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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보면 가끔 읍성을 만나는데 보통 바다와 가까운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주로 복원된 읍성을 마주보게 된다. 읍성은 해적, 즉 왜구로부터 고을을 방어 목적으로 축성한 것으로 행정기능과 군사기능을 겸하고 있다. 고려말에 처음 읍성을 축성했고 읍성 내부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거주하고 읍성 밖에는 지역주민이 거주했다. 읍성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조선총독부의 계획에 따라 해체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훼손되고 철거 된 자리에는 식민지 지배를 위한 시설부지로 활용되었고 군 및 읍사무소, 경찰서, 등기소 등이 건립됐다. 그리고 해방 후 도시화와 도로개설, 무관심 등으로 사라졌다. 현재 경주읍성, 언양읍성, 장기읍성, 낙안읍성, 고창읍성, 해미읍성, 홍주읍성 등이 남아 있다.
평산성(平山城)인 기장읍성의 위치는 토성(土城)인 기장읍 교리 일대와 석성(石城)인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 일대이다. 현재 읍성의 형태를 볼 수 있는 곳이 동부리 기장초등학교 주변과 서부리 일대이다. 기장초등학교 주변은 공덕비군(功德碑群)과 더불어 나름 옛 멋이 남아 있고 서부리 일대는 복원되어 정비된 모습이다. 특히 기장읍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죽성리 왜성을 축성하면서 필요한 돌을 기장읍성을 사용하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동부리 일대에는 동헌과 우물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기장초등학교를 지으면서 허물어 사라졌다. 교리 일대의 읍성(古邑城)은 고려 우왕(禑王:1374∼1388년)때 왜구의 침입으로 함락되어 관아가 모두 불에 전소되었다. 이후 다시 축조된 것이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 일대의 읍성이다.

석성(石城)인 동부리 주변에는 동헌과 우물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기장초등학교를 지으면서 허물어 사라졌다.
기장초등학교 주변은 읍성과 더불어 공덕비군(功德碑群)이 있어 나름 옛 멋이 남아 있다.
기장군에 산재해 있는 공덕비 36기를 1972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이 곳에는 관찰사비 7기, 수군절도사비 1기, 어사비 1기, 현감비 14기, 군수비 5기, 아전비 2기, 객사건성비 1기, 교량건성비 1기, 교량개축 등 2기, 기타 3기 등 있다.
기장 죽성리 두호마을에서 발생한 조운선 양곡 절도의 원만한 해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기리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이도재 생사단비가 여기에 있다. 생사단이란 고향 출신의 수령이 부임한 경우, 이의 탄생지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을 가리킨다.
비의 재질은 석재이고 비석 머리는 둥글고 받침돌은 없다. 비의 앞면에는 비의 제목 '수사 이공도재 생사단(繡史李公道宰生祀壇)' 이라 되어 있고, 내용은 '우리 고을에 왜 이리도 늦게 오셨나/ 그래도 하늘은 기필코 도우시네/ 수많은 폐단들을 모두 바로잡으시니/ 천추에 영원토록 기리오리다[來何暮兮 天必佑之 百弊咸正 千秌永祀]'라고 적혀 있다. 뒷면에는 '광서 계미년[1883] 봄에 세우다[光緖癸未春立]'라고 적혀 있고 건립자에 관한 기록은 없다. 비의 크기는 높이 92.5㎝, 너비 36㎝, 두께 13㎝이다.
비의 재질이 화강암이 아닌 철로 된 공덕비.
귀부를 가진 공덕비

일반적으로 읍성의 내부에는 객사(客舍)와 동헌(東軒), 외부에는 사직단(社稷壇), 문묘(文廟)와 같은 제사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읍성은 군사기능을 겸하고 있는데 평시에는 주민들은 성 밖에 거주하다가 유사시에 성 내로 들어와 방어를 한다.
왕 또는 국가를 상징하는 객사는 조선시대 관아건물로서 임금을 상징하는 闕牌(임금을 상징 하는 궐자를 새긴 위패)와 대궐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보관하고, 고을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망배를 드린 곳이며, 행정업무와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객사구조는 일반적으로 궐패를 모시는 정청(正廳) 또는 주사(主舍)와 좌우 한 단계 낮은 건물인 동〮 서 익랑, 또는 익사(翼舍)로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학교건물과 관청 건물로 사용되었다.
수령의 근무처인 동헌은 간혹 객사 정청과 같이 쓰이나 객사와 나란히 배치 되어있다. 주로 장방형의 평면에 마루방과 온돌방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 많다. 수령의 숙소이자 안채인 내아(內衙), 내사(內舍), 서헌(西軒)이 있다. 부속 건물로 지방출신 인물들의 자문기관인 향사당(鄕士堂), 향청(鄕廳), 군사업무를 보는 군관청, 도둑을 잡는 등 치안을 보는 토포청, 아전, 6방이 집무하는 작청, 등 있다.
읍성의 위치는 군사 방어목적과 백성생활을 위해 배산임수(背山臨水)형의 지형에 각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발달한 곳에 자리 잡았다. 따라서 구릉지와 평탄지를 일부씩 포함하여 축조 된 평산성(平山城)이다.

서부리 일대 기장읍성은 복원되어 정비된 모습이다. 특히 기장읍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죽성리 왜성을 축성하면서 필요한 돌을 기장읍성을 사용하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성벽은 고려시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나 조선시대에는 주로 돌로 쌓은 석성이고 성을 쌓을 때 내부는 비탈이나 경사로 처리하고 외부 성벽만 쌓는 편축성(片築城)과 평지에서 내외·부 모두 쌓는 협축성(挾築城)이 있다. 특히 돌을 쌓아 올릴 때 밑쪽은 밑돌보다 윗돌을 약간 들여쌓는 퇴물림 쌓기와 반대인 내쌓기가 있다.
성벽 방어를 위해 성벽위에 낮은 담장을 올린 여장(女墻)도 갖추기도 하고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직사각형 또는 반원형의 구조물 치(稚), 치의 일종으로 성벽 모서리 부분에 설치한 각루(角樓), 성벽의 주변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낸 해자(垓字) 등 있다.
성문은 성벽에 개구부를 내 출입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홍예문이 많다. 문비, 즉 문짝은 목재판문으로 제작하여 바깥쪽에는 철엽을 씌어 화공 등에 대비하였고 홍예문 위에는 목조로 누각으로 설치 한 문루를 지어 장수의 지휘소 기능과 적을 감시하는 기능을 겸하였다. 또한 성문 보호를 위해 성문을 밖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외부에 설치한 이중 성벽인 옹성과 성문에 좌우에 설치한 치(稚)인 적대가 있다.

