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사지(天柱寺址)는 (반)월성의 북쪽이자, 동궁과 안압지(월지) 서편에 위치하는 절터로 과거 박무의공비(朴武毅公碑)가 세워져있었던 축대가 남아있었고 계단식논과 밭이 있었지만, 현재 연꽃 구경을 위한 연밭과 꽃밭으로 조성되어있다. 이에 천주사(天柱寺)와 관련된 유구나 유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천주사의 창건연대는 소지왕과 진평왕에 의한 창건설로 구분되지만 『三國遺事』의 기록으로 볼 때, 삼국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며 조선후기인 17세기 까지 법등이 이어졌다.


천주사(天柱寺)와 관련된 기록으로는 三國遺事와 조선시대 간행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경잡기(東京雜記) 등이 있다. 三國遺事 기이(紀異) 편의 사금갑(射琴匣)」과「진평왕(眞平王) 천사옥대(天賜玉帶)」와 감통(感通) 편의 「월명사(月明師) 도솔가(兜率歌)」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21대 비처왕(소지왕) 10년(488)에 … 왕이 궁중에 들어가 거문고갑을 쏘니 내전의 분수승(焚修僧)과 궁주가 은밀히 간통하고 있었다.
제26대 백정왕의 시호는 진평대왕이고 성은 김 씨이다. …내제석궁(內帝釋宮)에 또한 천주사(天柱寺)라고도 하는데 왕이 창건하였다. 행차하여 돌계단을 밟으니, 돌 3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경덕왕19년(760년) 4월… 월명은 이를 내궁의 사자로 여겼고, 왕은 스님의 종자로 여겼으나 서로 알아보니 그렇지 않았다. 왕은 매우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이를 좇게 하였더니, 동자는 내원의 탑 안으로 들어가 숨어버리고 차와 염주는 남쪽벽화에 그려진 미륵상 앞에 있었다.」
위 내용을 정리하면 신라에는 불교 공인이전에도 신라 왕실까지 불교가 전파 되었고 왕궁 안에도 법당이 있었다. 진평왕 때에는 왕궁 안에는 내제석궁(內帝釋宮) 즉 천주사(天柱寺)라는 내불당(內佛堂)이 있었고 그 명칭을 ‘내궁(內宮)’ 혹은 ‘내원(內院)’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사찰 안에는 탑이 있었으며, 탑 남쪽 벽에는 미륵불이 그려져 있었다.
또한 천주사(天柱寺)는 진평왕의 신장(身長)이 11척이나 되는 장신으로 힘이 대단하여 부동석(不動石)관련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진평왕이 내제석궁(內帝釋宮 : 또는 천주사(天柱寺)에 거동하여 섬돌을 밟자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고 왕이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뒷세상 사람들이 보도록 하라." 하였다고 했다.
이것은 왕이 힘이 세다는 것이 이웃나라에 전해져 함부로 신라에 침략하지 못하게 할 의도로 생각되고 이 돌은 성 안에 있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않는 돌(五不動石) 중 하나였다.
해방이전에 안압지(월지) 남쪽의 논 가운데에 부동석(不動石)이라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안압지 주변정리와 주차장 공사 때 없어졌다고 한다.
천주사(天柱寺)가 신라이후 언제까지 존속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1477년경 조선시대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경주부(慶州府) 불우(佛宇)편에 천주사(天柱寺)가 소개되어 있고 위치를 월성 서북쪽에 있으며, 절 북쪽에는 안압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법등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간행된 동경잡기(東京雜記)의 불우(佛宇)편에도 천주사(天柱寺)가 소개되어있는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대동소이하나 말미에“…현재의 제석원(帝釋院)이다. 나라사람들이 해마다 뜰에 꽃을 심고 복을 빈다.”는 내용이 더해져 있어, 조선후기 어느 시점에 천주사(天柱寺)에서 제석원(帝釋院)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후 1933년 동경잡기(東京雜記)를 증간한 동경통지(東京通志)에는 기존의 천주사(天柱寺)를 천주사지(天柱寺址)로 표기했고 20세기 초에 천주사 (天柱寺)혹은 제석원(帝釋院)이 폐사되었음이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 폐탑이 있어 경주지역을 조사한 일인학자들은 안압지와 월성사이를 천주사지(天柱寺址)로 비정했는데 경주고적보존회의 오사카 긴타로는 월성의 북서쪽, 즉 석빙고입구 북쪽에 해당하는 마을 앞 벌판을 천주뜰(天柱垈)로 부르고 있는 것을 근거로 했다.
1975년 안압지발굴조사에서 연못서편지역에 다수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천주사지로 추정되는 장소와 바로 인접한곳이다.
