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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고속도로 군북 IC에서 빠져나와 의령을 향해 출발하면 먼발치에서 맞이하는 것이 의령관문이고 의령교로 건너는 강이 남강(南江)이다. 그리고 가마솥을 닮은 바위 하나가 남강에 있으니 그 이름이 솥 바위(정암 : 鼎巖). 그래서 의령을 찾는 여행객이면 먼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의 승전지인 정암진과 솥 바위를 둘러보는 것이 좋다.

정암 철교와 의령교

정암진은 정암루(鼎巖樓)에서 둘러보는 것과 정암 철교 인도에서 바라보는 것이 각각 즐거움이 다르다. 솥 바위 또한 원거리와 근거리에서 보는 맛이 다르다. 일찍이 남강은 뛰어난 경치로 인해 선비와 가객들이 찾아 시를 읊고 자연을 노래했으리라. 또한 나룻배를 타고 왕래했던 교통의 요충지였던 정암진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왜적을 몰살시킨 승전지로 유명하다.

정암 철교

정암 철교는 경남 의령군과 함안군을 연결하는 교량으로서 1935년에 준공되었다. 6.25전쟁으로 파괴된 후 1958년 남아있던 2개의 경간을 그대로 살려 상부는 철골트러스 형식으로 재건하였다.

정암루(鼎巖樓)

정면 3, 측면 2칸 팔작지붕 겹처마 익공양식의 정암루는 자연암반 위에 장대석 기단을 놓아 지어졌다. 기둥은 원기둥으로, 누하주는 화강석을, 누상주는 목재를 사용하였다. 계단은 전면 중앙 한 곳에 두었고 기둥 상부 공포는 연화로 장식된 이익공을 결구하여 겹처마로 구성하였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계자난간을 둘렸다.

현재 정암루 자리는 조서 중기 대제학을 지낸 용재(容齋) 이행(李荇)이 귀양살이를 하며 지은 취원루(聚遠樓)가 있었던 곳으로 1935년 임진왜란 승첩지를 기리고자 지었다. 그 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정암루가 소실되었으나 1963년에 재건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정암진(鼎巖津, 정암나루) 전투

남강은 함양군 서상면 남덕유산에서 발원하여 진주시를 거쳐 함안군과 의령군의 경계를 따라 흐르다가 낙동강에 합류한다낙동강과 더불어 일찍 뱃길이 열렸던 남강은 임진왜란 때 왜적이 호남으로 진출하는 침략의 길이 되었고 의령의 관문인 정암진은 홍의장군 곽재우의 최대 승첩지 중 하나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장군은 1592(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같은 해 5월 의령 정암진(鼎巖津)에서 왜적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의병 활동 초기에는 의령 정암진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 본부를 두고 의령을 고수하면서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삼으면서 유사시에 대처하였다. 당시 곽재우는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에게 위엄을 보였으며, 의병(疑兵, 적을 혼란스럽게 하는 위장 병사)을 둔 위장 전술과 적을 유인하는 매복 작전, 그리고 유격전 등을 펼쳐 가며 적을 섬멸하였다.

정암 철교에서 바라본 정암루와 솥 바위

의병 활동 초기에는 의령 정암진(鼎巖津)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 본부를 설치하여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삼아 유사시에 대처했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疑兵, 적이 의심하도록 하기 위한 위장 병사)을 구사해 위장 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했다. 그리고 적을 유인해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솥 바위는 임진왜란 당시의 격전지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1592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적을 맞아 2,000인에 이르는 병력을 휘하에 거느리고 대승을 거둠으로써 왜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정암 철교에서 바라본 정암진

정암(鼎巖, 솥바위)

정암(鼎巖)은 가마솥 다리처럼 세 개의 다리를 뻗고 물 위에 드러난 암석이 마치 솥뚜껑처럼 보인다고 해서 생긴 명칭이고 솥바위라고 부른다. 한자로 정()'솥 정'이라 하고, ()'바위 암'이다외형을 살펴보면 약 20ton 가량의 커다란 바위가 아래를 받치고 있고, 그 위로 높이 8m가량의 작은 바위가 탑 층을 이루고 있다조선 말기 한 도사가 이 바위 수면 아래 세 개의 발이 가리키는 주변 20(8)에 큰 부자가 나올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북쪽 의령군 정곡면에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 남쪽 진주 지수면에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 GS그룹 창업주 허만정 회장, 동남쪽 함안 군북면에 효성 창업주 조홍제 회장 등 4명의 재벌 총수가 태어났다. 그래서 창업과 입시를 목전에 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기도를 한다. 의령에는 부와 성공을 상징하는 3대 바위가 있는데  "솥 바위", "탑 바위"와 "코끼리 바위"이다.

여기서 이병철 생가 정곡면 중교리 까지는 9.410여분 정도 소요된다그곳에서 태어난 이병철은 결혼해 분가하기 전까지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 회장도 의령 친할머니 슬하에서 3살까지 자랐다. 1,907(577) 크기의 생가는 남서향으로 크게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된 한옥이다. 대문에서 오른쪽으로는 큰 바위가 있고, 뒤쪽으로 대나무 숲이 있는 구조다. 마당에는 안채 쪽과 대문 쪽에 2개의 우물이 있고 곳곳에 벽오동과 회화나무가 있다.

지수면 승산리 지수초등학교에는 1921년 개교 당시 1회 입학생이던 LG 창업주 구인회 회장, 효성 창업주 조홍제 회장,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함께 심고 가꾼 소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부자 소나무'로 불린다. 지수초등학교는 학생 수 감소로 2009년 인근 송정초교와 통합됐다. 옛 지수초교는 ‘K-기업가정신센터로 변모했다.

창업주 4인의 인연

조홍제 회장은 유년 시절 의령에 있는 이병철 회장의 형 이병각과 교류를 많이 해 자연스레 친구 동생인 이병철 회장도 알게 됐다. 이병각은 진주에서 제분업 사업을, 마산에서 양조장 사업도 했다. 이병각의 장인 하겸진은 진주 수곡면 출신이다. 조홍제 회장의 장인 하세진 역시 진주 수곡면 출신으로 하겸진과는 친척이다. 조홍제 회장은 해방 후 이병철 회장이 서울에서 설립한 삼성물산공사에 투자를 해 동업을 했다.

조홍제 회장과 구인회 회장과의 관계는 동네 대항 축구 시합을 하면서 교류해 이웃한 마을 친구로 지냈다. 서울에 있는 중앙고등학교 2학년까지 함께 보냈다. 그 후 각자 사업을 하면서도 교류는 왕성해 구인회가 플라스틱 연구를 할 때 일본에서 도서를 구입해 주는 등 구씨 집안과 아주 절친한 관계로 지내왔다.

