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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7대 선덕여왕(? ~ 647, 재위기간 632년 정월 ~ 647년 정월 : 15)의 능은 보문동 산79-2번지로 경주 낭산(狼山) 남쪽 봉우리 정상(해발 100m)에 위치하고 있다. 산 정상의 남쪽 부분 일부를 깎아 평지로 만든 후 능을 조성하였다. 능은 원형봉토분으로 높이 6.8m, 직경 23.4m, 둘레 73.3m이다. 묘제는 횡혈식석실분으로 추정된다.

선덕여왕릉 찾아가는 길
신라 27 대 선덕여왕 (? ~ 647 년, 재위기간 632 년 정월 ~ 647 년 정월 : 15 년 ) 의 능

봉분자락에는 괴석을 쌓아 만든 호석이 있는데 2~3단으로 높이는 70cm로 봉분 주위를 둘러쌓았다. 현재 선덕여왕의 능은 원형이 아니라 1949년에 보수한 것으로 당시 호석은 봉분의 흙에 덮여 있는데 이를 제거 후 호석을 다시 축조를 하였다. 즉 괴석 몇 개를 나란히 쌓아 나가다가 중간에 큰 평석을 하나씩 세워서 끼우는 방법으로 호석을 조성하였다. 호석에 쓰인 괴석은 재사용하였고 부족한 것은 주변에 있는 돌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덕여왕의 호석은 괴석 몇 개를 나란히 쌓아 나가다가 중간에 큰 평석을 하나씩 세워서 끼우는 방법으로 조성하였다.

낭산(狼山)은 나지막한 야산이지만 신라시대 신유림(神遊林)하여 신령스러운 산으로 숭앙받았다.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실성왕 12(413) 8월에 구름이 낭산에 일어났는데 구름이 누각같이 보이고 사방에 아름다운 향기가 퍼져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의 신령이 내려와서 노는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생각한 왕은 낭산을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겨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하였다.

()은 이리 낭()’로 이리가 엎드린 형상이라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는 사마천의 <사기>에는 동쪽의 큰 별을 ()’이라 한다.” 고 해서 왕궁(월성)의 동쪽에 있는 산이라 낭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삼국사기> ‘잡지·제사지는 신라에서 가장 큰 제사인 대사(大祀)를 지내는 3(三山)으로 나력(奈歷), 골화(骨火), 혈례(穴禮)’를 꼽았는데 학계에서는 3(三山) 가운데 유일하게 왕경(경주)에 속한 나력’(奈歷)낭산’(狼山)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를 통해 우리민족의 토착신앙인 산악숭배 사상을 엿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천년 신라의 망조가 낭산 주변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삼국유사>경명왕 때(918년 혹은 920) 사천왕사의 소조상이 잡고 있던 활시위가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가 짖었으며,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능(善德女王陵)의 상석

선덕여왕은 26대 진평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사이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은 첫 왕비 마야부인에게서 두 딸이 있었는데 첫째 딸은 천명이고 진지왕의 아들 김용수에게 시집을 갔다. 김용수는 진평왕을 이어 왕에 될 수 있으나 진지왕이 폐위되어서 지지 세력이 없었다. 그리고 마야부인이 죽고 둘째 왕비인 승만부인에게 아들이 태어났으나 얼마 되지 않고 죽었다. 이후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녀를 왕위에 추대하였고, 성조황고(聖祖皇姑), 거룩한 조상을 가진 여왕이란 칭호를 올렸다.

왕위에 오를 즈음 선덕여왕은 40세를 약간 넘긴 나이였고 공주시절에 이미 결혼을 하였으며, 남편은 김용춘이다. 김용춘은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른 후 자식을 낳지 못하여 남편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흠반과 을제(乙祭)가 각 각 남편이 되었으나 자식을 잉태하지 못하였다. 당시 신라에는 삼서제도(三婿制度)가 있어 왕녀가 자식을 가지지 못할 때, 남편 셋을 가질 수 있는 제도였다. 후에 29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이 되는 김승만(金勝曼)과는 사촌자매지간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왕이 될 수 있는 성골(聖骨)이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은 즉위하던 해인 632년에 대신 을제(乙祭)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賑恤)하였으며, 633년에는 주군(州郡)의 조세를 일 년간 면제해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634년에 분황사(芬皇寺),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즉위3(서기634)에 인평(仁平)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중고왕실의 자주성을 견지하려고 했다. 다만 즉위 이래 거의 매년 당나라에 대해 조공사신을 파견함으로써 당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 백제의 신라에 대한 공격이 빈번해짐에 따라 당나라와 연합함으로써 국가를 보존하려는 자구책의 일환이였다.

신라는 642년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본격적으로 받았다. 이해에 신라는 백제의 의자왕의 침공을 받아 서쪽 변경에 있는 40여성을 공취 당하였으며,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지금의 南陽)도 고구려백제의 침공을 받았다. 또한 백제장군 윤충(允忠)의 침공으로 낙동강방면의 거점인 대야성(大耶城:지금의 陜川)이 함락 당하였다. 이와 같은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선덕여왕은 김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지금의 慶山) 군주(軍主)에 임명하여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의 구원요청에 접한 당 태종 이세민은 신라 사신에게 세 가지 계책을 제시 하였다. 첫째는 당이 거란과 말갈을 시켜 요동을 치면 고구려가 함부로 신라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고, 둘째는 신라가 당나라의 옷과 깃발을 사용하면 고구려와 백제가 겁을 먹고 도주할 것이고, 셋째는 여왕을 폐위시키고 그 대신 자기의 친족을 신라의 왕으로 앉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계책은 당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이고 신라 사신을 농락하는 것이라서 사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644년 정월에 다시 사신을 당에 보내 군대를 요청하였고 당 태종은 고구려에 이현장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을 종용했으나 연개소문(淵蓋蘇文)에 의해 거부되고 말았다. 그 무렵 신라의 김유신은 백제를 공격하여 일곱 성을 회복하였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6453월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김유신은 다시 출전하여 2천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뒀다. 그해 5월에는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 공격하자, 선덕여왕은 군대 3만을 동원하여 협공을 하였다. 이 때 틈을 노려 백제가 신라변경을 급습하여 일곱 성을 점령했다. 이 무렵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자장(慈藏)의 건의에 따라 호국불교의 상징인 황룡사9층탑(皇龍寺九層塔)645년에 건립하였다.

