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군 삼남읍(三南邑) 교동리(校洞里)에 있는작괘천(酌掛川)은 물이 맑고 주변 풍광이 뛰어난 언양의 명소다. 이로 인해 냇가의 바위에는 온통 사람 이름이 많이 새겨져 있어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리고 근래 이 일대에 벚나무가 심어져 꽃이 만발할 때는 울산 12경의 하나가 된다.
해발 1,068m의 간월산에서 발원해 태화강으로 흘러가는 작괘천(酌掛川)은 지도에는 작수천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지역주민들은 작괘천(酌掛川)으로 부르고 있고 줄여서 작천(酌川)이라고도 한다.
이름의 유래는 냇가의 수백 평이나 되는 바위가 오랜 세월의 물살에 깎여 움푹 파인 형상이 마치 술잔을 걸어 둔 것과 같다고 하여 작괘천(酌川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작괘천(酌川亭)은 거대한 화강암으로 된 옥산과 봉화산 사이의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화강암에는 유리의 원료가 되는 형석(螢石)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자수정의 광맥도 이 형석인 어미 돌로 이어져 있는데 어미 돌을 따라 파 내려가면 단단한 화강암 속에 자수정 구덕이 형성되어 있다.
옛날에는 작괘천(酌川亭)의 바위면은 형석이 많이 배겨 있어 달밤이면 반딧불이 불빛처럼 빛을 반사하는 것으로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움푹 파인 형상으로 크고 작은 구덕은 자연적으로 자수정이 패여 나간 옥 구덕인 것이다
작괘천(酌掛川)에 작천정(酌川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1894년(고종 31년)에 언양 현감으로 부임해 온 정긍조(鄭肯朝)가 작천정 앞 냇가에서 시회(時會)를 열고 정각(亭閣)을 만들기로 여러 사람과 뜻을 모았으나 다른 곳으로 부임하는 바람에 만들지 못하고 1902년 여름에 최시명(崔時鳴) 군수가 정비하면서 정각(亭閣)을 세우고 이름을 작천정(酌川亭)이라고 하였다.
1902년 여름에 최시명(崔時鳴) 군수가 세운 작천정(酌川亭)
작천정(酌川亭) 안에 들어가면 지역 문인들이 지은 글이 현판에 걸려 있는데 작천정기(酌川亭記), 오언율시 등 작품이 있다.
작천정(酌川亭) 안에는 지역 문인들이 지은 글이 현판에 걸려 있다.
「동국여지승람」 기록에 따르면 부로산(봉화산)에 석수사(石水寺)가 있다고 하였 는데 절터가 작천정(酌川亭) 입구로 추측되며 절이 있었던 자리를 지금은 절터구미라고 부른다. 그리고 언양 향교의 주춧돌이 석수사(石水寺)의 것이라고 하며 작천정 (酌川亭) 자리는 수석암(水石庵)이라는 암자터였다고 한다.
작천정(酌川亭)에서 상류 쪽으로 20m 정도 걸어가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마애석각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전투에서 공을 세우거나 군수품 보급에 기여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0인의 후손들이 일제강점기 때인 1936년에 일본인의 눈을 피해 바위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0인의 이름을 새긴 바위이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마애석각 뒤쪽에는 1986년에 세운 비각이 있다.
가로 5m, 높이 2m 크기의 바위에 가로로 선무원종공신이라고 새기고 세로로 직함, 이름, 출신지역을 새겼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마애석각 뒤쪽에는 1986년에 세운 비각이 있는데 안에는 귀부 위에 높이 2.52m의 비가 있다.
작괘천(酌川亭) 초입의 바위에 인내천(人乃天)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5년 울주군 상북면 출신의 김영걸씨가 글씨를 쓰고 삼남면 출신 함석헌씨가 음각대자로 새겼는데 당시에 쉽지 않는 행동이다.
그리고 인내천(人乃天) 바위의 맞은 편 앞산 중턱에는 1935년 언양청년회장 신근수씨가 높이 2m, 넓이 100㎡ 부지에 민족자주 정신 청사에 남으리라는 뜻으로 청사대(靑史臺)를 축조하였고 글씨도 새겼다.
작괘천(酌川亭) 초입의 인내천(人乃天) 바위
삼남면(三南面)의 삼남은 1933년 중남면(中南面)과 삼동면(三同面)을 통합하면서 삼동의 ‘삼(三)’자와 중남의‘남(南)’자에서 한 글자씩 따서 형성된 지명이다. 교동리(校洞里)는 언양 향교(鄕校)가 있어 붙은 지명이다. 언양 향교의 창건은 언제 지어 졌는지 알 수 없으나 네 번 짓고 세 번 옮긴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금시당(今是堂)과 백곡서재(栢谷書齋)는 밀양강변(밀양시 활성로 24-184)에 있는 고택으로 조선 명종 때 문신 금시당 이광진(今是堂 李光軫 : 1513~1566, 여주 이씨)이 만년에 관직에서 은퇴하여 학문과 수양을 닦으며, 여생을 보내기 위해 1566년(명종 21년) 창건한 별서(別墅)이다. 별서(別墅)는 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이다.
