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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 자리 잡고 있는 묘관음사(妙觀音寺)는 임제종 소속의 사찰로 운봉 대종사가 1941년에 창건하였다. 운봉 대종사가 입적(入寂)한 후에는 제자인 향곡 혜림(1912~1978)이 중창하였고, 1967년 진제 스님이 법을 이어받았다. 묘관음사(妙觀音寺)는 임제종 선풍을 선양하면서 청담(靑潭), 성철(性徹), 서옹(西翁), 월산(月山) 등 당대의 선지식 승려들이 묘관음사에 수행 정진(爲法忘軀)하였다.

사찰은 오래 되지 않았지만, 한국 불교의 선풍 맥을 잇는 사찰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서산 대사 이후 끊어진 선 맥이 경허 스님에 의해 되살아나 경허(鏡虛), 혜월, 운봉(雲峰), 향곡(香谷), 진제(眞際) 스님으로 이어졌다. 성철 스님도 이곳에서 생식하며 동안거를 보냈다. 이곳에서 성철 스님이 출가 전 두었던 딸 수경이 찾아오자 "만날 필요 없다"고 일갈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이 일화는 1949년 성철 스님이 향곡 스님과 함께 이곳에서 수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수경은 교사생활을 하다 이후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는데, 법명을 불필(不必)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불도를 얻는데 필요 없는 딸이라는 뜻이다.

다리 위에는 동해선 경전철이 있어 전철이 수시로 달리고 있다.

향곡과 성철 스님은 불교 정화 운동을 하던 봉암사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향곡, 성철 스님과 절친한 사이였던 청담의 딸인 묘엄이 쓴 책 회색 고무신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인연으로 성철은 묘관음사 길상선원에 머물면서 생식을 하고 장좌불와(長坐不臥)로 동안거(冬安居)를 하였다고 한다.

인도에서 온 달마대사가 중국에서 선종을 일으킨 이래  6조 혜능조사 이후 위앙, 임제, 조동, 운문, 법안종으로 갈라져 이른바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는 선종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특히 임제종은 양기방회와 황룡혜남이라는 걸출한 종장이 나타나서 양기종과 황룡종으로 외연이 확대되었다.

2층 건물로 1층은 금강문, 2층은 보화원
강당 역할을 하는 보화원

 고려 말 태고(太古) 보우 선사(普愚禪師)가 중국 임제종 양기파의 석옥 청공 선사(石屋淸控禪師)로부터 정통 법맥을 이어받은 후 열반(涅槃)의 미묘한 이치와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석가모니의 깨달음[正法眼藏]’을 스승과 제자가 계속 이어 갔다. 이러한 깨달음은 청허당(靑虛堂) 휴정(休靜)과 환성(喚醒) 지안(志安)을 거쳐 경허(鏡虛), 혜월, 운봉(雲峰), 향곡(香谷), 진제(眞際)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묘관음사 경내를 둘러보면 조경이 매우 정갈하고 깔끔함이 느껴진다. 마치 군두더기가 없어 보이는 정원 같다. 동백나무, 대나무, 단풍나무, 소나무와 능소화 등이 조화롭게 경내를 감싸고 있어 깊은 산골 사찰과 비교하더라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특히 선 수행을 하는 납자들에게는 사시사철 주야 함축되고 절제된 조경과 사찰공간이 어우러진 환경을 제공하여 득도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대웅전 중심으로 좌우 마노당과 산호당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마노당
산호당
종각

경내 전각은 대웅전, 조사전, 관음전, 삼성각, 종각 등이 있으며, 당우(堂宇)로는 금강문과 보화원,마노당, 산호당, 길상선원(吉祥禪院), 금모당 등 있다. 또 묘관음사를 창건하고 중창한 승려 운봉과 향곡의 부도와 탑비가 백화도장에 있다.

대웅전과 산호당

그리고 경내에 탁마정(琢磨井)이라는 샘이 있는데 향곡 스님과 성철 스님의 관련된 일화가 있다. 탁마는 옥 따위를 갈고 닦는 일 또는 학문, 기예, 정신 등을 향상시키는 과정이고 탁마정의 깊이는 약 6m로 물이 지표면까지 올라 차있다. 향곡, 성철 스님 두 스님이 수행을 하다가 더욱더 깊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한 스님이 다른 스님의 목덜미를 잡고 우물 속에 머리를 넣고 죽음의 직전까지 가는 극한의 상황에서 한마디 하도록 하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였다.

탁마정이라는 우물

혜림(蕙林) 향곡(香谷)

혜림(蕙林) 향곡(香谷, 1912~1978)1912년 음력 118일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 토성리(현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리) 아버지 김원묵(金元默), 어머니 김적정행(金寂靜行) 사이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김진탁(金震鐸), 법명은 혜림(蕙林), 법호는 향곡(香谷)이다.

능소화와 한 몸이 된 소나무

192716세에 천성산 내원사로 출가하여 범어사 성월(性月)을 은사로 득도하고, 혜림(蕙林)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31년 금정산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운봉(雲峯)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내원사 조실 운봉 문하에서 정진하다 크게 깨달은 후 인가를 받았다. 1960년대~1970년대에 북쪽에는 전강, 남쪽에는 향곡이란 뜻의 북 전강 남 향곡(北 田岡 南 香谷)’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혜림은 한국 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참선 수행자였다.

조사전에는 경허(鏡虛 ),  혜월 ,  운봉(雲峰),  향곡(香谷)스님의 진영이 있다.
관음전에서 본 경내 전경
저 너머 임랑해수욕장을 품고 있는 동해바다가 보인다.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성철(性徹), 청담(靑潭), 보문, 자운(慈雲) 등과 함께 결사에 참여하였다. 봉암사 결사는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지키고, 수행자의 본분대로 살아갈 것을 발원하여 이후 대한불교 조계종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이후 혜림은 제방선원에서 수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였다. 6·25 전쟁 직후인 1951년에는 부산 선암사 조실로 추대되었다. 1955년에는 정화불사에 동참하여 경주 불국사 주지 소임을 맡았고,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중창하였다. 정화불사 당시 중앙종회의장으로 한국 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헌신하였다.

관음전

1959년에 부산 묘관음사에 길상선원(吉祥禪院)을 개원하고 무차 대회(無遮大會)를 열어 법문을 펼쳤다. 이후 조계산 선암사, 경주 불국사, 팔공산 동화사의 조실 및 선학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7년 진제(眞際)에게 법맥을 물려주고,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이다가 1978년 음력 1218일 묘관음사에서 입적하였다. 세수는 67, 법랍은 57세로 부도와 비는 묘관음사 백화도장에 있다.

삼성각 가는 길
삼성각

혜림은 경허(鏡虛), 혜월(慧月), 운봉의 법맥을 계승하였고 후학을 가르칠 때는 부처를 절대자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부처에 대한 관념을 버리지 못하면 부처 또한 스스로를 얽어매는 쇠사슬에 불과하다.”고 강조하였다. 즉 스스로가 하나의 무위 진인(無位眞人, 도를 닦는 마음이 뛰어나서 지위를 달 수 없을 만큼의 위치에 오른 참된 인간)임을 자각하도록 하였다.

길상선원

또 혜림은 정법을 만나 공부하는 사람이면 먹고 입는 데 팔려서는 안 된다.”면서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이 간절히 공부해야 된다.”고 강조하였다. 편하고 잘 먹는 것만 생각하면 도심(道心)이 일어나지 못하고 망상과 분별과 번뇌만 일어난다. 신심과 분심과 의심을 갖고 정진해야 성과가 있다.”고 하였다. 저서로 1982년에 제자들이 편찬한 향곡 선사 법어집(香谷禪師法語集)이 있다.

금모당 가는 길
사찰 가장 상단에 위치한 금모당

묘관음사 입구 금강문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비스듬히 올라가면 운봉선사 발원문 표지석을 지나 백일홍 한 그루와 백화도장이 보이는데 그곳 백화도장에 향곡 대종사 행화비(香谷大宗師行化碑)와 부도 그리고 운봉 대종사 행화비(雲峰大宗師行化碑)와 부도가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백화도장의 바닥이 만다라를 연상케 하는 대리석에 경전내용을 새겨져 깔려있다.

