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42대 흥덕왕릉(興德王陵)은 안강 어래산(魚來山)의 동쪽 자락인 안강읍 육통리 산42번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신라 왕릉 가운데 경주 시가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봉분 직경 20.7m, 봉분 높이 6.4m로 묘제는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굴식돌방무덤)인데 호석(護石, 둘레돌)은 면석(面石, 돌판)과 탱석(撑石, 버팀돌)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무복(武服)을 입은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경주 지역에 있는 신라 왕릉 가운데 호석에 십이지신상을 새겨 넣은 것은 십이지신상 첫 출현인 성덕왕릉을 비롯하여 김유신 묘, 원성왕릉, 경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구정동 방형분, 진덕여왕릉이 있다.
호석(護石) 밖에는 돌기둥을 세웠고 석난간은 모두 없어 졌으며, 호석과 돌기둥 사이 바닥에는 박석을 깔아서 회랑을 조성하였다. 능(陵) 주위 네 모서리에는 각각 돌사자를 한 마리씩 배치하여 능(陵)을 수호하고 있다.
능(陵)의 남쪽에는 상석(床石)을 설치하였는데 탁자형상석으로 두꺼운 큰 판석 5매를 이용하여 복원한 것이다. 탁자형상석은 33대 성덕왕릉(聖德王陵)에 처음 등장했는데 이전에는 여러 개의 장대석을 조립하여 상석(床石)을 설치하였다. 탁자형상석은 흥덕왕릉(興德王陵)이후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상석 옆면의 앞뒤, 좌우는 4매의 판석을 조립하였고 앞뒤 면에는 안상(眼象) 2개를, 좌우 면에는 1개를 각각 모각하였다. 안상(眼象)의 형상은 첨정(尖頂)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되게 각각 3개의 호형(弧形)을 수평적으로 모각하였다. 상석 윗면은 1매의 판석을 조립하였다. 안상(眼象)은 통일신라 초기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함에 처음 나타났고 탁자형상석의 안상(眼象)은 8세기 중엽 33대 성덕왕릉(聖德王陵)에 등장했고 흥덕왕릉(興德王陵)이후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상석(床石)은 제수(祭需)를 진설하는 공간, 제상(祭床)과 제사를 지내는 곳이자 능(陵)의 정면을 나타내는 방향 역할을 한다. 일부 학계에서는 제단(祭壇)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와 조선시대에서 정자각(亭子閣)이 등장하면서 상석(床石)은 혼유석(魂遊石)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정자각(亭子閣)에서 제수를 차리고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용도와 기능이 상석(床石)에서 정자각(亭子閣)으로 바꿔졌다. 혼유석(魂遊石) 의미는 죽은 자의 영혼이 거처하는 곳이다.
상석의 방향은 적석목곽분과 중고기의 능에서는 동쪽에 설치하는데 이는 시신의 위치가 동서방향으로 머리는 동쪽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횡혈식석실분에서 남쪽에 설치되어 있는데 현실을 통하는 연도가 남쪽에 있기 때문이다.
능(陵)의 초입에는 동서로 사이를 화표석(華表石) 1쌍, 호인상(胡人像) 1쌍, 문인상(文人像) 1쌍을 차례로 마주보도록 배치하였고 화표석(華表石)과 호인상(胡人像)은 원성왕릉(元聖王陵)에 처음 세웠다.
화표석(華表石)은 죽은 자와 산자의 경계 표시로 죽은 자의 부활을 염원하고 후손들의 번창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도 아쇼카 석주 형식을 중국 남조의 황제릉에서 받아들인 후 당에 이르러 새로운 형태로 완성된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호인상(胡人像)은 원성왕릉(元聖王陵)에 있는 호인상(胡人像) 처럼 서역인(西域人)의 모습을 하고 있다. 능(陵)의 앞 오른쪽에는 흥덕왕(興德王)의 비(碑)을 받쳤던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龜趺)만 손상된 채 남아있고 비신(碑身)과 이수(螭首, 비석의 머릿돌)는 없다.
능(陵)의 비, 즉 능비(陵碑)와 귀부龜趺)의 첫 등장은 무열왕릉에 등장했고 현재 까지 확인 된 능비는 있는 능과 묘는 무열왕릉, 문무왕릉, 성덕왕릉, 흥덕왕릉, 김유신 묘, 김인문 묘 등 6기가 있다.
1977년 8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상당수의 비편이 발견되었고 그중에서 이수의 제액(題額)에서 흥덕(興德)이라는 글자가 확인됨으로써 흥덕왕릉(興德王陵)임이 입증되었다.
삼국유사 왕력(王曆)에 흥덕왕(興德王)의 능(陵)이 안강 북쪽 비화양(比火壤)에 있는데 왕비 장화부인(章和王妃)과 합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에는 왕의 유언에 따라 장화왕비(章和王妃)의 능에 합장하였다고 되어있다.
능원 내 석물배치는 당의 능묘제도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무열왕릉의 능비 이후 신라인의 뛰어난 조각수법과 창의적인 발상으로 예술적 경지로 완비 된 것이 원성왕릉이다. 이후 헌덕왕릉, 흥덕왕릉에 잠깐 계승된 뒤 쇠퇴기에 접어들어 완전히 사라졌다. 십이지신상과 호인상을 호석과 능전에 배치한 것은 신라인의 창조적인 발상이다.