그런데 당 태종 이세민이 제시한 계책이 신라 정계에 파문을 일으켜 647년 정월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것을 구실로 명활산성을 장악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비담(毗曇)은 석()씨 계열의 수장으로 645년에 상대등에 임명된 인물로 당시 백성들에게 명망이 높아서 반란에 많은 군대가 참여하였다. 그러나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 알천에 의해 진압되었고 비담 등 진골 귀족들은 9족이 멸족 당했다. 선덕여왕은 이미 병을 앓고 있어 이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병세가 악화되어 64718일에 재위 16년 만에 죽으니 시호(諡號)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선덕(善德)이란 이름은 불교적인 것으로 5세기 초 인도 출신의 학승 담무참(385~433)이 번역한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想經)에 나오는 선덕바라문을 따온 것인데 선덕이란 이름을 사용한 사람 불경에 여러 명 나타난다. 선덕바라문은 석가모니로부터 불법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교화시킨다는 전륜성왕의 운명을 예지 받는 인물이다. 인도에는 아소카왕이 선덕바라문 같은 운명을 갖고 있었다.

선덕왕(善德王) 지기삼사(知幾三事)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에 나타난 지기삼사(知幾三事) 내용은 다음과 같다.
27대 덕만(德曼; 은 만으로도 씀)의 시호(諡號)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 ()은 김씨(金氏),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 632)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나라 태종(太宗)이 붉은빛자줏빛흰빛의 세 가지 빛으로 그린 모란[牧丹]과 그 씨 서 되[]를 보내 온 일이 있었다. 왕은 그림의 꽃을 보더니 말하기를, “이 꽃은 필경 향기가 없을 것이다하고 씨를 뜰에 심도록 했다. 거기에서 꽃이 피어 떨어질 때까지 과연 왕의 말과 같았다.

둘째는, 영묘사(靈廟寺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 4일 동안 울어 댄 일이 있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상히 여겨 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 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精兵) 2,000명을 뽑아 가지고 속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찾아 가면 반드시 적병(賊兵)이 있을 것이니 엄습해서 모두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서교(西郊)에 가 보니 부산(富山) 아래 과연 여근곡(女根谷)이 있고 백제(百濟) 군사 500명이 와서 거기에 숨어 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백제의 장군(將軍) 우소(亏召)란 자가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으므로 포위하고 활을 쏘아 죽였다. 또 뒤에 군사 1,200명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모두 쳐서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여근곡(女根谷) 옥문지(玉門池)

셋째는, 왕이 아무 병도 없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이 그게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니라.” 그 날이 이르니 왕은 과연 죽었고, 여러 신하들은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호대왕(文虎()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는데 불경(佛經)에 말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忉利天)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대왕(大王)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

왕이 죽기 전에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어떻게 해서 모란꽃에 향기가 없고, 개구리 우는 것으로 변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왕이 대답했다.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

또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병사(兵士)의 형상이요. 옥문(玉門)이란 곧 여자의 음부(陰部)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빛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근(男根)은 여근(女根)이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탄복했다.

꽃은 세 빛으로 그려 보낸 것은 대개 신라에는 세 여왕(女王)이 있을 것을 알고 한 일이었던가. 세 여왕이란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이니 당나라 임금도 짐작하여 아는 밝은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선덕왕(善德王)이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별기(別記)>에 말하기를, “이 임금 때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했다.

여왕을 사랑한 지귀(志鬼)의 이야기, 심화요탑설화(心火繞塔說話)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은 조선 선조 때 권문해가 편찬한 백과서로 여기에 선덕여왕을 사모하다가 죽어서 화귀(火鬼)가 된 자귀의 사랑을 그린 설화, 심화요탑설화(心火繞塔說話)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덕여왕이 영묘사(靈妙寺)란 절에 나들이를 갔다. 그 절에서 활리역의 역리(驛吏) 지귀(志鬼)라는 총각이 여왕을 한 번 본 후 그만 깊은 짝사랑에 빠졌다.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여왕을 사랑한 지귀 총각은 심한 열병을 앓았다. 그러던 중 여왕이 다시 영묘사에 온다는 소식을 접한 지귀는 여왕이 지나칠 목탑 밑에 쭈그리고 앉아 기다렸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지친 지귀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목탑을 베고 잠이 들어버렸다.

그 사이 여왕이 목탑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잠든 지귀를 발견하고는 그 연유를 물었다. 연유를 알고 난 여왕은 불공을 올리고 그 목탑 밑에 자고 있는 지귀의 품속에 자신의 팔찌를 빼내 묻어주고 왕궁으로 떠났다. 얼마 뒤 잠에서 깨어난 지귀는 자신의 품안에 놓인 팔찌를 발견하고는 여왕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자 그녀에 대한 열정이 불로 타올라 그의 몸을 태우고 곁에 있던 목탑까지 태워버렸다. 영묘사의 목탑은 이렇게 연모의 불길로 소실되고 말았다.

선덕여왕이 이 소식을 듣자 주문을 짓게 하여 화귀(火鬼)를 달래도록 하였다. 이후 민가에서는 이 주문을 문 벽에 붙여 화재를 방지하는 부적으로 삼았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귀의 마음 속 울화가
몸을 태우고 화신으로 변했구나.
부디 창해 밖으로 떠나다오
만나지 못하여 친할 수 없음을 어찌하리.“

 자귀의 심화(心火)로 인하여 영묘사는 전소 될 것이었는데 혜공스님의 신통력으로 그 일부는 화재를 면할 수가 있었다. 혜공스님은 원효대사와도 친분이 두터운 이름난 스님이었다. 그는 원효가 여러 불경의 소(疏)를 찬술할 때 서로 질문하고 토론한 상대이기도 하였다.

그는 작은 절에 살면서 언제나 미친 사람처럼 크게 취해서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을 춘 까닭에 사람들은 그를 부궤화상이라 불렀으며 그가 있는 절을 부개사(婦蓋寺)라고 했는데 '부개'는 '부궤'에서 온 말이다
그는 또 절의 우물 속에서 살기도 했는데 한 번 우물에 들어가면 몇 달이나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우물에서 나올 때는 먼저 푸른 옷을 입은 신동이 솟아 나왔으므로 그것을 보고 혜공이 우물에서 나오는 시각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우물 속에서 나와도 옷이 젖지 않았다.

