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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사지(高仙寺址)는 경주시에서 동쪽으로 보문단지를 지나서 약 13㎞거리에 위치한 암곡동(暗谷洞) 1020번지 일대로 계곡을 끼고 서쪽의 협소한 산기슭에 있었으나 지금은 덕동 댐에 수몰되어 찾아 볼 수 없다. 고선사지(高仙寺址)는 기록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한때 주석한 것으로 알려진 사찰로 통일신라 초기에 창건되어 고려시대까지 존속되었다.

덕동 댐에 수몰 된 암곡동(暗谷洞) 1020번지 일대



1975년 수몰 당시 절터에는 국보로 지정된 통일신라전기 7세기 후반에 세워진 삼층석탑(三層石塔)과 귀부(龜趺)  등이 있었고, 주변은 경작지로 개간되었으며 민가는 없었다. 절터는 금당을 중심으로 하는 금당구와 서쪽에 석탑을 중심으로 하는 탑구, 북쪽에는 건물지들이 북구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사찰배치는 매우 특이한 배치이다.

1975년 수몰 당시 절터에는 국보로 지정된 통일신라전기 7세기 후반에 세워진 삼층석탑과 귀부 등이 있었고, 주변은 경작지로 개간되었으며 민가는 없었다.
1975년 수몰 당시 고선사지 삼층석탑(高仙寺址 三層石塔)

고선사지(高仙寺址)는 덕동호 다목적댐건설로 수몰위기에 처하게 되자 1975년 3월부터 11월까지 절터에 대해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삼층석탑(三層石塔)과 귀부(龜趺) 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동남모서리 야외에 이전 복원되어 있다.

고선사지(高仙寺址) 삼층석탑(三層石塔)은 규모나 결구방식이 감은사지 삼층석탑(感恩寺址 三層石塔)과 거의 같으나 다른 점은 석탑의 1층 탑신 각 면에 문비(扉門)를 양각한 것이다. 그리고 고선사지 삼층석탑(高仙寺址 三層石塔)  창건당시의 탑이 아닌 682년에 세워진 감은사지 삼층석탑 (感恩寺址 三層石塔) 의 뒤를 잇는 석탑임이 사리공의 구조를 통해서 밝혀졌다.

고선사(高仙寺)와 관련된 기록은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 『삼국유사』 권 제4 의해 제5 사복불언조(蛇福不言條)』, 『고려사』 등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동남모서리 야외에 이전 복원된 고선사지 삼층석탑(高仙寺址 三層石塔)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는 9세기 초(800∼808) 원효의 손자인 설중업(薛仲業))이 고선사(高仙寺)에 세운 추모비로 원효의 일대기를 적은 비로 원효의 전기에 관한 현존 최고(最古)의 자료이다. 고려시대 이후 비신은 파손된 채 흩어졌는데, 1915년 5월 9일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하던 일본인이 덕동댐 상류인 암곡동 지연(止淵)에서 하단부의 비편 3 개를 발견하였다. 높이 90㎝, 너비 93㎝, 두께 23㎝로 원비(原碑)의 하반부에 해당되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그리고 1968년 경주시 동천동분황사 북쪽 동천사지(東泉寺址)로 전칭되는 부근 농가에서 원비의 향좌(向左) 상부에 해당되는 또 하나의 비편이 발견되었는데, 이전의 단석과 아래위로 연결되고 삼각형으로 길이 52.0cm, 폭 45.0cm, 두께 24㎝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있다.

원래는 일제시대 고물수집에 상당한 취미를 갖고 있던 일인(日人)이 수습하여, 자신의 제지공장에 보관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후 공장을 철거하고 다시 50년대 중반 경에 논으로 변경할 때 발견하여, 곡물 타작용으로 사용하려고 집으로 옮겼다고 한다.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의 향좌(向左) 상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의 하단부 비편 3개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는 원효의 손자인 설중업(薛仲業)이 36대 혜공왕 15년(779)에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원효를 추모하기 위하여, 40대 애장왕(800~808) 때 숙부로 당시의 실권자인 각간(角干) 김언승(金彦昇, 41대 헌덕왕(憲德王)의 후원 하에 고선사(高仙寺)에 건립한 것이었다.

서당화상비문(誓幢和上碑文)의 전체구조는 33행이며, 각 행은 61자로 추정된다. 서체는 행서(行書)이고 구양순체로 찬자(撰者)는 성명 미상의 승려이며, 서자(書者) 역시 미상이다. 각자(刻者)는 음리화(音里火) 삼천당주(三千幢主)인 급찬(級飡) 고금□(高金□)이다.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 비편 4개의 조합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있는 고선사지(高仙寺址) 귀부(龜趺)

『삼국유사』 제4권 의해 제5 사복불언(蛇福不言)편을 통해서 살펴보면 원효는 고선사 (高仙寺 )에 주석하였고 7세기후반, 즉 원효가 설총의 집 옆에 있던 혈사(穴寺)에서 입적하던 686년 이전에는 이미 고선사가 창건되었다.

