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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동천동 산 17번지 소금강산 남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능은 높이 4.4m, 지름 15.7m로 신라 4대 탈해왕릉(脫解王陵)으로 전해지고 있다능 앞의 상석은 조선 왕릉 혼유석 형태로 최근에 설치되었다능의 동남쪽에 있는 숭신전(崇信殿)은 조선 철종 때 반월성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1980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탈해왕릉(脫解王陵)19741230일에 도굴을 당했는데 봉분 동북쪽 중간지점에서 너비 85m, 깊이 4.4m로 도굴갱을 만들어서 도굴을 하였다. 이때 묘제가 6세기 이후에 조영된 횡혈식석실분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탈해왕릉(脫解王陵)의 묘제는 신라초기 목관묘 형태이다.

현재 동천동(東川洞)에 있는 능이 탈해왕릉으로 정해진 것은 20세기 초 석씨 일족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장지로 기록 된 성북양정구(城北壤井丘)와 조선시대 지리지 관련 기록을 근거로 정하였다. 석씨 일족은 성북(城北)을 근거로 동천동(東川洞)에 있는 능을 탈해왕릉으로 정하였다.

오늘날 경주지역에는 양정구(壤井丘)라는 지명은 없다. 구전으로 성동동 전랑지(城東洞 殿廊址) 주위를 양정구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인왕동의 선덕여자 중, 고등학교 남쪽 사거리에서 성동동 전랑지에 이르는 대로 이름이 양정로(壤井路)이다.

탈해왕 시기에는 월성이 축조되지 않았으므로 성북(城北)을 금성 북쪽으로 고려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와 동경잡기에는 금성 위치를 경주부 동쪽 4리에 있는 성동동 전랑지와 남고루 일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석씨 일족은 황오동의 남고루와 성동동 전랑지 북쪽의 가까운 지역이 양정구(壤井丘)로 판단되나 주변에 왕릉이라고 추정되는 고분이 없어 부득이 소금강산 남쪽의 이름 없는 고분을 석탈해왕릉으로 정하였다.

신라시대 왕 중 석씨 왕은 모두 8명으로 시조인 탈해왕을 제외하고는 장지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후기 17세기말~18세기 족보 간행과 이에 따른 조상숭배 대상의 확대가 될 당시 석씨 일족은 경주지역 사회에서 세력이 미약하고 그들만의 족보가 미처 완성되지 못하여 현재 경주 일대 왕릉 중 석씨 왕릉은 이곳 석탈해왕이 유일하다.

경주시 양남면 상계(上溪)리에 서왕(西王)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원래 씨 왕릉이 있어 석왕리(昔王里)이나 마을이름에 그 왕명을 칭하는 것은 곤란하다하여 서왕리로 변하였다고 한다. 예전부터 이 마을 북쪽에 석씨 임금의 능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은 나이가 62세에 왕위에 올랐다. 성은 석씨(昔氏). 토해(吐解)라고도 불렀는데 해를 토해낸다는 뜻으로 훗날 토함산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탈해의 아버지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 용성국(龍城國)의 함달파왕(含達婆王), 혹은 완하국(琓夏國)의 함달왕(含達王) 등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어머니는 여국왕(女國王)의 딸 또는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이라고 하는 등 다국적 혈통을 지닌 인물이 탈해이다. 왕비는 남해차차웅의 딸 아효(阿孝阿尼, 또는 남해차차웅의 누이동생 阿老)부인이다.

즉위 248월에 별세하였고 성의 북쪽 양정 언덕(城北壤井丘)에 장사지냈다.

석탈해의 장지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삼국유사 왕력과 기이편내용이 서로 다르다. 삼국유사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재위(在位) 23년 만인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 29)에 죽어서 소천구(疏川丘) 속에 장사지냈다. 그런데 뒤에 신()이 명령하기를, “조심해서 내 뼈를 묻으라고 했다. 그 두골(頭骨)의 둘레는 석 자 두 치, 신골(身骨)의 길이는 아홉 자 일곱 치나 된다. []는 서로 엉기어 하나가 된 듯도 하고 뼈마디는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천하에 짝이 없는 역사(力士)의 골격(骨格)이었다.