이러한 신통력을 가진 혜공이 하루는 풀로 새끼를 꼬아 가지고서 영묘사를 찾아 왔다. 그는 새끼줄로 금당과 경루와 남문의 낭무를 둘러 묶고는 절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일렀다.
"이 새끼는 3일 후에 풀어야 하느니라."
절을 관리하는 사람은 이상하게 여겼으나 신통력을 갖고 있는 혜공스님의 말이라 그대로 따랐다. 과연 그 3일 되던 날에 선덕여왕의 행차가 있었고, 지귀의 심화로 불이 난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혜공이 풀 새끼로 매어 둔 곳만은 화재를 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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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사지(念佛寺址)는 양피사지에서 칠불암 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약 600m 떨어진 곳으로 통일신라시대 1금당 2탑식의 전형적인 사찰이다. 절의 규모는 경주시 남산동 1130번지 일원(면적 : 2,175)이고 삼국유사권 제5, 피은(避隱) 8 염불사(念佛師)조에 기록된 절이다.

삼국유사 염불사(念佛師)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산(南山)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避里村)이 있고, 그 마을에 절이 있는데 피리사(避里寺)라 했다. 그 절에 이상한 중이 있었는데 성명은 말하지 않았다. 항상 아미타불을 외어 그 소리가 성() 안에까지 들려서 360() 17만호(萬戶)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소리는 높고 낮음이 없이 낭랑하기 한결같았다. 이로써 그를 이상히 여겨 공경치 않는 이가 없었고, 모두 그를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다. 그가 죽은 뒤에 소상(塑像)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 안에 모시고 그가 본래 살던 피리사(避里寺)를 염불사(念佛寺)로 이름을 고쳤다. 이 절 옆에 또 절이 있는데 이름을 양피사(讓避寺)라 했으니 마을 이름을 따서 얻은 이름이다.

여기에 나오는 염불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알려진 내용이 없으나 삼국유사 5권 피은(避隱)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를 보면 정토신앙(淨土信仰)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따라서 염불은 관음신앙과 정토신앙이 관련된 것으로 추정 된다.

창건 시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기록을 살펴보며 당() 천보(天寶) 4(745) 이전으로 추정되므로 최소한 8세기 초에는 창건된 것으로 생각된다. 폐사 시기는 삼국유사<皇龍寺九層塔>조와 고려사(高麗史)<세가(世家)>의 내용을 참조할 때, 고려 고종 25(1238)의 원의 침입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폐사된 이후 조선시대 마을이 들어서면서 삼층석탑을 무너뜨리고 탑 부재를 석재로 이용하였다.

절 주위를 살펴보면 동편은 칠불암 진입로가 지나가고 서편에는 산자락이 산길을 사이에 두고 접해 있으며, 남편은 밭과 분묘가 분포하고 있다. 북편의 금당이 위치하는 곳에는 사찰과 민가가 들어서 있다. 2003년과 2008년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20091월에 동·서 삼층석탑은 모두 복원되었다. 2003년 발굴조사 이전의 동 삼층석탑은 북쪽으로 넘어진 상태로 일부 부재만 잔존하고 있었고, 서 삼층석탑은 서쪽으로 넘어진 상태로 각 부재가 남아 있었는데 주변으로 와편과 토기편이 산재하고 있었다.

불국사역 앞 삼층석탑은 염불사지의 동 삼층석탑의 탑재를 사용하여 1962년 복원하였고 1층 옥개석만 이거사지의 탑재를 사용했다. 2009년에 이루어진 복원작업에 따라서 원래 자리인 전 이거사지(傳移車寺址)로 옮겨졌다.

동 삼층석탑

2003년에 이루어진 발굴 조사 당시 옥개석편 3매와 하층기단면석 1매만 남아 있었고, 나머지 부재들은 1962년에 불국사역 앞으로 옮겨져서 1963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복원 당시 1층 지붕돌(옥개석)의 파손 정도가 심하여 부근의 이거사지(移車寺址) 석탑의 부재로 대신하였고, 원래의 1층 옥개석은 이설된 석탑의 뒤에 묻었다. 또한 현재의 노반석은 이설 당시에 새로 만들었다.

염불사지(念佛寺址) 동 삼층석탑
이거사지(移車寺址) 석탑의 지붕돌(옥개석)

동 삼층석탑은 이층기단에 3층의 탑신부(塔身部)를 갖고 있는 석탑으로 상·하층기단면석에 탱주(撑柱) 2, 지붕돌(옥개석)의 옥개받침 5단 등 전형적인 8세기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석탑이다. 하층기단면석은 8매의 돌로 결구되었는데, 탱주 1주는 별석(別石)으로 만들어졌다. 상층기단면석 역시 8매의 돌로 결구되었는데, 그 형식은 하층기단면석과 같다. 그 위의 상층기단갑석에는 각형2단으로 탑신받침이 있다. 몸돌(탑신석)은 양쪽에 우주(隅柱)가 조각되어 있고, 옥개석은 5단의 옥개받침과 2단 괴임이 있는 갑석과 갑석부연이 탑신석을 받치고 있다.

그러나 1층 옥개석 옥개받침의 최하단이 1층 탑신석의 폭보다 훨씬 넓은 것은 1층 옥개석의 부재가 이거사지에서 옮겨온 데 따른 것이다. 또한 상륜부(相輪部)는 노반석(露盤石)만 남아 있는데 노반석이 작은 이유는 복원 당시 잘못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1963년에 불국사 역 앞으로 이전된 동 삼층석탑의 복원된 전체 높이는 588이었지만, 염불사지로 옮겨서 복원된 석탑의 높이는 583.7이었다. 이는 새로 복원하면서 1층 옥개석과 노반석을 원래 형태에 맞춰서 새롭게 교체하면서 높이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여겨진다. 

서 삼층석탑

염불사지(念佛寺址) 서 삼층석탑

서 삼층석탑은 2003년 조사 당시 탑재가 도괴되었으나 하층기단면석 2, 하층기단갑석 1, 상층기단면석 3, 1·2·3층탑신석, 2·3층옥개석이 남아 있었다. 기단면석과 지대석은 1매석으로 처리되었고 각 부재의 크기는 동 삼층석탑과 비슷하여 같은 크기의 쌍탑으로 만들어졌다. 동 삼층석탑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던 사리공을 서 삼층석탑이 3층 탑신석에서 확인 되었는데 방형으로 너비 18, 깊이 10.5이다. 복원된 전체 탑 높이는 545이다.

