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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주변지역에 인기 있는 해수욕장 중 하나가 일광해수욕장이다. 특히 동해남부선 전철역이 있어 부산시민이 많이 찾아오고 주말이면 더욱 관광객으로 넘친다. 회와 장어를 즐기는 사람, 낚시를 하는 사람, 바다와 카페를 찾는 사람 가족나들이와 연인들로 다양하다. 이로 인해 삼성1리 주민들이 교통체증으로 인해 생활의 불편함을 호소한다.

일광해수욕장은 가수 최백호와 인연이 깊다. 최백호는 일광초등학교 34회 졸업생으로 결핵 때문에 군 생활을 의과사로 제대하고 일광해수욕장 주변에서 2년간 월세로 생활을 하며 건강을 관리하며 요양했다. 그리고 가진 돈이 없어 기타하나 들고 산에 들어가 오막살이를 하며 노래연습을 했고 이것이 훗날 가수로써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그가 작사/작곡한 노래 낭만에 대하여는 이곳 주변 소라다방에서 만들었다. 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를 들으며 일광해수욕장 백사장을 거닐어 본다.

이천가화교에 있는 가수 최백호 사진
보이는 좌측 이천리, 우측 학리

일광해수욕장은 수심이 얕고 삼성1리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이천리, 우측에는 학리로 해안선이 반원에 가까운 모습을 갖추고 있다. 백사장 길이는 1.8으로 평균 수심이 1.2m. 고산 윤선도가 유배 왔을 때 풍광은 삼성대(三聖臺)가 백사장 가운데 솟아 있고 해안선을 따라 일반 방풍림처럼 해송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당시 백사장의 모래는 금사(金沙)라 하여 반짝이고 영롱하여 매우 아름다웠다고 전해지며 일제강점기 때는 해당화가 아름답게 수를 놓았으며 약간의 노송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카페와 횟집, 다양한 식당이 그 모습을 대신하고 있다.

고산 윤선도의 스토리텔링 주제로 한 포토 존
일광해수욕장 내 공연장소

삼성대의 삼성(三聖)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이곳 향토에서는 고려 말의 삼은(三隱)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등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 외 삼성교(三聖敎)에서 모시는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 등을 가리킨다는 설과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尹弼) 등을 가리킨다는 설 등이다.

 근래에는 세미성대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세미성대를 줄이면 세성대가 되고 이를 한자식으로 바꾸면 삼성대(三聖臺)’가 되기 때문이다. ‘세미성세미의 사투리 발음이고, ‘이 발음의 편의상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은 배를 정박하기 위해 배 밑에 대는 나무를 가리키는 말로 요즘의 서까래와 같은 말로 보인다. 삼성대의 남쪽에 약수터가 있고, 삼성대 앞의 모래사장에는 배를 대기 위한 섞이 깔려 있기 때문에 샘과 섞을 합해져 세미섞이 되었고 이것이 삼성이 되어 삼성대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삼성대는 옛날 일광 바다풍경을 조망하는 모래둔덕이다.

 삼성대는 옛날 일광 바다풍경을 조망하는 모래둔덕으로 기장에 유배 온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621(광해군 13) 서제(庶弟)인 윤선양(尹善養)과 이별하면서 증별소제(贈別少弟)2수를 지은 곳으로 유명하며, 삼성대 아래왼쪽에는 삼성대라는 표지석이 있고 오른쪽에 20054월 이를 기념한 고산 윤선도 선생 시비가 세워져있다.

고산 윤선도 선생 시비

학리(鶴里)는 일광해수욕장 우측에 있는 마을로 주말이면 방파제에 낚시꾼으로 가득하다. 또한 회센터, 카페, 펜션이 있어 이를 이용하는 사람으로 붐비다. 소설 갯마을 작가 오영수(1909-1979)가 이곳에서 낚시를 하면서 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난계(蘭溪) 오영수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출신으로 1937년 도쿄 국민예술원을 졸업하였고 1943년 부산 동래 기장 일광면의 서기를 하면서 이곳에서 김동리(金東里)를 만나 문학적 영향을 받고 일광을 소설 갯마을의 배경으로 삼게 되었다.

학리항, 학포 전경

갯마을은 멸치 후리를 하는 갯마을 주민들의 생활상을 담았는데, 오영수가 일광면사무소의 서기로 근무하면서 직접 보고 느낀 생활상을 소재로 한 것이다. 일광 해수욕장 북쪽 강송교 사이 근린공원인 별님 공원에 오영수 갯마을 문학비가 세워져 있고 기장문인협회에서 관리하고 있다작품집으로 머루, 갯마을, 명암, 메아리, 수련, 황혼, 잃어버린 도원등 다수가 있다. 1959년 아세아 자유 문학상 수상, 1977년 제22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문화 훈장을 수상하였다.

일광 해수욕장 북쪽 강송교 사이 근린공원인 별님 공원에 오영수 갯마을 문학비

학리의 옛 이름은 항곶이(項串), 항구지(項串浦). 한문이름으로는 마을이름이 항리(項里)였다. ()은 목덜미라는 뜻으로 잘록한 곶()을 말한다.  마을 남쪽 산마루가 잘룩하여 이전부터 이 곳을 황새목이라 하고 학항(鶴項)이라 표기하였다. 항곶(項串)이 항과 황새목의 학이 모두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항리(項里)를 학리(鶴里)로 이름이 바뀌었다.

학리에서 본 일광해수욕장

 

학리에서 본 이천리

이천리(伊川里)는 일광해수욕장 우측에 있는 마을로 일광천을 경계로 삼성리와 구분된다. 1965년 오영수의 소설을 영화화한 김수용 감독 신영균, 고은아 주연의 갯마을을 촬영한 곳으로 유명하다. 영화는 출어 중 폭풍을 만나 실종된 이 마을 부자(父子)의 실존인물 이야기다. 동해로 유입하는 일광천은 과거 1960년대에는 주변이 갈대밭이었고 참게와 재첩이 유명했다.

이천가화교에 있는 영화 갯마을의 주요 장면들
동해로 유입하는 일광천은 과거 1960년대에는 주변이 갈대밭이었고 참게와 재첩이 유명했다. 일광천(日光川)은 일광면을 흐르는 하천으로 아홉산(361m) 북쪽 산록에서 발원하여 용천저수지를 지나 남동쪽으로 흐르면서 일광읍내에서 동해의 이천포 일대로 유입한다.
이천리 해안선 따라 카페와 횟집이 즐비하여 주말이면 관광객으로 붐빈다 .
이천항, 이천포

 

이곳 또한 해안선 따라 카페와 횟집이 즐비하여 주말이면 관광객으로 붐빈다. 마을 제당과 강송정(江松亭) 주위에 수령이 150년 된 노송이 있어 바다풍경과 함께 운치가 있다. 도로가 있는 가게 중 찐빵집이 유명하고 특이하게 수석(壽石)을 파는 가게가 몇 군데 보이는데 이유는 80년대 이곳에서 한때 수석바람이 불어 해녀들이 바다에서 해산물보다 수석을 건져 올렸고 그 때의 수석가게가 지금까지 남아 곳이다.

오영수의 소설 갯마을 일부 발췌한 내용
1965 년 오영수의 소설을 영화화한 김수용 감독 신영균, 고은아 주연의 《 갯마을 》 주요 장면
이천리 마을 제당 주위에 수령이150 년 된 노송이 있어 바다풍경과 함께 운치가 있다
일광해수욕장 야경
이천리 해안 야경

이천리(伊川里)의 옛 이름은 일개이다. 개는 갯가를 뜻하는 포(), 개를 이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이을포(伊乙浦)는 현에서 동쪽 6리에 있다. 어량(魚梁)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어량[강물의 물살을 막은 뒤 통발을 놓아 고기를 잡는 시설]을 이곳에서는 일개혹은 이을개라 불러 지명이 유래되었다고도 전한다. 이천리는 이을포와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 천()’ 자가 합성되어 비롯되었다고 한다

일광천(日光川)은 일광면을 흐르는 하천으로 아홉산(361m) 북쪽 산록에서 발원하여 용천저수지를 지나 남동쪽으로 흐르면서 일광읍내에서 동해의 이천포 일대로 유입한다. 지명은 이곳 면 지명인 일광면에서 비롯되었다. 향토에서는 취정천으로 부르고 있다. 기장읍지에는취정천은 일광천을 일컫는다. 하나의 원류에서나왔는데 현의 동쪽 15리에 있는 수리골에서 이천포로 흘러들어 간다.”라는 기록이 있다.