기장읍성 주변 골목길에서 본 돌담

『문종실록(문종실록)』에 “기장현 읍성은 주위가 1,527척(척), 높이가 11척이고, 여장(녀장)의 높이는 2척이며, 적대가 6개소, 문 3개소인데 옹성이 있고, 여장이 383개이며, 성안에 우물이 1개소인데 판 깊이가 20척이고 물의 깊이는 1척이며, 성밖의 방천(방천)에서 성을 뚫고 물을 끌어들여 못을 만들어 저수하였는데 깊이는 1척이며, 해자(해자)는 아직 파지 않았습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을 통하여 읍성의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으나 적대가 6개이고, 옹성이 돌려진 성문이 3개소이며, 여장이 383개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에는 읍성을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50보(步)이며 성내에 못과 우물이 각각 하나씩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각종 읍지(邑誌)에는 읍성이 석축으로 둘레가 3,197척이고 성 높이가 12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교리 일대의 읍성(古邑城)은 고려 우왕(禑王:1374~1388년)때 왜구의 침입으로 함락되어 관아가 모두 불에 전소되었다. 이후 다시 축조된 것이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 일대의 읍성이다.
교리근린공원 내 기장읍성은 부경문물연구원에서 2012년 지표 및 표본조사와 2014년 정밀조사를 한 결과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건물지를 확인하였고 청자류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기장의 옛 이름은 갑화량곡(甲火良谷)이고 별호(別號)는 차성(車城)이다. 갑화량곡은 "큰 마을" 이라는 의미로 옛 지명에 갑(甲)은 “크다”의 뜻이고, 화(火)는 "불" "벌"로서 곧 마을이나 성을 뜻한다. 기장이라는 지명은 두 가지로 보고 있는데, 첫째는 옥녀직금설로 기장은 옥황상제의 옥녀가 이곳에 내려 와서 베틀(織機)을 차려서(張) 비단을 짜고 (織錦) 물레질(紡車)을 한 곳(城)이기 때문에 베틀 기(機)와 베풀 장(張)으로서 기장(機張)이라 하였고, 둘째로 대읍성설(大邑城說)은 “갑화량곡”과 같이 큰 마을이라는 의미다.
삼국시대 기장지역은 지증왕 6년(505) 거칠산국(居漆山國)의 갑화량곡(甲火良谷)에서 동래군의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으로 개편되었고, 신문왕 때(685)에 9주 5소경의 군현제 개편시 삽양주에 편입되었다. 그리고『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장은 원래 갑화랑곡현(甲火良谷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757) 12월 양주(良州)관내 동래군 기장현으로 고쳤다”고 한다.


속오군을 지휘, 통솔한 기장 장관청(機張 將官廳)
기장 장관청은 조선 후기 동남해변을 지키던 기장 지역의 속오군을 지휘·통솔하기 위해서 파견된 군·장관들이 사용하던 집무소이다. 당초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에 지붕은 팔작지붕이었으나 건립된 후 몇 차례의 개·보수를 거쳐 오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변형이 이루어졌고, 특히 개인 주택으로 사용되면서 외관은 정면 8칸, 측면 2칸으로 크게 변형되었으며, 기와는 누수를 막기 위해 시멘트를 덮어서 지붕 윤곽만 겨우 드러난 상태였다.

건물 내부에 대한 조사 결과 대들보, 서까래, 도리, 기둥 등 주요한 구조부재 등이 원형대로 남아 있어 2013년~2014년에 걸쳐 전면 해체 보수를 실시하였고, 해체 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1835년(헌종 5)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기장 장관청은 동래부의 장관청(부산광역시지정 유형문화재 제8호)과 함께 전국적으로도 남아 있는 사례가 드문 관아 건물이다. 조선 중기 이래의 간소한 굴도리식 건물로써 건축사적으로 크게 주목될 뿐 아니라 문화재적 가치도 뛰어나며, 조선 후기 부산 및 기장 지역 관아 건축의 양상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건축 유구(遺構)로 우리나라 동남해안의 전략 요충지였던 기장군의 역사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2008년 12월 16일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7호로 지정·보존되어 오다가 건물의 중요성 및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3월 18일 부산광역시지정 유형문화재 제153호로 승격되었다.

장관청에서 본 서부리일대 기장읍성
기장읍성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는 부산시 지정 근대건조물로써 지붕의 기와형태가 일본식 구조이다
기장역 주변 한국철도공사가 소유하는 건물로써 과거 관사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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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면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화정리(禾亭里)는 북으로는 온양과 온산, 동으로는 회야강이 흐르면서 온산과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서생 그리고 서쪽으로는 위양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 들판은 화장들이라 하고 옛날 이 지역에는 서생포 만호 진성과 숙마산성 등이 있어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화정리는 신라 때는 샛내, 조선 예종 때는 술이리라 하였고 정조 때는 수마리(水麻里)라 하였다. 300년 전 김해 김씨(金氏)와 남양(南陽) 홍씨(洪氏)가 입향(入鄕)한 것으로 전해지고 김씨와 홍씨는 처남 매부지간으로 지내오고 있다고 한다. 화정리는 화정마을과 술마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화정마을은 진하리 위에, 술마마을 아래에 위치하고 마을 앞으로 국도 31호선이 지나고 있다. 서생포 만호 진성이 화정터널 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비록 바다가 마을에서 가깝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벼농사보다는 과수와 원예 그리고 채소를 많이 키워 울산으로 팔고 있다. 특히 가을이 되면 국도변에 간이 상점을 만들어 배와 감 등 과일과 무·호박 등 채소를 팔아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술마마을은 화정마을 위에 위치하고 윗술마와 아랫술마로 나누어져 있다. 두 마을 모두 국도31호선에서 안으로 들어간 자리에 있으며 가구수도 윗술마가 7가구, 아랫술마가 16가구로 모두 23가구의 한적하고 조용한 농촌마을이다.

숙마산성은 술마마을의 남서쪽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어 먼저 술마마을을 찾아야 한다. 술마마을에 도착하여 술마길로 마을초입을 지나 안쪽으로 가면 술마마을회관을 만나고 계속 시멘트 외길을 따라 올라간다. 마을을 벗어나 골짜기로 진입하여 좁은 시멘트 길로 가다보면 골짜기 좌측에 농막이 조성된 여러 곳을 보게 된다.

마을을 벗어나 골짜기로 진입하여 좁은 시멘트 길로 가다보면 골짜기 좌측에 농막이 조성된 여러 곳을 보게 된다 .

이들을 지나 얼마 못가서 숙마산성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산성에 도착하여 살펴보면 대부분 무너져 있어서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성내의 시설과 축조 시기, 성격 등을 밝히기 위해서는 추가 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 마성(馬城)으로도 별칭 되는 이 성은 골짜기에서 산정의 능선까지 연결되는 석축성으로 보고 있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길이는 300m 정도이다. 성벽은 먼저 가공된 화강암으로 기단부를 만든 후 그 위에 사람머리 크기보다 조금 큰 돌을 가로쌓기 방법으로 협축 하였으며, 내부는 사람머리 크기의 화강암으로 막채우는 방법으로 마무리하였다. 잔존높이는 50㎝∼110이며 폭은 310정도이다.

숙마산성 안내판. 산성을 살펴보면 대부분 무너져 있어서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성내의 시설과 축조 시기, 성격 등을 밝히기 위한 추가 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
마성 ( 馬城 ) 으로도 별칭 되는 이 성은 골짜기에서 산정의 능선까지 연결되는 석축성으로 보고 있지만 ,  현재까지 확인된 길이는  300m  정도이다 .