밀양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금시당(今是堂)과 백곡서재(栢谷書齋)
금시당(今是堂)이란 이광진(李光軫)의 호인데 지금(今)이 옳다(是) 라는 뜻을 담고 있는 금시(今是)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이는 중국 당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의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 : 지금이 옳고 지난날이 그른 줄을 깨달았다)”라는 문장에서 취한 것이다.
금시당 정원에는 이광진(李光軫)이 직접 심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수령은 420년 높이 22m, 둘레 5.1m로 밀량시의 보호수이다.
이광진(李光軫)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옥당(翰林玉堂), 각조 랑관(各曹 郞官),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과 집의(執義), 사유(師儒) 등 요직을 두루 거쳐 좌승지(左承旨)에 올라 명망이 높았다. 금시당 이광진은 별업을 조성한 그 해에 별세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근재 이경홍(謹齋 李慶弘)이 선친의 유지를 이어 받아 후진을 양성하는 강학소(講學所)로 사용했다.
금시당 정원에는 이광진 ( 李光軫 ) 이 직접 심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수령은 420 년 높이 22m, 둘레 5.1m이다.
금시당(今是堂)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서 1743년(영조 19년)에 그의 5대손인 교남처사 백곡 이지운(嶠南處士 栢谷 李之運:1681~1763)이 이를 복원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금시당의 10대손 무릉옹 이종원(武陵翁 李鍾元)과 11대손 만성 이용구가 문중의 뜻을 모아 1867년(고종 4년)에 건물을 해체하고 크게 중수한 후의 모습이다.
금시당 ( 今是堂 ) 은 정면 4 칸 , 측면 2 칸 홑처마 팔작지붕 익공양식의 집이다
금시당(今是堂)은 정면 4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 익공양식의 집으로, 평면은 좌측부터 마루 2칸, 온돌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마루 좌측면과 후면 및 온돌방 배면에 쪽마루를 달아냈다.
평면은 좌측부터 마루 2 칸 , 온돌방 2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대청마루 좌측면과 후면 및 온돌방 배면에 쪽마루가 있다
백곡서재(栢谷書齋)는 금시당 동쪽에 위치한 서재 건물로 금시당(今是堂)을 복원한 이지운(李之運)을 추모하기 위해서 이지운의 6대손인 만성 이용구(晩醒 李龍九)가 주관하여 그의 호인 백곡(栢谷)을 이름으로 삼아 1860년(철종 11년)에 새로 지었다.
백곡서재(栢谷書齋)는 정면 4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 익공양식의 집이다.백곡서재(栢谷書齋)에서 본 은행나무
백곡서재(栢谷書齋)는 정면 4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 익공양식의 집으로, 평면은 정면 좌측부터 온돌방 2칸, 마루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 온돌방의 천장은 우물반자이고 마루의 귀서까래는 선자연으로 장식하였으며, 대들보와 선자연 등에 태극문양을 그려 놓았다.
평면은 정면 좌측부터 온돌방 2칸, 마루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마루의 귀서까래는 선자연으로 장식하였으며, 대들보와 선자연 등에 태극문양을 그려 놓았다.
밀양강(密陽江)은 밀양시의 일대를 관류하는 하천으로 상동면 옥산리에서 청도천과 동창천이 합류하는 하천으로 밀양 시내를 지나 삼랑진읍 삼랑진리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유역의 경관이 뛰어나 강변에 영남루(嶺南樓)와 아랑각(阿娘閣) 등 명소가 있다.
밀양강(密陽江)은 밀양시의 일대를 관류하는 하천으로 상동면 옥산리에서 청도천과 동창천이 합류하는 하천으로 밀양 시내를 지나 삼랑진읍 삼랑진리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밀양시(密陽市)는 『삼국지』에 의하면 변한12소국 중의 하나인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지리지』에는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지방 제도 정비와 더불어 밀성군(密城郡)으로 개칭하게 되었으며, 995년(고려 성종 14)에 밀성군을 밀주(密州)로 승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276년(고려 충렬왕 2) 삼별초군에 호응하였다는 이유로 귀화부곡으로 강등되어 계림부(경주)에 예속하였고, 그 뒤에 밀성현(密城縣)으로, 다시 밀성군(密城郡)을 거쳐 밀양부(密陽府)로 승격되었다.
안강읍(安康邑) 육통리(六通里)회화나무(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1428외 3필)는 수령이 약 400년으로 높이 19.1m, 둘레 6.2m로 줄기의 많은 부분이 상해서 나무 모습이 좋지 못하다. 오랜 세월동안 마을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살아 왔으며, 음력 정월 보름날에 이 나무 앞에 모여서 새해의 풍작과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동제를 지낸다.
육통(六通)의 유래는 옛날 대표적인 6개 자연부락(능골, 원당, 존당, 못밑, 학지, 거리마을)을 통칭하여 육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활엽수인 회화나무는 생명력이 강하고,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그늘 밑에서 쉬어 가는 마을의 정자나무로도 쓰였고 향교나 사찰 등에 심었다. 활엽수 중 공해에 가장 강한 나무로 가로수나 공원수로도 이용된다.
