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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8대 진덕여왕릉(眞德女王陵)은 경주 시내에서 동북방향 안태봉 남쪽 능선 현곡면 오류리 산48번지(해발 97.8m)에 위치하고 있다.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봉분 직경 14.2m, 봉분 높이 .4m로 묘제는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굴식돌방무덤)인데 199784일 도굴하려다 석실내부에는 진입하지 못하고 실패한 것을 발견되어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임을 확인됐다.

(陵)의 호석(護石, 둘레돌)은 면석(面石, 돌판)과 탱석(撑石, 버팀돌)으로 이루어져 있고 면석과 면석사이에는 24개의 탱석을 끼워 넣고 그 가운데 12개의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무복(武服)을 입은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호석(護石) 밖에는 돌기둥, 석난간, 회랑 및 상석은 설치되지 않았다. 또한 능(陵)변에는 설치하는 석인상과 석사자(돌사자)도 설치되어 않았다. 앞에 있는 축대와 통로는 1975년에 만든 것이다.

축대와 통로는 1975년에 만든 것이다

진덕여왕릉(眞德女王陵)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의 조각 기법은 저부조로 거의 평면에 가깝게 조각하여 마치 선각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신라 미술에서 저부조 및 평면화는 9세기 중엽에 유행했으므로 이 시기에 조성된 능(陵)이다. 그리고 현재 확인 된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진 능(陵) 중 시기적으로 마지막에 조성되었다.

경주 지역에 있는 신라 왕릉 가운데 호석에 십이지신상을 새겨 넣은 것은 성덕왕릉에 처음 등장하였고 이후 김유신 묘, 원성왕릉, 경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구정동 방형분, 진덕여왕릉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54년에 왕이 죽자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량부(沙梁部)는 현재 경주 시내의 서남쪽 일대로 이 능(陵)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4km 이상 떨어져 있다. 현재의 능(陵)은 조선 영조 6년 김씨 일족에 의해 비정되었다.

그럼 실제 진덕여왕릉(眞德女王陵)은 어디에 있을까? 일부학자는 사량부(沙梁部)가 경주 남천 남쪽 서남산 일대이므로 남산 약수곡과 도당산 서북록 사이에 있는 도당산 고분(식혜곡 고분)을 진덕여왕릉(眞德女王陵)으로 추정하고 있다. 외형은 타원형으로 봉분 높이 6.5m, 긴 직경 19.8m, 짧은 직경 16.1m이다.

신상(申像)으로 오른 손에 칼을 잡고 있다.
오상(午像)으로 오른 손에 긴 창을 잡고 있다.
미상(未像)으로 왼 손에 긴 창을 잡고 있다.

십이지신(十二支神)은 점성술이 발달한 서아시아의 십이궁(十二宮)이 인도를 거쳐 중국에 전래된 것으로 한()나라 중기 때 방위(方位)와 시간에 대응시키고 자(), (), (), (), (), (), (), (), (), (), (), () 12동물과도 대응시켰다.

후한(後漢) 때 오행상극설 (五行相剋說)에 따라 십이지신(十二支神)을 설명하고 사람의 생년월일(生年月日)을 동물명으로 대신하여 일컬었다.

그리고 당() 나라 때 묘지명판(墓地銘板)의 사면(四面)에 조각하거나 무덤에 넣는 도제용(陶製俑)에도 사용 되었는데 손에 홀()을 들고 문관(文官) 복장(服裝)을 한 인신에 머리만 십이지(十二支)의 동물로 나타냈다.

불교에서 십이지신(十二支神)은 땅을 지키는 일을 하는 열두 신장으로 약사경(藥師經)을 외우는 불교인을 지키는 신장(神將)으로 12야차대장, 12시왕이라고도 하였다.