기장방면에서 일광해수욕장으로 가는 도로 왼쪽에 있는 삼성마을제당에는 특이하게 천하대장군 장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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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읍 대변리와 송정에는 시랑대, 오랑대, 국립수산과학관, 해동용궁사, 롯데 월드 어드벤처, 개관 준비 중인 오시리아 관광단지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있다. 이 중 탁 트인 해안 감상과 시원한 동해바람을 즐기기에는 시랑대가 제격이다. 시랑대는 시랑산(82m) 동쪽 해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군부대가 주둔하여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지금은 태고종 사찰인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 시랑리 산 416-3번지)는 입구 우측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12지신상 석물을 지나 해동용궁사 입구(일주문) 주변 춘원 이광수 시비
해동용궁사 입구(일주문) 앞 교통안전기원탑
시랑대 방향 오솔길 입구
바로 좌측 오솔길로 걸어간다
오솔길 도중 만난 안내표지판

시랑대(侍郞臺)는 적선대, 삼성대, 황학대와 더불어 기장의 4대 명승지로써 시랑리 동암마을 남쪽 해변 바위에 세 글자 「시랑대」 와 시(詩)를 새긴 것을 가리킨다. 시랑(侍郞)은 이조참의 정3품 당상관의 옛 이름을 뜻한다.
1733년(영조 9년) 권적(權樀, 1675~1755)이 이조참의(吏曹參議)에서 기장현감으로 좌천되어 부임하여 이곳의 살펴보니 파도가 흰 거품을 물고 밀려올 때마다 조개들과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아낙네들이 쌀 씻는 소리와 같고, 그 위를 나는 비오리(기러기목 오리과의 새)의 군무는 오색찬란하며, 노송 우거진 절벽을 찾은 달빛은 가히 인간 세상에서 보기 드문 절경인지라, 그 감회를 바위에 시(詩)를 새겨 남겼다.

해동용궁사 옆 시랑대 입구

 

시랑대에서 공수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길이다. 공수 지명은 공수전(公須田)에서 유래된 것으로 공수전은 지방관청의 운영 경비에 충당되는 토지이다. 공수마을의 옛 이름으로 비옥포(非玉浦, 飛玉浦), 비오포(飛烏浦), 비오개 등 있다. 비오포(飛烏浦)는 오색찬란한 원앙새 같은 비오리가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큰 무리를 짓고 까마귀 떼처럼 무리를 지어 날아다닌다 하여 비롯되었다.

 

시랑대로 가는 데크길
왼쪽 부터 국립수산과학관, 기장 힐튼호텔

권적은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경하(景賀), 호는 창백헌(蒼白軒), 남애(南厓),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그의 좌천 이유는 암행어사로 널리 알려진 박문수(朴文秀)의 호남 관찰사 임명을 반대하다가 영조의 미움을 받아 정3품 당상관인 이조참의(吏曹參議)에서 종6품의 기장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권적이 당시 이곳에 왔을 때는 바위 위에는 가운데가 안방 같으며 방바닥처럼 평평하게 되어 있어 사오십 명이 앉아도 남을 만큼 널찍하고 시랑대의 뒤편은 기암괴석이 첩첩이 쌓여 병풍처럼 둘러쳐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중앙에서 고위 관료를 역임하다가 유배지로 유명한 이곳의 지방관으로 좌천된 기분을 귀양살이로 표현하며 울분과 서러움을 시로 남긴 것이다. 시랑대 절경에 마음의 응어리를 풀고 외로움을 달래며 지난 관직을 바위에 시랑으로 표현 하였던 것이다.
시랑대 권적의 각석시(刻石詩)
 
謫居猶得近蓬萊 人自天曺貳席來
三字丹書明翠壁 千秋留作侍郞臺
 
귀양 온 이곳이 봉래산과 가깝고
이 사람도 천조(天曹)의 이석(貳席)에서 왔다네.
석 자의 붉은 글씨 푸른 벽에 선명하니
천추에 전할 시를 시랑대에 남겨보네.

또한 고종 31년(1894) 홍문관 교리 손경현(孫庚鉉)이 기장군수로 부임하여 이곳에 와서 시랑대의 글귀와 절경을 본 후 주변 바위에 세 글자 학사암(學士岩)과 시(詩)를 남겼다. 그리고 『기장현 읍지』 형성조에 의하면 “기장 현감 과 홍문관 교리를 지낸 손경현이 놀러 와서 학사암(學士嵓)이라 부르기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학사암 손경현의 각석시(刻石詩)
侍郞臺上一層巖 屹若支天何出凡
上下千年長在石 東南大海自任帆
民勤野壁秋將熟 郡小官閑事已監
喧雷忽送人間雨 不妨須臾濕我衫
乙未 仲夏 學士 孫庚鉉
시랑대 위로 바위 높이 얹혔으니
하늘을 버티는 듯 우뚝 얼마나 출중한가.
지난 세월 천년 동안 바윗돌 그대로요
동남쪽 넓은 바다에 돛단배 자유롭다.
부지런한 농민들 들녘을 열어 곡식은 익어가고
자그마한 고을 공무 한가로워 일은 이미 마쳤다네.
갑작스런 번개소리 홀연 비를 뿌리니
잠깐 새 내 적삼 적신들 어떠하랴.
을미년(1895) 중하 학사 손경현
그 후 권적은 마음을 바로 잡았어 일까? 1733년(영조 9) 5월에서 1734년(영조 10) 11월까지 기장 현감으로 재직할 때 그의 청렴하고 선정을 기리기 위해 1737년 3월 권적 청덕선정비(權擿淸德善政碑)가 건립되었다. 선정비의 위치는 기장읍성 앞 기장공덕비군 內(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85-7번지)에 있다. 비의 제목은 ‘전 이조참의 행현감 권공적 청덕선정비(前吏曹參議行縣監權公䙗淸德善政碑)’이다.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政淸淮陽 學闡潮州 維石一片 不忘千秋
정사에 청렴하긴 회양후(淮陽侯)에 버금가고
학문을 드높인 건 조주 자사(潮州刺史) 같도다.
한 조각 돌 위에 새겨 두는 뜻은
천추토록 길이 잊지 않기 위함일세.“
뒷면에는 “색리 허방익, 도감 유학 김징 숭정 기원 후 두 번째 정사년[1737] 삼월 일[色吏 許邦翊 都監 幼學 金澄 崇禎後再丁巳三月日]”이라고 적혀 있다.

1733 년 ( 영조  9) 5 월에서  1734 년 ( 영조  10) 11 월까지 기장 현감으로 재직할 때 그의 청렴하고 선정을 기리기 위해  1737 년  3 월 권적 청덕선정비 ( 權擿淸德善政碑 ) 가 건립되었다 .  선정비의 위치는 기장읍성 앞 기장공덕비군  內 (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85-7 번지 ) 에 있다 .

 

시랑대 외의 다른 자연석에 ‘엄신영 제우영(嚴信永弟宇永)’이라는 각자를 비롯하여 엄신영(嚴信永), 이후서 등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찾아 시를 남겨 놓았으나  1960년대 들어 구들장용으로 시랑대의 바위를 마구 훼손되어 지금은 겨우 두 수의 시문(詩文)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시랑대로 부르기 전에는 원앙대(鴛鴦臺)라 불리었고    이곳에 용녀와 얽힌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가뭄이 심하던 어느 여름날 마을 사람들은 미랑 스님과 함께 원앙대 아래 제룡단에서 기우제를 올렸다. 제가 끝나고 미랑 스님은 홀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지고 어느덧 달빛이 내리는데 용궁에서 동굴을 통하여 아름다운 용녀가 나타나 미랑 스님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어느덧 용녀는 만삭이 되었다.
원앙대에서 출산의 산고를 겪고 막 순산하여 탯줄을 끊을 여는 순간 큰 파도가 덮치려했다. 이 순간을 하늘의 옥황상제가 내려다보고서 평소에 착하기 짝이 없던 용녀를 구하기 위해 천마를 내려 보내 이들 모녀를 구해 천상의 옥녀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때 미랑 스님은 파도에 휩싸여 갔다.
지금도 원앙대 아래에는 용녀의 탯줄이 붉은 줄로 길게 바위에 박혀 있고 탯줄을 끊은 가위는 돌바닥에 모양이 남아 있다고 전한다. 그리고 파도가 치면 애절한 미랑 스님의 절규가 들려온다고 한다.

