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0년 9월 101명의 남녀 퓨리턴(Puritan, 청교도)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 플리머스 항에서 뉴욕 항을 향해 출발했다. 그들은 몇 마리의 동물, 여러 가지 생활도구, 씨앗, 음식 등을 싣고 약 2달에 걸친 항해 끝에 뉴욕이 아닌 보스턴 남쪽 지역인 케이프 코드(Cape Cod)에 도착했다. 그곳은 그들이 정착허가를 받지 않는 곳이라 12월에 다시 남쪽으로 항해하여 뉴욕 항에 도착하려 했으나 오랜 항해에 지쳐서 포기하고 인근 지역에 상륙했는데 보스턴에서 남쪽으로 40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1620년 12월 상륙하여 정착한 퓨리턴(Puritan)의 마을을 재현 한 플리머스 플랜테이션 (Plymouth Plantation) 입구
그리고 이곳에서 정착했고 출발한 영국의 항구 이름을 따서 플리머스(Plymouth)라고 명명하였다. 이들은 북아메리카 해안의 추운 겨울을 나면서 준비 부족으로 그해 절반가량만 살아남았다. 다행히도 주변 인디언 부족과 반세기 이상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초기에 우연히 영어를 할 줄 아는 파투셋(Patuxet) 부족 출신의 스콴토(Squanto)라는 인디언의 도움도 받았었다. 나중에 이들을 순례시조, 필그림 파더스(Pilgrims Fathers)라고 불렀다.
현재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에는 1620년 12월 상륙하여 정착한 당시 퓨리턴의 마을을 재현 한 플리머스 플랜테이션(Plymouth Plantation)이 있는데 17세기 주민의 모습으로 한 배우들이 퓨리턴의 생활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이곳에서 3마일 떨어진 곳에서 메이플라워호를 복제해서 만든 메이플라워호(Mayflower) Ⅱ가 있고 필그림이 맨 처음 밟은 자리라는 플리머스 록(Plymouth Rock)이 있다.
플리머스 바위는 도리아 양식의 사방이 뚫린 신전 건물 안에 들어있다. 신전 안으로 들어가면 움푹 파인 바닥 아래 놓여있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바위이고 표면에는 1620이란 숫자가 새겨져있다. 1620년 퓨리턴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 상륙할 때 밟은 바위이다.
1620이란 숫자를 보면서 비록 21세기 세계 최강 미국이나 200년의 짧은 역사의 문화재를 보니 웃음이 나온다. 진정 퓨리턴이 이 플리머스 바위를 밟고 내렸는지.
16세기 초 서유럽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면죄부판매와 성직 매매 등으로 비판을 받았고 이에 대하여 종교 개혁을 주장하며 마틴 루터와 장 칼뱅이 주도한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때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생겨났다. 당시 영국 국왕 헨리 8세는 스페인 출신의 왕비인 캐서린과 이혼을 원했지만 카톨리 교회의 교황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을 이룩한다는 명분으로 영국 국왕이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는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를 설립하였다.
플리머스 플랜테이션(Plymouth Plantation) 가옥 내부
그러나 무늬만 종교 개혁 일뿐 기존 교회의 부패는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를 정화(Purify)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퓨리턴이다. 퓨리턴은 신학적으로 장 칼뱅의 추종자들이었다. 점차 영국에서 탄압을 받자 퓨리턴의 회중파와 분리파 중 분리파는 신대륙에서 자신들만의 신앙 공동체를 건설할 계획으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 플리머스 항을 떠났다. 이후 10년이 지나서 퓨리턴 중 회중파도 신대륙을 향해 영국을 떠났다.
플리머스 플랜테이션(Plymouth Plantation)에서 17세기 주민의 모습으로 한 배우들이 퓨리턴의 생활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메이플라워(Mayflower)는 5월의 꽃으로 의미인데 산사(山査)나무의 꽃이다. 산사나무 꽃은 5월에 피는데 흰색으로 배꽃과 유사하다. 산사나무는 서양에서는 호손(Hawthorn)부르는데 천둥이 칠 때 생겨난 나무라고 한다. 그래서 벼락을 막아 주는 나무라하여 가지를 옷에 꽂아 놓으면 벼락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집안에 꽂으면 화를 면할 수 있다는 벽사신앙을 가지고 있다. 또한 목재로 쓰이고 밭에 설치하는 울타리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메이플라워호를 복제해서 만든 메이플라워호(Mayflower) Ⅱ메이플라워호(Mayflower) Ⅱ 내부
퓨리턴이 영국 플리머스 항을 출발할 때 배이름을 메이플라워(Mayflower)라고 불렀던 이유는 항해 중 벼락을 막기 위해서였다.
미국에 와서 먼저 느끼는 것이 보행자 중심의 교통문화이다. 특히 집에 아기가 있어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신호등 쪽으로 가고 있으면 지나가려던 차들이 미리 정지하여 기다리는 것을 보면 미국이 교통문화의 선진국이라는 것을 느껴진다.
뉴욕 주(New York State)에 있는 뉴욕은 미국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지만 센트럴 파크로 유명하고 월가, 브로드웨이 등 경제, 예술 문화의 중심도시이다. 여행 전 뉴욕 역사를 살펴보자.
뉴욕에 최초로 백인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중반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에 살던 프랑스인 모피 사냥꾼과 무역상들이였다. 그러나 그 곳에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살고 있었던 10만 명의 알곤킨족(Algonquian) 인디언과 이로쿼이족(Ir oquois) 인디언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새, 곰, 늑대 등의 동물형상을 한 거대한 의식용 언덕을 축조하였기에 언덕 축조자(Mound Builders)라고 불렀다. 또한 남쪽에는 크리크족(Creek) 인디언과 체로키족(Cherokee) 인디언이 살았다. 그들은 옥수수, 콩, 담배를 재배했고 주위 숲에서 동물을 사냥하면서 식량을 보충했다.
