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27대 선덕여왕(? ~ 647년, 재위기간 632년 정월 ~ 647년 정월 : 15년)의 능은 보문동 산79-2번지로 경주 낭산(狼山) 남쪽 봉우리 정상(해발 100m)에 위치하고 있다. 산 정상의 남쪽 부분 일부를 깎아 평지로 만든 후 능을 조성하였다. 능은 원형봉토분으로 높이 6.8m, 직경 23.4m, 둘레 73.3m이다. 묘제는 횡혈식석실분으로 추정된다.
봉분자락에는 괴석을 쌓아 만든 호석이 있는데 2~3단으로 높이는 70cm로 봉분 주위를 둘러쌓았다. 현재 선덕여왕의 능은 원형이 아니라 1949년에 보수한 것으로 당시 호석은 봉분의 흙에 덮여 있는데 이를 제거 후 호석을 다시 축조를 하였다. 즉 괴석 몇 개를 나란히 쌓아 나가다가 중간에 큰 평석을 하나씩 세워서 끼우는 방법으로 호석을 조성하였다. 호석에 쓰인 괴석은 재사용하였고 부족한 것은 주변에 있는 돌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낭산(狼山)은 나지막한 야산이지만 신라시대 신유림(神遊林)하여 신령스러운 산으로 숭앙받았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실성왕 12년(413년) 8월에 구름이 낭산에 일어났는데 구름이 누각같이 보이고 사방에 아름다운 향기가 퍼져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의 신령이 내려와서 노는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생각한 왕은 낭산을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겨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하였다.
낭(狼)은 이리 낭(狼)’字로 이리가 엎드린 형상이라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는 사마천의 <사기>에는 “동쪽의 큰 별을 ‘랑(狼)’이라 한다.” 고 해서 왕궁(월성)의 동쪽에 있는 산이라 ‘낭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삼국사기> ‘잡지·제사’지는 신라에서 가장 큰 제사인 대사(大祀)를 지내는 3산(三山)으로 ‘나력(奈歷), 골화(骨火), 혈례(穴禮)’를 꼽았는데 학계에서는 3산(三山) 가운데 유일하게 왕경(경주)에 속한 ‘나력’(奈歷)을 ‘낭산’(狼山)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를 통해 우리민족의 토착신앙인 산악숭배 사상을 엿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천년 신라의 망조가 낭산 주변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삼국유사>는 “경명왕 때(918년 혹은 920년) 사천왕사의 소조상이 잡고 있던 활시위가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犬)가 짖었으며,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은 26대 진평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사이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은 첫 왕비 마야부인에게서 두 딸이 있었는데 첫째 딸은 천명이고 진지왕의 아들 김용수에게 시집을 갔다. 김용수는 진평왕을 이어 왕에 될 수 있으나 진지왕이 폐위되어서 지지 세력이 없었다. 그리고 마야부인이 죽고 둘째 왕비인 승만부인에게 아들이 태어났으나 얼마 되지 않고 죽었다. 이후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녀를 왕위에 추대하였고, 성조황고(聖祖皇姑), 즉 “거룩한 조상을 가진 여왕”이란 칭호를 올렸다.
왕위에 오를 즈음 선덕여왕은 40세를 약간 넘긴 나이였고 공주시절에 이미 결혼을 하였으며, 남편은 김용춘이다. 김용춘은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른 후 자식을 낳지 못하여 남편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흠반과 을제(乙祭)가 각 각 남편이 되었으나 자식을 잉태하지 못하였다. 당시 신라에는 삼서제도(三婿制度)가 있어 왕녀가 자식을 가지지 못할 때, 남편 셋을 가질 수 있는 제도였다. 후에 29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이 되는 김승만(金勝曼)과는 사촌자매지간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왕이 될 수 있는 성골(聖骨)이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은 즉위하던 해인 632년에 대신 을제(乙祭)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賑恤)하였으며, 633년에는 주군(州郡)의 조세를 일 년간 면제해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634년에 분황사(芬皇寺)를,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즉위3년(서기634)에 인평(仁平)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중고왕실의 자주성을 견지하려고 했다. 다만 즉위 이래 거의 매년 당나라에 대해 조공사신을 파견함으로써 당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 백제의 신라에 대한 공격이 빈번해짐에 따라 당나라와 연합함으로써 국가를 보존하려는 자구책의 일환이였다.
