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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은 금오봉과 고위봉의 2개의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는 산으로 등산코스 매우 다양하다. 특히 많이 애용하는 코스가 초입의 송림이 아름다워서 배동 삼릉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배동 삼릉(拜洞 三陵)은 남산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기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피장자(被葬者)는 동쪽에 있는 능은 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154~184 재위), 중앙에 있는 능은 제53대 신덕왕(神德王, 912~917 재위), 서쪽에 있는 능은 제54대 경명왕(景明王, 917~924 재위)이다. 모두 박씨 왕들이다.

3기의 왕릉은 규모가 비슷한 원형봉토분으로 신덕왕릉(神德王陵)이 궁륭형 횡혈식석실분으로 미루어 볼 때 그리고 신덕왕릉(神德王陵)의 내부구조가 경주 노서동에 있는 3기의 석실분과 충효리고분, 서악리석실분 등과 같은 묘제 형식으로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 중엽에 조성 된 귀족 묘로 추정된다.

맨 뒤로 부터 피장자는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154~184 재위), 제53대 신덕왕(神德王, 912~917 재위), 맨 앞은 제54대 경명왕(景明王, 917~924 재위)

현재의 능은 조선 영조 6년에 이르러 박씨 일족이 지정한 것이다. 최근에 조선 왕릉의 혼유석 형태의 상석이 경명왕릉(景明王陵) 남쪽에 나란히 설치되었다.

최근에 조선 왕릉의 혼유석 형태의 상석이 경명왕릉(景明王陵) 남쪽에 나란히 설치되었다.

아달라왕릉(阿達羅王陵)은 봉분 높이 5.2m, 봉분 직경 20.4m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장지와 위치와 관련한 기록은 없다.

아달라왕릉(阿達羅王陵)의 규모는 봉분 높이  5.2m,  봉분 직경  20.4m

신덕왕릉(神德王陵)은 봉분 높이 5.7m, 봉분 직경 20.4m1935년과 1963719일에 걸쳐 두 번이나 도굴을 당했다. 1963년 도굴 계기로 내부조사를 한 결과 횡혈식석실분(굴식돌방무덤)으로 피장자(被葬者)2인이 합장된 것이었다. 내부구조는 할석(割石)으로 쌓은 석실분으로 평면이 정방형에 가깝고 천정은 궁륭형(穹窿形)이었다.

신덕왕릉(神德王陵)은 봉분 높이 5.7m, 봉분 직경 20.4m로 1935년과 1963년 7월 19일에 걸쳐 두 번이나 도굴을 당했다.

이 능에서 주목되는 점은 북벽과, , 서벽 일부에 연속해서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을 칠함으로서 마치 병풍을 둘서 세운 채색된 벽화가 있었다. 입구에서 볼 때 정면인 북쪽 벽면에 6, 그리고 그 좌우 동, 서 벽면에 3폭으로 모두 12폭이 채색되었다.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이었다.

신덕왕(神德王) 사망 후 죽성(竹城)에서 장사지냈다. 유물은 도굴로 인해 발견되지 않았다.

경명왕릉(景明王陵)은 봉분 높이 4.5m, 봉분 직경 15.9m로 봉분자락에는 괴석을 쌓은 호석과 괴석의 받침석이 2~3개 확인된다. 경명왕(景明王) 사망 후 황복사 북쪽에서 장사지냈다.

경명왕릉(景明王陵) 규모는 봉분 높이 4.5m, 봉분 직경 15.9m
봉분자락에는 괴석을 쌓은 호석과 괴석의 받침석이 2~3개 확인된다.

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 1542~ 1843월 재위, 301개월)

성은 박씨(朴氏), 그는 일성의 맏아들이다. 그는 키가 일곱 자였으며 풍채가 훌륭하고 얼굴 모양이 기이하였다. 어머니는 박씨인데 그녀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내례부인(內禮夫人)이고 6대 지마왕의 딸이다8촌 사이의 족내혼으로 박씨 왕족의 힘을 규합하려는 세력연합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즉위 원년(154년) 3, 계원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군무와 정사를 맡겼고 즉위 2년 봄 정월, 왕이 시조 묘에 직접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고 흥선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34, 계립령(鷄立嶺: 경북 풍기에서 충북 단양으로 통하는 조령 동쪽 20리 지점, 지금의 문경새재 동쪽고개)에 길이 개통되었다.

42, 감물현(충북 괴산 감물면)과 마산현(충남 보령 남포면) 두 현을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3, 왕이 장령진에 행차하여 주둔하는 병사들을 위로하고 각각의 군사들에게 군복을 하사하였다53, 죽령(竹嶺:풍기 북쪽고개)이 개통되었고 왜인이 예방해왔고 74, 폭우로 알천이 넘쳐서 집이 떠내려가고, 금성 북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112, 서울에 용이 나타났고 1210, 아찬 길선(吉宣)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처형을 두려워하여 백제로 도망갔다. 왕이 글을 보내 그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백제가 응하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는 성을 닫고 수비하며 나오지 않았고 신라 군사는 식량이 떨어져 돌아왔다.

147, 백제가 서쪽의 두 성을 격파하고, 주민 1천 명을 잡아 갔다8, 일길찬 흥선으로 하여금 군사 2만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게 하고, 또한 왕은 기병 8천을 거느리고 한수로부터 그 곳에 도착하였다. 백제는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를 돌려주고 화친을 요구하였다.

15년 여름 4, 이찬 계원이 사망하자 흥선을 이찬에 임명하였고 172, 시조 묘를 중수하였고 10, 백제가 변경을 약탈하였다19년 봄 정월, 구도를 파진찬에 임명하고 구수혜를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20(서기 173) 여름 5, 왜국 여왕 비미호(卑彌乎, 히미코)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왔다21년 봄 정월, 흙비가 내렸고 2, 가뭄이 들어 우물과 샘물이 말랐다.

313, 아달라왕은 아들 없이 별세하였고 9대 벌휴왕 등극으로 석탈해왕 이후 본격적인 석씨 왕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삼국사기 아달라왕 즉위 20(서기 173)에 등장하는 왜국 여왕 비미호(卑彌乎, 히미코)는 일본 사학계에서는 그녀의 존재를 부정하고 대신 신공황후라고 주장하며 일본서기에도 관련 기록이 없다. 그러나 삼국지 위지동이전 에 여왕 비미호(卑彌乎)는 등장하며 남편 없이 남동생이 보좌하며 재위 기간 74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고 정초 2(238)에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자기 나라에 조공할 것을 요구했다. 비미호(卑彌乎)와 그녀의 후계자 일여 여왕은 약 120년 동안 일본을 통치했다.

일본 역사에서 왕이 여왕인 경우는 비미호와 일여 이외에도 추고, 황극, 효명 등 있었다. 그런데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세운 나라는 신무천황 계통의 종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비미호(卑彌乎)가 왜의 초대 천황(덴노)인 신무(神武) 왕실이 혼란인 틈을 노려 왕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세운 것이다.

그래서 일본 사학계에서는 비미호와 일여 여왕 통치기간을 부정하고 있다대신 신공, 응신, 인덕천황 등의 재위 기간을 늘려서 120년 공백을 메웠다일본인들은 그들의 천황이 하나의 종족이라고 주장하며, 신격화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황후는 201년부터 269년까지 왜를 통치하면서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다스렸고, 신라를 정벌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자기보다 21살 많은 중애천황한테 시집을 갔다고 하며 269100세로 죽었다고 하니 이 무렵이 신라 아달라왕 즉위 19(서기 173) 무렵이다.

삼국유사 권제1 2 기이 상(紀異 上)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4년 정유(丁酉; 157)에 동해(東海) 바닷가에는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조(海藻)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가 나타나더니 연오랑을 등에 업고 일본(日本)으로 가 버렸다.

이것을 본 나라 사람들은, “이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하고 세워서 왕을 삼았다[<일본제기日本帝紀>를 상고해 보면 전후(前後)에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이는 변읍(邊邑)의 조그만 왕()이고 참말 왕()은 아닐 것이다].

세오녀(細烏女)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바닷가에 나가서 찾아보니 남편이 벗어 놓은 신이 있었다.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그 바위는 또한 세오녀를 업고 마치 연오랑 때와 같이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그녀로 귀비(貴妃)를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에 광채(光彩)가 없었다. 일자(日者)가 왕께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우리나라에 내려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생기는 것입니다했다.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서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은 말한다.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데 어찌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비()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비단을 주니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을 보고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런 뒤에 해와 달의 정기가 전과 같았다. 이에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수하고 국보(國寶)로 삼으니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한다. 또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한다.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설화  당시 신라 상황을 살펴보면 아달라왕 재위기간 동안에 문경새재, 북 괴산 감물면, 충남 보령 남포면, 풍기 까지 영토를 넓게 확장했다. 이러한 과정에 근기국(현재 포항)을 신라에 복속시켰고 이때 나라가 신라에 정복당하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는 일본으로 정치적 망명을 한 것이다.

연오랑(延烏郞) 이름을 풀이하면 까마귀를 끌어들이는 남자라는 뜻이다까마귀()는 태양의 정기를 세발 달린 까마귀(삼족오)로 형상화시킨 새로 고대부터 태양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그래서 연오랑은 이름이 아니라 소임을 나타내는 직업 명칭이다. 즉 일식 때 까마귀를 잡아서 생초비단에 감싸다가 태양을 향해 날아가도록 풀어주는 소임인 것이다. 이때 세오녀(細烏女)는 까마귀를 감싸는 생초비단 보자기를 짜는 일을 한 것이다.