 

성벽은 먼저 가공된 화강암으로 기단부를 만든 후 그 위에 사람머리 크기보다 조금 큰 돌을 가로쌓기 방법으로 협축 하였으며 ,  내부는 사람머리 크기의 화강암으로 막채우는 방법으로 마무리하였다 .  잔존높이는  50 ㎝∼ 110 ㎝ 이며 폭은  310 ㎝  정도이다 .

숙마산성을 지나 50m 올라가면 용곡산 하늘길을 조우하고 울산전파관리소를 만날 수 있다. 용곡산 하늘길이라고 부르는 이 코스는 용곡산, 용골산, 울산전파관리소 중심으로 출발점은 동서남북으로 다양하다. 주로 발리에서 출발하여 서생포 왜성, 진하해수욕장 또는 송정마을로 도착하는 코스이나 위양리 위곡마을 위곡2, 나사리 봉화산 해맞이로 , 화정리 술마마을 술마길, 용리 덕골재길, 등 원하는 루트를 선택할 수 있다.

숙마산성을 지나  50m  올라가면 용곡산 하늘길을 조우하고 울산전파관리소를 만날 수 있다 .
「 용곡산 하늘길 」 이라고 부르는 이 코스는 용곡산 ,  용골산 ,  울산전파관리소 중심으로 출발점은 동서남북으로 다양하다 .  주로 발리에서 출발하여 서생포 왜성 ,  진하해수욕장 또는 송정마을로 도착하는 코스이나 위양리 위곡마을 위곡 2 길 ,  나사리 봉화산 해맞이로  ,  화정리 술마마을 술마길 ,  용리 덕골재길 ,  등 원하는 루트를 선택할 수 있다 .

숙마산성을 마성이라고 보는 이유는 흥려승람(興麗勝覽)[1934]에 숙마성에 대해 일명 마성이라고 하며 서생에 있는데 언제 쌓았는지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고 울산읍지 고적조[1934]에도 숙마산성을 마성이라고 전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숙마성의 숙마(熟麻)는 말을 기른다는 의미를 지닌 숙마(熟馬)의 잘못된 표기로 판단하고 있고 입지나 축조방식이 울산지역 방어진 목장과 유사하여 일반적인 전투성과는 다른 모습이 보여 조선시대 이길곶 목장으로 보고 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1469],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의하면 울산 지역에 방어진 목장, 방암산 목장, 이길곶 목장 등 모두 3개의 목장이 설치되었으나, 이후 방암산 목장과 이길곶 목장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두 목장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폐지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성(馬城)은 말이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목장 둘레를 돌로 막아 쌓은 담장으로 목장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근세까지 국가에서 말 산업을 관장했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때 국영 말 목장이 174개소나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초기부터 군사, 교통 등 필요에 따라 많은 국영 목장을 설치했고 고려사에도 대표적인 말 목장 8개소가 등장한다. 조선시대에는 강원도를 뺀 제주와 전국7도 관찰사 아래 말 목장 감목관을 뒀다. 감목관은 외관직으로 말 목장을 관리했고 30개월 만기 종6품관으로 전국에 21명이 있었다고 한다. 가장 규모가 큰 목장이 제주목장이고 그 밖에 강화도, 진도, 도련포, 등 유명했다. 조선 초기 말 목장은 59개소에 불과했으나 순종 때는 172개소로 말 목장을 국가 관장사업으로 육성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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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앞들에서 본 신리해수욕장
봉화앞들에서 본 봉화산

봉화산은 해발 117m로 서생면 나사리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이다나사 해수욕장과 간절곶을 품고 있는 봉화산은 산악 자전거와 트레킹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용곡산 하늘길이라고 부르는 이 코스는 용곡산, 용골산, 울산전파관리소 중심으로 출발점은 동서남북으로 다양하다. 주로 발리에서 출발하여 서생포 왜성, 진하해수욕장 또는 송정마을로 도착하는 코스이나 위양리 위곡마을 위곡2, 나사리 봉화산 해맞이로 , 화정리 술마마을 술마길, 용리 덕골재길, 등 원하는 루트를 선택할 수 있다.

용곡산하늘길 종합안내도

봉화산은 국도31선을 따라 간절곶 방향으로 서생면사무소를 지나 신리해수욕장 뒤편 안내표지판과 함께 카페 HI FLORA를 찾으면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봉화산 정상에는 조선전기에 축조 된 나사봉수대(羅士烽燧臺) 또는 서생 이길 봉수대(西生爾吉烽燧臺)라고 불리는 연변(沿邊) 봉수대가 있다. 이 봉수대는 제2로 봉수로에 속하는 간봉(間烽) 중의 하나로 간비오 봉수대(干飛烏烽燧臺) 시작으로 기장군 장안읍 아이 봉수대(阿爾烽燧臺), 북쪽으로는 온산읍 강양리 하산봉수대(下山烽燧臺)로 차례로 연결된다.

봉화산은 국도31선을 따라 간절곶 방향으로 서생면사무소를 지나 신리해수욕장 뒤편 안내표지판과 함께 카페 HI FLORA를 찾으면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봉화산 초입 길은 시멘트길이나 200m정도 지나면 비포장길을 만난다.
봉화산 정상에는 조선전기에 축조 된 나사봉수대(羅士烽燧臺) 또는 서생 이길 봉수대(西生爾吉烽燧臺)라고 불리는 연변(沿邊) 봉수대가 있다.

이곳의 봉수대는 불을 지피던 연대(煙臺)의 평면형태는 말각방형에 가까우며 하부둘레 30m, 높이는 250cm내외이다. 연대의 동쪽은 많이 허물어진 상태이나 남쪽이 비교적 양호하게 잘 남아있다. 연대 상부 중앙에는 원형의 연소실이 잘 남아 있는데 직경 220 ~ 230cm, 높이 60~70cm, 상부 폭 80cm 이다. 또한 남쪽과 북쪽에 걸쳐 상부 폭 90cm의 단면 U 자형 출입시설이 있으며, 연대 주위에는 남쪽을 제외한 3면에 방어용 ()시설이 있는데 폭 3.5m이다.

 

문헌에 나타난 것은 1425년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부터이며, 이후 각종 지지서(地誌書)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 축조되었고, 1895(고종 32) 전국 봉수 제도가 철폐되면서 폐지되었다. 경상도지리지에 울산군 소속의 이길 봉화(尒吉烽火)는 북쪽의 하산 봉화(下山烽火)39340보의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봉수(烽燧)는 봉화(烽火) 또는 낭연(狼煙)이라고도 하는데, 조망이 유리한 높은 산에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는 군사통신제도이다. 역마(驛馬)나 인편(人便)보다 시간이 단축되어 지방의 변고나 국경지방의 병란 등을 중앙과 진보(鎭堡)에 신속히 전달하여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는 군사통신 네트워크로,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안위를 지키는 목적으로 설치, 운영되었다.