나뭇가지의 자유로운 뻗음이 학자의 기개를 상징한다 하여 ‘학자수(學者樹)’라고도 하며, 영어 이름도 이와 같은 뜻인 ‘스콜라 트리(scholar tree)’이다.
옛 선비들은 이사를 가면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선비가 사는 곳’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마을 입구에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모양이 둥글고 온화하여 높은 관리의 무덤이나 선비의 집에 즐겨 심었다.
이 회화나무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약 600년 전인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이 마을에 살던 젊은이가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면서 이 나무를 심어놓고 부모님께 자식처럼 키워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 후 젊은이는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부모는 아들의 뜻대로 이 나무를 자식같이 여기며 가꾸어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한다.」
안강읍(安康邑)은 경주시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읍이다. 남쪽으로는 현곡면, 동쪽으로는 강동면과 천북면, 북쪽으로는 포항시의 기계면, 서쪽으로는 영천시의 고경면과 접해 있다. 원래 안강은 무인 하천 지역이었으나 칠평천(七坪川) 유수의 변천으로 민가가 형성되었고 759년 신라 경덕왕 때 주민의 평안함을 염원하는 뜻에서 '안강(安康)'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칠평(七坪)이라는 지명은 옛날 큰 홍수가 나서 안강 전역이 물에 잠겼을 때, 이곳의 일곱평 정도의 땅이 물에 잠기지 않았는데 그 물에 잠기지 않은 땅모양이 칠(七)자 모양이었다고 하여 그 넓이와 모양을 따서 칠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칠평천(七坪川)은 안강읍 두류리에서 발원하여 안강읍을 관통하고 형산강에 합류되는 하천이다. 동남북의 산지로부터 흘러내린 많은 지류들이 안강읍 지역에 넓은 들을 만들어 옛날 안강현(安康縣)의 중심지가 들어설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삼국사기』에 원래 비화현(比火縣)이었는데, 759년(신라 경덕왕 16)에 안강현(安康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비화현에서의 ‘화(火)’는 신라지역에서‘성(城)’을 의미하는‘벌’을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102년(신라 파사니사금 23) 음즙벌국(音汁伐國)을 취하여 음즙화현(音汁火縣)을 만들었는데 후에 안강현에 합해졌다는 기록도 나온다. 음즙화현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일이나 사정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화합하지 못하는 상태를 갈등(葛藤)이라고 하는데 갈등은 칡과 등나무이다. 칡은 줄기를 왼쪽으로,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고 올라가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해결의 실마리가 찾는 것이 어렵다”라는 의미가 된다. 현곡면 오류리에 있는 등나무(현곡면 오류리 527번지)는 1962년 12월 7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등나무는 4그루인데, 두 그루씩 모여서 자라고 있다. 가슴높이의 줄기지름이 각각 20·40·40·50cm이며 팽나무를 감고 올라가고 있다. 높이 17m이로 동서쪽으로 20m, 남북쪽으로 50m 정도 퍼져있다.
어떤 일이나 사정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화합하지 못하는 상태를 갈등(葛藤)이라고 하는데 갈등은 칡과 등나무이다.칡은 줄기를 왼쪽으로,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고 올라가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해결의 실마리가 찾는 것이 어렵다”라는 의미가 된다.
등(藤)은 콩과에 속하는 덩굴성 식물로 5월에 연보라색의 꽃이 핀다. 봄을 알리는 꽃향기로 아카시아나무 꽃향기와 더불어 등나무 꽃 향기는 은은하고 깔끔한 향기가 난다. 또한 여름에는 나그네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여름나무이다. 등(藤)이라는 한자는 위로 감고 올라가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문자이다. 학술적으로 이 나무의 본래 이름은 참등이라고 하는데 흔히 등이라고 하여 산등이나 애기등 같은 등류를 통칭한다.
등(藤)은 콩과에 속하는 덩굴성 식물로 5월에 연보라색의 꽃이 핀다.등(藤)이라는 한자는 위로 감고 올라가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문자이다.
신라 시대 때, 이곳을 용림(龍林)이라 하여 왕이 수렵을 즐기던 곳이었다. 여기의 등나무를 용등(龍藤)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등나무 줄기의 꼬임과 그 위엄을 용에 견주어 붙인 명칭이다. 이 등나무 옆에 깊은 샘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고 옆에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여기에 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때 어느 농가에 열아홉 살, 열일곱 살이 된 예쁜 두 딸이 있었는데 둘다 남모르게 이웃집 청년을 사모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청년이 싸움터로 출정하게 되어 떠나게 되고 그 모습을 몰래 보며 눈물을 짓다 두 자매는 같이 그 청년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정한 자매가 서로 양보하기로 결심하고 있을 때 그 청년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얼싸안고 울다가 함께 못에 몸을 던졌다.
