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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10.06 짧은 치세의 신라 50대 정강왕(定康王)과 그의 능(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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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50대 정강왕릉(定康王陵)은 경주 동남산의 남산동 산53번지에 위치하며 남쪽에는 통일전이 있고 북쪽에는 49대 헌강왕릉(憲康王陵)이 있다. 흙으로 덮은 둥근 형태의 원형봉토분으로 봉분 직경 15.7m, 봉분 높이 4m로 묘제는 헌강왕릉(憲康王陵)과 같이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 : 굴식돌방무덤)로 추정된다.
봉분을 두른 호석(護石, 둘레돌)은 길이 90 ~120cm, 너비 30cm 내외의 가공한 장대석을 이용하여 2단으로 쌓았는데 하단의 지대석은 호석(護石)보다 넓게 하였고 지대석 위에 약 10cm 정도 안으로 들여서 호석(護石)을 2단으로 쌓았다.

헌강왕릉(憲康王陵)의 호석(護石)은 4단인데 비해 정강왕릉(定康王陵)은 2단으로 축소된 것으로 기울어가는 신라하대 국운을 반영한 것 같다. 능의 동쪽에 있는 상석은 후대에 설치 된 것으로 추정된다.

능의 동쪽에 있는 상석은 후대에 설치 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지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헌강왕(憲康王陵)과 같이 보리사(菩提寺) 동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영조 6년에 김씨 일족은 동남산에서 약 3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두 고분 가운데 월성에 가까운 고분을 헌강왕릉(憲康王陵)으로 그 남쪽의 고분은 정강왕릉(定康王陵)으로 비정하였다.
신라 50정강왕(定康王 : 재위기간 8867~ 8877, 1)
「이름은 황()이며, 경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49대 헌강왕(憲康王)의 동생이다. 당시 헌강왕(憲康王)에게는 아들 요가 있었지만 태어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아기이기에 황()이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는 헌안왕의 맏딸로 문의왕후(文懿王后)에 봉하여진 영화부인(寧花夫人)이다. (: 49대 헌강왕), (: 51대 진성여왕), ()과 형제간이다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懿恭大王)으로 추봉된 계명(啓明)이고, 할머니는 광의왕태후(光義王太后)로 추봉된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정강왕(憲康王)은 형인 헌강왕(憲康王)에 이어 886년 7월에 왕위에 올랐으나 887년 7월에 병으로 죽어 왕위에 있던 기간이 만 1년밖에 되지 않았다.
정강왕(憲康王)은 병이 깊어지자 시중 준흥(俊興)에게 병이 위급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아들이 없으므로 누이동생인 만(曼, 진성여왕)이 왕위를 잇게 하라는 말을 남기고 887년 75일 세상을 떠났다. 헌강왕(憲康王)과 마찬가지로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서 장사를 지냈다.

즉위 원년(886년) 8월, 이찬 준흥(俊興)을 시중으로 임명하였고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어 황폐하였다.
2년 봄 정월, 황룡사(皇龍寺)에 백고좌(百高座)를 열고 왕이 직접 가서 강론을 들었다. 백고좌(百高座)는 나라의 평안을 위하고 백성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열었던 국가적 불교 행사의 하나이다. 한주 이찬 김 요가 모반하므로, 군사를 보내 그를 처형하였다.

정강왕릉 ( 定康王陵 ) 주변의 장대석들

5월, 왕이 병들자 시중 준흥(俊興)에게 말했다. “나의 병이 위급하니 다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불행히 뒤를 이을 자식은 없으나, 누이 동생 만은 천성이 명민하고 체격이 남자와 같으니, 그대들이 선덕왕과 진덕왕의 옛 일을 본받아 그녀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7월 5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정강이라 하고,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정강왕릉( 定康王陵 )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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