루고 있다. 다행스럽게 넘어졌을 때 돌출되어 있는 마애불상 머리카락(나발)이 돌에 먼저 닿으면서 손상이 없었고 불상의 허벅지 부분과 머리 부분만 암반과 괴석(塊石)에 닿아 마애불상을 지탱하고 있다. 돌과 얼굴과의 거리는 5cm이다.

마애불상은 화강암(약 250×190×620㎝, 무게 약 80톤)의 한 면을 고부조(高浮彫)한 것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460㎝, 발아래 연화대좌가 100㎝로, 전체 높이가 560㎝에 이르는 대형 마애불이다.

육계(肉髻)가 높고 민머리[소발(素髮)]이며, 타원형의 얼굴에는 오뚝하게 솟은 코와 아래로 내리뜬 길고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도톰하고 부드럽게 처리된 입술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어깨는 넓고, 가슴은 펴고 있어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아래로 내려올수록 옷 주름 간격이 넓어져 9단을 형성하면서 발목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두발은 발끝이 밖으로 향하게 벌리고 있으며, 연화대좌는 5장의 앙련(仰蓮)을 얕게 조각하였다.

스케치한 마애불상

특히 이 마애불상에서 주목할 것은 세 가지가 이다.
한 가지는 귀가 발제선(髮際線: 머리털이 난 끝선)에서 어깨에 이를 정도로 매우 크며, 평면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또 한 가지는 불상의 수인(手印)으로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이라 하여 한 손바닥으로 밖으로 해서 어깨높이까지 올리고, 다른 손바닥은 아래로 늘어뜨려 손바닥이 보이게 하는 수인이다.
그런데 여기 마애불상은 왼쪽 손등을 바깥으로 하여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서 가슴 위에 얹었으며, 오른손 역시 손등이 밖으로 향하고 엄지손가락을 안으로 감싼 채 네 손가락을 가지런히 하복부에 대고 있는 특이한 형식의 수인이다. 마지막은 마애불상이 약 4등신(等身)으로 몸에 비하여 머리 부분이 크게 표현되어 있어 예불하는 사람이 마애불을 우러러 볼 때의 시각적인 효과를 고려한 것이다.
열암곡 마애불은 8세기 후반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삼화령 삼존불, 배리 삼존불, 석굴암 본존불로 이어지는 신라 불상의 큰 흐름을 이어가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하루속히 1,300년 전 신라 원형의 모습을 간직한 마애불상을 온전히 볼 수 있는 날을 기다려본다.

석굴암 본존불을 연상케 하는 열암곡(列岩谷) 석불좌상(石佛坐像)
열암곡 석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3호)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경주시와 함께 보수·정비계획에 따라 2007년 4월부터 발굴조사와, 정비 및 복원을 마친 결과, 2009년 1월 29일 높이 4m, 남향(南向)으로 정좌한 장대한 모습으로 갖추었다. 본래 열암곡 석불좌상은 8~9세기경 통일신라시대에 상대, 중대, 하대를 갖춘 3단 대좌 위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조선시대 전기까지 유지되어 오다가 이후 누군가에 의해 파괴되었다.
불상은 도괴되어 불두(佛頭)는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졌으며 광배(光背)는 불상 뒤편으로 넘어져 크게 파손되었고 중대석(中臺石)은 결실되고 없으며 상대석도 깨어져 일부분이 없었고 하대석은 부분적으로 파손된 상태였다.

복원 전 초기 모습
정비 및 복원 전 모습

2005년 10월 9일 우연히 남산을 답사하던 한 시민에 의해 불두가 극적으로 발견된 후, 이를 계기로 발굴조사, 정비 및 복원이 시작 되었다. 또한 2005년 11월 20일 상대석 일부분도 시민이 발견하였다. 석불좌상의 불두, 깨진 광배 및 하대석 편(片)들에 대한 접합 복원 그리고 대좌 부재 중 유실된 중대석(中臺石)을 신재(新材)로 만들어 재현하였다.

열암곡   석불좌상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13 호 )

대좌는 지대석(地臺石)과 하대석(下臺石)이 한 몸돌로 되어 있는 3단의 팔각 연화대좌(蓮花臺座)이다. 떨어져 나간 불두는 보존처리 후 불신(佛身)에 접합하고 10여 조각으로 깨진 광배는 구조 보강 작업을 거쳐 완전하게 접합하였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아우르는 거신광(擧身光)으로서 연화문(蓮華文), 화불(化佛)과 불꽃무늬(火焰文) 새김 등으로 하였고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였으며 몸체의 양감과 자연스럽게 늘어뜨려진 법의 차림새 및 조각수법 등 통일신라시대 전성기 양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모습이다.

열암곡은 경주 남산의 고위봉(해발 494m)과 봉화대봉(해발 476m), 천왕지봉(해발 433m)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능선들에 의해 형성된 여러 골짜기 중 하나이다. 이 중에서 백운암으로 향하는 백운계가 본류이며, 백운계 오른편으로 열암곡, 양조암곡, 심수곡이라는 세 개의 골짜기가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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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주(양남면·양북면·감포읍)지역 동해구의 문화유적답사 3각 포인트는 감은사지, 문무대왕릉, 이견대(利見臺). 이 중 감포읍(甘浦邑) 대본리 해안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이견대(利見臺)는 특히 사진애호가들이 일출 사진을 즐겨 찾는 곳이다. 맞은편에는 폐교된 대본초등학교가 있으며 이견대 아래는 바닷가와 인접한 횟집이 즐비하게 있고 좀 더 안쪽으로는 대본항이 있다. 이견대의 이름은 주역(周易)''비용재천(飛龍在天), 이견대인(利見大人)'이란 문구에서 따온 것으로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6825월 신문왕(神文王)이 이곳에서 동해용으로 부터 흑옥대(黑玉帶)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아들 신문왕이 이곳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서라벌에서 수레를 타고 추령(楸嶺, 고도310m)고개를 넘어야 한다. 추령고개는 경주시의 동쪽에 있는 북천의 발원지인 황룡동과 대종천의 발원지인 양북면 장항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 이름은 가래나무 추()’고개 령()’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서낭당이 있어 서낭재라고도 불렀다. 경주시내와 동해안의 양북면·감포읍지역을 연결하는 최단코스이자 가장 낮은 곳이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 4번 국도가 추령을 지나가게 건설되었다. 1998년에 추령터널이 개통되면서, 현재는 단풍구경을 위한 드라이브 코스로 이용되고 있다.

신문왕이 탄 수레가 추령고개를 넘어 용연폭포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기림사에 도착하여 앞에 흐르는 대종천 지류인 호암천(虎岩川)에서 배를 타고 본류인 대종천을 만나기 위해 출발했을 것이다. 호암천(虎岩川)은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의 성황현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안동리에서 대종천에 합류하는 하천으로 호암(虎岩)은 순우리말 이름인 범바위에 대해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안동리에서 대종천을 만난 배는 동해방향인 하류를 따라 감은사 선착장에 도착하여 감은사에서 하루정도 묵으면서 여독을 풀었을 것이다. 다음날 감은사 뒤편 연화산 능선을 따라 이곳 이견대에 도착하여 부왕 문무대왕릉을 바라다보며 제를 지냈을 신문왕의 마음을 살펴보면 그의 효심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축성의 연대는 감은사와 문무대왕릉이 완공되는 시기로 추정되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대 발굴 때 건물지(建物址) 초석이 확인되어 이를 근거로 새로이 건립한 것이다. 이견대의 내부에 걸려있는 <利見臺記>에 의하면 신라五嶽조사단의 발굴로 문무대왕 해중릉이 대왕암으로 고증되면서 역사의 부침 속에 잊혀진 채 기우단(祈雨壇)이나 역원(譯院)으로 쓰였던 이곳 이견대도 함께 중건되었다는 내력을 전하고 있다.

이견대 관련 내용을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2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보면 다음과 같다.

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政明), 성은 김씨(金氏)이다. 개요(開耀) 원년(元年) 신사(辛巳; 681) 77일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하여 동해(東海) 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절 안에 있는 기록에는 이렇게 말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왜병(倭兵)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 창건(創建)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왕위(王位)에 올라 개요(開耀) 2(682)에 공사를 끝냈다. 금당(金堂) 뜰아래에 동쪽을 향해서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으니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遺言)으로 유골(遺骨)을 간직해 둔 곳은 대왕암(大王岩)이고, 절 이름은 감은사(感恩寺)이다. 뒤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했다.

이듬해 임오(壬午) 5월 초하루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飡)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속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 혹은 춘일春日)을 명하여 점을 치게 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三韓)을 진호(鎭護)하고 계십니다. 또 김유신공(金庾信公)도 삼삼천(三三天)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계에 내려와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聖人)이 덕()을 함께 하여 이 성을 지킬 보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으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달 7일에 이견대(利見臺)로 나가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살펴보도록 했다.