구인회 회장과 이병철 회장은 1922년 지수보통학교 3학년 1학기를 함께 공부했다. 이병철 회장이 생활한 매형 집이 구인회 회장 본가와 옆집이라 일찍 결혼한 구인회 회장이 의령에서 유학 온 이병철 회장을 불러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1957년 구인회 회장의 3남 구자학과 이병철 회장의 차녀가 결혼해 두 사람은 사돈 관계가 되었다. 1960년대 두 사람은 방송사업 동업을 한 인연도 있다.

허만정 회장은 194512, 부산에서 무역업을 하던 구인회 회장을 찾아가 사돈이 하는 사업에 자금을 투자하겠소, 그리고 내 셋째 아들 준구를 맡기겠소.” “준구야, 경영은 구씨 집안이 잘한다. 나서지 말거라하는 가르침을 남겼다이것이 구씨와 허씨의 첫 공동사업의 진행이고 LGGS로 분리하기까지 50년 넘게 불협화음이 없었다.

허만정 회장은 이병철 회장이 부산에서 제일제당을 경영할 때 장남 허정구를 보내면서 삼성에도 자본을 투자했다. 이병철 회장의 매형 허순구가 이웃한 집 허만정 회장과 친척이라 자연스레 이병철 회장과 허만정 회장이 연결된 것으로 보여 진다. 조홍제 회장의 처남 하영진은 허만정 회장의 유고집에 조카관계로 기록되어 있다. 조홍제 회장과 허만정 회장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의령 여씨(宜寧 余氏) 시조제단비(始祖祭壇碑)와 향제시도록(享祭時到錄)

의령 여씨 시조 제단비는 정암루 동쪽 절벽 아래 솥바위 가는 길에 위치하며 의령 여씨 시조 여선재에게 제사를 지내 던 제단에 세워진 비석이다. 1807년에 세워진 비석에는 여선재를 우음곡에 모셨다는 족보의 내용 바탕으로 묘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끝내 찾지못 하였고 우음곡과 뜻이 비슷한 지금의 위치에 제단 비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글은 대사간을 지낸 의성인 김한동(金翰東)이 짓고, 글씨는 단성에 거주하던 선비 합천인 이의선(李宜璿)이 쓴 것이다.

향제시도록의 표제는 시도기(時到記)로 되어 있고 책등에는 향제시도록이라 적혀 있으며, 필사본이다. 여중묵(余重默)의 친필로 보이는 비단일록서(碑壇日錄序)2면이 권두에 실려 있으며, 1면에 178행씩 적혀 있다그 뒤 정서(淨書)되어 있는 본문은 1면당 총 10(평균적으로 120자씩 기록)으로 총 461면이다. 책의 내용은 비단일록 및 시도기의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체 461면 가운데, 비단일록은 4-19면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시도기에 해당하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비단일록은 여중묵이 안동을 출발하는 때인 1807226일로부터 의령 정암에 비석을 세우는 일자인 동년 124일까지 일의 진행 과정 및 관련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다. 1807년으로부터 1943년까지 총 136년간의 기록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 제향과 관련한 지역별 종회의 참여율, 소요된 경비 및 출자 금액 등의 경제 상황, 의령 여씨 가문의 봉선(奉先) 의식 등을 사적인 흐름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써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82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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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읍은 기장군 북부에 위치한 읍으로 장안의 유래는 이 고장의 이름난 사찰인 장안사에서 따온 것으로 생각된다. 한자(漢字)를 보면 길게, 오랫동안의 장()과 편안할 안()을 합하여, 오래도록 편안하고 평화스러운 읍()라는 뜻이다. 불광산(佛光山) 골짜기에서 발원하는 장안천이 역내(域內) 중앙부를 남북으로 관류하고 있고 이를 중심으로 좌우에 명례장안기룡용소반룡월내길천 등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지역  중심은 기룡리 하근마을이다. 장안천은 옛날에는 건천(乾川), 용천(龍川)이라 하였다. 건천은 마르내고, 용천은 미리내다. 모두 머리내로서 큰 내, 으뜸가는 내라는 뜻이다.

옛 부터 이 지역 마을에 다섯 마리의 용이 있는데기룡, 반룡, 용소, 대룡와 개천마을로 이름하여 오룡(五龍)이다. 개천마을에도 용이 있다는 것이다. 오룡 (五龍) 중 용소의 용은 등천하였으니 등천룡이고, 개천의 용은 강속에 누워있으니 와룡이고, 반룡의 용은 등천하려고 몸을 서리고 있는 반룡이고, 대룡의 용은 큰 바위로 화하였으니 대암룡이고, 기룡의 용은 강을 기어가고 있으니 복룡이라는 것이다.

신라 문무왕이 심은 장안리 느티나무

장안읍 장안사로 가는 길의 윗 장안마을 우측에 천년을 살아온 느티나무가 있다. 수령은 1,300년으로 신라 문무왕이 지나가다 심은 나무로 애장왕이 쉬어가기도 하였다는 유서 깊은 노거수다. 높이 25m, 둘레 8m1978년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느티나무로 1999년 산림청에서 새천년을 맞이하여 대표하는 밀레니엄 나무로 지정됐다. 그러나 태풍 "매미" 의 피해를 받아 한쪽 큰 가지가 부러져 예전만큼 풍부한 녹음을 볼 수는 없지만 노쇠 되지 않은 푸르름은 지나가는 이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아홉 공주가 쌓은 우시산국(于尸山國)의 애절한 마지막 왕비 릉(王妃 陵)

장안읍은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에 동래지방을 중심으로 존재한 거칠산국(巨柒山國)과 일정한 정치적 연계를 가지고 존재하였을 것을 생각된다. 그리고 신라에 정복된 이후 신라의 갑화양곡현이 되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16(757)에 이르러서는 기장현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그에 소속되었다. 이 시기 기장현은 동래군의 속현으로 존재하였다.

기룡리 장안초등학교를 지나서 하근마을 기룡다리로 기룡천을 건너 도로좌측의 송림에 옛날 왕비 능이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삼한시대 말엽쯤 오늘날의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에 우시산국(于尸山國)이라는 작은 부족국가가 있었는데 신라의 침략을 받아 병합이 되었다그 침략으로 왕과 왕자는 포로로 잡혀가고 왕비만 아홉 공주를 데리고 탈출하여 지금의 기룡리 근처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곳도 신라의 손길이 뻗쳐 신라군이 왕비와 공주를 찾고 있었다. 왕비와 아홉 공주는 신분을 숨기고 평민으로 가장하여 남의 집 농사일을 도우는 품팔이를 하며 움막집에서 살았다.