연오랑 세오녀가 살았던 곳은 포항시 남구 오천읍 세계리(世界里)이다마을이름은 세오녀가 짠 비단으로 일월지에 제사를 지냈더니, 그 빛이 고지대인 이곳에 제일 먼저 비쳐 온 세계가 환하게 되었다고 하여 유래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가 나타낸 배경은 박씨 왕조가 아달라왕 시대로 막을 내리고, 석씨 왕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렸다는 것이다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인데 해와 달의 기운이 사라졌다는 것은 박씨 왕조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53대 신덕왕(神德王 : 9124~ 9177월 재위, 53개월)

성은 박씨(朴氏)이며, 이름은 경휘(景暉)이고, 8대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다아버지는 예겸(乂兼)이고 정강왕 때 대아찬을 지냈다. 어머니는 정화부인(貞和夫人)이다. 왕비는 김씨이고 헌강대왕의 딸인 의성왕후(義成王后)이다. 효공왕이 별세하였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후에 승영(昇英)은 경명왕(景明王), 위응(魏膺)은 경애왕(景哀王)이 된다. 이 시대에 신라는 실제로 경주지역을 다스리는 정도였고, 국토의 대부분이 궁예와 견훤의 세력안에 있었다. 즉위5(서기916) 견훤은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였고 신라는 더 이상 궁예나 견훤의 공격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원년(912년) 5, 선친을 선성대왕으로 추존하고, 정화 태후, 왕비를 의성왕후라 하고, 아들 승영(昇英)을 왕태자로 삼았다. 이찬 계강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즉위 33, 궁예가 연호 수덕 만세를 정개로 고쳤다. 이 해가 정개 원년이다.

5년 가을 8, 견훤이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6년 봄 정월, 금성이 달을 범하였고 7,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신덕이라 하고, 죽성에 장사지냈다.

54대 경명왕(景明王, 9177~ 9248월 재위, 71개월)

성은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승영(昇英)이고 아버지는 신덕왕,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황후다. 경명왕 때 신라 지방은 궁예와 견훤에게 거의 다 점령당한 상태였다. 원년(916년) 8, 왕의 아우 이찬 위응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대아찬 유렴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즉위 22, 일길찬 현승이 모반하다가 처형되었고 6, 궁예의 부하들의 인심이 갑자기 변하여 태조를 추대하자, 궁예가 도주하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태조가 즉위하여 연호를 새로 정하고, 이 해를 원년으로 하였다. 7, 상주의 도적 두목 아자개가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3, 사천왕사의 소상이 잡고 있던 활줄이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에 그려진 개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그 개가 짖는 것 같았다. 상대등 김 성을 각찬, 시중 언옹을 사찬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가 송악군으로 도읍을 옮겼다.

4년 봄 정월, 왕이 태조와 사신을 교환하고 수호 관계를 맺었고 2, 강주 장군 윤웅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10, 후백제 군주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 진례로 진군하였다. 왕이 아찬 김율을 태조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게 하니, 견훤이 이 말을 듣고 물러갔다.

5년 봄 정월, 김 율이 왕에게 제가 지난해 고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려왕이 저에게 묻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으니, 소위 장륙 불상과 9층탑과 성대가 그것이라고 들었다. 불상과 탑은 지금도 있는 줄 알거니와 성대가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구나.’라고 하므로, 제가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성대란 어떠한 보물인가?” 그러나 이를 아는 자가 없었다.

이 때 황룡사에 중이 있었는데 나이 90세가 넘었다. 그가 말하였다. “그 보배로운 허리띠는 진평대왕이 사용하던 것인데, 여러 대를 전해 내려오면서 남쪽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왕이 즉시 창고를 열어 찾게 하였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날을 정하여 치성을 드리고 제사를 지낸 뒤에야 그것이 발견되었다.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되었고 매우 길어서 보통 사람은 맬 수가 없었다.

2, 말갈의 일부인 달고의 무리가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이 때 태조의 장수 견권이 삭주를 지키고 있다가, 기병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여 대파하니,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태조에게 사신을 통해 편지를 보내어 사례하였다.

6년 봄 정월, 하지성 장군 원봉과 명주 장군 순식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의 귀순을 기념하여 원봉의 본 성을 순주라 하였으며, 순식에게 왕씨 성을 내려 주었다. 이 달에 진보성 장군 홍 술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7년 가을 7, 왕이 지성 장군 성달과 경산부 장군 양문 등에게 명령하여 태조에게 항복하게 하였다. 왕이 창부 시랑 김낙과 녹사 참군 김유경을 후당에 입조시키고 토산물을 바쳤다. 장종이 정도에 따라 선물을 주었다.

8년 봄 정월,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천주 절도사 왕 봉규가 역시 후당에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6, 왕이 조산대부 창부시랑 김악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니, 장종이 그에게 조의대부시위위경의 관직을 주었다8,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경명이라 하고, 황복사 북쪽에 장사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케 하였다.

삼국유사 제 2권 기이 하(紀異 下) 2 경명왕(景明王)

54대 경명왕(景明王) 때인 정명(貞明) 5년 무인(戊寅; 918)에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壁畵) 속의 개가 울었다. 이 때문에 3일 동안 불경을 외어 이를 물리쳤으나 반일(半日)이 지나자 그 개가 또 울었다.

7년 경진(庚辰; 920) 2월에는 황룡사탑(皇龍寺塔) 그림자가 금모사지(今毛舍知)의 집 뜰 안에 한 달 동안이나 거꾸로 서서 비쳐 보였다.

10월에 사천왕사(四天王寺)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으며, 벽화 속의 개가 뜰로 달려 나왔다가 다시 벽의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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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7대 일성왕릉(逸聖王陵)은 남산 서북쪽 산기슭 송림 가운데 있으며 남간사지 동편에 있다. ()은 높이 5.3m, 직경 15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규모가 소형이고 서남쪽 방향으로 약간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였다. 봉분 자락의 서편에는 화강암 괴석으로 된 호석일부가 노출되어 있고 묘제 양식은 통일기의 횡혈식석실분(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능 앞의 표석은 박씨 문중에서 고종 8(1871)에 세웠으며 상석은 1953년 박익현(朴益鉉)이 설치를 하였다. 능 앞 2단 축대는 능을 보호하기 위해 197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의 능은 문헌기록에 없고 확인되지 않음에도 조선 영조6년에 박씨 일족이 일성왕릉(逸聖王陵)이라고 주장하며 지정하였다.

일성왕의 장지에 대한 남아 있는 기록은 없다. 그래서 일부학자들은 삼국사기에 경애왕의 장지가 해목령이라 기록하고 있어 현재 일성왕릉을 경애왕릉으로 추정한다.

신라 7대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 재위 134 ~ 154)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일성(逸聖), 왕호는 이사금(尼師今)으로 나이 여든에 왕위에 올랐다. 왕비는 지소례왕의 딸 박씨이다. 삼국사기에는 제3대 유리왕(儒理王)의 맏아들이라 기록되어있고 삼국유사에는 유리왕의 조카 혹은 제6대 지마왕(祗摩王)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유리왕(儒理王)의 맏아들로 보고 있다.

일성왕(逸聖王)은 늦게 왕위에 올랐으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 유리왕이 사망할 즈음 그는 어린 애기라서 그의 고모부 석탈해가 신라 4대 왕이 되었다. 그리고 석탈해왕이 죽을 당시에 왕자가 있었으나 너무 어렸다. 그래서 왕위 계승의 1순위는 일성(逸聖)이였다.

그러나 그의 이복 동생 파사(波娑)에게 왕위가 돌아갔다. 이유는 파사의 부인인 사성부인이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김알지의 손녀였기 때문이다. 이에 일성(逸聖)은 파사왕과의 관계 등 정치역학 구도를 고려한 끝에 왜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였다. 당시 분위기는 일성(逸聖)에게 불리했으며 강압적이거나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판단된다. 신라를 떠날 때 여러 도공과 노비들이 그를 따랐다.

신라 초기 왜국과의 관계를 보면 왜인들은 꾸준히 신라에 침범하여 노략질을 하였는데 이들은 대마도에서 활동하는 왜구로 추정된다. 4대 석탈해왕 즉위 3년(서기 60년) 5월에 비로서 왜국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했고 6대 지마왕 즉위 12년(서기 124년) 3월에 왜국과 강화하였다.

일성(逸聖)이 왜국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하는 중에 본국 신라로부터 조카 6대 지마왕이 후계자 없이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귀국해달라고 요청을 받고 서기 134840년 만에 신라로 돌아와 신라 7대 일성왕(逸聖王)이 되었다.

일성(逸聖)의 망명에 관한 기록은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 수인천황 3(서기 93) 3월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이 내귀하였다. 가지고 온 물건은 우태옥 1, 족고옥 1, 조록록의 적석옥 1, 출석의 작은 칼 1, 출석의 창 1, 일경(日鏡 : 거울) 1, 태의 신리(神籬) 1구 등 일곱 가지였다. 그것들을 단마국(但馬國)에 모셔 놓고 항상 신보(神寶)로 삼았다.

또 다음과 같은 다른 내용도 있다.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이 내귀하였다. 처음에 천일창이 배를 타고 파마국(播馬國)에 정박해 육속읍에 있었다. 그러자 천황이 삼륜군의 선조 대우주(大友主)와 왜직의 선조 장미시(長尾市)를 파마에 보내 천일창(天日槍)에게 그대는 누구이며,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천일창(天日槍)저는 신라국의 왕자입니다. 일본국에 성황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나라를 아우 지고(知古 : 파사왕)에게 주고 왔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바친 물건이 엽세주(), 족고주, 조록록의 적고주, 출석의 칼, 출석의 창, 일경(日鏡), 태의 신리(神籬), 담협천의 큰칼 등 모두 여덟 가지였다.

천황이 천일창(天日槍)을 불러 심미국의 육속읍과 담로도의 출천읍 두 읍을 줄 테니 네 마음대로 살아라.”고 했다. 천일창(天日槍)만일 천은을 내리시어 신이 원하는 곳을 주신다면 신은 직접 제국을 돌아다녀 보고 살 곳을 정하겠으니 신의 마음에 드는 곳을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부탁하자 허락했다.

천일창(天日槍)은 토도하(菟道河)를 거슬러 올라가서 북쪽인 근강국(近江國)의 오명읍에 들어가 잠시 살았다. 다시 근강에서 약협국을 거쳐 서쪽인 단마국(但馬國)에 가서 거주지를 정하였다. 근강국(近江國) 경촌 골짜기의 도기쟁이들은 천일창(天日槍)을 따라온 자들이다.

천일창(天日槍)은 단마국(但馬國)의 출도 사람 태이(太耳)의 딸 마다오(麻多烏)에게 장가를 들어 단마제조(但馬諸助)를 낳아다. 제조(諸助)는 단마일유제(但馬日楢杵)를 낳았고 일유제(日楢杵)는 청언(淸彦)을 낳았다. 청언은 전도간수(田道間守)를 낳았다고 한다.

왼쪽 보이는 저수지는 금강저수지이다.