산 모양은 마치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는데 산 위에 한 개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해서 하나가 되었다. 사자(使者)가 와서 사실대로 아뢰었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는데 이튿날 점심 때 보니 대나무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데, 천지(天地)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7일 동안이나 어두웠다. 그 달 16일에 가니 용 한 마리가 검은 옥대(玉帶)를 받들어 바친다. 왕은 용을 맞아 함께 앉아서 묻는다.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용이 대답한다. “비유해 말씀드리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오니, 성왕(聖王)께서는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실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부시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다 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天神)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五色) 비단과 금()과 옥()을 주고는 사자(使者)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때 산과 용은 갑자기 모양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 지림사(祗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太子) 이공(理恭; 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는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玉帶)의 여러 쪽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말한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 “이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십시오.” 이에 옥대의 왼편 둘째 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금시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이내 못이 되었으니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불렀다.

왕이 대궐로 돌아오자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천존고(月城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敵兵)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 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는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國寶)로 삼았다. 효소왕(孝昭王) 때에 이르러 천수(天授) 4년 계사(癸巳; 693)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서 돌아온 이상한 일로 해서 다시 이름을 고쳐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했다. 자세한 것은 그의 전기(傳記)에 실려 있다.

감포의 이름은 지형이()’자처럼 생겨서 만들어졌다는 설, 감은포라 부르다자가 생략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둘 다 확실하지는 않다. 우리나라 마을의 순우리말 이름대부분이 한자의뜻이나 소리를 따서 기록하였다는 점에 기초하면, 감포리에 있는 순우리말이름인 감디 또는 감딧골과 물가를 의미하는가 합하여 한자의 소리와 뜻을 따서 감포리(甘浦里)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특히 감포항은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어 항구의 발달에 유리한 지형을 하고 있어 어항으로 발달하였다.

이견대(利見臺) 위치 진위 논란

이견대 위치에 대한 진위 논란의 발단은 황수영 박사가 불교신문(2002. 4. 30)에 기고한 佛跡逸話 경주 이견대칼럼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1961년 감은사지 발굴 이후로 인접한 이견대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1965년 오악조사를 계기로 이견대지를 본격적으로 탐사하게 되었다. 당시 이견대의 위치를 현재의 이견정(利見亭) 뒤쪽에 있는 산 위로 비정하는 주장과, 대본리 해변가로 보는 의견이 있었다. 산상설은 경주 유적에 밝은 최남주 선생이 주장하였고, 해변설은 마을의 노인들에 의한 것이었다. 나는 일단 촌로들의 말을 따라 그들이 말하는 지역을 1주일 동안 시굴해 보았다. 그 결과 비록 몹시 교란되기는 했으나 분명한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이 자리를 이견대로 지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 자리는 조선시대의 역원(驛院)터일 뿐 신라시대의 이견대는 아닌 듯하다.

1965년의 시굴 직후 나는 일단 이견정의 위치를 발굴지로 비정하기는 하였으나 삼국유사등의 문헌에 보이는 축성(築成)’의 자취를 찾지 못한 것이 못내 개운치 못하였다. 그래서 그 뒤로도 부근의 해안가를 두루 둘러보았으나 여전히 그 자취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1995년 가을 예전에 최남주 선생이 말하던 산 위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곳은 대본초등학교 뒷산으로, 현재의 이견정에서 국도를 건너면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내가 이 지역을 새삼스레 주목한 것은 최남주 선생의 말 외에 문무대왕릉 관리인인 김도진씨의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의 말이 현재는 없어졌으나 옛날에는 대본부락에서 감은사로 넘어 가는 길이 이 산으로 해서 나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인도로 산 위에 올라가 보았는데, 과연 약 4500평의 너른 대지가 있고 그 삼면에 인공으로 축석된 자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부근에 신라시대 와편이 보였고, 또한 커다란 민묘와 석비 1기가 있었다. 석비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인데, 비문 가운데 이견대(利見坮)’라는 글자가 보이기도 하였다. 이곳이 과연 고문헌에 보이는 이견대인지는 발굴 등의 정밀조사가 있어야 하겠으나, 한 눈에 동해구가 조망 되는데다가 서쪽으로는 감은사로 통하는 옛길의 존재도 짐작되었다. 이렇게 되면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처럼 신문왕이 이견대에서 동해의 문무왕릉을 참배한 뒤 만파식적을 얻은 다음 감은사로 가서 묵었다는 행적과도 일치된다. 그러므로 이곳이 이견대일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인다. 그리고 현재의 이견정 자리는 조선시대에 설치되었던 역원인 이견원(利見院)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칼럼의 핵심은 현재 이견대의 자리는 조선시대 역원인 이견원 자리인 것이다. 즉 이견대 내부에 걸려있는 <利見臺記>에 현재 자리가 기우단(祈雨壇)이나 역원(譯院)으로 쓰였던 곳이라고 기록한 배경을 술회한 것이다. 역원(驛院)조선 시대에 도성과 지방을 연결하던 교통 및 통신제도로써 도로로 연결된 중요한 곳에 역과 원을 설치해 왕명이 지방에 신속히 전달되도록 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는 데 기여한 제도이다. 역(驛), 원(阮)은 30리(11km)마다 설치하여 중앙관청의 공문을 지방관청에 전달하는 등 공무를 집행하는 관리들의 숙소와 교통 편의(말 제공 및 교환)를 제공하는 곳으로 역과 원은 서로 밀접한 관련 하에 설치되기 때문에 흔히 역원이라 일컬었다

현재 이견대 맞은편 대본초등학교는 폐교가 되었고 학교 뒤편 길을 따라 뒷산을 올라보면 넓은 평지와 함께 묘가 여러 개 있고 이 중 한 묘의 묘비에는 이견대 5(1.5m) 주변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주변을 살펴보면 석축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있고 마을에서는 뒷산을 뜸북재라고 부르는데 소로가 있어 감은사지는 물론이고 양북면 사무소까지 갈 수 있는 길이다. 여기서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면 동해의 절경에 한 폭의 그림 같다.

이견대 맞은편 폐교 된 대본초등학교 뒤편 길을 따라 뒷산을 올라가는 중 바라본 문무대왕릉
뒷산(뜸북재) 정상 초입
뒷산(뜸북재) 주변 축성의 흔적

 

뒷산(뜸북재) 정상을 올라보면 넓은 평지와 함께 묘가 여러 개 있다.
이 중 한 묘의 묘비에는 이견대 5자(약 1.5m) 주변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뒷산(뜸북재) 정상에서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면 동해의 절경에 한 폭의 그림 같다.

옛 문헌 중 이견대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이며 퇴계 성리학의 맥을 이은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 1541~1596)은 농암 이현보의 증손으로 그의 경주(동경) 여행기인 동경유록(東京遊錄)에는

1587418일 신라시대 감은사 터이다. 동쪽 산 한 줄기는 곧장 바닷가로 달려와 한쪽 모퉁이에서 끊어지는데, 깎아지를 듯 서있는 바위는 높이가 십여 길이나 되었다. 그 위에 단청(丹靑)된 누각이 우뚝 솟아 있으니, 이른바 이견대(利見臺). 동헌에 앉아 둘러보니 파도가 하늘에 닿을 듯 드넓게 넘실거렸다. 또 남쪽 포구에 바위가 솟아 몰아치는 파도와 거센 물결 가운데 우뚝 하였으니, 이른바 대왕암이다.

상기 문헌의 기록으로 이견대 위치를 유추해 보면 평지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가 있어 뜸북재 민묘가 있는 주변이 이견대 위치로 합당하다고 여겨지고 현재 이견대(利見臺)는 이견원(利見阮)으로 공무를 띤 관리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주요도로에 설치된 관청으로 판단된다.

양북면 봉길리에서 바라본 대본초등학교 뒷산(뜸북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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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중반 문화유산답사가 유행하였고 모 출판사의 경주문화유적 안내책 표지에 장엄한 감은사지 삼층석탑으로 장식하였다. 이로 인해 감은사지와 추령고개 넘어 동해구(東海口)로 가는 왕의 길은 경주문화유산답사 방문객에게는 필수 방문코스가 되었다. 감은사지는 해발 240m의 나지막한 연대산(蓮臺山)에서 서남쪽을 향해 뻗은 지맥(支脈)용당산(龍堂山)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대종천변(大鐘川邊)의 평지보다 9m정도 높은 지점에 있다. 그리고 절터가 위치한 마을은 속칭 탑곡(塔谷) 또는 탑동네로 부른다.

또한 풍수지리측면에서 살펴보면 대종천 하구에서 육지 쪽을 바라보면 마치 용이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으로 대종천(大鐘川) 양옆의 용당리, 봉길리 일대 산들이 용의 이빨에 해당되고 감은사지 삼층석탑 2기는 용의 이빨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기 위한 어금니 또는 송곳니에 해당되니 신라 서라벌로 침입하려는 왜구를 막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종천은 양북면 장항리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감은사지를 지나 동해로 흘러가는 하천이다. 예전에는 봄이면 이곳 동해구에서 어린 뱀장어와 은어가 바다에서 대종천으로 올라왔었다. 대종천의 유래는 1238년(고려 고종 25)에 몽골군의 약탈로 황룡사 9층목탑 등이 완전히 불타 없어질 때, 몽골군이 49만근의 장항리 절터의 대종을 가져가려 배에 싣고 대종천에 띄우자 폭풍우가 불어 가라앉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실제로 대종천과 관련된 조선시대 기록을 찾기 어렵다. 하천 이름이 처음으로 나오는 『대동지지』, 『동여도』, 『대동여지도』에는 동해천(東海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해천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동해면에 있는 내라는 뜻이며, 일제강점기 시대에 들어 이 하천에 전해지는 전설을 따서 대종천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하루속히 대종천을 원래 이름인 동해천으로 정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동해천을 대종천으로 바꾼 것은 식민사관의 일환으로 실행된 식민사학의 타율성론(반도사관), 지정학적으로 반도국가인 한국 역사는 대륙과 해양세력, 즉 중국과 일본에 의하여 좌지우지되었다는 사학으로 우리나라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친일잔재청산이 곧 일제 식민사관과 식민사학이다.

