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사지(䥐藏寺址)은 경주시 암곡동 산 1번지 일대에 있는 신라시대 절터로 여기를 가기 위해서는 보문단지 물레방아 광장을 지나서 신평 삼거리에서 맥도날드와 농협경주교육원사이의 왼쪽 길로 200m 정도 가면 손곡동/천북면과 암곡(暗谷) 갈림길을 만나는데 여기서 오론 쪽 길로 계속 가면 무장사지1주차장이 나타난다.
비록 산골마을이지만 주변의 마을길은 많이 개설되어 도로가 포장 되었고 미나리 재배용 비닐하우스가 많이 조성되어 있다. 여기서 2.4km를 걸어서 가야되는데 400m 정도의 포장도로와 새롭게 조성 된 길을 2km를 가면 무장사지(䥐藏寺址)를 만날 수 있다. 예전에는 개울과 함께 거닐던 아름답고 운치 있는 산길이었지만 지금은 과도한 개발로 사라졌다.
암곡(暗谷)이라는 지명은 깊은 산골짜기의 안쪽이라 어두운 마을이란 뜻에서 암실(暗室) 또는 암곡(暗谷)으로 불려왔는데 조선초기에는 명곡(明谷)이라 하다가 조선 말 부터 암곡(暗谷)이라고 불려졌다.
무장사(䥐藏寺)는 『삼국유사』 무장사 미타전조(䥐藏寺 彌陀殿條)와 무장사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鍪藏寺 阿彌陀佛 造像 事蹟碑) 의하면,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아버지인 대아간(大阿干) 김효양(金孝讓 : 명덕대왕(明德大王)에 추봉됨)이 그의 숙부 파진찬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고 이후 39대 소성왕(재위 799∼800)의 왕비인 계화부인(桂花夫人)이 소성왕 사망 후 801년에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미타전(彌陀殿)을 건립하였고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을 조성하였다.
이후 고려시대까지 절은 남아있었으나 미타전(彌陀殿)은 허물어졌다. 조선후기인 1760년(영조 38년)에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있던 홍양호(洪良浩)가 무장사(䥐藏寺)에 암자와 같은 건물이 있었음을 확인하였고 1817년에 무장사(䥐藏寺)를 찾았던 김정희가 비편(碑片)을 새로 발견한 뒤 사찰 뒤로 옮겼다고 한 내용으로 보아 19세기초반 이후에 폐사(廢寺)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곳이 무장사지(䥐藏寺址)로 비정한 것은 발견된 무장사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鍪藏寺 阿彌陀佛 造像 事蹟碑)의 비편 3개에서 비문의 일부분이 『삼국유사』무장사 미타전조(䥐藏寺 彌陀殿條)의 내용과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비편 3개가 발견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조선(朝鮮) 영조(英祖) 38년 경진년(庚辰年 : 1760)에 홍양호(洪良浩)가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있을 때에 경주(慶州) 내동명(內東面) 암곡리(暗谷里)에서 발견하였다가 다시 그 소재를 잃은 것을 순조(純祖) 17년 정축년(丁丑年 : 1817)에 김정희(金正喜)가 경주 일대를 뒤져 깨진 비석 두 부분을 다시 찾은 것으로, 청(淸)나라 사람 유승간(劉承幹)이 편찬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부록에 처음 소개되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자료 조사 과정 중 무장사지(鍪藏寺址) 부근에서 귀부(龜趺), 이수(螭首) 및 『해동금석원』에 소개되지 않았던 다른 한 부분이 다시 발견되어 소개되었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이다.
비문의 찬자(撰者)는 김육진(金陸珍)이나 그는 단지 문장만을 지었고 서체는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긴 것이다.
무장(䥐藏)은 투구를 묻은 곳이라는 뜻으로 사찰 이름을 무장사(䥐藏寺)라 한 것은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兵器)와 투구를 이 골짜기 안에 매장시킨 곳이기 때문에 연유한 것이다.
무장사(䥐藏寺) 터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특성상 서향한 가람배치로 동쪽 높은 곳에 불전(佛殿)을, 서쪽 낮은 곳에 탑을 배치하였는데 상하로 단이 져 있다. 상단에는 미타전과 무장사 아미타불조상사적비(阿彌陀佛造像寺跡碑)가 있고, 하단에는 가운데 금당, 끝자락에 삼층석탑이 있다.






무장사 아미타불조상사적비(阿彌陀佛造像寺跡碑)는 아미타불을 조성한 인연을 적은 비문으로 제 39대 소성왕(재위 799∼800)의 왕비인 계화부인(桂花夫人)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을 만들면서 그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비이다. 건립연대는 801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비는 쌍두귀부(雙頭龜趺)의 머리 부분과 이수(螭首)의 1/4 정도가 파손되어 완전하지 않다. 크기는 쌍두귀부(雙頭龜趺) 가로 168cm, 세로 110cm, 높이 58cm, 이수(螭首) 높이 65cm, 너비 81cm이다.