자매가 그 청년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얼싸안고 울다가 함께 못에 몸을 던졌던 연못가에는 등나무 두 그루가 자라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 연못가에는 등나무 두 그루가 자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청년이 훌륭한 화랑이 되어 돌아오게 되었고, 이 화랑은 세상을 등진 자매의 애달픈 사연을 듣고서 자신도 연못에 몸을 던졌다. 화랑이 죽은 연못가 자리에서 팽나무가 자라 나왔고 이로부터 등 두 그루는 팽나무를 힘차게 감고 올라가 자라 5월이 되면 탐스러운 꽃송이로 그윽한 향기를 퍼뜨리고 있다. 이에 두 그루 등나무는 팽나무를 감고 자라며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을 달래고 있다고 한다.」
화랑이 죽은 연못가 자리에서 팽나무가 자라 나왔고 이로부터 등 두 그루는 팽나무를 힘차게 감고 올라가 자라 5월이 되면 탐스러운 꽃송이로 그윽한 향기를 퍼뜨리고 있다.두 그루 등나무는 팽나무를 감고 자라며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을 달래고 있다고 한다.
이 애틋한 전설에서 유래되었는지 신혼부부의 금침(베게)에 등꽃을 따서 말린 것을 넣어주면 정이 한층 깊어진다는 말도 전하여지고 있으며, 또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때 등나무의 잎을 달여 마시면 정이 다시 살아난다는 속신도 있다.
신혼부부의 금침(베게)에 등꽃을 따서 말린 것을 넣어주면 정이 한층 깊어진다는 말도 전하여지고 있다.
현곡면(見谷面)은 경주시의 서북쪽에 있는 면으로 남쪽으로 경주시내, 동쪽으로 천북면, 북쪽으로 안강읍, 서쪽으로 건천읍과 영천시 고경면에 접해 있다. 서쪽에서 발원하는 소현천을 중심으로 작은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소현천은 동쪽의 형산강에 합류된다. ‘현실’이라는 순우리말 이름을 한자의 소리와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 ‘현곡(見谷)’이라는 설이 있다. 오류리(五柳里) 이름은 마을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었다 해서 유래가 됐다.
목도(目島)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방도리에 있는 무인도로 모양이 물고기 눈처럼 생겼다고 하여 부르게 되었고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에는 ‘동백도’로 표기돼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부터 명칭이 춘도(椿島)로 바뀌었는데 청산해야 할 일제잔재이다. 일본에서는 동백나무를 한자로 춘(椿)자를 쓰는데 갑자기 생기는 불행한 일을 춘사(椿事)라고 한다. 식민사관의 일환으로 경주 양북 동해천(東海川)을 대종천(大鐘川)으로 바꾼 것처럼 목도(目島), 동백도(冬柏島)를 춘도(椿島)로 바꾼 것이다.
목도는 면적은 약 1만 5047㎡, 둘레는 440m으로 동해안 섬 중 유일한 상록수림(常綠樹林)으로 동백나무, 후박나무, 사철나무 등 각종 상록수림으로 절경을 이루어서 1962년 12월 7일에 천연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옛날에는 대나무가 많아서 대섬(竹島)이라고도 불렀고 신라 때에는 대나무를 길렀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주민들이 대나무 화살을 만들어 나라에 바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나무는 점점 사라지고 동백나무·후박나무 등 각종 상록수림이 그 자리를 메웠다.
1970, 80년대 울산 최고의 동백꽃 관광지로 꽃피는 봄이면 붉은 동백꽃을 보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고 45인승짜리 배 두 척이 운항했다. 그러나 점차 섬 생태계가 훼손되자 1992년부터 안식년제를 도입하면서 현재까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언젠가 생태계가 복원되어 개방되기를 손꼽아 기다릴 뿐이다.
목도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도 있다. 가수 하춘화(河春花)가 1973년 4월 5일에 부른 「목도는 내 고향」이다. 1970년대 울산이 농어촌에서 산업 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향이 공장부지로 편입되어 고향을 떠나는 이주민들의 망향과 실향의 정서를 노래로 담고 있다.
17세기 이곳 방도리(方島里)는 울산도호부 청량면 목도리 목도포구로써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이 1693년과 1696년 2회에 걸쳐 독도로 출발한 포구이다. 이들은 독도를 지키기 위해 독도에서 돗토리현까지 건너가 싸웠다. 안용복은 이곳 목도 세거 광주 안씨 출신이다. 박어둔은 충청도 이산현(논산시 노성면) 소론명가 출신으로 증조부는 가선대부(종2품) 박잉석, 조부는 통정대부(정3품) 박국생이며 아버지는 정병 박기산이다. 조부 박국생이 1646년(인조 24년) 3월 그 지방의 유탁(柳擢)과 한양의 권대용(權大用)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을 하여 고향 이산현에서 살수가 없게 되자 울산으로 이사 왔다.
방도리(方島里)는 사방(四方)의 방(方)과 목도(目島)의 도(島)를 합성하여 만든 이름이다. 방도리에서 어부와 인어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동백도설화(冬柏島說話)라 하여 용왕의 딸인 인어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어부에 대한 보은담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에 마음씨 착한 청년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다보니 그물에 인어가 들어 있었다. 다른 어부들은 인어를 팔아 돈을 벌 수 있다고 기대에 부풀었지만 이 어부는 인어가 불쌍해 풀어 주자고 하였다. 이 어부는 다른 어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어를 구해 주고 다른 어부들로부터 매를 맞고 쓰러졌다.