통일신라이후 고선사 삼층석탑(高仙寺址 三層石塔)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나타나는데 고려현종 12년(1021) 5월에 상서좌승 이가도(李可道)에 명하여 고선사(高仙寺)의 금라가사(金鑼袈裟)  불정골(佛頂骨)을, 남산 창림사(昌林寺)의 불아(佛牙)와 같이 가져오게 하여 내전(內殿)에 안치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때 탑 속에 안치되어있던 진신사리가 유출되었다.

조선시대 문헌자료에서 고선사는 더 이상 확인되지 않아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선사지발굴조사에서도 조선시대로 편년되는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1975년 정부정책에 의해 덕동지역에 다목적댐이 건설됨에 따라 경주사적관리사무소의 주관으로 1975년 5월 11일부터 11월 20일까지 충남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하여 금당구와 석탑구 등 일대의 유구를 발굴·조사하여 금당지·강당지·중문지·회랑지 등 많은 유구를 확인하였으며, 금동불상·와전류 등 상당한 유물을 수습하였다.

1975년 고선사지에서 출토 된 와전류(국립경주박물관)



고선사지 삼층석탑 (高仙寺址 三層石塔)은 이중기단의 삼층석탑 (三層石塔)으로 감은사지 삼층석탑 (感恩寺址 三層石塔)과 더불어 신라석탑의 시원기양식이다. 1, 2(상·하)층 기단 각 면에 우주와 탱주를 배치하고 탑신 양쪽에도 우주를 둔 것은 목조건축의 기둥을 표현한 것이고,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공포를 약화한 표현이며, 옥개석 낙수면에 경사와 전각에서 반전이 뚜렷한 것도 목조건축의 지붕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고선사지 삼층석탑 (高仙寺址 三層石塔) 은 기단높이 2,496㎜, 탑신높이 7,306㎜, 상륜부 높이1,062㎜로 지대석 상면에서 복발까지 전체높이는 10,864㎜이고, 지대석 한 변 너비는 6,750~6,861㎜이다. 석탑에 사용된 부재는 기단부 44매, 탑신석 13매, 옥개석 24매, 상륜부 3매로 모두 84매의 부재로 결구되어있다.

지대석은 갑석보다 더 많이 내밀고, 갑석의 이음위치를 탱주 위에 두었으며, 상부하중 분산을 위하여 옥개 받침석과 옥개석의 이음위치를 서로 엇갈리게 둔 것은 구조 안전을 고려한 부재결구기법이다.

기단부 기단은 이중기단으로 1층(하층) 기단은 지대석과 기단면석을 1매석으로 12매석을 다듬고 그 위에 갑석 12매를 올려놓았다. 지대석과 면석, 즉 두 부재를 한 부재로 만든 것은 부재의 이완과 침하 등 부재변형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다.

1층(하층) 기단면석의 각 면에는 양쪽에 우주(隅柱)를 두고 가운데는 탱주(撑柱) 3주씩을 두어 4구(區)로 구분하였다. 부재는 네 모서리에는 우주를 모각(模刻)한 ‘ㄱ’자형 부재를 1매씩 배치하고 그 사이에 ‘一’자형 부재 2매씩을 배치하여 모두 12매로 구성되어있다.

1층(하층) 기단 갑석은 단부(端部)에 부연과 모서리에 합각선과 솟음은 없다. 가장자리로 얕은 물매가 있고, 상면에는 호각형(弧角形) 2단 상층기단 면석받침이 있다. 부재는 지대석과 같이 네 모서리에 ‘ㄱ’자형 부재를 1매씩 배치하고 그 사이에 ‘一’자형 부재2매씩을 배치하여 모두 12매로 구성되어 있다.

2층(상층) 기단면석의 각 면 양쪽에 우주(隅柱) 를 두고 가운데는 탱주(撑柱)  2주씩을 두어 3구(區)로 구분하였다. 부재는 각 면에 3매씩 모두 12매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주(隅柱) 와 면석을 다듬은 것 4매, 탱주(撑柱)와 면석을 다듬은 것 8매로 되어있다.

2층(상층) 기단갑석은 단부에 부연이 있고, 모서리에 합각선과 솟음은 없다. 가장자리로 얕은 물매가 있고, 상면에는 각형(角形) 2단 탑신받침이 있다. 네 모서리에 ‘ㄱ’자형 부재와 각 면에 ‘一’자형 부재를 각 각 1매씩 배치하여 모두 8매로 구성되어있다.

탑신부 1층 탑신과 각 층 옥개석은 각각 8매씩 32매이고, 2층 탑신은 4매, 3층 탑신은 1매로 모두 37매로 구성되어 있다.
1층 탑신은 우주와 면석이 별석으로 각각 4매씩 모두8매로 구성되어있다. 탑신 4면에는 문비(門扉)가 모각(模刻)되어 있는데 문설주와 인방, 아래에는 신방목도 표현하였다. 문비 상하에 각각 작은 구멍 여러 개가 세 개 군을 이루고 있으며, 가운데는 원형으로 문고리도 표현하였다.