일성왕(逸聖王)은 즉위 원년(134) 9,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고 즉위 2년 봄 정월에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즉위 42,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여, 장령 지방의 다섯 곳의 책을 불태웠다. 즉위 52, 금성에 정사당(政事堂) 을 설치하여 중요한 국정을 논의했다. 그해 10, 왕이 북쪽으로 순행하고, 태백산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다.

보광사를 지나서 본 일성왕릉이 위치하고 있는 송림

즉위 112, 왕이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요, 먹는 것은 백성들에게 하늘처럼 귀중한 것이다. 모든 주와 군에서는 제방을 수리하고 밭과 들을 개간하여 넓히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민간에서 금주옥(金銀珠玉)의 사용을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보광사를 지나서 만나는 금강저수지

즉위 12,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남쪽 지방이 가장 심하여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식량을 운반하여 그들에게 공급하였다즉위 13년 겨울 10, 압독(押督 :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지방의 부족국가)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풀어 평정하고, 남은 무리들을 남쪽 지방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일성왕릉 초입에 있는 보광사

즉위 182, 이찬 웅선이 사망하자, 대선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즉위 2010, 궁궐 대문에 불이 났고 212, 왕이 별세하였다.

경덕사
경덕사는 금산 가리촌장 배지타와 후손 고려 개국공신 무열공 배현경을 모신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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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30대 문무대왕비의 비편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비는 무너져 파괴되었던 것을 조선 정조 때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서 두 개의 비편이 발견되었다. 당시 문인 홍양호(洪良浩)의 『이계집(耳溪集)』에 의하면, 정조 20년(1796년)에 경주지방 사람이 이 비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그 비문의 탁본 네 장이 청나라 고증학자 유희해(劉喜海)에게 들어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실렸다. 유희해(劉喜海)는 네 장의 탁본을 제1, 2, 3, 4석으로 호칭하여 4개의 비편으로 파악하였으나, 실제는 2개의 비편의 앞, 뒤 면에 새겨진 것이었다.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 중인 문무대왕비편

그런데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에서 비편 하나가 다시 발견되었는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1796년에 발견되었던 비편 중 비신 하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해동금석원』의 제1석과 제4석은 비의 상부 앞면과 뒷면에, 제2석과 제3석은 비의 하부 앞면과 뒷면에 해당함을 알게 되었다.

비의 석질은 적갈색 화성암(火成岩)으로 글씨는 가로 3.2cm, 세로 3.3cm로 구획된 네모칸 안에 자경(字徑) 2cm 정도로 새겨져 있다. 서체는 구양순체의 해서(楷書)이며, 문장은 사륙변려체이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급찬 국학소경(國學少卿) 김모이며 이름은 글자가 마멸되어 알 수 없다.

비문의 전체적인 내용은 파손된 부분이 많아 알기 어렵지만, 남아 있는 비편을 보면 한당류(漢唐流)의 명문장을 모방하였고, 중국의 경전이나 고사성어에서 따온 미사여구가 많이 들어 있다.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 신라 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의 사적, 문무왕의 사적, 백제 평정 사실 등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문무왕의 유언, 문무왕의 장례 사실, 비명(碑銘) 등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의 건립 연대에 대해서는 유희해(劉喜海)는 681년(신문왕 1)으로 추정하였고, 동양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은 직명과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국학설치(國學設置) 기사를 관련시켜 682년(신문왕 2년) 6월 이후로 보았다. 한편 김창호(金昌鎬)는 682년(신문왕 2년) 7월 25일로 보았다.

비의 받침돌인 귀부는 사천왕사터의 서귀부인 것을 확인하였다. 서귀부는 도로변에 있는 귀부로 원래 방향은 능지탑을 바라보는 북쪽방향인데 일제강점기 때 철도공사에 따라 남쪽방향으로 바뀌어졌다.

사천왕사터의 동귀부와 서귀부

문무대왕비문 내용 중 논란이 된 것은 秺侯祭天之胤傅七葉十五代祖星漢王 글귀다. 한서(漢書) 김일제전(金日磾傳) 따르면 투후(秺侯)는 한()나라 7대왕 무제(武帝)가 김일제(金日磾 :B.C. 134~86)에게 내린 작위다. 김일제(金日磾)는 흉노(匈奴) 휴도왕(休屠王)의 태자로서 자()는 옹숙(翁叔)이고 곽거병(霍去病)의 흉노 토벌 시 포로가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14세였고 동생 윤()과 어머니 알씨(閼氏)도 포로가 되었다. 그 뒤 한나라 마감(馬監) 등을 하였고, 망하라(莽何羅)의 난() 때 무제(武帝)를 구한 공으로 투후(秺侯 : 지금의 중국 하남성 일대인 지방을 다스리는 제후 벼슬)에 봉해졌다. 김일제 성()인 김씨(金氏)는 무제(武帝)로부터 사성(賜姓)을 받은 것이다.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休屠)’가 흉노의 왕으로 살고 있던 땅은 지금 서안 북쪽 땅인 무위(武危)의 언지산 (焉支山)과 돈황(敦煌) 삼위산(三危山)이 있는 감숙성(甘肅省) 지역이다.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힌 곳은 삼위산이다.

사천왕사터 서귀부

이 지대는 오초령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신강에 이르기까지 길이가 1000km에 이르며, 그 폭은 40100km나 되는 광활한 땅이다. 중국 사람들은 황하의 서쪽을 달리고 있는 긴 복도라는 뜻으로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고 부른다.

한족(漢族)흉노 공포증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41년 한(漢) 무제(武帝)가 즉위하면서부터였다. 기원전 200년 고조 유방(劉邦)32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묵특(冒頓) 선우가 거느린 30만명의 기마 궁병(弓兵)에게 참패한 이후 매년 흉노에 막대한 조공을 바치며 살아왔었다.

김일제의 묘는 무제(武帝·14187 BC)가 묻혀 있는, 중국 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 남위향(南位鄕) 도상촌(道常村)에 있다. 무제가 묻혀 있는 무릉의 들머리에서 동쪽으로 1km나 떨어진 곳이다. 묘의 높이는 12m, 동편의 길이는 41.2m, 서편이 41.9m, 남편이 35.5m, 북편이 36.3m로 경주의 천마총 규모와 비슷하다. 김일제의 묘 꼭대기는 잔디가 벗겨져 있고 도굴 된 흔적도 있다.

김일제가 투후 작위를 받은 후 아들 상()도 투후가 되나 일찍 죽고, 후에 5대손인 성()까지 투후 벼슬을 받아 제후국의 왕이 되기에 이른다그런데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 의하면 유방(劉邦)이 세운 한나라는 13200여년 만에 왕망(王莽·BC 45AD 23)에게 나라를 뺏긴다.

왕망(王莽)은 한나라 10대 원제(元帝·BC 4933)의 황후 왕씨(王氏) 가문 출신으로 나라이름을 신()이라 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 후 15년 만에 한나라 황족 유수(劉秀)에 의해 멸망하고 후한(後漢)이 건국되었다. 역사에서는 이전을 전한(前漢)이라고 하여 구별하고 있다.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당()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의 남편으로 당에게는 이모부이다. 즉 왕망은 투후 김일제 계열과는 외가 사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김일제의 후손들은 왕망이 ()나라를 세우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이유로 신나라 멸망과 함께 김일제 후손도 역사에서 사라졌다.

신나라가  망한 후 발해연안 또는 산동 반도 지방에서 항거 세력을 형성하다가 완전히 무너졌고 이 때 김일제 후손들이 멸문의 지경에 이르자 한반도로 유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쪽 김해 및 제주도, 바다를 건너 일본 규슈와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왕망 때 만든 화폐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되는 것은 왕망과 같이 참여했던 세력이 대륙 밖으로 이동한 흔적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十五代祖星漢王에서 성한왕(星漢王)은 누구인가?

신라 56명의 왕 중에는 성한왕이라는 왕은 없고 경주 김씨 족보에도 성한왕 관련 내용이 없다. 신라 42대 흥덕왕릉 비편 중 일부에서 흥덕왕이 태조(太祖) 성한(星漢)24대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932년 서악서원 영귀루 보수 때 축대석으로 발견 된 김인문 묘비에는 절반이상이 훼손되었으나 태조(太祖) 한왕(漢王)이라고 기록이 있어 일부 학자는 성한왕의 약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에 성한왕(星漢王)에 대해서는 김알지(金閼智)로 보는 견해, 알지의 아들인 세()(())으로 보는 견해, 알지의 7세손으로 김씨 중 최초로 왕위에 오른 미추왕(味鄒王)으로 보는 견해, 등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문무대왕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

그럼 고고학적 유물로써 북방기마민족의 흔적을 찾아보자.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돌무지덧널무덤)4세기 중반 때 경주에서 출현한 묘제양식으로 바닥에 냇돌을 깔아 그 주위에 통나무로 상자모양의 목곽, 즉 방을 만들었는데 구성은 주곽과 부곽을 조성하여 설치하였고 주곽에는 목관을 안치하였다. 부곽에는 부장품을 매장하였다.

그리고는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리고 바깥에는 흙을 부어 거대한 봉분을 조성하는 방식이다. 이 적석목곽분은 흉노족(匈奴族)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이 조성했던 무덤과 매우 유사한 방식이다. 백제와 고구려의 묘제양식은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 정상부에 시신을 안치하는 적석총(돌무지무덤)이다.

신라의 묘제양식은 목관묘 목곽묘 적석목곽묘() 횡혈식석실분의 단계로 시대별 발전시켜 나갔다.
경주 대릉원 에 있는 황남대총(皇南大塚, 98호 고분)은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형식의 고분으로 737월에 발굴하였는데 지름 80m, 높이 23m의 고분 둘을 연결시킨 쌍분(雙墳)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신라 17대 내물왕 부부로 추정하고 있는데  내물왕은 재위 46년간 신라의 기틀을 확립한 왕이었고 김씨(金氏) 왕족 시대를 열었다.