뉴욕 리버티 섬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세계를 비추는 자유)
1609년에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의 후원을 받고 있는 헨리 허드슨이 항해하여 맨해튼에 와서 네덜란드 땅임을 선포하였고 “누구라도 밟고 싶어 할 아름다운 땅“이라고 표현하였다. 허드슨 강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이후 네덜란드 이주민이 맨해튼과 허드슨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는 이곳을 무역항이자 교역기지로 건설하였다. 1624년 네덜란드인들은 맨해튼을 뉴 암스테르담(New Amsterdam)이라고 불렀다.
1884년에 완공한 자유의 여신상 높이는 받침대를 포함해 92m이다. 머리에 씌어진 왕관의 7개 첨단은 당시 7개 강을 의미하고 자유가 널리 퍼져 나간다는 상징이다
뉴잉글랜드에서 영국 이주민들의 정착이 원활해지고 인구가 늘어나자 그들은 남쪽으로 점차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국 국왕 찰스 2세는 이곳 뉴욕지역을 탐을 내기 시작하여 마침내 1964년 영국 해군을 출동시켜 네덜란드로부터 빼앗고 그의 동생 요크 공(Duke of York) 제임스에게 넘겨주었다. 이후 요크 공의 이름을 따서 뉴욕(New York)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18세 중반까지 네덜란드 특성을 간직하였다.
여신상 내부는 왕관까지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는데 왕관까지 가려면 354계단(2층)을 올라가야 한다.
요크 공 제임스는 나중에 영국 왕 제임스 2세가 되는데 그의 땅 중에서 허드슨 강과 델라웨어 강 사이의 땅을 친구 조지 카터릿 경(Sir George Carteret)과 존 버클리(John Berkeley)에게 주었는데 이 땅은 뉴욕에서 갈라져 나와 뉴저지(New Jersey) 식민지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영국 귀족 신분이라서 영주(領主) 식민지로 출발했다.
뉴욕 허드슨 강 기슭의 시골마을 뉴 버그(New Burgh)는 미국 독립전쟁 사령부가 있었는데 1789년 당시 수도 뉴욕에서 조지 워싱턴이 미국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1811년 바둑판 모양의 거리가 만들어 졌고 1825년 이리 호와 허드슨 강 상류를 연결한 이리운하가 개통되어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고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1842년에 상수도가 완성되어 위생상태가 향상되었고 1876년 뉴욕 북쪽 늪지대 843에이커를 매립하여 직사각형의 센트럴 파크를 조성하였다.
뉴욕의 별명은 Big Apple인데 1920년대, 스포츠 기자였던 존 피츠제럴드(John J. Fitz Gerald)가 뉴욕에서 열리는 경마 대회를 취재하며 뉴욕을 '빅애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경마 산업에서 '애플'은 큰 상금이나 성공을 상징했으며, 경주마를 소유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뉴욕의 경마 대회를 '빅애플'이라 부르는 것이 하나의 관용어처럼 사용되었다.
또는 1930년대, 재즈 뮤지션들 사이에서도 뉴욕은 '빅애플'로 불리게 되었는데 당시 뉴욕은 음악 산업의 중심지였으며, 여러 재즈 음악가들이 뉴욕을 '최고의 무대'로 여겼다. 특히 이들이 다른 지역에서 공연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올 때, 마치 거대한 사과를 거머쥐듯 '성공의 상징'으로 뉴욕을 바라보며 '빅애플'이라고 칭했다. 이 때문에 재즈 음악계에서 '빅애플'은 뉴욕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은 뉴욕의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주도는 올버니(Albany)이며 유서 깊은 북쪽 주(the old North state)라 불리기도 한다.
뉴욕시는 맨해튼(Manhattan), 브루클린(Brooklyn), 퀸스(Queens), 브롱크스(Bronx), 스태튼 아일랜드(Staten Island), 등 다섯 구(borough)로 구성되어 있다. 맨해튼과 스태튼 아일랜드는 섬이고 브루클린과 퀸스는 롱아일랜드에 위치하며 브롱크스만 유일하게 뉴욕 주 내륙에 있다.
맨해튼은 뉴욕의 심장부이자 명소들이 많이 있고 맨해튼 이름은 “동산의 섬”이라는 뜻의 인디언 말에서 왔다. 브루클린은 맨해튼 남쪽에 위치하고 있고 뉴요커들이 맨해튼 다음으로 살고 싶어 하고 관광화가 된 곳이다. 퀀스는 가장 넓고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곳으로 최근 한국 사람들이 급증한 곳이다. 브롱크스는 절반은 시내이고 절반은 교외지역으로 가장 큰 동물원, 식물원과 양키 스타디움이 있다. 뉴욕 만에 있는 스태튼 아일랜드는 인구가 적고 교외지역으로 조용하고 아름다운 부두와 뉴욕의 초창기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뉴저지와 뉴욕 맨해튼을 연결해주는 다리뉴욕 맨해튼(Manhattan) 코리아타운 거리.맨해튼 이름은 동산의 섬이라는 뜻의 인디언 말에서 나왔다.
뉴욕 관광을 하는 방법에는 버스 투어, 유람선 투어, 헬기 투어 등 있는데 버스 투어가 가장 인기가 많다. 버스 투어를 할 경우는 그레이 라인(Gray Line) 투어 상품을 사용하면 무난하고 관광 소요 시간은 8시간 30분이다. 유람선 투어는 맨해튼 섬을 일주하면서 자유의 여신상을 보는 것이 가장 보편화된 유람선 투어로 허드슨 강 42번가 피어 83에서 서클 라인 투어(Circle Line Tour)를 이용하거나 사우스 스트리트 시포트 피어 16에서 시포트 리버티 크루즈(Seaport Liberty Cruise)를 이용하면 된다. 리버티 섬에 도착하여 자유의 여신상 내부까지 구경하는 경우는 배터리 파크에서 유람선을 타면 된다.