백일홍과 백화도장

향곡 대종사 행화비(香谷 大宗師 行化碑)와 부도

19791218일 법제자 진제(眞際)가 세웠고  비신은 너비 63, 두께 32, 높이 174이다. 귀부는 가로 152, 세로184, 높이 93이다. 귀부는 연화문이었던 것을 최근에 거북 모양으로 바꾸었다.

향곡 대종사 행화비 ( 香谷 大宗師 行化碑 )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향곡은 1912118일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 토성리에서 아버지 김원묵(金元黙)과 어머니 김적정행(金寂精行)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진탁(震鐸)이며, 16세에 둘째 형을 따라 천성산 내원사에서 입산하였다. 18세에 조성월(趙性月)을 은사로 모시고 혜림(蕙林)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1930년 금정산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운봉 선사(雲峰禪師)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1944년 임제 정맥의 적전(嫡傳)이 되었고, 향곡(香谷)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여러 도반들과 함께 정진하던 중에 크게 깨우치고 아래의 오도송을 읊었다.

왼쪽부터 향곡 대종사(香谷 大宗師) 부도와 행화비(行化碑), 진신사리탑, 운봉 대종사 행화비(雲峰 大宗師 行化碑)

홀연히 두 손을 보니 전체가 살아났네/ 삼세의 불조들은 눈 속의 꽃이요/ 천경만론이 모두가 무슨 물건이었더냐/ 이를 좇아 불조들이 모두 몸을 잃었도다. 봉암사의 한 번 웃음 천고의 기쁨이요/ 희양산 구비 구비 만겁토록 한가롭네. 내년에도 또 있겠지 둥글고도 밝은 달/ 금풍이 부는 곳에 학의 울음 새롭구나.

이후 묘관음사를 중건하고 선방을 열자 많은 제자들이 모였다. 묘관음사에서 후학을 지도하다가 19781215일 해운정사에서 열반게를 짓고, 1218일 입적하였다. 세수는 67세이고, 법랍은 50세였다.

운봉 대종사 행화비(雲峰 大宗師 行化碑)와 부도

원래 경상북도 선산 도리사에 있었는데, 문도들의 뜻에 따라 2000년 묘관음사로 옮겼다.  비신은 높이 81, 너비 66, 두께 33이다. 귀부는 가로 103, 세로 146, 높이 79이다.

운봉 대종사 행화비 (雲峰 大宗師 行化碑)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운봉은 1889127일 경상북도 안동 후남동 정씨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13세 때 일하 화상(一荷和尙)을 은사로 출가하였고, 15세 되던 해 삭발하고 사미계를 받았다. 이때 법명이 성수(性粹)이다. 사미계를 받고 본격적으로 불문에 든 운봉은 강백(講伯) 회응(晦應)의 문하에서 교법을 배우고, 23세 되던 해 범어사 만하 화상(萬下和尙)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25세에 상주 원적사의 석교 율사(石橋律師)로부터 계율을 배웠다. 금강산·오대산·묘향산 등의 거찰에서 정진하였다. 35세에 백양사 운문암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이때 한 편의 게송을 읊었다.

운봉 대종사 (雲峰 大宗師) 부도

문 밖에 나왔다가 갑작스레 차가운 기운이 뼈 속에 사무치자/ 가슴속에 오랫동안 걸렸던 물건 활연히 사라져 자취가 없네. 서릿발 날리는 달 밝은 밤에 나그네들 헤어져 떠나간 다음/ 오색단청 누각에 홀로 있으니 산과 물이 다 공하도다.

운봉은 부산 선암사의 승려 혜월을 찾아가 인가(認可)를 받았다. 이로써 임제종의 법등(法燈)이 운봉에게 계승된 것이다. 이후 운봉은 통도사·범어사 등에서 조실을 맡아 후학을 가르쳤다. 계미년(1943) 월내포 묘관음사로 옮겼다. 병색이 깊어지자 제자 향곡에게 자신이 입적할 날을 미리 알리고 후사를 부촉(咐囑)하였다. 2월 그믐날 입적게(入寂偈)를 남기고 돌아가셨다. 운봉의 나이 58, 법랍 45세였다.

석가 달마삼천(釋迦達磨退三千) 후학 성철(性徹) 삼가 쓰다.

법자질(法資秩) 회암 조심(晦岩祖心), 향곡 혜림(香谷蕙林), 구옹 지우(瞿翁智宇), 구암 고현(龜岩古玄), 우하 도원(雨下道源), 진해 각현(震海覺玄), 낙산 병율(落山炳律)

묘관음사에는 조선후기에 제작 된 부산시 문화재 42호 오여래탱(五如來幀)46호 불자(拂子)가 있다.

전법(傳法)의 증표인 불자(拂子)

불자(拂子)는 승려가 수행할 때 마음의 티끌이나 번뇌를 털어 내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불교 용구 중 하나이다. () 혹은 불진(拂塵)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먼지와 벌레 등을 쫓아내는 데 사용하였던 생활 용구로 그 모습은 총채와 유사하다. 불자는 선종에서 전법(傳法)의 증표이기도 하며, 선승의 문답 또는 주지가 설법할 때 상징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경전의 기록에 의하면 흰 말의 꼬리털로 만든 백불(白拂)을 불자 중 귀중하게 여겼는데, 묘관음사의 불자가 바로 백불이다. 선사[慧明禪師]], 운봉으로 이어지는 전법게를 전수받은 뒤 창건하였는데, 묘관음사불자는 혜월의 유품으로 향곡이 사용하였다.

모양은 흰색의 말총과 나무 자루로 이루어졌는데, 길이는 83이다. 말총은 유제(鍮製, 놋쇠)로 된 세 벌의 줄로 촘촘히 엮어 나무 자루에 단단히 묶어 연결하였다. 나무 자루에는 어떠한 장식도 하지 않았으나, 손잡이 부분에 붉은색의 띠를 묶고 그 끝에 2개의 수술을 매어 소박하게 장식하였다.

영가 천도를 위한 재()에 사용되는 오여래탱(五如來幀)

묘관음사 오여래탱(妙觀音寺五如來幀)은 다보여래(多寶如來), 묘색신여래(妙色身如來), 광박신여래(廣博身如來), 이포외여래(離怖畏如來),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 등 다섯 여래를 각 폭에 따로 그린 탱화로, 영가 천도를 위한 재() 의식 때 사용하는 도량 장엄용 불화이다.

오여래탱은 부산 지역에서는 유일한 작품으로 5폭이 한 세트를 이루는데 각 폭의 크기는 세로 66.4, 가로 116.3의 액자 형태로 되어 있다. 원래 족자 형태였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1폭씩 액자 형태로 개조해 재 표구된 상태이다. 다섯 여래의 전체적인 모습은 매우 흡사하다. 중앙에 정면을 향한 여래를 중심으로 좌우 각 2폭의 여래로 구성되어 있는데, 적색과 녹색의 구름문을 뒤로 한 채 두광과 신광을 갖춘 여래가 연꽃 위에 서서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여래의 머리 위에는 육계가 뾰족하게 솟아 있고, 얼굴은 타원형에 이목구비가 다소 중앙으로 몰려있는 편이다. 전반적으로 채색은 적색과 녹색을 주조로 군청색을 가미하였는데, 일부 덧칠된 색채와 필선으로 원래의 가치를 다소 떨어뜨린다. 하단의 화기란(畵記欄)은 원위치를 상실한 채 액자 속에 따로 보관되어 있으며 화승으로 보이는 유성(有性)과 낙정(樂淨)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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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고속도로 군북 IC에서 빠져나와 의령을 향해 출발하면 먼발치에서 맞이하는 것이 의령관문이고 의령교로 건너는 강이 남강(南江)이다. 그리고 가마솥을 닮은 바위 하나가 남강에 있으니 그 이름이 솥 바위(정암 : 鼎巖). 그래서 의령을 찾는 여행객이면 먼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의 승전지인 정암진과 솥 바위를 둘러보는 것이 좋다.