어부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부는 용궁에 있었다. 인어는 용왕의 딸이었다. 인어는 자신을 구해 준 어부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용궁으로 데려 온 것이다. 용궁에서 다시 만난 인어는 용왕에게 어부와 인간 세상에 나가 살겠다고 하였고 용왕은 딸을 위해 울산의 온산에 섬을 만들었다. 육지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물길이 하늘 높이 치솟으며 바다로부터 섬이 솟아올라와 지금 모양의 목도가 되었다. 이후 섬에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갔다.」
현재 목도는 쌍용정유공장에 둘러싸여 외롭게 홀로 떠 있다. 낚시꾼들이 가끔씩 찾아 와서 외로움을 달래 주고 있다.
예로부터 호수처럼 맑고 잔잔한 바다에 떠오르는 달을 월호(月湖)라 하고 그 월호에서의 가을 달맞이가 경승(勝景)이라 하였고 병풍처럼 펼쳐진 송림 위에 달이 떠오르면 조각배를 타고 달구경을 하면서 뱃놀이를 즐겼던 곳으로 차성팔경 중 하나가 임랑해수욕장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옛 문헌에서는 「동산(東山) 위에 달이 떴으니 월호(月湖)에 선유(船遊)한다 」라고 예찬하였다.
임랑해수욕장은 정관에서 흘러온 좌광천(임랑천)이 유입하여 모래톱을 형성하면서 생긴 해수욕장으로 모래사장 길이가 1km이다. 예전에는 백사장 주변이 노송으로 병풍처럼 푸른 숲을 이루었고 좌광천이 맑아 쏘가리 천렵(川獵)을 했다고 한다. 현재는 정관 신도시로 인하여 수질이 좋지는 않고 송림도 많이 사라졌지만 요즈음 문화에 맞는 볼거리와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임랑교 아래 정관에서 흘러온 좌광천의 모습임랑해수욕장 방파제 사이를 지나 동해로 유입하는 좌광천임랑교 상부임랑교에서 바라 본 좌광천
임랑해수욕장은 울주군 서생면과 경계를 두는 기장군 장안읍에 위치하고 있는 해수욕장으로 여름철이면 피서객이 많이 찾는 해수욕장이다. 특히 최근에는 캠핑 붐으로 인해 사계절 내내 여행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또한 부산 갈맷길의 출발점이기에 중년의 부부, 중장년층 단체 관광객 등 트레킹을 찾는 이들과 정관과 임랑 사이에 흐르는 좌광천을 따라 달리는 MTB 및 사이클 동호회 인으로 분주하고 역동적인 해수욕장이다.
청암 박태준 기념관
여행에 여유가 있다면 기업가이자 정치가인 청암 박태준 기념관을 둘러보는 것도 솔솔한 재미가 있다.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의 고향이 임랑이고 생가가 여기에 있다. 임랑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기념관에서 60 ~ 70년대 대한민국의 경제적 상황, 시대모습 그리고 포항제철(포스코) 창립, 성장과정을 엿 볼 수 있다.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의 젊음 때의 모습기념관 옆에 위치하고 있는 박태준 전 회장의 생가임랑해수욕장 민박주변의 골목길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잔에 파도를 감상하고자 하면 가수 정훈희가 운영하는 카페 Garden Flowers(꽃밭에서)를 찾는 곳도 좋을 듯하다. 카페 이름 "꽃밭에서는" 그녀가 불렸던 노래 제목이다. 최근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애잔한 심금을 울리는 노래 “안개”는 정훈희와 송창식이 듀엣으로 불렀던 노래로서 최근 방문객의 발길이 잦다. 사실 정훈희는 70년대를 대표하는 여자가수로 몇 차례 국제음악대회에서 수상을 했다.
가수 정훈희가 운영하는 카페 Garden Flowers(꽃밭에서)
임랑(林浪)의 옛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당시 임계안(林溪岸) 뒷산에 왜적들이 성을 쌓고 이 성을 임성(林城)이라 하였는데 그 후 유(柳)씨, 방(方)씨, 김(金)씨, 박(朴)씨, 정(鄭)씨 등이 정착하여 이들 다섯 성씨가 본 마을의 숲이 울창하고 물결이 아름답다 하여 수풀 임(林)자와 물결 랑(浪)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임랑(林浪)의 옛 이름은 ‘임을랑(林乙浪)’이며 임랑으로 바뀐 것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마을에 숲이 우거지고 바다 물결이 아름다워, ‘수풀 림(林)’ 자와 ‘물결 랑(浪)’ 자를 따서 불렀다고 한다.
함안(咸安)은 6가야 중 아라가야의 나라이자 생육신 중 한사람인 조려(趙旅, 1420~1489)가 태어난 곳이다. 그리고 이 지역 토착 세거 성씨 중 함안(파산, 巴山) 趙氏가 있는데 조려는 함안 조씨이고 현재 대부분 어계(漁溪) 조려의 후손들이다. 군복IC에서 나와 국도 79번을 따라서 가다가 지방도로 1004번로 진입하여 원북 마을에 다다르면 도로 우측에는 서산서원, 조열 신도비각, 쌍절각 그리고 도로 좌측 청풍대(淸風臺)라는 언덕 옆에 채미정이 있다.
