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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말사 중 하나인 극락암은 「여기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 시바세계를 무대로 멋지게 살아라.」라는 법어로 유명한 근·현대의 선승 경봉(鏡峰, 1892∼1982) 스님이 주석한 암자로 유명하다.  1968년 이후 경봉스님이  홍예(虹橋), 조사각(祖師閣), 단하각(丹荷閣), 수세전(壽世殿) 등, 가람 전체를 크게 중수하였다.

1927년 11월 20일 삼경 「삼소굴」에서 경봉스님이 확철대오(確撤大悟)의 대도(大道)를 성취 하였는데 방안의 촛불이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자성(自性)을 깨닫고는 기쁨 마음에 문을 박차고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시, 서, 화, 선, 차까지 두루 갖춰 오절로 불리었던 경봉스님은 「기껏 살아봐야 백년을 더 사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니 언제나 쾌활하고 낙관적인 기분으로 활기찬 생활을 해야 한다.

지금껏 생활해 온 모든 사고방식과 생활 관념에 잘못이 있으면 텅 비워 버리고 바르고 참되고 활발한 산 정신으로 살아가야한다」라고 말씀하셨다. 1982년 7월 17일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하시며 열반에 들었다.

경봉스님이 입적 할 당시, 이 지역에는 가뭄이 발생하여 농사를 짓는 데 큰 어려움을 있었다. 그러나 다비를 마친 후에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가뭄이 해소되었다고 한다.


극락암의 핫 플레이스가 2곳이 있다. 하나가 극락영지와 홍예로 이곳은 사진촬영하려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 사계절이 제각각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다. 다른 하나는 단하각(丹荷閣)으로 소원성취를 위해 찾는 중장년층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극락암은 1344년(충혜왕 복위 5)에 창건됐으며, 창건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소실 된 법당들을 1758년(영조 34)에 지홍대사(智弘大師)가 중창하였다. 고종 30년(1893)에 무량수각을 중건하였다. 주요 건물로는 삼소굴(三笑窟), 무량수각, 수세전(壽世殿), 설법전(說法殿)과 영월루(暎月樓), 조사각(祖師閣)과 원광제(員光齊), 단하각(丹荷閣), 등 있다. 극락암은 수덕사 전 방장 원담스님, 은해사 전 조실 일타스님, 해인사 원로 도견스님, 화엄사 전 주지 도광스님 등 제방의 조실스님들이 모두 이곳에서 정진하는 등 한강 이남의 제일가는 호국선원이다.

극락암의 일주문인 여여문

극락영지는 극락암 앞 연못으로 통도팔경 중 제5경이고 영축산의 산봉과 산록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친다고 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연못과 담장이 넝쿨 로 감싸인 홍예는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봄에는 한그루의 벚나무에서 꽃이 피고, 여름에는 수련 꽃이 만발하고 가을이면 단풍 물든 영축산이 잠기고 겨울이면 맑은 하늘 구름이 노닐고 가는 곳이다. 극락영지의 조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홍교(虹橋)인 극락교는 극락세상으로 가기 위해 건너는 다리로 경봉스님이 71세 때인 1962년 만들었다.

극락영지는 극락암 앞 연못으로 통도팔경 중 제5경이고 영축산의 산봉과 산록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친다고 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극락암에는 조선 말기에 제작된 지름 85.5~85.8㎝ 크기의 청동반자(靑銅飯子)가 있다. 옆면에 반원형의 고리 두 개가 붙어 있어 반자를 고정시키고 있고 범어[梵語] ‘옴’자를 돋을새김(음각)의 새겨 총 44개의 ‘옴’ 자 원형문으로 2열 배열하여 새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서방 정토에 극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옴마니반메훔」를 육자대명주(六字大明呪)라 하여 여섯 자를 새기고 있다.

극락암 청동반자

앞면 중앙에는 돋을새김의 태극원문 당좌(撞座)가 있고 오른쪽 방향에는 ‘대황제폐하만만세(大皇帝陛下萬萬歲)’, ‘순비저하수제년(淳妃邸下壽齊年)’, ‘영친왕저하수제년(英親王邸下壽齊年)’ 왼쪽 방향에는 ‘황태자전하천천세(皇太子殿下千千歲)’, ‘황태자비전하수제년(皇太子妃殿下壽齊年)’이라는 글이 주조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작시기와 대한제국 황실의 수복(壽福)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뒷면에는 직경 65㎝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다. 