정암 철교와 의령교

정암진은 정암루(鼎巖樓)에서 둘러보는 것과 정암 철교 인도에서 바라보는 것이 각각 즐거움이 다르다. 솥 바위 또한 원거리와 근거리에서 보는 맛이 다르다. 일찍이 남강은 뛰어난 경치로 인해 선비와 가객들이 찾아 시를 읊고 자연을 노래했으리라. 또한 나룻배를 타고 왕래했던 교통의 요충지였던 정암진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왜적을 몰살시킨 승전지로 유명하다.

정암 철교

정암 철교는 경남 의령군과 함안군을 연결하는 교량으로서 1935년에 준공되었다. 6.25전쟁으로 파괴된 후 1958년 남아있던 2개의 경간을 그대로 살려 상부는 철골트러스 형식으로 재건하였다.

정암루(鼎巖樓)

정면 3, 측면 2칸 팔작지붕 겹처마 익공양식의 정암루는 자연암반 위에 장대석 기단을 놓아 지어졌다. 기둥은 원기둥으로, 누하주는 화강석을, 누상주는 목재를 사용하였다. 계단은 전면 중앙 한 곳에 두었고 기둥 상부 공포는 연화로 장식된 이익공을 결구하여 겹처마로 구성하였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계자난간을 둘렸다.

현재 정암루 자리는 조서 중기 대제학을 지낸 용재(容齋) 이행(李荇)이 귀양살이를 하며 지은 취원루(聚遠樓)가 있었던 곳으로 1935년 임진왜란 승첩지를 기리고자 지었다. 그 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정암루가 소실되었으나 1963년에 재건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정암진(鼎巖津, 정암나루) 전투

남강은 함양군 서상면 남덕유산에서 발원하여 진주시를 거쳐 함안군과 의령군의 경계를 따라 흐르다가 낙동강에 합류한다낙동강과 더불어 일찍 뱃길이 열렸던 남강은 임진왜란 때 왜적이 호남으로 진출하는 침략의 길이 되었고 의령의 관문인 정암진은 홍의장군 곽재우의 최대 승첩지 중 하나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장군은 1592(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같은 해 5월 의령 정암진(鼎巖津)에서 왜적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의병 활동 초기에는 의령 정암진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 본부를 두고 의령을 고수하면서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삼으면서 유사시에 대처하였다. 당시 곽재우는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에게 위엄을 보였으며, 의병(疑兵, 적을 혼란스럽게 하는 위장 병사)을 둔 위장 전술과 적을 유인하는 매복 작전, 그리고 유격전 등을 펼쳐 가며 적을 섬멸하였다.

정암 철교에서 바라본 정암루와 솥 바위

의병 활동 초기에는 의령 정암진(鼎巖津)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 본부를 설치하여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삼아 유사시에 대처했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疑兵, 적이 의심하도록 하기 위한 위장 병사)을 구사해 위장 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했다. 그리고 적을 유인해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솥 바위는 임진왜란 당시의 격전지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1592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적을 맞아 2,000인에 이르는 병력을 휘하에 거느리고 대승을 거둠으로써 왜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정암 철교에서 바라본 정암진

정암(鼎巖, 솥바위)

정암(鼎巖)은 가마솥 다리처럼 세 개의 다리를 뻗고 물 위에 드러난 암석이 마치 솥뚜껑처럼 보인다고 해서 생긴 명칭이고 솥바위라고 부른다. 한자로 정()'솥 정'이라 하고, ()'바위 암'이다외형을 살펴보면 약 20ton 가량의 커다란 바위가 아래를 받치고 있고, 그 위로 높이 8m가량의 작은 바위가 탑 층을 이루고 있다조선 말기 한 도사가 이 바위 수면 아래 세 개의 발이 가리키는 주변 20(8)에 큰 부자가 나올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북쪽 의령군 정곡면에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 남쪽 진주 지수면에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 GS그룹 창업주 허만정 회장, 동남쪽 함안 군북면에 효성 창업주 조홍제 회장 등 4명의 재벌 총수가 태어났다. 그래서 창업과 입시를 목전에 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기도를 한다. 의령에는 부와 성공을 상징하는 3대 바위가 있는데  "솥 바위", "탑 바위"와 "코끼리 바위"이다.

여기서 이병철 생가 정곡면 중교리 까지는 9.410여분 정도 소요된다그곳에서 태어난 이병철은 결혼해 분가하기 전까지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 회장도 의령 친할머니 슬하에서 3살까지 자랐다. 1,907(577) 크기의 생가는 남서향으로 크게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된 한옥이다. 대문에서 오른쪽으로는 큰 바위가 있고, 뒤쪽으로 대나무 숲이 있는 구조다. 마당에는 안채 쪽과 대문 쪽에 2개의 우물이 있고 곳곳에 벽오동과 회화나무가 있다.

지수면 승산리 지수초등학교에는 1921년 개교 당시 1회 입학생이던 LG 창업주 구인회 회장, 효성 창업주 조홍제 회장,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함께 심고 가꾼 소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부자 소나무'로 불린다. 지수초등학교는 학생 수 감소로 2009년 인근 송정초교와 통합됐다. 옛 지수초교는 ‘K-기업가정신센터로 변모했다.

창업주 4인의 인연

조홍제 회장은 유년 시절 의령에 있는 이병철 회장의 형 이병각과 교류를 많이 해 자연스레 친구 동생인 이병철 회장도 알게 됐다. 이병각은 진주에서 제분업 사업을, 마산에서 양조장 사업도 했다. 이병각의 장인 하겸진은 진주 수곡면 출신이다. 조홍제 회장의 장인 하세진 역시 진주 수곡면 출신으로 하겸진과는 친척이다. 조홍제 회장은 해방 후 이병철 회장이 서울에서 설립한 삼성물산공사에 투자를 해 동업을 했다.

조홍제 회장과 구인회 회장과의 관계는 동네 대항 축구 시합을 하면서 교류해 이웃한 마을 친구로 지냈다. 서울에 있는 중앙고등학교 2학년까지 함께 보냈다. 그 후 각자 사업을 하면서도 교류는 왕성해 구인회가 플라스틱 연구를 할 때 일본에서 도서를 구입해 주는 등 구씨 집안과 아주 절친한 관계로 지내왔다.

구인회 회장과 이병철 회장은 1922년 지수보통학교 3학년 1학기를 함께 공부했다. 이병철 회장이 생활한 매형 집이 구인회 회장 본가와 옆집이라 일찍 결혼한 구인회 회장이 의령에서 유학 온 이병철 회장을 불러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1957년 구인회 회장의 3남 구자학과 이병철 회장의 차녀가 결혼해 두 사람은 사돈 관계가 되었다. 1960년대 두 사람은 방송사업 동업을 한 인연도 있다.

허만정 회장은 194512, 부산에서 무역업을 하던 구인회 회장을 찾아가 사돈이 하는 사업에 자금을 투자하겠소, 그리고 내 셋째 아들 준구를 맡기겠소.” “준구야, 경영은 구씨 집안이 잘한다. 나서지 말거라하는 가르침을 남겼다이것이 구씨와 허씨의 첫 공동사업의 진행이고 LGGS로 분리하기까지 50년 넘게 불협화음이 없었다.

허만정 회장은 이병철 회장이 부산에서 제일제당을 경영할 때 장남 허정구를 보내면서 삼성에도 자본을 투자했다. 이병철 회장의 매형 허순구가 이웃한 집 허만정 회장과 친척이라 자연스레 이병철 회장과 허만정 회장이 연결된 것으로 보여 진다. 조홍제 회장의 처남 하영진은 허만정 회장의 유고집에 조카관계로 기록되어 있다. 조홍제 회장과 허만정 회장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의령 여씨(宜寧 余氏) 시조제단비(始祖祭壇碑)와 향제시도록(享祭時到錄)

의령 여씨 시조 제단비는 정암루 동쪽 절벽 아래 솥바위 가는 길에 위치하며 의령 여씨 시조 여선재에게 제사를 지내 던 제단에 세워진 비석이다. 1807년에 세워진 비석에는 여선재를 우음곡에 모셨다는 족보의 내용 바탕으로 묘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끝내 찾지못 하였고 우음곡과 뜻이 비슷한 지금의 위치에 제단 비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글은 대사간을 지낸 의성인 김한동(金翰東)이 짓고, 글씨는 단성에 거주하던 선비 합천인 이의선(李宜璿)이 쓴 것이다.