뉴욕 맨해튼 거리버스 투어 用 관광버스
뉴욕과 미국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은 리버티 섬에 있는데 1886년 미국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기증하였는데 1875년 파리에서 만들기 시작하여 1884년에 완공하였고 1885년 군함으로 미국에 옮겨졌다.
1865년 프랑스 지식인 에두아르 라볼레가 미국에 공화국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기념물을 세울 계획을 품었고 프랑스 조각가 프레드릭 오귀스트 바르톨다가 설계와 제작을 하였고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만들었다고 한다.
높이는 받침대를 포함해 92m이다. 머리에 씌어진 왕관의 7개 첨단은 당시 7개 강을 의미하고 자유가 널리 퍼져 나간다는 상징이다. 원래 명칭은 “세계를 비추는 자유”였다. 여신상 내부는 왕관까지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는데 왕관까지 가려면 354계단(22층)을 올라가야 한다.
맨해튼 섬을 일주하면서 자유의 여신상을 보는 것이 가장 보편화된 유람선 투어다.
월가(Wall Street)의 이름은 17세기 초 네덜란드 이주민들이 인디언과 영국인들로부터 뉴 암스테르담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 장벽(Wall) 세운데서 유래한 것이다.
월가(Wall Street)의 청동 황소
뉴욕증권거래소(New York Stock Exchange)는 마치 로마 성을 연상시키는데1792년 24명의 중개인에 의해 최초로 설립되었고 현재 중개인의 수는 약 1,400명이다.
뉴욕증권거래소(New York Stock Exchange)
페더럴 홀(Federal Hall National Memorial)은 그리스풍의 건물로 뉴욕이 미국 최초의 수도가 된 이후 1789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취임 선서를 한 곳이다. 이후 18세기 뉴욕 시청건물이었다.
페더럴 홀(Federal Hall National Memorial)에 있는 초대 미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 동상
트리니티 교회(Trinity Church)는 1697년에 세워진 최초의 영국 성공회 교회로 화재로 소실 된 후 증축, 개축하여 1846년에 완공하였다.
영국 성공회의 트리니티 교회(Trinity Church)
프랑스 르네상스풍의 건물은 세 번째 뉴욕 시청사로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뉴욕 시청사
퇴역한 실제 항공모함 인트레피드(USS Intrepid)를 개조하여 만든 인트레피드 해양우주항공 박물관이 맨해튼 미드타운에 있다. 전투기, 헬기, 잠수함 등 전시되어 있는데 가족여행객에게는 인기가 매우 높다.
퇴역한 실제 항공모함 인트레피드(USS Intrepid)를 개조하여 만든 인트레피드 해양우주항공 박물관
브롱크스 동물원(Bronx Zoo)는 국제 야생 동물 보호공원으로 1899년에 건립되었고 영국 런던 동물원에 이어 세계 2번째로 큰 동물원이다.
브롱크스 동물원(Bronx Zoo)는 국제 야생 동물 보호공원으로 1899년에 건립되었다.영국 런던 동물원에 이어 세계 2번째로 큰 동물원이다.
뉴욕 근교에 있는 롱아일랜드(Long Island)는 1640년에 유럽인들이 들어와 고래잡이와 어업을 하는 포구로 이용하였다. 흰 모래 사장과 녹음이 어우러진 풍경은 “바다의 낙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평화롭고 아름다워서 19세기말과 20세기 초부터 뉴욕 부유층 사람들이 해안가나 절벽에 별장을 지었고 휴양지로 유명하다.
롱아일랜드(Long Island)의 존스비치(Jones Beach)뉴욕 근교에 있는 롱아일랜드(Long Island)는 1640년에 유럽인들이 들어와 고래잡이와 어업을 하는 포구로 이용하였고 19세기말과 20세기 초부터 뉴욕 부유층 사람들의 휴양지로 유명하다.존스비치(Jones Beach)는 대서양을 맞이하는 해변으로 모래밭 길이가 10km로 서핑, 해수욕, 낚시를 즐기기 위해 많이 사람들이 찾아온다.
존스비치(Jones Beach)는 대서양을 맞이하는 해변으로 모래밭 길이가 10km로 서핑, 해수욕, 낚시를 즐기기 위해 많이 사람들이 찾아온다.
동북부에서 승용차를 가지고 롱아일랜드로 여행 갈 경우에는 코넷티켓 주 뉴 런던에서 롱아일랜드 Orient Point로 도착하는 페리 호 배를 타면 승용차를 싣고 편안히 갈수 있다. 가다 보면 해안가에 잠수함을 만드는 군수사업체 General Dynamic을 볼 수 있다.
코넷티켓 주 뉴 런던뉴 런던 해안가에 잠수함을 만드는 군수사업체 General Dynamic
미국 여행을 하다보면 미국인들은 독서가 생활화 된 것 같다. 대중교통의 대기실이나 비행기, 버스, 여객선, 그리고 기차 안에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항상 책을 읽는다. 출근 중이나 여행 중에나 깨알 같은 글자를 틈틈이 읽고 책을 가까이 한다. 또한 시종일관 정숙하여 옆에서 가만히 있자니 내는 숨소리조차 미안할 지경이다. 정말로 독서에 대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Los Angeles(LA)는 뉴욕에 이어 미국 제2의 도시로 캘리포니아 주 남부 해변을 따라 시내중심가로부터 80km까지로 광대한 지역이다. 1769년 스페인의 탐험가 가스파르데 포르톨라에 의해 “천사의 여왕 마을”이라고 불렸다.기원전 6,000년전 가브리엘리노와 추마시라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살기 시작했는데 18세기 후반 후니페로 세라가 이끄는 스페인 선교 사절이 선교회를 설립하면서 이 지역에서 그들은 사라졌다.
