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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38대 원성왕릉(785~798)은 토함산 서쪽 자락인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번지에 있다. 원형봉토분으로 높이 7.5m, 봉분직경 22.2m로 봉분아래에는 봉토를 보호하기 위한 면석(돌판)과 탱석(버팀돌)을 각각 연결하여 호석을 마련하였으며 탱석 12개에는 무복(武服)의 십이지신상을 부조하였다. 호석과 가장자리의 석 난간 사이의 바닥에는 박석을 깔아 회랑을 조성하였다. 봉분의 동남쪽에는 상석을 설치하였고 봉분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위치로부터 동서로 약25m 사이를 두고 북쪽으로부터 돌사자(석사자상) 두 쌍, 관검석인상(冠劍石人像) 1쌍, 호인상(胡人像) 1쌍, 화표석(華表石) 1쌍을 차례로 마주보도록 배치하였다.

신라38대 원성왕릉(785~798)은 토함산 서쪽 자락인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번지에 있다.
능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위치로부터 동서로 약25m 사이를 두고 북쪽으로부터 돌사자(석사자상) 두 쌍, 관검석인상(冠劍石人像) 1쌍, 호인상(胡人像) 1쌍, 화표석(華表石) 1쌍을 차례로 마주보도록 배치하였다.
호석과 가장자리의 석 난간 사이의 바닥에는 박석을 깔아 회랑을 조성하였다

이들 중 호인상과 화표석은 원성왕릉에 처음 세운 것으로 특이한 몽둥이를 들고 있는 호인상은 당 능묘에 매납했든 것으로 서역인 또는 불교의 신장상 모습을 하고 있다. 죽은 자와 산자의 경계 표시로 죽은 자의 부활을 염원하고 후손들의 번창을 상징하는 화표석은 인도 아쇼카석주 형식을 중국 남조의 황제릉에서 받아들인 후 당에 이르러 새로운 형태로 완성된 것을 신라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동쪽방향 석조물
서쪽방향 석조물
화표석(華表石)은 죽은 자와 산자의 경계 표시로 죽은 자의 부활을 염원하고 후손들의 번창을 상징한다.
화표석은 인도 아쇼카석주 형식을 중국 남조의 황제릉에서 받아들인 후 당에 이르러 새로운 형태로 완성된 것을 신라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특이한 몽둥이를 들고 있는 호인상(胡人像)은 당 능묘에 매납했던 것으로 서역인의 모습 또는 불교의 신장상 모습을 하고 있다.

관복 위에 갑옷을 걸친 관검석인상은 두 손으로 긴 칼을 세워 쥐고 있으나 관복으로 덮여 있어 칼자루가 보이지 않지만 두 발 사이에서 긴 칼끝을 확인할 수 있다. 갑옷은 뒷모습에서 볼 수 있다. 돌사자는 불교조각의 영향으로 좌상을 하고 있으며 동서남북 방향을 주시하고 능을 수호하고 있다. 반면 성덕대왕릉은 북쪽방향을 수호하는 돌사자는 없다.

관복 위에 갑옷을 걸친 관검석인상(冠劍石人像)은 두 손으로 긴 칼을 세워 쥐고 있으나 관복으로 덮여 있어 칼자루가 보이지 않지만 두 발 사이에서 긴 칼끝을 확인할 수 있다.
갑옷은 뒷모습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동쪽방향 돌사자(석사자상)
서쪽방향 돌사자(석사자상)
4마리의 돌사자는 제각자 동서남북 방향을 주시하면서 능을 수호하고 있다.

상석은 탁자형상석으로 두꺼운 큰 판석 5매를 이용하여 탁자형으로 만든 것이다. 상석 옆면의 앞뒤, 좌우는 4매의 판석을 조립하였고 앞뒤 면에는 안상(眼象) 2개를, 좌우 면에는 안상 1개를 각각 모각하였다. 안상의 형상은 첨정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되게 각각 3개의 호형을 연속적으로 모각하였다. 상석 윗면은 1매의 판석을 조립하였다.