향제시도록의 표제는 시도기(時到記)로 되어 있고 책등에는 향제시도록이라 적혀 있으며, 필사본이다. 여중묵(余重默)의 친필로 보이는 비단일록서(碑壇日錄序)2면이 권두에 실려 있으며, 1면에 178행씩 적혀 있다그 뒤 정서(淨書)되어 있는 본문은 1면당 총 10(평균적으로 120자씩 기록)으로 총 461면이다. 책의 내용은 비단일록 및 시도기의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체 461면 가운데, 비단일록은 4-19면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시도기에 해당하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비단일록은 여중묵이 안동을 출발하는 때인 1807226일로부터 의령 정암에 비석을 세우는 일자인 동년 124일까지 일의 진행 과정 및 관련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다. 1807년으로부터 1943년까지 총 136년간의 기록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 제향과 관련한 지역별 종회의 참여율, 소요된 경비 및 출자 금액 등의 경제 상황, 의령 여씨 가문의 봉선(奉先) 의식 등을 사적인 흐름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써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82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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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읍은 기장군 북부에 위치한 읍으로 장안의 유래는 이 고장의 이름난 사찰인 장안사에서 따온 것으로 생각된다. 한자(漢字)를 보면 길게, 오랫동안의 장()과 편안할 안()을 합하여, 오래도록 편안하고 평화스러운 읍()라는 뜻이다. 불광산(佛光山) 골짜기에서 발원하는 장안천이 역내(域內) 중앙부를 남북으로 관류하고 있고 이를 중심으로 좌우에 명례장안기룡용소반룡월내길천 등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지역  중심은 기룡리 하근마을이다. 장안천은 옛날에는 건천(乾川), 용천(龍川)이라 하였다. 건천은 마르내고, 용천은 미리내다. 모두 머리내로서 큰 내, 으뜸가는 내라는 뜻이다.

옛 부터 이 지역 마을에 다섯 마리의 용이 있는데기룡, 반룡, 용소, 대룡와 개천마을로 이름하여 오룡(五龍)이다. 개천마을에도 용이 있다는 것이다. 오룡 (五龍) 중 용소의 용은 등천하였으니 등천룡이고, 개천의 용은 강속에 누워있으니 와룡이고, 반룡의 용은 등천하려고 몸을 서리고 있는 반룡이고, 대룡의 용은 큰 바위로 화하였으니 대암룡이고, 기룡의 용은 강을 기어가고 있으니 복룡이라는 것이다.

신라 문무왕이 심은 장안리 느티나무

장안읍 장안사로 가는 길의 윗 장안마을 우측에 천년을 살아온 느티나무가 있다. 수령은 1,300년으로 신라 문무왕이 지나가다 심은 나무로 애장왕이 쉬어가기도 하였다는 유서 깊은 노거수다. 높이 25m, 둘레 8m1978년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느티나무로 1999년 산림청에서 새천년을 맞이하여 대표하는 밀레니엄 나무로 지정됐다. 그러나 태풍 "매미" 의 피해를 받아 한쪽 큰 가지가 부러져 예전만큼 풍부한 녹음을 볼 수는 없지만 노쇠 되지 않은 푸르름은 지나가는 이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아홉 공주가 쌓은 우시산국(于尸山國)의 애절한 마지막 왕비 릉(王妃 陵)

장안읍은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에 동래지방을 중심으로 존재한 거칠산국(巨柒山國)과 일정한 정치적 연계를 가지고 존재하였을 것을 생각된다. 그리고 신라에 정복된 이후 신라의 갑화양곡현이 되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16(757)에 이르러서는 기장현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그에 소속되었다. 이 시기 기장현은 동래군의 속현으로 존재하였다.

기룡리 장안초등학교를 지나서 하근마을 기룡다리로 기룡천을 건너 도로좌측의 송림에 옛날 왕비 능이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삼한시대 말엽쯤 오늘날의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에 우시산국(于尸山國)이라는 작은 부족국가가 있었는데 신라의 침략을 받아 병합이 되었다그 침략으로 왕과 왕자는 포로로 잡혀가고 왕비만 아홉 공주를 데리고 탈출하여 지금의 기룡리 근처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곳도 신라의 손길이 뻗쳐 신라군이 왕비와 공주를 찾고 있었다. 왕비와 아홉 공주는 신분을 숨기고 평민으로 가장하여 남의 집 농사일을 도우는 품팔이를 하며 움막집에서 살았다.

지금 왕비 능으로 전해지고 있는 송림은 어느 문중의 소유로 넘어가 나무와 잡목이 무성해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가 되었고 봉분 또한 잡풀이 자라서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는 가운데 왕비는 포로가 되어 끌려간 왕과 왕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 생사 여부에 대한 근심, 걱정과 몸에 익숙지 못한 농사꾼의 고된 일에 몸과 마음이 지쳐 병을 얻어 숨지자 아홉 공주는 어머니 시신을 마당 한가운데 묻고 제각기 흩어져 살았다. 그러나 해마다 3월 보름이면 어머니 무덤가에 모여 치마폭에 흙을 담아 초라한 어머니 무덤을 밤을 꼬박 새워가며 봉분을 쌓았다.

그러고 나서 각자가 장만하여 온 화전과 음식을 차려놓고, 제문을 지어 어머니의 넋을 위로하였다. 해마다 치마폭에 담은 흙으로 쌓은 봉분은 세월이 갈수록 큰 봉분이 되어 왕릉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아홉 공주의 변함없는 효심과 자매간의 깊은 우애가 알려져 아홉 공주가 살고 있던 마을의 부녀들도 그날이 되면 모두 이곳 무덤에 모여서 아홉 공주의 아름다운 행실을 기리며 축제를 하게 되었다부녀자들은 이곳에 모여 아홉 공주의 효성과 우애를 기리는 작문도 하고 작시도 하고 시집살이의 고달픈 사연도 함께 호소하면서 이웃끼리 정도 두텁게 하였다. 이런 아름다운 풍습은 이곳 이웃마을에서 천오백년이나 끊임없이 이어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하여도 해마다 음력 315일이 되면 이러한 풍습은 계속 되었다. 그리고 계를 모아 그 돈으로 좋은 일도 많이 하였고 그 당시의 계 장부와 작문집도 시집간 어느 할머니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이런 좋은 풍습이 계승되지 못하고 사라져 전설로만 남게 되었다. 지금 왕비 능이 있는 송림은 어느 문중의 소유로 넘어가 나무와 잡목이 무성해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가 되었고 봉분 또한 잡풀이 자라서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과연 전설 그대로 이곳이 실제 왕비 능일까? 단지 능과 같이 한 주변 소나무는 알 것이다.

봉분 앞 무궁화꽃이 왕비의 넋을 위로 하듯 만발하게 피어있다.

보부상(褓負商) 배상기(裵常起) 업적을 기린 비석

고리원자력본부에서 임랑해수욕장 방향으로 장안천을 월내교로 건너면 우측에 송림이 울창한 공원이 있는데 명칭이 월내어린이공원이다. 이곳에 보부상 출신이었던 배상기(裵常起)의 업적을 기린 비석 3기가 나란히 서 있다제각각 세운 시기를 달리하면서 동일 인물의 비석 내용도 다르면서 한자리에 있는 것이 독특하다. 그 만큼 이곳에서 배상기의 공덕이 매우크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비석을 통하여 일제강점기 때 보부상(褓負商)의 조직체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배상기(裵常起)란 인물을 알아보면, 1842년 전북 익산 부잣집 종손으로 태어나서 구한말 민란 주모자로 연루되어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면서 보부상 무리에 섞여서 1860년대 월내에 정착하였다. 월내에 정착한 그는 동해안 보부상 최고 수령인 반수(班首)가 되었고 멸치잡이와 젓갈로 많이 번 돈으로 빈민 구제와 장학 사업에 매진했다. 1895년 갑오년 큰 흉년 때는 월내와 좌천 장날마다 가마솥을 장터에 내걸어 굶주린 사람을 구휼했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자금을 대기도 했던 그는 192079세를 일기를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장안읍 용소리 시명산 8부 능선에 있다.

