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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해발 469m)은 기장군 장안읍 명례리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이름은 삿갓 모양의 3개의 봉우리가 동서로 나란히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산은 옛날부터 영험한 산이라서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고 그러면 비가 내려 해갈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영험한 산이 명당으로 인식되어 암장(暗葬)을 하기도 했다. 대동여지도에 삼각산은 원적산(양산 천성산)에서 백운산을 거쳐 이어지는 줄기로 바다로 유입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일반적인 삼각산 등산로는 박치골 따라 조성 된 길을 따라서 가다가 좌측으로 빠져 산길을 이용하여 삼각산 능선까지 올라가는데 보통 2곳에서 올라간다. 능선에 도착한 후에는 동쪽 방향으로 해서 삼각산 정상으로 이동한다. 아래의 등산코스로는 소요시간이 3시간 30분정도 걸린다.

장안사 주차장 박치골 임도, 트레킹 로드 석은덤 삼각산 전망바위 장안사 주차장

삼각산 등산로는 박치골 따라 조성 된 길로 매우 잘 되어있다. 길 폭도 넓으며 바닥은 초입부는 포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비포장 길이다.
불광사 약수터는 장안사산장 옆 소로 길을 따라 가면 계곡아래에 있는 약수터를 만날수 있다.
반딧불이 공원 입구
반딧불이 공원에는 방문객을 위한 산책 길을 계곡 따라 일부 구간을 Deck 길로 조성하였다.

삼각산 등산로는 박치골 따라 조성 된 길로 매우 잘 되어있다. 길 폭도 넓으며 바닥은 초입부는 포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비포장 길이다. 특히 높이 뻗은 큰 감나무를 길에서 자주 접하는데 지나가는 객에게는 풍요로움과 아늑함을 느끼게 한다. 장안사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맞이하는 것이 장안사산장 뒤 계곡아래에 있는 불광산 약수터이다. 안내문이 없어 놓치기 쉽다. 약수 한 바가지 들이 키고 나서 길을 재촉하여 가다 보면 반딧불이 공원을 만난다. 반딧불이 공원은 산책을 위해 계곡 따라 일부 구간을 Deck 길을 조성하였다.

조성된 길을 따라 보면 높이 뻗은 큰 감나무를 길에서 자주 접하는데 보는 이에게 풍요로움과 아늑함을 느끼게 한다.

굽이굽이 절경 속에 길을 따라가다 보면 쉽게 석은덤까지 갈 수 있다. 가히 팔기산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하는 길이다. 병산마을 방향으로 가기 전 동쪽방향 능선으로 가는 산길을 이용하여 동쪽으로 이동한다. 산길이 양호하지는 않다. 능선을 따라 가다보면 까마귀 떼도 만나고 길 바닥에는 도토리가 많이 떨어져 있어 자칫 미끄러져 넘어지 지기가 쉽다.

등산로에서 좌측으로 빠져 산길을 이용하여 삼각산 능선까지 올라가는 첫 번째 갈림길 입구이다.
두 번째 갈림길로  좌측으로 빠져 산길을 이용하여 삼각산 능선까지 올라갈수있다. 이곳부터 비포장 된 흙길이다.
이곳 갈림길에서 좌측 길로 계속 석은덤까지 올라간다.

삼각산 정상에는 2개의 정상 표지석이 있는데 흰색 바탕의 표지석과 검정색 바탕의 표 지석이 각각 연이서 다른 곳에서 세워져 있다.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다. 잠시 가파른 길을 지나서 완만한 능선 길을 계속 가다 보면 장안사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바위를 만난다. 바로 아래는 천길 절벽이다. 조심하여 전방 절경을 감상해야 할 것 같다. 여기서부터 장안사 화장실 뒤편까지 경사가 80도가 되는 험난하고 위험한 길을 완주해야 한다. 추락사고가 우려되는 곳으로 삼각산 산행의 절정이 여기 하산길이다.

삼각산 정상에는 정상 표지석이 2개가 있는데 흰색 바탕의 표지석과 검정색 바탕의 표 지석이 각각 따로 연이서 다른 곳에서 세워져 있다. 이중 흰색 바탕의 정상 표지석
삼각산 정상에서 본 전경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장안사 원경
장안사 주차자에서 바라 본 전망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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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하면 떠오르는 풍광이 경포해수욕장, 경포대, 오죽헌 등 이고 인물은 신사임당, 율곡 이이, 허균과 허난설헌이다. 음식은 초당두부이고 두부를 만들 때 소금물 대신 바닷물을 간수로 사용하기 때문에 맛이 뛰어나기도 유명하다.

거울처럼 맑다하여 이름이 붙은 경포호(鏡浦湖)에는 달이 네 개가 뜨는데 하늘에 뜬 달 하나, 바다에 하나, 호수에 하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술잔에 하나이다. 여기서 추가로 커피 한잔을 마시는 연인들의 모습이 아닐까한다최근 강릉은 커피향으로 가득하다. 카페나 카페 형태로 영업 중인 곳이 400~500여 개에 이른다. 이에 매년 커피축제 열리고 카페 문화의 중심지로 우뚝 솟고 있다.