경주 대릉원

즉 남분(南墳)은 내물왕, 북분(北墳)은 내물왕의 부인인 보반(保反)인 것이다. 능을 조성할 때 먼저 남분(南墳)을 만들고 나중에 그 고분의 일부를 파내고 북분(北墳)을 연결하였다. 즉 왕이 왕비보다 먼저 사망한 것이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 된 유리병

남분(南墳)에서는 환두대도, 금동관, 은제 잔, 상감 팔찌, 유리제품, 갑옷 등 유물이 출토되었고 60세 전, 후의 남자 턱뼈도 나왔어 피장자는 남자로 확인된다. 그리고 주곽에서 순장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15세 전후의 소녀 뼈가 나왔고 말 순장도 발견되었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 된 금제 관식

북분에서는 금관, 반지, 부인대(夫人帶)라고 쓰인 허리띠 장식이 나왔으며 갑옷은 출토되지 않았고 피장자는 키 150m의 여자로 추정된다. 부장품과 적석목곽분의 형식을 보면 남분은 4세기 후반~5세기 초반, 북분은 5세기 전반 중엽 이전에 속한다3세기 중엽 13대 미추왕(261~ 284) 이후 23대 법흥왕 사이에는 석씨를 포함하여 10명의 왕이 있었다.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 된 금반지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 된 은잔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 된 고배

22대 지증왕(500~ 514)은 재위 3(502)에 순장을 금지시켰고 재위 4년에는 국호를 신라로 확정했다.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칭호를 했고 묘호는 지증이라고 했는데 이때부터 신라에 시호법이 사용되었다.

23대 법흥왕(514~ 540)은 처음으로 중국처럼 연호를 정하고 사용했는데 건원(建元)이였다. 능은 애공사 북쪽 봉우리로 평지에서 산자락으로 매장되었는데 묘제는 횡혈식 석실분(굴식돌방무덤)이고 출토 된 유물은 황금유물이 아닌 토기 류가 주를 이룬다.

서봉총 금관

황남대총에서 출토 된 금관이 지금까지 신라의 금관 중 가장 아름답다금관이 나온 곳은 황남대총을 포함하여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 부부총이다금관의 장식은 출자(出字) 형 나무모양에 좌, 우 사슴뿔 모양의 형상을 하고 있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에는 나무가 하늘로 통하는 길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고 유라시아에는 사슴뿔모양의 모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하늘로 인도하는 전령사 역할을 한다.

고구려에서 왕은 금관이 없고 비단 모자를 사용하고 백제왕도 금관이 없고 금꽃 장식을 한 모자를 사용한다. 중국에서는 비단으로 만든 관을 사용한다.

천마총 금관

신라 고분만큼 황금 세공품이 많이 나오는 유적도 세계적으로 드물다. 흉노 등 유목 민족의 황금 숭배 사상은 유명하다. 신라금관은 중국식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스키타이로 상징되는 북방 유목 민족들이 사용한 양식인데 로마의 관(冠)을 상당 부분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

1924년 경주 노동동 금령총에서 발굴된 국보인 도기 기마인물상(국보 91) 명기(明器)는 전형적인 유목민의 차림이다. 말잔 등에 실려 있는 동복(청동솥)도 같은 형태다. 동복은 유목민의 상징적인 유물로 스키타이식과 흉노식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흉노의 동복이 스키타이식과 구별되는 것은 화려한 문양이 있고 손잡이의 형태가 다르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동복은 북한과 중국 길림지역에서 발견되었고 북부중국 초원과 내몽고 오르도스지방, 남부소련, 헝가리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경주고분과 김해의 가야고분인 대성동에서 발견되는 동복은 북방계 흉노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유물이다.

기마인물상(국보 91호) 명기(明器) 주인상

동북의 용도는 유목민 족장들이 사용하든 용기로 제례의식에 사용하는 고기를 삶을 때 쓰는 용기다. 말 탄 기마인물이 말잔등에 동복을 싣고 있는데 그 주인공은 족장의 지위에 있는 실제 피장자의 모습일 수도 있다.

기마인물상(국보 91호) 명기(明器) 하인상

신라 적석목곽분의 주인공들은 반도 서북부를 거쳐 동남진(東南進)을 한 북방기마민족( 스키타이-흉노 계통)으로 시베리아-오르도스계의 대형 적석목곽분과 철기, 승석문(繩蓆文) 토기, 금세공기술을 그대로 갖고 남하한 것이다.

흉노(匈奴)는 대체로 몽골 고원의 서쪽 알타이 지역, 즉 지금의 중앙아시아와 가까운 곳에 살았다. 알타이 산맥의 그 알타이가 금()이란 뜻이다. 마립간(麻立干)이란 말은 여러 부족들의 대표자란 뜻인데 유목민족의 칸(칭기즈칸의 칸)과 같은 어원이다. 이들의 행동반경 안에는 중앙아시아, 러시아, 흑해 연안도 들어 있고 이 지역은 로마 문명권과 겹쳐 있다.

금관총에서 출토 된 금제 허리띠

스키타이기원 전 7세기경부터 지금의 이란, 러시아,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를 누볐던 인류역사상 최초의 유목기마 군사 집단이었다. 이들이 만든 기마(騎馬)문화가 동쪽으로 확산되어 흉노, 선비(鮮卑), 투르크, 위구르, 거란, 몽골로 이어지는 북방기마문화의 원류(源流)가 되었다.

스키타이 계통의 문화는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는 흉노에게 전해졌다. 부여 계통의 고구려와 백제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중국의 영향을 일찍부터 받았는 반면 스키타이-흉노 계통의 신라는 북방 초원 루트를 통해 들어오는 서방문화, 로마 문화를 많이 수입했을 것이며 신라 금관 등 유물은 스키타이 계통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금관총에서 출토 된 금제 관식

북방기마민족(스키타이-흉노계통)이 한반도 남쪽에 어떻게 유입 했을까?

고구려, 백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북방기마민족의 유적과 유물이 어찌하여 한반도의 동남단 신라, 가야에서만 나타나고 있는지는 고대사의 오랜 수수께끼였다.

중국 진(晋)나라 학자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을 보면 3세기 후반까지 한반도 남부에는 삼한(三韓)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쪽에 마한 50개국이 있고 동쪽에 진한과 변한 24개 나라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한(三韓) 74개 부족국가를 영도하는 것은 마한의 목지국(目支國)이라고 나온다.

부부총에서 출토 된 금귀걸이

삼국사기에는 2세기 중반인 서기 167년에 신라가 28천명의 대군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반해 진수의 삼국지(三國志)에는 3세기 후반까지도 百濟, 新羅라는 국호는 보이지 않고 마한에서 백제국(伯濟國), 진한에서 斯사로국(盧國)이란 소규모 부족 국가의 이름이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 기록과 달리 한반도 남부에 자리 잡고 있던 삼한(三韓)3세기 후반까지 부족국가 연맹체 단계였다는 것이다.

4세기 이후 한반도에서 三韓은 사라지고 백제와 신라, 가야연맹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백제의 급속한 발전 배경에 대해서는 기마 문화에 익숙했던 부여계의 진출과 관련 있어 보인다. 가야는 문헌 기록이 부족하지만 고고학적 발굴 결과 변한의 옛터에서 북방 기마민족()의 무기류와 마구류가  출토되어 강력한 기마군단을 보유한 정치 집단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낙랑과 대방군이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무너지고(서기 313년 경) 백제 근초고왕이 활발한 정복 전쟁을 펼치자 경상도 지역의 소규모 부족국가들이 위기의식을 느껴 통합이 가속화되었고 특히 신라가 그 중심세력이 되었는 것이다.

천마총에서 출토 된 유리잔

내물왕 26, 즉 서기 381년 신라는 북중국의 유목민족 국가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낸다. 전진(前秦)351년 티베트계 저족출신 부건(符健)이 세운 나라로 381년에는 부건의 조카 부견(符堅)이 황제가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전진의 황제 부견(符堅)과 신라 사신 위두(衛頭) 간의 대화가 기록돼 있다.

부견이 위두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에 海東(해동: 신라)의 형편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을 말함이냐고 하니, 위두가 대답하기를 이는 마치 중국의 시대변혁(時代變革)명호개역(名號改易)과 같은 것이니 지금이 어찌 예와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符堅問 衛頭曰, 卿言海東之事, 與古不同, 何耶, 答曰, 亦猶中國 時代變革 名號改易, 今焉得同]

금귀걸이

이 기록을 보면 내물왕 들어 나라가 크게 발전했음을 알 수 있고 시대변혁(時代變革)명호개역(名號改易)은 단순히 나라의 체제가 정비된 수준을 넘어선다. 내물왕 이후 석()씨는 신라 역사의 주류에서 사라졌다석(昔)씨가 사라지는 것과 위두(衛頭)가 밝힌 시대변혁이라는 문구를 통해 이 시기에 강력한 군사력에다 선진적 국가체계를 경험한 새로운 세력임을 의미 할 수 있다.

위의 기록대로 위두(衛頭)가 신라에 중국의 시대변혁명호개역과 같은 큰 변화가 이뤄졌다고 답한 것이다. 이 기록의 원래 출처는 중국 역사서인 진서(秦書)이다.
그렇다면 4세기에 일어난 중국의 시대변혁명호개역은 무엇을 말하는가?

4세기에 흉노(匈奴)와 갈, (), , 선비(鮮卑) 등 다섯 유목민족은 중국 북방을 정복하고 호족(胡族)의 나라 16개를 차례로 세우기 시작했다. 이른바 516시대. 이를 두고 훗날 한족(漢族) 역사가들은 다섯 오랑캐의 폭정 시대로 규정했지만 당사자인 5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名號改易이 이뤄진 변혁의 시대인 것이다. 자신들의 전통에 부합되는 정치체제를 갖게 되었고 천대받던 오랑캐에서 한족(漢族)을 지배하는 귀족장군이 되었으니 시대변혁명호개역으로 부른 것이다.

위두와 부견의 대화에서 당시 북중국에서는 기마족의 중원(中原) 정복과 그에 따른 정치, 사회적 변화를 시대변혁명호개역으로 표현하며 정당시했음을 알 수 있고 신라에서도 그와 유사한 사건, 즉 기마 족의 정복과 왕위 찬탈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추정 할 수 있다.

신라 30대 문무대왕릉

중국 진나라 사람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의 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과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종합하면 변한과 진한 땅에는 네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첫째는 선사시대부터 농경을 하며 살고 있던 사람들로 묘제로는 지석묘(고인돌)를 사용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출현을 가능케 한 것은 BC 1,000년경부터 시작된 청동기 문화이다. 농경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정착생활로 안정을 찾게 되고 부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서 계급이 발생하여 군장사회가 형성된다. 군장은 부와 권력을 지닌 자를 뜻하며 이 같은 군장사회는 초기국가로 발전하는 과도기적 역할을 했다.