감은사지의 창건은 신라 30대 문무대왕이 왜구의 상륙지점인 동해구에 부처의 힘을 빌러 왜구를 막겠다는 뜻으로 국찰을 착공하였고 사찰이름은 진국사(鎭國寺)로 불렸으나 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재위2156세에 세상을 떠났다. 진국은 진호국가의 준말로 왜구를 물리치려는 의미인 욕진왜병(欲鎭倭兵)의 뜻과 잘 맞는다.

이후 신라 31대 그의 아들 신문왕이 682년에 절을 완공하여 感恩寺(은혜를 느끼는 절, 또는 은혜에 감사하는 절)로 개명하였고 사명을 고친 이유는 대왕의 별세 후 동해구 바다에 장사 지냈기에 대왕의 은혜에 감축(感祝)하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또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부왕의 명복을 비는 효심의 발로로 생각된다.

감은사지 선창장으로 신문왕이 감은사지에 오기 위해 서라벌에서 수레를 타고 출발하여 추령고개를 넘어 기림사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배를 타고 이곳까지 왔었다. 당시에는 대종천의 수위가 지금 보다 1m10cm 높았고 배를 이용하였다.

감은사지 관련 역사 문헌을 들여다보면 삼국유사 만파식적조(萬波息笛條) 기록에는 제31(31) 신문대왕(神文大王)의 휘()는 정명(政明)이며 성()은 김씨(金氏)로서 개요 원년(開耀 元年) 신사(辛巳) 七月七日에 즉위(卽位)하였고 아버지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하여 동해변(東海邊)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創建)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만파식적조하(萬波息笛條下)의 주()에 인용(引用)되어 있는 󰡔감은사 사중기(感恩寺 寺中記)󰡕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고 하여 이 사찰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붕어(崩御)하여 해룡(海龍)이 되었는데,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하여 개요開耀 二年(唐 高宗 年號, A.D.682)에 공사를 마쳤다. 금당 밑의 섬돌을 파고 동쪽으로 향하도록 하나의 구멍을 내었으니 이 구멍으로 용이 금당으로 들어와 서리게 하였다. 대개 왕이 내린 유조(遺詔)로써 뼈를 묻은 곳을 大王岩이라 하였고, 절의 이름을 感恩寺라 하였다. 뒤에 용의 현형을 본 곳을 利見臺라 이름 지었다

또한 왕력조(王曆條)에는 제30대 문무왕이 신유년(辛酉年, A.D. 661)에 즉위하여 20년간 다스렸으며, ()은 감은사 앞 東海 中에 있다고 적혀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 문무왕 21년조(文武王21年條)에는 가을 71일 왕이 죽자 시호를 문무라 하고 군신(群臣)이 유언에 따라 동해구(東海口)의 대석(大石)위에 장사하였으며, 속전(俗傳)에는 왕이 변하여 용이 되었다하니, 이에 그 돌을 가리켜 대왕암(大王岩)이라 한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혜공왕(惠恭王) 12(A.D 777)과 경문왕(景文王 4(A.D 864)에는 각각 한 차례씩 왕이 직접 감은사로 행차하여 동해를 바라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외에 성덕대왕 신종에 보면, 역관(役官)의 직명에 해당하는 󰡔검교감은사사(檢校感恩寺使)󰡕라는 명문이 있다.

조선 초기 예종(睿宗) 때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는 감은촌(感恩村) 혹은 감은리(感恩里라는 지명이 언급되어 있어서 이때에는 이미 감은사가 폐사(廢寺)되었던지, 아주 미미한 상태로 간신히 그 명맥만 유지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중기 성종(成宗) 때 편찬 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불우조(佛宇條)에는 감은사 부동오십리(感恩寺 府東五十里)’라는 기록이 있고 임진왜란 이후 경주부(慶州府)에서 간행 된 동경잡기(東京雜記) 불우조(佛宇條)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이때까지는 어떤 형태이든 감은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정조초(正祖初)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의하면 당시에 폐사(廢寺)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 감은사가 반드시 폐사(廢寺)되었다기보다는 국가시책에 영향을 받아 지명화(地名化)한 기록으로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며, 존재의 미미함에 비추어 중요시하지 않은 까닭으로 불우(佛宇)로만 남겼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고대(古代)의 가람배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된 것은 탑()이었다. 탑이 금당보다 높은 격에 있다는 것은 기단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지금까지 조사한 유적에서는 탑기단이 금당 기단보다 한 층씩 높게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같은 가람에서 금당이 단층기단(單層基壇)이면 탑은 이중기단(二重基壇)이고, 금당이 이중기단(二重基壇)이면 탑은 삼중기단(三重基壇)인 것이다.

초기(初期) 사찰(寺刹에서는 부처님의 사리(舍利)가 봉안되어 있던 탑이 예배의 주 대상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부처의 형상이 금당으로 옮겨지고 나서는 탑의 규모가 차츰 작아지고 양식도 약화되는 반면, 부처를 안치한 금당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웅장하고 커진 것으로 보인다. 감은사는 통일직후에 가람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초기에서 중기로 들어가는 과도기에 해당하므로 아직은 탑이 건물에 비하여 크게 쇠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감은사지 배치도

우리나라 고대 사원의 가람배치(伽藍配置) 형식은 남쪽으로부터 중문(中門), (), 금당(金堂), 강당(講堂)의 순서로 남북 일직선상에 나란히 배치하는 단탑식 가람(單塔式 伽藍)과 금당 전면(金堂 前面)에 탑을 양쪽으로 배치하는 쌍탑식 가람(雙塔式 伽藍)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탑을 중심으로 3면에 금당을 배치하는 일탑삼금당식 가람(一塔三金堂式 伽藍, 분황사, 황룡사)이라는 특수한 형식도 있다. 또한, 미륵사지처럼 중문과 탑, 금당을 하나의 구역으로 하여 일원(一院)을 구획하고, 이렇게 구획된 3개소의 원을 횡으로 병렬한 삼원식 가람(三院式 伽藍)이라고 하는 매우 독특한 가람배치도 있다.

감은사의 가람배치는 금당 이탑(金堂 二塔)의 쌍탑식으로서 통일신라시대에 경주지방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던 가람배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文武王 11(A.D.671)에 창건된 망덕사(望德寺)同王 19(A.D.679)에 창건된 사천왕사(四天王寺)가 그 始原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이후에는 불국사, 천군리절터 등이 대표적인 유적에 속한다. 통일신라 초기에 세워진 망덕사와 사천왕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木造 雙塔이 세워졌던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그 이후에 재료적으로 변형이 나타난 첫 번째 石造 雙塔이 바로 감은사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기단부와 탑신부 등 각 부분이 한 개의 통돌이 아니라 수십 개에 이르는 부분 석재로 조립되었는데 모두 82점의 각종 석재로 이루어져 있어 목조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상하층기단 각 면에 우주와 탱주를 배치하고 탑신 모서리에 우주를 조각한 것과 옥개받침을 층급으로 표현하고 옥개 낙수면은 층급이 없는 경사를 이루고 있는 점, 전각에서 반전이 뚜렷한 점 등 목조건축양식을 모방한 것이다.

석탑의 재질은 화산재가 쌓여서 만들어진 응회암이고 二重基壇 밖에 탑구(塔區)를 돌려 三重基壇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여기서 塔區를 제외한 이중기단은 감은사 창건 이후의 한국 석탑에 있어서 하나의 규범(規範)을 이루는 전형(典型)을 보여주고 있다. 지표(地表)에서 노반(露盤)까지의 높이는 9.85m인데, 노반 위의 상륜뷰(相輪部)는 없어지고 3.49m 높이의 철제 찰주(鐵製 擦柱)만 남아 있다. 찰주의 높이까지 합하면(전체 높이 13m) 국내의 현존하는 탑 중에서 가장 큰 석탑이다.

감은사지 동 삼층석탑
감은사지 서 삼층석탑

금당은 정면 5, 측면 3. 기단은 2중 기단으로 되어 있고 초석 아래에는 특이한 석조유구(石造遺構)가 있어 건물바닥 밑에 일정한 높이의 공간을 두기 위하여 마련된 것으로 다른 건물에서 보기 드문 구조이다. 이것은 문무왕이 화한 동해 大龍이 금당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하였다는 寺中記의 내용과 일치한다.