앞면 중앙에는 돋을새김의 태극원문 당좌(撞座)가 있고 오른쪽 방향에는 대황제폐하만만세(大皇帝陛下萬萬歲), 순비저하수제년(淳妃邸下壽齊年),영친왕저하수제년(英親王邸下壽齊年),왼쪽 방향에 황태자전하천천세(皇太子殿下千千歲), 황태자비전하수제년(皇太子妃殿下壽齊年)이라는 글이 주조되어 있다.
순비저하수제년(淳妃邸下壽齊年), 영친왕저하수제년(英親王邸下壽齊年), 대황제폐하만만세(大皇帝陛下萬萬歲)
황태자비전하수제년(皇太子妃殿下壽齊年), 황태자전하천천세(皇太子殿下千千歲)
옆면에 범어[梵語] 옴자를 돋을새김(음각)의 새겨 총 44개의 옴자 원형문으로 2열 배열하여 새겨져 있다.
옆면에 반원형의 고리 두 개가 붙어 있어 반자를 고정시키고 있고 뒷면에는 직경 65㎝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다.

설법전(說法殿)이자 영월루(暎月樓)는 법회장소이며 달그림자가 비치는 모습을 즐기는 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광무3년(1899)에 건축되었고 1967년 경봉스님 때 단청을 하였다. 설법전 현판과 주련은 경봉스님 글씨이고 영월루 현판은 석재 서병오 글씨이며 정법안장(正法眼藏)은 청남 오제봉의 글씨이다.

설법전(說法殿)이자 영월루(暎月樓)는 법회장소이며 달그림자가 비치는 모습을 즐기는 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광무3년(1899)에 건축되었다.

수세전(壽世殿)은 인간의 수명과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도교의 칠성신앙이 불교화한 것으로 1820년 대 양산 군수가 왕명을 받들어 고종 황실의 명복이나 황족의 무병장수를 기원할 목적으로 세운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1967년 7월 경봉스님이 단청 보수를 하였다.

수세전(壽世殿)은 1820년 대 양산 군수가 왕명을 받들어 고종 황실의 명복이나 황족의 무병장수를 기원할 목적으로 세운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삼소굴(三笑窟)은 맞배지붕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경봉스님이 36세부터 91세로 입적하기까지 50년을 생활을 했던 곳이다. 경봉스님의 영정은 불교화가 김범수가 그렸다. 본래 이 건물은 순조 31년(1831)에 영봉 스님이 토굴로 지었고 이후 영봉헌으로 불리다가 철종 6년(1855) 봉흡 스님이 보수하였다. 1927년 경봉스님이 이곳에서 득도한 후 「삼소굴」로 바뀌었고 삼소(三笑)는 깨달음의 웃음을 의미한다. 삼소굴 현판은 대구출신 팔능거사(八能居士) 석재 서병오 글씨이며 방장(方丈) 현판은 경봉스님의 글씨이다.

삼소굴 경봉스님의 영정
삼소굴(三笑窟)은 맞배지붕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경봉스님이 36세부터 91세로 입적하기까지 50년을 생활을 했던 곳이다.
고양이와 삼소굴 안내문
삼소굴 뒷편의 산수유나무
산수유 열매
삼소굴 마루에 낮잠을 자는 고양이. 이곳 극락암에는 고양이들을 쉽게 만날수 있다.

조사각(祖師閣)이자 원광제(員光齊)는 33분의 조사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정면 9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1955년 극락선원 조실이었던 경봉스님이 건립하였다. 지금은 선원으로 경봉스님의 유품을 보관하고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이다. 매년 음력 10월 30일 역대조사의 뜻을 기리는 추모대재를 봉행 할 때 일반인에게 개방한다. 현판 원광제(員光齊)는 석재 서병오의 글씨로 원광은 경봉 스님의 호이다. 호쾌대활(好快大活)은 추사 김정희, 무진장(無盡藏)은 경봉 스님 글씨이다.

조사각(祖師閣)이자 원광제(員光齊)는 33분의 조사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정면 9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1955년 극락선원 조실이었던 경봉스님이 건립하였다.