염불사지 동, 서 삼층석탑은 경주지역 삼층석탑의 시원이었던 감은사지 삼층석탑의 기본구조를 따라 세워진 후대 삼층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복원 공사 후 남은 석탑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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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은 루이 14세가 17세기말 베르사유로 궁권을 옮기기 전 까지 사용되었던 궁궐로써 800년 동안 증축공사의 결과가 현재의 모습이다. 1970년대까지 경제부처와 미술관으로 나누어 사용되었는데 1981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에 의해 전체가 박물관으로 변경, 사용되었다. 6만㎡의 전시실은 리슐리외관, 숼리관, 드농관 등 3곳으로 나뉘며 발권장소인 지하층을 포함하여 총 4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는 11개 분야로 방대하여 전부를 감상하려면 일주일 정도가 소요된다.

최초의 루브르는 12세기말 늑대로부터 시가지를 보호하기 위해 필리프 오귀스트가 축조하였다. 이름의 유래는 늑대를 뜻하는 라틴어 Lupus, 즉 프랑스어 Loup에서 유래가 된 것이다. 당시에는 망루를 지키는 문지기 숙소와 감옥에 불과하였는데 14세기부터 궁궐로써 확장을 거쳐 거듭나게 되었다. 궁궐이 베르사유로 옮긴 후부터는 아카데미 회원들의 사무실과 유명 예술가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프랑스 혁명 때 왕족과 귀족들로부터 압수한 재물 660여점을 전시하기 위해 1793년 박물관으로 용도가 변경되어다. 이후 계속된 정비와 확장을 통해 나폴레옹 3세 섭정기간 때인 1880년에 마무리가 되었다.

루브르 박물관 정문에 위치하고 있는 유리 피라미드는 1981년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에 의해 지어졌고 건축가 이오 밍 페이의 작품으로 1989년에 완공되었다. 피라미드의 정사각형 바닥면에서 꼭짓점까지의 높이는 21.64m, 603개의 마름모와 70개의 삼각유리로 95톤의 철근이 지지하고 있다. 유리 피라미드 아래는 박물관 안내소와 유무인 발권장소가 있다.
총 5개의 층과 3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리슐리외(루이 13세 때 재상) 관, 쉴리(앙리 4세 때 재상) 관, 드농(루브르 박물관 초대 관장) 관이다.

 

암사슴과 함께 있는 사랑의 여신 아르테미스. 일명 베르사유의 다이아나
밀로의 비너스

밀로의 비너스는 1820년 한 농부에 의해서 에게 해의 밀로 섬에서 발견되었고 당시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샤를 프랑스와 드 리파르도가 루이 18세에게 바쳤다. 기원전 130 ~ 100년 당티오슈가 제작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날개를 단 사모트라케의 니케(승리의 여신)

날개를 단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기원전 331년 ~ 323년에 제작 된 헬레니즘 시기를 대표하는 조각이다. 기울어진 날개의 각도, 왼쪽 다리의 위치, 바람이 불어 여신의 다리를 휘감는 듯한 옷의 표현은 조각을 보는 사람들에게 조각상이 날아오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15세기 작품으로 성모 마리아가 유다 산골의 즈가리아 집에 있는 엘리사벳을 만나는 것을 그린 작품이다. 고령으로 임신한 엘리사벳이 무릎을 꿇고 마리아에게 존경을 표하는데 마리아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엘리사벳의 어깨를 짚으며 그녀의 행동을 만류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뒤에 서 있는 두 여자는 마리아 야코비와 마리아 살로메이고 마리아 야코비는 배가 부풀었고 마리아 살로메는 두 손을 모았다.
화면배경에는 개선문과 항구도시 전경이 보이는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는 개선문은 승리의 문, 항구는 구원의 기항지를 의미하는 메타포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은 1503년에 스푸마토 기법으로 그린 작품으로 피렌체에서 제작한 후기 작품이다. 중앙에 정면을 향해 앉아있는 여인이 마라아의 모친 성 안나이다. 어머니의 무릅에 앉아있는 성모 마리아는 양의 등을 타려는 아기 예수를 양과 떼어놓으려고 하고 있다. 양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희생양의 상징으로서, 마리아의 행위는 아들을 험난한 운명으로부터 막고 싶은 모정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성 안나의 머리를 정점으로 하여 삼각형의 오른편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어린 양으로 구성 된 피라미드 구도다.
스푸마토 기법은 윤곽선을 뚜렷하게 그리지 않고 희미하고 뿌옇게 그리는 기법으로서, 인물이 살아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주는 효과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밀라노 귀족 부인의 초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밀라노 귀족 부인의 초상”은 15세기에 밀라노에서 그린 작품이다. 검은 배경을 바탕으로 도발적인 눈, 꽉 다문 입, 밖에서 들어온 반사 된 빛까지 고스란히 담은 정교한 눈동자의 이 여인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밀라노에서 초상화를 그릴 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요소다. 이 작품에는 손이 그려져 있지 않고 손 부분이 파라페토라고 불리는 난간으로 가려져 있는데 당시 이탈리아 화가들이 인물에 현실감과 공간감을 불어넣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요소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바위산의 성모"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바위산의 성모”는 스푸마토 기법으로 그린 작품으로 1483년 밀라노의 산 프란체스코 수도회 성당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1485년에 완성한 것으로 밀라노에서 제작한 첫 작품이다. 성 가족이 이집트로 피난을 하던 중 세례자 요한을 만났다는 전설을 그린 것으로 동굴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순간을 묘사한 작품이다.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 그리고 천사와 예수가 피라미드 구도로 화면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1503년 비단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가 그녀의 초상화를 다빈치에게 부탁해서 그린 작품이다. 모나는 이탈리어로 부인을 뜻하고 리자는 이름이다. 프란체스코가 작품료를 지불하지 않아 다빈치가 1519년 사망하기까지 그가 가지고 있었고 사망 후 그의 제자에게 남겼다.
피라미드 구도 속에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의 여인이 팔걸이의자에 몸에 살짝 의자에 앉아 있다. 모나리자의 원본은 관리차원에서 지하 아틀리에에 보관되어 있고 전시관에 걸린 작품은 최첨단 기법으로 그려낸 복제품이다.