지금 왕비 능으로 전해지고 있는 송림은 어느 문중의 소유로 넘어가 나무와 잡목이 무성해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가 되었고 봉분 또한 잡풀이 자라서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는 가운데 왕비는 포로가 되어 끌려간 왕과 왕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 생사 여부에 대한 근심, 걱정과 몸에 익숙지 못한 농사꾼의 고된 일에 몸과 마음이 지쳐 병을 얻어 숨지자 아홉 공주는 어머니 시신을 마당 한가운데 묻고 제각기 흩어져 살았다. 그러나 해마다 3월 보름이면 어머니 무덤가에 모여 치마폭에 흙을 담아 초라한 어머니 무덤을 밤을 꼬박 새워가며 봉분을 쌓았다.

그러고 나서 각자가 장만하여 온 화전과 음식을 차려놓고, 제문을 지어 어머니의 넋을 위로하였다. 해마다 치마폭에 담은 흙으로 쌓은 봉분은 세월이 갈수록 큰 봉분이 되어 왕릉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아홉 공주의 변함없는 효심과 자매간의 깊은 우애가 알려져 아홉 공주가 살고 있던 마을의 부녀들도 그날이 되면 모두 이곳 무덤에 모여서 아홉 공주의 아름다운 행실을 기리며 축제를 하게 되었다부녀자들은 이곳에 모여 아홉 공주의 효성과 우애를 기리는 작문도 하고 작시도 하고 시집살이의 고달픈 사연도 함께 호소하면서 이웃끼리 정도 두텁게 하였다. 이런 아름다운 풍습은 이곳 이웃마을에서 천오백년이나 끊임없이 이어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하여도 해마다 음력 315일이 되면 이러한 풍습은 계속 되었다. 그리고 계를 모아 그 돈으로 좋은 일도 많이 하였고 그 당시의 계 장부와 작문집도 시집간 어느 할머니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이런 좋은 풍습이 계승되지 못하고 사라져 전설로만 남게 되었다. 지금 왕비 능이 있는 송림은 어느 문중의 소유로 넘어가 나무와 잡목이 무성해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가 되었고 봉분 또한 잡풀이 자라서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과연 전설 그대로 이곳이 실제 왕비 능일까? 단지 능과 같이 한 주변 소나무는 알 것이다.

봉분 앞 무궁화꽃이 왕비의 넋을 위로 하듯 만발하게 피어있다.

보부상(褓負商) 배상기(裵常起) 업적을 기린 비석

고리원자력본부에서 임랑해수욕장 방향으로 장안천을 월내교로 건너면 우측에 송림이 울창한 공원이 있는데 명칭이 월내어린이공원이다. 이곳에 보부상 출신이었던 배상기(裵常起)의 업적을 기린 비석 3기가 나란히 서 있다제각각 세운 시기를 달리하면서 동일 인물의 비석 내용도 다르면서 한자리에 있는 것이 독특하다. 그 만큼 이곳에서 배상기의 공덕이 매우크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비석을 통하여 일제강점기 때 보부상(褓負商)의 조직체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배상기(裵常起)란 인물을 알아보면, 1842년 전북 익산 부잣집 종손으로 태어나서 구한말 민란 주모자로 연루되어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면서 보부상 무리에 섞여서 1860년대 월내에 정착하였다. 월내에 정착한 그는 동해안 보부상 최고 수령인 반수(班首)가 되었고 멸치잡이와 젓갈로 많이 번 돈으로 빈민 구제와 장학 사업에 매진했다. 1895년 갑오년 큰 흉년 때는 월내와 좌천 장날마다 가마솥을 장터에 내걸어 굶주린 사람을 구휼했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자금을 대기도 했던 그는 192079세를 일기를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장안읍 용소리 시명산 8부 능선에 있다.

세워진 시기 별로 비석을 살펴보면 1904(고종 8)에 세워진 좌우사 반수 배상기 휼상 영세불망비(左右社 班首 裵常起 恤商 永世不忘碑)이다. 좌우사 반수(左右社 班首)는 보부상 조직의 우두머리 직책이고 비석 전면 양쪽에 새겨진 반수, 접장(接長), 감역(監役) 들은 보부상 조직 직책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좌우사는 조선말기의 보부상 조직이고 반수는 보부상 조직의 우두머리이며 그 아래에 부반수, 주사, 접장, 감역, 공원 등이 있다.

부상(負商)과 보상(褓商)은 각 별개의 행상조합으로 성장하였으나, 1883년 혜상공국이 설치되면서 통합되었고, 1885년 상리국(商理局)으로 개칭되면서 부상을 좌단(左團) 좌사(左社)라 하였고, 보상을 우단(右團) 우사(右社)라고 하였다. 특이하게도 같은 비석의 후면에 다른 이의 공덕이 적혀있다. 즉 후면에는전 주사 접장 김상명 출의 영세불망비(前 主事 接長 金相明 出義 永世不忘碑)라 새기고 김상명이 성금을 낸 일을 기리는 내용이 담고 있다.

두 번째는 1913년에 세워진 비석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계 휼리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契 恤里碑)이다통정대부는 조선시대 문관 정3품 당상관의 품계이다. 비석이 세울 당시는 한일늑약 3년 뒤인 일제강점기 때 통정대부란 관직명을 사용 가능한지가 궁금하다. 비문에는 계를 형성하여 마을을 도운 일을 기리고 있다.

세 번째는 1917년에 세워진 비석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숙 장학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塾 獎學碑)이다. 비문에는 배상기가 글방을 열어 학문을 장려한 일을 기리고 있다.

왼쪽부터 비석명이 "좌우사 반수 배상기 휼상 영세불망비,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숙 장학비,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계 휼리비"이다
좌우사 반수 배상기 휼상 영세불망비(左右社 班首 裵常起 恤商 永世不忘碑)

捐金數千 惠我行賈

수천냥의 재산을 털어서 우리들 행상을 도와주셨네.

片石嵬然 咸曰某甫

우뚝한 한 조각 비석도 한 입으로 반수어른 칭송한다네.

時班首 金應寬 接長 金世洪 監役 明奎員 崔學柱 金大洪

시반수 김응관 접장 김세홍 감역 명규원 최학주 김대홍

전 주사 접장 김상명 출의 영세불망비(前 主事 接長 金相明 出義 永世不忘碑)

五百其緡 亦云不鮮

오백 꿰미의 돈이란 결코 적지 않나니

惟我賈民 豈忘少選

바라건대 우리 상인들 어찌 잠시라도 잊을소냐!

公員 朴璋鎭 朴泰邠 李起湊 張盛祚

공원 박장진 박태분 이기진 장성조

甲辰四月日立

갑진년(1904) 4월 일 세우다.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숙 장학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塾 獎學碑) 전면

疎財捐義 惠及我蒙

재화를 트이고 의연금 내놓으니 은덕이 우리 학생에게 이르렀도다.

春秋絃誦 里巷西東

춘추로 매번 책 읽고 외는 소리 골목마다 여기저기 들려온다네.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숙 장학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塾 獎學碑) 후면

丁巳五月二十五日立

정사년(1917) 5월 25일 세우다.