세워진 시기 별로 비석을 살펴보면 1904(고종 8)에 세워진 좌우사 반수 배상기 휼상 영세불망비(左右社 班首 裵常起 恤商 永世不忘碑)이다. 좌우사 반수(左右社 班首)는 보부상 조직의 우두머리 직책이고 비석 전면 양쪽에 새겨진 반수, 접장(接長), 감역(監役) 들은 보부상 조직 직책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좌우사는 조선말기의 보부상 조직이고 반수는 보부상 조직의 우두머리이며 그 아래에 부반수, 주사, 접장, 감역, 공원 등이 있다.

부상(負商)과 보상(褓商)은 각 별개의 행상조합으로 성장하였으나, 1883년 혜상공국이 설치되면서 통합되었고, 1885년 상리국(商理局)으로 개칭되면서 부상을 좌단(左團) 좌사(左社)라 하였고, 보상을 우단(右團) 우사(右社)라고 하였다. 특이하게도 같은 비석의 후면에 다른 이의 공덕이 적혀있다. 즉 후면에는전 주사 접장 김상명 출의 영세불망비(前 主事 接長 金相明 出義 永世不忘碑)라 새기고 김상명이 성금을 낸 일을 기리는 내용이 담고 있다.

두 번째는 1913년에 세워진 비석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계 휼리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契 恤里碑)이다통정대부는 조선시대 문관 정3품 당상관의 품계이다. 비석이 세울 당시는 한일늑약 3년 뒤인 일제강점기 때 통정대부란 관직명을 사용 가능한지가 궁금하다. 비문에는 계를 형성하여 마을을 도운 일을 기리고 있다.

세 번째는 1917년에 세워진 비석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숙 장학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塾 獎學碑)이다. 비문에는 배상기가 글방을 열어 학문을 장려한 일을 기리고 있다.

왼쪽부터 비석명이 "좌우사 반수 배상기 휼상 영세불망비,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숙 장학비,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계 휼리비"이다
좌우사 반수 배상기 휼상 영세불망비(左右社 班首 裵常起 恤商 永世不忘碑)

捐金數千 惠我行賈

수천냥의 재산을 털어서 우리들 행상을 도와주셨네.

片石嵬然 咸曰某甫

우뚝한 한 조각 비석도 한 입으로 반수어른 칭송한다네.

時班首 金應寬 接長 金世洪 監役 明奎員 崔學柱 金大洪

시반수 김응관 접장 김세홍 감역 명규원 최학주 김대홍

전 주사 접장 김상명 출의 영세불망비(前 主事 接長 金相明 出義 永世不忘碑)

五百其緡 亦云不鮮

오백 꿰미의 돈이란 결코 적지 않나니

惟我賈民 豈忘少選

바라건대 우리 상인들 어찌 잠시라도 잊을소냐!

公員 朴璋鎭 朴泰邠 李起湊 張盛祚

공원 박장진 박태분 이기진 장성조

甲辰四月日立

갑진년(1904) 4월 일 세우다.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숙 장학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塾 獎學碑) 전면

疎財捐義 惠及我蒙

재화를 트이고 의연금 내놓으니 은덕이 우리 학생에게 이르렀도다.

春秋絃誦 里巷西東

춘추로 매번 책 읽고 외는 소리 골목마다 여기저기 들려온다네.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숙 장학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塾 獎學碑) 후면

丁巳五月二十五日立

정사년(1917) 5월 25일 세우다.

監董 秋斗高 金埰洙 朱在昊 張守珠

감동 추두고 김채수 주재호 장수주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계 휼리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契 恤里碑) 전면

坊境頌績 社旅竪功

마을에는 그의 공적 칭송하고 결사의 사람들 공을 치켜세우네.

養逆無憾 我深賴公

여행객 숙박에 유감없으니 우리가 공의 힘을 깊이 입었던 탓이라네.

통정대부 배공 상기 창계 휼리비(通政大夫 裵公 常起 刱契 恤里碑) 후면

大正貳年癸丑六月貳拾日

대정 2년(1913) 계축년 6월 20일

機張郡中北面月內洞西里契立碑

기장군 중북면 월내동 서리계에서 세우다.

有司 南順宗 朱仁權 李載成 韓桓 朴潤浩 金守萬

유사 남순종 주인권 이재성 한환 박윤호 김수만

월내마을은 월래포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고 월래포는 기장의 9대 포구(무지포, 이을포, 기을포, 동백포, 공수포, 기포, 독이포, 월래포, 화사을포) 중 하나다. 월내의 옛 이름은 월래(月來). 월래의 은 울타리의 과 같은 뜻이라고 한다. 즉 방어를 위한 책(), ()을 뜻한다. 월래의 는 내()라고도 표기한다. , 래는 나(, ), (), (), ()와 같은 의미로 나라[], (), () 등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월내, 월래는 성책을 가진 마을의 의미.

예전 디젤기관차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서생역이 경전철인 동해선으로 변경됨으로써 역사가 새 건물로 바뀌었다. 옛 것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옛 건물을 찾고 거기서 옛 정서와 지난 추억을 돌이켜 본다.

구 서생역사 부속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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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면 신평리에 위치하고 있는 신평소공원은 해안가에 조성한 조그마한 간이공원이다. 20092월 착공하여 20104월에 준공되었고 배 조형 전망대를 비롯하여 팔각정자, 야외무대 등이 구성되어 있다. 신평소공원 앞 해변에는 크고 넓고 긴 암반과 바위가 아름답고 멋있다. 주변에는 여느 바닷가처럼 카페가 즐비한데 커피 한잔에 바다풍광을 즐기는 여행객이 많이 온다.

그리고 바다 절경 중 하나가 크고 넓은 암반의 윷판대(擲柶臺)이다.

척사대(擲柶臺)라 하고 윷바위 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유래를 살펴보면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우리나라 장수와 왜나라 장수가 몇 날을 겨루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아 윷놀이로 승부를 결정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바위에 윷판을 칼로 새기고 종일 겨루어도 승부가 나지 않고 저녁이 되자, 왜장이 바다 쪽으로 서서 윷판이 잘 보이도록 깊고 굵게 새기고() 있을 때 우리 장수가 왜장을 발길로 차서 바다에 던져버렸다() 하여 이곳을() 척사대로 불렀다고 전한다. ㅎ ㅎ 반칙 아니 인가~

카페 솔 앞에 있는 윷판대 안내판으로 관리 부족으로 잡풀에 묻혀있어 안타깝다.
윷판대로 추정하고 있는 암반

신평리(新平里)는 일광면의 동쪽 해안에 위치하여 북으로는 칠암리와 원리, 서쪽과 남쪽으로는 동백리와 접한다. 옛 이름은 새들, 이를 한자로 표기한 지명이다. 평탄한 들 가운데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새들은 새버든, 새버들이라고도 하며 새각단이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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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곶(艮絶串) 우리나라 육지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으로 매년 새해 해맞이 축제를 개최하고 서생면 대송(大松)마을에 있는 곶이다. 이곳에서는 영일만의 호미곶 보다 1, 정동진보다도 5분 일찍 해돋이가 시작되고 매년 1231일에서 11일로 넘어가는 날에는 간절곶 해맞이축제가 열린다. 1231일 전야행사부터 시작하여 11일 재야행사까지 이어지며 관광객이 참여하는 레크리에이션, 가요제, 콘서트, 부대행사 등이 열려 특별한 신년맞이를 경험할 수 있다.