우리나라의 봉수제도는 삼국시대 초기부터 사용되었다. 三國遺事駕洛國記에 의하면,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하기 위해 봉화를 사용했다는 기록에서 봉수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봉수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들이 나타난다. 高麗圖經에는 인종 원년(1123) 송나라 사신들의 도착 사실을 흑산도에서 왕성까지 봉화를 순차적으로 밝혀 중앙에 보고한 기록이 있으며, 高麗史에도 봉수 관련 기록들이 확인된다. 의종 3(1149) 봉수의 거화수를 규정하고 봉수군에게 생활대책을 마련하고 감독책임자를 배치한 기록, 우왕 3(1377) 강화에서 봉화를 올려 왜의 침입을 알린 기록, 우왕 14(1388) 왜의 침입에 따라 밤마다 봉화가 여러 번 올랐다는 기록 등이 이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는 종래에 계승되어 온 고려의 봉수제를 근간으로 세종 대에 5거제를 비롯한 조직과 기능을 전국적으로 확립하였다. 세종 원년(1419) 봉화의 수를 5거제로 구분하였으며, 세종 5(1423)에 중앙의 경봉수로 최종 집결하는 5거제의 노선이 확립되었다. 또한 세종 28(1446)부터 29(1447)까지의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봉수제 전반에 걸쳐 체제를 정비하여 봉수제를 확립하였다. 이는 經國大典의 봉수조에 실린 규정의 원형을 이루었다.

이길봉수대에서 본 나사리 바다

 

그러나 봉수는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안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전쟁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정작 제구실을 하지 못하거나 잘못 전달되는 등의 폐해가 많았다. 이로 인해 선조 30(1597), 서발(서울-의주), 북발(서울-경원), 남발(서울-동래)3대로를 근간으로 한 파발제도를 실시하여 이를 보완하였다. 이후 봉수제는 근대적인 통신방식이 도입됨에 따라 고종 31(1894)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봉수제가 확립된 조선시대는 전국의 봉수를 두만강, 압록강, 경상도, 전라도의 국경지역을 기점으로 5로의 직봉을 설치하여 경봉수인 중앙의 목멱산에 집결되도록 하였다. 여기서 제1·3·4로는 여진족 등 북방민족의 침입을, 2·5로는 왜의 침입에 대한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구축되었다.

봉수는 설치 목적과 성격에 따라 경봉수(京烽燧내지봉수(內地烽燧연변봉수(沿邊烽燧) 등으로 구분된다. 경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봉수로서 서울의 목멱산봉수가 이에 해당한다. 연변봉수는 해륙변경의 제1선에 설치하여 위치상 적의 접근을 알리는 최초의 봉수대인데, 적의 공격 목표가 되기 쉬운 시설물이었기 때문에 유사시에 대처할 수 있는 화기와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내지봉수는 육지의 내륙에 설치되어 연변봉수와 경봉수를 연결하는 중간봉수의 역할을 하였다. 그 밖에 군사적 요충지에 자체적으로 설치하여 한시적으로 운영한 권설봉수(權設烽燧)가 있다.

봉수대는 크게 중심시설과 보조시설로 대별된다. 중심시설은 봉수의 주기능인 대응봉수 간의 후망을 통한 신호전달의 시설로서 연조, 연대, 방호벽 등이 있다. 보조시설은 봉수대 군영을 위해 축조된 생활 관련 시설로서 주거지, 창고 등이 있다.

봉화산 초입에 위치한 카페 HI FLORA의 랜드마크인 호접란
호접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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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기수원지는 양산시 동면 법기리 340번지에 위치한 수원지로 일제 강점기 때인 1927년에 착공하여 1932년에 준공한 흙댐으로 건립한 수원지다수원지의 최고 수위는 197.23m, 수심 14.7m, 높이 21m, 길이 260m, 둘레 6m이다. 총저수량 157만 톤으로 현재 수원지의 물은 범어사 정수장으로 보내어 정수된 뒤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노포동, 청룡동, 남산동 일대 약 7,000여 세대에 공급하고 있다.

법기 수원지는 건립 이후 일반인에게 출입이 금지 되었으나 20117월 수원지 전체 68중에서 둑 주변과 수림지” 2만여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개방 이후 많은 관광객이 찾아와서 수목의 아름다움을 만끽 느끼고 간다. 이곳의 동식물 보호를 위해 음식물 반입을 금지하고 있다. 처음 왔을 때는 다람쥐 무리를 자주 보았는데 두 번째 왔을 때는 다람쥐는 보이지 않고 청설모가 보였다.

히말라시다(개잎갈나무)는 수령 98년으로 원산지가 히말라야 산맥으로 주로 히말라야 산맥 서부와 아프가니스탄 동부에 분포하고 있다. 평균 높이는 30m로 관상수로 이용되고 있다.

법기 수원지 안으로 들어서면 거대하고 장대한 히말라시다(개잎갈나무)에 압도되어 감탄사를 연발케 한다. 수령 98년으로 원산지가 히말라야 산맥으로 주로 히말라야 산맥 서부와 아프가니스탄 동부에 분포하고 있다. 평균 높이는 30m로 관상수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 수원지 수림지에는 히말라시다 59그루, 편백 413그루, 가래(추자)나무 25그루, 반송 14그루, 벚나무 131그루, 은행나무 3그루, 감나무 1그루 등 총 7644그루가 자라고 있다.

인간에게 유익한 피톤치드로 유명한 편백나무도 높이 30m로 수령 98년이다. 그리고 가래나무는 높이 20m로 수령 또한 98년이다. 댐 마루에 있는 7그루의 반송은 수령이 88년에서 138년으로 칠형제반송이라 부르고 있다.

당시 법기수원지 관사를 화장실로 개조하여 사용 중
반송나무
댐 마루 칠형제반송을 향하는 하늘계단(123개의 계단). 댐 마루에 있는 7그루의 반송은 수령이 88년에서 138년으로 칠형제반송이라 부르고 있다.
법기 수원지의 최고 수위는  197.23m,  수심  14.7m,  높이  21m,  길이  260m,  둘레  6m 이다 .  총저수량  157 만 톤으로 현재 수원지의 물은 범어사 정수장으로 보내어 정수된 뒤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  노포동 ,  청룡동 ,  남산동 일대 약  7,000 여 세대에 공급하고 있다 .
멀리 보이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취수탑
댐 마루 칠형제반송 중 한그루

수목의 수려한 모습과 수원지의 조화로 절경을 이루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과거 부산 군수 사령관 때인 19606월에 이곳에 와서 낚시를 하며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취수터널 상부에는 일제강점기 2차례(3, 5)의 조선 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트가 준공식(1932) 때 석각한 글로 원정윤군생(源淨潤群生)이 있다. 의미는 깨끗한 물은 많은 생명체를 윤택하게 한다.”이다. 사이토 마코트는 3대 조선 총독으로 있을 때 문화정치로 민족말살 정책의 장본인으로 독립운동가 강우규 의사의 폭탄투척에 살아남은 자이다.