監董 秋斗高 金埰洙 朱在昊 張守珠

감동 추두고 김채수 주재호 장수주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계 휼리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契 恤里碑) 전면

坊境頌績 社旅竪功

마을에는 그의 공적 칭송하고 결사의 사람들 공을 치켜세우네.

養逆無憾 我深賴公

여행객 숙박에 유감없으니 우리가 공의 힘을 깊이 입었던 탓이라네.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계 휼리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契 恤里碑) 후면

大正貳年癸丑六月貳拾日

대정 2년(1913) 계축년 6월 20일

機張郡中北面月內洞西里契立碑

기장군 중북면 월내동 서리계에서 세우다.

有司 南順宗 朱仁權 李載成 韓桓 朴潤浩 金守萬

유사 남순종 주인권 이재성 한환 박윤호 김수만

월내마을은 월래포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고 월래포는 기장의 9대 포구(무지포, 이을포, 기을포, 동백포, 공수포, 기포, 독이포, 월래포, 화사을포) 중 하나다. 월내의 옛 이름은 월래(月來). 월래의 은 울타리의 과 같은 뜻이라고 한다. 즉 방어를 위한 책(), ()을 뜻한다. 월래의 는 내()라고도 표기한다. , 래는 나(, ), (), (), ()와 같은 의미로 나라[], (), () 등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월내, 월래는 성책을 가진 마을의 의미.

예전 디젤기관차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서생역이 경전철인 동해선으로 변경됨으로써 역사가 새 건물로 바뀌었다. 옛 것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옛 건물을 찾고 거기서 옛 정서와 지난 추억을 돌이켜 본다.

구 서생역사 부속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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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면 신평리에 위치하고 있는 신평소공원은 해안가에 조성한 조그마한 간이공원이다. 20092월 착공하여 20104월에 준공되었고 배 조형 전망대를 비롯하여 팔각정자, 야외무대 등이 구성되어 있다. 신평소공원 앞 해변에는 크고 넓고 긴 암반과 바위가 아름답고 멋있다. 주변에는 여느 바닷가처럼 카페가 즐비한데 커피 한잔에 바다풍광을 즐기는 여행객이 많이 온다.

그리고 바다 절경 중 하나가 크고 넓은 암반의 윷판대(擲柶臺)이다.

척사대(擲柶臺)라 하고 윷바위 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유래를 살펴보면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우리나라 장수와 왜나라 장수가 몇 날을 겨루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아 윷놀이로 승부를 결정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바위에 윷판을 칼로 새기고 종일 겨루어도 승부가 나지 않고 저녁이 되자, 왜장이 바다 쪽으로 서서 윷판이 잘 보이도록 깊고 굵게 새기고() 있을 때 우리 장수가 왜장을 발길로 차서 바다에 던져버렸다() 하여 이곳을() 척사대로 불렀다고 전한다. ㅎ ㅎ 반칙 아니 인가~

카페 솔 앞에 있는 윷판대 안내판으로 관리 부족으로 잡풀에 묻혀있어 안타깝다.
윷판대로 추정하고 있는 암반

신평리(新平里)는 일광면의 동쪽 해안에 위치하여 북으로는 칠암리와 원리, 서쪽과 남쪽으로는 동백리와 접한다. 옛 이름은 새들, 이를 한자로 표기한 지명이다. 평탄한 들 가운데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새들은 새버든, 새버들이라고도 하며 새각단이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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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곶(艮絶串) 우리나라 육지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으로 매년 새해 해맞이 축제를 개최하고 서생면 대송(大松)마을에 있는 곶이다. 이곳에서는 영일만의 호미곶 보다 1, 정동진보다도 5분 일찍 해돋이가 시작되고 매년 1231일에서 11일로 넘어가는 날에는 간절곶 해맞이축제가 열린다. 1231일 전야행사부터 시작하여 11일 재야행사까지 이어지며 관광객이 참여하는 레크리에이션, 가요제, 콘서트, 부대행사 등이 열려 특별한 신년맞이를 경험할 수 있다.

신암에서 바라본 간절곶

간절곶이라는 이름은 먼 바다를 항해하는 어부들이 동북방이나 서남방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지형이 뾰족하고 긴 간짓대(대나무 장대)]처럼 바다로 길게 뻗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유래한 지명이다. 한자로는 艮絶이라 표기한다. 간절곶을 조선 초기 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길곶(爾吉串)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가 가지고 있는 뜻은 넓다이며 길()길다라는 뜻으로 역시 길게 튀어나왔다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1918년에 제작된 조선오만분일지형도(朝鮮五方分一地形圖)에는 간절갑(艮絶岬)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기운을 억누르기 위한 것 이었다.

간절곶은 서쪽 봉화산(烽火山) 산줄기가 동쪽으로 완경사를 이루다가 이곳에 이르면 매우 평탄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대부분의 해안가는 바위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곳에서는 해안 절벽이 없다. 봉화산에는 조선 전기에 설치 된 봉수대가 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이곳에는 항로를 인도하는 등대가 있었다.
이 때문에 2차 대전 때는 미군이 등대를 여러 번 폭격해 주위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등대는 광복 후 다시 복원돼 지금까지 운영이 되고 있다.

간절곶은 해맞이공원으로 조성되어 있고 주목할 만한 조형물이 있다. 바로 카보다호카(Cabo da Roca) 돌탑이다. 이 돌탑은 포르투갈 리스보아주의 관광도시인 신트라에 있는 카보다호카(일명 호카) 십자가 기념비를 모방한 돌탑이다. 신트라는 포르투갈 최서단(유럽대륙 최서단)에 위치하고 이곳의 곶의 이름이 카보다호카다.

돌탑에는 포르투갈 시인 루이스 카몽이스의 말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가 있고 지리적 위치, 신트라의 상징 로고 및 좌표와 고도가 새겨져 있다. 차이점은 돌탑의 상부에는 십자가가 없다.

카보다호카(Cabo da Roca) 돌탑으로 포르투갈 리스보아주의 관광도시인 신트라市에 있는 카보다호카(일명 호카) 십자가 기념비를 모방한 돌탑이다.
돌탑에는 포르투갈 시인 루이스 카몽이스의 말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가 있고 지리적 위치, 신트라의 상징 로고 및 좌표와 고도가 새겨져 있다.