단하각(丹荷閣)은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으로 정면1칸, 측면1칸의 팔작지붕으로 극락암에서 가장 작은 건물로 1955년에 경봉스님 때 지었다. 나반존자 소상(塑像)은 신상균氏 작품이다. 이곳 나반존자는 영험하다하여 주변 여러 지역에서 찾아오는 이가 많다.

영축산(靈鷲山)은 북쪽 신불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로 형성 된 산으로 취서산(鷲棲山, 鷲栖山), 축서산, 영취산으로도 불리고 양산시와 울산광역시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가지산도립공원 內 산으로 영남 알프스 구봉 중 하나로 고도는 1,081m 이다. 산 모양이 독수리 머리같이 생겼다고 하여 영취산이고 독수리가 깃들다, 독수리가 산다하여 취서산이다. 산 이름은 인도의 영축산과 닮아 유래하였는데 본래 영축산은 인도의 옛 마가다국에 있는 산으로 삭가모니가 “법화경”을 설한 곳으로 유명하다.

『세종실록지리지』(양산)에“취서산(鷲棲山)은 군의 북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부터 취서산으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사료에도 취서산(鷲棲山, 鷲栖山)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통도사 일주문에는 「영축산 통도사」라고 기록되어 있어 일찍부터 영축산이라고도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2001년 취서산, 축서산, 영축산, 영취산 등으로 부르던 산을 영축산으로 정식 고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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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말사 중 하나인 비로암은 극락암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암자로 고려 충목왕 원년(1345) 영숙(靈淑)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선조 11(1578) 태근(太釿)대사가 중건하였고 이후 원명화상이 중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비로암 전경에는 정족산, 천성산으로 형성 된 큰 능선과 백련암, 옥련암을 품고 있는 작은 능선이 앞, 뒤가 조화롭게 펼쳐져 있다. 영취산 자락에 위치한 암자이기에 가능한 경관이다. 종무소 옆 샘물은 영축산 암능을 타고 내려온 석간수로 산정약수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 샘물은 효능이 좋다고 알려져 찾는 이가 많다. 소위 영축산 정기를 담고 있어 몸과 마음 치유에 좋다고 한다.

  비로암 전경에는 정족산, 천성산으로 형성 된 큰 능선과 백련암, 옥련암을 품고 있는 작은 능선이 앞, 뒤가 조화롭게 펼쳐져 있다. 영취산 자락에 위치한 암자이기에 가능한 경관이다.

 비로암의 서쪽에 발달한 계류(溪流)에 형성된 폭포로 소리가 일품이라 하여 통도팔경 중 제3경인 비로폭포가 있다. 영축산에서 발원되는 비로천에서 생성된 폭포로 유량이 풍부했던 예전에는 낙수 소리가 비로암과 영축산의 계곡을 삼킬 만큼 우렁찼다고 한다.

종무소 옆 샘물은 영축산 암능을 타고 내려온 석간수로 산정약수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 샘물은 효능이 좋다고 알려져 찾는 이가 많다. 소위 영축산 정기를 담고 있어 몸과 마음 치유에 좋다고 한다.

조선 후기 불화(佛畵) 연구에 귀중한 비로암 탱화(毘盧庵幀畵)

비로암에는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모니후불탱화를 비롯하여 극락탱화, 칠성탱화, 비로암에는 산신탱화, 독성탱화, 조왕탱화8점의 불화(佛畵)를 가리키는 귀중한 탱화가 있다. 화기(畵記)에 따르면 1899(고종 36) 비구 주화(周華) 등이 주도하여 조성한 후 비로암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현재 8점 중 3점은 비로암, 나머지 5점은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봉안되어 있다.

이들 탱화는 주제가 다양하고 연대가 확실하여 조선시대 불교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석가모니후불탱화는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보여 주는 가로로 긴 그림인 가로구도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중간 색조의 차분한 색감보다 원색에 가까운 색깔이 사용되었다.