상석은 탁자형상석으로 두꺼운 큰 판석 5매를 이용하여 탁자형으로 만든 것이다. 상석 옆면의 앞뒤, 좌우는 4매의 판석을 조립하였고 상석 윗면은 1매의 판석을 조립하였다.
앞뒤 면에는 안상(眼象) 2개를, 좌우 면에는 안상 1개를 각각 모각하였다. 안상의 형상은 첨정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되게 각각 3개의 호형을 연속적으로 모각하였다.

능역 내 석물배치는 당의 능묘제도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무열왕릉의 능비 이후 신라인의 뛰어난 조각수법과 창의적인 발상으로 예술적 경지로 완성된 것으로 현존 신라 왕릉 중 가장 화려하고 완벽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십이지신상과 호인상을 호석과 능전에 배치한 것은 신라인의 창조적인 발상이다. 그리고 십이지신상은 왕릉에서의 십이지신상 첫 출현은 33대 성덕왕능이고 여기 원성왕릉의 십이지신상은 무복차림으로 정북은 자()로 시계 반대방향과 정남 오()의 시계방향으로 대칭으로 배치하였고 신라시대에서 가장 우수하고 뛰어난 조각수법이다.

화염문검을 들고 있는 午(말)상
월(도끼)를 들고 있는 未(양)상

 

외날창을 들고 있는 寅(호랑이)상

십이지신(十二支神)은 점성술이 발달한 서아시아의 십이궁(十二宮)印度를 거쳐 中國에 전래된 것으로 ()나라 중기 때 方位時間에 대응시키고 (), (), (), (), (), (), (), (), (), (), (), () 12동물과도 대응시켰다. 후한(後漢) 때 오행상극설 (五行相剋說)에 따라 십이지신을 설명하고 사람의 생년월일(生年月日)을 동물명으로 대신하여 일컬었다. 그리고 나라 때 묘지명판(墓地銘板)의 사면(四面)에 조각하거나 무덤에 넣는 도제용(陶製俑)에도 사용 되었는데 손에 홀()을 들고 문관(文官) 복장(服裝)을 한 인신에 머리만 십이지의 동물로 나타냈다.

불교에서 십이지신(十二支神)은 땅을 지키는 일을 하는 열두 신장으로 약사경(藥師經)을 외우는 불교인을 지키는 신장(神將)으로 12야차대장, 12시왕이라고도 하였다. 약사불의 12대원에 대응하여 약사불을 수호하고 약사의 대원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신장이며 십이신장이 약사여래와 함께 등장하게 된 것은 약사경(藥師經)에 따른 것인데, 석가모니가 약사여래의 본원공덕을 설명할 때 12야차대장이 크게 감명 받아 12대원을 행할 것을 서원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밀본법사(密本法師)약사경을 읽어서 병을 고쳤다는 기록과 김유신(金庾信) 장군도 약사경을 호지(護持)하는 사람과 교분을 가졌다는 기록이 있다. 십이지 신앙 즉 약사신앙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밀교의 영향으로 호국적 성격을 지녔으나, 삼국통일 이후에는 단순한 방위신으로써 그 신격(神格)이 변모되었다.

능의 뒤쪽에는 물이 나오고 있어 축대를 쌓고 물길을 만들어져 있다 .

원성왕릉(元聖王陵)으로 확정되기 전에는 걸 괘()자에 괘릉(掛陵)이라고 불렸고 옛날 이 자리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관을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고 전해 내려왔다. 그래서 능의 뒤쪽에는 물이 나오고 있어 축대를 쌓고 물길을 만들어져 있다. 동경잡기에는 괘릉은 어느 왕의 능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수중에 장사지내고 돌 위에 널을 걸고 흙을 덮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조선후기(17세기말~18세기)부터 1973년 까지 사천왕사터에서 문무대왕비문 발견과 능지탑과의 거리 등 이유로 경주 김씨 문중에서 문무대왕릉이라 주장하였다.