둘째는 BC 221년 진()의 통일로 시황제(始皇帝)의 만리장성, 궁궐 등 노역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변방민족과 연나라 망명객들로 고조선과 마한의 동쪽, 진한에 살았다. 전국시대 7웅 중에서 진()만이 유목국가였고 나머지는 농경국가로 진이 통일한 데는 유목민 특유의 기마전술이 컸다.

셋째는. BC 194년 연나라 망명객 중 위만세력이 고조선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이 고조선의 왕(위만 조선)이 됨에 따라 쫓겨난 준왕세력이 이동해 온 사람들이다.

넷째는 BC 108고조선(古朝鮮)이 한 무제에 의하여 망하자 이동해 온 고조선유민(遺民)들이다.
다섯째는 고구려 3대 무신왕(武神王: 무휼)이 가 낙랑군을 멸망시키자 낙랑군 유민 5,000명이 신라에 투항하자 당시 3대 유리왕 14(38)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해변가에서 바라 본 문무대왕릉

변한은 신라1대 박혁거세 즉위 19(BC 38)에 나라를 바쳐 항복하였고, 9년 백제 온조왕이 마한을 멸망 및 병합시키자 마한 장수 맹소가 부흥세력과 함께 신라4대 탈해왕 5(48)에 투항하였다. 이후 신라는 백제와 본격적으로 영토분쟁을 하였고 이전에는 왜, 낙랑군과 전쟁을 하였다.

한국 고대사의 지배민족은 만주를 원류로 하는 부여계통 북방민족의 고구려-백제와 고대 유라시아초원 지대을 누비는 북방기마민족(스키타이-흉노계통)의 고조선-신라-가야의 2가지 부류로 생각할 수 있다.

부여계는 만주 동쪽에 살았고 인종적으로는 퉁구스계이며 순수 유목민이 아니고 수렵과 농업도 함께 했다. 북방기마민족은 알타이 산맥-내몽골(오르도스) 북방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기마민족으로 단계적으로 한반도에 유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대릉원의 벌초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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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산 고분지 미완성 왕릉석재군은 황복사지 삼층석탑(皇福寺址 三層石塔)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황복사 초기 목탑지 혹은 신문왕릉, 성덕왕비릉(소덕왕후 김씨)) 또는 효성왕비릉(해명왕후 김씨), 민애왕릉 등으로 추정하였다.

황복사(皇福寺)삼국유사에 의하면 654(진덕여왕 8)에 의상(義湘)대사(625~702)29세에 출가한 곳으로, 1942년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을 해체 수리할 때 나온 사리함(舍利函)에서 확인된 명문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을 통해 신라 왕실 사찰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낭산 고분지 발굴조사를 통하여 출토 된 유물은 막새, 기와, 전돌, 등잔 등 약 400여 점이다. 면석과 지대석 및 갑석과 같은 왕릉 석재 대부분은 경작으로 인해 원래 위치는 아니다.

이 왕릉 석재군은 당시 왕을 위하여 사전에 능침을 조영하기 위하여 준비를 하다가 어떠한 사유로 중지하고 왕릉을 설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하대석이나 상대갑석으로 가공되어질 미완성 장대석 석재가 다수 확인되어 이를 뒤받쳐 주고 있다.

조사된 왕릉 석재의 곡률을 감안할 때 직경 약 22m, 둘레 60m의 규모로 복원되는데, 기존 왕릉의 규모를 통해 비교해 보면 35대 경덕왕릉(765)과 비슷하고, 갑석의 가공기법 또한 경덕왕릉과 유사하기 때문에 추정 왕릉지의 조성 시기는 그 전·후로 추정된다.

이에 왕릉 석재의 출토 양상, 개별 석재의 가공기법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해 볼 때 추정 왕릉지는 33대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자 35대 경덕왕의 형인 34대 효성왕(孝成王, 742)의 미완성 왕릉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효성왕은 그의 유언대로 관을 법류사 남쪽에서 화장하여 동해에 산골하였다는 기록과 5년간 짧은 재위기간을 고려해 보면 병석病席에 있을 때 능침을 사전에 준비하다가 왕이 유언으로 화장을 택하자 왕릉의 석물은 방치되어 오다가 후대에 자연스럽게 황복사 금당의 면석, 건물지의 담장 및 기단석 등으로 재사용되었는 것으로 판단된다.

왕릉의 조성은 서쪽에 위치한 너비 약 18m 정도의 대형 도로를 사용하여 석재를 산지에서 운반한 뒤 가공하였으며, 가공에서 나온 박편 등은 도로 부재로 재사용하고 있어 신라 왕릉의 석재 가공이 현장에서 직접 이루어졌음을 확인되었다.

또한 왕릉지로 추정되는 동북쪽은 담장과 석렬을 이용하여 별도 공간을 마련한 다음 서쪽에 대형 건물지와 담장, 회랑 등을 배치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왕릉 능원제도에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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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림(始林)은 반월성과 대릉원 사이의 외딴 숲으로 신라 김씨(金氏) 시조인 알지(閼智)의 강림 설화가 전해오는 숲이다. 면적은 7,300로 구림(鳩林)이라고도 하고 닭 계()자를 써 계림(鷄林)이라 불렀다. 주위에는 내물왕릉을 비롯한 고분이 둘러싸고 있다.

반월성에서 본 시림(始林), 계림(鷄林)

이곳에는 왕버들, 느티나무, 팽나무 등 오랜 고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나무 아래에는 조그만 실개천이 흐르고 있어 정겹다특히 초입에는 수령 13,00년 된 회화나무가 있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회화나무는 주로 궁궐, 서원, 향교 입구에 심고 있는데 악귀, 잡귀 등 물리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계림비각(鷄林碑閣)

또한 계림비각(鷄林碑閣)이 있어 안에는 조선 순조 3(1803)에 세운 김알지 탄생 기록비, 계림김씨시조탄강유허비명(鷄林金氏始祖誕降遺墟碑銘)가 있다높이 111.0cm, 너비 39.0cm, 두께 17.0cm로 찬자(撰者) 남공철(南公轍), 서자(書者) 최헌중(崔獻重), 각자 미상으로 내용은 김알지의 탄생에 관련된 설화와 김알지 이후의 김씨 왕가의 계보와 대표적인 치적을 기록하고 명문(銘文)을 쓰게 된 동기를 서술하고 있다.

계림김씨시조탄강유허비명(鷄林金氏始祖誕降遺墟碑銘)

동경잡기 기록에 따르면 계림에 높이가 3척 정도 되게 돌을 쌓은 것이 있는데, 속설에 알지가 태()를 풀 때에 가위를 놓아두었던 돌인데 가위 날의 흔적이 있다고 전한다.

김알지(金閼智)는 누구인가?

당나라 태종 때(630) 위징이 편찬한 수서에 신라왕족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신라의 왕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달아나 신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나라를 왕으로 다스리게 되었다

여기에 나온 백제 사람은 수서를 편찬한 때가 신라 진평왕이므로 신라 김씨 왕족이야기다김알지가 계림에 온 때인 서기 60년과 65년 사이의 한반도 상황을 확인하면 백제가 마한을 정복할 시점으로 서기 618월에 마한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신라에 바치고 귀순 했던 때이자 마한의 부흥운동 실패와 몰락한 때이다. 그때 마한의 마지막 왕족 후손인 김알지가 포함되었던 것이다.

계림(鷄林) 초입에서 맞이하는 계림비각(鷄林碑閣)

시림(始林) 즉 계림(鷄林의 위치가 맞는 곳인가?

시름(始林)의 위치와 방향, 규모에 대하여 알아보자. 시름(始林)은 외부에서 경주 로 출입할 때 처음으로 맞이하는 숲이라는 뜻이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시름의 방향은 금성 서쪽방향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시림 관련 내용을 보면 눌지마립간 177월에 이리떼가 시림으로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시름이 넓고 방대하다는 것이다선덕여왕 37월에 시림의 들판에서 크게 열병하였다고 되어있어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하는 열병장소 라면 넓은 공간의 장소이다.

삼국유사 견훤 편에는 927년 포석정에 있는 경애왕을 시해하기 위해 견훤이 후백제 군사를 출병시켰다. 신라 수도 경주근방 영천에서 경주로 침입하기 위해 시림에 도착하여 기습공격을 개시하였는데, 시림으로 나아가게 한 후 갑자기 신라왕도경주로 들어갔다고 되어 있다.

계림(鷄林)에는 왕버들, 느티나무, 팽나무 등 오랜 고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영천에서 경주로 오는 길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영천북안아화건천이고 다른 하나는 영천고경현곡이다. 전자인 경우는 건천에 부산성이 있어 기습공격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반면 후자는 구미산이 있어 산악 지형을 이용하면 은밀한 이동이 가능하여 유력한 경로이다.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시림은 수도 서라벌 서쪽인 서천 건너편 외곽에 있는 숲으로 현곡방면에 있는 숲이다. 시림의 어원은 조선 유민 즉 고조선 준왕 일행의 유민인 6부촌 세력 중 일부 세력 또는 김일지 세력이 경주지역에 도착했을 때 처음 맞이한 숲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김알지(金閼智), 탈해왕대(脫解王代)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영평(永平) 3년 경신(庚申; 60, 중원中元 6년이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중원中元은 모두 2년 뿐이다) 84일에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걸어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고도 함) 속에서 비치는 것이 보였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쳤는데 그 구름 속에 황금(黃金)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빛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또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호공(瓠公)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그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동남(童男)이 있는데 누웠다가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赫居世)의 고사(故事)와도 같았으므로 그 말에 따라 그 아이를 알지(閼知)라고 이름지었다. 알지(閼知)란 곧 우리말로 소아(小兒)를 일컫는 것이다. 그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면서 기뻐하여 뛰놀고 춤을 춘다.

왕은 길일(吉日)을 가려 그를 태자(太子)로 책봉했다. 그는 뒤에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破娑王)에게 물려 주고 왕위(王位)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金櫃)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金氏)라 했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 혹은 구도仇刀)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으니 미추(未鄒)가 왕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신라의 김씨(金氏)는 알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시림, 계림에서 본 반월성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9년 봄 3월 왕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 어찌된 일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호공이 가보니 그 곳에는 나무 가지에 금빛나는 작은 상자가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이를 보고하였다.