1781년부터 최초의 정착민이 멕시코에서 44명이 왔다. 그리고 1818년 첫 미국인은 난파 당한 보스턴 출신 목수 조셉 채프먼이었고 1830년 중반부터 서부에 대한 관심이 많이 생겨서 미국인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LA 유니버설 스튜디오(LA Universal Studio) 거리 모습
멕시코-미국전쟁(1846~1848)에서 미국이 승리하여 1850년 4월 4일에 미국에 편입되었다. 영화산업은 1908년부터 뿌리내리기 시작했고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도시가 되었다. 이곳 LA 코리아타운은 미국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1960년대 이후 미국에 온 이민1세대가 주축이 되어 197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 주(California State)는 1535년 스페인의 탐험가 코르테즈(Herman Cortes)가 “뜨거운 아궁이”라는 뜻의 스페인어 “칼리엔테 포르날리아(Caliente fomalia)라고 부른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그리스 신화에서 칼리피아 여왕이 다스린 전설의 섬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1500년에 선보인 스페인의 작가 몬탈보(Montalvo)의 소설 ”지상낙원의 설화(Las Sergas de Esplandian)“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캘리포니아는 지상낙원 근처의 섬 Califia로 표시되어 이다. 별명은 황금의 주(the Golden State)이다. 주도는 새크라멘토(Sacramento)이다.
LA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로스앤젤리스 할리우드 북쪽에 있는데 영화 스튜디오 중 가장 크고 인기가 많다. 주변의 대표적인 스튜디오는 실제 촬영 현장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워너 브라더스 스튜디오(Warner Bros Studio), 투나잇 쇼 등 NBC의 TV 세트를 볼 수 있는 NBC 텔레비전 스튜디오(NBC Television Studio) 등 있다.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워터 월드 촬영장소를 스턴트 맨들이 영화 주연장면을 재연
이곳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유명 영화 세트, 특수 촬영장면, 스턴트 쇼 등 관람 할 수 있는 일종의 놀이공원이다. LA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세계 최대 영화 스튜디오로 약 170만 ㎢라는 광대한 부지에 설립되었고 스튜디오 투어, 스튜디오 센터, 엔터테인먼트 센터 등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엔터테인먼트센터는 영화를 모티브로 한 멋진 어트랙션과 다양한 쇼를 즐길 수 있다. 주요 코스에는 아놀드 슈워즈네거 주연의 터미네이트,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워터 월드, 백 투 더 퓨처, 애니멀 플래닛 라이브(Animal Planet Live), 미라, 블루스 브라더스(The Blues Brothers), 스파이더맨 록스(Spiderman Rocks), 블래스트 존(Blast Zone) 등 공연하고 있다.
스튜디오 센터는 영화의 특수효과를 자세하게 볼 수 있는 곳으로 영화 제작 과정에 대한 소개와 함께 직접 등장인물이 되어 영화를 똑같이 재현해보는 등 영화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E.T 어드벤처, 쥬라기 공원, 백 드래프트, 더 월드 오브 시네 매직 등 있다.
스튜디오 투어는 4량으로 편성된 트램을 타고 약 40분 동안 실제 영화와 TV 촬영이 이루어졌던 스튜디오 및 세트를 관람 할 수 있다. 트램 투어 도중에 내려 특수 촬영 현장을 견학하게 되는데 이 때 몇 사람을 뽑아 촬영세트에 등장시켜 준다.
스튜디오 투어
미국 여행을 하다 보면 디즈니랜드나 유니버셜 스튜디오 등 놀이공원에서 대가족이 모여 즐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비롯하여 손자, 손녀들이 서로서로 손잡고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여가생활을 온 가족이 모여 같이 즐기는 것을 알 수 있다. 좋은 풍광을 배경으로 우리 부부가 따로 독사진을 찍을 때면 우리한데 와서 부부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한다.
옛날 중, 고교시절 미국사회는 개인주의 사회이고 고교졸업하거나 대학생이 되면 집을 떠나는 핵 가족사회라는 것이라 배웠는데 잘못 이해있음을 깨달았다. 즉 대가족 중심의 여가문화가 일반화가 되어있음을 알았다.
이곳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스턴트 쇼를 마치면 아이들이 스턴트맨을 기다리다가 사인을 받는 모습을 보고 이런 문화가 한국에서도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 본다.
남미의 이구아수 폭포,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와 함께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인 나이아가라 폭포는 다른 폭포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 걸쳐져 있다. 오대호(五大湖) 중 슈피리어 호(Lake Superior), 미시간 호(Lake Michigan), 휴런 호, 이리 호(Lake Erie)를 지나서 흐르는 강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형성하였고 이 물이 온타리오 호(Lake Ontario)를 지나서 세인트 로렌스 강이 되어 최종 대서양으로 흘러간다.
나이아가라(Niagara) 폭포는 뉴욕 주 버팔로(Buffalo) 시의 미국 폭포와 캐나다 온타리오 주 나이아가라 폭포 시의 캐나다 폭포로 나누는데 고트 섬(미국) 경계로 사진의 왼쪽이 미국 폭포이고 오른쪽이 캐나다 폭포다.미국 나이아가라 폭포
나이아가라(Niagara) 폭포는 뉴욕 주 버팔로(Buffalo) 시의 미국 폭포와 캐나다 온타리오 주 나이아가라 폭포 시의 캐나다 폭포로 나누는데 고트 섬(미국) 경계로 동쪽이 미국 폭포이고 서쪽이 캐나다 폭포다. 캐나다 폭포는 낙차 54m, 너비 675m이며 말발굽(Horse Shoe) 폭포라고 부른다. 고트 섬을 끼고 건너편에 있는 미국 폭포는 낙차 56m, 너비 320m으로 규모와 수량을 비교하면 캐나다 폭포가 크고 웅장하다. 폭포를 구경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배를 타고 폭포 가까이 폭포수를 느끼는 것과, 헬기를 타고 보는 헬기 투어 또는 전망대(Tower)에 가서 보는 것인데 주변에 99m, 236m 등 다양한 높이의 전당대가 있어 폭포 전체 조망을 즐기는 것에는 부족함이 없다.