로렌조 로토의 "간통한 여인과 예수"

로렌조 로토의 “간통한 여인과 예수”는 16세기 작품으로 이소케팔리아 원칙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소케팔리아 원칙은 다수의 등장인물로 짜이는 역사화의 구성에서 사람들의 머리 높이를 균등하게 맞추는 방식이다. 간음한 여인과 손바닥을 펴서 군중의 공격에 대한 저지, 만류, 반대하는 예수와 노란 옷을 입은 늙은 율법학자를 전면 중앙에 하나로 묶고, 손가락을 치켜들고 모세의 율법을 들먹인 남자, 병장기류를 든 군인 등 여인의 처벌을 요구하거나 예수의 반응을 떠보는 주변 무리를 묶어서 두 그룹 사이에 긴장감 넘치는 대치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는 1814년 나폴레옹의 여동생 캐롤린 뮈라의 의뢰를 받아 그린 작품이다. 오달리스크는 터키어 오달릭(odalik)에서 유래한 말로, 규방의 여인을 뜻한다. 여인의 나체를 극도로 미화한 작품으로 나폴레옹 제국의 멸망으로 인해 주문자로부터 값을 치르지 못해 화가의 손에 남겨졌다. 앵그르의 스승은 자크 루이 다비드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와 조세핀 황후의 대관식"
대관식 당시 조세핀은 마흔이 넘었는데 우아한 여인으로 묘사되었다.
전통적인 대관식에는 교황이 황관을 씌워주는데 나폴레옹은 본인 스스로 황관을 쓰는 쪽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교황 피우스 7세는 나폴레옹 뒤쪽에 앉아 단지 축복하는 손짓만 하고 있다.
황관을 받는 인물은 그의 처남이자 나폴리 국왕인 뮈리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와 조세핀 황후의 대관식” 은 나폴레옹의 대관식 3개월 전인 1804년 9월 황제로부터 직접 청탁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2년의 제작 과정을 거쳐 완성하였다. 1804년 7월 국민투표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12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나폴레옹이 아내 조세핀에게 직접 황관을 씌워 준 후 본인은 스스로 양손으로 황관을 썼다. 전통적인 대관식에는 교황이 황관을 씌워주는데 나폴레옹은 본인 스스로 황관을 쓰는 쪽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교황 피우스 7세는 나폴레옹 뒤쪽에 앉아 단지 축복하는 손짓만 하고 있다. 대관식 당시 조세핀은 마흔이 넘어 는데 우아한 여인으로 묘사되었다.
황관을 받는 인물은 그의 처남이자 나폴리 국왕인 뮈리이고 조세핀의 두 시녀 뒤의 선 다섯 여인들은 나폴레옹의 여형제들로 첫 번째 여인이 데리고 선 사내아이는 나폴레옹과 전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 나폴레옹 샤를이다. 황관을 받는 인물 뒤의 그림 중앙에 앉아 있는 여인은 나폴레옹의 어머니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

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는 1783년 루이16세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신고전주의의 첫 작품으로 출장 전 호라티우스 형제를 묘사한 작품이다. 기원전 669년경에 로마와 알바(Albains)의 전쟁에서 싸웠던 사돈관계의 두 가문의 아들들, 즉 로마 호라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와 알바의 큐라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에 관한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이다.
그림의 왼쪽은 호라티우스 형제의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세 자루의 칼을 주면서 제국을 위한 죽음이나 전쟁의 승리를 맹세하게 있고 오른쪽은 고통스러워하는 큐라티우스로 시집 갈 누이 카밀라, 큐라티우스에서 시집온 아내 사비나 그리고 어린 손자를 감싸 안고 있는 어머니가 그려져 있다.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은 1819년 작품으로 1816년 7월 2일 영국에서 프랑스로 반환된 세네갈의 생루이 섬에 정착하기 위해 약 400명을 태운 군함 메두사호가 좌초되어 13일 동안 표류하였고 15명만 구조된 비극적인 사건을 그렸다.
작품은 생존자들이 13일간의 표류 뒤 수평선 멀리 구조선을 발견하는 순간을 묘사하였다. 먼 곳에서 지나가는 배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흔드는 인물들과 무릎에 놓인 죽은 아들을 애도하는 아버지, 뗏목 가장자리에 곧 파도에 떠내려갈 듯한 시체들 등 피라미드 구도다.

역사화가 폴 들라로슈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역사화가 폴 들라로슈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1850년도 유화 작품으로 1800년 봄 이탈리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을 기습 공격하기 위하여 제2차 이탈리아 원정 때 나폴레옹 보나파트트의 모습이다. 말 대신 노새를 타고 알프스 설산 그랑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하는 모습으로 추위를 막기 위하여 회색 코트를 입었으며 차갑고 힘겨워하는 분위기로 실제 모습에 가깝도록 표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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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도(目島)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방도리에 있는 무인도로 모양이 물고기 눈처럼 생겼다고 하여 부르게 되었고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에는 동백도로 표기돼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부터 명칭이 춘도(椿島)로 바뀌었는데 청산해야 할 일제잔재이다. 일본에서는 동백나무를 한자로 춘(椿)자를 쓰는데 갑자기 생기는 불행한 일을 춘사(椿事)라고 한다. 식민사관의 일환으로 경주 양북 동해천(東海川)을 대종천(大鐘川)으로 바꾼 것처럼 목도(目島), 동백도(冬柏島)를 춘도(椿島)로 바꾼 것이다.

목도는 면적은 약 15047, 둘레는 440m으로 동해안 섬 중 유일한 상록수림(常綠樹林)으로 동백나무, 후박나무, 사철나무 등 각종 상록수림으로 절경을 이루어서 1962127일에 천연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옛날에는 대나무가 많아서 대섬(竹島)이라고도 불렀고 신라 때에는 대나무를 길렀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주민들이 대나무 화살을 만들어 나라에 바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나무는 점점 사라지고 동백나무·후박나무 등 각종 상록수림이 그 자리를 메웠다.

1970, 80년대 울산 최고의 동백꽃 관광지로 꽃피는 봄이면 붉은 동백꽃을 보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고 45인승짜리 배 두 척이 운항했다. 그러나 점차 섬 생태계가 훼손되자 1992년부터 안식년제를 도입하면서 현재까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언젠가 생태계가 복원되어 개방되기를 손꼽아 기다릴 뿐이다.

목도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도 있다. 가수 하춘화(河春花)197345에 부른 목도는 내 고향이다. 1970년대 울산이 농어촌에서 산업 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향이 공장부지로 편입되어 고향을 떠나는 이주민들의 망향과 실향의 정서를 노래로 담고 있다.