왕은 사람을 보내 그 상자를 가져와 열게 하였다. 그 속에는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고, 그 아이는 자태와 용모가 뛰어났다. 왕이 기뻐하며 측근들에게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로 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그의 이름을 알지라고 하였다. 그는 금빛이 나는 상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시림을 고쳐 계림이라 부르고, 이를 국호로 하였다.

대릉원에서 본 시림(始林), 계림(鷄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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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6대 지마왕릉(祇磨王陵, 경주시 배동 산30번지)은 서남산 포석정 남쪽 200m 지점에 있다. 능은 계단식 지형을 이용하여 조성하였고 원형봉토분으로 직경 12.7m, 높이 3.3m이다. 남쪽아래에는 배동 석조여래삼존불상이 있다. 지마왕릉(祇磨王陵)의 위치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기록에는 없다. 

신라 6대 지마왕릉(祇磨王陵)은 서남산 포석정 남쪽 200m 지점에 있고 계단식 지형을 이용하여 조성하였으며 원형봉토분으로 직경 12.7m, 높이 3.3m이다.

지마이사금(祇磨尼師今)성은 박씨(朴氏)이며 지미(祇味) 또는 지마(祇磨)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이고, 어머니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사성부인(史省夫人)이며, 비는 갈문왕 마제(摩帝)의 딸 애례부인 김씨(愛禮夫人 金氏)이다.

서기 112년에 즉위하였고 치적은 가야와 왜와 말갈의 침입을 격퇴한 것이다. 기록을 보면 즉위 4(115)5(116)에는 친히 병력을 이끌고 황산하(黃山河: 낙동강 하류)를 건너 가야를 공격하였다. 즉위 14(125) 말갈군이 대령책(大嶺柵:대관령)으로 쳐들어 왔으나 물리쳤다. 재위 23년에 아들이 없이 죽었다.

지마왕릉(祇磨王陵)의 묘제 양식은 6세기 중엽부터 통일신라 때의 횡혈식석실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지마왕릉(祇磨王陵)은 조선 영조 6(1730)에 박씨 일족이 주장하였고 능 앞의 표석은 박씨 문중에서 고종 8(1871)에 세웠다박씨 일족이 주장하여 제()를 지내는 신라 박씨 왕릉은 ,지마왕릉, 일성왕릉, 아달라왕릉, 신덕왕릉, 경명왕릉, 경애왕릉 등 모두 6기이다.

혼유석 형태의 상석은 1955년 박응수씨가 설치하였다. 묘제 양식은 6세기 중엽부터 통일신라 때의 횡혈식석실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혼유석 형태의 상석은 1955년 박응수씨가 설치하였고 표석은 박씨 문중에서 고종 8년(1871년)에 세웠다.

능 앞에 있는 상석(床石)의 변천 및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상석(床石)은 제수(祭需)를 진설하는 곳이자 능의 정면을 가리키는 역할을 하는데 신라 왕릉에서 상석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무열왕릉이고 흥덕왕릉 이후에는 설치되지 않았다.

상석의 형태는 여러 개의 장대석을 조립한 초기의 상석(무열왕릉, 신문왕릉)과 두꺼운 큰 판석 6매를 이용한 탁자형 상석(성덕왕릉, 원성왕릉, 경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으로 구분된다. 특히 탁자형 상석에는 전면 또는 후면에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의 왕릉에서는 정자각(丁字閣)이 등장하여 이곳에서 제수(祭需)를 진설하였고, 능의 앞의 상석은 혼유석(魂遊石)이라 하여 영혼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의미와 명칭이 바뀌어졌다. 따라서 신라 왕릉에 설치된 혼유석 형태의 상석은 조선후기 또는 일제 강점기 때 김씨 일족과 박씨 일족, 석씨 일족이 설치한 것이다.

신라 6대 지마이사금(祇磨尼師今, 재위 112~134, 2110개월)

어느 날 5대 파사왕이 태자 지마를 데리고 유찬의 연못으로 사냥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지부에 들렀다. 이때 이찬 허루가 왕 일행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모두들 취했을 무렵 허루의 아내가 한 처자를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다. 그러자 마제의 아내도 자신의 딸을 불렀는데 태자의 마음에 들었다.

이것을 본 허루가 질투를 하자 파사왕이 허루에게 이 곳 땅 이름이 대포(큰 부엌)인데, 공이 이곳에서 훌륭한 음식과 좋은 술을 차려 잔치를 베풀어 즐겁게 하니, 직위를 주다(酒多:술이 많음)라고 하여 이찬 위에 두어야 마땅하겠다.”라고 벼슬을 내려 무마하고, 마제의 딸을 태자의 배필로 삼았다. 주다는 뒤에 각간이라고 불렀다.

지마이사금(祇磨尼師今)의 주요 일대기를 보면, 즉위 22,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창영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옥권을 파진찬으로, 신권을 일길찬으로, 순선을 급찬으로 임명하였다.

3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왔고 여름 4월에 홍수가 났다. 죄수들를 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42, 가야가 남쪽 변경을 약탈하였고 7, 왕이 가야를 직접 공격하였다.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 낙동강 하류)를 지나는데 가야인들이 숲 속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기다렸다. 왕은 이를 모르고 곧바로 전진하였는데, 복병이 나와 왕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왕은 군사를 지휘하여 맹렬히 싸워 포위를 뚫고 퇴각하였다.

58, 장수를 보내 가야를 공격하게 하고, 왕은 정병 1만을 거느려 뒤를 이었다. 가야는 성을 닫고 굳게 수비하였다. 그 때 마침 비가 오래 내렸으므로 왕은 되돌아 왔다.

10년 정월, 익종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흔련을 파진찬으로 임명하고, 임권을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2, 대증산성을 쌓았고 4,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11년 서울 사람들이 왜병이 크게 몰려온다는 헛소문을 듣고 앞 다투어 산골짜기로 피난하였다. 왕은 이찬 익종 등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123, 왜국과 강화하였다.

14년 정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크게 공격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가을 7월에 그들은 다시 대령 책을 습격하고 이하를 넘어왔다. 왕은 백제에 글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고, 백제는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돕게 하였다. 적은 이 소식을 듣고 물러갔다.

8, 이찬 창영이 사망하자, 파진찬 옥권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에 참여시켰다. 212, 궁궐 남문이 불탔다. 238, 왕이 별세하였으나 아들이 없었다.

배동 석조여래삼존불상에서 지마왕릉 방향으로 오솔길을 따라 출발하여 만나는 태진지라는 작은 연못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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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동천동 산 17번지 소금강산 남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능은 높이 4.4m, 지름 15.7m로 신라 4대 탈해왕릉(脫解王陵)으로 전해지고 있다능 앞의 상석은 조선 왕릉 혼유석 형태로 최근에 설치되었다능의 동남쪽에 있는 숭신전(崇信殿)은 조선 철종 때 반월성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1980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탈해왕릉(脫解王陵)19741230일에 도굴을 당했는데 봉분 동북쪽 중간지점에서 너비 85m, 깊이 4.4m로 도굴갱을 만들어서 도굴을 하였다. 이때 묘제가 6세기 이후에 조영된 횡혈식석실분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탈해왕릉(脫解王陵)의 묘제는 신라초기 목관묘 형태이다.

현재 동천동(東川洞)에 있는 능이 탈해왕릉으로 정해진 것은 20세기 초 석씨 일족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장지로 기록 된 성북양정구(城北壤井丘)와 조선시대 지리지 관련 기록을 근거로 정하였다. 석씨 일족은 성북(城北)을 근거로 동천동(東川洞)에 있는 능을 탈해왕릉으로 정하였다.

오늘날 경주지역에는 양정구(壤井丘)라는 지명은 없다. 구전으로 성동동 전랑지(城東洞 殿廊址) 주위를 양정구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인왕동의 선덕여자 중, 고등학교 남쪽 사거리에서 성동동 전랑지에 이르는 대로 이름이 양정로(壤井路)이다.

탈해왕 시기에는 월성이 축조되지 않았으므로 성북(城北)을 금성 북쪽으로 고려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와 동경잡기에는 금성 위치를 경주부 동쪽 4리에 있는 성동동 전랑지와 남고루 일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석씨 일족은 황오동의 남고루와 성동동 전랑지 북쪽의 가까운 지역이 양정구(壤井丘)로 판단되나 주변에 왕릉이라고 추정되는 고분이 없어 부득이 소금강산 남쪽의 이름 없는 고분을 석탈해왕릉으로 정하였다.

신라시대 왕 중 석씨 왕은 모두 8명으로 시조인 탈해왕을 제외하고는 장지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후기 17세기말~18세기 족보 간행과 이에 따른 조상숭배 대상의 확대가 될 당시 석씨 일족은 경주지역 사회에서 세력이 미약하고 그들만의 족보가 미처 완성되지 못하여 현재 경주 일대 왕릉 중 석씨 왕릉은 이곳 석탈해왕이 유일하다.

경주시 양남면 상계(上溪)리에 서왕(西王)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원래 씨 왕릉이 있어 석왕리(昔王里)이나 마을이름에 그 왕명을 칭하는 것은 곤란하다하여 서왕리로 변하였다고 한다. 예전부터 이 마을 북쪽에 석씨 임금의 능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은 나이가 62세에 왕위에 올랐다. 성은 석씨(昔氏). 토해(吐解)라고도 불렀는데 해를 토해낸다는 뜻으로 훗날 토함산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탈해의 아버지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 용성국(龍城國)의 함달파왕(含達婆王), 혹은 완하국(琓夏國)의 함달왕(含達王) 등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어머니는 여국왕(女國王)의 딸 또는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이라고 하는 등 다국적 혈통을 지닌 인물이 탈해이다. 왕비는 남해차차웅의 딸 아효(阿孝阿尼, 또는 남해차차웅의 누이동생 阿老)부인이다.

즉위 248월에 별세하였고 성의 북쪽 양정 언덕(城北壤井丘)에 장사지냈다.