한반도 동해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대송(大松)마을은 앞이 확 트여 수평선을 가장 넓게 볼 수 있고 뒤로는 송림이 우거져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이 마을의 간절곶이 전국 명소가 되면서 마을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간절곶의 낭끝 바위는 가장 돌출 지역으로 이곳에서 해를 보는 것이 가장 빨리 볼 수 있다하여 명소가 되었다그러나 간절곶 앞 바다는 지형적으로 돌출지역이 되어 해류가 급해 옛날에는 이 해역을 지나는 배들이 많이 침몰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우체통인 소망우체통으로 너비가 약 2.4m, 높이가 5m로 사진 명소로도 유명한데 실제로 운영되고 있어 엽서를 넣으면 전국으로 발송이 된다. 느린 우체통은 아니며 남울산 우체국에서 매일 한 차례씩 우편물을 수집해 보내준다.

대송(大松)마을의 이전 명칭은 대륙동(大陸洞)이었는데 대운산 줄기가 바다로 뻗고 있어 이의 대()자와, 육지의 끝(간절곶)이 튀어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후 대륙동의 대()자와 송정동(松亭洞)의 송()자를 따서 대송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이곳에는 항로를 인도하는 등대가 있었다. 이 때문에 2차 대전 때는 미군이 등대를 여러 번 폭격해 주위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등대는 광복 후 다시 복원돼 지금까지 운영이 되고 있다.

개발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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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은 의병의 고장으로 곽재우 장군이 태어났고 장군을 기리는 유적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충익사(忠翼祀)와 현고수(懸鼓樹), 정암나루 그리고 생가이다. 충익사는 곽재우 장군과 7장령의 위패를 모신 곳이고 현고수는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큰북을 매달아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義兵)을 모았다는 느티나무이다. 그리고 정암나루는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대승을 거둔 곳이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장군과 17장령의 위패를 모신 충익사(忠翼祀)

남해 고속도로 군북 IC에서 내려 10분 가량 달리면 남강을 만난다. 이 남강을 건너면 의령군 하리이고 정암나루와 의령관문을 통과하여 의령천을 따라가면 맞이하는 것이 충익사다. 먼저 의령천 둔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의병교를 건너면 양쪽 기둥을 세워 둥근 고리로 층층이 쌓은 의병탑이 푸른 숲을 뚫고 그 위용을 자랑한다. 매년 의병제 개최 시 의병교와 의병탑을 화려한 오색불꽃으로 장식한다.

양쪽 기둥을 세워 둥근 고리로 층층이 쌓은 의병탑. 매년 의병제 개최 시 의병교와 의병탑을 화려한 오색불꽃으로 장식한다.

충익사는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던 망우당 곽재우 홍의장군과 17장령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충익사는 19781222일에 준공하였고 충익(忠翼)은 숙종이 곽재우 장군에게 내린 시호로서, 은 나라에 충절을 다하고 은 생각이 깊고 멀다는 뜻이다.

충익사 충의문

충익사 충의각(忠義閣,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2)곽재우 장군과 장군 17의 이름, 본관, , 벼슬 등이 적힌 명판을 보관한 곳이다. 원래 이 건물은 1910년도 합천 이씨 문중에서 의령읍 동동리의 관찰사를 지낸 이중하를 기리는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을 1972년 재부산향우회에서 이를 매입하여 이곳으로 옮겨왔다. 앞면 2칸 옆면 1칸 다포양식의 팔작지붕으로 공포의 높이가 매우 높고 화려하며 지붕면적도 넓다. 극락세계에 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상여모양을 본떠 지은 건물이다. 충의각은 어느 한 곳에도 쇠못을 치지 않은 우리나라 전통 목조건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충의각(忠義閣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522 호)은 극락세계에 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상여모양을 본떠 지은 건물이다 .
충의각은  곽재우 장군과 장군  17 의 이름 ,  본관 ,  호 ,  벼슬 등이 적힌 명판을 보관한 곳이다

모과나무(경상남도 기념물 제83) 높이 12m, 밑둘레 4m, 가슴높이 둘레 3.1m로 수령은 약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이는 지금까지 조사된 모과나무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모과나무는 원래 가례면 수성마을을 지켜주고 보호하던 당산나무로 토속신앙의 대상이었으나 1978년에 충익사로 옮겨졌다.

모과나무 ( 경상남도 기념물 제 83 호 )
주목나무로 박정히 전 대통령이 기념식수(1978.12.22)한 나무다.

유곡면 세간리 현고수(懸鼓樹, 천연기념물 제493)

세간리 현고수는 유곡면 세간마을 앞에 위치하고 있는 느티나무로, 나이는 55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15m, 둘레는 7m이다. 이 느티나무가 현고수(懸鼓樹)라고 불리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연유가 있다.

조선(朝鮮) 선조(宣祖) 25(1592) 413일 왜적이 부산포로 침입하자 당시 41세의 유생이었던 곽재우가 422일 이곳 유곡면 세간리 이 느티나무에 큰 북을 매달아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義兵)을 모아 훈련을 시켰다고 하여 이때부터 현고수로 불렸다고 한다.

세간리 현고수(懸鼓樹, 천연기념물 제493호)

망우당 곽재우 생가와 세간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2)

곽재우 생가와 세간리 은행나무

망우당 곽재우 생가는 2005년에 복원한 것으로 조선 초기 건축양식으로 안채, 사랑채, 별당, 큰 곳간, 작은 곳간, 대문, 문간채등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양반가의 집이다. 1592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9일째 되는 날 이곳 곽재우 생가가 있는 마을에서 곽재우장군을 비롯한 17장령들과 함께 책과 붓을 던지고 가재를 던지고 의병을 일으켰다.

망우당 곽재우 생가는  조선초기 건축양식으로 2005 년에 복원함

곽재우(郭再祐)[1552~1617]는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다. 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낸 곽월(郭越), 어머니는 목사(牧使)를 지낸 강응두(姜應斗)의 딸 진주 강씨(晉州姜氏)와 참봉(參奉)을 지낸 허경(許瓊)의 딸 김해 허씨(金海許氏)인데, 곽재우는 진주 강씨의 소생이다. 곽재우의 부인은 만호(萬戶)를 지낸 김행(金行)의 딸 정부인 상산 김씨(商山金氏)이다.

곽재우(郭再祐)1552(명종 7) 경상도 의령현(宜寧縣) 세간리(世干里)에서 출생하였는데 세간리는 곽재우의 외가가 있는 곳으로, 원래 곽재우의 선대는 경상도 현풍현 솔례리(率禮里,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리)에 세거해 왔다. 곽재우는 어려서부터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독서를 즐겼다고 한다. 1569(명종 22) 의령현 세간리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는데, 공부를 하다 여가가 생기면 활쏘기와 말타기를 하거나 병서(兵書)를 익혔다. 1574(선조 7)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부임한 아버지 곽월을 따라 2년 간 배행하였으며, 1578(선조 11)에는 동지사(冬至使)로 임명된 아버지와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관상 보는 사람이 곽재우를 보고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칠 것이라 하였다.