금당터 초석 아래 석조유구(石造遺構)의 공간은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준비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상징적인 龍穴이자 건축적으로 공기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일종의 환기장치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금당터 초석 아래의 특이한 석조유구(石造遺構)의 공간은 三國遺事에 인용된 寺中記排金堂砌下東向開一穴, 乃龍之入寺旋統之備에서 金堂砌下(금당의 섬돌 아래)으로 향한 구멍을 한군데 열어 둠으로써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준비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상징적인 龍穴이자 건축적으로 공기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일종의 환기장치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금당이 이중기단으로 구성된 건물터를 살펴보면 고구려 지역에서는 평양 청암리 폐사지가 있으며, 백제 지역에서는 부소산성의 건물터와 절터, 금성산의 절터, 정림사터, 미륵사 금당터 등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신라 지역에서는 황룡사 금당터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주목할 것은 2점의 태극무늬 장대석으로 한 점은 1959년도 1차 발굴조사 시, 금당지 기단 동남모서리 전면에서 발견된 것이고, 다른 한 점은 1979~1980년도에 걸쳐 이루어진 2차 발굴조사 시, 곽외 남측 석축 앞 연못에서 출토된 것으로 용도는 內部 佛壇 周圍에 깔아 받친 地臺石으로 추정하는 견해와 금당의 용혈입구 구성 등에 사용된 석조부재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이견대의 명칭이 주역』의 비룡재천(飛龍在天) 이견대인(利見大人) 에서 취해졌던 것처럼, 감은사지 출토 장대석의 태극무늬 역시 주역에서 취해진 것으로 그 배경이 학계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태극무늬가 새겨진 장대석

중문은 정면 3, 측면 2칸의 건물. 3칸에 모두 문이 달려 있고 문과 연결되는 계단이 3칸 전 후면에 모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문 앞 낭떠러지에는 중문으로 이어지는 큼직한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강당은 정면 8, 측면 4칸 건물일 것으로 추정되고 강당 정면을 8칸의 등 간격으로 분할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가람에서 강당에 흔히 사용된 기둥배치 방식으로 후대에는 정면 5, 측면 4칸으로 바뀐다.

강당좌우의 건물배치는 각각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는 경우와 회랑을 배치하여 연결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감은사지 강당은 좌우에는 별도의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였다가 후대에 회랑형 건물로 바뀌었음을 확인되었으며 강당 좌우에 독립된 건물을 배치한 예는 황룡사터와 황룡사서편 폐사지에서 각각 확인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강당 양쪽에 독립된 건물이 배치되었다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회랑으로 연결되는 것인지, 아니면 가람의 평면이 정방형이나 정방형에 가까운 평면일 때는 독립된 건물이 배치되고, 남북으로 긴 장방형 평면일 때는 회랑으로 연결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회랑은 동북 회랑이 모두 접속되어 있었으며, 익랑(翼廊)이 금당의 양쪽에 마련되어 있다. 즉 회랑안쪽 중심에 위치한 금당 양쪽에는 翼廊이 있다. 회랑(廻廊)은 남회랑, 동회랑, 서회랑, 동익랑, 서익랑 등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伽藍 南北中心線을 기준으로 東西로 나누었을 때, 각각 하나의 기단으로 처리된 2개소의 회랑으로 大別된다. , 동회랑을 비롯하여 중문 동쪽의 동남회랑, 금당 동쪽의 동익랑이 하나의 통합된 기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동쪽이 F자를 180도 회전한 모양이고 서쪽은 F자의 아래위를 뒤집어 놓은 모양이 되어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남회랑은 중문 동서쪽으로 각각 10칸씩, 모두 20칸의 도리칸으로 되어 있으며, 동회랑과 서회랑은 남회랑과 접속되는 칸을 포함하여 각각 20칸의 도리칸인데, 南端으로부터 12칸째 도리칸에서 금당 좌우의 동서익랑이 직각으로 연결되어 각각 7칸의 도리칸으로 되어 있다翼廊은 금당 좌우에서 동회랑과 서회랑에 직각으로 이어지는 동서 방향으로 길게 놓인 회랑을 말하며, 일부에서는 中廻廊이라고도 한다.

감은사지를 답사를 하면 반드시 탑마을(동네) 뒷산인 용당산(龍堂山)에서 이견대까지 답사를 하여야 감은사지 답사가 마무리가 된다. 가는 길은 마을 뒤편에 난 소로를 따라 20분 정도 가면 용당산(龍堂山) 동편 끝자락을 맞이하게 되는데 여기서 문무대왕릉을 바라다보면 그 옛날 신문왕의 마음을 살펴 볼 수가 있다.

탑마을에 세워진 이견대 길안내 이정표
마을 뒤편에 난 소로를 따라 20분 정도 가면&nbsp;용당산(龍堂山) 동편 끝자락을 맞이하게 되는데 여기서 문무대왕릉을 바라다보면 그 옛날 신문왕의 마음을 살펴 볼 수가 있다.
이곳 마을에서는&nbsp;용당산(龍堂山) 동편 끝자락을 뜸북재로 부른다.

 

양북면 봉길와 대본리 사이 대종천을 건너게 하는 대본다리

 

멀리 보이는 동해의 문무대왕릉과 대종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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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도시 울산에는 옛 부터 군사적으로 전략요충지로써 조선시대의 성곽유적인 경상좌도수군절제사영성과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성(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城)이 있다. 특히 왜와 거리상으로 가까운 지역으로, 고려 말·조선 초 이후 지속된 왜구의 침탈에 대비하여 해안 지방의 철저한 방어선이 필요했다. 이곳 개운포성지 남쪽으로는 외황강 하류를 접하고  서북에서 동남으로 흘러 동해로 들어간다. 이런 입지 조건이 일찍부터 수군이 주둔할 수 있게 했고 조선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과 경상좌도 수군 절제사영(慶尙左道水軍節制使營)의 진·영성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개운포성지 표지석과 우측에 보이는 환경처리시설 굴뚝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태종 7년의 최초 기록을 통해 보면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수군과 관련된 기지가 이곳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1425)에 개운포에 만호진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세조(世祖) 5, 1459년에 좌수영이 개운포로 이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개운포성은 용도와 목적, 규모의 변화를 여러 차례 겪으면서 몇 번의 증·개축과 보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최초 축조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의 영성(營城)으로 사용된 시기는 조선 전기 세종 5(1459)부터 선조 25(1592)까지 이며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자기들은 개운포성의 사용시기인 15세기 초17세기에 제작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기록상의 성 운용시기와 부합된다.

개운포성지 남쪽 성벽

온산만 처용암 옆을 오가는 뱃길은 천 년 전 신라 헌강왕의 눈길이 머문 곳이고, 조선초기에는 지금으로 치면 해군사령부(개운포영성)의 군함이 정박하던 곳이다. 개운포 8경의 하나인 전함홍기(戰艦紅旗)로 도열한 군함의 붉은 깃발이 아름답고 하여 붙여졌다.

오늘날 개운포성터는 황량하고 쓸쓸하지 못해 마치 폐허처럼 변해 있다. 지난 강 건너편에 온산 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섰고 마을 뒤에는 울산시 환경처리시설이 있어 뿜어대는 악취로 숨쉬기조차 곤란하다. 성안 주민들은 지금 두 세 가구만 남아 있고 외지로 떠났다. 부근의 하개마을과 염전은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석유화학단지 개발로 없어졌고, 선수마을을 비롯한 세죽, 성외 등의 마을도 1990년대 중반 이후 다운동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다.

현재 개운포성을 돌아보면 성안 대밭과 남문 터 좌우 긴 석축만이 옛 성터임을 말해준다. 남문 터를 지나 들어가 북문 터까지 이어지는 S자형의 길은 본래 성안 길이 아니고 고압선 전신주 설치를 위해 한전 측이 넓힌 길이다. 예스런 멋은 없지만 이 길로 북문 터 가까이 언덕배기를 올라가면 성안마을의 옛 정취는 느껴볼 수 있다. 그러나 성벽 주변과 성 내부는 밭농사로 인해 경관과 성체 훼손이 심하다. 하루속히 시에서 매입하여 복원이 아니더라도 단정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 밖에서 외성을 따라 돌아보면 전체 윤곽을 짐작할 수 있다.

개운포성지 남쪽 성벽 주변

임진왜란 이후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이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으로 옮겨가고 그 장소에는 효종(1656) 때 전선소(戰船所)가 설치되었다. 당시 학성공원 아래 있던 전선창이 옮겨왔다. 전선창은 군선을 건조하는 시설을 뜻하고 일명 선소(船所)’라고 하였다. 성안 마을 웃각단 아래각단 등이 철거되기 전 선수마을이라고도 불리었다. ‘선수선소에서 전이된 발음이다. 군사 전략거점에서 지원병참시설로 그 기능을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선창도 1895(고종 32) 수군 해산 때 문 닫게 되었다.