약사불의 12대원에 대응하여 약사불을 수호하고 약사의 대원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신장이며 십이신장이 약사여래와 함께 등장하게 된 것은 약사경(藥師經)에 따른 것인데, 석가모니가 약사여래의 본원공덕을 설명할 때 12야차대장이 크게 감명 받아 12대원을 행할 것을 서원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능 주변에 있는 석재들

신라 28진덕여왕(眞德女王 : 재위기간 647년 정월 ~ 6543, 72개월)

그녀의 이름은 승만(勝曼)이며, 진평왕(眞平王)의 동복 아우 갈문왕(葛文王) 국반(國飯)의 딸이자 선덕여왕의 사촌동생이다. 신라의 두 번째 여왕이면서 성골(聖骨)로서는 마지막 왕이다. 어머니는 박씨 월명부인이다. 승만은 자태가 곱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7척이었고, 팔을 늘이고 있으면 그 길이가 무릎을 넘었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이 갑자기 죽자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의 도움으로 왕이 되어 비담(毗曇)의 난을 수습했고 알천(閼川)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여 정치 안정을 도모했다. 김춘추(金春秋)는 당 태종(太宗)의 마음을 움직여 군사 지원을 받아냈고 이때부터 당으로부터 내정 간섭을 받게 된다. 그 결과 의관을 중국식으로 하고 독자 연호인 태화(太和)를 당 고종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사용했다. 정월 초하룻날 아침 조례(朝禮)를 행했고, 시랑(侍郞)이라는 칭호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즉위 원년 647년 봄 정월 17, 비담(毗曇)을 목 베어 처벌하였다. 이에 연루되어 죽은 자가 30명이었다. 2월에 이찬(伊湌) 알천(閼川)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하고, 대아찬(大阿湌) 수승(守勝)을 우두주(牛頭州, 춘천) 군주(軍主)로 임명하였다. 당 태종(太宗)이 지절사(持節使)를 보내 전왕을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증했다. 그리고 왕을 주국(柱國)으로 삼아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책봉하였다.

7,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은공에 사례하였다. 연호를 태화(太和)로 고쳤다. 10, 백제 군사가 무산성(茂山城), 감물성(甘勿城), 동잠성(桐岑城)3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유신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항하게 하였다.

그들은 악전고투로 기운이 다하였다. 그런 가운데 유신의 부하 비녕자(丕寧子)와 그 아들 거진(擧眞)이 적진에 들어가 격렬하게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에 여러 군사들이 용감하게 공격하여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11,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2,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3, 백제 장군 의직(義直)이 서쪽 변경을 침범하여 요거(腰車, 상주) 10여 성을 점령하였다. 왕이 이를 걱정하여 압독주(押督州) 도독(都督) 유신(庾信)으로 하여금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유신(庾信)이 군사들을 격려하여 작전을 시작하려 하자 의직(義直)이 저항하였다.

유신(庾信)이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협격하자, 백제 군사가 패주하였다. 유신(庾信)은 도망가는 백제 군사를 추격하여 거의 모두 죽였다. 왕이 기뻐하면서 군사들에게 공훈에 따라 상을 주었다.

겨울, 감질허(邯帙許)를 당 나라에 보내 조회하도록 하였다. 태종(太宗)이 어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묻게 하였다. “신라가 신하의 자격으로 대국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당과 다른 연호(年號)를 사용하는가?” 질허(帙許)일찌이 대국 조정에서 정삭(正朔)을 반포하지 않았으므로, 선조 법흥왕(法興王)이래 우리 나름대로의 연호를 사용한 것이다. 만약 대국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면, 우리나라가 어찌 감히 다른 연호(年號)를 사용하였겠는가?”라고 말했다.

태종(太宗)이 이를 수긍하였다. 이찬(伊湌)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문왕(文汪)을 당 나라에 파견하여 조회케 하였다. 태종(太宗)은 광록경 유형을 교외까지 내보내 맞이하면서 그들을 위로하였다. 그들이 도착하자 태종(太宗)이 춘추의 풍모가 영특하며 늠름한 것을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춘추(春秋)는 국학에 가서 석전(釋奠)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요청하였다. 태종(太宗)이 이를 허락하고, 당의 황제가 지은 온탕(溫湯) 및 진사비(晉祠碑)의 비문과 새로 지은 진서(晉書)를 주었다.

태종(太宗)이 하루는 춘추(春秋)를 연회에 불러 황금과 비단을 더욱 후하게 주면서 그대에게 무슨 소원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춘추(春秋)가 무릎을 꿇고 신의 나라가 멀리 바다 한 구석에 있어, 대국을 섬긴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제가 강성하고 교활하여 침략을 일삼아 왔습니다. 더구나 지난해에는 대군을 거느리고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수십 개의 성을 점령하여, 대국에 입조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군사를 보내 그 흉악한 무리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백성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육로와 수로를 거쳐 술직하는 일도 다시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태종(太宗)이 크게 동감하고 군사의 파견을 승낙하였다.