단연 백미는 배를 타고 폭포를 보고, 느끼고, 즐기는 것이다. 안개 아가씨 호(Maid of the Mist)에 승선하면 배는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 최대한 폭포에 가까이 접근하는데 폭포수에서 떨어지는 물보라를 체험하게 되는데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된다. 그리고 승선하면 반드시 파란 레인 코트를 입어야 한다. 안개 아가씨 호(Maid of the Mist)는 1846년 최초로 운영한 이래 계속 운행 중이다.
안개 아가씨 호(Maid of the Mist) 선착장과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레인보 다리와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왼쪽부터 레인보 다리와 프로스펙트 전망 타워(86m)안개 아가씨 호(Maid of the Mist)에서 본 미국 나아아가라 폭포왼쪽부터 레인보 다리와 프로스펙트 전망 타워(86m) 그리고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캐나다 나이아가라(말발굽 : Horse Shoe) 폭포에 진입하는 안개 아가씨 호(Maid of the Mist)
그리고 퀸 빅토리아 공원에서 매일 해가 진 뒤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등 형형색색의 조명을 비추는데 그 모습이 너무 황홀하고 아름답다. 또한 말발굽(Horse Shoe) 폭포 전경을 감상하기에도 제격이다.
캐나다 나이아가라(말발굽 : Horse Shoe) 폭포 상류
옛날 이곳에는 북미 세네카 인디언들이 살았었고 프랑스 선교사 루이 헤네핀이 1978년에 나이아가라 폭포를 발견했다. 발견 당시 그는 “세계에서 이에 견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감회를 묘사하였다.
나아가가라 폭포에는 슬픈 전설이 하나 서려있다. 먼 옛날, 이곳에 살던 어느 북미 원주민 부족은 1년에 한 번씩 폭포의 신에게 제물을 바쳐야 했는데, 부족의 추장은 제비뽑기로 자신의 하나뿐인 딸이 선택되었다. 공정성과 추장으로서의 위엄을 위해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추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마침내 딸이 제물로 바쳐지던 날, 그녀는 꽃으로 장식된 작은 조각배를 타고 폭포를 향해 떠밀렸다. 그녀의 슬픈 절규가 물소리에 묻혀버리려던 찰나, 멀리서 그녀의 아버지인 추장이 배를 타고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두 부녀는 손을 맞잡은 채, 함께 폭포 아래로 사라졌다.
캐나나 퀘벡에서 출발하여 몬트리올 - 킹스턴 - 토론토- 나이아가라 폭포로 이어지는 여행경로에 만난 모습레인보 다리를 건너면 만나는 캐나다 - 미국 국경 검문소
루브르 박물관은 루이 14세가 17세기말 베르사유로 궁권을 옮기기 전 까지 사용되었던 궁궐로써 800년 동안 증축공사의 결과가 현재의 모습이다. 1970년대까지 경제부처와 미술관으로 나누어 사용되었는데 1981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에 의해 전체가 박물관으로 변경, 사용되었다. 6만㎡의 전시실은 리슐리외관, 숼리관, 드농관 등 3곳으로 나뉘며 발권장소인 지하층을 포함하여 총 4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는 11개 분야로 방대하여 전부를 감상하려면 일주일 정도가 소요된다.
최초의 루브르는 12세기말 늑대로부터 시가지를 보호하기 위해 필리프 오귀스트가 축조하였다. 이름의 유래는 늑대를 뜻하는 라틴어 Lupus, 즉 프랑스어 Loup에서 유래가 된 것이다. 당시에는 망루를 지키는 문지기 숙소와 감옥에 불과하였는데 14세기부터 궁궐로써 확장을 거쳐 거듭나게 되었다. 궁궐이 베르사유로 옮긴 후부터는 아카데미 회원들의 사무실과 유명 예술가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프랑스 혁명 때 왕족과 귀족들로부터 압수한 재물 660여점을 전시하기 위해 1793년 박물관으로 용도가 변경되어다. 이후 계속된 정비와 확장을 통해 나폴레옹 3세 섭정기간 때인 1880년에 마무리가 되었다.
루브르 박물관 정문에 위치하고 있는 유리 피라미드는 1981년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에 의해 지어졌고 건축가 이오 밍 페이의 작품으로 1989년에 완공되었다. 피라미드의 정사각형 바닥면에서 꼭짓점까지의 높이는 21.64m, 603개의 마름모와 70개의 삼각유리로 95톤의 철근이 지지하고 있다. 유리 피라미드 아래는 박물관 안내소와 유무인 발권장소가 있다. 총 5개의 층과 3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리슐리외(루이 13세 때 재상) 관, 쉴리(앙리 4세 때 재상) 관, 드농(루브르 박물관 초대 관장) 관이다.