사이토 마코트가 3대 조선 총독로 191992일 취임할 때 남대문 역에서 사이토 마코트의 마차에 강우규 의사가 폭탄투척을 하였으나 수행원, 일본경찰 등 37명의 사상자만 나왔다. 당시 강우규 의사의 나이는 65세였다 거사 15일 뒤 일본순사에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사이토 마코트는 1936년 일본군부의 급진파 청년장교에 의해 친영미파로 지목되어 암살되었다.

취수터널 입구이며 석축상부에는 일제강점기 2차례(제3대, 5대)의 조선 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트가 준공식(1932년) 때 석각한 글로 원정윤군생(源淨潤群生)이 있다. 의미는 “깨끗한 물은 많은 생명체를 윤택하게 한다.”이다.
인간에게 유익한 피톤치드로 유명한 편백나무도 높이 30m로 수령 98년이다.
가래나무는 높이 20m로 수령 또한 98년이다
가래나무와 반송이 하늘을 덮고 있다.

동면(東面)의 유래는 양산읍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법기는 1897년 본법과 창기 마을이 합쳐져 만들어졌고 본법마을은 그 이전에 본의곡이라 불렀으며 1872년에 본의리, 그 후 본법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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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군 서생면의 특산물인 서생 배는 맛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해안 가까이 과수원이 있어 육풍과 해풍의 절묘한 조화로 맛이 좋을까그리고 서생 배와 함께 해안 경관 또한 아름답다서생면 해안은 신암, 신리, 나사항부터 시작하여 나사해수욕장, 간절곶, 송정공원, 솔개공원, 솔개해수욕장, 대바위공원, 진하해수욕장으로 절경이 이어진다.

카페를 찾는 사람, 트레킹을 하는 사람, 낚시를 즐기는 사람 등으로 주말이면 해안이 나들이 인파로 수를 넣는다. 특히 압도하게 수려한 경관, 화려하며 아름다운 분위기, 소박한 카페가 즐비하다. 각각의 분위기 다양하고 경관이 훌륭하여 카페천국이라고 불려도 무방하고 카페답사를 하여도 재미가 솔솔 할 것 같다. 또한 횟집을 비롯한 다양한 맛 집이 있어 여행객에게 입맛을 돋우게 한다.

아담하고 소박한 나사해수욕장과 솔개해수욕장에는 조용한 어촌 정취를 느끼고자 하는 관광객이 주로 찾는다. 또한 해파랑길의 한 구간으로 deck 길이 조성되어 단아한 해안절벽과 바다풍경을 즐길 수 있다. 해파랑길은 동해안의 떠오르는 해와 푸르른 동해바다를 벗 삼아 함께 걷는 길이란 뜻으로 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를 잇는 약 770km의 광역 탐방로이다.

 

비학마을 해변가의 공동묘지

 

만발한 꽃들이 넋을 위로하는것 같다.
바다를 마주보는 한기의 무덤

학이 난다는 비학(飛鶴)마을은 이 마을의 가장 끝자락에 있는 동묘산이 마치 학의 입모습을 닮았다는 데서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고 하고 울주군 최남단으로 부산의 기장군과 경계를 하고 있다. 실제로 이곳에는 학이 많이 서식했고 이곳에서 가까운 온곡 삼거리 마을을 학이 춤을 춘다는 뜻의 무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형적으로 마을을 보면 소백산 줄기의 대운산 자락이 되어 소위 명당이라고 불린다. 이 때문에 옛날에는 전국의 유명한 풍수학자들이 많이 다녀갔다고 한다. 현재 한수원 인재개발원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 옛날 '한림 명산'으로 불리는데 이곳에서 공부를 하던 선비들이 많았다고 한다.

 

신고리3,4호기 원자력발전소 부지에 편입되어 간절곶으로 이주 한 신암리 비학마을 망향비

비학 마을에 원자력 교육원이 처음 들어선 것은 1978년이고 이후 신고리1,23,4호기가 들어섰다. 마을 사람들은 원전이 들어서면서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우선 대부분의 땅이 개발제한 구역으로 묶이는 바람에 개발을 할 수 없어 재래식 농어촌 가옥을 그대로 사용해야 했다. 또 논과 밭 등 각종 부동산이 팔리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이곳 주민들은 전력 생산도 좋고 개발도 좋지만 조상 대대로 살아온 이 땅이 지도상에서 없어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리(新里)마을 지명은 운암(雲岩)마을의 이름을 따서 새운암으로 불려오다가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리(新里)로 바꾸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으며 당시 건립되었던 서생어업조합 사무실과 사택건물 등이 아직 남아 있다. 당시 일본의 수곡수산(守谷水産)이란 회사가 부산과 방어진간의 물류를 운반했는데 이 화물선이 신리항에서 출·입항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의 제일무역회사가 출범, 어부들이 잡아온 붕장어(아나고)를 일본으로 수출하여 동해산 장어수출 기지항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후 1960년대에는 밀복잡이 주항으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카페와 맞집으로 어우러진 신리항
카페 히든 블루에서 본 신암항
카페 히든 블루에서 본 신리항
신암항 전경

면소재지가 있는 신암(新岩)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 유물인 즐문토기(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 곳으로 옛날부터 기후가 따뜻하고 바다와 접하여 먹을 것이 많았던 지역으로 가장 먼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살았던 지역으로 알려졌다. 이 유물은 서울 중앙국립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마을 앞 해변은 주로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때문에 사시사철 낚시꾼들이 모여들어 낚시를 즐기는데 흑돔과 노래미 등이 주로 잡힌다. 마을에는 신선암(神仙岩)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위가 넓고 펀펀한데 45덩이의 큰 바위가 첩첩으로 돼 있고 신선암(神仙岩)이라 불리게 된 것은 봄과 여름, 바다로부터 안개가 일어나 마치 신선이 옷을 입은 것 같아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바위에 오르면 아무리 더운 여름날이라 해도 선선하다고 한다.

 

신암(新岩)마을 이전 이름은 마을 앞에 구름 같이 희고 큰 바위가 보여 그 바위 모양을 따서 구름 '()'자와 바위 '()'자를 따서 운암동(雲岩洞)이라 정하였다고 한다. 마을 한 가운데는 마을의 역사를 증명하는 운암동(雲岩洞)’이란 표지석과 함께 울타리를 쳐서 바위를 보존하고 있다.

조용하고 한적한 신암항의 모래밭
나사해수욕장과 주변 해안

나사(羅士) 해수욕장의 모래사장 길이는 약 800m, 폭은 1020m로 여름이면 부산, 울산 등지에서 피서객이 몰려와 만원을 이룬다. 기후도 해양성 기후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마을 뒤쪽의 봉대산이 북풍을 막아주어 따뜻하다. 나사(羅士)라는 이름은 나사(羅沙)에서 바뀌진 것으로 모래가 계속 쌓여 육지로 변하여 모래가 뻗어나간다하여 '나사(羅沙)'라고 사용하다가 그 후 선비가 많이 배출되기를 원해 '나사(羅士)'로 사용했다.

