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낭산(狼山) 서록에 있는 독서당(讀書堂)은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의 옛집(古宅)이자 학문을 닦았던 곳이다. 경주 배반사거리에서 포항방면으로 400m 정도 가면 오른쪽에 야트막한 산이 있는데 낭산(狼山)이다. 낭산(狼山) 아래에서부터 완만한 계단이 있어 찾아오는 객을 맞이하는데 계단 정상에 오르면 숲으로 둘러싸인 터에 독서당(讀書堂)을 만날 수 있다. 기와를 얹은 흙돌담이 방형으로 둘러서 있고, 살짝 기울어진 땅에는 석축을 쌓고 수로가 있어 얇은 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다.


독서당(讀書堂)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에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낮은 시멘트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툇마루 앞쪽으로는 원형기둥을 세웠다. 초석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재를 비롯해 조선시대의 석조물까지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어 오랜 시간에 걸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독서당 (讀書堂)연혁에 대해선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의 자료가 없어 고증할 수 없다.
현재 건물의 상량문에 따르면 “단기 4295년 음력 5월 초하루에 건립하여 5월 초6일에 상량하였다.”고 적혀있어 1962년에 세워진 건물이다. 그런데 21년 22일 오전 4시 11분께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하여 독서당(讀書堂)의 목조 부속건물 1개 동(22㎡)이 불에 전소되었도 다음해 2022년 5월 25일에 해당 건물을 일 년 만에 중건하였다.


왼쪽에는 3칸 집이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다. 부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살림집으로 여겨진다. 담장 안 앞뜰에는 고운이 사용했다는 우물(古井)이 있다. 둥근 돌로 가장자리를 동그랗게 두른 작은 샘물이다.
『삼국유사』 기이 제2 신라시조 혁거세왕조(新羅始祖 赫居世王條) 기록에 따르면 「최치원(崔致遠)은 본피부인(本彼部人)인데, 지금 황룡사(皇龍寺) 남쪽에 있는 미탄사(味呑寺)의 남쪽에 옛터가 남아있어 이것이 바로 최후(崔侯)의 고택(古宅)이다.」 라고 되어있다. 2014년 황룡사(皇龍寺) 앞쪽의 절터에서 ‘미탄(味呑)’이라 새겨진 기와편이 여럿 발견되면서 미탄사(味呑寺)의 위치가 확인되었고 황룡사(皇龍寺) 의 남쪽에 해당된다. 그래서 독서당(讀書堂)이 최치원(崔致遠)의 옛집임을 추정하고 있다.


독서당(讀書堂) 오른쪽에는 따로 담장을 두르고 붉은색 사주문(四柱門)을 단 비각이 있다. 조선 철종 1년인 1850년에 건립한 유허비(遺墟碑)다. 비석의 전면에는 ‘문창후최선생 독서당 유허비(文昌侯 崔先生 讀書堂 遺墟碑)’라 새겨져 있다. 비문은 경주부윤 이원조(李源朝)가 썼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창후최선생독서당유허비(文昌侯崔先生讀書堂遺墟碑)
도감(都監) 후손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 최위(崔瑋),
유사(有司) 최사권(崔思權),
감역(監役) 최영한(崔永漢), 절충(折衝) 남곤(南崑) 세움.
선생은 신라 사람으로 생존 연대가 멀어 자세한 행적을 알 수 없다. 옛사람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은 선생에 대해, 학문으로 보면 문묘에 올랐고, 문장으로 보면 문단을 주도했으며, 뜻으로 보면 백이(伯夷)처럼 세상을 피해 살았고, 자취로 보면 장자방(張子房)처럼 신선에게 의탁했다고 말들 한다. 선생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아아, 선생은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 과거에 합격하고 만당(晩唐 : 당나라 후기)의 명사들과 어깨를 견주었으며, 선생이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전송되고 있다. 고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신라의 운이 다한 기미를 보고 속세를 초월하여 바깥세상을 구름처럼 떠돌아다녔다. 나라 안의 명산으로 일컬어지는 산은 모두 선생을 기다린 뒤에야 유명해졌다.
선생은 참으로 천하의 큰 인물이었으므로 한 귀퉁이 동쪽 나라로도 선생을 얽어매기에 역부족인데, 작디작은 한 고을 한 동네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공(鄭公)의 고향을 세우고 안락정(顏樂亭)을 일으킨 것은 필시 태어나 자란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읍지(邑誌)를 살펴보면 선생의 고택은 본래 저쪽 마을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있고 상서장(上書莊)은 금오산(金鰲山) 북쪽 문천(汶川) 가에 있었는데, 동도(東都 : 경주)의 지령(地靈)이 울린 것은 과연 우연이 아니었다. 더구나 터를 닦은 바를 분명히 밝히고 후손들이 전해가며 지켰으니 어떻게 없어질 수 있겠는가?
고을 동쪽의 낭산(狼山)에 독서당 터가 있는데 옛 우물이 아직도 남아있고, 옛 주춧돌로 당(堂)을 지어 학업을 닦는 곳으로 만들었다. 후손 최사연(思衎衍)이 비로소 비석을 세워 표시하고자 했는데, 종중 사람들이 합의하여 뜻을 이루게 되어 내게 글을 청했다.
나는 다만 선생의 위대함은 천하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고을로, 고을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당으로 논한다면 의미가 충분치 않지만, 당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고을로, 고을에서 나라로, 나라에서 천하로 미루어 나가면 선생의 사업과 문장이 자취가 들어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선생의 후손이라면 어찌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통정대부 경주부윤(通政大夫慶州府尹) 성산(星山) 이원조(李源祚) 지음.
후손 최세규(崔世圭) 글씨.
숭정기원후 네 번째 경술년(철종 1, 1850년) 3월 일」

최치원(崔致遠)은 신라 6두품 집안 출신으로 골품제 사회에서 6두품은 아찬(阿飡) 이상의 벼슬에는 오를 수 없었다. 골품제의 한계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했던 6두품들은 당나라 유학의 길을 많이 선택했고, 최치원도 일찍이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18세에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합격했으며, 「토 황소격문(討 黃巢檄文)」을 써서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이후 헌강왕 10년(884)에 신라로 돌아왔다. 진성여왕 8년(894) 최치원은 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진성여왕에게 시무 십여 조(時務 十餘 條)를 건의하였다. 진성여왕은 그의 제안대로 개혁을 펼치려하였으나 당시 중앙귀족들로 인해 그의 개혁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치원의 정치적 사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은 없으나 시무 10여 조(時務 十餘 條)는 전해지지 않지만 그의 정치에 대한 마음을 읽게 하는 단서가 된다.
이후 최치원(崔致遠)은 벼슬을 그만두고 산림과 강해를 소요하며 누대와 정자를 지어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놓고 책 속에 묻혀서 풍월을 읊었다. 말년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면서, 형인 승려 현준 및 정현스님과 도우를 맺고 한가로이 은거생활을 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최치원(崔致遠)과 관련한 흔적은 전국적으로 분포하지만, 그의 고향인 경주에는 독서당(讀書堂)과 상서장(上書莊), 그리고 숭복사지(崇福寺址)의 대숭복사비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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