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군 대변리 대변항부터 죽성리 월전마을까지 기장해안로를 따라 가면 아름다운 해안 절경이 펼쳐진다. 횟집, 펜션, 카페 등 즐비하여 주말이면 교통 체증이 발생한다. 특히 아스팔트 도로 폭이 좁아 교통체증에 곤욕을 치른다. 그래서 월드컵기념 등대공원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도보로 풍광과 바다바람을 보고 즐기고 느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적선대는 선인(仙人)이 죄를 짓고 귀양 와서 기거했던 곳으로 예로부터 수려하고 아름다운 절경으로 인하여 시랑대, 삼성대, 황학대와 더불어 기장의 4대 경승지이다. 특히 해송과 바위사이의 일출 장관이 뛰어나다고 한다. 이곳 해안가 중 어느 한곳이나 적선대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
해안가 주변을 살펴보면 해송과 장대한 바위의 아름다운 조화는 동해 파도와 더불어 나그네의 걸음을 멈추게 할 것 같다. 특히 다양한 바위의 형상은 자연의 묘미를 느끼게 하고 아이들과 함께 오면 지질공부에 유익할 것이다.
읍파정은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 파도가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밀려오는 듯하다하여 붙여진 조선후기 누정이다. 『차성가(車城歌, 1860)』에 나오는 것으로 보면 100년 전에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선대 위에 지었다고 하니 이 또한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차성가는 조선후기 기장 지역의 경치와 유적 등 소재로 한 가사문학 작품이름으로 차성은 고려시대 기장의 별호(別號)이다. 이곳 해안가 어디를 가나 절경이니 적선대와 읍파정은 머리에 두고 현재의 풍광으로 가슴으로 즐길 뿐이다.
의병장(義兵將) 김산수(金山壽)와 동호장군(東虎將軍) 김득복(金得福) 부자묘(父子墓)
임란공신(壬亂功臣) 부자묘(父子墓, 대변리 남산 감개 산5 –1번지)가 카페824와 기장 해수담수화설비 사이의 기장해안로에 있다. 임란공신(壬亂功臣) 의병장(義兵將) 김산수(金山壽)는 本貫은 金海이고 자(子)는 군경(君卿)이고 호(號)는 덕계(德溪)이다. 그의 아들 김득복(金得福) 자는 진옥(振玉)이고 호(號)는 동호(東虎)이다. 임진왜란 때 부자가 함께 의병을 모아 왜병과 싸웠다. 고향을 옮긴 것은 임진왜란 당시 경주에서 기장현(機張縣)으로 이동하였다.
이곳 바닷가에 묻힌 것은 생전에 죽어서 혼백이라도 왜적을 막아야 된다며 동해바다가 보이는 곳에 묻으라는 유언에 따름이라고 전한다.
부자(父子)는 임진(壬辰)․정유재란(丁酉再亂)까지 7년 전쟁에 경주를 비롯해 대구, 팔공산, 울산, 언양, 양산, 동래, 기장, 창녕 등지의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울산도산성전투(蔚山島山城戰鬪)에서 부공(父公)인 의병장 김산수(金山壽) 공이 순절하자 아들 김득복(金得福)이 야음을 틈타 울산 염포(鹽浦) 뒷산에 부공의 시신을 가장(假葬)하였다.
동호장군(東虎將軍)으로 불린 김득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주 문천(蚊川)에서 주위 여러 고을의 의사(義士)들이 왜적을 섬멸할 것을 피로써 하늘에 맹세하였는데 이 맹세를 문천회맹(蚊川會盟)이라 한다. 이 문천회맹은 1592년(선조 25) 6월 김득복과 함께 류백춘(柳伯春), 이눌(李訥), 이여량(李女良), 윤홍명(尹弘鳴)들이 맹세를 하고 의병을 모아 분전하였다.
이때 적을 격살함이 4백여급이고, 총검 등을 노획한 것이 27자루나 되었다. 그 이후 울산의 구강(鷗江, 오늘날의 伴鷗洞), 경주의 금오산(金鰲山)과 영천(永川), 대구 팔공산(八公山), 화왕산(火旺山), 서생포(西生浦)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김득복 장군은 용맹과 지략이 뛰어나니 명나라 도청제독(都廳提督) 마귀(麻貴) 장군이 동쪽의 호랑이 장군이라고 동호라는 사호(賜號)까지 내렸다.
전쟁이 끝나고 1605년 선조(宣祖) 38年 4월 16일에 조정에서 전쟁 중 공이 많은 사람에게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을 내렸는데 김산수(金山壽) 의병장은 선무원종삼등공신(宣武原從三等功臣)에 녹훈(錄勳)되고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고 인조조(仁祖朝)에 자헌대부병조참판(資憲大夫兵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현재 후손들이 기장을 중심으로 해운대, 수영, 광안리, 동래, 영도 등지에 100여 세대가 살고 있다.
기장 척화비(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1호, 1996. 5. 25 지정)
기장 척화비는 고종 때 대원군이「병인양요(丙寅洋擾)」,「신미양요(辛未洋擾)」 후 외국을 배척하고 쇄국주의를 고창하기 위하여 전국 주요한 지역에 세웠던 비 가운데의 하나이다. 높이 144㎝, 폭 52.5㎝, 두께 21㎝ 규모의 화강석으로 된 이 비문의 내용은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고 화친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니 우리 만년 자손에게 경계한다. 병인년(1866)에 만들어 신미년(1871)에 세우다”
이 비석은 원래는 기장군 대변항 방파제 안쪽에 세워져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항구시설을 하면서 바다에 던져버렸다. 1894년 청일전쟁 때 대변항에 정박 중이던 청국상선(쟝컬선박) 3척이 일본인들에 의해 침몰되어 그 잔형이 오랫동안 항내에 남아 항로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었다. 광복 후인 1947년 최태희씨의 지도를 받아 마을 청년들이 척화비를 인양하여 세운 것이다.
대변항 소방도로 개설로 인해 기장 척화비는 현 대변초등학교 교내로 옮겨졌다. 2004년 척화비 주변으로 도로개설공사를 하면서 척화비 뒷편의 주택을 철거하자, 척화비 아래의 시멘트블록 축대에 일제강점기 때 군사경계표지석으로 사용되었던 장대석이 가로로 눕혀져 있는 것이 드러났다.
대변항은 조선시대에는 대변포(大邊浦)라 불리던 곳으로 이곳에 대동고(大同庫)가 있었다. 대동고는 지방관청이 백성에게서 거둔 곡식을 보관하는 곳이다. 그래서 대동고가 있는 갯가라는 뜻인 대동고변포(大同庫邊浦)를 줄여서 대변포라 불렀다고 한다. 옛날 이곳은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두포(船頭浦)라고 부르기도 하고, 전선창(戰船廠), 주사창(舟師廠)이라고 하였고, 무지포(無知浦)라고도 불렀다.
월전 마을의 옛 이름은 달밭[月田]이다. 마을 앞 포구를 달밭개라고 불렀다. ‘달’은 높다, 또는 산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은 남산(南山) 기슭의 언덕 산을 개간하여 생긴 마을로서, 경작지가 높은 곳에 있는 밭, 또는 산에 있는 밭이라는 뜻에서 달밭이라 하였다고 한다. 즉 달밭은 고전(高田), 산전(山田)이란 뜻이다. 달밭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달 ‘월’자를 따서 월전이 되었다고 한다. 달밭개를 월전포(月田浦)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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