암사슴과 함께 있는 사랑의 여신 아르테미스. 일명 베르사유의 다이아나밀로의 비너스
밀로의 비너스는 1820년 한 농부에 의해서 에게 해의 밀로 섬에서 발견되었고 당시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샤를 프랑스와 드 리파르도가 루이 18세에게 바쳤다. 기원전 130 ~ 100년 당티오슈가 제작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날개를 단 사모트라케의 니케(승리의 여신)
날개를 단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기원전 331년 ~ 323년에 제작 된 헬레니즘 시기를 대표하는 조각이다. 기울어진 날개의 각도, 왼쪽 다리의 위치, 바람이 불어 여신의 다리를 휘감는 듯한 옷의 표현은 조각을 보는 사람들에게 조각상이 날아오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15세기 작품으로 성모 마리아가 유다 산골의 즈가리아 집에 있는 엘리사벳을 만나는 것을 그린 작품이다. 고령으로 임신한 엘리사벳이 무릎을 꿇고 마리아에게 존경을 표하는데 마리아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엘리사벳의 어깨를 짚으며 그녀의 행동을 만류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뒤에 서 있는 두 여자는 마리아 야코비와 마리아 살로메이고 마리아 야코비는 배가 부풀었고 마리아 살로메는 두 손을 모았다. 화면배경에는 개선문과 항구도시 전경이 보이는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는 개선문은 승리의 문, 항구는 구원의 기항지를 의미하는 메타포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은 1503년에 스푸마토 기법으로 그린 작품으로 피렌체에서 제작한 후기 작품이다. 중앙에 정면을 향해 앉아있는 여인이 마라아의 모친 성 안나이다. 어머니의 무릅에 앉아있는 성모 마리아는 양의 등을 타려는 아기 예수를 양과 떼어놓으려고 하고 있다. 양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희생양의 상징으로서, 마리아의 행위는 아들을 험난한 운명으로부터 막고 싶은 모정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성 안나의 머리를 정점으로 하여 삼각형의 오른편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어린 양으로 구성 된 피라미드 구도다. 스푸마토 기법은 윤곽선을 뚜렷하게 그리지 않고 희미하고 뿌옇게 그리는 기법으로서, 인물이 살아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주는 효과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밀라노 귀족 부인의 초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밀라노 귀족 부인의 초상”은 15세기에 밀라노에서 그린 작품이다. 검은 배경을 바탕으로 도발적인 눈, 꽉 다문 입, 밖에서 들어온 반사 된 빛까지 고스란히 담은 정교한 눈동자의 이 여인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밀라노에서 초상화를 그릴 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요소다. 이 작품에는 손이 그려져 있지 않고 손 부분이 파라페토라고 불리는 난간으로 가려져 있는데 당시 이탈리아 화가들이 인물에 현실감과 공간감을 불어넣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요소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바위산의 성모"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바위산의 성모”는 스푸마토 기법으로 그린 작품으로 1483년 밀라노의 산 프란체스코 수도회 성당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1485년에 완성한 것으로 밀라노에서 제작한 첫 작품이다. 성 가족이 이집트로 피난을 하던 중 세례자 요한을 만났다는 전설을 그린 것으로 동굴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순간을 묘사한 작품이다.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 그리고 천사와 예수가 피라미드 구도로 화면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1503년 비단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가 그녀의 초상화를 다빈치에게 부탁해서 그린 작품이다. 모나는 이탈리어로 부인을 뜻하고 리자는 이름이다. 프란체스코가 작품료를 지불하지 않아 다빈치가 1519년 사망하기까지 그가 가지고 있었고 사망 후 그의 제자에게 남겼다. 피라미드 구도 속에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의 여인이 팔걸이의자에 몸에 살짝 의자에 앉아 있다. 모나리자의 원본은 관리차원에서 지하 아틀리에에 보관되어 있고 전시관에 걸린 작품은 최첨단 기법으로 그려낸 복제품이다.
로렌조 로토의 "간통한 여인과 예수"
로렌조 로토의 “간통한 여인과 예수”는 16세기 작품으로 이소케팔리아 원칙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소케팔리아 원칙은 다수의 등장인물로 짜이는 역사화의 구성에서 사람들의 머리 높이를 균등하게 맞추는 방식이다. 간음한 여인과 손바닥을 펴서 군중의 공격에 대한 저지, 만류, 반대하는 예수와 노란 옷을 입은 늙은 율법학자를 전면 중앙에 하나로 묶고, 손가락을 치켜들고 모세의 율법을 들먹인 남자, 병장기류를 든 군인 등 여인의 처벌을 요구하거나 예수의 반응을 떠보는 주변 무리를 묶어서 두 그룹 사이에 긴장감 넘치는 대치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는 1814년 나폴레옹의 여동생 캐롤린 뮈라의 의뢰를 받아 그린 작품이다. 오달리스크는 터키어 오달릭(odalik)에서 유래한 말로, 규방의 여인을 뜻한다. 여인의 나체를 극도로 미화한 작품으로 나폴레옹 제국의 멸망으로 인해 주문자로부터 값을 치르지 못해 화가의 손에 남겨졌다. 앵그르의 스승은 자크 루이 다비드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와 조세핀 황후의 대관식"대관식 당시 조세핀은 마흔이 넘었는데 우아한 여인으로 묘사되었다.전통적인 대관식에는 교황이 황관을 씌워주는데 나폴레옹은 본인 스스로 황관을 쓰는 쪽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교황 피우스 7세는 나폴레옹 뒤쪽에 앉아 단지 축복하는 손짓만 하고 있다.황관을 받는 인물은 그의 처남이자 나폴리 국왕인 뮈리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와 조세핀 황후의 대관식” 은 나폴레옹의 대관식 3개월 전인 1804년 9월황제로부터 직접 청탁을 받아그린 작품으로 2년의 제작 과정을 거쳐 완성하였다. 1804년 7월 국민투표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12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나폴레옹이 아내 조세핀에게 직접 황관을 씌워 준 후 본인은 스스로 양손으로 황관을 썼다. 전통적인 대관식에는 교황이 황관을 씌워주는데 나폴레옹은 본인 스스로 황관을 쓰는 쪽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교황 피우스 7세는 나폴레옹 뒤쪽에 앉아 단지 축복하는 손짓만 하고 있다. 대관식 당시 조세핀은 마흔이 넘어 는데 우아한 여인으로 묘사되었다. 황관을 받는 인물은 그의 처남이자 나폴리 국왕인 뮈리이고 조세핀의 두 시녀 뒤의 선 다섯 여인들은 나폴레옹의 여형제들로 첫 번째 여인이 데리고 선 사내아이는 나폴레옹과 전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 나폴레옹 샤를이다. 황관을 받는 인물 뒤의 그림 중앙에 앉아 있는 여인은 나폴레옹의 어머니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
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는 1783년 루이16세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신고전주의의 첫 작품으로 출장 전 호라티우스 형제를 묘사한 작품이다. 기원전 669년경에 로마와 알바(Albains)의 전쟁에서 싸웠던 사돈관계의 두 가문의 아들들, 즉 로마 호라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와 알바의 큐라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에 관한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이다. 그림의 왼쪽은 호라티우스 형제의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세 자루의 칼을 주면서 제국을 위한 죽음이나 전쟁의 승리를 맹세하게 있고 오른쪽은 고통스러워하는 큐라티우스로 시집 갈 누이 카밀라, 큐라티우스에서 시집온 아내 사비나 그리고 어린 손자를 감싸 안고 있는 어머니가 그려져 있다.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은 1819년 작품으로 1816년 7월 2일 영국에서 프랑스로 반환된 세네갈의 생루이 섬에 정착하기 위해 약 400명을 태운 군함 메두사호가 좌초되어 13일 동안 표류하였고 15명만 구조된 비극적인 사건을 그렸다. 작품은 생존자들이 13일간의 표류 뒤 수평선 멀리 구조선을 발견하는 순간을 묘사하였다. 먼 곳에서 지나가는 배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흔드는 인물들과 무릎에 놓인 죽은 아들을 애도하는 아버지, 뗏목 가장자리에 곧 파도에 떠내려갈 듯한 시체들 등 피라미드 구도다.