군북면 원북 마을에 위치한 채미정(採薇亭)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온 후 조려(趙旅)가 여생을 보낸 곳으로 이곳 유림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1693년에 건립하였다. 6.25 전쟁 때 소실되었는데 1954년에 재건하였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八作)지붕 겹처마로 정면 2칸, 측면2칸의 방이 한가운데 있고 나머지는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연못이 있어 당시 조경 구조를 엿 볼 수 있다. 채미정 현판 오른편에 백세, 외편에 청풍이란 현판이 각각 있다.
어계(漁溪) 조려(趙旅)는 자가 주옹(主翁), 호는 어계은자(漁溪隱者),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단종 때 생육신[김시습(金時習),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중 한사람으로 계유정난 이후 세조의 왕위찬탈에 격분하여 조정을 등지고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당시 조려(趙旅)는 1453년(단종1)에 성균관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채미정( 採薇亭 ) 전경
고향에 온 후 조려(趙旅)는 스스로 어계처사(漁溪處士)라 하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는데 그의 시문(詩文)에 고사리를 뜯어 먹으면서 은둔생활(隱遁生活)을 하겠다는 의미의 구절이 있어 그의 삶을 엿 볼 수 있다. 어계(漁溪)는 함안 방어산에서 발원하여 원북으로 흘러가는 하천으로 원래 이름은 원북계(院北溪)이다. 조려가 계유정란 때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 하천이름을 어계라 칭하였다.
채미정 뒤편 언덕이 청풍대이고 문풍루가 보인다
채미(採薇)는 중국 주나라 무왕 때 상나라에서 주나라로 왕권이 바뀌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비(고사리처럼 생긴 나물)를 채취하여 연명하다가 이거마저 거부하여 아사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조려의 지절과 비견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채미정 앞쪽 멀리 보이는 산이 백이산(伯夷山)이다. 백이산(伯夷山, 369m)은 진주시와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이전 지명은 서산(西山), 쌍안산(雙安山)이었으나 후세 사람들이 백이산이라고 불렀다.
채미정 출입문
채미정 현판 오른편에 백세, 왼편에 청풍이란 현판이 있다.채미정(採薇亭)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八作)지붕 겹처마로 정면 2칸, 측면2칸의 방이 한가운데 있고 나머지는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1699년(숙종25)에 단종의 왕위가 복위되자 이조참판을 추증(追贈)하고 1703년 경상도 유생 곽억령(郭抑齡) 등이 상소를 올려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의 예에 따라 생육신인 조려 등도 사당을 세워 제향하도록 조정에 건의하여 1706년 생전에 기거하던 백이산 아래 함안군 원북동에 사당을 세워 김시습 등과 함께 제향하였다. 사당은 1713년(숙종 39)에 사액(賜額)되어 서산 서원(西山書院)으로 이름 지어졌다.
바람의 소리를 듣는 누, 청풍대 문풍루(聞風樓)으로 가는 길
1781(정조 5년)에 그의 정충(精忠)과 고절(高節)에 감격하여 그에게 이조판서란 벼슬과 정절공(靖節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려 그의 충혼(忠魂)과 의백(義魄)을 위로하였다. 저서로는 『어계집(漁溪集)』이 전한다. 서산 서원(西山書院)은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1902년에 어계의 중종과 유림들이 다시 서원을 건립하였다. 1984년에 사촌리에서 이곳 원북리로 이전하였다.
청풍대에 위치하고 있는 문풍루(聞風樓)
조려 묘(趙旅墓)는 함안군 법수면 강주리 응암 마을 입구 산기슭에 있다.
충의공(忠毅公)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와 쌍절각(雙節閣)
문풍루(聞風樓)에서 본 조종도 ( 趙宗道 )의 쌍절각(雙節閣)
조종도(趙宗道)의 쌍절각(雙節閣)은 정면2칸 측면1칸 팔작지붕의 다포집이고채미정 도로 건너편에 있다. 쌍절각(雙節閣)에는 조종도와 그의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 비가 있는데 빛바랜 단청과 지붕 위의 와솔에서 충의(忠毅)와 열녀(烈女)의 절개가 느껴진다. 조종도(趙宗道, 1537]∼1597)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남명 조식의 대표적인 제자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쌍절각(雙節閣) 출입문
생육신(生六臣) 어계은자(漁溪隱者) 조려(趙旅)의 오세손으로 1537년(중종 32) 함안 원북동(院北洞)에서 출생하여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당시 가족까지 이끌고 안의(安義)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인솔한 적군과 싸우다가 음력 8월 18일 전사하였다. 그의 나이 둘째 아들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날 그의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도 자결하였다. 둘째 아들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쌍절각 ( 雙節閣 ) 은 정면 2 칸 측면 1 칸 팔작지붕의 다포집이다.쌍절각(雙節閣)에는 조종도와 그의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 비가 있는데 빛바랜 단청과 지붕 위의 와솔에서 충의(忠毅)와 열녀(烈女)의 절개가 느껴진다.
1616년(광해 8년) 조정에서 충신증자헌대부(忠臣贈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충의공(忠毅公) 함양군수지문(咸陽郡守之門)이란 정려(旌閭)를 내렸고 1732년(영조8년) 그의 부인에게도 열녀충의공(烈女忠毅公) 조종도처(趙宗道妻) 증정부인(贈貞夫人) 전의이씨지문(全義李氏之門)으로 동상정려(仝上旌閭)를 내렸다.