춘추(春秋)는 또한 관리들의 휘장과 복식을 바꾸어 중국의 제도를 따르겠다고 청했다. 이에 태종(太宗)은 내전으로 하여금 진귀한 의복을 춘추(春秋)와 수행원들에게 하사하였다. 태종(太宗)은 조칙을 내려 춘추(春秋)를 특진에, 문왕(文汪)을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에 제수하였다.

춘추(春秋)가 귀국할 때, 태종(太宗)3품 이상의 관리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고 그들과 전별하였다. 태종(太宗)이 그들을 우대하는 예절이 이와 같이 극진하였다. 춘추(春秋)는 황제에게 저의 자식이 일곱입니다. 원컨대 그 중의 하나인 문왕(文汪)으로 하여금 성상의 곁을 떠나지 않는 숙위가 되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하였다. 태종(太宗)은 곧 그의 아들 문왕(文汪)과 대감(大監)에게 숙위를 명하였다.

춘추(春秋)가 귀국하는 도중에 바다에서 고구려의 순라병(巡邏兵)을 만났다. 이렇게 되자 춘추(春秋)의 시종인 온군해(溫君解)가 큰 모자를 쓰고 대의를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었다. 순라병(巡邏兵)은 그를 춘추(春秋)로 알고 잡아 죽였다. 춘추(春秋)는 작은 배를 타고 신라로 돌아왔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군해(君解)에게 대아찬(大阿湌)을 추증하고, 그의 자손들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다.

3, 봄 정월에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였다 8, 백제 장군 은상(殷相)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석토(石吐) 등의 일곱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왕은 대장군 유신(庾信)과 장군 진춘(陳春) 죽지(竹旨), 천존(天存) 등에게 대항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들은 장소를 옮겨 가며 열흘이 지나도록 싸웠으나 백제군을 물리치지 못하고 도살성(道薩城) 밑에 진을 쳤다. 유신(庾信)은 군사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틀림없이 백제 사람이 정탐을 하러 올 것이다. 너희들은 이를 모르는 체 하고, 절대로 누구인가를 묻지 말라!” 유신 (庾信)은 곧바로 사람을 시켜 진중을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결연한 자세로 움직이지 말라. 내일 구원병이 온 후에 결전을 하겠다.”라고 말하도록 하였다. 첩자가 이 말을 듣고 돌아가 은상(殷相)에게 그대로 보고하였다.

은상(殷相) 등은 증원병이 온다고 생각하여 두려운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유신 (庾信) 등이 진격하여 적을 크게 쳐부수고, 장령 백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군졸 8980명의 머리를 베고, 군마 만 필을 얻었다. 노획한 병기 종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4년 여름 4, 교서를 내려 진골로서 현직에 있는 자는 상아홀()을 들게 하였다. 6,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를 이긴 사실을 보고하였다. 왕은 비단에 5언시 태평송(平頌)을 써서, 이를 춘추(春秋)의 아들 법민(法敏)으로 하여금 당 나라 황제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위대한 당 나라 왕업을 열었으니 높고 높은 황제의 앞 길 번창하여라.

전쟁을 끝내 천하를 평정하고, 학문을 닦아 백대에 이어지리라.

하늘의 뜻 받드니 은혜의 비 내리고 땅의 만물 다스려 빛나는 이치 얻었네.

어질음 깊고 깊어 일월과 어울리고, 시운도 따라오니 언제나 태평하네.

큰 깃발 작은 깃발 저리도 빛나며, 징소리 북소리 어찌 저리 쟁쟁한가?

외방의 오랑캐 황제 명령 거역하면, 하늘의 재앙으로 멸망하리라.

시골이나 도시에나 풍속이 순박하고, 멀리서 가까이서 좋은 일 다투어 일어나네.

빛나고 밝은 조화 사계절과 어울리고, 해와 달과 오성이 만방을 도는구나.

산신의 뜻으로 재상이 보필하고, 황제는 충신 인재를 믿으시니,

삼황과 오제의 덕이 하나가 되어 우리 당 나라를 밝게 비추리로다.