십이지신(十二支神)은 점성술이 발달한 서아시아의 십이궁(十二宮)이 인도를 거쳐 중국에 전래된 것으로 한(漢)나라 중기 때 방위(方位)와 시간에 대응시키고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 등 12동물과도 대응시켰다.
후한(後漢) 때 오행상극설 (五行相剋說)에 따라 십이지신(十二支神)을 설명하고 사람의 생년월일(生年月日)을 동물명으로 대신하여 일컬었다. 그리고 당(唐) 나라 때 묘지명판(墓地銘板)의 사면(四面)에 조각하거나 무덤에 넣는 도제용(陶製俑)에도 사용 되었는데 손에 홀(笏)을 들고 문관(文官) 복장(服裝)을 한 인신에 머리만 십이지(十二支)의 동물로 나타냈다.
불교에서 십이지신(十二支神)은 땅을 지키는 일을 하는 열두 신장으로 《약사경(藥師經)》을 외우는 불교인을 지키는 신장(神將)으로 12야차대장, 12시왕이라고도 하였다.
약사불의 12대원에 대응하여 약사불을 수호하고 약사의 대원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신장이며 십이신장이 약사여래와 함께 등장하게 된 것은 『약사경(藥師經)』에 따른 것인데, 석가모니가 약사여래의 본원공덕을 설명할 때 12야차대장이 크게 감명 받아 12대원을 행할 것을 서원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신라 42대 흥덕왕(興德王 : 재위기간 826년 10월 ~ 836년 12월, 10년 2개월)
이름은 수종(秀宗)이지만, 그 후에 경휘(景徽)로 바꾸었고 41대 헌덕왕의 동복 동생이다. 형인 헌덕왕(憲德王)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哀莊王)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상대등(上大等)으로 국정을 주도하였고 헌덕왕이 죽은 후에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큰 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 인겸(仁謙)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 김씨(聖穆太后 金氏)이다. 할머니는 각간(角干) 신술(神述)의 딸인 숙정부인 김씨(淑貞夫人 金氏)이고, 왕비는 소성왕의 딸인 장화부인 김씨(章和夫人 金氏)인데, 즉위한 해에 죽으니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봉하고 이를 그리워하여 이후로 어떤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한다.
골품(骨品)에 따라 복식(服飾) 착용에 제한을 두는 내용의 법령을 반포하였다. 즉위 3년(828년) 궁복(弓福), 장보고(張保皐)가 처음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하는데 중국 당나라 서주(徐州)에서 소장(小將)으로 활약하다가 귀국하였으므로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게 하여 서해를 방어하게 하였다.
즉위 826년 당해 12월 왕비 장화부인(章和夫人)이 사망하자,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봉(追封)하였다. 왕은 왕비를 잊지 못하고 슬퍼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표문을 올려 다시 왕비를 맞아들이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말했다.
“짝을 잃은 새에게도 자기의 짝을 잃은 슬픔이 있는데, 좋은 배필을 잃고 나서 어찌하여 무정스럽게도 바로 다시 부인을 얻겠는가?”
왕은 끝내 요청을 듣지 않고, 시녀들조차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좌우의 심부름꾼은 오직 내시뿐이었다.
즉위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당 문종은 헌덕왕이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회를 폐지하고 태자좌유덕겸어사중승(太子左諭德兼御史中丞) 원적(源寂)을 지절사(持節吊)로 파견하여 조의를 표하고 제사에 참여케 하였다. 이어 새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영해군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使持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兼持節充寧海軍使<新羅>)’으로 책봉하고, 어머니 박씨를 대비로, 아내 박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3월, 고구려의 중 구덕이 당 나라에 갔다가 불경을 가지고 오자, 왕이 여러 절의 중을 소집하여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8월, 금성이 낮에 나타나고, 서울에 큰 가뭄이 들었다. 시중 영공이 퇴직하였다.
3년 봄 정월, 대아찬(大阿湌) 김우징(金祐徵)이 시중(侍中)이 되었다. 2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4월, 청해 대사(淸海 大使) 궁복(弓福)은 성이 장씨였다(一名 保臯). 그는 당 나라 서주(徐州)에 건너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가 후에 귀국하였다. 그는 왕을 알현하고,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청해(지금의 완도[莞島])를 수비하게 되었다.
한산주 표천현(漢山州 瓢川縣)에 사는 요망스러운 자가, 빨리 부자가 되는 술수가 있다고 말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에 미혹되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옳지 않은 방도로 많은 사람을 미혹시키는 자에게는 벌을 주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다. 그 자를 먼 섬으로 쫓아 버리라”라고 말하였다.
12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문종(文宗)이 인덕전麟德殿에서 접견하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연회를 베풀어 주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다. 당 나라에 갔다가 귀국한 사신 대렴(大廉)이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왔다. 왕은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善德王) 때부터 있었으나, 크게 유행한 것은 이 시기부터였다.