사랑채

1586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묘소가 위치한 신당동(新堂洞,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에서 여묘 살이를 하였다. 1589년 상사(喪事)가 끝난 뒤에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의령현의 기강(岐江) 돈지(遯池)[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마산리]에 정자를 짓고 한평생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안채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즉시 사재를 털어 장사들을 모집한 뒤 의병을 일으켰다. 곽재우는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이름 짓고 위엄을 보이었다. 곽재우는 우선 의령현의 신번현(新繁縣)[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일대]을 왜적으로부터 지켰으며, 이후 연전연승하였다. 곽재우는 처음 의병을 일으켰을 때 군사가 적었으므로, 매복전을 통해 왜적을 물리치니, 이들이 곽재우를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렀다. 특히 곽재우는 1592년에 정암진(鼎巖津) 전투와 제1차 진주성(晉州城) 전투에서 승리하여, 전라도를 수호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617년 세상을 떠났는데, 묘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에 있다.

곳간채

세간리 은행나무는 수령 6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높이 24.5m, 둘레 9.1m이다. 마을의 동편 의병장 곽재우 생가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을 지켜주는 신성한 나무로 믿어지고 있다. 특히 남쪽가지에서 자란 두 개의 짧은 가지(돌기)가 여인의 젖꼭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젖이 나오지 않는 산모들이 찾아와 정성들여 빌면 효력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세간리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제 302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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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4월부터 온산산업 기지개발로 정든 고향을 등져야했던 온산면 10개 법정리와 19개 행정마을의 주민 2,804세대 1만 3,000여명 이주민(실향민)을 위해 울주군 온산읍 화산리 화산근린공원(화산리 869 외 3필지) 정상에 온산이주민 망향비를 2010년 8월 31일 세웠다. 화산근린공원 망향비는 높이 8.5m, 폭 2.5m의 망향비와 함께 대리석을 좌대로 한 동판에 19개 마을의 사진과 유래가 새겨진 전시물이 조성됐다. 전시물은 동판으로 새겨진 마을 전경과 관련 설명으로 이물질 등이 묻어 있어 주기적으로 관리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누군가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오면 온산국가산업공단이라 답해야 한다. 차라리 우리들 고향이 북한이라면 언젠가 통일이 되어갈 수라도 있으련만, 차라리 우리들 고향이 수몰되었다면 잠수하여 볼 수라도 있을 것을」 먕향의 노래비의 일부로 이주민들 아픔의 깊이가 배어나는 망향의 노래이다.

울산공업도시로의 서막
울산은 1962년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되어 공업화를 맞이하게 되었고 울산공업단지, 온산공업단지 등의 공업 단지를 조성하고 공업용수 공급을 위한 댐을 만들기 시작했다. 특정공업지구의 사업은 정유, 비료, 화력 발전소, 제철 제강 등이었다. 같은 해 9월에 울산정유공장 기공식 이후 울산시 전역과 대현면 상남동 외 5개 동을 범위로 하는 울산도시계획구역이 지정되었다. 구역은 총 면적 176.04㎢로 주거 지역, 상업 지역, 공업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에 따른 후속으로 5만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집과 삶의 터전을 공장과 댐에게 내어 주었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되어 실향민이 되었다. 그리고 이주민들이 옮겨 갈 택지가 이주 전에 완성되지 않아, 택지 조성이 완료될 때까지 월세 방을 전전해야 하였다. 아울러 택지 분양금조차 제대로 낼 수 없을 정도로 보상금이 적어 결국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이주와 공업 단지 조성 역시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않아서 주민들이 공장과 공장 사이에 끼이거나, 공장들에 포위되어 고립된 채 생활하게 되면서 오랜 기간 불편을 겪어야만 하였다. 게다가 공장으로 인한 각종 공해에 시달리면서 질병에 노출되기도 하였다.

온사이주민 망향비에서 바라본 온산공업단지

울산공업지구 조성은 매끄럽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주민들의 피해는 더욱 커졌다. 석유화학공업단지를 조성하기로 하였으나 석유 화학 계열의 공장 유치가 부진해서 공업 단지의 절반 정도에 지역 원주민이 그대로 거주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 울산공업단지 31.40㎢의 면적 중 44%인 13.97㎢에 6,090가구 2만 7000명의 주민이 이주하지 못하고 그대로 살고 있어 울산공업단지 내 모습이 말 그대로 공장 반, 사람 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장 울타리로 길이 막히고 진동, 소음, 폐수, 분진 등 각종 공해로 생활에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역 주민과 공장은 1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마찰을 빚었다. 결국 정부는 1979년부터 이주 보상비를 지급하는 등 5개년 계획을 통해 울산공업단지 내 지역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발전 그리고 어두운 그림자
울산의 또 다른 대규모 공업 단지인 온산공업단지도 마찬가지였다. 온산공업단지는 1974년에 조성하였다. 구리, 아연, 알루미늄 등 비철 금속 산업을 육성해서 석유 화학 제품의 기초 원료 생산을 위해 울산공업단지와 인접한 온산면[현 온산읍] 일대에 조성하였다. 19개 마을이 공장에 터를 내주고 사라졌으며, 1만 3000여 명의 주민이 이주해야 하였다.

그러나 이주 대책에는 문제가 많았다. 무엇보다 이주 단지를 건설해서 주민들을 완전히 이주시킨 뒤 공업 단지를 만들어야 하였지만,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계획 없이 공장부터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즉, 공업 단지에 입주를 희망하는 공장들이 토지를 개별적으로 매입해 아무 때나 공장을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민가와 공장, 농지와 공장이 뒤섞이면서 전체 1만 4000여 명의 주민 중 이주한 사람은 17%인 1,800명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1만 2000명의 주민들은 공장과 공장 사이, 혹은 공장 한 가운데 외딴섬처럼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오염에 노출된 주민들 사이에 온산병(溫山病)이 발병하면서 정부는 공장으로 둘러싸여 있던 16개 마을 주민 1만여 명을 집단 이주시켰다. 온산공업단지 조성으로 인한 두 번째 이주였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주민들이 원한 이주는 아니었지만, 두 번째 이주는 몸과 마음 모두 상처를 남긴 이주가 되었다. 온산 지역 주민들은 공장과 공해에 쫓겨 온산공업단지에서 2㎞ 떨어진 덕신지구로 이주하게 되면서 공해 실향민이 되었다. 생활의 터전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생활, 생계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채 이주가 진행되면서 이들은 또 다른 병인 이주병(移住病)을 앓게 되었다.