카페 공극에서 본 공수 해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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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 대변리 대변항부터 죽성리 월전마을까지 기장해안로를 따라 가면 아름다운 해안 절경이 펼쳐진다. 횟집, 펜션, 카페 등 즐비하여 주말이면 교통 체증이 발생한다. 특히 아스팔트 도로 폭이 좁아 교통체증에 곤욕을 치른다. 그래서 월드컵기념 등대공원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도보로 풍광과 바다바람을 보고 즐기고 느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적선대는 선인(仙人)이 죄를 짓고 귀양 와서 기거했던 곳으로 예로부터 수려하고 아름다운 절경으로 인하여 시랑대, 삼성대, 황학대와 더불어 기장의 4대 경승지이다. 특히 해송과 바위사이의 일출 장관이 뛰어나다고 한다이곳 해안가 중 어느 한곳이나 적선대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

멀리 보이는 기장 아난티코브와 힐튼호텔

해안가 주변을 살펴보면 해송과 장대한 바위의 아름다운 조화는 동해 파도와 더불어 나그네의 걸음을 멈추게 할 것 같다. 특히 다양한 바위의 형상은 자연의 묘미를 느끼게 하고 아이들과 함께 오면 지질공부에 유익할 것이다.

읍파정은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 파도가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밀려오는 듯하다하여 붙여진 조선후기 누정이다. 차성가(車城歌, 1860)에 나오는 것으로 보면 100년 전에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선대 위에 지었다고 하니 이 또한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차성가는 조선후기 기장 지역의 경치와 유적 등 소재로 한 가사문학 작품이름으로 차성은 고려시대 기장의 별호(別號)이다. 이곳 해안가 어디를 가나 절경이니 적선대와 읍파정은 머리에 두고 현재의 풍광으로 가슴으로 즐길 뿐이다.

의병장(義兵將) 김산수(金山壽)와 동호장군(東虎將軍) 김득복(金得福) 부자묘(父子墓)

 

임란공신(壬亂功臣) 부자묘(父子墓, 대변리 남산 감개 산5 –1번지)가 카페824와 기장 해수담수화설비 사이의 기장해안로에 있다. 임란공신(壬亂功臣) 의병장(義兵將) 김산수(金山壽)는 本貫은 金海이고 자(子)는 군경(君卿)이고 호(號)는 덕계(德溪)이다. 그의 아들 김득복(金得福) 자는 진옥(振玉)이고 호(號)는 동호(東虎)이다. 임진왜란 때 부자가 함께 의병을 모아 왜병과 싸웠다. 고향을 옮긴 것은 임진왜란 당시 경주에서 기장현(機張縣)으로 이동하였다.

이곳 바닷가에 묻힌 것은 생전에 죽어서 혼백이라도 왜적을 막아야 된다며 동해바다가 보이는 곳에 묻으라는 유언에 따름이라고 전한다.

임란공신(壬亂功臣) 부자묘(父子墓) 안내표지판

부자(父子)는 임진(壬辰)․정유재란(丁酉再亂)까지 7년 전쟁에 경주를 비롯해 대구, 팔공산, 울산, 언양, 양산, 동래, 기장, 창녕 등지의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울산도산성전투(蔚山島山城戰鬪)에서 부공(父公)인 의병장 김산수(金山壽) 공이 순절하자 아들 김득복(金得福)이 야음을 틈타 울산 염포(鹽浦) 뒷산에 부공의 시신을 가장(假葬)하였다.

동호장군(東虎將軍)으로 불린 김득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주 문천(蚊川)에서 주위 여러 고을의 의사(義士)들이 왜적을 섬멸할 것을 피로써 하늘에 맹세하였는데 이 맹세를 문천회맹(蚊川會盟)이라 한다. 이 문천회맹은 1592년(선조 25) 6월 김득복과 함께 류백춘(柳伯春), 이눌(李訥), 이여량(李女良), 윤홍명(尹弘鳴)들이 맹세를 하고 의병을 모아 분전하였다.

이때 적을 격살함이 4백여급이고, 총검 등을 노획한 것이 27자루나 되었다. 그 이후 울산의 구강(鷗江, 오늘날의 伴鷗洞), 경주의 금오산(金鰲山)과 영천(永川), 대구 팔공산(八公山), 화왕산(火旺山), 서생포(西生浦)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김득복 장군은 용맹과 지략이 뛰어나니 명나라 도청제독(都廳提督) 마귀(麻貴) 장군이 동쪽의 호랑이 장군이라고 동호라는 사호(賜號)까지 내렸다.

전쟁이 끝나고 1605년 선조(宣祖) 38年 4월 16일에 조정에서 전쟁 중 공이 많은 사람에게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을 내렸는데 김산수(金山壽) 의병장은 선무원종삼등공신(宣武原從三等功臣)에 녹훈(錄勳)되고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고 인조조(仁祖朝)에 자헌대부병조참판(資憲大夫兵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현재 후손들이 기장을 중심으로 해운대, 수영, 광안리, 동래, 영도 등지에 100여 세대가 살고 있다.

기장 척화비(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1, 1996. 5. 25 지정)

기장 척화비는 고종 때 대원군이「병인양요(丙寅洋擾)」,「신미양요(辛未洋擾)」 후 외국을 배척하고 쇄국주의를 고창하기 위하여 전국 주요한 지역에 세웠던 비 가운데의 하나이다. 높이 144㎝, 폭 52.5㎝, 두께 21㎝ 규모의 화강석으로 된 이 비문의 내용은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고 화친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니 우리 만년 자손에게 경계한다. 병인년(1866)에 만들어 신미년(1871)에 세우다”

높이 144㎝, 폭 52.5㎝, 두께 21㎝ 규모의 화강석으로 된 기장 척화비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이 비석은 원래는 기장군 대변항 방파제 안쪽에 세워져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항구시설을 하면서 바다에 던져버렸다. 1894년 청일전쟁 때 대변항에 정박 중이던 청국상선(쟝컬선박) 3척이 일본인들에 의해 침몰되어 그 잔형이 오랫동안 항내에 남아 항로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었다. 광복 후인 1947년 최태희씨의 지도를 받아 마을 청년들이 척화비를 인양하여 세운 것이다.

대변항 소방도로 개설로 인해 기장 척화비는 현 대변초등학교 교내로 옮겨졌다. 2004년 척화비 주변으로 도로개설공사를 하면서 척화비 뒷편의 주택을 철거하자, 척화비 아래의 시멘트블록 축대에 일제강점기 때 군사경계표지석으로 사용되었던 장대석이 가로로 눕혀져 있는 것이 드러났다.

대변항은 조선시대에는 대변포(大邊浦)라 불리던 곳으로 이곳에 대동고(大同庫)가 있었다. 대동고는 지방관청이 백성에게서 거둔 곡식을 보관하는 곳이다. 그래서 대동고가 있는 갯가라는 뜻인 대동고변포(大同庫邊浦)를 줄여서 대변포라 불렀다고 한다. 옛날 이곳은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두포(船頭浦)라고 부르기도 하고, 전선창(戰船廠), 주사창(舟師廠)이라고 하였고, 무지포(無知浦)라고도 불렀다.

월전 마을의 옛 이름은 달밭[月田]이다. 마을 앞 포구를 달밭개라고 불렀다은 높다, 또는 산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은 남산(南山) 기슭의 언덕 산을 개간하여 생긴 마을로서, 경작지가 높은 곳에 있는 밭, 또는 산에 있는 밭이라는 뜻에서 달밭이라 하였다고 한다. 즉 달밭은 고전(高田), 산전(山田)이란 뜻이다. 달밭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달 자를 따서 월전이 되었다고 한다. 달밭개를 월전포(月田浦)라고 불렀다.

토암식당 내 5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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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읍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는 연화리(蓮花里)는 주말이면 해물포장마차에서 해산물과 전복죽을 즐기고 커피를 마시며 바다 풍광을 보며 여유를 즐기는 인파로 가득하다. 심지어 교통체증까지 발생한다. 이곳에는 기장 8경 중 하나로 형상이 거북을 닮은 작은 섬 죽도(1,500)가 있다.

연화리 지명은 연화리와 석산리의 경계를 이루는 마을 뒷산 봉우리모습이 연꽃처럼 생겼다 하여 연화봉(蓮花峯, 154m)로 불리우지고 있어 비롯되었다옛날 기장고을의 형국을 말할 때 옥녀가 비단을 짜고 있는 옥녀직금(玉女織錦)형이라고 하고, 이러한 형국에서 연화봉은 연꽃무늬의 비단 폭에 해당되는 산봉우리이다.

지금 죽도는 매립과 연죽교(蓮竹橋)라는 다리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육지와 200m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배로 왕래할 수 있는 곳이었다죽도의 원명은 무지포도(無只浦島)이나 대나무 숲이 울창하여 지명이 비롯되었으나, 근래에는 대나무가 줄고 동백나무가 자생하여 가득하여 동백섬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조선환여승람도서조에 의하면 죽도는 기장군 남쪽 8리 무지포 앞바다에 있으며, 거북이가 물에 떠 있는 것과 같다. 섬의 길이가 40척이고 넓이는 20척인데 섬 안에 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섬에는 대나무가 자생하고 시원한 샘, 암자(죽도암) 그리고 옥녀당(玉女堂)이라는 당집이 있었으며 옥녀를 위해 정월 초하루, 시월 초하루에는 마을에서 당제(堂祭)를 올렸으나 그 유래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비오는 밤에는 댓잎의 떨림과 빗소리가 문풍지와 함께 화음을 내면서 많은 멋과 낭만을 전해주기에 죽도야우(竹島夜雨)의 승경이라 하였다. 그래서 예부터 많은 묵객들이 자주 찾았던 기장의 대표적인 명소였다.