 

카페 쿠즈베리에서 본 나사 바닷가
카페 나살에서 본 나사바닷가의 모래사장

나사(羅士) 멸치잡이가 유명한데 멸치를 잡는 방법으로 지인망을 사용한다. 지인망은 일명 후리라고 하는데 한쪽 그물 끝을 육지에 두고 다른 한쪽 끝은 어선에서 펼치면서 여러 사람이 양쪽을 끌어당겨 멸치를 잡는 방법을 말한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방법으로 멸치를 많이 잡아 주민 소득이 높았으나 최근 들어서는 어획고가 고갈이 되면서 이런 모습을 찾기가 힘들다. 또 미역을 많이 생산하고 있어 마을 곳곳에서 미역을 말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이 마을 봉대산을 중심으로 금맥이 있다는 얘기가 전해지면서 일본 사람들이 금을 채굴했던 곳이기도 하다. 봉대산 서쪽에는 지금도 구덩이가 많아 당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해방 이후에는 봉대산 금맥이 마을이 있는 해안까지 뻗었다고 해 한때는 마을 사람들도 금을 찾아 나섰으나 성공을 하지 못했다.

카페 AOP
서생 배를 형상화한 크림빵
카페 AOP의 규모는 무척 크다.
카페 AOP에서 본 나사 바닷가
카페 온돌라상에서 본 고양이
나사 바닷가에 위치한 카페 해밀

마들이 넓고 평평하다는 뜻의 평동(平洞)마을은 뒷산이 동서로 가로막고 있고 마을이 남쪽으로 향해 있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1910년 이전에는 마을이름이 새터 라고 불렀다고 한다. 1940년 이전까지 이 마을에는 천주교와 기독교의 예배터가 있었다고 하나 그동안 신자가 줄어들어 예배장소가 경작지로 바뀌었고 예전의 종교적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은 새예루살렘 공동체가 있다.

평동마을 바닷가 횟집거리의 일몰

한반도 동해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대송(大松)마을은 마을 앞이 확 트여 서생면에서는 수평선을 가장 넓게 볼 수 있고 뒤로는 송림이 우거져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이 마을의 간절곶이 전국 명소가 되면서 마을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간절곶의 낭끝 바위는 가장 돌출 지역으로 이곳에서 해를 보는 것이 가장 빨리 볼 수 있다하여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간절곶 앞 바다는 지형적으로 돌출지역이 되어 해류가 급해 옛날에는 이 해역을 지나는 배들이 많이 침몰되었다고 한다.

대송(大松)마을의 이전 명칭은 대륙동(大陸洞)이었는데 대운산 줄기가 바다로 뻗고 있어 이의 대()자와, 육지의 끝(간절곶)이 튀어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후 대륙동의 대()자와 송정동(松亭洞)의 송()자를 따서 대송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이곳에는 항로를 인도하는 등대가 있었다. 이 때문에 2차 대전 때는 미군이 등대를 여러 번 폭격해 주위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등대는 광복 후 다시 복원돼 지금까지 운영이 되고 있다.

산 정상부에 위치한 카페 헤이메르에서 본 바닷가 절경
송정공원

송정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들판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서생, 용리, 나사, 대송 등 다른 마을로 나아가 농사를 지었다마을이름이 송정으로 불린 것은 옛날부터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고 지금도 국도 위쪽으로는 아름드리 해송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다. 이 때문에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마을 사람들이 소나무 송진을 일본에 공출하기 위해 부역에 시달려야 했다.

 

송정공원 앞 바닷가

이 마을 사람들은 송정이라는 이름보다 1914년 이전부터 사용 된 '잿골'이라는 이름이 더 친근하다. 옛날부터 잿골이라고 불린 것은 기와를 구웠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잿골에서 구워진 기와는 서생첨사 관청을 건립할 때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송정공원과 솔개공원 구간의 해파랑길
송정공원과 송정항 구간의 해파랑길
송정항의 바다낚시터
배들의 피항

송정항은 주변에 어항이 개설되기 전에는 간절곶을 항해하던 어선이나 상선들이 계절풍을 만나면 간절곶을 넘기 힘들어 바람이 잘 때까지 정박하여 식수나 식량을 공급받는 피항지 구실을 해왔다.

솔개공원
솔개공원에서 본 진하해수욕장
솔개공원 해파랑길에서 본 솔개해수욕장
솔개해수욕장 주변 경관
대바위공원 입구

대바위공원 곳곳에 해송이 군집을 이루고 있어 경치 또한 좋은 곳이다. 대바위는 진하해수욕장과 솔개해수욕장 사이에 있는 거대한 바위이고 진하 8경 중 '대암초가(臺岩樵歌)' 라고 있는데 대바위에서 나무하는 초동들이 불렀던 노래 소리를 말한다. 대암(臺巖)은 여러 개의 큰 바위가 첩촉(疊矗)해 큰 대()를 이뤘다고 해 한자로 대암(臺巖)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갯방풍과 해당화가 많이 자랐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기가 힘들다. 이중 특히 갯방풍은 중풍의 예방에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꺾어가는 바람에 지금은 보기가 힘들다.

대바위공원에서 본 진하해수욕장
대바위공원과 솔개해수욕장 구간의 해파랑길
해파랑길에서 본 솔개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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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단길은 옛 해운대역사 뒤편 약 1.3에 카페와 맛 집, 책방, 공방 등 60여 곳의 상권지역으로 부산 해운대구와 지역공동체가 함께 조성하여 성공한 도시 재생 사례다. 2018년부터 젊은 소상공인들이 시작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이르렀고 해운대의 새로운 명소가 되었다.

우동3구역 주택 재개발 정비 사업에 대한 대응으로 출발한 해리단길은 2018년 부산연구원의 부산 10대 히트상품으로 선정된 데 이어 2019년에는 행정안전부의 지역 골목상권 활성화 우수사례 발표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다락방이 있는 카페는 옛 아파트 1층을 리모델링하여 만든 카페로 정다운 분위기와 맛난 커피, 귀여운 강아지가 한번 발길을 꾸준히 매혹시킨다. 다락방 발코니의 예쁜 꽃은 지친 마음을 달래주고 아득한 옛 정서를 되살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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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대산 정상에서 본 죽성리 바닷가 전경

봉대산(228m)은 기장읍 죽성리 산 50번지에 있는 산으로 주변 청강리, 신천리, 대변리와 인접하고 있고 이곳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북쪽으로 흐르면서 덕발 저수지, 죽곡 저수지, 신천 저수지를 이루며 죽성천에 유입한다. 산은 크게 높지 않아 정상까지 1시간 이내에 도달 할 수 있으며 주로 청강리 우신네오빌 아파트와 신천리 선비촌 식당 방향에서 출발한다. 높이에 비해 정상에서의 풍광은 매우 뛰어나다. 정상부에는 연변(해안) 봉수대 중 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초기 연변봉수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남산 봉수대(烽燧臺)가 있다. 또한 이곳은 고산 윤선도와 인연이 있다.