 17세기 이곳 방도리(方島里)는 울산도호부 청량면 목도리 목도포구로써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1693년과 16962회에 걸쳐 독도로 출발한 포구이다. 이들은 독도를 지키기 위해 독도에서 돗토리현까지 건너가 싸웠다. 안용복은 이곳 목도 세거 광주 안씨 출신이다. 박어둔은 충청도 이산현(논산시 노성면) 소론명가 출신으로 증조부는 가선대부(2) 박잉석, 조부는 통정대부(3) 박국생이며 아버지는 정병 박기산이다. 조부 박국생이 1646(인조 24) 3월 그 지방의 유탁(柳擢)과 한양의 권대용(權大用)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을 하여 고향 이산현에서 살수가 없게 되자 울산으로 이사 왔다.

방도리(方島里)는 사방(四方)의 방()과 목도(目島)의 도()를 합성하여 만든 이름이다. 방도리에서 어부와 인어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동백도설화(冬柏島說話)라 하여 용왕의 딸인 인어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어부에 대한 보은담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에 마음씨 착한 청년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다보니 그물에 인어가 들어 있었다. 다른 어부들은 인어를 팔아 돈을 벌 수 있다고 기대에 부풀었지만 이 어부는 인어가 불쌍해 풀어 주자고 하였다. 이 어부는 다른 어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어를 구해 주고 다른 어부들로부터 매를 맞고 쓰러졌다.

어부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부는 용궁에 있었다. 인어는 용왕의 딸이었다. 인어는 자신을 구해 준 어부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용궁으로 데려 온 것이다. 용궁에서 다시 만난 인어는 용왕에게 어부와 인간 세상에 나가 살겠다고 하였고 용왕은 딸을 위해 울산의 온산에 섬을 만들었다. 육지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하는 소리와 함께 물길이 하늘 높이 치솟으며 바다로부터 섬이 솟아올라와 지금 모양의 목도가 되었다. 이후 섬에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갔다.

 현재 목도는 쌍용정유공장에 둘러싸여 외롭게 홀로 떠 있다. 낚시꾼들이 가끔씩 찾아 와서 외로움을 달래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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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산(日光山)은 일광면 삼성리에 있는 산으로 안산암의 암주(岩柱)로 되어 있고, 일광 신도시를 바라보고 있다. 해발 385m로 그리 높지 않고 비교적 완만하나 정상부 주변부터는 약간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산의 형상은 종을 엎어놓은 듯한 종상형이고 산 정상에서 동해를 바라보면 경관이 뛰어나며 일광 바다가 아늑하게 보인다.

일광산 정상에서 바라보 보면 펼쳐지는 일광 앞 바다

임도와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인근 주민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자주 찾는 산이다. 또한 MTB 동호회가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기장읍지에는 아침 햇살을 가장 먼저 받는 곳이라고 하여 일광산이라고 하며 기장 향교가 기장읍 교리로 옮기기 전에 는 향교의 주산이었다.

남쪽으로 바라도 본 LCT와 해운대 장산

일광산(日光山)에 오르는 방법에는 임도를 이용하는 것과 소로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소로를 이용하는 것이 운치가 나고 산행하는 맛이 난다. 가장 빨리 정상까지 가는 방법은 횡거사까지 차로 와서 주차 한 후 걸어가면 30분이면 도착한다. 그러나 임도의 경사가 심해 운전 할 때 주의를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많이 이용하는 방법은 백두사에서 출발하여 좌측과 우측에 조성 된 임도 또는 소로를 따라 올라간다.

일광면 백두사
백두사 좌측 임도에 있는 안내표지판
백두사 좌측에 조성 된 임도와 소로 입구
소로에서 만난 정3품 비석(증 통정대부 김해김씨지묘)

소로를 따라 산행을 하면 유난히 다양한 바위를 자주 만난다. 아무래도 산행의 묘미는 흙과 바위의 산세를 감상하고 꽃과 나무의 생명력을 느끼는 것일 것이다. 차성가(車城歌) 삭출금부(削出金芙) 일광산은 만장봉(萬丈峯) 높았는데~그 옛날 높고 높은 산봉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정상을 알리는 표지판
일광산 정상 표지석
멀리 보이는 고리원자력발전소
하산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
횡금사 방향을 안내하는 표지판
좌측 임도로 하산 때 만나는 휴게장소
백두사와 예지골못 갈림길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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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옛길은 산성산과 일광산 사이 기장읍 서부리 용소골에 있는 계곡 길이다. 용소골 지명은 옛날 이곳에서 용이 났다고 하여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 골짜기는 청강천 상류계곡에 해당되고 하류에는 둑을 막아 만든 용소골저수지가  있고 주변은 용소웰빙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기장초등학교 자리에는 옛날에 기장 동헌이 있었는데 동헌에서 남으로 큰 길을 만들고, 길의 동쪽은 동부동(東部洞), 서쪽은 서부동(西部洞)이라 하였다. 1914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서부동 일부가 서부리로 되었다,

용소윌빙공원 입구에서 바라본 산성산(성산)
용소웰빙공원 입구. 직진방향으로 저수지와 나란히 조성 된 길을 따라가면 기장 옛길 이정표를 만난다.

기장 옛길은 신라 갑화양곡현(505년)에서 비롯하여 이전 선사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이 넘나들던 유서 깊은 길이자 기장의 관문길이다. 옛날 용소 계곡 길의 상류 지역은 험한 바윗길로서 사람이나 우마차의 통행이 어려워 잔도(棧道)를 만들어 이용하였다. 이 옛길은 지역 주민들의 나들이 길이자 양산, 동래, 김해를 비롯하여 멀리 서울을 내왕하던 관리와 백성, 그리고 장꾼, 보부상, 남사당 등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었고 대한제국 말기까지 존속된 길이였다. 이 길은 일제강점기 때인 1932년 동래~기장간의 신작로 개설로 자연히 폐도 되었다. 최근 기장군에서는 이 옛길(약 200m)을 문화유적지 차원에서 보존 및 관리해 왔고 잔도(棧道)도 재현시켰다.