그러나 지금은 천부교 기장신앙촌 소유하고 주변이 철조망이 둘러 싸여 외부인의 접근을 금하고 있다. 섬 밖에서 보면 별장, 관리건물, 그리고 큰 담벼락이 보이며 그 곳을 갈 수 없음이 매우 안타깝다. 기장의 명소가 기장신앙촌 소유로 갈 수 없는 것이 용두대, 신라토성, 죽도 등 이다. 천부교는 대승적 차원에서 이들 명소에 대해서는 일반인에게 일부 개방하는 것이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바람직한 종교의 참모습일 것이다.

연화리는 신암마을과 서암마을로 구성되어 있고 신암마을 해안가에 있는 섬이 죽도이다. 신암의 옛 이름은 무재다. 기장현읍지에는 이곳을 무지포(無知浦), 무차포(武次浦)라 적고 있다. 지금의 대변항까지를 포함하여 무지포라 불렀는데, 기장에서 가장 큰 포구다. 이곳은 예부터 수군영이 있는 변방의 요충지였다. 옛 이름인 무재에서 무는 물의 고어이고, 재는 잣이라고도 부르는데 성()의 고어이다. 따라서 무재 즉 물재는 수군영을 뜻하는 수성(水城)의 의미다.

연화리는 신암마을과 서암마을로 구성되어 있고 신암마을 해안가에 있는 섬이 죽도이다 .  신암의 옛 이름은 무재다 .  기장현읍지에는 이곳을 무지포 ( 無知浦 ),  무차포 ( 武次浦 ) 라 적고 있다 .
대변항 전경. 기장현읍지에는 지금의 대변항까지를 포함하여 무지포라 불렀는데, 기장에서 가장 큰 포구다. 이곳은 예부터 수군영이 있는 변방의 요충지였다.

신암의 신은 새롭다는 뜻으로 해 뜨는 곳, 동쪽의 의미다. 암은 바오의 와음(訛音)으로 보고 있다. 바오는 영의 옛말이다. 따라서 신암은 원래는 새바오 즉 동영(東營)을 의미한다. 무지포에 있는 수군영을 새바오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잘못 새바우로 발음하고,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신암(新岩)으로 표기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신암을 신촌(新村)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부산은 다양한 신흥 종교의 발원지로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바다를 끼고 있는 지리적 조건으로 새로운 외래 문물의 수용이 수월하기 때문 일까? 부산 사하구 감천2동 태극도 본산, 동구 범일6동 안창마을 통일교 성지(수정산 자락에서 문선명 교주가 통일교 기초와 원리를 세웠다고 한다), 기장군 기장읍 천부교 신앙촌, 영도구 동삼동 천리교 본부, 남산동 '이슬람 부산성원' 등 부산에서 발원한 신흥 종교이다.

신암마을 해변가에 있는 것으로 누군가 옥녀를 위해 제(祭 )를 올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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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를 침입한 전쟁으로 육군 15만 8,700명, 수군 9,000명 총 병력 약 20만 명의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1597년 화의 (강화회의)결렬로 왜장 가토 기요사마(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선봉으로 한 1만 4,500명 등 총 병력 14만 1.500명이 정월 15일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한다.

1차 침입 때 제1번대(番隊) 4월 13일 부산 침입, 제2번대 4월 16일 등 제9번대 까지 9회로 나누어 침략을 개시하였고 이 때 제2번대 주장이 가토 기요마사로 병력 2만 2,800명이였다. 가토가 인솔한 제2번대는 나고야를 떠나 대마도에 도착한 후 제1번대 고니시의 부산 상륙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19일 부산에 상륙하여 그 길로 경상 좌도를 택하여 장기·기장을 거쳐서 좌병영 울산을 함락하고, 경주·영천·신령·의흥·군위·비안을 거쳐 문경, 충주로 들어갔고 5월 3일에 한양에 당도하였다.

이후 함경도로 침입한 가토의 군은 선조 26년(1593년) 정월 조·명 연합군의 반격으로 평양에서 패퇴, 고니시 등이 한양으로 퇴각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서둘러 한양으로 퇴진하였다. 거듭된 패퇴로 5월 중순경에 서생포 왜성에 주둔하였고 선조 29년(1596년) 5월말에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같은 해 9월 정유재란 때 선봉장이 되어 다시 서생포 왜성에 주둔하였다.

서생포 왜성은 서생면 서생리 711일원으로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이 선조 25년 7월부터 쌓기 시작하여 다음해 선조 26년(1593년)에 완성한 일본식 평산성(平山城)으로 조선 백성의 강제 노동과 희생에 의해 만들어진 왜군 침략의 산물이다. 당시 왜군은 임진왜란 때 동래, 구포, 진해, 가덕도, 거제도, 기장, 서생 등 동남해안에 왜성을 쌓았고 정유재란 때에는 남해, 고성, 순천, 사천, 마산, 울산 등으로 확대하였고 총 31개의 왜성을 쌓았다.

이 중 고니시가 축성한 진해 웅천왜성이 규모가 가장 크고 서생포 왜성은 성곽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다. 최초의 왜성이자 왜성 본부 역할을 하는 부산왜성,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축성한 기장 죽성리 왜성, 정유재란 때 가토가 축성한 울산 왜성(학성공원)과 봉화로 서로 연락했다고 하여 일명 봉화성이라고 한다.

서생포 왜성은 내부 면적 45,960평, 성 외곽부 길이 2.5km, 평면상의 직선거리가 동서 약 870m, 남북 약 370m인 석성이고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성(본성) 정상부(해발 133m)에는 우물터와 지휘부이자 가토 기요마사가 기거했던 천수각(天守閣)터와 천수대(天守臺)가 남아 있다.

천수각은 높이 5m, 넓이 18×17m 천수대 위에 세워지는 건물로 3층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 사명대사가 서생포 왜성에서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한 내용을 기록한 “송운대사분충서난록(松雲大師奮忠序難錄)을 보면 천수각 규모를 알 수 있다.

『고층 누각에 큰 가옥도 지었다. 청정(淸正, 가토 기요마사)의 거처에 이르니 방 안 전체가 화려한 자리에 금칠한 병풍으로 둘러쳐졌다. - 중략 - 』

 

 

성벽 축조 방식은 외성인 경우는 돌로 외벽을 쌓고 내벽은 흙으로 채운 내탁식(內托式)이고 내성인 경우는 내·외벽 모두 돌로 쌓는 협축식 (夾築式)이다. 특히 내성은 계단식으로 석축을 쌓았는데, 산의 정상부에서 아래로 성벽을 세 겹(三之丸)으로 두르고 있고 각 구역이 독립적인 전투를 치를 수 있도록 되어있다. 또한 내성 출입구는 외부에서 직진 출입이 힘들도록 구성되어 있다. 성벽 높이는 6m이며 기울기가 지면에서 60도 내외다. 일본성의 특징 중 하나가 성벽의 기울기인데 이는 지진이 잦은 일본의 자연환경을 반영한 것이다.

 

외성(外城) 남문으로 실제 성벽 높이를 추정할수 있다.
외성(外城) 동문으로 이를 통과하여 회야강 선착장을 이용했음을 추정되며 선창장은 군수 물자 보급, 문서발송 등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외성(外城) 내 왜군의 막사 건물터로 주춧돌 없이 나무기둥을 땅속 깊이 박아 건물을 지었다.

 

내성(內城) 삼지환(三之丸)의 출입구
내성(內城) 이지환(二之丸)의 출입구
이지환(二之丸)에서 바라본 본성 일지환(一之丸)
내성(內城, 본성) 일지환(一之丸)의 출입구
일지환(一之丸)에서 바라 본 회야강과 동해바다

 

 

 

내성(內城, 본성)  정상부(해발 133m)의 중심 공간인 소곽(小郭) 출입구
소곽(小郭) 내 중심지역으로 우물터와 천수대( 天守臺 )와 천수각(天守閣)터가 남아있다.
왜성의 지휘부 건물이며 가토 기요마사가 기거했던 천수각(天守閣)터와 천수대 ( 天守臺 )
천수대 ( 天守臺 ), 천수각(天守閣)터 올라가는 계단
소곽(小郭) 내 뒷편 출입구로 비상 또는 함락시 탈출통로로 추정됨
떨어진 벚꽃은 마치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끌려온 조선 백성의 흘린 피눈물이 승화된것 같다.
성벽에 새겨진 어느 조선백성 포로의 이름. 참으로 슬프다.