고종이 이 글을 아름답게 여기고, 법민(法敏)에게 대부경(大府卿)을 제수하여 돌려보냈다. 이 해에 처음으로 중국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사용하였다.

5년 봄 정월 초하루에 왕이 조원전(朝元殿)에 나아가 백관들의 신년 하례를 받았다. 신년 하례의 예식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2,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로 고치고, 파진찬(波珍湌) 죽지(竹旨)를 집사중시(執事中侍)로 임명하여 기밀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파진찬(波珍湌) 김인문(金仁問)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이어서 숙위(宿衛)로 머물러 있게 하였다.

6년 봄 정월에 파진찬(波珍湌) 천효(天曉)를 좌리(左理) 방부령(方府令)으로 삼았다.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711,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금총포(金總布)를 바쳤다.

83,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 당 고종이 이를 듣고 영광문(永光門)에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대상승(大常丞) 장문수(張文收)를 사절로 삼아, 황제의 신임표를 가지고 와서 조문케하였으며, 왕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추증하고 비단 3백 필을 부의로 주었다.

시조 혁거세(赫居世)로부터 진덕왕(眞德王)28대 왕을 성골(聖骨)이라고 불렀으며, 무열왕(武烈王)으로부터 마지막 임금까지를 진골(眞骨)이라고 불렀다. 당 나라 영호징(令狐澄)신라기에는 그 나라에서는 왕족을 제 1골이라 부르고, 나머지 귀족을 제 2골이라고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1권 기이(紀異) 1 진덕왕(眞德王)

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왕위에 오르자 친히 태평가(太平歌)를 지어 비단을 짜서 그 가사로 무늬를 놓아 사신을 시켜서 당()나라에 바치게 했다. ()나라 황제(皇帝)는 이것을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고 진덕여왕(眞德女王)을 계림국왕(鷄林國王)으로 고쳐 봉했다. 태평가(太平歌)의 가사(歌詞)는 이러했다.

진덕여왕릉(眞德女王陵) 가는 초입

큰 당()나라 왕업(王業)을 세우니, 높고 높은 임금의 계획 장하여라.

전쟁 끝나니 천하를 평정하고, 문치(文治)를 닦으니 백왕(百王)이 뒤를 이었네.

하늘을 거느리니 좋은 비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모든 것이 광채가 나네.

깊은 인덕(人德)은 해와 달에 비기겠고, 돌아오는 운수는 요순(堯舜)보다 앞서네.

깃발은 어찌 그리 번쩍이는가, 징소리 북소리는 웅장도 하여라.

외이(外夷)로서 황제의 명령 거역하는 자는 칼 앞에 자빠져 천벌을 받으리.

순후(淳厚)한 풍속 곳곳에 퍼지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상서(祥瑞)를 바치네.

사시(四時)의 기후는 옥촉(玉燭)처럼 고르고, 칠요(七曜)의 광명은 만방에 두루 비치네.

산악(山嶽)의 정기는 보필할 재상을 낳고, 황제(皇帝)는 충량(忠良)한 신하에게 일을 맡겼네.

오제(五帝) 삼황(三皇)의 덕()이 하나로 이룩되니, 우리 당()나라 황제(皇帝)를 밝게 해 주리.

진덕여왕릉(眞德女王陵) 가는 초입에 있는 버들저수지

왕의 대()에 알천공(閼川公), 임종공(林宗公), 술종공(述宗公), 호림공(虎林公; 자장慈藏의 아버지), 염장공(廉長公), 유신공(庾信公)이 있었다. 이들은 남산(南山) 우지암(亏知巖)에 모여서 나랏일을 의논했다. 이때 큰 범 한 마리가 좌중에 뛰어들었다. 여러 사람들은 놀라 일어났지만 알천공(閼川公)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범의 꼬리를 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처럼 세었으므로 그를 수석(首席)에 앉혔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유신공(庾信公)의 위엄에 심복(心腹)했다.

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스러운 땅이 있어서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면 대신(大臣)들은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일을 의논했다. 그러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 네 곳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요, 둘째는 남쪽의 우지산(亏知山)이요, 셋째는 서쪽의 피전(皮田)이요,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다. 이 왕 때에 비로소 정월 초하룻날 아침의 조례(朝禮)를 행했고, 또 시랑(侍郞)이라는 칭호도 이때에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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