개운포성은 강변에 솟은 야산의 골짜기를 감싸며 구릉부를 따라 쌓은 포곡식(包谷式)으로 둘레는 1,270m 면적은 102,919정도이다. 2003년과 2005년 두 차례의 발굴 조사 결과 북문지, 동문지, 서문지, 4곳의 성벽, 남쪽과 북쪽에 해자가 확인되었다. 성벽은 돌로 쌓았으며 바깥 쪽에 해자[도랑]를 둘렀다. 돌로 쌓은 성벽은 일정한 간격으로 큰 돌덩이를 세워 구조적으로 안정되게 하였는데, 이러한 축조 방법은 울산 경상좌도병영성, 언양읍성 등 울산 지역의 성에서는 흔히 보이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어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남쪽 성벽과 해자

성벽 관련 주요 시설물로는 체성, 문지, 치성, 옹성, 수로 시설, 해자 등이 있고 건물지도 조사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성벽의 최대 너비는 4.0~4.7m, 잔존 최대 높이는 2.4m 정도다. 동문지의 경우 1회 중축한 것이 확인되었다. 만호진성이 수영성으로 바뀌면서 중축된 것으로 보인다. 성문지 주변에 기와편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상부에 누각이 있었을 것이다. 성벽 축조는 기초 부분을 판 다음 3~4단의 할석으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기단석을 눕혀서 쌓았다. 기단석 끝에서 20정도 물려서 대석으로 세워쌓기를 하고 2단은 눕혀서 쌓았다. 내벽은 작은 할석으로 다지고 상부에는 흙을 여러 겹 쌓았다.

성벽 주변과 성 내부는 밭농사로 인해 경관과 성체 훼손이 심하다. 하루속히 시에서 매입하여 복원이 아니더라도 단정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운포성의 문은 동···4개의 문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출입을 위한 문은 동문과 북문으로 확인되었다. 동문은 성지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한다. 구조는 외측에 반원형의 옹성이 협축 방식으로 축조되어 있고 문지의 내측에는 확돌 2개가 입구부를 사이에 두고 대칭되게 확인되었다. 옹성은 남쪽 체성의 기단석에 잇대어 쌓은 형태이고 축조방법은 체성과 동일하다. 옹성의 면석은 체성의 면석에 비해 큰 편이다.

동문지 방향의 성벽
동문지 방향의 성벽 흔적

해자는 남쪽, 북쪽을 비롯하여 성벽 전체를 둘러싸고 설치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남문지)해자는 체성과의 이격 거리가 약 500이고 해자의 폭은 450, 최대깊이는 110내외이다. 북쪽(북문지) 해자는 자연 경사면을 이용하여 일정 깊이의 토사를 파내어 외성을 축조함으로 해자의 깊이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축조되어있다. 체성에서 약 1015m 이상 떨어져 있으며 폭은 10m 정도이고 깊이는 600이상이다.

동문지에서 바라본 외황강과 공단모습

개운포성지(開雲浦城址)1997109일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고 개운포(開雲浦)’라는 이름은 삼국유사(三國遺事)기이편의 처용랑 망해사조와 삼국사기(三國史記)헌강왕 5[879] 3월 기록에 보인다. 삼국유사에는 왕이 울주 고을 포구에 와서 쉬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서 길을 잃었는데, 일관이 말하기를 동해용의 조화이니 좋은 일을 하여 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절을 세워 주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져서 개운포라고 이름 지었다고 적고 있다.

동문지와 북문지 사이의 치성
북문지
북문지와 서남지 사이의 치성
추정 서문지에서 바라본&nbsp;영서곶(營西串)
추정 서문지 가는 길
추정 서문지와 남체성 사이

개운포성지(開雲浦城址) 남쪽 강가에서 서쪽 끝으로 가면 영서곶(營西串) 또는 영시끝이 있다. 개운포영성(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성) 서쪽 곶으로 동해에서 외황강으로 침입하는 적선을 감시하거나 개운포영성을 방어하는 곳이다.

영서곶(營西串) 또는 영시끝
영서곶(營西串)에서 본 외황강과 개운포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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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보면 가끔 읍성을 만나는데 보통 바다와 가까운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주로 복원된 읍성을 마주보게 된다. 읍성은 해적, 즉 왜구로부터 고을을 방어 목적으로 축성한 것으로 행정기능과 군사기능을 겸하고 있다. 고려말에 처음 읍성을 축성했고 읍성 내부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거주하고 읍성 밖에는 지역주민이 거주했다. 읍성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조선총독부의 계획에 따라 해체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훼손되고 철거 된 자리에는 식민지 지배를 위한 시설부지로 활용되었고 군 및 읍사무소, 경찰서, 등기소 등이 건립됐다. 그리고 해방 후 도시화와 도로개설, 무관심 등으로 사라졌다. 현재 경주읍성, 언양읍성, 장기읍성, 낙안읍성, 고창읍성, 해미읍성, 홍주읍성 등이 남아 있다.
평산성(平山城)인 기장읍성의 위치는 토성(土城)인 기장읍 교리 일대와 석성(石城)인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 일대이다. 현재 읍성의 형태를 볼 수 있는 곳이 동부리 기장초등학교 주변과 서부리 일대이다. 기장초등학교 주변은 공덕비군(功德碑群)과 더불어 나름 옛 멋이 남아 있고 서부리 일대는 복원되어 정비된 모습이다. 특히 기장읍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죽성리 왜성을 축성하면서 필요한 돌을 기장읍성을 사용하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동부리 일대에는 동헌과 우물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기장초등학교를 지으면서 허물어 사라졌다. 교리 일대의 읍성(古邑城)은 고려 우왕(禑王:1374∼1388년)때 왜구의 침입으로 함락되어 관아가 모두 불에 전소되었다. 이후 다시 축조된 것이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 일대의 읍성이다.

석성(石城)인 동부리 주변에는 동헌과 우물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기장초등학교를 지으면서 허물어 사라졌다.
기장초등학교 주변은 읍성과 더불어 공덕비군(功德碑群)이 있어 나름 옛 멋이 남아 있다.
기장군에 산재해 있는 공덕비 36기를 1972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이 곳에는 관찰사비 7기, 수군절도사비 1기, 어사비 1기, 현감비 14기, 군수비 5기, 아전비 2기, 객사건성비 1기, 교량건성비 1기, 교량개축 등 2기, 기타 3기 등 있다.
기장 죽성리 두호마을에서 발생한 조운선 양곡 절도의 원만한 해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기리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이도재 생사단비가 여기에 있다. 생사단이란 고향 출신의 수령이 부임한 경우, 이의 탄생지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을 가리킨다.
비의 재질은 석재이고 비석 머리는 둥글고 받침돌은 없다. 비의 앞면에는 비의 제목 '수사 이공도재 생사단(繡史李公道宰生祀壇)' 이라 되어 있고, 내용은 '우리 고을에 왜 이리도 늦게 오셨나/ 그래도 하늘은 기필코 도우시네/ 수많은 폐단들을 모두 바로잡으시니/ 천추에 영원토록 기리오리다[來何暮兮 天必佑之 百弊咸正 千秌永祀]'라고 적혀 있다. 뒷면에는 '광서 계미년[1883] 봄에 세우다[光緖癸未春立]'라고 적혀 있고 건립자에 관한 기록은 없다. 비의 크기는 높이 92.5㎝, 너비 36㎝, 두께 13㎝이다.
비의 재질이 화강암이 아닌 철로 된 공덕비.
귀부를 가진 공덕비

일반적으로 읍성의 내부에는 객사(客舍)와 동헌(東軒), 외부에는 사직단(社稷壇), 문묘(文廟)와 같은 제사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읍성은 군사기능을 겸하고 있는데 평시에는 주민들은 성 밖에 거주하다가 유사시에 성 내로 들어와 방어를 한다.
왕 또는 국가를 상징하는 객사는 조선시대 관아건물로서 임금을 상징하는 闕牌(임금을 상징 하는 궐자를 새긴 위패)와 대궐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보관하고, 고을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망배를 드린 곳이며, 행정업무와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객사구조는 일반적으로 궐패를 모시는 정청(正廳) 또는 주사(主舍)와 좌우 한 단계 낮은 건물인 동〮 서 익랑, 또는 익사(翼舍)로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학교건물과 관청 건물로 사용되었다.
수령의 근무처인 동헌은 간혹 객사 정청과 같이 쓰이나 객사와 나란히 배치 되어있다. 주로 장방형의 평면에 마루방과 온돌방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 많다. 수령의 숙소이자 안채인 내아(內衙), 내사(內舍), 서헌(西軒)이 있다. 부속 건물로 지방출신 인물들의 자문기관인 향사당(鄕士堂), 향청(鄕廳), 군사업무를 보는 군관청, 도둑을 잡는 등 치안을 보는 토포청, 아전, 6방이 집무하는 작청, 등 있다.
읍성의 위치는 군사 방어목적과 백성생활을 위해 배산임수(背山臨水)형의 지형에 각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발달한 곳에 자리 잡았다. 따라서 구릉지와 평탄지를 일부씩 포함하여 축조 된 평산성(平山城)이다.