역사화가 폴 들라로슈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역사화가 폴 들라로슈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1850년도 유화 작품으로 1800년 봄 이탈리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을 기습 공격하기 위하여 제2차 이탈리아 원정 때 나폴레옹 보나파트트의 모습이다. 말 대신 노새를 타고 알프스 설산 그랑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하는 모습으로 추위를 막기 위하여 회색 코트를 입었으며 차갑고 힘겨워하는 분위기로 실제 모습에 가깝도록 표현한 작품이다.
프랑스의 위대한 작가 빅토르 위고의 작품이자 앤소니 퀀 주연의 영화 『노트르담의 곱추』의 배경이 된 노트르담 대성당은 중세 고딕의 대표 양식으로 시테섬에 위치하고 있다. 독일의 쾰른 대성당, 이탈리아 밀라노 대성당과 함께 중세 고딕 양식의 3대 성당에 포함되는 노트르담 대성당은 1,302년 필리프 4세 때 삼부회가 개최되었고 1,455년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이 열렸다. 또한 1,804년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고 드골이 프랑스 해방을 축원하며 국가를 불렸고 프랑스 전 대통령 미테랑의 장례식도 치러졌다. 그리고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길이 127m, 너비 48m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원안에 꽃을 그려 넣은 로자스(rosace)를 중심부로 상단에는 양쪽으로 우뚝 솟아오른 사각기둥의 탑과 하단에는 3개의 출입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2019년 4월 15일 오후 6시 50분경 대성당 지붕에서 발생한 화재(火災)로 탑과 그 주변의 지붕이 붕괴되었고 화재는 약 10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프랑스 국민에게 노트르담 대성당의 상징성은 매우 커서 화재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현재 재건 및 복구 중이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024년까지 복구를 완료 하겠다고 한다. 2017년 파리 여행 때 노트르담 대성당 추억을 돌이켜 본다.
하단의 출입문 3개 중 왼쪽 문으로 성모 마리아가 조각되어 있다.
1160년 파리의 부주교였던 쉴 리가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기 위해 짓기 시작하여 200년이라는 공사 기간을 거쳐 1363년에 완공되었다. 「노트르담」의 뜻은 우리들의 귀부인이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를 가리킨다. 길이 127m, 너비 48m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원안에 꽃을 그려 넣은 로자스(rosace)를 중심부로 상단에는 양쪽으로 우뚝 솟아오른 사각기둥의 탑과 하단에는 3개의 출입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의 로자스 바로 앞 3명의 조각상은 가운데가 성모 마리아이고 좌우에는 아담과 이브인데 성당 정면의 모든 조각과 장식들이 이 조각상에 경의를 표하는 구도로 설계되었다. 성모 마리아, 아담과 이브의 조각상아래에는 28명으로 이루어진 제왕들이 떠받치고 있다. 가고일(gargoyle)을 비롯하여 성당 처마에 달려 있는 다양한 낙수받이 조각상 또한 보는 이의 흥미를 자극시킨다.
하단의 출입문 3개 중 가운데 문은 최후 심판의 문, 왼쪽 문은 성모 마리아, 오른쪽은 성녀 안나 각각 조각되어 있다. 성당내부는 성경 내용을 주제로 조각되었고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이 특히 뛰어나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뒤쪽은 예쁜 화초로 정원이 가꾸어져 있어 여행으로 지친 몸을 조용히 다독거리기에 좋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또 다른 볼거리는 푸앵 제로(Point Zero)이다. 노트르담 정문에서 앞으로 약 50m 떨어진 바닥에 있는 표지판으로 파리와 유럽 각 도시간의 고속도로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이다. 예를 들어 여기서 디종까지 거리는 310km이다. 푸앵 제로의 기원은 중세 시대 죄수들이 대주교관의 문 앞에서 공개 참회를 했던 장소가 현재 푸앵 제로의 위치다.
푸앵 제로(Point Zero)는 바닥에 있는 표지판으로 파리와 유럽 각 도시간의 고속도로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이다. 기원은 중세 시대 죄수들이 대주교관의 문 앞에서 공개 참회를 했던 장소였다.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혁명 100돌 기념하기 위해 공학자 귀스타브 에펠에 의해 파리 만국 박람회 때 만들어졌다. 현재 프랑스의 유료 관광 명소 1위이다. 에펠탑은 1930년대 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로 324m. 무게 10,000톤으로 1964년에 프랑스 국가유산, 199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에펠탑을 만들 당시에는 문학가 모파상을 비롯한 보수 지식인들은 파리의 품격과 격조를 떨어뜨린다고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탑이 완공되고 관광객에게 개장했을 때, 유럽 각 국의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5개월 만에 2천만 명이나 이르렀고 반대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승강기를 이용하여 에펠탑 전망대에서 파리를 조망하고자 한다면, 1~2개월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현장에서 1~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에펠탑에는 전당대가 1층 전망대(57m), 2층 전망대(116m), 꼭대기 전망대(276m) 등 3곳이 있다. 2층 전망대에는 기념품 Shop, 레스토랑 등 있는데 여기 레스토랑을 이용하려면 3~4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당연히 꼭대기 전망대에서 보아야만 파리의 모습이 그려진다.