신라는 642년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본격적으로 받았다. 이해에 신라는 백제의 의자왕의 침공을 받아 서쪽 변경에 있는 40여성을 공취 당하였으며,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지금의 南陽)도 고구려․백제의 침공을 받았다. 또한 백제장군 윤충(允忠)의 침공으로 낙동강방면의 거점인 대야성(大耶城:지금의 陜川)이 함락 당하였다. 이와 같은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선덕여왕은 김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지금의 慶山) 군주(軍主)에 임명하여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의 구원요청에 접한 당 태종 이세민은 신라 사신에게 세 가지 계책을 제시 하였다. 첫째는 당이 거란과 말갈을 시켜 요동을 치면 고구려가 함부로 신라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고, 둘째는 신라가 당나라의 옷과 깃발을 사용하면 고구려와 백제가 겁을 먹고 도주할 것이고, 셋째는 여왕을 폐위시키고 그 대신 자기의 친족을 신라의 왕으로 앉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계책은 당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이고 신라 사신을 농락하는 것이라서 사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644년 정월에 다시 사신을 당에 보내 군대를 요청하였고 당 태종은 고구려에 이현장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을 종용했으나 연개소문(淵蓋蘇文)에 의해 거부되고 말았다. 그 무렵 신라의 김유신은 백제를 공격하여 일곱 성을 회복하였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645년 3월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김유신은 다시 출전하여 2천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뒀다. 그해 5월에는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 공격하자, 선덕여왕은 군대 3만을 동원하여 협공을 하였다. 이 때 틈을 노려 백제가 신라변경을 급습하여 일곱 성을 점령했다. 이 무렵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자장(慈藏)의 건의에 따라 호국불교의 상징인 황룡사9층탑(皇龍寺九層塔)을 645년에 건립하였다.
그런데 당 태종 이세민이 제시한 계책이 신라 정계에 파문을 일으켜 647년 정월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것을 구실로 명활산성을 장악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비담(毗曇)은 석(昔)씨 계열의 수장으로 645년에 상대등에 임명된 인물로 당시 백성들에게 명망이 높아서 반란에 많은 군대가 참여하였다. 그러나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 알천에 의해 진압되었고 비담 등 진골 귀족들은 9족이 멸족 당했다. 선덕여왕은 이미 병을 앓고 있어 이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병세가 악화되어 647년 1월 8일에 재위 16년 만에 죽으니 시호(諡號)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선덕(善德)이란 이름은 불교적인 것으로 5세기 초 인도 출신의 학승 담무참(385~433)이 번역한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想經)에 나오는 선덕바라문을 따온 것인데 선덕이란 이름을 사용한 사람 불경에 여러 명 나타난다. 선덕바라문’은 석가모니로부터 불법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교화시킨다는 전륜성왕의 운명을 예지 받는 인물이다. 인도에는 아소카왕이 선덕바라문 같은 운명을 갖고 있었다.
선덕왕(善德王)의 지기삼사(知幾三事)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에 나타난 지기삼사(知幾三事)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27대 덕만(德曼; 만曼은 만萬으로도 씀)의 시호(諡號)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 성(姓)은 김씨(金氏),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 632)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붉은빛․자줏빛․흰빛의 세 가지 빛으로 그린 모란[牧丹]과 그 씨 서 되[升]를 보내 온 일이 있었다. 왕은 그림의 꽃을 보더니 말하기를, “이 꽃은 필경 향기가 없을 것이다”하고 씨를 뜰에 심도록 했다. 거기에서 꽃이 피어 떨어질 때까지 과연 왕의 말과 같았다.
둘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 4일 동안 울어 댄 일이 있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상히 여겨 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 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精兵) 2,000명을 뽑아 가지고 속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찾아 가면 반드시 적병(賊兵)이 있을 것이니 엄습해서 모두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서교(西郊)에 가 보니 부산(富山) 아래 과연 여근곡(女根谷)이 있고 백제(百濟) 군사 500명이 와서 거기에 숨어 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백제의 장군(將軍) 우소(亏召)란 자가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으므로 포위하고 활을 쏘아 죽였다. 또 뒤에 군사 1,200명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모두 쳐서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셋째는, 왕이 아무 병도 없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이 그게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니라.” 그 날이 이르니 왕은 과연 죽었고, 여러 신하들은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호대왕(文虎(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는데 불경(佛經)에 말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忉利天)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대왕(大王)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
왕이 죽기 전에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어떻게 해서 모란꽃에 향기가 없고, 개구리 우는 것으로 변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왕이 대답했다.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
또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병사(兵士)의 형상이요. 옥문(玉門)이란 곧 여자의 음부(陰部)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빛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근(男根)은 여근(女根)이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탄복했다.