서부리 일대 기장읍성은 복원되어 정비된 모습이다. 특히 기장읍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죽성리 왜성을 축성하면서 필요한 돌을 기장읍성을 사용하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성벽은 고려시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나 조선시대에는 주로 돌로 쌓은 석성이고 성을 쌓을 때 내부는 비탈이나 경사로 처리하고 외부 성벽만 쌓는 편축성(片築城)과 평지에서 내외·부 모두 쌓는 협축성(挾築城)이 있다. 특히 돌을 쌓아 올릴 때 밑쪽은 밑돌보다 윗돌을 약간 들여쌓는 퇴물림 쌓기와 반대인 내쌓기가 있다.
성벽 방어를 위해 성벽위에 낮은 담장을 올린 여장(女墻)도 갖추기도 하고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직사각형 또는 반원형의 구조물 치(稚), 치의 일종으로 성벽 모서리 부분에 설치한 각루(角樓), 성벽의 주변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낸 해자(垓字) 등 있다.
성문은 성벽에 개구부를 내 출입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홍예문이 많다. 문비, 즉 문짝은 목재판문으로 제작하여 바깥쪽에는 철엽을 씌어 화공 등에 대비하였고 홍예문 위에는 목조로 누각으로 설치 한 문루를 지어 장수의 지휘소 기능과 적을 감시하는 기능을 겸하였다. 또한 성문 보호를 위해 성문을 밖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외부에 설치한 이중 성벽인 옹성과 성문에 좌우에 설치한 치(稚)인 적대가 있다.

기장읍성 주변 골목길에서 본 돌담

『문종실록(문종실록)』에 “기장현 읍성은 주위가 1,527척(척), 높이가 11척이고, 여장(녀장)의 높이는 2척이며, 적대가 6개소, 문 3개소인데 옹성이 있고, 여장이 383개이며, 성안에 우물이 1개소인데 판 깊이가 20척이고 물의 깊이는 1척이며, 성밖의 방천(방천)에서 성을 뚫고 물을 끌어들여 못을 만들어 저수하였는데 깊이는 1척이며, 해자(해자)는 아직 파지 않았습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을 통하여 읍성의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으나 적대가 6개이고, 옹성이 돌려진 성문이 3개소이며, 여장이 383개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에는 읍성을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50보(步)이며 성내에 못과 우물이 각각 하나씩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각종 읍지(邑誌)에는 읍성이 석축으로 둘레가 3,197척이고 성 높이가 12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교리 일대의 읍성(古邑城)은 고려 우왕(禑王:1374~1388년)때 왜구의 침입으로 함락되어 관아가 모두 불에 전소되었다. 이후 다시 축조된 것이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 일대의 읍성이다.
교리근린공원 내 기장읍성은 부경문물연구원에서 2012년 지표 및 표본조사와 2014년 정밀조사를 한 결과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건물지를 확인하였고 청자류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기장의 옛 이름은 갑화량곡(甲火良谷)이고 별호(別號)는 차성(車城)이다. 갑화량곡은 "큰 마을" 이라는 의미로 옛 지명에 갑(甲)은 “크다”의 뜻이고, 화(火)는 "불" "벌"로서 곧 마을이나 성을 뜻한다. 기장이라는 지명은 두 가지로 보고 있는데, 첫째는 옥녀직금설로 기장은 옥황상제의 옥녀가 이곳에 내려 와서 베틀(織機)을 차려서(張) 비단을 짜고 (織錦) 물레질(紡車)을 한 곳(城)이기 때문에 베틀 기(機)와 베풀 장(張)으로서 기장(機張)이라 하였고, 둘째로 대읍성설(大邑城說)은 “갑화량곡”과 같이 큰 마을이라는 의미다.
삼국시대 기장지역은 지증왕 6년(505) 거칠산국(居漆山國)의 갑화량곡(甲火良谷)에서 동래군의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으로 개편되었고, 신문왕 때(685)에 9주 5소경의 군현제 개편시 삽양주에 편입되었다. 그리고『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장은 원래 갑화랑곡현(甲火良谷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757) 12월 양주(良州)관내 동래군 기장현으로 고쳤다”고 한다.


속오군을 지휘, 통솔한 기장 장관청(機張 將官廳)
기장 장관청은 조선 후기 동남해변을 지키던 기장 지역의 속오군을 지휘·통솔하기 위해서 파견된 군·장관들이 사용하던 집무소이다. 당초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에 지붕은 팔작지붕이었으나 건립된 후 몇 차례의 개·보수를 거쳐 오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변형이 이루어졌고, 특히 개인 주택으로 사용되면서 외관은 정면 8칸, 측면 2칸으로 크게 변형되었으며, 기와는 누수를 막기 위해 시멘트를 덮어서 지붕 윤곽만 겨우 드러난 상태였다.

건물 내부에 대한 조사 결과 대들보, 서까래, 도리, 기둥 등 주요한 구조부재 등이 원형대로 남아 있어 2013년~2014년에 걸쳐 전면 해체 보수를 실시하였고, 해체 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1835년(헌종 5)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기장 장관청은 동래부의 장관청(부산광역시지정 유형문화재 제8호)과 함께 전국적으로도 남아 있는 사례가 드문 관아 건물이다. 조선 중기 이래의 간소한 굴도리식 건물로써 건축사적으로 크게 주목될 뿐 아니라 문화재적 가치도 뛰어나며, 조선 후기 부산 및 기장 지역 관아 건축의 양상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건축 유구(遺構)로 우리나라 동남해안의 전략 요충지였던 기장군의 역사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2008년 12월 16일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7호로 지정·보존되어 오다가 건물의 중요성 및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3월 18일 부산광역시지정 유형문화재 제153호로 승격되었다.

장관청에서 본 서부리일대 기장읍성
기장읍성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는 부산시 지정 근대건조물로써 지붕의 기와형태가 일본식 구조이다
기장역 주변 한국철도공사가 소유하는 건물로써 과거 관사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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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를 침입한 전쟁으로 육군 15만 8,700명, 수군 9,000명 총 병력 약 20만 명의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1597년 화의 (강화회의)결렬로 왜장 가토 기요사마(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선봉으로 한 1만 4,500명 등 총 병력 14만 1.500명이 정월 15일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한다.

1차 침입 때 제1번대(番隊) 4월 13일 부산 침입, 제2번대 4월 16일 등 제9번대 까지 9회로 나누어 침략을 개시하였고 이 때 제2번대 주장이 가토 기요마사로 병력 2만 2,800명이였다. 가토가 인솔한 제2번대는 나고야를 떠나 대마도에 도착한 후 제1번대 고니시의 부산 상륙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19일 부산에 상륙하여 그 길로 경상 좌도를 택하여 장기·기장을 거쳐서 좌병영 울산을 함락하고, 경주·영천·신령·의흥·군위·비안을 거쳐 문경, 충주로 들어갔고 5월 3일에 한양에 당도하였다.

이후 함경도로 침입한 가토의 군은 선조 26년(1593년) 정월 조·명 연합군의 반격으로 평양에서 패퇴, 고니시 등이 한양으로 퇴각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서둘러 한양으로 퇴진하였다. 거듭된 패퇴로 5월 중순경에 서생포 왜성에 주둔하였고 선조 29년(1596년) 5월말에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같은 해 9월 정유재란 때 선봉장이 되어 다시 서생포 왜성에 주둔하였다.

서생포 왜성은 서생면 서생리 711일원으로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이 선조 25년 7월부터 쌓기 시작하여 다음해 선조 26년(1593년)에 완성한 일본식 평산성(平山城)으로 조선 백성의 강제 노동과 희생에 의해 만들어진 왜군 침략의 산물이다. 당시 왜군은 임진왜란 때 동래, 구포, 진해, 가덕도, 거제도, 기장, 서생 등 동남해안에 왜성을 쌓았고 정유재란 때에는 남해, 고성, 순천, 사천, 마산, 울산 등으로 확대하였고 총 31개의 왜성을 쌓았다.

이 중 고니시가 축성한 진해 웅천왜성이 규모가 가장 크고 서생포 왜성은 성곽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다. 최초의 왜성이자 왜성 본부 역할을 하는 부산왜성,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축성한 기장 죽성리 왜성, 정유재란 때 가토가 축성한 울산 왜성(학성공원)과 봉화로 서로 연락했다고 하여 일명 봉화성이라고 한다.

서생포 왜성은 내부 면적 45,960평, 성 외곽부 길이 2.5km, 평면상의 직선거리가 동서 약 870m, 남북 약 370m인 석성이고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성(본성) 정상부(해발 133m)에는 우물터와 지휘부이자 가토 기요마사가 기거했던 천수각(天守閣)터와 천수대(天守臺)가 남아 있다.

천수각은 높이 5m, 넓이 18×17m 천수대 위에 세워지는 건물로 3층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 사명대사가 서생포 왜성에서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한 내용을 기록한 “송운대사분충서난록(松雲大師奮忠序難錄)을 보면 천수각 규모를 알 수 있다.