울산의 동쪽 해변 마을은 온전히 보존된 곳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서생면, 정자, 방어진, 장생포 해안 일부를 제외하고는 공업 단지가 마을을 밀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화강과 외황강(外煌江) 하구 마을 또한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던 미포만(尾浦灣)과 전하만(田下灣)의 절경은 현대중공업 건설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고, 붉은 동백꽃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아오던 울주군 온산읍 방도리 목도는  드넓은 온산공업단지와 온산항에 둘러싸였다.
공장이 늘어나면서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만큼 대기에 배출된 공해 물질로 인해 환경오염이 심화되면서 이로 인한 피해 또한 점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산업화 초기에는 환경오염으로 입는 피해보다는 성장의 논리가 중시되었다. 경제적 부와 풍요를 얻은 만큼 환경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졌다.

1970년을 넘어서면서 벼의 잎이 노랗게 시들어 가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수확량이 줄기 시작하였고, 공업 단지 인근 해역에서 물고기나 조개, 미역, 전복 등이 폐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농작물의 피해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점차 심해지면서 환경오염의 피해가 사람에게까지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공해로 인한 질병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바로 온산병이다. 온산병의 발생은 환경의 중요성과 오염의 심각성을 울산 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3년부터 온산 주민들은 집단적으로 관절이 아프다거나 신경통 증세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통증을 느끼는 부위는 허리·다리·전신·팔·어깨 등의 순서로 나타났으며, 피부병과 눈병을 동반하기도 하였다. 1985년 온산공업단지 인근의 주민 1,000여 명이 전신 마비 현상을 보이면서 온산병이 한국판 이타이이타이병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온산병이 공해병(公害病)이 아니라고 공식 부인함으로써 논란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마침내 정부가 온산병은 환경 요인의 탓이라고 발표하면서 2,000가구 1만여 명의 피해 주민의 이주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온산병의 구체적인 원인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가 노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층까지 원인 모를 통증과 증세를 보이는 등 공해로 인한 피해를 직접적으로 받게 되면서 울산의 공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온산 지역 주민들은 온산공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이주를 경험한 바 있는데, 온산병으로 인해 다시 이주하게 되어 이주의 고통을 두 번이나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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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대표적인 축제 중 하나가 처용문화제이다. 명성과는 걸맞지 않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처용암과 주변 환경이다. 인근 산업공단 공해영향인지 조용하다 못해 쓸쓸하고 적막하다. 그 옛날 동해용과 일곱 아들이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던 곳이라고는 무색하게 한다. 처용암은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호로 207000규모의 바위섬으로 울산광역시 남구 황성동 세죽마을 해변에서 약 150m 떨어진 외황강 하구에 있다. 현재 황성동 일대는 울산 미포국가산업단지와 인접해 있다처용암 이름은 동해용과 그 아들이 나타난 바위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처용암과 관련되는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2권 기이(紀異)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 수가 있다.

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재위 875-886) 때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가(草家)는 하나도 없었다.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어느 날 대왕(大王)이 개운포(開雲浦)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었다. 왕이 괴상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뢴다. “이것은 동해(東海) ()의 조화이오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그곳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의 용은 기뻐해서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의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가서 왕의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했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처용의 아내를 삼아 머물러 있도록 하고, 또 급간(級干)이라는 관직(官職)까지 주었다. 처용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해서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남몰래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서 자기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자 이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들어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 가랑이 넷일러라.

둘은 내해이고,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할꼬.

그때 역신이 본래의 모양을 나타내어 처용의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이제 잘못을 저질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이제부터는 공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서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왕은 서울로 돌아오자 이내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망해사(望海寺)라 했다. 또는 이 절을 신방사(新房寺)라 했으니 이것은 용을 위해서 세운 것이다.

이후 신라 사람들은 처용의 춤과 노래는 전염병을 옮기는 역신(疫神)을 쫓아내는 힘이 있다고 판단하여 역신을 쫓기 위해 처용의 얼굴을 그려 대문에 붙이고, 특별한 날 처용의 탈을 만들어 쓰고, 처용이 역신을 쫓을 때 추었다는 춤을 추었다. 처용무(處容舞)는 고려시대를 이어 조선시대 국가 행사에서도 재연되었다.

성현의 용재총화 처용희(處容戱) 편을 살펴보면 매년 섣달그믐밤이면 창경궁과 창덕궁에서 처용희를 하였고 창경궁에서는 기악(妓樂), 창덕궁에서는 가동(歌童)을 하였으며 새벽까지 노래와 춤을 하였는데 이는 사귀(邪鬼)를 물리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제현의 시에 조개 같은 이와 붉은 얼굴로 달밤에 노래하는데, 솔개같은 어깨에 붉은 소매가 봄바람에 춤춘다.라고 묘사하였다.

현재 학계에서 처용랑(處容郞)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며 하나씩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아라비아인이라는 견해

  - 경주 괘릉(원성왕릉)의 무인석을 보면 우람한 체격에 높은 코, 파마를 한 듯한 턱수염 등 아라비아인 모습에 가깝고        당시 신라에서 당으로 가 는 바닷길은 울산인근 포구 → 남해안 → 서해안 흑산도 → 당(중국)이다. 그리고 9세기           이슬람 문헌에 「중국의 동쪽에 6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다. 그곳에 간 무슬림들        은 좋은 환경 에 매료되어 영구 정착해버리곤 한다.」라고 기록되어있음

2. 신라말기 지방 호족의 아들이라는 설

  - 중앙의 골품 귀족정권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처용의 상경으로 정략결혼 등 지방에 대한 포섭 견제하려 하였으      나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을 반영한 것이고 당시 서라벌을 도덕성을 상실한 퇴폐적이고 병든 도시로 상징하고        있음

3. 향가연구에서 승려나 용으로 보는 견해

4. 의무주술사(醫巫呪術師)로 보는 견해

5. 귀족문화에 대항하는 지방문학이라는 견해

6. 화랑도로 보는 견해

7. 선신(善神)인 용신(처용)과 악신(惡神)인 역신(疫神)의 설화로 보는 견해

8. 신라 하대 유명한 가면극 배우로써 임금의 총애를 받던 배우이라는 견해

9. 해(日)의 신으로 보는 견해

집단이주로 사라진 세죽(細竹)마을은 70년대 외황강 상류에 석유화학공단이 들어서면서 공해로 말미암아 주민이 살 수 없는 공해지역으로 변해 1990년대부터 다운동으로 집단이주 시작하여 1999년에 완료하였다.

울산공업도시 개발이전 세죽마을은 외황강 하구의 수산물 집산지로 횟집과 상점이 즐비하였다. 수산물 중 아나고(붕장어)와 꼬시래기(망둥어)가 유명했다. 특히 꼬시래기(망둥어)는 일본으로 수출될 정도로 맛이 뛰어났다당시 이곳 바닷가 사람들은 남창장에 해산물을 팔고 생활필수품을 구했다.