신암에서 바라본 간절곶

간절곶이라는 이름은 먼 바다를 항해하는 어부들이 동북방이나 서남방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지형이 뾰족하고 긴 간짓대(대나무 장대)]처럼 바다로 길게 뻗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유래한 지명이다. 한자로는 艮絶이라 표기한다. 간절곶을 조선 초기 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길곶(爾吉串)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가 가지고 있는 뜻은 넓다이며 길()길다라는 뜻으로 역시 길게 튀어나왔다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1918년에 제작된 조선오만분일지형도(朝鮮五方分一地形圖)에는 간절갑(艮絶岬)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기운을 억누르기 위한 것 이었다.

간절곶은 서쪽 봉화산(烽火山) 산줄기가 동쪽으로 완경사를 이루다가 이곳에 이르면 매우 평탄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대부분의 해안가는 바위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곳에서는 해안 절벽이 없다. 봉화산에는 조선 전기에 설치 된 봉수대가 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이곳에는 항로를 인도하는 등대가 있었다.
이 때문에 2차 대전 때는 미군이 등대를 여러 번 폭격해 주위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등대는 광복 후 다시 복원돼 지금까지 운영이 되고 있다.

간절곶은 해맞이공원으로 조성되어 있고 주목할 만한 조형물이 있다. 바로 카보다호카(Cabo da Roca) 돌탑이다. 이 돌탑은 포르투갈 리스보아주의 관광도시인 신트라에 있는 카보다호카(일명 호카) 십자가 기념비를 모방한 돌탑이다. 신트라는 포르투갈 최서단(유럽대륙 최서단)에 위치하고 이곳의 곶의 이름이 카보다호카다.

돌탑에는 포르투갈 시인 루이스 카몽이스의 말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가 있고 지리적 위치, 신트라의 상징 로고 및 좌표와 고도가 새겨져 있다. 차이점은 돌탑의 상부에는 십자가가 없다.

카보다호카(Cabo da Roca) 돌탑으로 포르투갈 리스보아주의 관광도시인 신트라市에 있는 카보다호카(일명 호카) 십자가 기념비를 모방한 돌탑이다.
돌탑에는 포르투갈 시인 루이스 카몽이스의 말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가 있고 지리적 위치, 신트라의 상징 로고 및 좌표와 고도가 새겨져 있다.

한반도 동해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대송(大松)마을은 앞이 확 트여 수평선을 가장 넓게 볼 수 있고 뒤로는 송림이 우거져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이 마을의 간절곶이 전국 명소가 되면서 마을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간절곶의 낭끝 바위는 가장 돌출 지역으로 이곳에서 해를 보는 것이 가장 빨리 볼 수 있다하여 명소가 되었다그러나 간절곶 앞 바다는 지형적으로 돌출지역이 되어 해류가 급해 옛날에는 이 해역을 지나는 배들이 많이 침몰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우체통인 소망우체통으로 너비가 약 2.4m, 높이가 5m로 사진 명소로도 유명한데 실제로 운영되고 있어 엽서를 넣으면 전국으로 발송이 된다. 느린 우체통은 아니며 남울산 우체국에서 매일 한 차례씩 우편물을 수집해 보내준다.

대송(大松)마을의 이전 명칭은 대륙동(大陸洞)이었는데 대운산 줄기가 바다로 뻗고 있어 이의 대()자와, 육지의 끝(간절곶)이 튀어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후 대륙동의 대()자와 송정동(松亭洞)의 송()자를 따서 대송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이곳에는 항로를 인도하는 등대가 있었다. 이 때문에 2차 대전 때는 미군이 등대를 여러 번 폭격해 주위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등대는 광복 후 다시 복원돼 지금까지 운영이 되고 있다.

개발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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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은 의병의 고장으로 곽재우 장군이 태어났고 장군을 기리는 유적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충익사(忠翼祀)와 현고수(懸鼓樹), 정암나루 그리고 생가이다. 충익사는 곽재우 장군과 7장령의 위패를 모신 곳이고 현고수는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큰북을 매달아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義兵)을 모았다는 느티나무이다. 그리고 정암나루는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대승을 거둔 곳이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장군과 17장령의 위패를 모신 충익사(忠翼祀)

남해 고속도로 군북 IC에서 내려 10분 가량 달리면 남강을 만난다. 이 남강을 건너면 의령군 하리이고 정암나루와 의령관문을 통과하여 의령천을 따라가면 맞이하는 것이 충익사다. 먼저 의령천 둔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의병교를 건너면 양쪽 기둥을 세워 둥근 고리로 층층이 쌓은 의병탑이 푸른 숲을 뚫고 그 위용을 자랑한다. 매년 의병제 개최 시 의병교와 의병탑을 화려한 오색불꽃으로 장식한다.

양쪽 기둥을 세워 둥근 고리로 층층이 쌓은 의병탑. 매년 의병제 개최 시 의병교와 의병탑을 화려한 오색불꽃으로 장식한다.

충익사는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던 망우당 곽재우 홍의장군과 17장령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충익사는 19781222일에 준공하였고 충익(忠翼)은 숙종이 곽재우 장군에게 내린 시호로서, 은 나라에 충절을 다하고 은 생각이 깊고 멀다는 뜻이다.

충익사 충의문

충익사 충의각(忠義閣,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2)곽재우 장군과 장군 17의 이름, 본관, , 벼슬 등이 적힌 명판을 보관한 곳이다. 원래 이 건물은 1910년도 합천 이씨 문중에서 의령읍 동동리의 관찰사를 지낸 이중하를 기리는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을 1972년 재부산향우회에서 이를 매입하여 이곳으로 옮겨왔다. 앞면 2칸 옆면 1칸 다포양식의 팔작지붕으로 공포의 높이가 매우 높고 화려하며 지붕면적도 넓다. 극락세계에 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상여모양을 본떠 지은 건물이다. 충의각은 어느 한 곳에도 쇠못을 치지 않은 우리나라 전통 목조건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충의각(忠義閣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522 호)은 극락세계에 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상여모양을 본떠 지은 건물이다 .
충의각은  곽재우 장군과 장군  17 의 이름 ,  본관 ,  호 ,  벼슬 등이 적힌 명판을 보관한 곳이다

모과나무(경상남도 기념물 제83) 높이 12m, 밑둘레 4m, 가슴높이 둘레 3.1m로 수령은 약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이는 지금까지 조사된 모과나무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모과나무는 원래 가례면 수성마을을 지켜주고 보호하던 당산나무로 토속신앙의 대상이었으나 1978년에 충익사로 옮겨졌다.

모과나무 ( 경상남도 기념물 제 83 호 )
주목나무로 박정히 전 대통령이 기념식수(1978.12.22)한 나무다.

유곡면 세간리 현고수(懸鼓樹, 천연기념물 제493)

세간리 현고수는 유곡면 세간마을 앞에 위치하고 있는 느티나무로, 나이는 55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15m, 둘레는 7m이다. 이 느티나무가 현고수(懸鼓樹)라고 불리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연유가 있다.

조선(朝鮮) 선조(宣祖) 25(1592) 413일 왜적이 부산포로 침입하자 당시 41세의 유생이었던 곽재우가 422일 이곳 유곡면 세간리 이 느티나무에 큰 북을 매달아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義兵)을 모아 훈련을 시켰다고 하여 이때부터 현고수로 불렸다고 한다.

세간리 현고수(懸鼓樹, 천연기념물 제493호)

망우당 곽재우 생가와 세간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2)

곽재우 생가와 세간리 은행나무

망우당 곽재우 생가는 2005년에 복원한 것으로 조선 초기 건축양식으로 안채, 사랑채, 별당, 큰 곳간, 작은 곳간, 대문, 문간채등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양반가의 집이다. 1592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9일째 되는 날 이곳 곽재우 생가가 있는 마을에서 곽재우장군을 비롯한 17장령들과 함께 책과 붓을 던지고 가재를 던지고 의병을 일으켰다.

