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처럼, 단풍 빛깔에 비치는 물결처럼, 이 모두 비단 빛의 물결이라서 비단 금(錦), 물 수(水)하여 금수(錦水)라고 하고 천년, 만년 동안 거울처럼 맑고 얼음처럼 차가운 금수가 사시사철 흐르는 골짜기가 금수동(錦水洞)이다. 금수(錦水)는 삼각산 박치골의 박천(朴川) 물과 불광산 백련암 계곡의 물이 합류한 청정한 물로써 이 아름다운 계곡인 금수동(錦水洞)이 장안사 계곡을 대표하고 있다.
장안사(長安寺)로 가기 위해 통과하는 초입 골짜기가 금수동(錦水洞)이고 멋있게 맞이하는 것이 금수동(錦水洞) 각석이다. 상장안 마을 첫 주차장과 둘째 주차장사이의 도로변 암벽에 錦水洞 세 글자를 초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그 유려함이 매우 뛰어나나 누구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그 옛날 금수동(錦水洞) 절경에 감탄한 유랑객이 필력을 다해 새겼으리라.
풍문에 의하면 이진순 현감, 본관이 능성 구씨인 선비 등이 썼다고 하며, 전설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손가락으로 썼다고도 한다. 원효대사는 그만큼 이 지역에서 인연이 많다. 금수동 글자 오른쪽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산수계원(山水契員)과 사람이름 12명이 새겨져 있어 양반들의 계모임인 산수계에서 12명이 이곳에 놀러 와서 기념으로 새긴 것 같다.
불광산(660m) 산록에 위치한 장안사(長安寺)는 673년(문무왕 13) 원효(元曉)가 척판암(擲板庵)과 함께 창건했다는 『송고승전(宋高僧傳)』의 기록이 있다. 처음 절 앞에 계곡이 양 갈래로 흐르고 있어서 쌍계사(雙溪寺)로 불리다가 809년(애장왕 10)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기장현 읍지(機張縣邑誌)』에는 선여사, 취정사, 안적사, 장안사 등을 원효가 창건한 4대 사찰로 기록하고 있다.
장안사(長安寺)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의 병화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1631년(인조 8년)에 중창하였고 1638년(인조 16년)에는 태의대사(太義大師)가 중건하였다. 1660년(현종 1) 김방한(金邦翰)이 지은 「장안사 대웅전기(長安寺大雄殿記)」와 2009년 대웅전 지붕 밑에서 중수 연도가 적힌 상량문인 「순치 13년 종도리 묵서명(順治十三年記宗道里墨書銘)」이 발견되어 확인결과, 1654년(효종 5년)에는 박수(朴秀), 김억문(金億文), 최춘매(崔春梅) 등 72명이 시주하고, 1657년(효종 8) 학능(학능), 충묵(沖墨), 원정(元正)스님 등이 2월 4일에 불사를 시작하여 5월 12일에 기둥을 세우고, 6월 7일에 들보를 올리는 상량을 하였으며, 1658년에 중수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장안사 대웅전은 2012년 8월 6일 보물 제1771호로 지정되었다.
1744년(영조 20)에는 대웅전 지붕 부분의 서까래 등을 교체·보수하였으며, 1951년에도 부분적으로 보수하였다. 1975년에는 처마를 다시 채색하였으며, 1987년에는 장안사 대웅전 지붕의 번와(翻瓦, 기와를 잇는 작업) 불사가 있었다.
현재 장안사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응진전, 명부전, 산신각, 설법전, 해동전, 불광전, 천왕문, 종각 등이 있으며 석조건축물에는 5층 석탑과 석등이 있다. 또한 경외 천왕문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대숲이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절터 주변에 있었던 부도(浮屠) 5기(基), 탑비(塔碑) 2기(基)를 옮겨 한 자리에 봉안하였다.
장안사 경내의 백미는 보물 제1771호인 대웅전(大雄殿)이다. 부산 지역 가장 오래된 다포식 목조 건축물로 1658년에 중수를 완성한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기둥과 대들보 등 주요 구조 부재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어, 건립 시기의 목조 건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 원형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건물 폭에 비해 건물 자체 높이가 높고 처마가 깊게 돌출한 팔작지붕을 갖기 있기 때문에 평면의 규모에 비해 웅장한 느낌을 준다. 대웅전 공포의 화려함에 이어 창호(窓戶)의 아름다운 미를 볼 수 있는데 살문 맨 아래에는 태극무늬, 중간 좌우에는 빗살(교살)과 솟을살(격자빗살), 그리고 맨 위에는 빗살과 원형의 꽃 살로 살문을 꾸며서 소목장의 뛰어난 미적안목과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건물로 측면에서 볼 때 팔(八) 자 모양을 가진 팔작지붕의 다포(多包) 양식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기둥 윗부분을 장식해 주는 공포는 기둥 윗부분 외에 기둥 사이에도 설치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전면 공포는 후면 공포나 좌우면 공포와도 양식의 차이를 나타내는 등 몇 차례에 걸친 공포의 보수·교체 흔적이 보인다.
