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는 이름이 같은 절터가 두 곳 있는데 시내 구황동(九黃洞)에 위치한 황룡사지(皇龍寺地)가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감포로 가는 길에 있는 황룡동(黃龍洞) 황용사지(黃龍寺址)로 보문단지를 지나 4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사시목(獅時目) 마을 휴게소(황룡 휴게소)에서 왼쪽 방향으로 마을길을 따라 약 2km 지점의 동대봉산(東大封山, 黃龍山 : 694m) 절골(寺谷)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동대봉산(東大封山)은 옛날에 이곳에 봉산(封山) 즉 입산금지구역의 산이기 때문에 산세가 험하고 삼림이 매우 울창했다. 그래서 여기에 생산되는 재목은 수군의 조선용 재료나 기타의 공용에 공급되었다. 동대봉산(東大封山)의 서남계곡은 황룡곡(黃龍谷), 절골(寺谷)로 황룡사지(黃龍寺址)가 있고 서쪽 계곡은 암곡(暗谷)으로 무장사지(鍪藏寺址)가 있다.


황용사(黃龍寺) 터 아래에는 1987년 종연(宗然) 스님이 건립한 황용사라는 사찰이 있고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다. 황용사(黃龍寺) 터는 황룡동 산 170-1번지 일대로 일제강점기 때 오사까긴따로(大坂金太郞)가 당시 지명인 황룡리(黃龍里)와 폐탑 유적을 토대로 사명을 황룡사지(黃龍寺址)로 추정하였고 수차례 폐사와 중창 거치며 19세기 초까지 존속하였다.



관련 문헌으로 『불국사고금역대기(佛國寺古今歷代記)』에 따르면 633년(선덕여왕 2년)에 ‘장인을 불러 약사불을 안치하고 황둔사(黃芚寺)로 하였다.’는 기록과 39대 소성왕(799~800) 행차 길에 산과 절을 보고 계곡의 물이 불어나 풀과 나무는 물을 흠뻑 먹었다고 하여 이 산을 은점산(隱霑山)이라고 하고, 절은 황룡사(黃龍寺)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을 통해 황둔사(黃芚寺)에서 황용사(黃龍寺)로 바뀌었으며, 창건 시기부터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찰이었다.
기록을 통해 보면 최초에 황용사(黃龍寺)는 ‘皇’이 아닌 ‘黃’을 사용하였고 조사 발굴 결과 조선 시대 초기 층에서 수습된 ‘皇龍寺大殿’이 새겨진 기와 편을 통해 조선 시대에는 ‘皇’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은점산 본사(隱霑山 本寺)’라는 문헌 기록과 왕의 명을 받은 담화(曇華) 스님 일화를 통해 조선 시대에도 왕실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담화(曇華) 스님은 조정의 명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왜적에 의해 불타 없어진 황룡사(黃龍寺)를 중창(1623년)과 중수(1650년)를 하였다. 1845년에 증보, 간행된 ‘동경잡기(東京雜記)에 황룡사가 기록되어 있어 조선후기에도 사명이 유지되었다.
신라시대 때 서라벌에서 동해로 가는 길목 중 고선사와 기림사 사이에 황용사(黃龍寺)가 자리하며, 소성왕 행차 길에 사명을 내린 기록을 통해 통일 신라 시대부터 왕의 길에 포함된 것이다. 근처 모차골(毛車谷)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신라시대 때 왕의 수레인 마차가 이곳으로 다녔다고 해서 마차곡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모차골(毛車谷)로 바뀌었어 신라시대 때 이 주변이 감은사로 가는 왕의 길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절터에서 출토 된 皇龍寺大殿’명 기와 편을 통해 조선 시대에도 황용사(黃龍寺)가 왕의 유숙을 담당한 ‘院’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까운 곳에 추원(楸院)이라는 재가 있는데 동해로 가기 위해 이곳을 거쳐 넘었는데 그 산세가 너무 험하므로 1일 왕래가 불가능하므로 조정에서 원(院)을 짓고 관리와 행인들이 숙식하고 다니게 했다고 해서 추원이라고 전해지고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황용사(黃龍寺)는 쌍탑 가람으로서 남북 폭이 좁은 산지의 여건에 맞춰 건물을 배치하였다. 황용사 터는 3구역으로 구분되는데 쌍탑과 금당이 있는 구역, 구들이 있는 건물 구역, 그리고 고려석탑이 있는 구역이다. 쌍탑과 금당이 있는 구역은 문지-쌍탑-금당을 중심 기준으로 오른쪽엔 대형 건물지를 배치하고, 왼쪽에는 축이 다른 건물과 석축을 조성하였으며 금당 중심으로는 동, 서, 남으로 회랑을 조성하였다.

황용사지(黃龍寺址)에 대한 발굴 조사는 문화재청 지원을 받아 (재)불교문화재연구소가 2018~2019년 1차 조사와 2020년 2차 조사를 시행하였다. 발굴 결과 ‘皇龍寺大殿’명 기와, 석조불상 편, 소조불상 편, 금동귀면, 금동보당, 금동사자상, 십이지신이 새겨진 불대좌하대석 등 유물이 약 600점 출토되었고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건물 터가 확인되었다.
쌍탑과 금당이 있는 구역은 상·하 2단의 평탄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계부에는 석축이 조성되어 있다. 석축은 정남향에 가까운 남서향이고, 35~130㎝ 크기의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잔존 높이는 2.8m이며, 길이는 20m 정도이다. 상·하단 평탄지 사이에는 약 6m가량 고도차가 있어서 원래 석축의 높이는 3m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단 평탄지 규모는 61×25.2m 정도이나 대나무 숲이 밀집한 건물지 후면을 포함하면 61×34m 내외로 추정된다.
금당지는 정면 3칸, 측면 3칸 정방형이며, 기단은 우주(隅柱), 탱주(撑柱), 면석을 개별로 제작하여 사용한 가구식이다. 금당 앞 무너진 두기의 폐탑은 삼층석탑으로 쌍탑 간 거리는 약10m 내외로 통일신라시대 때의 일반적인 석탑이다.