두 귀부의 등위중앙에 비신을 세우기 위한 장방형의 비좌(碑座)를 마련하고, 비좌의 네 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으나 왼쪽 면은 파손되어 볼 수가 없다. 이처럼 귀부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것은 다른 귀부에는 볼 수가 없다.



장방형의 비좌(碑座)에는 2011년에 복원된 비신(碑身)이 있고 그 위에 이수(螭首)가 얹혀 있다. 일부 잘려진 이수(螭首)의 전, 후면에는 두 마리의 반용(蟠龍)이 운기문(雲氣文)속에서 앞발로 여의주(如意珠)를 잡고 있으며, 이수(螭首) 중앙 전, 후면에는 ‘阿彌陀佛□□이라는 여섯 글자를 이행으로 새겼다고 하나 현재 마모가 심하여 식별이 안 된다.


또한 이수(螭首) 왼쪽 면에는 1817년 4월 29일에 이곳을 답사하다가 이 비편을 발견하여 탁본한 김정희(金正喜)의 감회를 기록한 조사기(調査記)가 별도로 새겨져 있다.
무장사 아미타조상사적비(鍪藏寺 阿彌陀佛 造像 事蹟碑)의 이수(螭首)는 통일신라초기에 조성된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릉비의 이수(螭首)와 9세기 후반 최치원이 찬한 숭복사지비(崇福寺址碑)의 이수(螭首)와 다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쌍두귀부(雙頭龜趺)는 정면을 서향으로 하고 있는데,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경주지역의 모든 신라시대 귀부는 건물지 또는 왕릉의 방향과 관계없이 남향을 하고 있다는 점과 다르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십이지신상의 고유한 방향과 일치하지 않는 점이다. 예컨대, 자상(子像)의 경우 정북을 향하고 있어야 하나, 현재는 동향을 하고 있다. 즉, 무장사지의 쌍두귀부(雙頭龜趺)는 남향을 하고 있었으나, 어느 때 서향으로 방향이 변경된 것이다.
무장사지 삼층석탑 (鍪藏寺址 三層石塔)는 원래 무너진 채 깨어져 있었던 것을 석재 일부를 보충하여 1963년 12월 13일 복원하였으며 1996년 8월~11월에 석탑을 전면해체 보수하였다. 이 석탑은 9세기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이중기단 삼층석탑으로 기단부와 탑신부는 비교적 온전한 편이지만 상륜부는 노반을 포함하여 대부분 결실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석탑의 전체높이는 지대석에서 상륜부까지 4.9m이고 기단부 지대석 4매, 하층기단 12매, 상층기단 12매, 탑신부 6매, 상륜부 2매로 모두 36매로 구성되어 있다.


석탑의 특징은 상층기단 면석에 우주와 탱주를 두지 않고 각 면에 2개씩 안상(眼象)을 새겼는데 이렇게 기단부에 안상을 새긴 예는 경주 지역에서는 남산 승소곡 삼층석탑(현 경주국립박물관), 황용골 황용사지 고려시대 폐탑재 등 에서 볼 수 있다.




기단부의 기단은 이중기단으로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1매석으로 다듬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려놓았다.
하층기단 면석은 각 면 양쪽에 우주를 두고 가운데 탱주2주를 두었고, 우주와 탱주에는 흘림기법이 없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이 1매석으로 ‘ㄱ’자형 부재를 네모서리에 1매씩 배치하고 각 면에 ‘一’자형 부재를 1매씩 배치하여 모두 8매로 결구되어있다. ‘ㄱ’자형 부재는 모서리에 우주를 두고 양쪽에 면석을 다듬어 4부재가 모두 크기와 모양이 동일하다.
가운데 ‘一’자형 부재는 역시 4매가 모두 크기와 모양이 동일하고, 면석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탱주를 다듬었다. 8매의 부재가 두 종류이며, 부재 간 이음은 탱주에 붙여서 간단한 맞댄이음을 하였다.
하층기단 갑석 역시 8매로 구성되어있는데, 크기가 비슷한 부재를 네모서리에 1매씩 배치하고 각 면에 ‘一’자형 부재를 1매씩 배치하였다. 갑석 위에 호·각형 2단 상층기단 받침이 있고, 가장자리로 약한 구배가 있다. 결구수법은 맞댄이음으로, 이음위치는 서면과 북면은 탱주 위에 두었으나, 동면과 남면은 탱주를 벗어나있다. 내민 길이는 지대석과 같다.
북동과 북서 부재는 심하게 훼손되어 새로운 석재로 보충하여 접착하였으며, 남서 부재도 날개부분이 많이 훼손되었다.
상층기단 면석은 ‘ㄱ’자형 부재를 네모서리에 1매씩 배치하고 각 면에 ‘一’자형 부재를 1매씩 배치하여 모두 8매로 결구되어 있다. ‘ㄱ’자형 부재는 모서리에 우주도 없이 양쪽에 면석만 다듬어서 4부재가 크기와 모양이 모두 같다. 가운데 ‘一’자형 부재 역시 4매가 모두 크기와 모양이 동일한데, 양쪽으로 안상이 조금씩 물려있다. 부재 간 이음은 탱주에 붙여서 간단한 맞댄이음을 하였다.