배경에는 조선후기 족보의 간행과 이에 따른 조상숭배 대상의 확대가 됨에 따라 각 문중에서 선조의 행적 재평가(追崇旌閭伸寃追贈), 유적(遺蹟)의 현창(유허비와 신도비 건립, 누정재실정사영당의 건립), 서원(書院) 및 사우(祠宇) 건립, 문중권위의 홍보(선조의 문집간행) 등 앞 다투어 행하였기 때문이다.

원성왕릉 확정 전 신라문무왕릉 표석을 받치고 있던 받침석

1973년에 감은사터와 이견대 등 발굴조사와 경주시 외동읍 말방 숭복사터에서 최치원의 대숭복사 13파편의 비문 발견으로 괘릉의 피장자는 원성왕릉으로 확인되었다. 비문 내용에 따르면 괘릉자리는 신라 귀족(파진찬) 김원랑의 별장터로 곡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원성왕이 죽자 터를 희사하여 장지가 되었고 곡사라는 절은 현재의 말방 숭복사터로 옮기고 연못을 메워 왕릉을 마련했는데 현실에 물이 차서 관을 바닥에 놓지 못하고 벽에 걸어 괘릉이라 불렀다. 곡사는 48대 경문왕 때 원성왕의 원찰로 지정하고 49대 헌강왕 때 절 이름을 대숭복사로 바꾸었다.

김경신은 왕이 되기 전 물과의 관계가 깊다. 첫째가 꿈에 그가 천관사 우물에 들어가는 것이고 둘째는 왕이 되기 위해 북천(알천)에 제사를 지낸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 원성왕이 재위 14년만에 죽으니 유해를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하였다.” 고 되어있고 삼국유사에는 “ 왕의 능()은 토함산(吐含山) 서쪽 동곡사(洞鵠寺; 지금의 崇德寺)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이 있다.”고 되어있다.

38대 원성왕은 내물왕의 12세손으로 성은 김(), 이름은 경신(敬信, 敬愼, 敬則)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인 36대 혜공왕 16(서기780) 2월에 훗날 37대 선덕왕(宣德王)이 되는 김양상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진압하였다. 성덕대왕신종의 주조에 김양상과 김경신이 소임을 맡아 종명(鐘銘)에 이름이 기재되어 있어 두 사람은 긴밀한 관계로 추정된다.

당시 조정은 상대등 양상파와 이찬 지정파로 나누어져 세력을 다투었고 혜공왕은 지정 편을 들었다. 이때 이찬 김지정이 친위혁명 성격의 난을 일으켰고 김양상과 김경신이 난을 진압하면서 혜공왕과 왕비를 살해하였고 김양상을 선덕왕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대한 공로로 김경신은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병으로 죽자 김경신은 태종 무열왕 셋째아들인 김문왕(金文王)5세손인 이찬(伊飡) 김주원(金周元)과의 왕위다툼에서 승리하여 왕이 되었다. 김주원은 777(혜공왕 13) 이찬(伊湌)으로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며, 혜공왕(惠恭王)이 살해되고 선덕왕(宣德王)이 즉위한 780년에 퇴임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주원은 당대의 실력자로서 여러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이 왕위다툼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찬 김주원(金周元)이 처음에 수석 재상으로 있을 때에 김경신은 각간의 지위로 그의 차석 자리에 있었다. 김경신은 꿈에 머리에 썼던 두건을 벗고 흰 갓을 쓰고 손에 12현금(絃琴)을 잡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을 깨어 사람을 시켜서 점을 쳤더니 점쟁이가 말하기를, 두건을 벗는 것은 관직에서 쫓겨날 조짐이요, 12현금을 잡은 것은 칼을 쓸 조짐이요,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들어갈 조짐이외다.라고 하였다. 김경신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걱정하여 문을 잠그고 출입을 하지 않았다. 이때에 아찬 여삼(餘三)이 와서 배알하겠다고 연락하였으나 김경신은 병으로 나가지 못하겠다고 사양하였다. 두 번째 연락하여 말하기를, 꼭 한 번만 뵙기를 바라나이다.󰡑고 하여 이를 승낙하였다.