 

임진왜란 때 축성 된 왜성은 포로로 잡힌 조선백성의 강제 노동과 희생에 의한 결과물이다.

 

임진왜란 이후 생긴 경상도 민요 후렴구에 “쾌지나 칭칭나네” 가 “쾌재라, 청정(淸正)이 도망간다.“에서 유래했을 정도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조선 백성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였다.
서생포 왜성에는 가끔 일본관광객이 방문한다. 왜성을 보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침략의 역사를 반성을 할까? 아니면 그들 선조들의 성곽기술 훌륭함을 감상과 한강이남 식민지 건설 못함을 아쉬워할까?

 

선조 32년(1599년) 명나라 장수 마귀장군이 승전기념으로 축하연을 위해 창건한 초가 4칸을 연회 마친 후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53명의 충신들을 배향하기 위해 기와 4칸 창표사(蒼表祠)를 중창하여 세웠다. 이후 후손들과 유림들이 매년 음력 1월 15일에 재를 올려왔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으나 최근 울주군에서 2016년 11월 창표사를 중건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파괴 된 것을 최근 울주군에서  중건한 창표사( 蒼表祠 )

 

서생포 왜성은 사명대사가 임재왜란 당시 4차례 걸쳐 외교활동을 했던 곳이다. 임진왜란 발발 1년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8도 중 4도 즉 한강 이남을 차지할 계획으로 동남해안에 총 18개의 왜성을 쌓았다. 그 일환으로 일본은 조선을 배제하고 명과 함께 강화회의를 진행하였다. 이때 일본 측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주도하였는데 경쟁 관계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갑자기 뛰어들었다.

 서생포 왜성에 있던 가토는 강화 관련 공을 고니시가 차지 할 것을 우려했다. 이에 선조 27년(1594년) 2월에 포로로 잡혀있던 정연복에게 문서를 주어 경상좌병사 고언백에게 보내었다. 그 내용은 강화를 하자는 것이었는데 고언백은 즉시 도원수 권율과 의논하고 뒤에 명나라 장군 도독 유정에게 보이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로써 강화회의 당사자는 모두 바뀌었다. 선조 27년(1594년) 4월 12일 도원수 권율은 명나라 장수 유정의 요청에 따라 승병장(僧兵將)이었던 사명대사와 함께 화평(강화)을 청하였다.

첫날 회담에서 가토는 사명대사에게 첫째 조선의 8도 중 4도를 할양하고, 둘째 조선의 왕자 한 사람을 일본에 보내어 영주케 할 것, 셋째 조선의 대신 및 대관을 일본에 인질로 보낼 것, 넷째 종전과 같이 교린을 할 것, 다섯째 명나라 황녀를 일본에 후비로 삼을 것 등을 요구하여 결렬되었다. 2차 교섭은 7월 6일에 있었는데, 이때 종전의 강화조건에 다시 명나라 인질 1명 등 2개 조건을 추가 주장하여 또 다시 결렬되고 말았다.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강화회의가 있었으나 모두 결렬되고 말았다. 이는 일본의 의도를 파악한 사명대사가 강화를 결렬코자 했던 것이다.

1594년 7월 12일에서 16일 사이 가토 기요마사와 담판 지을 때 사명대사의 유명한 보물일화가 있다. 담판의 주요한 부분이 결렬되자 가토 기요마사가 사명당에게 “귀국에도 보물이 있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우리나라에서는 귀하의 머리를 금 천근과 읍 만호를 주고 산다고 하오. 이러한 막중한 것이 어찌 보배가 되지 않겠소” 라고 호방하게 맞받아쳤다고 한다.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 앞에서 '네 목을 따서 바치면 여럿 팔자 고친다'는 식의 말은 웬만한 강심장 아니면 힘들다. 사명대사의 대범함이 알 수 있다. 사명대사는 이밖에도 1604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가 8개월 동안 머무르며 설법과 외교활동을 통해 억류돼 있던 조선이 3,000명을 구출해 귀국시켰다. 

사명대사(1544 ~1610)는 스승인 서산대사와 더불어 임진왜란 때 승병장(僧兵將)이였다. 사명대사의 법명은 유정(惟政)이고 사명당(四溟堂)은 스님을 높여 부르는 호이다. 이외에도 송운(松雲), 종봉(鍾峯), 등이 사용되고 있다. 중종 39년(1544) 지금의 밀양시 무안면 고사리에서 태어났으며 13세에 김천 황악산 직지사로 출가했다. 18세에 승려 과거시험 선과(禪科)에 응시, 합격하여 글 잘하는 승려로 통했다. 직지사의 주지를 지내고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묘향산 보현사로 들어가 서산대사 휴정에게 3년간 수도하였다.

이후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을 두루 다니며 선 수행을 하다가 43세 되던 해 오대산에 머물렀다. 이때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고 강릉의 옥에 갇힌 일이 있었다. 그러자 강릉의 유생들이 앞장서 그의 무고함을 항소하였으며, 이에 힘입어 석방되었다. 유생들이 승려를 위해 구출운동을 벌인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이후 금강산 유점사에 들어가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염주대신 칼을 들었다. 선조 25년(1592), 49세 나이에 임란초기 승병장으로 평양 탈환참여 등 활약이 컸지만, 점차 전쟁보다 평화회담에 투입되었다. 임진왜란 종료 후 합천 해안사 홍제암에서 67세에 입적했고 나라에서는 그에게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시호를 내려 사명대사의 생애와 입적을 기렸다.

서생포 왜성에서 기억해야 할 왜장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척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선봉장으로 많은 조선 백성을 학살, 온갖 만행을 저질렀고 당시 백성들에게 악명이 높았다. 임진왜란 이후 생긴 경상도 민요 후렴구에 “쾌지나 칭칭나네” 가 “쾌재라, 청정(淸正)이 도망간다.“에서 유래했을 정도이다. 가토는 조선에서 퇴각하면서 많은 조선 백성을 강제로 끌고 갔다.

현재 구마모토에 울산마찌라는 마을이 남아 있을 정도이니 당시 얼마나 많은 백성이 끌려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때 영주가 가토 기요마사이다. 그리고 조선 백성의 희생에 의해 축성 된 구마모토 성이 일본 3대 명성 중 하나이다. 임진왜란 때 축성 된 왜성은 포로로 잡힌 조선백성의 강제 노동과 희생에 의한 결과물이다. 당시 성곽 축성을 했던 조선 백성의 손재주에 왜장들은 감탄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일본인이 하면 축성 완료를 1년 소요되는 것을 조선 백성은 3 ~ 4개월에 완료시키는 것이다. 임진왜란 후 일본으로 많은 조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강제 노동에 동원되고 노예로도 매매됐다. 끌려간 조선인 포로 가운데, 도공(陶工)들의 도자기 제조기술은 일본 도자기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서생포 왜성에는 가끔 일본관광객이 방문한다. 왜성을 보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침략의 역사를 반성을 할까? 아니면 그들 선조들의 성곽기술 훌륭함을 감상과 한강이남 식민지 건설 못함을 아쉬워할까?

 

멀리서 본 진하해수욕장

 

울산의 3대 수군 진성의 하나인 서생포 만호진성

『세종실록지리지』(울산)에는“서생포(西生浦)는 군 남쪽 44리 거리에 있다. 모두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있어 수어(守禦)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는 “만호(萬戶)가 지휘하며, 병선 20척에 군졸 767명이 성에 상주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이 있었고, 임진왜란 후에는 서생포 수군동첨절제사영(水軍同僉節制使)으로 승격되어 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가 이곳에 머물렀다. 이후 인근 서생포 왜성으로 이동하여 한말까지 유지 되어 왔다. 성의 축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염포진성이 성종 21년(1490년)5월에 쌓은 것으로 보아 이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된다.

 

서생포 만호 진성 안내표지판
서생포 만호 진성으로 가는 오솔길

 

진성(鎭城)은 외적의 침입이 잦은 국경 및 해안 같은 국방상 중요한 곳에 쌓은 성이고 만호(萬戶)는 원나라의 제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무관직 벼슬이다. 본래 그가 통솔하여 다스리는 민호(民戶)의 수에 따라 만호·천호·백호 등으로 불리다가, 차차 민호의 수와 관계없이 진장(鎭將)의 품계와 직책 등으로 변하였다. 수군의 만호(萬戶)는 육군의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와 같이 종4품으로 만호의 임기는 진에 가족을 데려가지 않는 경우 900일이었다.