상층기단 갑석은 크기가 비슷한 4매로 구성되어있다. 단부에 부연과 약한 물매가 있고, 갑석 위에는 각형(角形) 2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결구수법은 맞댄이음으로, 이음위치는 면석 위에 두었다.
탑신부는 3층 탑신으로 각 층의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 각 1매석으로 모두 6매로 구성되어 있다. 각 층 탑신은 네 모서리에 우주만 모각되어있고, 문비 등 장식은 없다. 1층 탑신상면 가운데 방형사리공이 뚫려있다. 2층 탑신과 3층 탑신은 1층 탑신에 비해서 현저하게 줄어들어서 급격한 체감을 나타낸다.
옥개석 각 층은 5단 받침이며, 상면에 각형 2단 받침이 있고,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며, 우동(귀마루) 단부에서 부드럽게 살짝 들려있고(반전), 전각에서 안허리와 앙곡이 약간 있다. 각 층 네 모서리에 풍령(風鈴) 등 장식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뚫려있다
상륜부의 노반과 복발은 복원하였고 노반은 방형육면체이고, 위에 복발은 편구형(扁球形)으로 다듬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제 3권 탑상(塔像) 제 4 무장사(䥐藏寺) 미타전(彌陀殿)
서울 동북쪽 20리 쯤 되는 암곡촌(暗谷村) 북쪽에 무장사(䥐藏寺)가 있으니, 이것은 신라 제38대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아버지 대아간(大阿干) 효양(孝讓), 즉 추봉(追封)된 명덕대왕(明德大王)의 숙부 파진찬(波珍飡)을 추모(追慕)해서 세운 것이다. 그윽한 골짜기가 몹시 험준해서 마치 깎아 세운 듯하다.
그곳은 깊고 어두워 저절로 허백(虛白)이 생길 것이니, 이야말로 마음을 쉬고 도(道)를 즐길 만한 신령스러운 곳이었다. 절의 위쪽에 아미타(阿彌陀)의 고전(古殿)이 있다. 곧 소성대왕(昭成大王; 혹은 昭聖大王)의 비(妃) 계화왕후(桂花王后)가, 대왕(大王)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왕후는 근심에 차서 황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고 지극히 슬퍼하여 피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했다.
이에 그는 밝고 아름다운 일을 돕고 명복을 빌 것을 생각했다. 이때 서방(西方)에 아미타(阿彌陀)라는 대성(大聖)이 있어 지성으로 그를 믿으면 잘 구원하여 맞아 준다는 말을 듣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찌 나를 속이겠느냐.”하고는 이에 육의(六衣)의 화려한 옷을 희사하고 구부(九府)에 저장해 두었던 재물을 다 내어 이름난 공인(工人)들을 불러서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 하나를 만들게 하고, 아울러 신중(神衆)도 만들어 모셨다.
이보다 앞서 이 절에는 늙은 중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 날 꿈에, 진인(眞人)이 석탑(石塔) 동남쪽 언덕 위에 앉아서 서쪽을 향하여 대중을 위해서 설법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이곳은 반드시 불법이 머무를 곳이다.”라고 생각하고 마음속에 숨겨 두고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곳은 원래 바위가 험하고 시냇물이 급하게 흐르므로 공인(工人)들은 돌아다보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좋지 못한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터를 닦을 때에는 평탄한 곳을 얻어서 집을 세울 만하여 확실히 신령스러운 터와 같으니 보는 이들은 깜짝 놀라 좋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근고(近古)에 와서 미타전(彌陀殿)은 허물어지고 절만 홀로 남아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종(太宗)이 삼국(三國)을 통일한 뒤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무장사(䥐藏寺)라고 한다.”고 한다.

'폐사지를 찾아서 > 경주지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동해로 가는 왕의 길에 위치한 왕실 사찰 황룡동(黃龍洞) 황룡사지(黃龍寺址) (0) | 2026.05.01 |
|---|---|
|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고선사지(高仙寺址)와 삼층석탑(三層石塔) (1) | 2026.04.04 |
| 국가 주관의 제사 거행과 정치적 자문을 했던 천관사지(天官寺址) (1) | 2026.03.29 |
| 전불시대(前佛時代) 절터 천경림(天鏡林)에 건립한 신라 최초의 사찰 흥륜사지(興輪寺址) (0) | 2026.03.23 |
| 황성사(皇聖寺)로 알려진 구황동(九黃[皇]洞) 옥다리들사지 (0) | 2026.03.1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