대웅전 內 삼존불 중앙에는 석가여래, 왼쪽에는 약사여래, 오른쪽에는 아미타여래로 구성되어 있고, 본존불인 석가여래는 1659년 대화원(大畵員) 녹원(鹿元)을 비롯하여 편수(片手)인 명자(明紫), 학륜(學崙), 각인(覺仁)이 참여하여 불신(佛身)은 불석(佛石, 제오라이트), 양손은 나무로 조성한 석조 석가여래삼불좌상(石造 釋迦如來三佛坐像)으로 보물 제1834호이다.
턱이 짧은 방형의 얼굴에 콧날이 우뚝하며, 부드럽고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있다. 이 불상은 조성연대와 작가가 밝혀져 있어 17세기 중·후반 불교조각사 연구에 기준 작이 될 수 있고, 불석 제 불상의 본격적인 유행 시점에 제작되어 불상 재료 연구에 중요한 불상으로 평가된다. 후불탱화는 석가영산회상도(釋迦靈山會上圖)로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87호이다.
응진전(應眞殿)은 맞배지붕 겹처마의 정면 3칸, 측면 2칸 익공양식으로 1899년에 건립되었고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하는데 공포는 전반적으로 장식적인 성향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으며 겹처마를 통하여 공포 살미 초제공, 이제공의 연화 앙서형, 삼제공의 용두와 봉두의 화려함을 부각하였는데 19세기말 부산지역 사찰의 건축특성을 확인 할 수가 있다.
중앙의 주불은 석가모니, 왼쪽에는 미륵보살, 오른쪽은 제화갈라보살 그리고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85호인 석조 석가 삼존 십육 나한상이 모셔졌다. 후불탱화인 석가 영산회상도(釋迦靈山會上圖)는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88호이다. 나한은 석가여래가 열반한 후 미륵이 나타나기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이 세상에 있으면서 불법을 수호하도록 위임한 분들이다.
명부전(冥府殿)은 맞배지붕의 정면 3칸, 측면 3칸 익공양식으로 1744년 중건되었고 주불은 지장보살, 왼쪽에는 도명존자, 오른쪽은 무독귀왕을 모신 곳이며 지장전이라고 하고 지옥의 심판관인 모신 곳이라서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 뒷면에 봉안 된 지장보살도는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89호이고 석조 지장 시왕상은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86호이다.
육도에서 헤매는 중생들이 죽으면 염마대왕 앞에 나가 자기가 지은 죄악에 대해 엄격하고도 공정한 재판을 밭게 되는데 그 재판은 10대왕이 하게 된다.
설법전(說法殿)은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커다란 규모로 최근에 지었다. 안에는 금동 와불상(臥佛像)이 봉안되어 있다. 와불 복장(腹藏)에는 2001년 미얀마 마웅매이사(寺)의 승려 우뚜리야 사야도우가 기증한 진신 사리 3과가 봉안되어 있다.
삼층석탑에도 혜경선사가 태국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7과를 구해서 봉안하였다.
부도(浮屠)와 탑비(塔碑)
천왕문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대숲이 나타나는데 입구에 「원효 이야기 숲 안내도」 표지판이 있다. 이곳 원효 이야기 숲 초입에 고려말 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석종형(石鐘形) 부도(浮屠) 5기(基), 탑비(塔碑) 2기(基)가 있다. 절터 주변에 있던 이들을 장안사 종루 왼쪽에 옮겨졌다가 현재는 위치로 다시 옮겨져 있다. 원효 이야기 숲은 조성 중인 것 같다.
부도 가운데 문자가 새겨진 것은 선암당 명열대사(仙岩堂 明悅大師) 부도뿐이다. 명열대사 부도는 옥개가 생략되고 석종형으로 전면에 仙岩堂 明悅大師塔이란 명문이 있고 후면에는 가경(嘉慶) 3년(정조 22년, 1798년) 9월에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딴 기록은 글자가 마멸되어 판독할 수가 없다. 이 이외의 부도는 8각의 옥개석을 얹은 것이 있고 중대석과 하대석이 한 돌로 구성된 부도도 있으며 높이 147㎝의 부도도 있으며 모두 5기의 부도가 있다.
부도와 연관된 탑비(塔碑)는 2기가 있는데 그 하나는 1754년(영조 30, 건륭 19년)에 처음 세웠는데 1844년(현종 10, 도광 24년)에 다시 세운 「선교양종 월조당 대선사지탑비(禪敎兩宗 月照堂 大禪師之塔碑)」이고 다른 하나는 1775년(영조 51, 건륭 40년) 세운 「연파당대사 쾌주지비(蓮坡堂大師 快淍之碑)」다.