최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연꽃 밭과 동궁과 안압지(월지)사이 평지에서 원형주좌가 새겨진 대형초석과 함께 석물, 기와 편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천주사(天柱寺)와 관련된 유물로는 조선시대초기에 제작된 목조불상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목조 아미타여래상은 1482년에 제작된 것으로 ‘皇明成化十八年壬寅三月日密地正水願成方敎主無量壽如‥˛…라고 묵서로 적혀있다. 불상의 크기는 높이 57.3㎝, 무릎너비 36.5㎝, 어깨너비 20㎝이다.
그리고 天柱가 새겨진 명문기와와 “天主寺小標…”이 새겨진 장대석등이 남아있다. 영남대학교박물관에 天柱가 새겨진 수막새는 지름 15.9㎝, 두께 2.4㎝의 복엽의 연화문 수막새로, 중앙 자방 안에 좌서(左書)로 ‘天柱’가 새겨져 있다.
또 다른 天柱가 기와로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암키와로 잔존길이 8.7㎝, 두께 1.5㎝의 기와 편으로 등 부분에 장방형의 곽을 만들고, 그 안에 좌서(左書)로‘天柱’라는 글자가 찍혀있다. 현재 하부가 결실되어서 그 아래에 글씨가 더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경주시 서부동19번지 유적(조선시대 옥사 담장지)에서 명문이 새겨진 장대석이 출토되었는데, 그 형태는 건축기단의 갑석과 매우 유사하다. 길이 132㎝, 폭 40㎝, 두께 23㎝정도로 매끄럽게 치석된 장대석 상면에는 “天主寺小標 日(自?)文太主… 至北五…”라는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하면에는 10개의 쐐기자국과 함께 거칠게 다듬은 흔적이 확인되었다.
명문의 전체내용을 이해하기는 어려우나, 천주사(天柱寺)의 사역이나 농지구역을 표시한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 읍성의 옥사 담장 축조 시 재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표기된 ‘天柱寺’가『三國遺事』, 『東國輿地勝覽』, 『東京雜記』등에 기록된 ‘天柱寺’로 가정한다면, 늦어도 조선후기 어느 시점에는 천주사(天柱寺)가 폐사되었고, 이후 재활용되어 옥지 기단석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편의 사금갑(射琴匣)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소지왕炤智王이라고도 한다)이 즉위한 10년 무진(戊辰; 488)에 천천정(天泉亭)에 거동했다. 이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보시오”한다,
왕은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따르게 했다. 남쪽 피촌(避村; 지금의 양피사壤避寺村이니 남산南山 동쪽 기슭에 있다)에 이르러 보니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다. 이것을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문득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잊어버리고 길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한 늙은이가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렸는데, 그 글 겉봉에는, “이 글을 떼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떼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입니다”했다. 기사(騎士)가 돌아와 비처왕(毗處王)에게 바치니 왕은 말한다. “두 사람을 죽게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떼어 보지 않아 한 사람만 죽게 하는 것이 낫겠다.” 이때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라 한 것은 서민(庶民)을 말한 것이요, 한 사람이란 바로 왕을 말한 것입니다.”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글을 떼어 보니 “금갑(琴匣)을 쏘라[射琴匣]”고 했을 뿐이다. 왕은 곧 궁중으로 들어가 거문고 갑(匣)을 쏘았다. 그 거문고 갑 속에는 내전(內殿)에서 분향수도(焚香修道)하고 있던 중이 궁주(宮主)와 은밀히 간통(奸通)하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을 사형(死刑)에 처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그 나라 풍속에 해마다 정월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일(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여 하고,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16(5)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지어 제사지냈으나 이런 일은 지금까지도 계속 행해지고 있다. 이언(俚言)에 이것을 달도(怛忉)라고 한다. 슬퍼하고 조심하며 모든 일을 금하고 꺼린다는 뜻이다. 또 노인이 나온 못을 이름하여 서출지(書出池)라고 했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편의 천사옥대(天賜玉帶)
청진淸秦 4년 정유丁酉(937) 5월에 정승正承 김부金傅가 금으로 새기고 옥玉으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쳤다. 길이는 10위圍요. 전과鐫銙가 62개나 되었다. 이것을 진평왕眞平王의 천사대天賜帶라고 한다.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이것을 받아 내고內庫에 간직했다.
제26대 백정왕(白淨王)의 시호(諡號)는 진평대왕(眞平大王), 성(姓)은 김씨(金氏)다. 대건(大建) 11년 기해(己亥; 579) 8월에 즉위했다. 신장(身長)이 11척이나 되었다. 내제석궁(內帝釋宮; 천주사天柱寺라고도 하는데 왕王이 창건創建한 것이다)에 거동하여 섬돌을 밟자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 사람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뒷 세상 사람들이 보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성 안에 있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않는 돌의 하나다.