서생포 진성은 염포진성, 개운포 진성와 더불어 조선 전기 울산에 세워진 수군진성이다. 일반적으로 수군 진성은 해안가에 위치하고 성안에 우물이 있고 적에게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바다 쪽에서는 볼 수 없는 막힌 포구에 위치하며 인접지역과 연락이 편리한곳을 성터로 삼는다. 성곽은 산 구릉을 따라 곡선형으로 하고 성벽은 수직으로 쌓은 견고한 석축성이고 성곽의 반은 산 구릉 위에 걸친 반산성(半山城)이며, 성 주위에는 성지(城址)를 파고 망루대는 구릉 위에 세운다. 그리고 출입정문은 배 선착장과 연결되어 있다.

서생포 만호 진성은 북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와 합류하고 있는 회야강이 있어 수군이 활동하기 유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성곽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구릉의 경사지를 이용하여 돌을 쌓았는데, 산허리에서부터 시작하여 회야강이 흐르는 북쪽평지를 연결하는 형태이다. 현재 북쪽성벽은 멸실되어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수군진성의 특성상 병선을 정박시키는 선창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남아있는 성벽의 길이는 약 440m이며, 성벽너비는 4m, 잔존높이는 1~1.5m이다. 서쪽성벽에는 문지로 보이는 시설이 일부 남아 있으며, 그 외측에서 발굴조사를 통하여 해자가 확인되었다. 이 진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왜군에 의해 함락되어 파손되었다.

 

성벽 흔적이 엿보인다
남아 있는 성벽의 길이는 약  440m 이며 ,  성벽너비는  4m,  잔존높이는  1~1.5m 이다 .
서생포 만호 진성은 북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와 합류하고 있는 회야강이 있어 수군이 활동하기 유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  현재 북쪽성벽은 멸실되어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수군진성의 특성상 병선을 정박시키는 선창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생(西生)의 지명 유래는 『삼국사기지리지』에 “동안군(東安郡)은 원래 생서량군(生西良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라는 기록에서 처음 등장 한다. 서생(西生)에서 ‘서(西)’는 고음(古音)인 ‘새’에서, ‘생(生)’은 ‘내’가 되어 벌이나 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서생(西生)이나 생서량(生西良)·동안(東安)은 「밝아오는 동쪽 들」을 뜻하는 ‘새내’로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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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 해안가 두호(豆湖) 마을은 봉대산 아래 자리 잡은 어촌마을로 죽성리 200번지 일대이고 마을 북쪽에는 원죽마을, 남쪽에는 월전 마을이 있다이곳은 신라시대부터 해안 방어를 위한 수군 요충지로써, 특히 왜구 침입을 대비 한 곳으로 신라토성, 두모포 진성이 있다. 그리고 시조문학 대가 고산 윤선도가 이곳에서 유배되어 즐겨 찾던 황학대가 있고 마을 뒤 언덕에는 수령 300년 되는 소나무 다섯 그루와 마을 제당인 국수당의 어울림은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두호마을(죽성항) 전경으로 좌로부터 용두대, 황학대가 보인다
해송과 국수당

이곳 마을 바닷가 방파제에는 주말이면 낚시꾼과 캠핑을 즐기는 가족단위 여행객으로 만원을 이루며 바다 건너 맞은편은 옛날부터 명당이라 불리어지고 동해바다를 향해 뻗어있는 용두대가 있다. 또한 SBS 드라마 드림촬영장소인 성당이 있어 연인들로 붐비며 해안가의 넓고 장대한 바위는 시원한 동해바다를 느끼려는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다. 더불어 조선말 민초들의 아픈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사암이 있어 여행 맛을 더해 주고 있다.

SBS 드라마 드림 촬영장소

두호의 옛 이름은 두모포(豆毛浦)이고 우리말로는 두모개라 부른다세종실록에 두모포는 현의 동쪽 5리에 있는데, 수군만호가 지킨다고 하였다1765년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두모포영은 인조 7(1629)에 동래로 진을 옮겼다고 하였는데 그때 부산으로 옮기면서, 그곳 이름을 두모포진이라 불렀고 진영과 함께 이 곳 마을 이름까지 없어지게 되었다현재 육안으로 확인되는 두모포진성은 죽성천(청강천)이 굽어지는 곳에서 서남쪽으로 논을 가로질러 남아 있고 민가 뒤편 축대로 사용되고 있다.

마을 뒤 편과  논을 구분시켜주고 있는 두모포진성

고산 윤선도가 창작활동 했던 황학대(黃鶴臺)

마을 선착장 뒤에 위치한 황학대(黃鶴臺)는 원래는 송도(松島)라는 섬이었다고 하며 암반위에 소나무 숲이 있는 곳으로 옛날에는 주변이 백사장과 수령 백년의 해송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 지역 선비들이 모여 시를 짓고 놀았으며 남쪽 암벽에는 이곳 출신 진사 방치주(方致周)의 이름이 각인 되어 있다. 황학대의 이름 유래는 이곳으로 유배 온 고산 윤선도가 송도가 지형이 꼭 황학이 나래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이름을 짓고 매일 찾았다고 한다. 기장현읍지(機張縣邑誌) 형성조의하면 황학대는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고 기록되어있다.

황학대에서 보이는 용두대
황학대 남쪽 암벽에는 이곳 출신 진사 방치주 ( 方致周 ) 의 이름이 각인 되어 있다

고산 윤선도는 1616(광해군 8) 12월 전횡을 일삼던 예조판서 이이첨을 벌할 것과 유희분, 박승종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화가 되어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을 갔다. 그런데 국경지대의 귀양지는 중국인과 내통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1618(광해군 8)에 죄인들을 남쪽으로 옮겼는데 이때 윤선도도 기장으로 이배(移配)되었다. 기장은 한양에서 1,000리나 떨어진 변방에 위치하여 많은 선비들이 이곳 기장으로 유배생활을 했으며 조선시대 14번째 순위에 드는 유배지였다.

고산 윤선도가 이곳에서 지은 시조 영계(詠鷄)

고산 윤선도는 이곳에서 7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 시조 영계(詠鷄), 영일일화(詠一日花) 등 여섯 수를 남겼고 마을 뒷산 봉대산에서 자주 약초를 캐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여 마을사람들에게는 의원님이라 불렀다고 한다한 번은 어린 하인이 산에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 갔다가 신선같이 보이는 한 노인이 암석 이에 앉아서 시 한수를 써 주며, 돌아가서 네 어른(윤선도)에게 드리라고 하였고 이 어린 하인은 이를 받았는데 잠깐사이에 그 노인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봉래산 한 골짜기 남쪽 땅에 떨어지니 그 절경 천하에 드문 곳임을 알게 되었네. 산은 비단 병풍을 두른 듯 북쪽으로 비스듬히 따랐고, 개울물은 옥대를 두른 듯 동쪽을 돌아 흐르네. 나무 틈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빛은 언덕을 비추고, 안개 속에 내리는 저녁 비는 들녘에 자욱하네. 성긴 숲을 마주 앉아 한 마디 말과 솔솔 부는 바람에 푸른 담쟁이 넝쿨이 흔들리네.  

마을을 지키는 다섯 그루 해송과 국수당의 어울림

두호마을 뒤 나지막한 언덕에는 다섯 그루 해송과 제당이 오랜 세월 동안 마을을 지켜주며 바라보고 있다. 제당은 어부의 무사귀환, 풍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장소로서 당산할배 제당, 국수당, 또는 국시당이라고도 부르며 개벽 당시 하늘에서 신이 지상으로 내려올 때 제일 먼저 발을 디딘 곳이라는 전설에서 유래하여 부르게 되었다.

다섯 그루의 나무가 모여 마치 한 그루의 큰나무 처럼 보이는 해송으로 수령은 약300년으로 추정되며 직경 30m, 높이가 약 10m에 달한다. 국수당의 건립연대는 1933(癸酉年) 710일이라고 적혀있고 기와 맞배지붕에 벽은 돌을 쌓아 시멘트로 마감한 구조물이고, 문은 여닫이 외짝 나무문이다. 제당의 문에는 태극도형이 그려져 있다.

이곳에서 매년 1회 마을 제를 지내는데 마을 이장이 제관 또는 제주를 선정하여 정월 보름날 정오에 무당을 불러 제를 지낸다. 5년에 한 번씩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별신굿을 음력 정월 3일에 거행한다. 별신굿은 마을의 무속적 축제의 하나로 요즈음 풍어제라 부른다.