연파당 대사(蓮坡堂大師) 쾌주비(快淍碑)
蓮坡堂大師快淍之碑
乾隆四十年乙未九月日 上左錦察允澤
건륭 40년(1775) 을미년 9월 일 상좌 금찰 윤택
선교양종(禪敎兩宗) 월조당 대선사(月照堂大禪師) 탑비(塔碑)
禪敎兩宗月照堂大禪師之塔碑
師諱克存 俗姓張氏 車成人也 幼從粹寬定師落髮 長隨香坡
선사의 휘는 극존(克存)이오, 속성은 장(張)씨로 거성(車成) 사람이다. 어려서 수관정사(粹寬定師)를 따라 머리를 깎았고, 커서는 향파(香坡)를 따르며
粗味敎亻又 後隨靑霄 更參禪旨 老而彌傳來祖焰淸虛七代 年臨稀二卒恙
대략 교종의 가르침을 맛보았다. 그 뒤 청소선사(靑霄禪師)를 따르며 참선의 뜻을 알았으며, 늙어서는 조사 청허(淸虛)의 7대 뒤를 뒤이었다. 나이 72세에 병으로 죽었다
皈寂三日 周維禪光亙天 灵骨二枚 形具五色 一安長安 一安雲興寺
선사가 입적한 지 3일 뒤에 선광(禪光)이 주위를 두르며 하늘에까지 닿았고, 사리 2매가 다섯 가지 색을 갖추고 있었다. 하나는 장안사(長安寺)에 안치하고, 또 하나는 운흥사(雲興寺)에안치하였다.
世稀有 故樹塔焉 □□ 哲海平順 平學性玉 最屹有侃
이는 세상에 드문 일이므로 탑을 세워둔다. 철해 평순, 평학 성옥, 최흘 유간.
(乾隆十九年)甲戌四月日立 都監通政眞札
건륭19년 갑술년(1754) 4월에 세우다. 도감 통정 진찰
道光二十四年甲辰二月日 改立 定林
도광24년 갑진년(1844) 2월 다시 세우다. 정림
청룡등(靑龍嶝) 절단에 얽힌 전설
청룡등(靑龍嶝) 대한 전설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혜통국사와 독룡 관련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스님들 이야기다. 혜통국사(惠通國師)와 독룡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신라 효소왕 때 기장산(機張山=달음산)에 숨어 있던 독룡이 곰으로 화신하여 주민들에게 큰 해를 입히고 있었다. 당시 혜통국사(惠通國師)께서는 친히 기장산의 독룡을 퇴치하려고 기장현에 왔었다. 독룡은 동해용왕에게 빌고서 이곳 청룡등에 숨어 있었다. 혜통국사께서는 독룡이 청룡등에 숨어있는 것을 알고 밀단법(密壇法)으로서 독룡을 설유하였다. 그러면서 독룡이 다치지 않고 도망칠 수 있도록 청룡등의 기슭을 헐어주었다. 그러나 독룡은 황금 송아지로 변신하여 또 도망하였다. 그리고 다시 기장산 바위굴에 곰으로 화신하여 숨어 있는것을 찾아 곰에게 불살계의 자비설법으로 단속하였다.
그때 혜통국사께서 청룡등의 기슭을 헐어놓게 되자 두 갈래 쌍계는 한 갈래 계곡수로 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쌍계사를 장안사라고 고쳤고, 장안사는 독룡의 피해를 벗어나고 동해용왕의 가호를 받아 번성하고 있다고 한다.」
다른 하나인 스님들 이야기다
「장안사는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는데, 초기에는 쌍계사라 하다가 신라 애장왕께서 다녀간(809년) 후부터 장안사라 개칭되었다. 그때 이후부터 장안사는 찾아드는 방문객은 물론 치성 드리고 재 올리는 청탁이 날로 늘어나 매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따라서 식당을 담당하는 부중 취사 전담 말석 스님들은 너무나 바빠 허리 한 번 펼 사이도 없이 종일 식사 뒷바라지에 시달려야 했다. 피곤이 쌓여 몸은 매일 지쳐 있었고 밥 지을 땔나무도 산에서 채취해 와야 했다.
밥 짓고 반찬 만들고, 그릇 씻고, 그야말로 한시 반시도 쉴 틈이 없으니 몸은 파김치가 되어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기가 싫을 지경이었다. 짜증이 절로 나왔다.
“이놈의 절이 언제쯤이나 망할꼬?”
탄식조로 나오는 넋두리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 과객이 늦게야 찾아들어 그들과 함께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부중들의 넋두리를 듣던 과객이 말했다.
“절을 망하게 할 방책이 한 가지 있기는 한데, 그대들이 과연 그 일을 해 낼 수 있을지?”