석탈해의 장지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삼국유사 왕력과 기이편내용이 서로 다르다. 삼국유사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재위(在位) 23년 만인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 29)에 죽어서 소천구(疏川丘) 속에 장사지냈다. 그런데 뒤에 신()이 명령하기를, “조심해서 내 뼈를 묻으라고 했다. 그 두골(頭骨)의 둘레는 석 자 두 치, 신골(身骨)의 길이는 아홉 자 일곱 치나 된다. []는 서로 엉기어 하나가 된 듯도 하고 뼈마디는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천하에 짝이 없는 역사(力士)의 골격(骨格)이었다.

이것을 부수고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 두었다. 그랬더니 신()이 또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東岳)에 안치해 두어라했다. 그래서 거기에 봉안케 했던 것이었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탈해脫解가 죽은 뒤 27문호왕文虎王 때 조로調露 2년 경진庚辰(680) 315일 신유辛酉 밤 태종太宗의 꿈에, 몹시 사나운 모습을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내가 탈해脫解이다. 내 뼈를 소천구疏川丘에서 파내다가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吐含山에 안치하도록 하라.” 은 그 말을 좇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제사를 끊이지 않고 지내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내용을 정리하면, 소천구(疏川丘)에 묻힌 석탈해의 뼈를 꺼내어 이것을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 두었다가 문무왕 때 토함산 정상으로 옮겨 사당을 짓고 동악신(東岳神)으로 제사를 지냈다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 까지 석탈해 사당에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제사를 지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폐사되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없다.

신라 4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 재위 57~80)

석탈해는 키가 9척에 이르고 성품이 너그럽고 지혜로웠고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 이름난 신하인 호공(瓠公)의 집터(뒤에 月城이 됨.)가 좋음을 보고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어놓고는 자기의 집이라 우기니 관가에서는 주장하는 근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자신의 조상이 본래 대장장이였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자고 하여,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자 탈해가 승소(勝訴)하여 그 집을 차지하였다.

이 같은 내용의 설화에서, 첫째 탈해 집단이 경주 동해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그가 죽은 뒤 동악신(東岳神)으로 봉사(奉祠)되었음에서도 확인된다. 둘째는 석씨부족이 어로를 주요생활수단으로 하였지만, 이미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철을 다루는 능력이 왕위계승에까지 연결되는 강점의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탈해는 서기 8(남해 차차웅 5)에 유리왕의 사위가 되고, 서기 10년에는 대보(大輔)란 벼슬에 올랐으며, 유리이사금의 즉위시에 이미 왕위계승의 물망에 올랐지만, 유리이사금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된 다음 유리이사금이 죽자 탈해가 왕위에 올랐다.

탈해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해차차웅의 사위이니 결국 박씨 집단(朴氏集團)의 일원이라는 동속개념(同屬槪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 철을 이용한 군사력 및 거기에 따르는 실질적인 정치실력파의 등장으로 박씨족과 석씨족이 연맹하였으며, 이것은 왕실세력의 폭을 넓혔다고 본다.

즉위 2년 정월, 호공(瓠公을 대보(大輔)로 임명하였고 2월에는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33월 왕이 토함산에 올라가니, 우산 모양의 검은 구름이 왕의 머리 위에 피어났다가 한참 후에 흩어졌다. 5월에는 왜국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고 6월에는 천선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58월 마한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710월 백제왕이 국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까지 넓히고 사신을 보내 왕을 만나기를 요청했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

88월 백제가 군사를 보내 와산성을 공격하였다고 10월에는 백제가 다시 구양성을 공격하자 왕은 기병 2천 명을 보내 그들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12월에는 지진이 있었고 눈이 내리지 않았다.

10년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2백 명을 그 곳에 남겨 거주시키며 수비하게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가 이 땅을 다시 빼앗았다.

11년 정월 박씨의 귀척으로 하여금 국내의 주와 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 직위를 각각 주주와 군주라고 불렀다. 2월에는 순정을 이벌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14년 백제가 침범하였고 17년 왜인이 목출도를 침범하였다. 왕이 각간 우오를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우오가 전사하였다188월 백제가 변경을 약탈하므로 군사를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19년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10월에는 백제가 서쪽 변경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209월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여 와산성을 다시 찾았다. 백제에서 와서 살고 있던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218월 아찬 길문이 가야 군사를 상대로 황산진 입구에서 싸워 1천여 명을 죽였다. 길문을 파진찬으로 임명하여 그 전공에 해당하는 상을 주었다23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북쪽에 나타나더니 20일 만에 사라졌다.

244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금성 동문이 저절로 무너졌고 8월에 왕이 별세하였다. 성의 북쪽 양정 언덕에 장사지냈다.

능의 동남쪽에 있는 숭신전 ( 崇信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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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릉(五陵)은 경주시 탑동 67-1번지에 있는 다섯 기의 왕릉으로 1대 혁거세왕(赫居世王, 기원전 57~ 서기 4), 알영왕비,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느 능이 누구의 능인지 명시되지 않고 있다.

신라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은 성이 박씨이며, 전한 효선제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 57) 4월 병진(정월 15일]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居西干, 또는 거슬감[居瑟邯]) 이다. 이 때 나이는 열 세 살이었으며 나라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었다. 사라(斯羅)사로(斯盧)라고도 했다. 남산(南山)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에 궁실(宮室)을 세웠다.

일설(一說)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는데 닭이 숲속에서 울었다 해서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이라 했다고도 한다. 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新羅)라는 국호로 정했던 것이다.
박혁거세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삼국유사에서 전해지고 있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이 되던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후에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리고 왕후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하직하였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합장하여 장사지내려하자 큰 뱀이 나타나 방해를 하므로 머리와 사지를 제각기 장사 지내 오릉(五陵)을 만들고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하였다.

오릉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에 의거하면, 통일신라 중대 이후부터 사릉(蛇陵)·사릉원(蛇陵園)이라는 능호(陵號)와 함께 혁거세왕과 알영부인의 능 또는 혁거세왕·남해왕·유리왕·파사왕의 능으로 알려지기 되었다.

능원 內에는 조선 세종 11년(1429)에 왕명에 따라 건립 된 숭덕전(崇德殿)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 33년(1600)에 다시 지었고 숙종 20년(1694)에 수리하였다. 경종 3년(1723)에 ‘숭덕전’이라는 편액을 걸었고, 영조 11년(1735)에 건물을 수리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영조 때 수리한 모양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제사는 처음에는 국가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에 와서 박씨 문중에서 주관하여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숭덕전(崇德殿) 일대
알영부인이 탄생하였다는 우물로 전해지고 있는 알영정(閼英井)
알영정(閼英井) 상부는 담암사(曇巖寺)에서 사용 된 장대석으로 우물을 덮고 있다.

영조 35년(1759)에 세운 신도비가 숭성각(崇聖閣)에 있는데, 비석에는 혁거세왕과 숭덕전의 내력이 새겨져 있다. 알영부인이 탄생하였다는 우물로 전해지고 있는 알영정(閼英井)이 있는데 담암사(曇巖寺)에서 사용 된 장대석으로 우물을 덮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세워진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가 있다. 그리고 담암사(曇巖寺) 당간지주(幢竿支柱)의 기둥을 사용하여 세운 홍전문(紅箭門)이 있다.

숭성각(崇聖閣)
숭성각(崇聖閣) 입구
숭성각(崇聖閣)안에는 영조 35년(1759)에 세운 숭덕비(崇德碑)가 있다.
숭덕비(崇德碑)에는 혁거세왕과 숭덕전의 내력이 새겨져 있다.
담암사(曇巖寺) 당간지주(幢竿支柱)의 기둥을 사용하여 세운 홍전문(紅箭門)

담암사(曇巖寺)는 전불시대의 칠처가람지 중 하나로 절터는 현재 숭덕전 일대로 보고 있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7세기로 추정된다. 담암사(曇巖寺)에 대한 기록은 문무왕 9년(679년)에 사천왕사 다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칠처가람지 중 가장 늦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 가는 입구

오릉의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능부터 제1호분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제5호분까지 부르고 있다. 제1호분은 높이 8.7m, 직경 41.4,m로 5기 중 가장 크다. 제2호분은 표주박형태로 높이는 각각 5.1m, 4.5m 직경은 장변 36.5m, 단변 20m이다. 제3호분은 제1호분의 동쪽에 있으며 높이 5.1m, 직경 26.1m 이고 제4호분은 제3호분의 북쪽에 있으며 높이 2.5m, 직경18.2m이다. 제5호분은 제3호분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 2.1m, 직경 17.5m이다.

표주박형태의 제2호분은 2기의 원형분이 합쳐져서 하나의 표형분이 된 부부합장묘로 추정되고 오릉 구역에 있는 능의 수는 실제로 6기로 능에 묻힌 피장자도 6명이다. 신라에서 5세기 이전에 존재하는 원형봉토분이 아직 확인된 것은 없다.

혁거세왕릉으로 추정되는 제1호분만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나머지는 작은 능이다. 나머지 능의 왕 재위기간이 1세기와 2세기 초로 당시 묘제 양식은 목관묘(木棺墓)로 고려하면 오릉과는 관련이 없다.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가 있는 건물(閣)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세워진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

신라의 묘제 양식은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살펴보면 기원전 1세기부터 1세기 때는 목관묘이고 2세기부터 4세기 중엽은 목곽묘이다. 이들 묘의 형태는 평면 장방형이거나 타원형으로 높이는 1.5m 내외로 소형분이다.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 목관이나 목곽은 부식 및 침하되어 지표상에서 발견하기가 어렵다. 간혹 도로개설이나 건물신축과정에서 발견되고 있다.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 때는 적석목곽분이고 6세기 중엽이후 부터는 횡혈식석실분이 축조되었다.
오릉의 묘제 대한 고고학적 결론을 보면 능의 축조 시기는 6세기 전반으로 귀족의 묘로 규모가 가장 큰 1호분 적석목곽분을 중심으로 신분적으로 차별성을 가진 혈연집단, 또는 배장묘로 보고 있다.