아찬이 말하기를, 공께서 지금 걱정하는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김경신은 이에 꿈을 점친 사연을 죄다 이야기하였더니 아찬이 일어나서 절을 하고 말하기를, 이 꿈은 아주 길한 꿈이외다. 공께서 왕위에 올라가도 저를 버리시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하여 해몽을 하겠습니다.고 하였다. 김경신은 곧 좌우를 물리치고서 해몽을 청하니 그가 말하기를, 󰡐두건을 벗는 것은 자기 윗자리에 사람이 없다는 뜻이요, 흰 갓을 썼다는 것은 면류관을 쓸 조짐이요, 12현금을 들었다는 것은 12대 손자에게 왕위를 전한다는 조짐이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대궐에 들어갈 조짐이외다. 고 하였다. 이에 김경신이 내 윗자리에는 주원(周元)이 있는데 어떻게 윗자리를 차지할 것인가?하니 아찬이 말하기를, 청컨대 비밀히 북천(北川)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여 그대로 하였다.

얼마 안 가서 선덕왕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주원을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고 그를 대궐로 맞아들이려 하였던 바 그의 집이 개천 북쪽에 있었는데 졸지에 냇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김경신이 먼저 대궐로 들어가 즉위하니 주원의 도당들도 모두 와서 여기에 붙어 새로 등극한 임금에게 배하(拜賀)하였다.

김경신이 왕이 된 배경의 꿈 해몽을 한 세력은 김유신계와 가야계인 것으로 추정된다. 김경신은 왕이 된 후 시조대왕(미추왕), 태종대왕(무열왕), 문무대왕, 조부 흥평대왕, 부 명덕대왕 등 5묘를 정하였고 무열왕계 왕조를 대신하여 원성왕계 왕조가 성립된 것 이며 신라 하대의 왕들은 원성왕의 후손이다. 최치원이 지은 숭복사 비문에 원성왕을 열조(烈祖)라고 호칭하고 있는데 이에 상응하게 그의 능은 다른 왕릉에 비해 화려하다. 무열왕계는 36대 혜공왕으로 끝났다.

즉위년(서기785)에 원성왕은 총관(摠管)을 도독(都督)으로 바꾸었으며, 즉위4(서기788)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였다. 이는 유교경전에 능통한 사람을 3품으로 나누어 실력에 따라 관리로 등용한 것으로, 당시 신라사회에 있어서 무보다 문이 더 중시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한다.

 

786년에는 대사(大舍) 무오(武烏)가 병법 15권과 화령도(花鈴圖) 2권을 바쳤고, 왕 자신도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를 지었는데, 그것은 인생 궁원(窮遠)의 변화에 대한 이치를 담은 것이라 하나 전하지 않는다. 즉위7(서기791)에 제공(悌恭)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하였다. 제공은 785년에 시중(侍中)이 된 인물로 그가 일으킨 반란의 성격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785년에 승관(僧官)을 두어 정법전(政法典)이라 하고, 795년에는 봉은사(奉恩寺, 혹은 報恩寺)를 창건하였으며 망덕루(望德樓)를 세웠다. 처음에는 화엄종(華嚴宗)승려인 묘정(妙正)을 편애하여 내전(內殿)에 맞아들여 떠나지 못하게 하였으나 후에는 왕의 신임을 잃은 듯하다. 즉위14(서기798) 12월에 죽으니, 유명(遺命)에 따라 봉덕사(奉德寺)남쪽 토함악(吐含岳) 서쪽 동굴에 화장하였고, 능을 추복(追福)하기 위한 숭복사(崇福寺)가 세워졌다.