이것을 부수고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 두었다. 그랬더니 신()이 또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東岳)에 안치해 두어라했다. 그래서 거기에 봉안케 했던 것이었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탈해脫解가 죽은 뒤 27문호왕文虎王 때 조로調露 2년 경진庚辰(680) 315일 신유辛酉 밤 태종太宗의 꿈에, 몹시 사나운 모습을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내가 탈해脫解이다. 내 뼈를 소천구疏川丘에서 파내다가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吐含山에 안치하도록 하라.” 은 그 말을 좇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제사를 끊이지 않고 지내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내용을 정리하면, 소천구(疏川丘)에 묻힌 석탈해의 뼈를 꺼내어 이것을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 두었다가 문무왕 때 토함산 정상으로 옮겨 사당을 짓고 동악신(東岳神)으로 제사를 지냈다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 까지 석탈해 사당에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제사를 지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폐사되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없다.

신라 4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 재위 57~80)

석탈해는 키가 9척에 이르고 성품이 너그럽고 지혜로웠고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 이름난 신하인 호공(瓠公)의 집터(뒤에 月城이 됨.)가 좋음을 보고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어놓고는 자기의 집이라 우기니 관가에서는 주장하는 근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자신의 조상이 본래 대장장이였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자고 하여,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자 탈해가 승소(勝訴)하여 그 집을 차지하였다.

이 같은 내용의 설화에서, 첫째 탈해 집단이 경주 동해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그가 죽은 뒤 동악신(東岳神)으로 봉사(奉祠)되었음에서도 확인된다. 둘째는 석씨부족이 어로를 주요생활수단으로 하였지만, 이미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철을 다루는 능력이 왕위계승에까지 연결되는 강점의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탈해는 서기 8(남해 차차웅 5)에 유리왕의 사위가 되고, 서기 10년에는 대보(大輔)란 벼슬에 올랐으며, 유리이사금의 즉위시에 이미 왕위계승의 물망에 올랐지만, 유리이사금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된 다음 유리이사금이 죽자 탈해가 왕위에 올랐다.

탈해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해차차웅의 사위이니 결국 박씨 집단(朴氏集團)의 일원이라는 동속개념(同屬槪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 철을 이용한 군사력 및 거기에 따르는 실질적인 정치실력파의 등장으로 박씨족과 석씨족이 연맹하였으며, 이것은 왕실세력의 폭을 넓혔다고 본다.

즉위 2년 정월, 호공(瓠公을 대보(大輔)로 임명하였고 2월에는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33월 왕이 토함산에 올라가니, 우산 모양의 검은 구름이 왕의 머리 위에 피어났다가 한참 후에 흩어졌다. 5월에는 왜국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고 6월에는 천선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58월 마한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710월 백제왕이 국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까지 넓히고 사신을 보내 왕을 만나기를 요청했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

88월 백제가 군사를 보내 와산성을 공격하였다고 10월에는 백제가 다시 구양성을 공격하자 왕은 기병 2천 명을 보내 그들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12월에는 지진이 있었고 눈이 내리지 않았다.

10년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2백 명을 그 곳에 남겨 거주시키며 수비하게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가 이 땅을 다시 빼앗았다.

11년 정월 박씨의 귀척으로 하여금 국내의 주와 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 직위를 각각 주주와 군주라고 불렀다. 2월에는 순정을 이벌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14년 백제가 침범하였고 17년 왜인이 목출도를 침범하였다. 왕이 각간 우오를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우오가 전사하였다188월 백제가 변경을 약탈하므로 군사를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19년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10월에는 백제가 서쪽 변경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209월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여 와산성을 다시 찾았다. 백제에서 와서 살고 있던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218월 아찬 길문이 가야 군사를 상대로 황산진 입구에서 싸워 1천여 명을 죽였다. 길문을 파진찬으로 임명하여 그 전공에 해당하는 상을 주었다23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북쪽에 나타나더니 20일 만에 사라졌다.

244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금성 동문이 저절로 무너졌고 8월에 왕이 별세하였다. 성의 북쪽 양정 언덕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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