망우당 곽재우 생가는  조선초기 건축양식으로 2005 년에 복원함

곽재우(郭再祐)[1552~1617]는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다. 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낸 곽월(郭越), 어머니는 목사(牧使)를 지낸 강응두(姜應斗)의 딸 진주 강씨(晉州姜氏)와 참봉(參奉)을 지낸 허경(許瓊)의 딸 김해 허씨(金海許氏)인데, 곽재우는 진주 강씨의 소생이다. 곽재우의 부인은 만호(萬戶)를 지낸 김행(金行)의 딸 정부인 상산 김씨(商山金氏)이다.

곽재우(郭再祐)1552(명종 7) 경상도 의령현(宜寧縣) 세간리(世干里)에서 출생하였는데 세간리는 곽재우의 외가가 있는 곳으로, 원래 곽재우의 선대는 경상도 현풍현 솔례리(率禮里,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리)에 세거해 왔다. 곽재우는 어려서부터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독서를 즐겼다고 한다. 1569(명종 22) 의령현 세간리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는데, 공부를 하다 여가가 생기면 활쏘기와 말타기를 하거나 병서(兵書)를 익혔다. 1574(선조 7)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부임한 아버지 곽월을 따라 2년 간 배행하였으며, 1578(선조 11)에는 동지사(冬至使)로 임명된 아버지와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관상 보는 사람이 곽재우를 보고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칠 것이라 하였다.

사랑채

1586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묘소가 위치한 신당동(新堂洞,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에서 여묘 살이를 하였다. 1589년 상사(喪事)가 끝난 뒤에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의령현의 기강(岐江) 돈지(遯池)[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마산리]에 정자를 짓고 한평생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안채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즉시 사재를 털어 장사들을 모집한 뒤 의병을 일으켰다. 곽재우는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이름 짓고 위엄을 보이었다. 곽재우는 우선 의령현의 신번현(新繁縣)[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일대]을 왜적으로부터 지켰으며, 이후 연전연승하였다. 곽재우는 처음 의병을 일으켰을 때 군사가 적었으므로, 매복전을 통해 왜적을 물리치니, 이들이 곽재우를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렀다. 특히 곽재우는 1592년에 정암진(鼎巖津) 전투와 제1차 진주성(晉州城) 전투에서 승리하여, 전라도를 수호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617년 세상을 떠났는데, 묘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에 있다.

곳간채

세간리 은행나무는 수령 6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높이 24.5m, 둘레 9.1m이다. 마을의 동편 의병장 곽재우 생가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을 지켜주는 신성한 나무로 믿어지고 있다. 특히 남쪽가지에서 자란 두 개의 짧은 가지(돌기)가 여인의 젖꼭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젖이 나오지 않는 산모들이 찾아와 정성들여 빌면 효력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세간리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제 302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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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련산((金蓮山, 415m) 마하사골에 위치한 마하사(摩訶寺)는 부산 최초의 사찰이다. 1965~1970년 대대적인 중창불사 중 대웅전 건물에서 "상량문" 이 발견되었는데, 그 상량문에서 마하사를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어 창건시기를 신라 내물왕대로 추정하고 있다. 마하사의 마하(Maha)는 산스크리트로서 그 뜻은 "훌륭한" "존귀한" "위대한"이란 뜻으로 글자 그대로 "훌륭한 사찰"이란 뜻이다.

마하사 초입의 나무터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누구인가?

아도화상 또는 묵호자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해동고승전에 따르면 고구려 사람으로 아버지 아굴마, 어머니 고도녕 사이에서 태어났고 5세 때 출가하여 16세에 위나라로 갔다가 19세에 돌아왔다. 신라 미추왕 2(263)때 부터 불교 전파에 노력하였고 눌지왕 2(418) 일선현(현재 선산)에 모례의 집에 머물면서 신라 최초의 사찰 도리사를 창건하였다. 그리고 신라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기 된 계기를 만든 인물이 아도화상이다.

그리고 마하사의 터가 금학이 알을 품는 금학포란(金鶴包卵)의 형세에 자리 잡고 있어 따뜻한 기운이 넘치는 명당자리이다오래전 금련산에는 마하사, 반야암, 바라밀다사(波羅密多寺) 등 세 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지금은 마하사만 남아 있고, 반야암과 바라밀다사는 마하사 입구의 맞은편 언덕에 사찰 터의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마하사 약수터
중생들의 간절한 소원성취를 위한 곳인가?

옛날부터 마하사의 십육나한이 영험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지역의 신도들이 많이 찾아와서 소원성취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나한전의 16나한의 불상이나 탱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적이고 해학적이며 소탈한 모습을 띄고 있다. 불씨를 구해 준 나한과 동지 팥죽, 참새를 쫓아낸 나한등 관련 설화를 보면 팥죽이 먹고 싶어서 황령산의 봉화대를 찾아 갔다는 것이나, 나한전의 불사를 하지 않자 종소리를 바꾸어 버린 것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주어 웃음과 함께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

인간적이고 소탈한 모습의 부처님
2층 누(樓) 건물양식에 천왕문과 범종각
좁은 산세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건물이다.

또한 수영팔경(水營八景) 중 하나인 연산모종(蓮山暮鐘)’이라 하여 마하사에서 해질녘에 울려 퍼지는 은은한 범종소리로 금련산 마하사골을 해탈 향기로 그윽하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일까? 초입에서 맞이하는 범종각의 청정한 종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다.

마하사 창건 내력을 보면 임진왜란 때 봉수대를 지키는 호국불교 사찰이기에 건물이 모두 불탔고, 18~19세기 단계적으로 사찰의 모습을 갖추었다. 1717(숙종 43) 초암(草庵) 형태의 대웅전과 나한전을 짓고 신도 박성우(朴聖祐)가 시주하여 16나한상을 조성하였다. 1729(영조 5) 승려 각찬이 주도하여 나한전을 중건하였다. 1773(영조 49) 승려 진우(震祐)와 쾌일(快一)이 나한전을 다시 중건하였다. 1791(정조 15) 승려 채정(采定)이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1841(순조 14) 대방, 즉 마하대복연을 중건하였다. 1860(철종 11) 대웅전과 요사를 중건하였다. 1876(고종 13) 요사와 식당을 중건하였다.

마하사의 터가 금학이 알을 품는 금학포란(金鶴包卵)의 형세에 자리 잡고 있어 따뜻한 기운이 넘치는 명당자리이다.

1965년부터 1970년 사이 승려 문성이 대웅전·응진전·대방·요사·식당을 중건하였다. 1983년 승려 지환이 응진전을 중건하였고, 1984~1985년 승려 지연이 종각을 세우고 반야암을 중창하였다. 1987년 승려 지정이 설법전을 보수하였고, 대방을 지장전으로 개축하였다. 1995~1998년 승려 경민이 대웅전과 삼성각을 중건하여 현재의 마하사 모습을 갖추었다.

대웅전은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안에는 2000년에 조성한 금동 아미타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후불탱과 목각 지장탱, 목각 신중탱이 있다. 오른쪽에는 조선 후기 제작한 목조 여래 삼존 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창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솟을살 살대에 십장생 살대를 꾸며 놓은 살문구조다. 대웅전에 보기 힘든 특이한 구조로 보는 재미가 솔솔한 창호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대웅전
대웅전 공포의 고풍스러운 맛은 크지 않다.
창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솟을살 살대에 십장생 살대를 꾸며 놓은 살문구조로 대웅전에 보기 힘든 특이한 구조로 보는 재미가 솔솔한 창호다 .
십장생 중 학과 소나무
십장생 중 학과 사슴, 소나무

나한전은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8세기 건물을 최근 중창하였다. 안에는 18세기 조성한 목조 석가여래 좌상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우 협시하고 있다. 또 불단 좌우에 16나한상과 나한도는 석조로 목조 석가여래 좌상과 같은 시기 작품이다.