꽃은 세 빛으로 그려 보낸 것은 대개 신라에는 세 여왕(女王)이 있을 것을 알고 한 일이었던가. 세 여왕이란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이니 당나라 임금도 짐작하여 아는 밝은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선덕왕(善德王)이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별기(別記)>에 말하기를, “이 임금 때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했다.』
여왕을 사랑한 지귀(志鬼)의 이야기, 심화요탑설화(心火繞塔說話)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은 조선 선조 때 권문해가 편찬한 백과서로 여기에 선덕여왕을 사모하다가 죽어서 화귀(火鬼)가 된 자귀의 사랑을 그린 설화, 심화요탑설화(心火繞塔說話)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덕여왕이 영묘사(靈妙寺)란 절에 나들이를 갔다. 그 절에서 활리역의 역리(驛吏) 지귀(志鬼)라는 총각이 여왕을 한 번 본 후 그만 깊은 짝사랑에 빠졌다.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여왕을 사랑한 지귀 총각은 심한 열병을 앓았다. 그러던 중 여왕이 다시 영묘사에 온다는 소식을 접한 지귀는 여왕이 지나칠 목탑 밑에 쭈그리고 앉아 기다렸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지친 지귀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목탑을 베고 잠이 들어버렸다.
그 사이 여왕이 목탑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잠든 지귀를 발견하고는 그 연유를 물었다. 연유를 알고 난 여왕은 불공을 올리고 그 목탑 밑에 자고 있는 지귀의 품속에 자신의 팔찌를 빼내 묻어주고 왕궁으로 떠났다. 얼마 뒤 잠에서 깨어난 지귀는 자신의 품안에 놓인 팔찌를 발견하고는 여왕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자 그녀에 대한 열정이 불로 타올라 그의 몸을 태우고 곁에 있던 목탑까지 태워버렸다. 영묘사의 목탑은 이렇게 연모의 불길로 소실되고 말았다.
선덕여왕이 이 소식을 듣자 주문을 짓게 하여 화귀(火鬼)를 달래도록 하였다. 이후 민가에서는 이 주문을 문 벽에 붙여 화재를 방지하는 부적으로 삼았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귀의 마음 속 울화가
몸을 태우고 화신으로 변했구나.
부디 창해 밖으로 떠나다오
만나지 못하여 친할 수 없음을 어찌하리.“
자귀의 심화(心火)로 인하여 영묘사는 전소 될 것이었는데 혜공스님의 신통력으로 그 일부는 화재를 면할 수가 있었다. 혜공스님은 원효대사와도 친분이 두터운 이름난 스님이었다. 그는 원효가 여러 불경의 소(疏)를 찬술할 때 서로 질문하고 토론한 상대이기도 하였다.
그는 작은 절에 살면서 언제나 미친 사람처럼 크게 취해서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을 춘 까닭에 사람들은 그를 부궤화상이라 불렀으며 그가 있는 절을 부개사(婦蓋寺)라고 했는데 '부개'는 '부궤'에서 온 말이다
그는 또 절의 우물 속에서 살기도 했는데 한 번 우물에 들어가면 몇 달이나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우물에서 나올 때는 먼저 푸른 옷을 입은 신동이 솟아 나왔으므로 그것을 보고 혜공이 우물에서 나오는 시각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우물 속에서 나와도 옷이 젖지 않았다.
이러한 신통력을 가진 혜공이 하루는 풀로 새끼를 꼬아 가지고서 영묘사를 찾아 왔다. 그는 새끼줄로 금당과 경루와 남문의 낭무를 둘러 묶고는 절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일렀다.
"이 새끼는 3일 후에 풀어야 하느니라."
절을 관리하는 사람은 이상하게 여겼으나 신통력을 갖고 있는 혜공스님의 말이라 그대로 따랐다. 과연 그 3일 되던 날에 선덕여왕의 행차가 있었고, 지귀의 심화로 불이 난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혜공이 풀 새끼로 매어 둔 곳만은 화재를 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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