한편 김경신과의 왕위 계승전에서 패배한 김주원은 강원도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로 퇴거(退去)하였다. 원성왕은 786(원성왕 2)에 김주원을 명주 군왕(溟州郡王)으로 책봉하고, 명주·익령(翼嶺, 지금의 양양삼척(三陟근을어(斤乙於, 지금의 평해울진(蔚珍) 등을 식읍으로 주었고 강릉김씨(江陵金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명주도독(溟州都督)은 대대로 김주원의 후손에 의해 세습되었는데, 이들은 신라 말까지 반독립적인 지방 호족 세력으로 남았다. 후삼국 시대 명주 지방의 대표적인 호족이었던 김순식(金順式, 뒤에 王順式]이 그의 후손이다. 이들은 굴산사(掘山寺)의 사굴산파(闍掘山派)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김순식 가문은 고려에 귀의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강력한 호족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2 원성대왕(元聖大王)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찬(伊飡) 김주원(金周元)이 맨 처음에 상재(上宰)가 되고 왕은 각간(角干)으로서 상재의 다음 자리에 있었는데, 꿈이 복두(幞頭)를 벗고 흰 갓을 쓰고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 천궁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에서 깨어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더니 복두(幞頭)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입니다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근심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이때 아찬(阿飡) 여삼(餘三; 어떤 책에는 여산餘山이라 함)이 와서 뵙기를 청했으나 왕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다. 아찬이 다시 청하여 한 번 뵙기를 원하므로 왕이 이를 허락하니 아찬이 물었다. “공께서 꺼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왕이 꿈을 점쳤던 일을 자세히 말하니 아찬이 일어나서 절하고 말한다. “이는 좋은 꿈입니다. 공이 만일 왕위에 올라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서 꿈을 풀어 보겠습니다.” 왕이 이에 좌우 사람들을 물리고 아찬에게 해몽(解夢)하기를 청하니 아찬은 말한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앉는 이가 없다는 것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열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손(代孫)이 왕위를 이어받을 징조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이 말한다. “위에 주원(周元)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상위(上位)에 있을 수가 있단 말이오?” 아찬이 비밀히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지내면 좋을 것입니다하니 이에 따랐다.
얼마 안 되어 선덕왕(宣德王)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은 김주원(金周元)을 왕으로 삼아 장차 궁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의 집이 북천(北川)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냇물이 불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왕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자 대신(大臣)들이 모두 와서 따라 새 임금에게 축하를 드리니 이가 원성대왕(元聖大王)이다.

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이요 성()은 김씨(金氏)이니 대개 길몽(吉夢)이 맞은 것이었다. 주원은 명주(溟洲)에 물러가 살았다. 경신이 왕위에 올랐으나 이 때 여산(餘山)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왕에게는 손자가 다섯 있었으니, 혜충태자(惠忠太子)헌평태자(憲平太子)예영잡간(禮英匝干)대룡부인(大龍夫人)소룡부인(小龍夫人) 등이다.
대왕(大王)은 실로 인생의 곤궁하고 영화로운 이치를 알았으므로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 노래는 없어져서 자세치 못하다)를 지을 수가 있었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大角干) 효양(孝讓)이 조종(祖宗)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왕에게 전했다. 왕은 이것을 얻게 되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텁게 입고 그 덕이 멀리까지 빛났던 것이다.

정원(貞元) 2년 병인(丙寅; 786) 1011일에 일본왕 문경(文慶; <일본제기日本帝紀>를 보면 제55대 왕 문덕文德이라고 했는데 아마 이인 듯하다. 그 밖에 문경文慶은 없다. 어떤 책에는 이 왕의 태자太子라고 했다)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물리고 금() 50냥을 사자(使者)에게 주어 보내서 피리를 달라고 청하므로 왕이 사자에게 일렀다. “나는 들으니 상대(上代) 진평왕(眞平王) 때에 그 피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듬해 77일에 다시 사자를 보내어 금 1,000냥을 가지고 와서 청하며 말하기를 내가 그 신비로운 물건을 보기만 하고 그대로 돌려보내겠습니다하였다. 왕은 먼저와 같은 대답으로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은() 3,000냥을 그 사자에게 주고, 보내 온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자가 돌아가자 그 피리를 내황전(內黃殿)에 간수해 두었다.