꼭대기 전망대(276m)에서 바라 본 파리시내와 세느강
승강기를 이용하여 에펠탑 전망대에서 파리를 조망하고자 한다면, 1~2개월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현장에서 1~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계단을 이용하면 바로 올라 갈수 있는데 “Stair Only”라고 표기 된 계단을 이용하면 된다. 무엇보다도 에펠탑의 진면목은 밤에 있다. 낮에는 경쾌한 모습이지만 밤에는 아름답지 못해 화려하다. 마치 밤을 깨우는 전령사 같다. 3만개가 넘는 전구와 스포트라이트 조명은 새벽 1시까지 탑을 밝히는데 저녁 7시부터는 정시마다 5분간 플래시 조명이 별처럼 반짝인다.
밤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에펠탑
특히 파리 야경을 감상하고자 한다면 세느강 유람선을 타면 더욱 기억에 남는 파리가 될 것 같다. 대표적인 유람선이 바토무슈 크루즈다. 유람선 코스는 앵발리드와 앵발리드 다리, 알렉상드로 3세 다리, 팔레 부르봉 왕궁과 콩코르드 다리 등 시작으로 오르세 미술관, 시테 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끝으로 시테 섬을 돌아서 콩시에르주리 왕궁 등 지나서 바토무슈 크루즈 선창장에 도착한다. 다양한 다리도 많이 볼 수 있어 파리 야경을 만끽할 수 있다.
바트무슈 유람선 선착장유람선에서 바라 본 에펠탑알렉상드로 3세 다리. 세느 강에 있는 다리 중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다. 1892년 프랑스와 러시아가 동맹을 체결 할 때 당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 3세 이름의 따서 1900년 프랑스 만국박람회 기념으로 만들어 졌다.팔레 부르봉 왕궁과 콩코르드 다리. 팔레 부르봉 왕궁은 루이14세 때 지어진 궁전으로 지금은 프랑스 하원 회의장으로 사용되고 있다.오르세 미술관노트르담 대성당콩시에르주리 왕궁은 프랑스 초기 왕들의 왕궁으로 프랑스 혁명 때 감옥으로 사용되었다.퐁뇌프 다리.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앙리3세 때 짓기 시작하여 앙리4세 때 완공되었다. 영화 "퐁 뇌프의 연인들"의 배경이 된 다리이다.
에펠탑, 베르사유와 함께 프랑스 3대 관광지 중 한 곳인 몽생미셸은 프랑스 북부 영국해협을 마주하고 있는 바스노르망디 망슈(Manche) 주의 생미셸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수도원이다. 생미셸 산은 92m 높이의 화강암으로 된 바위산으로 산의 형태에 따라 수도원을 아래에서 조금씩 지어 올렸고 수도원의 구성은 예배당(Chapelle)과 라 메르베유(La Merveille, 불가사의)로 나누어져 있다.
멀리 옥수수밭 위에 떠 있는 몽생미셸
조수간만의 차이가 유럽에서 가장 크고 10 ~ 15m의 수면 차이로 밀물 때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이다. 특히 노을이 질 때 매우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한다.
밀물 때도 상관없이 몰생미셸로 갈수 있는 다리
708년 이곳에서 아브랑슈의 오베르 주교의 꿈에 대천사 미카엘 계시를 3번이나 받고 바위산에 수도원을 짓기 시작했고 유럽인의 성지 순례지로 유명해졌다. 966년 미로처럼 꾸며진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원이 세워졌고 그 아래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14세기에는 마을이 바위산 바로 아래까지 확장되었다.
12세기 수도원 주변에 성벽을 쌓으면서 백년전쟁 때 난공불락의 요새로 사용되어 영국군의 총공세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수도원은 프랑스 대혁명 때 해산되었고 1863년 까지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1874년에 사적기념물로 되면서 대대적인 복원공사가 시작되었다.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등록되었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성 미카엘(Michael) 대천사 숭배
오베르 주교
천사 군단의 수장인 성 미카엘은 중세의 중교적 감수성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 미카엘은 신약성경 요한 묵시록에 악마의 상징인 용과맞서 싸워 무찌르는모습으로 등장한다. 내세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던 중세인들에게 성 미카엘은 최후의 심판일에 죽은 자를 인도하고 인간의 영혼을 저울에 다는 인물이다.
708년 아브랑슈의 오베르 주교가 꿈에 대천사 미카엘부터 계시를 받는 모습
성 미카엘에 대한 숭배는 492년 몬테 가르가노(이탈리아)에 최초의 성소가 건립되면서 5세기말에 등장하게 된다. 1,000년 경에는 성 미카엘을 기리는 교회와 예배당이 유럽 전역에 확산되면서 주로 언덕이나 갑(岬)의 상단에 세워졌다. 백년전쟁 후에는 몽생미셸이 영국군에 저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서 성 미카엘에 대한 숭배가 새로운 차원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숭배는 반종교개혁과 함께 새롭게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교회의 입장(구교)에서 볼 때 오직 군대를 이끄는 천사만이 프로테스탄트 이단(신교)에 맞서 싸울 수 있다고 믿었다.
천사 군단의 수장인 성 미카엘
기독교의 도상에서 성 미카엘은 흔히 칼과 저울을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전통과 민간종교는 성 미카엘을 무기와 저울에 관련된 모든 직종의 사람들과 기사들의 수호성인으로 만들었다.
수도원은 프랑스 대혁명 때 감옥으로 1863년 까지 사용되었다.
현재 몽생미셸 수도원 안에는 상업시설이 있어 식당에 들러 나폴레옹도 즐겨 먹은 굴 요리를 먹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또한 노르망디 지방에서 나는 치즈 또한 유명하니 식당에서 주문할 때 참고하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