정면  3 칸 ,  측면  2 칸의 팔작지붕의 나한전
옛날부터 마하사의 십육나한이 영험하기로 유명하여 지역의 신도들이 많이 찾아와서 소원성취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대웅전 맞은편 대방(大房)은 일명 마하대복연(摩訶大福緣), 지장전으로 근래에 다시 고쳤다. 대방(大房)은 스님들의 수행, 식사, 회의 등이 열리는 곳으로 현재 마하대복연, 지장전 현판이 각각 걸려있다. 맨 좌측에는 지대방 현판이 걸려있는데 사찰의 큰 방에 딸린 작은 방을 칭하는 것으로 본 건물에 시멘트로 추가적으로 만든 것 같다.

지대방은 본래 스님들의 휴게실로 스님들의 신변잡기, 종단 소식 등을 주고받는 장소로 주로 별도의 방이 없는 스님, 갓 출가한 행자나 사미들이 주된 이용자다. 어원은 벽에 지댈 수 있는 방에서 유래했으며 현재는 창고로 쓰이는 것 같다.

지대방, 마하대복연 ( 摩訶大福緣 ),  지장전

십육나한의 설화, 불씨를 구해 준 나한과 동지 팥죽」과 참새를 쫓아낸 나한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어느 해 동짓날 밤에 마하사의 불씨가 모두 꺼져 버려 팥죽을 쑤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주지가 절 부엌에 가 보니 화덕에 불이 켜져 있어 놀라는데, 그때 황령산의 봉화꾼이 와서 하는 말이 어젯밤 이 절의 상좌 아이가 불을 얻으러 왔기에 불을 주고 팥죽을 먹여 보냈다고 했다. 주지는 그리한 일이 없기에 이상하게 여기고 팥죽을 쑤어 나한전에 올라갔는데 십육나한 중 오른쪽 세 번째 나한의 입술에 팥죽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뒤 소문이 나 민가에서 찾아오는 신도들이 많아졌다.

어느 해에는 절 마당에 참새가 많이 찾아와 절에 피해가 크자 나한전에 빌었더니 참새 한 마리가 죽어 떨어지고, 그 후로 다시는 참새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어느 해에는 불사를 거행하는데 돈이 부족하여 나한전의 불사를 행하지 않고 불사 종료 회향식을 올리려고 했다. 이때 범종을 치는데 종소리가 나무 소리로 바뀌어 신도들이 깜짝 놀라 나한전에 나가 내일 나한전 불사를 거행하겠다고 하니 종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16나한 설화의 영향인지 전반적으로 부처님 상이 정겹고 친밀감이 느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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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앵림산(鶯林山, 491m) 기슭에 위치한 안적사(安寂寺)는 신라 시대인 661(문무왕 원년)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초창에 관한 문헌 자료는 전하지 않으나 해운대구 반송동 운봉 부락 뒤편에 있었던 운봉사(雲峰寺)가 연원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운봉사는 석탑 옥개석을 비롯해서 기와·토기·청자 파편 등이 발견되어 신라 말 고려 초의 사찰로 추정된다. 운봉사가 임진왜란으로 폐사되자 현재 지역으로 옮겨와 안적사가 되었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계단따라 올라가면 맞이하는 원통문

1592(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이후 범어사(梵魚寺) 묘전 화상(妙全和尙)이 중건하였다. 1873년에는 대웅전, 수선실 등을 경허(慶虛), 해령(海嶺)이 중수하였으나 광복 후 거의 폐사되고 소실되었다. 1973년부터 남곡덕명(南谷德明)이 대웅전, 삼성각, 수선실, 요사채, 종무소 등을 다시 지어 지금의 가람 배치를 갖추었다.

일주문

현재 안적사 경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삼성각, 설현당, 보림원 등 10동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1990년 무렵 지어졌으며, 아미타여래 좌상과 관음보살·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그리고 대웅전 에는 아미타여래가 서방 극락세계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아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가 있는데 1874년에 제작 된 탱화로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0호이다. 보통 극락전의 본존불인 아미타여래의 후불탱화나 감로 탱화 등의 상단탱화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천왕문
천왕문에서 바라 본 일주문
천왕문 겸 반야문 사방벽면에는 12지상이 벽화로 꾸며져있다.
공포가 아름다운 종각

특징은 화면 상단에 등장하는 나한의 묘사에서 두드러지는데, 아미타 삼존을 비롯한 문수·보현 동자의 표현이 조선 후기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면, 나한상 6위의 얼굴 표현은 주색(朱色) 바림의 음영을 통해 얼굴의 굴곡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어, 음영을 부각시켜 인물의 개성을 표현하는 근대 불화의 성격으로 조선 후기 불화에서 근대 불화로 전환되는 과도기적인 변화 단계를 보여주고 있는 자료이다.

또한 중생의 사후 세계를 관장하는 지장보살과 명부(冥府)에서 중생들의 죄질을 심판하는 십대 명왕들, 그리고 그 권속들을 도설하고 있는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가 있었으나 현재 범어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1919년에 제작된 작품이기는 하나 전통 기법을 가진 고식적인 구도, 독특한 표현 기법,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양, 유려한 선 처리 등 이 시대 작품으로는 보기 드문 아름다운 작품으로 주목받는 문화재이다.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9호이다.

삼층탑에 진신사리3과를 봉안하여 여래진신사리보탑이라고 칭함

대웅전 바로 옆에 삼성각에는 칠성탱·산신탱·신중탱과 원효·의상(義湘동산(東山)의 진영이 있다. 대웅전 왼편에 요사인 설현당(說玄堂), 오른편에 보림원(寶林院)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 뒤편으로 삼소굴(三笑窟)이라는  선원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에 조성한 3층 석탑도 경내에 있다.

안적사 전경

안적사는 비록 건축물은 최근에 지어졌지만 신라 시대 승려 원효와 의상이 젊었을 때 화엄경을 깊이 연구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신심이 깊은 신도와 수선납자가 꾸준히 이 절을 찾고 있다. 현재 범어사의 수사찰(首寺刹)이고 신라시대의 맥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앵림산(鶯林山)은 산속에 꾀꼬리 떼들이 모였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장산의 북쪽 연봉으로, 북서쪽 골짜기에서는 내동천이 발원해 내동 마을의 내리교를 가로질러 흘러내린다. 앵림산 주변에는 억새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고 해송이 주를 이루며, 사방으로 너덜겅이 있다. 그리고 2시간에서 7~8시간에 이르는 다양한 산행 코스와 시원하고 조용한 계곡도 있어 등산객과 여름철 가족 피서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앵림산(鶯林山)과 원효(元曉)와 의상(義湘)대사의 이야기

원효(元曉)대사와 의상(義湘)대사는 젊었을 때 불교의 경전인 화엄경을 깊이 연구하며 안적사에서 정진하였다. 안적사(安寂寺)가 있는 곳은 동해의 푸른 바다가 아른거리고, 숲이 울창하며, 기후가 따뜻하여 온갖 새가 지저귀고 있는 극락같이 아름다운 곳이다. 더욱이 따뜻한 남쪽 나라에만 있는 꾀꼬리와 극락조가 짝을 지어 지저귀고, 사람들의 팔과 어깨에 앉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곳을 앵림산(鶯林山)이라 했다. 이 극락 같은 곳에서 원효대사는 안적사 자리에 토굴을 만들고, 의상대사는 꾀꼬리 떼가 많이 서식하는 그 아래에 토굴을 만들어 주석하였다. 의상대사는 탁발하지도 않고 선녀가 올리는 공양을 받고 있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이를 자랑하고 싶어 사형으로 모시고 있는 원효대가를 공양에 초대하였다. 그런데 이날 어김없이 공양을 올리던 선녀는 끝내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기다리다 못해 되돌아 간 후에 나타난 선녀에게 의상대사는 무안을 당한 화풀이를 하였다. 선녀는 원효대사가 앉은 곳에 화광이 충전하여 접근할 수 없었다고 변명하였다. 그때 의상스님은 원효스님이 금강 삼매에 들어 신통을 부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의상스님은 교만심을 버리게 되어 크게 득도하였다고 한다.

1973년 불사에 크게 기여한 신도의 무덤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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