기단부는 이중기단으로 지대석과 하층기단면석은 하나의 돌이며, 하층기단갑석은 별도로 조성하였다. 기단석은 두 탑 모두 8매의 부재를 사용하였고, 모서리 4매, 면석 4매로 구성하였다. 길이는 90~110㎝ 내외이고, 길이가 긴 부재는 우주와 탱주가 함께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탑신부의 옥개석과 탑신석은 각각 1매의 석재로 조성되었다. 탑신석에는 우주를 새겨 놓았고, 옥개석에는 2단의 각형 탑신 괴임과 4단의 각형 옥개받침을 표현하였으며, 풍탁을 달았던 구멍이 있다.
1층 탑신석은 두 탑 모두 너비 95㎝, 높이 90㎝내외로 크기가 유사하며, 우주의 너비는 19㎝이다. 상면 중앙에 17×18㎝, 깊이 14㎝정도의 방형사리공이 조성되어 있다. 1층 옥개석의 경우 동탑은 일부만 잔존하고, 서탑도 반전된 상태로 매립되어 있어 일부만 확인할 수 있다.


3층 탑신석은 두 탑 모두 확인되지 않는다. 3층 옥개석은 두 탑 모두 상면에 직경 13.5㎝, 깊이 13㎝ 내외의 찰주공이 조성되어 있다.



금당 오른쪽에 배치된 대형 건물지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기단은 가구식이지만 금당과 달리 우주, 탱주, 면석이 일체형으로 제작되었다. 건물 내부에서는 석조불상과 다량의 소조불상 편이 출토되어 금당과 다른 불전이나 강당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구들이 있는 건물 구역은 4단의 평탄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른 구역에 비해 정비가 되어있는 편이다. 최상단에 해당하는 1단 평탄지는 34.3×13.7m 규모이고, 평탄지 종단에는 석축이 확인되나 대부분 결실되었다. 석축의 잔존 높이는 2.3m이며, 부분적으로 길이 2.3~4m 가량 남아 있다.



2단 평탄지 이하에는 잔디 등이 식재되어 있고, 3단 평탄지 내에는 길이 162㎝ 정도의 장대석이 포함된 폭 3m의 돌무지가 확인되어 해당구역 일원이 정비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폐탑이 있는 구역은 20×12m 가량의 타원형 평탄지로 형성되어 있다. 평탄지 내에는 붕괴된 석탑 부재와 배례석 등이 남아 있다. 건물지 관련 유구는 확인되지 않는다.

기단부는 탑구로 추정되는 판석이 기단 외부에 일부 남아 있고, 지대석은 31~89㎝ 크기의 방형석재 5~6매를 이용하여 한 면을 구성하고 있어 복원되는 지대석 길이는 3.7m, 높이 35㎝이다. 기단면석은 5매의 판석형 부재로 구성되어 있다. 너비 42~46㎝, 높이 78㎝ 내외의 부재 중 모서리와 중앙부에는 곡선형으로 양각된 면석이 있다.







황룡동(黃龍洞)은 경주시의 동 중에서 가장 험준한 산골에 위치하고 경주에서 감포 간 4번 국도주변과 남북으로 길게 두 골짜기를 타고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신라 30대 문무왕이 동해로 오갈 때 이쪽을 이용하였다.
황룡(黃龍)이라는 지명은 문무왕이 동해에 왜구가 침입하여 혼란을 야기하는 것을 목격하고 탄식하며 귀로에 현재의 토함산 중턱에서 휴식하면서 산천을 관망하니 단풍이 황색으로 물든 절경과 산세가 용의 머리 같이 생겼다 하여 즉석에서 황용이라 칭했다 한다. 절골(寺谷)은 원효대사가 건립한 큰 절이 있었으며 암자가 20여개소나 있었다 하여 절골이라고 불렸다.
사시목(獅時目)은 황용동(黃龍洞)에서 가장 큰 마을로 이름 유래는 신라시대 표충사 앞의 산이 사자목과 비슷하다고 하여 사시목(獅時目)이라 칭했다는 설과 옛날 이곳에 사슴이 많이 살아 사냥꾼들이 사냥을 할 때 여기서 지키고 있다가 사슴을 잡는 길목이라 해서 사시목(獅時目)이라 하는 두 가지가 있다. 사시목(獅時目)은 사시메기 또는 사항(獅項)이라고도 하는데 4번 국도를 따라 추령재(楸嶺岾)를 지나면 문무대왕면 장항리((獐項里)가 있어 후자가 더 설득력(說得力)이 있다.


추령(楸嶺, 서낭재)은 경주 동쪽에 있는 북천의 발원지인 황룡동과 대종천의 발원지인 양북면 장항리사이에있는 고개이다(고도:310m). 순우리말이름인 가내고개를 ‘가래나무 추(楸)’와‘고개 령(嶺)’등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서낭당이 있어서 낭재라고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에는 동쪽 25리에, 『동경잡기』에는 동쪽 30리에 있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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