석가모니후불탱화는 크게 삼세불화(三世佛畵)와 독존도(獨尊圖)로 나뉘는데, 비로암 대웅전의 석가모니후불탱화는 독존도에 해당한다. 크기는 가로 165, 세로 128이고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불화의 구도는 중앙에 석가모니불상을 두고 좌우를 각각 2단으로 나누어 아래쪽에는 두 사람의 보살, 위쪽에는 석가모니불 좌우에 가섭과 아난 두 명의 제자, 바깥쪽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배치하였다.

석가모니의 피부는 황색으로 채색하였으며 계주(髻珠)와 정상계주(頂上髻珠)는 붉은색 바탕에 흰색 선으로 바림하였다. 광배(光背)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둥글게 표현하였고 테두리는 흰색 선으로 처리하였으며, 그 안에 군청색과 붉은색 2조의 선으로 원을 만들었다. 두광은 안쪽을 녹청색을 칠하였으며, 신광은 안쪽에 녹청색·황색·군청색·붉은색 띠를 차례대로 배열하여 빛을 형상화하였다.

석가모니 협시보살은 아래쪽 보살들의 경우 두광은 흰색 테두리 안을 녹청색으로 처리하였고 신광은 붉은색을 발랐고, 위쪽 보살들은 두광과 신광 모두 안쪽을 녹청색으로 처리하였다. 가섭과 아난은 녹청색의 두광만 표현하였다. 보살들은 모두 의자에 앉은 모습인데 오른쪽 다리는 내리고 왼쪽 다리는 올린 유희좌(遊戱座)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가섭과 아난 두 제자는 손을 가슴에서 모아 합장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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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여타 광역시 보다 관할 내 산이 많고 사연 또한 다양하다일제 강점기 때 일본 제국주의는 대륙침략과 한반도 병참기지화와 이를 위한 자원수탈 목적으로 국토의 산을 유린하였고 무차별 광산을 개발하였다. 부산지역의 산 또한 예외가 없었고 금과 구리 채굴목적으로 광산을 개발하였고 황령산, 금련산, 백양산, 이기대, 기장군 달음산 등이 도륙을 당한 산이다. 특히 이기대 구리광산은 폐광유출수로 인한 중금속 오염이 심각하였다.

황령산은 퇴적암, 금련산은 화산암으로 암석구성이 되어 있고 당시 황령산 및 금련산 일대는 구리 및 아연 제련소도 있었다. 황령산은 금을 채굴하였고 금련산은 구리를 채굴하기 위해 광산을 개발하였으며 지금은 폐광되어 막혀있거나 묻혀 버렸지만 80년대까지는 폐광 갱도가 여름철 피서장소로 인근 주민들이 사용하였다.

우암사에서 바라 본 전경

 

이곳 우암사는 폐광 된 갱도2곳을 매입하여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고 사찰 입구 진입로의 경사가 매우 가파르다. 겨울에는 빙판길이 우려 되어 차량이용하기가 어렵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안전할 것 같다. 첫 번째 맞이하는 우미사의 갱도 사찰은 두 번째에 비하여 길이가 길다. 갱도 곳곳에 불교용품으로 사찰을 장식하였고 마지막 부분에는 불상으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실제 갱도 끝은 아니고 단지 안전을 위한 방법인 것 같다. 두 번째 갱도 사찰은 길이는 짧지만 끝 부분은 넓고 분위기는 첫 번째에 비해 경건함과 숙연함을 많이 느껴진다. 다만 소원성취 돌이 있어 아쉽다.

첫 번째 갱도 사찰 입구
두 번째 갱도 사찰 입구

무엇보다도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 자원수탈 일환으로 이러한 갱도 건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강제징용을 당하였고 가혹한 노동착취를 시달렸는지 여기서 그분들의 고통을 가늠 해본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본성은 침략과 지배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이곳 망미1동 광산촌 마을은 당시 광산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터를 잡기 시작하여 조성 된 마을로 6.25 전쟁을 거치면서 현재는 100여 가구 200여명으로 대부분 노인들이 살고 있는 산동네다. 금련산 중턱 가파른 곳에 위치한 관계로 집들이 밀접하게 자리 잡고 있고 골목길 또한 좁다. 그렇지만 원색의 지붕 색깔과 산 아래 자연 환경과의 어울림이 조화를 이루어 전체 마을모습은 정겹고 아늑하다.

우암사 사찰 앞 광산촌 마을
금련산 중턱이라서 마을주민이 염소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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