『고층 누각에 큰 가옥도 지었다. 청정(淸正, 가토 기요마사)의 거처에 이르니 방 안 전체가 화려한 자리에 금칠한 병풍으로 둘러쳐졌다. - 중략 - 』

 

 

성벽 축조 방식은 외성인 경우는 돌로 외벽을 쌓고 내벽은 흙으로 채운 내탁식(內托式)이고 내성인 경우는 내·외벽 모두 돌로 쌓는 협축식 (夾築式)이다. 특히 내성은 계단식으로 석축을 쌓았는데, 산의 정상부에서 아래로 성벽을 세 겹(三之丸)으로 두르고 있고 각 구역이 독립적인 전투를 치를 수 있도록 되어있다. 또한 내성 출입구는 외부에서 직진 출입이 힘들도록 구성되어 있다. 성벽 높이는 6m이며 기울기가 지면에서 60도 내외다. 일본성의 특징 중 하나가 성벽의 기울기인데 이는 지진이 잦은 일본의 자연환경을 반영한 것이다.

 

외성(外城) 남문으로 실제 성벽 높이를 추정할수 있다.
외성(外城) 동문으로 이를 통과하여 회야강 선착장을 이용했음을 추정되며 선창장은 군수 물자 보급, 문서발송 등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외성(外城) 내 왜군의 막사 건물터로 주춧돌 없이 나무기둥을 땅속 깊이 박아 건물을 지었다.

 

내성(內城) 삼지환(三之丸)의 출입구
내성(內城) 이지환(二之丸)의 출입구
이지환(二之丸)에서 바라본 본성 일지환(一之丸)
내성(內城, 본성) 일지환(一之丸)의 출입구
일지환(一之丸)에서 바라 본 회야강과 동해바다

 

 

 

내성(內城, 본성)&nbsp; 정상부(해발 133m)의 중심 공간인 소곽(小郭) 출입구
소곽(小郭) 내 중심지역으로 우물터와 천수대( 天守臺 )와 천수각(天守閣)터가 남아있다.
왜성의 지휘부 건물이며 가토 기요마사가 기거했던 천수각(天守閣)터와&nbsp;천수대 ( 天守臺 )
천수대 ( 天守臺 ), 천수각(天守閣)터 올라가는 계단
소곽(小郭) 내 뒷편 출입구로 비상 또는 함락시 탈출통로로 추정됨
떨어진 벚꽃은 마치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끌려온 조선 백성의 흘린 피눈물이 승화된것 같다.
성벽에 새겨진 어느 조선백성 포로의 이름. 참으로 슬프다.

 

임진왜란 때 축성 된 왜성은 포로로 잡힌 조선백성의 강제 노동과 희생에 의한 결과물이다.

 

임진왜란 이후 생긴 경상도 민요 후렴구에 &ldquo;쾌지나 칭칭나네&rdquo; 가 &ldquo;쾌재라, 청정(淸正)이 도망간다.&ldquo;에서 유래했을 정도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조선 백성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였다.
서생포 왜성에는 가끔 일본관광객이 방문한다. 왜성을 보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침략의 역사를 반성을 할까? 아니면 그들 선조들의 성곽기술 훌륭함을 감상과 한강이남 식민지 건설 못함을 아쉬워할까?

 

선조 32년(1599년) 명나라 장수 마귀장군이 승전기념으로 축하연을 위해 창건한 초가 4칸을 연회 마친 후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53명의 충신들을 배향하기 위해 기와 4칸 창표사(蒼表祠)를 중창하여 세웠다. 이후 후손들과 유림들이 매년 음력 1월 15일에 재를 올려왔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으나 최근 울주군에서 2016년 11월 창표사를 중건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파괴 된 것을 최근 울주군에서&nbsp; 중건한 창표사( 蒼表祠 )

 

서생포 왜성은 사명대사가 임재왜란 당시 4차례 걸쳐 외교활동을 했던 곳이다. 임진왜란 발발 1년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8도 중 4도 즉 한강 이남을 차지할 계획으로 동남해안에 총 18개의 왜성을 쌓았다. 그 일환으로 일본은 조선을 배제하고 명과 함께 강화회의를 진행하였다. 이때 일본 측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주도하였는데 경쟁 관계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갑자기 뛰어들었다.

 서생포 왜성에 있던 가토는 강화 관련 공을 고니시가 차지 할 것을 우려했다. 이에 선조 27년(1594년) 2월에 포로로 잡혀있던 정연복에게 문서를 주어 경상좌병사 고언백에게 보내었다. 그 내용은 강화를 하자는 것이었는데 고언백은 즉시 도원수 권율과 의논하고 뒤에 명나라 장군 도독 유정에게 보이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로써 강화회의 당사자는 모두 바뀌었다. 선조 27년(1594년) 4월 12일 도원수 권율은 명나라 장수 유정의 요청에 따라 승병장(僧兵將)이었던 사명대사와 함께 화평(강화)을 청하였다.

첫날 회담에서 가토는 사명대사에게 첫째 조선의 8도 중 4도를 할양하고, 둘째 조선의 왕자 한 사람을 일본에 보내어 영주케 할 것, 셋째 조선의 대신 및 대관을 일본에 인질로 보낼 것, 넷째 종전과 같이 교린을 할 것, 다섯째 명나라 황녀를 일본에 후비로 삼을 것 등을 요구하여 결렬되었다. 2차 교섭은 7월 6일에 있었는데, 이때 종전의 강화조건에 다시 명나라 인질 1명 등 2개 조건을 추가 주장하여 또 다시 결렬되고 말았다.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강화회의가 있었으나 모두 결렬되고 말았다. 이는 일본의 의도를 파악한 사명대사가 강화를 결렬코자 했던 것이다.

1594년 7월 12일에서 16일 사이 가토 기요마사와 담판 지을 때 사명대사의 유명한 보물일화가 있다. 담판의 주요한 부분이 결렬되자 가토 기요마사가 사명당에게 “귀국에도 보물이 있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우리나라에서는 귀하의 머리를 금 천근과 읍 만호를 주고 산다고 하오. 이러한 막중한 것이 어찌 보배가 되지 않겠소” 라고 호방하게 맞받아쳤다고 한다.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 앞에서 '네 목을 따서 바치면 여럿 팔자 고친다'는 식의 말은 웬만한 강심장 아니면 힘들다. 사명대사의 대범함이 알 수 있다. 사명대사는 이밖에도 1604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가 8개월 동안 머무르며 설법과 외교활동을 통해 억류돼 있던 조선이 3,000명을 구출해 귀국시켰다. 

사명대사(1544 ~1610)는 스승인 서산대사와 더불어 임진왜란 때 승병장(僧兵將)이였다. 사명대사의 법명은 유정(惟政)이고 사명당(四溟堂)은 스님을 높여 부르는 호이다. 이외에도 송운(松雲), 종봉(鍾峯), 등이 사용되고 있다. 중종 39년(1544) 지금의 밀양시 무안면 고사리에서 태어났으며 13세에 김천 황악산 직지사로 출가했다. 18세에 승려 과거시험 선과(禪科)에 응시, 합격하여 글 잘하는 승려로 통했다. 직지사의 주지를 지내고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묘향산 보현사로 들어가 서산대사 휴정에게 3년간 수도하였다.

이후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을 두루 다니며 선 수행을 하다가 43세 되던 해 오대산에 머물렀다. 이때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고 강릉의 옥에 갇힌 일이 있었다. 그러자 강릉의 유생들이 앞장서 그의 무고함을 항소하였으며, 이에 힘입어 석방되었다. 유생들이 승려를 위해 구출운동을 벌인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이후 금강산 유점사에 들어가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염주대신 칼을 들었다. 선조 25년(1592), 49세 나이에 임란초기 승병장으로 평양 탈환참여 등 활약이 컸지만, 점차 전쟁보다 평화회담에 투입되었다. 임진왜란 종료 후 합천 해안사 홍제암에서 67세에 입적했고 나라에서는 그에게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시호를 내려 사명대사의 생애와 입적을 기렸다.

서생포 왜성에서 기억해야 할 왜장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척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선봉장으로 많은 조선 백성을 학살, 온갖 만행을 저질렀고 당시 백성들에게 악명이 높았다. 임진왜란 이후 생긴 경상도 민요 후렴구에 “쾌지나 칭칭나네” 가 “쾌재라, 청정(淸正)이 도망간다.“에서 유래했을 정도이다. 가토는 조선에서 퇴각하면서 많은 조선 백성을 강제로 끌고 갔다.

현재 구마모토에 울산마찌라는 마을이 남아 있을 정도이니 당시 얼마나 많은 백성이 끌려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때 영주가 가토 기요마사이다. 그리고 조선 백성의 희생에 의해 축성 된 구마모토 성이 일본 3대 명성 중 하나이다. 임진왜란 때 축성 된 왜성은 포로로 잡힌 조선백성의 강제 노동과 희생에 의한 결과물이다. 당시 성곽 축성을 했던 조선 백성의 손재주에 왜장들은 감탄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일본인이 하면 축성 완료를 1년 소요되는 것을 조선 백성은 3 ~ 4개월에 완료시키는 것이다. 임진왜란 후 일본으로 많은 조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강제 노동에 동원되고 노예로도 매매됐다. 끌려간 조선인 포로 가운데, 도공(陶工)들의 도자기 제조기술은 일본 도자기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서생포 왜성에는 가끔 일본관광객이 방문한다. 왜성을 보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침략의 역사를 반성을 할까? 아니면 그들 선조들의 성곽기술 훌륭함을 감상과 한강이남 식민지 건설 못함을 아쉬워할까?