지금 세죽나루 선착장은 선박 몇 척만 보이는 작고 낡은 콘크리트 선착장이지만 예전에는 목심장이라 불리던 5일장 열리는 온산읍 방도리와 맞은편 처용리로 오가던 뱃길과 목도(동백섬)로 가는 유람선 뱃길이 있었다. 특히 목도는 동백꽃이 유명하여 동백섬으로 부르며 조선시대에도 명성이 자자하여 지방 수령들이 개운포에서 동백섬으로 뱃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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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면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화정리(禾亭里)는 북으로는 온양과 온산, 동으로는 회야강이 흐르면서 온산과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서생 그리고 서쪽으로는 위양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 들판은 화장들이라 하고 옛날 이 지역에는 서생포 만호 진성과 숙마산성 등이 있어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화정리는 신라 때는 샛내, 조선 예종 때는 술이리라 하였고 정조 때는 수마리(水麻里)라 하였다. 300년 전 김해 김씨(金氏)와 남양(南陽) 홍씨(洪氏)가 입향(入鄕)한 것으로 전해지고 김씨와 홍씨는 처남 매부지간으로 지내오고 있다고 한다. 화정리는 화정마을과 술마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화정마을은 진하리 위에, 술마마을 아래에 위치하고 마을 앞으로 국도 31호선이 지나고 있다. 서생포 만호 진성이 화정터널 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비록 바다가 마을에서 가깝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벼농사보다는 과수와 원예 그리고 채소를 많이 키워 울산으로 팔고 있다. 특히 가을이 되면 국도변에 간이 상점을 만들어 배와 감 등 과일과 무·호박 등 채소를 팔아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술마마을은 화정마을 위에 위치하고 윗술마와 아랫술마로 나누어져 있다. 두 마을 모두 국도31호선에서 안으로 들어간 자리에 있으며 가구수도 윗술마가 7가구, 아랫술마가 16가구로 모두 23가구의 한적하고 조용한 농촌마을이다.

숙마산성은 술마마을의 남서쪽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어 먼저 술마마을을 찾아야 한다. 술마마을에 도착하여 술마길로 마을초입을 지나 안쪽으로 가면 술마마을회관을 만나고 계속 시멘트 외길을 따라 올라간다. 마을을 벗어나 골짜기로 진입하여 좁은 시멘트 길로 가다보면 골짜기 좌측에 농막이 조성된 여러 곳을 보게 된다.

마을을 벗어나 골짜기로 진입하여 좁은 시멘트 길로 가다보면 골짜기 좌측에 농막이 조성된 여러 곳을 보게 된다 .

이들을 지나 얼마 못가서 숙마산성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산성에 도착하여 살펴보면 대부분 무너져 있어서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성내의 시설과 축조 시기, 성격 등을 밝히기 위해서는 추가 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 마성(馬城)으로도 별칭 되는 이 성은 골짜기에서 산정의 능선까지 연결되는 석축성으로 보고 있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길이는 300m 정도이다. 성벽은 먼저 가공된 화강암으로 기단부를 만든 후 그 위에 사람머리 크기보다 조금 큰 돌을 가로쌓기 방법으로 협축 하였으며, 내부는 사람머리 크기의 화강암으로 막채우는 방법으로 마무리하였다. 잔존높이는 50㎝∼110이며 폭은 310정도이다.

숙마산성 안내판. 산성을 살펴보면 대부분 무너져 있어서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성내의 시설과 축조 시기, 성격 등을 밝히기 위한 추가 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
마성 ( 馬城 ) 으로도 별칭 되는 이 성은 골짜기에서 산정의 능선까지 연결되는 석축성으로 보고 있지만 ,  현재까지 확인된 길이는  300m  정도이다 .

 

성벽은 먼저 가공된 화강암으로 기단부를 만든 후 그 위에 사람머리 크기보다 조금 큰 돌을 가로쌓기 방법으로 협축 하였으며 ,  내부는 사람머리 크기의 화강암으로 막채우는 방법으로 마무리하였다 .  잔존높이는  50 ㎝∼ 110 ㎝ 이며 폭은  310 ㎝  정도이다 .

숙마산성을 지나 50m 올라가면 용곡산 하늘길을 조우하고 울산전파관리소를 만날 수 있다. 용곡산 하늘길이라고 부르는 이 코스는 용곡산, 용골산, 울산전파관리소 중심으로 출발점은 동서남북으로 다양하다. 주로 발리에서 출발하여 서생포 왜성, 진하해수욕장 또는 송정마을로 도착하는 코스이나 위양리 위곡마을 위곡2, 나사리 봉화산 해맞이로 , 화정리 술마마을 술마길, 용리 덕골재길, 등 원하는 루트를 선택할 수 있다.

숙마산성을 지나  50m  올라가면 용곡산 하늘길을 조우하고 울산전파관리소를 만날 수 있다 .
「 용곡산 하늘길 」 이라고 부르는 이 코스는 용곡산 ,  용골산 ,  울산전파관리소 중심으로 출발점은 동서남북으로 다양하다 .  주로 발리에서 출발하여 서생포 왜성 ,  진하해수욕장 또는 송정마을로 도착하는 코스이나 위양리 위곡마을 위곡 2 길 ,  나사리 봉화산 해맞이로  ,  화정리 술마마을 술마길 ,  용리 덕골재길 ,  등 원하는 루트를 선택할 수 있다 .

숙마산성을 마성이라고 보는 이유는 흥려승람(興麗勝覽)[1934]에 숙마성에 대해 일명 마성이라고 하며 서생에 있는데 언제 쌓았는지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고 울산읍지 고적조[1934]에도 숙마산성을 마성이라고 전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숙마성의 숙마(熟麻)는 말을 기른다는 의미를 지닌 숙마(熟馬)의 잘못된 표기로 판단하고 있고 입지나 축조방식이 울산지역 방어진 목장과 유사하여 일반적인 전투성과는 다른 모습이 보여 조선시대 이길곶 목장으로 보고 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1469],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의하면 울산 지역에 방어진 목장, 방암산 목장, 이길곶 목장 등 모두 3개의 목장이 설치되었으나, 이후 방암산 목장과 이길곶 목장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두 목장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폐지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성(馬城)은 말이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목장 둘레를 돌로 막아 쌓은 담장으로 목장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근세까지 국가에서 말 산업을 관장했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때 국영 말 목장이 174개소나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초기부터 군사, 교통 등 필요에 따라 많은 국영 목장을 설치했고 고려사에도 대표적인 말 목장 8개소가 등장한다. 조선시대에는 강원도를 뺀 제주와 전국7도 관찰사 아래 말 목장 감목관을 뒀다. 감목관은 외관직으로 말 목장을 관리했고 30개월 만기 종6품관으로 전국에 21명이 있었다고 한다. 가장 규모가 큰 목장이 제주목장이고 그 밖에 강화도, 진도, 도련포, 등 유명했다. 조선 초기 말 목장은 59개소에 불과했으나 순종 때는 172개소로 말 목장을 국가 관장사업으로 육성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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