부산포항고속도로 교각 밑에 세워진 기장 옛길 안내 표지판
최근 기장군에서는 이 옛길(약 200m)을 문화유적지 차원에서 복원한 기장 옛길 입구

기장 옛길을 답사하기 위해서는 산성산 또는 성산 북쪽에 위치한 용소웰빙공원에 찾아오면 된다. 용소웰빙공원 입구에서 직진방향으로 저수지와 나란히 조성 된 길을 따라가면 부산포항고속도로 교각 밑을 지나다 되는데 산기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농막과 밭을 만난다. 5분 정도 걸어가면 기장 옛길 표지석을 마주하게 된다. 짧은 구간의 한적한 옛길을 거닐다 보면 조선시대 기장에서 군수 및 현감을 지낸 이해륜(李海崙), 엄신영(嚴信永), 손영희(孫永禧), 손경현(孫慶鉉), 오영석(吳榮錫), 송재우(宋載遇), 이경우(李敬佑) 등 7명이 1751년부터 이임으로 떠날 때 계곡 수 좌측 바위와 길 우측 바위에 이름을 새긴 것을 볼 수 있다. 이들 중 엄신영(嚴信永)과 손경현(孫慶鉉)은 시랑대에도 각석(刻石)을 하였다.

맨 먼저 볼 수 있는 각석은 군수(郡守) 이해륜(李海崙)으로 계곡 수 건너편 바위에 행(行) 군수(郡守) 이해륜(李海崙)을 새겼다.
행(行) 군수(郡守) 이해륜(李海崙)

맨 먼저 볼 수 있는 각석은 군수(郡守) 이해륜(李海崙)으로 계곡 수 건너편 바위에 행(行) 군수(郡守) 이해륜(李海崙)을 새겼다. 1897년 6월에 기장 군수로 부임해 왔고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청덕거사비(淸德去思碑)와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세워져 남아 있다. 여기 군수(郡守)는 기장이 기장현에서 1894년 갑오개혁이 단행되고 1895년(고종32년) 2차 개혁 때 동래도호부가 동래관찰부(東萊觀察府)가 되었고 그 아래 군이 되었을 때다.

다음 바위에는 엄신영(嚴信永)의 행(行) 군수(郡守) 엄신영(嚴信永)이 새겨져 있다.
행(行) 군수(郡守) 엄신영(嚴信永)

다음 바위에는 엄신영(嚴信永)의 행(行) 군수(郡守) 엄신영(嚴信永)이 새겨져 있다. 군수(郡守) 엄신영(嚴信永)은 1905년에 부임하였고 시랑대 바위에 엄신영 제우영(嚴信永 弟宇永)’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1904년 4월에 세워진 청덕거사비(淸德去思碑)와 1904년 10월에 세워진 유애불망비(遺愛不忘碑)가 남아 있다.

손영희(孫永禧)의 행(行) 군수(郡守) 손영희(孫永禧)가 새겨져 있는 바위
행(行) 군수(郡守) 손영희(孫永禧)

연이어 손영희(孫永禧)의 행(行) 군수(郡守) 손영희(孫永禧)가 새겨져 있고 군수(郡守) 손영희(孫永禧)는 1901년 8월에 부임하여 1903년에 이임하였다. 전임은 중추원 의관이었다.

계곡 수 좌측 바위에 새겨진 마지막 각석은 손경현(孫慶鉉)의 현감(縣監) 손경현(孫慶鉉) 영세불망(永世不忘)이다.
현감(縣監) 손경현(孫慶鉉) 영세불망(永世不忘)

계곡 수 좌측 바위에 새겨진 마지막 각석은 손경현(孫慶鉉)의 현감(縣監) 손경현(孫慶鉉) 영세불망(永世不忘)이다. 기장 부임 전 손경현(孫慶鉉)은 홍문관 교리로 1894년 9월에 현감(縣監)에 부임하여 1895년 11월에 이임하였고 이곳 시랑대의 글귀와 절경을 본 후 주변 바위에 세 글자 학사암(學士岩)과 시(詩)를 남겼다. 그리고 『기장현 읍지』 형성조에 의하면 “기장 현감 과 홍문관 교리를 지낸 손경현이 놀러 와서 학사암(學士嵓)이라 부르기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1895년 5월에 세워진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가 남아 있다.

옛길을 거닐다 보면 길가 안내 표지판에는 여근석(女根石)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바위 형상을 따서 여근석이라고 부른데 지형변경으로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신앙(性信仰) 즉 성기숭배신앙(性器崇拜信仰)은 신석기시대 이후 형성된 것으로 개인적인 목적은 기자(祈子)나 기복(祈福)이고 국가나 공동체 집단의 목적은 다산(多産)과 풍년, 풍어, 마을의 평안이다. 그러나 조선시대부터 유교의 영향으로 남호선호사상과 칠거지악에 의해 여인들의 고통과 아픔이 여근석(女根石)에 남아있으리라 생각된다.

옛길 우측에 3명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바위에 있는데 현감(縣監) 오영석(吳榮錫), 현감(縣監) 송재우(宋載遇)와 군수(郡守) 이경우(李敬佑)이다.

옛길 우측에 3명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바위에 있는데 현감(縣監) 오영석(吳榮錫), 현감(縣監) 송재우(宋載遇)와 군수(郡守) 이경우(李敬佑)이다. 현감(縣監) 오영석(吳榮錫)은 1892년 10월에 부임하여 1895년 11월에 이임하였고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1893년에 세워진 생사단(生祀壇)과 애민구해불망비(愛民捄海不忘碑)가 남아있다.

현감(縣監) 오영석(吳榮錫)과 현감(縣監) 송재우(宋載遇)의 각석

현감(縣監) 송재우(宋載遇)는 무관으로 1751년 9월에 부임하여 1753년 6월에 사직하였고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휼민선정 만고불망비(恤民善政 萬古不忘碑)가 남아 있다.

군수(郡守) 이경우(李敬佑) 영세불망(永世不忘)

군수(郡守) 이경우(李敬佑)는 1895년 5월에 부임하여 1896년 9월에 이임하였고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1896년 9월에 세워진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남아 있다.