 

멀리서 본 진하해수욕장

 

울산의 3대 수군 진성의 하나인 서생포 만호진성

『세종실록지리지』(울산)에는“서생포(西生浦)는 군 남쪽 44리 거리에 있다. 모두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있어 수어(守禦)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는 “만호(萬戶)가 지휘하며, 병선 20척에 군졸 767명이 성에 상주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이 있었고, 임진왜란 후에는 서생포 수군동첨절제사영(水軍同僉節制使)으로 승격되어 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가 이곳에 머물렀다. 이후 인근 서생포 왜성으로 이동하여 한말까지 유지 되어 왔다. 성의 축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염포진성이 성종 21년(1490년)5월에 쌓은 것으로 보아 이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된다.

 

서생포 만호 진성 안내표지판
서생포 만호 진성으로 가는 오솔길

 

진성(鎭城)은 외적의 침입이 잦은 국경 및 해안 같은 국방상 중요한 곳에 쌓은 성이고 만호(萬戶)는 원나라의 제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무관직 벼슬이다. 본래 그가 통솔하여 다스리는 민호(民戶)의 수에 따라 만호·천호·백호 등으로 불리다가, 차차 민호의 수와 관계없이 진장(鎭將)의 품계와 직책 등으로 변하였다. 수군의 만호(萬戶)는 육군의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와 같이 종4품으로 만호의 임기는 진에 가족을 데려가지 않는 경우 900일이었다.

서생포 진성은 염포진성, 개운포 진성와 더불어 조선 전기 울산에 세워진 수군진성이다. 일반적으로 수군 진성은 해안가에 위치하고 성안에 우물이 있고 적에게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바다 쪽에서는 볼 수 없는 막힌 포구에 위치하며 인접지역과 연락이 편리한곳을 성터로 삼는다. 성곽은 산 구릉을 따라 곡선형으로 하고 성벽은 수직으로 쌓은 견고한 석축성이고 성곽의 반은 산 구릉 위에 걸친 반산성(半山城)이며, 성 주위에는 성지(城址)를 파고 망루대는 구릉 위에 세운다. 그리고 출입정문은 배 선착장과 연결되어 있다.

서생포 만호 진성은 북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와 합류하고 있는 회야강이 있어 수군이 활동하기 유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성곽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구릉의 경사지를 이용하여 돌을 쌓았는데, 산허리에서부터 시작하여 회야강이 흐르는 북쪽평지를 연결하는 형태이다. 현재 북쪽성벽은 멸실되어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수군진성의 특성상 병선을 정박시키는 선창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남아있는 성벽의 길이는 약 440m이며, 성벽너비는 4m, 잔존높이는 1~1.5m이다. 서쪽성벽에는 문지로 보이는 시설이 일부 남아 있으며, 그 외측에서 발굴조사를 통하여 해자가 확인되었다. 이 진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왜군에 의해 함락되어 파손되었다.

 

성벽 흔적이 엿보인다
남아 있는 성벽의 길이는 약&nbsp; 440m 이며 ,&nbsp; 성벽너비는&nbsp; 4m,&nbsp; 잔존높이는&nbsp; 1~1.5m 이다 .
서생포 만호 진성은 북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와 합류하고 있는 회야강이 있어 수군이 활동하기 유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nbsp;&nbsp;현재 북쪽성벽은 멸실되어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수군진성의 특성상 병선을 정박시키는 선창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생(西生)의 지명 유래는 『삼국사기지리지』에 “동안군(東安郡)은 원래 생서량군(生西良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라는 기록에서 처음 등장 한다. 서생(西生)에서 ‘서(西)’는 고음(古音)인 ‘새’에서, ‘생(生)’은 ‘내’가 되어 벌이나 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서생(西生)이나 생서량(生西良)·동안(東安)은 「밝아오는 동쪽 들」을 뜻하는 ‘새내’로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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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25(15924)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일으킨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16세기 일본에서는 다도가 유행하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한 차를 좋아하여 다회를 자주 열었다고 한다. 이에 임진왜란에 참전한 왜군의 장수들은 수많은 조선의 도공과 사기장, 칠기장 같은 장인을 일본으로 끌고 갔다. 또한 장인 외에도 수 없이 많은 젊은 남녀를 끌고 가서 전쟁 노예로 삼아 상업적 이익을 취했다. 왜란 7년 동안 일본은 조선에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큰 만행과 악행을 저질렀다.

일본에 끌려 간 다양한 장인의 수는 기록에 따라 다르며,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10~ 20만 명, 일본 쪽에서는 56만 명으로 보고 있으나, 장인 외의 사람들도 일본에 끌려가서 포르투갈 상인에게 노예로 팔렸다고 하니 전체 인원은 파악하기가 어렵다. 참으로 천인공노할 짓을 일본이 하였다.

왜란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참담한 현장 중 하나가 죽성리 왜성(또는 두모포 왜성)이다. 이 왜성에서 도공을 비롯한 많은 장인들이 왜선을 통해 일본에 끌려 간 것이다. 이곳에는 서답골, 또는 세답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왜란 당시 전국에서 끌려온 수많은 도공들이 왜선에 타기 전 억류생활 하면서 빨래를 했다고 하여 세탁골이라 불리었다.

두호마을 뒷산 산정에 위치한 죽성리 왜성

 

1593(선조 26) 봄 왜군은 전남 여수에서 울산에 이르는 우리나라 동남해안 일대에 30여개의 성을 쌓고 이 성들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전으로 조선을 굴복시키려 하였다. 이들 왜성은 대개 강이나 바다에 근접한 구릉을 택하고 수송, 연락관계 등을 고려하여 선박의 출입이 편리한 장소에 성을 축성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죽성리 산 52-1일대의 죽성리 왜성은 이들 왜성 중 하나로 왜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인원 33000명 동원하여 축성한 것으로 인근 기장읍성과 두모포 진성 성벽 돌을 사용하였다. 이 왜성은 죽성포(두모포)만 서쪽의 서답골을 끼고 있는 두 개의 구릉을 중심으로 남쪽 높은 구릉(해발 64m)에 본성을 쌓고 북쪽 낮은 구릉(해발 45m)에 본성 방어를 위한 외성(지성)을 두른 형태다. 여기에 다시 본성과 외성의 서쪽 성벽 밖에 너비 7m 이상 구덩이(해자)를 길게 파 방어망을 강화했다.

죽성리 왜성 본성으로 올라가는 계단
죽성리 왜성 본성(해발 64m)
왜국으로 끌려간 도공들의 슬픔과 한이 맺힌 초목과 바위

성벽은 주로 화강암을 써서 70도 정도 경사지에 비스듬히 쌓았는데, 총 면적 2,600평에 둘레가 약 960m이고 성벽 높이는 약 4m이며 3단으로 축조했다. 외성 일부 구간에서는 수직으로 축조 된 성벽이 나타나는데 이는 기존의 두모포 진성과 연결시킨 것이다. 즉 기존 조선 수군 두모포 진성을 활용한 것이다. 죽성리 왜성은 청강천(죽성천)의 자연지형과 해자를 통해 북서쪽의 외곽 방어망을 강화하고 동쪽으로는 죽성만 포구를 감싸 안은 해안요새인 것이다. 이 성은 일본에서는 기장성이라고도 부르고, 왜란 중에는 울주군 서생포성(西生浦城)과 울산 학성(鶴城), 그리고 증산왜성(부산포성)을 연결하는 요충지 역할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유유히 동해로 흐르는 청강천(죽성천)

 

죽성천(竹城川), 청강천(淸江川)은 양달산(286m) 동쪽 산록에 있는 연곡저수지 일대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강으로 청강이라는 이름은 냇물이 너무 맑아 붙인 이름이다. 청강천을 장강(長江)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물이 맑아 물밑에 있는 돌조차 이끼 하나 끼지 않고 하얗게 되어 있다고 하여 &lsquo;백설청강(白石淸江)&rsquo;이라고 하였다.
바닷가에서 본 청강천 동해구
왜란 당시 도공들이 왜국으로 끌려갔던 죽성포(두모포)

죽성 지명은 이곳에 있던 성곽과 이곳에 죽이 많이 자생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곳에는 신라토성, 두모포 진성의 석축성(石築城), 또 임진왜란 때의 석축성인 왜성(倭城)이 있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의하면, “두모포는 현에서 동쪽 5리에 있고 수군만호(萬戶)가 수비하고 있다.” 라는 기록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두모포영은 수군만호가 있고 중종 5(1510)에 설치하였다.” 라는 내용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 기장현이 폐현되면서 두모포 만호영은 동래부 부산(釜山)으로 이전하였다. 죽성이 행정지명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이다.

죽성리 왜성 본성에서 본 두호마을 전경

현재 죽성리 왜성 입구는 철문에 의해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다. 땅 소유자인 신앙촌(천부교)에 대하여 기장군이 소송을 진행 중이다. 사유는 신앙촌이 문화재에 대하여 현상 변경을 하였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철문에 의해 닫혀진 죽성리 왜성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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