4년 2월, 당은군(唐恩郡)을 당성진(唐城鎭)으로 바꾸고, 사찬 극정(極正)을 파견하여 이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5년 4월, 왕의 건강이 좋지 않게 되자, 기도를 드리고 이어서 중 15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12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6년 봄 정월, 지진이 있었고 시중侍中) 우징(祐徵)이 퇴직하고, 이찬(伊湌) 윤분(允芬)이 시중(侍中)이 되었다. 2월, 왕자 김능유(金能儒)와 중 아홉 명을 당 나라에 보냈다. 7월, 당 나라에 갔던 진봉사(進奉使) 능유(能儒) 등 일행이 귀국하다가 바다에 빠져 익사하였다. 11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7년 봄과 여름이 가물어 땅의 빛깔이 붉은 색으로 변했다. 왕은 정전(正殿)에나가지 않고 음식을 줄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특사하였다. 7월에야 비가 내렸다. 8월, 흉년이 들어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10월에 왕은 사자를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8년 봄, 나라에 대 기근이 들었고 4월, 왕이 시조묘(始祖廟)에 참배하였다. 10월, 복숭아와 오얏나무에 두 번째 꽃이 피었고,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다. 11월, 시중(侍中) 윤분(允芬)이 사직하였다.
9년 봄 정월, 우징(祐徵)을 다시 시중(侍中)으로 임명하였다. 9월, 왕이 서형산(西兄山)에 행차하여 크게 군대를 사열하고, 무평문(武平門)에서 활쏘기를 관람하였다. 10월, 왕이 남쪽 지방의 주와 군을 순행하면서, 노인과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곡식과 베를 하사하였다.
10년 2월, 아찬(阿湌) 김균정(金均貞)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하였다. 시중(侍中) 우징(祐徵)이, 그의 아버지 균정이 재상이 되었다는 이유로 사직할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대아찬(大阿湌) 김명(金明)이 시중(侍中)을 맡았다.
11년 봄 정월 초하루 신축일(辛丑日)에 일식(日食)이 있었고 왕자 김의종(金義琮)을 당에 보내 사은하고, 아울러 숙위宿衛를 들게 하였다. 6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7월, 금성이 달을 범하였다.
12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흥덕(興德)이라 하였다. 조정에서는 왕의 유언에 따라 장화왕비(章和王妃)의 능에 합장(合葬)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제2권 기이(紀異) 제2 흥덕왕(興德王)과 앵무새
제42대 흥덕대왕(興德大王)은 보력(寶曆) 2년 병오(丙午; 826)에 즉위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당(唐)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다. 오래지 않아 암놈이 죽자 홀로 남은 수놈은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는다. 왕은 사람을 시켜 그 앞에 거울을 걸어 놓게 했더니 새는 거울 속의 그림자를 보고는 제 짝을 얻은 줄 알고 그 거울을 쪼다가 제 그림자인 것을 알고는 슬피 울다 죽었다. 이에 왕이 앵무새를 두고 노래를 지었다고 하나 가사(歌辭)는 알 수 없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제5권 효선(孝善) 제9 손순매아(孫順埋兒) 흥덕왕대(興德王代)
손순(孫順)은 모량리(牟梁里) 사림이니 아버지는 학산(鶴山)이다. 아버지가 죽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양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어머니의 이름은 운오(運烏)였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항상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손순은 민망히 여겨 그 아내에게 말했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가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렵소. 그런데 아이가 어머님의 음식을 빼앗아 먹어서 어머님은 굶주림이 심하시니 이 아이를 땅에 묻어서 어머님 배를 부르게 해드려야 겠소.” 이에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모량리牟梁里 서북쪽에 있는 산) 북쪽 들에 가서 땅을 파다가 이상한 석종(石鐘)을 얻었다. 부부는 놀라고 괴이히 여겨 잠깐 나무 위에 걸어 놓고 시험삼아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은은해서 들을 만하다.
아내가 말했다.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필경 이 아이의 복인 듯싶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남편도 이 말을 옳게 여겨 아이와 석종(石鐘)을 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종을 들보에 매달고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興德王)이 이 소리를 듣고 좌우를 보고 말했다. “서쪽 들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도 멀리 들리는 것이 보통 종소리가 아니니 빨리 가서 조사해 보라.” 왕의 사자(使者)가 그 집에 가서 조사해 보고 그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왕은 말했다. “옛날 곽거(郭巨)가 아들을 땅에 묻자 하늘에서 금솥을 내렸더니, 이번에는 손순이 그 아이를 묻자 땅 속에서 석종이 솟아나왔으니 전세(前世)의 효도와 후세의 효도를 천지가 함께 보시는 것이로구나.”
이에 집 한 채를 내리고 해마다 벼 50석을 주어 순후한 효성을 숭상했다. 이에 손순은 예전에 살던 집을 희사해서 절로 삼아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석종을 모셔 두었다.
진성왕(眞聖王) 때에 후백제의 횡포한 도둑이 그 마을에 쳐들어와서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아 있다. 그 종은 얻은 땅을 완호평(完乎坪)이라 했는데 지금은 잘못 전하여 지량평(枝良坪)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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