신천리 선비촌 식당 방향에서 출발하여 맞이한 초입 오솔길

고산 윤선도는 1616(광해군 8) 12월 전횡을 일삼던 예조판서 이이첨을 벌할 것과 유희분, 박승종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화가 되어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을 갔다. 그런데 국경지대의 귀양지는 중국인과 내통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1618(광해군 8)에 죄인들을 남쪽으로 옮겼는데 이때 윤선도도 기장으로 이배(移配)되었다.

기장은 한양에서 1,000리나 떨어진 변방에 위치하여 많은 선비들이 이곳 기장으로 유배생활을 했으며 조선시대 14번째 순위에 드는 유배지였다고산 윤선도는 이곳에서 7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 봉대산에서 자주 약초를 캐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여 마을사람들에게는 의원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갈림길에서의 안내 표지판

한 번은 어린 하인이 산에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 갔다가 신선같이 보이는 한 노인이 암석 이에 앉아서 시 한수를 써 주며, 돌아가서 네 어른(윤선도)에게 드리라고 하였고 이 어린 하인은 이를 받았는데 잠깐사이에 그 노인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봉래산 한 골짜기 남쪽 땅에 떨어지니 그 절경 천하에 드문 곳임을 알게 되었네. 산은 비단 병풍을 두른 듯 북쪽으로 비스듬히 따랐고, 개울물은 옥대를 두른 듯 동쪽을 돌아 흐르네. 나무 틈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빛은 언덕을 비추고, 안개 속에 내리는 저녁 비는 들녘에 자욱하네. 성긴 숲을 마주 앉아 한 마디 말과 솔솔 부는 바람에 푸른 담쟁이 넝쿨이 흔들리네.

정상부를 향한 마지막 오솔길 구간

고려 및 조선시대의 연변(해안) 봉수, 남산(南山) 봉수대(烽燧臺)

산불감시초소 너머 보이는 동해 바다전경
멀리 보이는 기장 아난티코브와 힐튼호텔

남산 봉수대는 봉대산의 정상 능선부 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연대(煙臺)는 원형을 상실한 채 흔적만 남아 있다. 봉대산의 정상에 있는 까닭에 연대 자리를 평평하게 하여 지적 측량의 원점으로 삼고 있다. 연대 아래에는 헬기장이 있고, 연대와 헬기장 사이에는 산불 감시 초소가 설치되어 있다. 19951215일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남산봉수대의 건립 시기는 고려 초기인 고려 성종 4(985)으로 추정되며, 특히 13세기 이후 왜구들이 자주 해안에 출몰하면서 연변 봉수의 기능이 중요해진 것으로 여겨졌다. 조선 시대에도 이미 1461(세조 7) 이전에 기장 남산봉수대가 존재하였으며, 이는 고려 시대에 있었던 봉수대가 계승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종 31(1894) 갑오경장(甲午更張) 때에 폐지되었다.

형태로써 남나산봉수대는 담장이나 호가 확인되지 않고, 연대만 갖춘 표준 형식의 연안 봉수이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암반 위에 연대를 돌로 쌓았는데, 지름 2.4m, 둘레 9m이다. 그 중앙에 높이 1.5m, 너비 1.5m, 지름 30~40의 화로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연대 ( 煙臺 ) 는 원형을 상실한 채 흔적만 남아 있다 .  봉대산의 정상에 있는 까닭에 연대 자리를 평평하게 하여 지적 측량의 원점으로 삼고 있다
연대 아래에는 헬기장이 있고 ,  연대와 헬기장 사이에는 산불 감시 초소가 설치되어 있다 .
남산 봉수대 주변 모습

 봉수에는 경봉수(京烽燧), 내지봉수(內地烽燧), 연변봉수(沿邊烽燧)가 있는데, 기장 남산봉수대는 전형적인 연변 봉수이고 동래에서 영남 내륙·호서 내륙· 경기도를 거쳐 광주 천천령으로 연결되는 제2로 봉수로에 속하는 간봉(間烽) 중의 하나이다. 경상도에는 90여 개의 간봉(間烽)이 있는데, 남산 봉수대는 간선 봉화로 제8봉에 해당하며, 남쪽으로는 간비오산 봉수대, 북쪽으로는 기장군 장안읍 아이 봉수대, 울주군 서생면 이길 봉수대, 온산읍 하산봉수대로 차례로 연결된다. 남산봉수대는 연변 봉수 중에서 고려 시대부터 존재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연변 봉수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초기 연변봉수의 원형을 갖추고 있다.

흔히 봉수는 적이 나타나면 연기나 불을 피워 위급 상황을 알리는데, 간봉의 경우는 연기나 불을 피우는 연소실이 하나밖에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형태의 봉수를 특별히 봉대 혹은 연대라고 하며, 그 때문에 주로 연안 봉수가 위치한 산은 봉대산 혹은 연대산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간봉은 평소에는 연해에 아무 일도 없다는 뜻으로 저녁에 해가 지고 나면 불을 피워 차례대로 봉화를 올려 한양의 남산봉수대에 도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수평선에 소속을 알 수 없는 배가 나타나면 가까운 수군진에 직접 달려가 알리며, 수군진의 초탐선이 나가서 수상한 배를 조사한다. 이처럼 5개의 연대를 갖춘 직봉(直烽)1개의 연대만 갖춘 간봉은 서로 그 역할이 달랐다.

고산 윤선도에게 시를 전한 신선의 인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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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면 진하리에 위치한 진하해수욕장은 울주군, 울산광역시에서 가장 큰 해수욕장으로 길고 완만한 백사장과 시원한 바다바람으로 여름이면 많은 해수욕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특히 파도와 바람이 좋아 서핑과 카이트 서핑 명소로 유명하다. 예전에는 세계 여자비치발리볼대회, 세계 원드서핑대회를 개최 했었다. 그리고 지자체 주관으로 매년 해양스포츠제전, 서머 페스티벌 등 다양한 여름행사를 개최한다. 또한 캠핑장이 조성되어 사계절 가족, 친구단위로 즐길 수 있다.

울주군에서 운영하는 울주해양스포츠센터캠핑장의 송림

 진하해수욕장 앞바다에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섬이 있다. 바로 명선도(名仙島)이다. 신선이 내려와 놀았던 섬으로 과거에는 매미가 많이 울어다 하여 명선도(鳴蟬島)라고 불렀다. 한때는 동백이 자란다하여 동백도(동백도)라고도 불렀다. 섬의 둘레는 330m, 면적은 6,744으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시원한 바다바람과 해안 풍광을 즐기고 느끼기에 좋다.

진하해수욕장 앞바다에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섬이 있다. 바로 명선도(名仙島)이다. 신선이 내려와 놀았던 섬으로 과거에는 매미가 많이 울어다 하여 명선도(鳴蟬島)라고 불렀다. 한때는 동백이 자란다하여 동백도(동백도)라고도 불렀다.
섬의 둘레는 330m, 면적은 6,744㎡으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시원한 바다바람과 해안 풍광을 즐기고 느끼기에 좋다.