산성산의 야경
용소웰빙공원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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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위대한 작가 빅토르 위고의 작품이자 앤소니 퀀 주연의 영화 노트르담의 곱추의 배경이 된 노트르담 대성당은 중세 고딕의 대표 양식으로 시테섬에 위치하고 있다. 독일의 쾰른 대성당, 이탈리아 밀라노 대성당과 함께 중세 고딕 양식의 3대 성당에 포함되는 노트르담 대성당은 1,302년 필리프 4세 때 삼부회가 개최되었고 1,455년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이 열렸다. 또한 1,804년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고 드골이 프랑스 해방을 축원하며 국가를 불렸고 프랑스 전 대통령 미테랑의 장례식도 치러졌다. 그리고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길이 127m, 너비 48m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원안에 꽃을 그려 넣은 로자스(rosace)를 중심부로 상단에는 양쪽으로 우뚝 솟아오른 사각기둥의 탑과 하단에는 3개의 출입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2019415일 오후 650분경 대성당 지붕에서 발생한 화재(火災)로 탑과 그 주변의 지붕이 붕괴되었고 화재는 약 10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프랑스 국민에게 노트르담 대성당의 상징성은 매우 커서 화재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현재 재건 및 복구 중이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024년까지 복구를 완료 하겠다고 한다. 2017년 파리 여행 때 노트르담 대성당 추억을 돌이켜 본다.

하단의 출입문 3개 중 왼쪽 문으로 성모 마리아가 조각되어 있다.

1160년 파리의 부주교였던 쉴 리가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기 위해 짓기 시작하여 200년이라는 공사 기간을 거쳐 1363년에 완공되었다. 노트르담의 뜻은 우리들의 귀부인이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를 가리킨다. 길이 127m, 너비 48m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원안에 꽃을 그려 넣은 로자스(rosace)를 중심부로 상단에는 양쪽으로 우뚝 솟아오른 사각기둥의 탑과 하단에는 3개의 출입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의 로자스 바로 앞 3명의 조각상은 가운데가 성모 마리아이고 좌우에는 아담과 이브인데 성당 정면의 모든 조각과 장식들이 이 조각상에 경의를 표하는 구도로 설계되었다. 성모 마리아, 아담과 이브의 조각상아래에는 28명으로 이루어진 제왕들이 떠받치고 있다. 가고일(gargoyle)을 비롯하여 성당 처마에 달려 있는 다양한 낙수받이 조각상 또한 보는 이의 흥미를 자극시킨다.

하단의 출입문 3개 중 가운데 문은 최후 심판의 문, 왼쪽 문은 성모 마리아, 오른쪽은 성녀 안나 각각 조각되어 있다. 성당내부는 성경 내용을 주제로 조각되었고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이 특히 뛰어나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뒤쪽은 예쁜 화초로 정원이 가꾸어져 있어 여행으로 지친 몸을 조용히 다독거리기에 좋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또 다른 볼거리는 푸앵 제로(Point Zero)이다. 노트르담 정문에서 앞으로 약 50m 떨어진 바닥에 있는 표지판으로 파리와 유럽 각 도시간의 고속도로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이다. 예를 들어 여기서 디종까지 거리는 310km이다. 푸앵 제로의 기원은 중세 시대 죄수들이 대주교관의 문 앞에서 공개 참회를 했던 장소가 현재 푸앵 제로의 위치다.

푸앵 제로(Point Zero)는 바닥에 있는 표지판으로 파리와 유럽 각 도시간의 고속도로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이다. 기원은 중세 시대 죄수들이 대주교관의 문 앞에서 공개 참회를 했던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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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혁명 100돌 기념하기 위해 공학자 귀스타브 에펠에 의해 파리 만국 박람회 때 만들어졌다. 현재 프랑스의 유료 관광 명소 1위이다.
에펠탑은 1930년대 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로 324m. 무게 10,000톤으로 1964년에 프랑스 국가유산, 199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에펠탑을 만들 당시에는 문학가 모파상을 비롯한 보수 지식인들은 파리의 품격과 격조를 떨어뜨린다고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탑이 완공되고 관광객에게 개장했을 때, 유럽 각 국의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5개월 만에 2천만 명이나 이르렀고 반대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승강기를 이용하여 에펠탑 전망대에서 파리를 조망하고자 한다면, 1~2개월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현장에서 1~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에펠탑에는 전당대가 1층 전망대(57m), 2층 전망대(116m), 꼭대기 전망대(276m) 등 3곳이 있다. 2층 전망대에는 기념품 Shop, 레스토랑 등 있는데 여기 레스토랑을 이용하려면 3~4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당연히 꼭대기 전망대에서 보아야만 파리의 모습이 그려진다.

꼭대기 전망대(276m)에서 바라 본 파리시내와 세느강

승강기를 이용하여 에펠탑 전망대에서 파리를 조망하고자 한다면, 1~2개월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현장에서 1~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계단을 이용하면 바로 올라 갈수 있는데 “Stair Only”라고 표기 된 계단을 이용하면 된다.
무엇보다도 에펠탑의 진면목은 밤에 있다. 낮에는 경쾌한 모습이지만 밤에는 아름답지 못해 화려하다. 마치 밤을 깨우는 전령사 같다. 3만개가 넘는 전구와 스포트라이트 조명은 새벽 1시까지 탑을 밝히는데 저녁 7시부터는 정시마다 5분간 플래시 조명이 별처럼 반짝인다.

밤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에펠탑

특히 파리 야경을 감상하고자 한다면 세느강 유람선을 타면 더욱 기억에 남는 파리가 될 것 같다. 대표적인 유람선이 바토무슈 크루즈다. 유람선 코스는 앵발리드와 앵발리드 다리, 알렉상드로 3세 다리, 팔레 부르봉 왕궁과 콩코르드 다리 등 시작으로  오르세 미술관, 시테 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끝으로 시테 섬을 돌아서 콩시에르주리 왕궁 등 지나서 바토무슈 크루즈 선창장에 도착한다. 다양한 다리도 많이 볼 수 있어 파리 야경을 만끽할 수 있다.

바트무슈 유람선 선착장
유람선에서 바라 본 에펠탑
알렉상드로 3세 다리. 세느 강에 있는 다리 중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다. 1892년 프랑스와 러시아가 동맹을 체결 할 때 당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 3세 이름의 따서 1900년 프랑스 만국박람회 기념으로 만들어 졌다.
팔레 부르봉 왕궁과 콩코르드 다리. 팔레 부르봉 왕궁은 루이14세 때 지어진 궁전으로 지금은 프랑스 하원 회의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르세 미술관
노트르담 대성당
콩시에르주리 왕궁은 프랑스 초기 왕들의 왕궁으로 프랑스 혁명 때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퐁뇌프 다리.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앙리3세 때 짓기 시작하여 앙리4세 때 완공되었다. 영화 "퐁 뇌프의 연인들"의 배경이 된 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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