오릉을 만나기 위해 지나가는 숭의문
오릉 앞 제자 지내는 제각

그럼 문헌 기록을 통해 오릉의 실체를 들여다보자.
삼국유사에 박혁거세의 능을 오릉으로 기록한 것은 신라 불교공인에 따라 구전으로 전승 된 설화로 변재천녀(辨才天女)의 시신을 각각 매장하여 오릉을 조성한 불교설화를 박혁거세의 사변설화(蛇變說話)로 변형하여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오릉의 다섯 능을 박혁거세왕,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을 의도적으로 설정하여 기록하였다. 왕비인 알영부인의 능은 언급 없이 묵시적으로 오릉에 포함시켰다. 이후 17세기 박씨 문중에서 대외적으로 오릉에 알영부인을 포함시켰다.

실제 박혁거세의 능을 포함한 신라 초기 왕들의 능은 어디에 있을까?

박씨 일족의 세력권인 남산 서부 구릉지 또 남산 서북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박혁거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 13년을 현재 창림사지에 거주하였고 즉위 21년 때 축조한 궁궐, 도성 역할을 했던 금성 위치는 현재 경주고 일대 또는 월성 서쪽 끝을 추정하고 있다. 이후 5대 파사왕 즉위 22년 때 금성에서 현재 반월성인 월성으로 궁궐을 옮겼다.

신라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즉위 8(기원전 50)에는 왜인들의 침임이 있었으나 왕이 덕이 있음을 알고 물러갔다고 되어있고 즉위 17(기원전 41)에는 왕과 왕비가 전국을 돌며 민정을 살피면서 농업과 양잠을 독려했다 즉위 19년 봄 정월에는 변한이 항복해 왔고 즉위 21(기원전 37)에는 도성을 지었는데 이를 금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 금성은 신라 최초의 도성인 셈이다. 그리고 기원전 37, 이때가 실질적인 개국인 것이다.

신라인들이 기원전 57년을 개국 시점을 잡은 것은 고구려의 개국 시점인 기원전 37년 보다 먼저 세워진 국가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다. 즉 기원전 57년부터 기원전 37년 사이 16년 동안 소국들을 결합하여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이었고 이로 인해 국경이 확대되어 북쪽 국경을 맞대온 낙랑(동예)과 잦은 국경분쟁이 생긴 것이다.

즉위 30, 낙랑이 쳐들어왔다가 노적가리가 밖에 쌓여있는 것을 보고 도적질 하지 않는 의로운 나라라 하여 물러갔다고 되었다즉위 38년, 봄 2월에 호공을 보내 마한을 예방하였다. 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본래 왜인이었는데,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호공(匏公)이라고 불렀다.
즉위 39년, 마한 왕이 별세하였고 곧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즉위 53년, 동옥저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쳤다.
즉위 61년, 봄 3월, 별세하였고 사릉에 장사지냈다.

신라 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재위 서기 4~24)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남해(南解) 차차웅(次次雄)은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알영부인(閼英夫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문(金大問)은 말하기를, “차차웅(次次雄)이란 무당을 이르는 방언(方言)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드디어 존장(尊長)되는 이를 자충(慈充)이라 한다고 했다. 오직 남해왕(南解王)만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 불렀다.

왕비는 운제부인(蕓帝夫人) 또는 아루부인(阿婁夫人)이다. 지금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雲梯山) 성모(聖母)가 있는데 가뭄 때 여기에 기도를 드리면 감응感應이 있다)이다. 삼국사기에 남해 차차웅은 키가 크고 성품이 심화하였으며 지략이 뛰어났다고 되었다. 즉위년에 낙랑국(樂浪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즉위 5년에는 석탈해를 사위로 삼고 즉위 11년에는 왜인이 침략하였고 낙랑이 금성을 공격하였다. 전한(前漢)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甲子; 4)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지 21년 만인 지황(地皇) 4년 갑신(甲申; 24)에 죽었다. 이 왕이 삼황(三皇)의 첫째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사금(尼師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잇금[齒理]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했다. 처음에 남해왕(南解王)이 죽자 그 아들 노례(弩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이에 탈해(脫解)가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성스럽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한다하고 떡을 입으로 물어 시험해 보았다.

고전(古典)에는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했다. 이것을 김대문(金大問)은 해석하기를, “마립간(麻立干)이란 서열을 뜻하는 방언(方言)이다. 서열(序列)은 위()를 따라 정하기 때문에 임금의 서열은 주()가 되고 신하의 서열은 아래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했다.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왕(新羅王)으로서 거서간(居西干)과 차차웅(次次雄)이란 이름을 쓴 이가 각기 하나요, 이사금(尼師金)이라고 한 이가 열여섯이며,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이가 넷이다. 신라 말기의 명유(名儒) 최치원(崔致遠)<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지을 적에는 모두 모왕(某王)이라고만 하고 거서간(居西干) 등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혹시 그 말이 야비해서 부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인가. 그러나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록하는 데 방언(方言)을 모두 그대로 두는 것도 또한 마땅한 일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이들을 갈문왕(葛文王)이라고 불렀는데, 이 일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남해왕(南解王) 때에 낙랑국(樂浪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또 천봉(天鳳) 5년 무인(戊寅; 18)에 고구려(高句麗)의 속국인 일곱 나라가 와서 항복했다.

신라 제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金, 재위 서기 24~57)
남해 차차웅의 태자이며 노례이질금(弩禮尼叱今)으로 삼국유사에서는 기록되었다. ()의 이름은 알 수 없고,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 박씨, 혹은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 혹은 사요왕(辭要王)의 딸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으며, 일지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한다.

이사금이라는 왕호는 이질금(尼叱今), 치질금(齒叱今)이라고도 쓰는데, 󰡐잇금(齒理,또는 나이의 순서)󰡑을 의미하는 신라 방언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사금시대 왕의 성격은 부족연맹장(部族聯盟長)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즉위 5(서기 28)에 민신을 살피다가 얼어 죽어가는 노파를 보고 최극빈층을 돌보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다음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였고, 차사(嗟辭)와 사뇌격(詞腦格)이 있었다. 또 보습과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즉위 9(32)6(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이들에게 이(), (), (), (), (), ()의 성()을 주었으며, 17관등(官等)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때 6부를 정한 기념으로 6부의 여자들을 두 편으로 갈라 길쌈을 짜게 하여 815일에 그 많고 적음을 보아 승부를 결정짓는 가배(嘉俳)놀이를 시켰는데, 이때 부른 노래가 회소곡(會蘇曲)이었다. 가배놀이는 우리 고유의 공동노동양식인 두레나 품앗이로 변천하였고 이것이 후일 여성 집단인 원화(源花), 남성 집단인 화랑(花郞)이 되었다.

즉위 14(서기 37)에는 고구려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하였고 그 낙랑의 피난민 5천여명이 귀순해왔다고 한다. 이 낙랑은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가 나오는 그 낙랑이다.
즉위 18(서기 42)에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 해에 고구려(高句麗) 군사가 침범해 왔다. 유리 이사금은 재위 34년 되던 해에 두 아들을 제치고 재능이 뛰어나다는 이유를 들어 매형인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잇게 하고 죽어, 사릉(蛇陵)에 묻혔다.

신라 5대 파사이사금(婆裟尼師金 재위 서기 80~112)
삼국사기에서는 파사왕의 출생에 대해 두 가지 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 유리이사금의 둘째아들로 태자 일성(逸聖)보다 인품이 뛰어나 즉위하였다고도 하고, 둘째, 유리이사금의 아우인 내로(奈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파사이사금의 어머니는 사요왕(辭要王)의 딸이고 왕비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사성부인(史省夫人, 혹은 史肖夫人)이다.

파사이사금이 유리이사금의 직계라면 탈해이사금 이후 왕위를 계승한 것이 문제가 없으나, 그가 내로(奈老)의 아들일 경우 월성(月城)에 기반을 둔 석씨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즉위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파사이사금은 즉위 2(서기 81) 2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3월에 주군(州郡)을 두루 돌며 위무하고, 창고를 열어 어려운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의 정상을 살펴 두 가지 사형죄[二罪]가 아닌 사람은 모두 풀어 주었다고 되어 있다.

한편, 내우외환에 대비하기 위해 즉위 3(서기 82) 봄 정월에 영()을 내려 말하였다. 지금 창고는 텅 비었고 병기는 무디어져 있다. 만약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있거나 변방에 변고가 있으면 무엇으로써 그것을 막겠는가?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게 하고 병기를 벼리어서 뜻밖의 일에 대비하라고 하였다 한다.

이 시기에 신라는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인들에게도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도 나타나 있다. 즉위 8(서기 87) 가을 7월에 영()을 내려 말하였다. 나는 덕이 없으면서도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여 있고 남쪽은 가야와 연접해 있다. 나의 덕은 능히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은 이웃 나라를 두렵게 하기에 부족하니 마땅히 성루(城壘)를 수리하여 침입에 대비하라.

이 달에 가소성(加召城)과 마두성(馬頭城)의 두 성을 쌓았다. 이 두 성은 신라가 금성을 벗어나 세운 최초의 국경방위시설이었다. 즉위 22(서기 101)에 월성을 쌓아 궁실을 옮겼다. 즉위 33(서기 112)에 죽자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 지냈다고 되어 있다.

오릉 내 조성 된 연못

일부 학계에서는 오릉, 사릉을 쿠데타 즉 반란의 결과로 보고 있다. 반란으로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왕비, 장남 등 직계가족이 처참히 살해되었고 7일이 지나서 시신을 찾을 수 있었으나 시신 훼손이 심하여 식별할 수 가 없었다. 이에 다섯 기의 능을 축조하여 시신을 각각 안치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근거로 삼국사기 즉위 60년 가을 9월 기록을 보면,

「두 마리의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났다. 우레와 비가 심하고 성의 남문이 벼락을 맞았다」 내용이 있다. 용은 일반적으로 왕을 상징하는 동물인데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났다는 것은 왕이 둘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한 사람은 혁거세왕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반락을 일으킨 세력의 우두머리인 것이다.

신라 2대 남해차차웅 즉위 원년 가을 7월 기록에 「왕이 측근에게 “ 두 분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조심스럽고 위태롭기가 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침범해오니, 이는 나에게 덕이 없는 탓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측근들이 “적은 우리나라에 국상이 난 것을 요행으로 여기고 함부로 침범해왔으니, 하늘은 절대 그들을 돕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

이 내용을 살펴보면 두 성인은 혁거세왕과 왕비이고 같은 날 살해를 당한 것이고 남해차차웅이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것은 왕의 장남 또는 적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도 왕과 함께 살해를 당했기 때문이다.

오릉에서 바라본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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