옛 풍경에 명선도 부근으로 고기잡이배가 들어오는 것이 절경이라 하여 선도귀범(仙島歸帆)이라 불렸다. 영남읍지(울산)에는 명선도(鳴蟬島)는 서생포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울산서생진지도에는 명산도(明山島), 청구도에는 명산(鳴山), 조선지형도(장생포)에는 명선도(名仙島)로 각각 묘사하고 있다.

명선도에서 본 명선교
회야강 하류에 엘리베이터를 갖춘 최신식 다리인 명선교가 놓아 져서 진하마을과 강양마을 사이를 주민들이 편하게 이동하고 있다. 또한 야경이 아름다워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명선교에서 본 명선도
명선교에서 본 강양마을
명선교에서 본 강양마을 해안선

 서생면과 온산읍 사이를 가르며 유유히 동해로 흐르는 강이 있다. 이 강은 양산시 원효산 원효샘 동쪽계곡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강으로 이름이 회야강(回夜江)이다. 회야(回夜)는 배미를 돌아서 흐르는 강이라는 의미이다. ‘돈다는 말이 ()’, ‘논배미와 같은 말에서 흔히 쓰이는 배미바미(밤이)’로 보아 ()’로 한자화하면서 회야(回夜)로 변한 것이다.

  서생면과 온산읍 사이를 가르며 유유히 동해로 흐르는 강이 있다. 이 강은 양산시 원효산 원효샘 동쪽계곡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강으로 이름이 회야강(回夜江)이다

특히 화정리 앞을 흐르는 회야강을 일승강(一勝江)이라고 부르는데,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조명연합군이 왜군을 무찔러 승리한데서 유래한다지금은 회야강을 따라 자전거 길과 인도가 조성되어 자전거 타는 사람과 트레킹 하는 사람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그리고 예전에는 화정리에서 강 건너 강양리로 가기위해 통시다리로 건너는데 이 다리는 강 속에 자연적으로 있던 돌 중간 중간에 다시 돌을 놓고 둥글게 무더기로 쌓아올리고 그 위로 나무를 놓은 다리다. 돌에 굴(石花)이 많이 붙어 자라기 때문에 다리 이름을 '꿀다리'로 불렸다. ''은 굴의 방언이다.

회야강을 따라 자전거 길과 인도가 조성되어 자전거 타는 사람과 해파랑길로 트레킹 하는 사람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그리고 예전에는 화정리에서 강 건너 강양리로 가기위해 통시다리로 건너는데 이 다리는 강 속에 자연적으로 있던 돌 중간 중간에 다시 돌을 놓고 둥글게 무더기로 쌓아올리고 그 위로 나무를 놓은 다리다. 돌에 굴(石花)이 많이 붙어 자라기 때문에 다리 이름을 '꿀다리'로 불렸다. ''은 굴의 방언이다

 지금은 서생교가 생겨나서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으나 돌들은 세월에 의해 많이 유실되어 다리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회야강 하류에 엘리베이터를 갖춘 최신식 다리인 명선교가 놓아 져서 진하마을과 강양마을 사이를 주민들이 편하게 이동하고 있다. 또한 야경이 아름다워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강양마을에서 본 서생교
서생교 다리 밑 바닷돌에 붙은 굴(石花)

 진하(鎭下)라는 이름은 서생포 진성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현재는 모두 육지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부는 육지, 일부는 기수 지역이었으나 그동안 해안의 융기 현상으로 지면이 높아졌고 이후 마을이 생겨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서생포 왜성의 동문에 배가 접안 할 수 있는 선착장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유유히 동해로 흘러가는 회야강

임진왜란 전승 기념비문 편장군 승첩동(片將軍 勝捷洞)마애비(磨崖碑)

편장군 승첩동은 진하해수욕장에서 남창방향의 군도31호선 도로변 왼쪽 암벽(서생면 서생리 450-2번지)에 새겨진 마애비(磨崖碑)이다편장군은 명나라 신종 때 어양총절사로써 이름은 편갈송(片碣頌)이고 중국 절강성(浙江省) 출신이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 장군 휘하에서 유격장군으로써 평양전투, 마귀(麻貴) 장군 휘하에서는 종군도독으로써 울산왜성(도산성)전투, 서생포왜성 탈환전투 등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후 본국으로 귀국하려 했으나 명나라 조사관 정응태의 모함으로 귀국을 단념하고 조선에 귀화하여 경주 금오산에 은거했다. 이후 편풍세(片豊世), 편풍원(片豊源), 편산보(片山甫) 등 세 아들 또한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와서 아버지 편갈성과 함께 금오산에 살았다편갈성이 세상을 떠나자 금오산에서 삼년상을 치른 후 편풍세, 편풍원은 전라남도 나주(羅州), 편산보는 만경(萬頃)에 각각 정착하여 살았으며 우리나라 절강 편씨(片氏)의 시조가 되었다.

내용을 살펴보면 편장군 승첩동여섯 글자가 새겨진 암벽 면의 크기는 높이 110cm, 70cm로 의미는 편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곳이라는 뜻으로 당시 편갈송 장군의 직책이 종군도독이라서 이곳을 도독동이라 불렸다. 이암벽에 누가, 언제 새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이후 새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옆에는 十一代孫 轉運郞 永基 下馬 壬辰 閏六月日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11대손 전운랑(轉運郞) 편영기(片永基)1892년 임진년(고종29) 찾아와 참배를 하였다는 내용이다. 전운랑은 세곡을 관리하고 운반하는 직책이며 1598년 임진왜란 끝나고 294년 지나서 후손이 찾아 온 것이다1987년 후손들이 편갈송 장군 기적비 유명어양총절사동원도독중군(有明漁陽摠節使東援都督中軍) 유격장모헌편공길송기적비(遊擊將慕軒片公碣頌紀跡碑)를 서생포왜성 동문입구에 세웠다.

「十一代孫 轉運郞 永基 下馬 壬辰 閏六月日」 이라는 명문은 11대손 전운랑(轉運郞) 편영기(片永基)가 1892년 임진년(고종29) 찾아와 참배를 하였다는 내용이다.

성현의 용재총화10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전 우리나라(조선)로 귀화한 인물은 원 말기에 온 설장수(偰長壽)와 명나라 태조 주원장 때 명옥진(明玉珍)의 아들 명승(明昇)과 진우량(陳友諒)의 아들 진리(陳理)이다설장수는 시문에 능해 근사재집과 예재집을 지었고 과거에 급제하여 2품 벼슬을 하였고 그의 아들 미수(眉壽)와 경수(敬壽)도 과거에 급제했다.

명옥진은 원 말기 수주(隨州)사람으로 촉()을 차지한 후 스스로 황제라 일컬었다. 나라이름은 대하(大夏), 연호는 천통(天統)이라고 했다. 그가 5년만에 죽은 후 그의 아들 명승이 우리나라로 귀화했다. 정치적 망명을 한 것이다. 이때 명 태조는 조선에게 그들에게 벼슬주지 말고 백성으로 삼지도 말라고 요구하여 나라에서는 초가집에 노비만 주었으나 여생은 편안하게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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