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乙亥; 795)에 당()나라 사자가 서울에 와서 한 달을 머물러 있다가 돌아갔는데, 하루 뒤에 두 여자가 내정(內廷)에 나와서 아뢴다. “저희들은 동지(東池)청지(靑池; 청지靑池는 곧 동천사東泉寺의 샘이다. 절에 있는 기록을 보면 이 샘은 동해東海의 용이 왕래하면서 불법佛法을 듣던 곳이요 절은 진평왕眞平王이 지은 것으로서 오백五百 성중聖衆과 오층탑五層塔과 전민田民까지 함께 헌납했다고 했다)에 있는 두 용()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당나라 사자가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있는 용까지 모두 세 용의 모습을 바꾸어 작은 고기로 변하게 해서 통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우리 남편들인 나라를 지키는 용을 여기에 머무르게 해 주십시오.” 왕은 하양관(河陽館)까지 쫓아가서 친히 연회를 열고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어찌해서 우리나라의 세 용을 잡아 여기까지 왔느냐. 만일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형(死刑)에 처할 것이다.” 그제야 하서국 사람들이 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치므로 세 곳에 놓아 주자, 각각 물속에서 한 길이나 뛰고 기뻐하면서 가 버렸다. 이에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철(明哲)함에 감복했다.

분황사 우물

어느 날 왕이 황룡사(皇龍寺)의 중 지해(智海)를 대궐 안으로 청하여 화엄경(華嚴經)50일 동안 외게 했다. 사미(沙彌) 묘정(妙正)이 매양 김광정(金光井; 대현법사大賢法師가 이 이름을 지었다) 가에서 바리때를 씻는데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속에서 떴다가는 다시 가라앉곤 하므로 사미는 늘 먹다 남은 밥을 자라에게 주면서 희롱했다. 법석(法席)이 끝나려 할 무렵 사미 묘정은 자라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푼 지가 오랜데 너는 무엇으로 갚으려느냐?” 그런 지 며칠 후에 자라는 조그만 구슬 한 개를 입에서 토하더니 묘정에게 주려는 것같이 하므로 묘정은 그 구슬을 얻어 허리띠 끝에 달았다. 그 후로부터 대왕(大王)은 묘정을 보면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내전(內殿)에 맞아들여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이 때 잡간(匝干) 한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도 묘정을 사랑해서 같이 가기를 청하자 왕은 이를 허락했다. 이들이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니 당나라의 황제(皇帝)도 역시 묘정을 보자 매우 사랑하게 되고 승상(丞相)과 좌우 신하들도 모두 그를 존경하고 신뢰했다. 관상 보는 사람 하나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사미를 살펴보니 하나도 길()한 상()이 없는데 남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으니 틀림없이 이상한 물건을 가졌을 것입니다.” 황제가 사람을 시켜서 몸을 뒤져 보니 허리띠 끝에 조그만 구슬이 매달려 있다.

황제는 말한다. “나에게 여의주(如意珠) 네 개가 있던 것을 지난 해에 한 개를 잃었는데 이제 이 구슬을 보니 내가 잃은 그 구슬이다.” 황제가 묘정에게 그 구슬을 가진 연유를 물으니 묘정은 그 사실을 자세히 말했다. 황제가 생각하니 구슬을 잃었던 날짜가 묘정이 구슬을 얻은 날과 똑같다. 황제가 그 구슬을 빼앗아 두고 묘정을 돌려보냈더니 그 뒤로는 아무도 묘정을 사랑하지도 않고 신뢰하지도 않았다.

왕의 능()은 토함산(吐含山) 서쪽 동곡사(洞鵠寺; 지금의 崇德寺)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이 있다. 왕은 또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를 세웠고, 조부(祖父) 훈입잡간(訓入匝干)을 추봉(追封)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이라 하고, 증조(曾祖) 의관잡간(議官匝干)을 신영대왕(神英大王)이라 하고, 고조(高祖) 법선대아간(法宣大阿干)을 현성대왕(玄聖大王)이라 했다. 현성대왕의 아버지는 곧 마질차잡간(摩叱次匝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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