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명리 삼층석탑 (龍明里 三層石塔, 보물 제908호)은 경주 서북쪽인 건천읍 용명리(龍明里) 탑골(塔谷, 856-7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시대 삼층석탑(三層石塔)으로 8세기 중엽에 세워졌다. 탑골(塔谷) 마을은 신라 때 큰 절이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불타버리고 그곳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신라 때의 3층 석탑이 마을 옆에 있었으므로 '탑골' 혹은 '탑리(塔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탑골 마을 서쪽은 밀구(密耳)라는 마을이 있는데 구미산으로 용이 날아갔다는 전설이 있는 용암(龍岩)이라는 바위가 있어 용암의 용(龍)자와 명장(明莊) 마을의 명(明)자를 따서 '용명(龍明)'이라고 불렀다 한다. 혹은 귀가 없는 미륵불이 있었다고 하여 '밀이촌(密耳村)' 또는 '밀귀'라고 부르던 것이 그 후 '밀구'로 바뀌어 불러졌다 한다.
북쪽에는 명장(明莊) 마을이 있는데 파평 윤씨(坡平 尹氏) 성을 가진 한 선비가 마을을 일구었다고 한다. 깊은 산골이라 산나물이 많아 부근에 명성이 났다고 하여 '명장(明莊)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절터 주변의 동쪽과 북쪽 산기슭은 오래전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남쪽과 서쪽은 계단식으로 조성된 논으로 경작되고 있어 원래의 지형은 알 수 없고 절의 범위나 방향, 배치 등은 전혀 알 수 없다. 또한 석물 등 절터의 흔적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제강점기인 1943년에 도괴의 위험이 있던 석탑을 개축할 때 탑신에서 청동불상 1구가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또한 2005년 4월 13일 그동안 일실되었던 3층 옥개석 위의 노반석이 건천초등학교 교정에서 확인되어 문화재청과 경주시에서 복원하였다.
용명리 삼층석탑(龍明里 三層石塔)은 높이 5.6m로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2중 기단의 3층 석탑으로 기단부에 28매, 탑신부 6매로, 상륜부에 1매로 모두 35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상·하 기단 면석에는 탱주가 2주씩이며, 옥개받침은 5단으로 되어있다.
기단부의 1층(하층) 기단은 면석의 양쪽에 우주(隅柱)를 두고 가운데 탱주(撑柱) 2주로 구성하여 3구(區)로 구분되어 있다. 지대석과 면석이 1매석으로 크기가 같은‘ㄱ'자형 부재를 네모서리에 1매씩 배치하고 각 면에 ‘一’자형 부재를 1매씩 배치하여 모두 8매로 결구되어 있다.
‘ㄱ'자형 부재는 모서리에 우주를 두고 양쪽에 면석을 다듬어 4부재가 모두 크기와 모양이 동일하다. 가운데‘一’자형 부재는 역시 4매가 모두 크기와 모양이 동일한데, 면석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탱주를 다듬었다.
기단갑석 역시 8매로 구성되어 있는데, ‘ㄱ'자형 부재를 네모서리에 1매씩 배치하고 각 면에‘一’자형 부재를 1매씩 배치하였다. 기단갑석 위는 2단의 호형과 각형 받침(괴임)으로 상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2층(상층) 기단은 1층 기단처럼 면석의 양쪽에 우주(隅柱)를 두고 가운데 탱주(撑柱) 2주로 구성되어 있다. 면석은‘ㄱ'자형 부재를 네모서리에 1매씩 배치하고 각 면에‘一’자형 부재를 1매씩 배치하여 모두 8매로 결구되어 있다.
‘ㄱ'자형 부재는 모서리에 우주를 두고 양쪽에 면석을 다듬어 4부재가 동일한 크기와 모양이다. 가운데‘一’자형 부재는 역시 4매가 크기와 모양이 동일한데, 면석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탱주를 다듬어서 모두 8매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갑석은 2단의 갑석에 4매가 사용되었다. 갑석 위는 2단의 각형 받침(괴임)으로 1층 탑신(몸돌)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의 탑신(塔身, 몸돌)과 옥개(지붕)는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탑신(塔身)의 각 면에는 우주만 모각되어 있고 문비 등 다른 조각은 없다. 옥개받침은 각 층이 5단으로 되어 있다고 각 옥개의 낙수면 위에는 각형 2단 탑신 받침이 있다. 낙수면은 경사를 이루다가 단부에서 살짝 반전하고, 귀마루의 합각선은 뚜렷하다. 전각 양면에는 풍령(風鈴) 등 장식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1개씩 있다.
탑신(塔身) 2층 이상은 1층 탑신에 비해서 현저하게 줄어들어서 급격한 체감을 나타낸다.
상륜부는 노반을 포함하여 모두 결실된 상태였으나, 지역 시의원의 제보와 경주시 담당자의 노력과 의지로 건천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노반석을 2005년 4월 13일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서 65년 만에 제자리를 찾았다. 노반은 방형 육면체로 상단부에 2단으로 돌출된 돌림띠가 있고, 가운데 원형 찰주공이 뚫려있다.
경주시는 한때 이곳 탑골마을을 동경이마을로 정해 경주개 새끼 동경이 7마리를 분양받아 사육하게 하여 동경이를 활용한 문화콘텐츠를 개발해 지역의 특화사업으로 발전시켜 하였다. 지금은 퇴락하여 쓸쓸하기가 그지없다. 경주시가 장기적인 안목으로 문화콘텐츠 지속성을 유지했으면 바랄뿐이다.
경주개 동경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라 토종개로 꼬리가 없거나 짧으며 성격은 온순하고 매우 친화적인 토종개다. 동경이라는 이름은 경주의 옛 지명인 동경(東京)에서 사육하는 개라는 의미로, 신라시대부터 경주지역에서 사육되다가 일제강점기 때 멸종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동경잡기(東京雜記)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의 옛 문헌을 통해 경주지역에서 널리 사육되던 개로 기록돼 있고 신라고분에서 토우로 발굴되는 등 그 역사와 문화적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2년에는 유전자 분석 결과 한국 토종개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져 문화재청으로부터 천연기념물 제540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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