별신굿은 고대 부족국가의 제천의식이었던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등 국가적인 행사가 마을행사로 축소되고, 한편으로는 해변 어촌의 행사로 변천해 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에 따라 매년 또는 2, 3, 5, 7, 10년마다 행하는데 요즈음에는 행사의 빈도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별신굿은 마을의 평안과 풍어 및 선원의 안전을 기원하는 마을 축제로 무격들의 예능적 기능이 가미되어 무악(巫樂)과 창() 및 오락적 예능이 뛰어나 주민들을 동참케 하는 개방적인 축제이다.

뛰어난 풍광과 명당으로 유명한 용두대(龍頭臺)

용두대(龍頭臺)산봉우리가 세 겹으로 둘러싸여 해안에 있는 야산으로, 용두대 이름 유래는 산의 지세나 형태가 용머리처럼 생겼다고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두호 마을 방파제 북쪽방향 바다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고 정상에 올라서서 사방을 바라보면, 뛰어난 풍광만 아니라 지관들에 의하면 옛 부터 명당이라 하였다.

황학대 뒤에 보이는 용두대

기장현읍지(機張縣邑誌)명승조에 용두대는 "()의 동쪽 8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용두대의 지맥을 보면, 용의 머리에 붙은 용의 목 부분이 잘록하여 두 사람이 함께 걷기가 어려우며 양면이 날카롭게 생겼고 용의 허리는 완만하게 세번 굽어지고, 꼬리는 뚜렷이 한쪽으로 뻗어 있어 한 마리의 용이 바다에 떠 있는 형국(形局)이라 한다.

이 지방의 풍수가들은 황룡부해지형(黃龍浮海之形)이라 하여, 좌에 유온천(有溫泉) 하고, 용의 여의주처럼 용두대 앞 바다에는 큰 바위가 줄지어 서 있다고 한다.

드라마 드림 촬영장소 성당과 용두대

지금은 안타깝게도 천부교 집단 정착촌인 신앙촌 소유지로 갈 수가 없어 먼발치에서만 바라볼 뿐이다. 마을 방파제에서 용두대를 바라보며 여타 신앙촌은 유명무실하나 기장 신앙촌만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명당은 명당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용두대는 현재 천부교 신앙촌 소유지에 포함되어 있어 일반인 출입은 불가능하다

천부교(天父敎) 집단 정착촌인 기장 신앙촌

기장 신앙촌은 천부교에 의해 1970228일 기장읍 죽성리, 학리, 삼성리, 동부리, 신천리 일원의 약 130만 평 부지에 건설이 시작되었다. 천부교는 소사신앙촌(부천, 1957111), 덕소신앙촌(1962721), 기장신앙촌 등 신앙촌 건설을 했고 기장신앙촌이 제3신앙촌으로 불리며 가장 크다. 천부교 교리에 따르면 세상의 종말이 오면 감람나무가 나타나는데 천년성(千年城)인 신앙촌에 들어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천부교 죽성교회. 일반교회와 천부교회의 구별은 천부교회는 십자가 대신 감람나무 잎을 물고 있는 비둘기 상이 있다 .

이곳 기장신앙촌은 천부교 시온그룹 관련기업 한일물산주식회사(면직물, 의복류 제조업; 제과, 장유제조업), 시온합섬 공업주식회사(양말 제조업), 시온식품공업주식회사(다과류 제조업), 반도금속주식회사(볼트, 넛트 제조) 4개 회사가 있다. 건평 약 4만 평 속에 있으며 임직원 도합 약 1,200여 명이 된다. 2013년에 개교한 시온식품 과학고등학교는 비인가 대안학교로 운영 중에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생명물 두부와 생명물 간장, '' 요구르트, 신앙촌 스타킹 등 공산품이 많이 알려져 있다.

천부교는 개신교 장로 중 한 명이었던 박태선(1917~1990)1955년에 창시한 반기독교 성향의 신흥종교이다. 초기에는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 약칭 '전도관' 라 했다. 박태선은 평안남도 덕천시 출신으로 창동교회(김치선 목사)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고 1950년대에는 통일교와 함께 한국 신흥종교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1970년 기성교회의 심한 반대에 직면하였고, 19756월 장남 박동명의 7공자 사건으로 알려진 윤리적 스캔들까지 겹쳐 이미지가 악화되자 1980년 교리를 대폭 수정하고 한국천부교회로 개칭했다. 그 후 19902월 박태선이 사망하자 3남 박윤명이 뒤를 이어 교회를 다스리며 시온그룹 회장을 맡고 있다. 일반교회와 천부교회의 구별은 천부교회는 십자가 대신 감람나무 잎을 물고 있는 비둘기 상이 있다.

민초들의 아픔이 담긴 어사암(御史岩)

방파제에서 드라마 드림 촬영장소 성당을 지나 해안가에 넓은 바위군락을 만나 볼 수 있는데 남쪽 부분은 둥근 형태로 펑퍼짐하고 동쪽 부분은 한 마리의 매가 남쪽을 바라보며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양새라 하여 매바위 또는 응암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1882(고종 19) 암행어사 이도재(李道宰)가 다녀갔다 하여 해안가 바위에 글자를 새겼는데 이를 어사암이라고 불렸다.  이도재, 관기 월매 그리고 어사암(御史岩)이란 글자와 오언절귀가 새겨져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마모되어 알아 볼 수가 없다.

암행어사 이도재(李道宰)가 다녀갔다 하여 해안가 바위에 글자를 새겼는데 이를 어사암이라고 불렸다. 이도재, 관기 월매 그리고 어사암(御史岩)이란 글자와 오언절귀가 새겨져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마모되어 알아 볼 수가 없다.

어사암에 얽힌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894(고종 20) 일광 독이방(禿伊坊)에 있는 해창(지금의 문동리)에서 양곡을 가득 실은 조운선이 부산포로 향하다 이곳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계속된 가뭄으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던 어민들이 난파선에서 바다 밑에 흩어진 가마니 곡식을 건져 먹었다. 기장현청에서 이 같은 일은 절도라면서 관아에 붙잡혀 가혹한 고문으로 죽어나는 사람이 생겨났다.

한편, 조정에서는 정부양곡이 운반 중 수장되었다는 그 진상과 어민들이 곡식을 도둑질해 갔는지 등 파악하기 위해 이도재를 어사로 보내 조사를 하게 하였는데 현지 오찬에 참석했던 기장 관기 월매가 주민들의 어려운 사정과 그동안 관리들의 행패를 이야기하였다. 매바위에서 현장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함께 온 월매가 바위에서 춤과 노래와 교태로 어사를 즐겁게 하였다. 어사는 그간의 사건을 종합해 본 결과 바다 속에 그대로 두면 썩을 곡식인데 그것을 건져 먹은 것이 어찌 절도가 되는가 하면서 어민들을 모두 석방시키라고 하였고 그 자리에서 오언절구의 시를 짓고 어사암이라는 글자를 바위에 각자하였다.

천공경무물(天空更無物), 해활난위시(海闊難爲時),

환구구만리(環球九萬里), 일위가항지(一葦可航之).

하늘이 텅 비었으니 보이는 것이 없고,

사나운 바다는 시객을 위해 춤을 추는데,

저 멀리 돛단배는 언제 무사히 돌아오려나.

매바위에서 바라본 두호마을

그 후 세월이 흘러 그 각자가 비바람에 마멸되자 주민들은 그 당시의 이도재 어사의 은공과 기생 월매의 인정을 잊지 못하여 이형은(李衡殷)이라는 사람을 청하여 어사암에 이도재(李道宰)라는 성명과 기월매(妓月)라는 세 글자도 함께 새기게 하였다. 월매(月梅)는 뒤에 혼인하여 월매(月梅)라고 하지 않고 월매(月每)라고 각자를 하였다.

이도재 생사단비(李道宰 生祀壇碑)를 세우다

조운선 양곡 절도의 원만한 해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기리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이도재 생산단비라는 비를 세웠다. 생사단이란 고향 출신의 수령이 부임한 경우, 이의 탄생지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을 가리킨다이도재 생사단비는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92번지 기장초등학교 앞 기장공덕비군 내에 있다.

비의 재질은 석재이고 비석 머리는 둥글고 받침돌은 없다비의 앞면에는 비의 제목 수사 이공도재 생사단(繡史李公道宰生祀壇)’이라 되어 있고, 내용은 우리 고을에 왜 이리도 늦게 오셨나/ 그래도 하늘은 기필코 도우시네/ 수많은 폐단들을 모두 바로잡으시니/ 천추에 영원토록 기리오리다[來何暮兮 天必佑之 百弊咸正 千秌永祀]”라고 적혀 있다.

이도재 생사단비는 기장읍성 앞 기장공덕비군 內(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85-7번지)에 있다.