왕이 즉위한 원년(元年) 천사(天使)가 대궐 뜰에 내려와 왕에게 말한다. “상제(上帝)께서 내게 명하여 이 옥대(玉帶)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꿇어앉아 친히 이것을 받으니 하늘로 올라갔다. 교사(郊社)나 종묘(宗廟)의 큰 제사 때에는 언제나 이것을 띠었다.
그 후에 고려왕(高麗王)이 신라를 치려하여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게 무엇 무엇이냐.” 좌우가 대답한다. “황룡사(皇龍寺)의 장육존상(丈六尊像)이 그 첫째요, 그 절에 있는 구층탑(九層塔)이 그 둘째요,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가 그 셋째입니다.” 이 말을 듣고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중지하고 찬(讚)하여 말했다.
『구름밖에 하늘이 주신 긴 옥대(玉帶)는, 임금의 곤룡포(袞龍袍)에 알맞게 둘려 있네.
우리 임금 이제부터 몸 더욱 무거우니, 이 다음날엔 쇠로 섬돌을 만들 것이네.』
삼국유사 제5권 감통(感通)편의 월명사(月明師) 도솔가(兜率歌)
경덕왕(景德王) 19년 경자(庚子; 790) 4월 초하루에 해가 둘이 나란히 나타나서 열흘 동안 없어지지 않으니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인연 있는 중을 청하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지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조원전(朝元殿)에 단을 정결히 모으고 임금이 청양루(靑陽樓)에 거둥하여 인연 있는 중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월명사(月明師)가 긴 밭두둑 길을 가고 있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서 그를 불러 단을 열고 기도하는 글을 짓게 하니 월명사가 아뢴다. “저는 다만 국선(國仙)의 무리에 속해 있기 때문에 겨우 향가(鄕歌)만 알 뿐이고 성범(聲梵)에는 서투릅니다.” 왕이 말했다. “이미 인연이 있는 중으로 뽑혔으니 향가라도 좋소.” 이에 월명이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바쳤는데 가사는 이러하다.
『오늘 여기 산화가(散花歌)를 불러, 뿌린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령을 부림이니, 미륵좌주(彌勒座主)를 모시게 하라.』
이것을 풀이하면 이렇다.
『용루(龍樓)에서 오늘 산화가(散花歌)를 불러, 청운(靑雲)에 한 송이 꽃을 뿌려 보내네,
은근하고 정중한 곧은 마음이 시키는 것이 어니, 멀리 도솔대선(兜率大僊)을 맞으라.』
지금 민간에서는 이것은 산화가(散花歌)라고 하지만 잘못이다. 마땅히 도솔가(兜率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산화가(散花歌)는 따로 있는데 그 글이 많아서 실을 수 없다. 그런 후에 이내 해의 변괴가 사라졌다. 왕이 이것을 가상히 여겨 품다(品茶) 한 봉과 수정염주(水晶念珠) 108개를 하사했다. 이때 갑자기 동자(童子) 하나가 나타났는데 모양이 곱고 깨끗했다.
그는 공손히 다(茶)와 염주(念珠)를 받들고 대궐 서쪽 작은 문으로 나갔다. 월명(月明)은 이것을 내궁(內宮)의 사자(使者)로 알고, 왕은 스님의 종자(從子)로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알고 보니 모두 틀린 추측이었다. 왕은 몹시 이상히 여겨 사람은 시켜 쫓게 하니, 동자는 내원(內院) 탑 속으로 숨고 다와 염주는 남쪽의 벽화(壁畵) 미륵상(彌勒像) 앞에 있었다.
월명의 지극한 덕과 지극한 정성이 미륵보살을 소가(昭仮) 시킴이 이와 같은 것을 알고 조정이나 민간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왕은 더욱 공경하여 다시 비단 100필을 주어 큰 정성을 표시했다. 월명은 또 일찍이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서 재를 올렸는데 향가를 지어 제사지냈었다. 이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지전(紙錢)을 불어서 서쪽으로 날려 없어지게 했다. 향가는 이러하다.
『죽고 사는 길이, 여기 있으니 두려워지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하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과 같이,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은 모르는구나.
아, 미타찰(彌陁刹)에서 너를 만나볼 나는,
도를 닦아 기다리련다.』
월명은 항상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어느 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이 때문에 그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다. 월명사(月明師)도 또한 이 일 때문에 이름을 나타냈다.
월명사는 곧 능준대사(能俊大師)의 제자인데 신라 사람들도 향가를 숭상한 자가 많았으니 이것은 대개 시(詩)ㆍ송(頌) 같은 것이다. 때문에 이따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찬(讚)해 말한다.
『바람은 종이돈 날려 죽은 누이동생의 노자를 삼게 하고,
피리는 밝은 달을 일깨워 항아(姮娥)가 그 자리에 멈추었네.
도솔천(兜率天)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萬德花) 그 한 곡조로 즐겨 맞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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