충신조종도려표비그의 부인 열녀충의공(烈女忠毅公) 비가 파손되어 더욱 애절하다.
조종도의 선비관은 만물 가운데 가장 영적인 존재가 사람이고, 사람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것이 선비이다. 국가에 재난이 있으면 관직의 유무를 막론하고 선비 된 사람은 평소 닦은 바대로 행하여 천 리의 당당함을 지켜야 한다. 세상을 잊고 자신만을 깨끗이 간직하는 것을 능사로 삼아 명예만 추구하려는 사람은 옳은 것이 아니며, 문무를 겸하고서 옳은 일에 몸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 올바른 선비이다.
고려 공조전서(工曹典書) 금은(琴隱) 조열(趙悅) 신도비각(神道碑閣)
금은(琴隱) 조열(趙悅)신도비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의 다포집으로 후손들이 세운 비각이다. 충의공(忠毅公)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의 쌍절각(雙節閣) 옆에 자리 잡고 있다.
금은(琴隱) 조열(趙悅)선생의 신도비각 출입문신도비각은 정면 3 칸 , 측면 1 칸의 팔작지붕의 다포집이다.
조열(趙悅) 본관은 함안(咸安). 호는 금은(琴隱)으로 아버지는 판도판서 조천계(趙天啓)이다. 고려공민왕(恭愍王) 때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면서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등과 교유하였고,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함안으로 낙향하여 거문고와 서화로 소일하였다. 조선 건국 후 출사를 권유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또한 태조3년 한양궁이 준공되어 낙성연(落成宴)을 열면서 팔도에 명하여 금서가무(琴書歌舞)에 능한 조열을 초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조열(趙悅)은 아들 넷을 두었다. 큰아들 조이(趙彛)는 신호위(神虎衛)를 지냈고, 둘째 조녕(趙寧)은 현감을 셋째는 조항(趙恒)이고, 넷째는 조안(趙安)이다. 조안의 아들이 어계(漁溪) 조려(趙旅)이다.
『함주지(咸州誌)』 인물조에서는 처음 함안의 평광(平廣)에 살다가 뒤에 산팔리(山八里) 원북동(院北洞)으로 옮겨 살았다고만 전한다. 조열의 행적은 맹사성(孟思誠)이 지은 만은(晩隱) 홍재(洪載)의 행장이 전해지면서 보다 자세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홍재의 행장에는 어느 날 밤 판서 성만용(成萬庸), 평리사(評理事) 변빈(卞贇), 박사 정몽주(鄭夢周), 전서 김성목(金成牧) 등이 대사성(大司成) 이색(李穡) 등과 함께 술을 마시며 회포를 논하였다. 이색이 말하기를 “비간(比干)은 죽었고 미자(微子)는 떠났으며 기자(箕子)는 종이 되었으니, 우리도 각자 뜻을 따라서 처신하자.”고 하여 결의하였다고 한다.
홍재는 귀향하기로 마음먹고 삼가(三嘉) 대평촌(大坪村)으로 우거(寓居)하여 이곳을 두심동(杜尋洞)이라 하였다. 이때 함안에 우거하고 있던 조열과 이오가 이곳을 서로 왕래하면서 시사(時事)를 걱정하였다고 한다. 고려가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세 사람이 모여서 울며 비가(悲歌)를 부르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맥수(麥秀), 채미(採薇)의 비가와 비유하였다. 후인들이 그 의리를 흠모하여 운구 서원(雲衢書院)을 지어 봉향하였다고 한다.
저서로 문집인 『금은 실기(琴隱實記)』가 있고 묘는 함안군 군북면 하림1길 에 있다.
어계(漁溪)조려(趙旅) 생가(生家)
어계(漁溪) 생가(生家)는 조려가 태어난 집으로 벼슬을 포기하고 낙향한 뒤 은거했던 곳이다. 채미정(採薇亭)에서 마을길을 따라 15분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어계 생가(漁溪生家) 가는 길은 채미정(採薇亭)에서 마을길을 따라 15 분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어계(漁溪)는 함안 방어산에서 발원하여 원북으로 흘러가는 하천으로 원래 이름은 원북계(院北溪)이다. 조려가 계유정란 때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 어계라 칭하였다.
어계 생가(漁溪生家)는 대문채, 원북재,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문채는 3칸으로 중앙의 솟을대문에 좌우에 방이 있다. 주 건물인 원북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일자형 평면으로 부엌은 없고 침실, 대청으로 되어 있어 별채이거나 사랑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건물 뒤편 사당에서는 3월 9일(초정일)에 조려와 그의 부인에게 항례를 치르고 있다. 그리고 어계(漁溪) 조려(趙旅)가 사용한 죽장(竹丈)과 동제향로(銅製香爐)가 보관되어 있다.
어계 생가(漁溪生家)의 대문채는 3칸으로 중앙의 솟을대문에 좌우에 방이 있다.