탑신 4면에는 문비(門扉)가 모각(模刻)되어 있는데 문설주와 인방, 아래에는 신방목도 표현하였다. 문비 상하에 각각 작은 구멍 여러 개가 세 개 군을 이루고 있으며, 가운데는 원형으로 문고리도 표현하였다

2층 탑신은 1층 탑신에 비해서 높이가 1/2이상 현저하게 줄어들고 부재는 우주와 면석을 1매석으로 다듬은 4매로 구성되어있다.

3층 탑신은 1매석으로 네모서리에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탑신상면 중앙에 찰주공을 두고 그 남쪽에 방형사리공을 마련하였데 이는 사리장치를 넣어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배려로, 석탑을 해체·복원하면서 밝혀졌다. 

옥개석 각 층은 낙수면과 옥개받침석이 별석으로, 각 각 크기가 다른 4매씩 모두 8매로 구성되어있다. 옥개석 상면에는 각형 2단 받침이 있다. 낙수면의 경사는 늘어진 ‘S’자형으로 완만한 편이며 단부에서 약간 반전한다. 귀마루의 합각선은 뚜렷하며 처마 저면(底面)은 수평직선이고, 물끊기는 없다.

각 층 옥개석은 모두 네 귀가 결실되어서 전각에는 풍령(風鈴) 등 장식을 달았던 작은 구멍의 위치, 수량 등은 확인이 불가능하다. 안허리와 앙곡은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부에서 약간 반전한다. 옥개받침은 각 층이 직각5단이다.

낙수면과 옥개받침석을 크기를 각각 다르게 만든 것은 이음부를 서로 어긋나게 함으로써 상부하중을 분산시키는 효과로 집중하중에 의한 부재의 이완과 변형 등 훼손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고선사지 삼층석탑(高仙寺址 三層石塔) 상륜부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 앙화가 남아있고 나머지는 오래전에 없어졌다. 노반은 2단 받침위에 방형육면체로 가운데에 원형으로 찰주공이 뚫려있고, 상단(上端)에는 1단 받침이 있다. 복발은 약한 편구형(便球形)으 가운데 두 줄로 횡대를 두르고 작은 원5개를 조합한 조각이 등 간격으로 4곳에 있다. 앙화는 다른 탑에 비해서 아주 작으며 방형간석에 2단 돌림띠를 두르고 그 위에 앙화를 조각하였다.

삼국유사4권 의해(意解)) 5 사복불언(蛇福不言)

서울 만선북리(萬善北里)에 있는 과부가 남편도 없이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2세가 되어도 말을 못하고 일어나지 못하므로 사동(蛇童; 아래에는 사복蛇卜이라도고 하고, 또 사파蛇巴사복蛇伏이라고 썼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사동蛇童을 말한다)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그때 원효(元曉)가 고선사(高仙寺)에 있었다. 원효는 그를 보고 맞아 예를 했으나 사복(蛇福)은 답례도 하지 않고 말한다. “그대와 내가 엣날에 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이제 죽었으니 나와 함께 장사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원효는 좋다하고 함께 사복의 집으로 갔다.

여기에서 사복은 원효에게 포살(布薩)시켜 계()를 주게 하니, 원효는 그 시체 앞에서 빌었다. “세상에 나지 말 것이니, 그 죽는 것이 괴로우니라. 죽지 말 것이니 세상에 나는 것이 괴로우니라.” 사복은 그 말이 너무 번거롭다고 하니 원효는 고쳐서 말했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모두 괴로우니라.” 이에 두 사람은 상여를 메고 활리산(活里山) 동쪽 기슭으로 갔다.

원효가 말한다. “지혜 있는 범을 지혜의 숲 속에 장사지내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사복은 이에 게()를 지어 말했다.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사라수(裟羅樹) 사이에서 열반(涅槃)하셨네.
지금 또한 그같은 이가 있어,
연화장(蓮花藏) 세계로 들어가려 하네.
말을 마치고 띠풀의 줄기를 뽑으니, 그 밑에 명랑하고 청허(淸虛)한 세계가 있는데, 칠보(七寶)로 장식한 난간에 누각이 장엄하여 인간의 세계는 아닌 것 같다. 사복이 시체를 업고 속에 들어가니 갑자기 그 땅이 합쳐 버린다. 이것을 보고 원효는 그대로 돌아왔다.

후세 사람들이 그를 위해서 금강산(金剛山) 동남쪽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도량사(道場寺)라 하여, 해마다 314일이면 점찰회(占察會)를 여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사복이 세상에 영험을 나타낸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그런데 민간에서는 황당한 얘기를 덧붙였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해 말한다.
잠자코 자는 용이 어찌 등한하리.
세상 떠나면서 읊은 한 곡조 간단도 해라.
고통스런 생사가 본래 고통이 아니어니,
연화장 세계 넓기도 해라.

1977년에 준공 된 덕동호
덕동호가 준공되면서 마을의 대부분이 수몰되고 동쪽 가장자리 산 중턱에 20여 가구만 살고 있다.
덕동호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기울어 길게 남북으로 활처럼 동쪽의 산들을 감싸 안았고 그 가장자리인 동쪽의 기슭에 덕동교에서 암곡으로 들어가는 호안로의 길가에 마을이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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