은근히 부중들을 충동질하였다. 그러나 부중들은 귀가 번쩍 띄었다. 그들은 정색을 하고 다그쳐 물었다.
“정말로 방책이 있기나 합니까?” 힘없던 눈망울들이 번쩍 빛이 났다.
“어서 좀 일러 주십시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소.”
부중들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제야 과객이 방책을 일러주었다.
그것은 바로 절 앞을 감싸고 흐르는 청룡골 개천 물 때문이다. 청룡등(靑龍嶝) 끝자락 잘록한 부분을 절단하여 똑바로 직선으로 흐르게 하라. 그러면 절은 자연적으로 쇠퇴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청룡등 잘록한 부분이 비록 가늘기는 하나 장비라고는 괭이와 삽밖에 없는 그들로서는 여간 거창한 공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부중들로서는 워낙 시달려왔기에 그런 저런 것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당장 그 다음날 밤부터 일에 착수하여 교대로 밤을 새워가며 작업을 진행시켰다. 기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달 밝은 날 밤 공사가 거의 완공단계에 이르렀을 때였다. 절단 부위에서 시뻘건 피가 터져 나오더니 이어서 황금송아지가 뛰어나와 슬픈 울음을 세 번 울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서였다. 절로 찾아드는 손님이 하나 둘씩 줄어들더니 마침내 손님의 발걸음이 완전히 끊어지고, 절은 망해버렸다는 것이다.」
두 이야기의 결과는 서로 상반된 내용이다. 이 대목에서 청룡등(靑龍嶝)의 존재와 위치가 궁금하다.
신라 불교 사상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승려인 원효(元曉)
원효(元曉, 617~686)는 성은 설씨(薛氏)이며, 아명은 서당(誓幢)·신당(新幢).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불교 사상을 대표하는 사상가이다. 서로 다른 견해에 내재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차원 높은 통섭(通攝)의 원리를 추구한 화쟁사상(和諍思想)은 불교뿐만 아니라 한국 철학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당나라 유학을 포기한 뒤 당시의 선진적인 불교 사상을 섭렵하여 화쟁의 논리로 체계화하였다.
원효(元曉)]에게 경주가 자신의 역량을 펼친 곳이라면, 젊은 원효의 주요 활동지 가운데 하나가 울산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보이는 낭지화상(郞智和尙)에게 불법을 배우는 장면이나 지통(智通)과 교유하며 수행한 곳이 울산의 반고사(槃皐寺)와 영축산 일대이다. 원효는 울주군 두동면 대곡리에 있던 반고사에서 지내면서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과 『초장관문(初章觀文)』을 저술한 뒤 울주 영취산에서 수행하던 낭지 화상에게 보내 비평을 부탁하였다.
남긴 저서는 약 80부 200권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완본으로 현존하는 저서는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법화종요(法華宗要)』, 『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 『미륵상생경종요(彌勒上生經宗要)』,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이장의(二障義)』,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등 13부이다. 잔본(殘本)으로 현존하는 저서는 『화엄경소(華巖經疏)』, 『본업경소(本業經疏)』, 『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 『판비량론(判比量論)』, 『중변분별론소(中邊分別論疏)』,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 6부와 『해심밀경소서(解深密經疏序)』, 『미타증성게(彌陀證性偈)』 등 총 20여 종이다.
불광산(660m)은 대동여지도(1861년)에 기장현 장안의 주산으로 표기돼 있고, 조선 후기에 지어진 '차성가'에도 「불광산 솟았으니 사문법계 없을 손가(이하 생략)」라고 이곳의 경관을 노래하고 있다. 불광산의 다른 이름은 팔기산으로 '봉우리 8개로 이루어진 산'이란 뜻이다.
차성가(車城歌)는 기장의 명소·마을 등 140여 곳의 아름다움을 풍수지리에 맞춰 호방하게 노래한 기행가사다. 창작 연대는 1800년대 중반, 작자는 미상이다. 차성은 고려시대부터 불린 기장의 옛 이름. 차성, 즉 수레(車)와 성(城)은 나라의 해안 변경 군사상의 요충지를 암시하고 있다.
삼각산(425m)는 장안사 서쪽에 있는 산으로 전형적인 노년산지로 산봉우리는 왕릉처럼 둥그스레하나 산기슭은 가파른 편이다. 삼각산이란 삿갓모양의 3개의 봉우리가 동서로 나란히 솟아 있는데서 비롯되며, 기우제를 지내던 산이라고 한다. 즉, 이 삼각산을 삼신산으로 삼아 인근마을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고 그러면 꼭 단비가 내려 해갈이 되었다고 한다.
박천(朴川)은 삼각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천으로 박천(朴川)은 밝내 로서 예부터 신선한 곳으로 인식해왔다. 옛날 이 삼각산 아래 박천물에서 삼각산의 산정으로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숭배하는 제사를 올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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