함안 조씨는 조정(趙鼎)을 시조로 하는 함안 지역의 토착 세거 성씨로 파산 조씨(巴山趙氏)' 라고도 한다. 시조 조정(趙鼎) 이후로 함안에 정착하여 대를 이어 살아서 함안 지역 최대의 성족(盛族)으로 발전한 성씨이다. 현재 함안에 세거하고 있는 함안 조씨는 대부분 어계조려의 후손들이다.
어계 생가에 있는 은행나무는 수령 500년, 수고 20m, 나무물레 340cm이다.
조정의 자는 우보(禹寶)이고, 호는 모당(慕唐)이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중국 후당인(後唐人)으로 신라 말에 두 아우 조부(趙釜)와 조당(趙鐺)을 데리고 한반도로 온 후 왕건(王建)을 도와 합천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931년(고려 태조 14) 고창성(古昌城 지금의 안동)에서 후백제의 견훤(甄萱) 군사를 대파하여 동경(東京) 관할 하에 있던 주현(州縣)의 항복을 받아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그가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대장군 원윤(元尹)에 오름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함안을 본관으로 하였다.
문헌으로 고증할 수 있는 함안과 관계가 있는 최초 인물은 고려 말의 금은조열이다.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에 있는 함안 조씨의 문중 묘역에서 가장 윗대가 금은 조열이다.
원북(院北)은 본동, 태실[台谷], 새절골[新寺谷] 등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있고 지명은 어속원(魚束院)의 북쪽에 있다 하여 ‘원북’이라 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위양지(位良池)는 밀양 부북면 위양리 동쪽에 위치한 저수지로 가운데에 5개의 작은 섬과 정자로 구성되어 있고 신라시대 때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된 저수지다. 이 저수지의 물로 아래쪽에 있는 넓은 들판에 물을 대어 위양리 일대에 농사를 지었다. 백성들을 위한다는 의미에서 위양지(位良池)라고도 하고 또는 양양지(陽良地)라고도 부른다.
위양지의 제방(堤防) 둘레는 원래 1.7km에 달하는 저수지였으나 지금은 수리구역(水利區域)의 제방으로 바뀌어 제방 길이가 160m 로 줄어들었다.
위양지 작은 섬에 있는 정자, 완재정(宛在亭)
『밀주구지(密州舊誌)』"위양동 조(位良洞 條)"에 의하면 인조 12년(1634년)에 임진왜란으로 훼철(毁撤)된 제방을 부사(府使) 이유달(李惟達)이 수축(修築)한 기록이 남아 있다.
완재정(宛在亭)은 위양지 작은 섬에 있는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에 팔작지붕 건물로 온돌방과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고 입향조(入鄕祖)인 안동 권씨 위양 종중의 학산(鶴山) 권삼변(權三變, 1577~1645)을 추모하기 위해 1900년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당시 권삼변은 위양지 섬 중에 한곳에 정자를 세우고 싶어 미리 완재(宛在)라는 정자 이름까지 지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250년 지난 후, 안동 권씨 후손들이 섬 위에 정자를 지었고 이름도 완재정(宛在亭)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완재정(宛在亭)에 배로 출입했으나 후대에 다리를 놓아 아무 때나 접근이 가능토록 되었다.
매년 5월이면 위양지 제방은 이팝나무 꽃이 만발하여 꽃구름을 만들고 멀리서는 흰 눈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한번 핀 꽃은 20일 이상 은은한 향기를 발산하여 천지를 진동시킨다. 또한 팽나무, 왕버들 나무가 조화롭게 심어져 있어 싱그러운 녹음과 하얀 꽃 세상을 만든다.
이팝나무는 소복이 쌓인 꽃송이가 사발에 얹힌 흰 쌀밥처럼 보여서, 조선시대 왕족이나 양반 李氏들만 먹는다고 이밥나무로 불렷다가 이팝나무으로 변했다. 또는 꽃이 입하 때 핀다하여 입하목(入夏木)으로 불렸다가, 입하가 연음되어 이파, 이팝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고욤나무
이팝나무는 한해의 풍년을 점치는 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꽃이 많이 필 때는 그해는 풍년이고 적게 필 때는 흉년이 든다고 한다.
이팝나무와 관련 전설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열여덟에 시집온 착한 며느리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시부모님께 순종하며 쉴 틈 없이 집안일을 하고 살았지만 시어머니는 끊임없이 트집을 잡고 구박하며 시집살이를 시켰다. 온 동네 사람들은 이 며느리를 칭송하는 한편 동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큰 제사가 있어 며느리는 조상들께 드리는 쌀밥을 짓게 되었다. 항상 잡곡만 짓다가 모처럼 쌀밥을 지으려니 혹 밥을 잘못지어 시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을 것이 겁난 며느리는 밥에 뜸이 잘들었나 밥알 몇 개를 떠서 먹었다. 그러나 공교롭게 그 순간 시어머니가 부엌에 들어왔다가 그 광경을 보고 제사에 쓸 멧밥을 며느리가 먼저 퍼먹는다며 온갖 학대를 하였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며느리는 그 길로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어 죽었고 이듬해 이 며느리가 묻힌 무덤가에서 나무가 자라더니 흰 꽃을 나무 가득 피워냈다. 이밥에 한이 맺힌 며느리가 죽어서 된 나무라 하여 동네 사람들은 이 나무를 이팝나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