뒷면에는 광서 계미년[1883] 봄에 세우다[光緖癸未春立]’라고 적혀 있고 건립자에 관한 기록은 없다. 비의 크기는 높이 92.5, 너비 36, 두께 13이다.

수사 이공도재 생사단(繡史李公道宰生祀壇)
비의 앞면에는 비의 제목 ‘수사 이공도재 생사단(繡史李公道宰生祀壇)’이라 되어 있고, 내용은 “우리 고을에 왜 이리도 늦게 오셨나/ 그래도 하늘은 기필코 도우시네/ 수많은 폐단들을 모두 바로잡으시니/ 천추에 영원토록 기리오리다[來何暮兮 天必佑之 百弊咸正 千秌永祀]”라고 적혀 있다.

 

잊히어 가는 古城, 신라 토성

죽성리 3거리에서 원죽마을 방향의 죽성로와 월전마을 방향의 기장해안로 갈림길에서 기장해안로 따로 50m가면 좌측에 공동묘지가 있고 그 앞을 지나는 좌측 샛길을 따라가면 도자기를 굽는 소름요가 나온다소름요 입구에서 앞 구릉지에 있는데 예전부터 옹산이라고 불리우지고 있다이곳에 신라토성(기장읍 죽성리 631번지)이 있으나 철조망이 놓여 있어 출입을 할 수가 없다. 이유는 신앙촌 소유의 사유지이기 때문이다. 죽성리 왜성 또한 그렇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국가의 역할을 생각하게 한다.

소름요 입구에서 앞 구릉지에 있는데 예전부터 옹산이라고 불리우지고 있다.
이곳에 신라토성(기장읍 죽성리 631번지)이 있으나 철조망이 놓여 있어 출입을 할 수가 없다. 이유는 신앙촌 소유의 사유지이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소름요, 죽성항이 보인다.

사유지 안에 있어 방치 된 문화재 및 유적지는 국가에서 매입하여 발굴, 조사 연구하여 그 결과물을 국민에게 알리는 것이 선조들의 역사를 대하는 현 후손들의 바람직 행동 일 것이다. 역사를 통한 교훈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 일환의 시작을 국가가 하여야한다.

주변 신라시대 관련 유적으로 온산읍 봉화산 강양리 성터(하산성), 서생면 화정리 숙마산성 등 있는 것으로 주로 해안가의 강과 합수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회야강 중심으로 아래쪽에는 숙마산성, 위쪽에는 강양리 성터가 있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일본열도의 왜구가 배를 타고 서라벌까지 최대한 가까이 침입하는 통로를 합수지역에서 차단, 방호하기 위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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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한파에 바다가 얼었다. 어디일까? 주인공은 다대포해수욕장이다얇은 수심, 기수지역, 긴 모래사장의 조합이이라서 가능한 것 같다. 삭막한 코로나와 추운 겨울날씨 속에서도 나름의 기분전환을 위한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특히 아이들이 너무 좋아한다.

다대포해수욕장은 낙동강 하구 최남단에 위치한 해수욕장으로 길고 넓은 백사장과 고운모래와 얇은 수심으로 여름이면 피서객들에게서 인기가 많다. 낙동강물이 바닷물과 만나서 평균수온이 21도로 따뜻하고 수심이 300m 거리 바다까지 1.5m로 물놀이하기가 좋다. 또한 가까운 곳에 지하철이 있어 대중교통이용에도 좋다.

여름 해수욕장 이용할 때 가끔 너울성 파도가 생기는 관계로 해안에서 너무 떨어지는 것은 삼가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수심이 얕아도 중간 중간 웅덩이가 있어 염두에 두고 물놀이하면 당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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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25(15924)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일으킨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16세기 일본에서는 다도가 유행하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한 차를 좋아하여 다회를 자주 열었다고 한다. 이에 임진왜란에 참전한 왜군의 장수들은 수많은 조선의 도공과 사기장, 칠기장 같은 장인을 일본으로 끌고 갔다. 또한 장인 외에도 수 없이 많은 젊은 남녀를 끌고 가서 전쟁 노예로 삼아 상업적 이익을 취했다. 왜란 7년 동안 일본은 조선에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큰 만행과 악행을 저질렀다.

일본에 끌려 간 다양한 장인의 수는 기록에 따라 다르며,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10~ 20만 명, 일본 쪽에서는 56만 명으로 보고 있으나, 장인 외의 사람들도 일본에 끌려가서 포르투갈 상인에게 노예로 팔렸다고 하니 전체 인원은 파악하기가 어렵다. 참으로 천인공노할 짓을 일본이 하였다.

왜란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참담한 현장 중 하나가 죽성리 왜성(또는 두모포 왜성)이다. 이 왜성에서 도공을 비롯한 많은 장인들이 왜선을 통해 일본에 끌려 간 것이다. 이곳에는 서답골, 또는 세답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왜란 당시 전국에서 끌려온 수많은 도공들이 왜선에 타기 전 억류생활 하면서 빨래를 했다고 하여 세탁골이라 불리었다.

두호마을 뒷산 산정에 위치한 죽성리 왜성

 

1593(선조 26) 봄 왜군은 전남 여수에서 울산에 이르는 우리나라 동남해안 일대에 30여개의 성을 쌓고 이 성들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전으로 조선을 굴복시키려 하였다. 이들 왜성은 대개 강이나 바다에 근접한 구릉을 택하고 수송, 연락관계 등을 고려하여 선박의 출입이 편리한 장소에 성을 축성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죽성리 산 52-1일대의 죽성리 왜성은 이들 왜성 중 하나로 왜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인원 33000명 동원하여 축성한 것으로 인근 기장읍성과 두모포 진성 성벽 돌을 사용하였다. 이 왜성은 죽성포(두모포)만 서쪽의 서답골을 끼고 있는 두 개의 구릉을 중심으로 남쪽 높은 구릉(해발 64m)에 본성을 쌓고 북쪽 낮은 구릉(해발 45m)에 본성 방어를 위한 외성(지성)을 두른 형태다. 여기에 다시 본성과 외성의 서쪽 성벽 밖에 너비 7m 이상 구덩이(해자)를 길게 파 방어망을 강화했다.

죽성리 왜성 본성으로 올라가는 계단
죽성리 왜성 본성(해발 64m)
왜국으로 끌려간 도공들의 슬픔과 한이 맺힌 초목과 바위

성벽은 주로 화강암을 써서 70도 정도 경사지에 비스듬히 쌓았는데, 총 면적 2,600평에 둘레가 약 960m이고 성벽 높이는 약 4m이며 3단으로 축조했다. 외성 일부 구간에서는 수직으로 축조 된 성벽이 나타나는데 이는 기존의 두모포 진성과 연결시킨 것이다. 즉 기존 조선 수군 두모포 진성을 활용한 것이다. 죽성리 왜성은 청강천(죽성천)의 자연지형과 해자를 통해 북서쪽의 외곽 방어망을 강화하고 동쪽으로는 죽성만 포구를 감싸 안은 해안요새인 것이다. 이 성은 일본에서는 기장성이라고도 부르고, 왜란 중에는 울주군 서생포성(西生浦城)과 울산 학성(鶴城), 그리고 증산왜성(부산포성)을 연결하는 요충지 역할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유유히 동해로 흐르는 청강천(죽성천)

 

죽성천(竹城川), 청강천(淸江川)은 양달산(286m) 동쪽 산록에 있는 연곡저수지 일대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강으로 청강이라는 이름은 냇물이 너무 맑아 붙인 이름이다. 청강천을 장강(長江)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물이 맑아 물밑에 있는 돌조차 이끼 하나 끼지 않고 하얗게 되어 있다고 하여 ‘백설청강(白石淸江)’이라고 하였다.
바닷가에서 본 청강천 동해구
왜란 당시 도공들이 왜국으로 끌려갔던 죽성포(두모포)

죽성 지명은 이곳에 있던 성곽과 이곳에 죽이 많이 자생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곳에는 신라토성, 두모포 진성의 석축성(石築城), 또 임진왜란 때의 석축성인 왜성(倭城)이 있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의하면, “두모포는 현에서 동쪽 5리에 있고 수군만호(萬戶)가 수비하고 있다.” 라는 기록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두모포영은 수군만호가 있고 중종 5(1510)에 설치하였다.” 라는 내용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 기장현이 폐현되면서 두모포 만호영은 동래부 부산(釜山)으로 이전하였다. 죽성이 행정지명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이다.

죽성리 왜성 본성에서 본 두호마을 전경

현재 죽성리 왜성 입구는 철문에 의해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다. 땅 소유자인 신앙촌(천부교)에 대하여 기장군이 소송을 진행 중이다. 사유는 신앙촌이 문화재에 대하여 현상 변경을 하였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철문에 의해 닫혀진 죽성리 왜성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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