강릉 사천의 보헤미안 로우스터즈(Bohemian Roasters) 박이추 커피공장 전경

여기 강릉 사천에 국내 1세대 바리스타 박이추(朴利秋)가 운영하는 보헤미안 로우스터즈(Bohemian Roasters) 박이추 커피공장이 있다. 그는 핸드 드립 커피의 대가로 같은 1세대 커피 전문가인 고() 서정달, 박원준, 박상홍 씨와 함께 ‘13으로 불리던 실력파 바리스타였다. 1950820, 일본 규슈 오이타의 작은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재일교포 2세였다.

서울대 공과대에 다니던 형의 영향을 받아 1974년 부모와 함께 한국에 왔다. 처음 정착한 곳은 경기도 포천에서 목장을 운영하였고 1986년 도일하여 도쿄에서 주경야독을 하며 커피를 배웠다. 그 후 1년 반 만에 커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1988년 혜화동에 가배 보헤미안을 열었고 한국에서의 그의 커피 인생이 시작되었다.

2004년 이곳 강릉 바닷가로 옮겼다. 18여 년이 되어간다는 보헤미안 로스터즈 박이추 커피공장은 3층 건물로 카페와 로스팅공장이 연결되어 커피 로스팅 과정을 직접 볼 수 있고 머무는 내내 커피향도 가득하다. 아담한 건물의 1층은 자택으로 쓰고, 3층이 카페다.

국내 1세대 바리스타이자 커피 명인의 커피 맛 조언은 핸드 드립 한 잔을 위해 필요한 원두 양은 15~20g, 추출 시간은 약 130, 추출하는 커피의 이상적인 양은 약 150ml이고 그 이상 커피를 추출하면 쓴맛과 카페인이 과해져 드립을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보헤미안 로스터즈 박이추 커피공장은 카페와 로스팅공장이 연결되어 커피 로스팅 과정을 직접 볼 수 있고 머무는 내내 커피향도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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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법성포에서 영광굴비 정식을 맛보다.

맛 기행 2022. 10. 2. 21:54 Posted by 추야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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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굴비는 3월 중순경 곡우 때 영광 칠산 앞바다에서 잡은 참조기를 가리키는 말인데 요즈음은 토사와 해저융기로 바다가 개펄로 메워지는 기후환경 변화와 무분별한 남획에 따른 어획량 감소로 이곳에서 잡히는 영광 굴비는 거의 없다. 조기(助氣)라고 부른 이유는 3월에 잡은 고기의 뼈를 골라내고 산모의 미역국을 끓이거나 병약자를 위해 죽을 쑤어 주면 기운이 낸다고 해서 불렀고 한자로는 "도울 조()", "기운 기()"자를 쓴다. 또는 봄이 되면 이동을 시작한다 해서 유수어라고도 한다.

법성포는 토사와 해저융기로 바다가 개펄로 메워지는 기후환경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조기를 소금에 절여서 말린 것을 굴비(屈非) 라고 하는데 현재 까지 영광굴비가 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조기를 말리는 기법이다. 칠산 바다의 해풍과 적절한 온도, 천일염을 사용한 소금 등 세 가지의 조합에 의해 맛있는 영광굴비가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비싼 영광굴비는 알이 통통 밴 조기로 한 두름에 다섯 마리가 있는 것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그 지역에서의 유명한 특산품 또는 음식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관련 맛 집을 찾게 되고 가장 좋은 방법은 지역 지인을 통해 추천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알게 된 곳이 007 식당이다. 상호명이 특이한데 법성포에서 영광 로터리 방향의 도로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굴비백반전문 식당이다. 주 메뉴는 굴비백반과 정식이고 개인 혼자이면 굴비백반이 무난하다.

007식당에서 주문한 굴비정식

오늘날 법성포에서 팔고 있는 영광굴비는 대부분 법성포가 아닌 다른 연안이나 더러는 중국에서 수입해 온 조기를 단지 법성포에서 말렸다 해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조기는 민어과에 속하는 고기로 황조기, 흰조기, 수조기, 꽃조기 등으로 구분되는데 문헌에 따라 석수어라고 하는 것은 조기 머리속에 흰 돌 같은 이석 두 개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자겸(?~1126)과 굴비(屈非)의 유래

굴비란 이름의 유래는 고려 17대 인종(1109~1146) 때로 올라간다이자겸은 현재의 인천광역시를 세거지로 했던 인주 이씨(仁州 李氏) 출신으로 고려 전기 대표적인 외척(外戚)세력이었다. 음서(蔭敍, 공신이나 전·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 제도를 통해 벼슬에 오른 그는 인종(仁宗)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으로 1126(인종 4) 인종을 독살하고 왕위를 찬탈하려고 난을 일으켰다. 당시 도참설에서 유래된 파자점이 유행했는데 내용인 즉 십팔자(十八子)가 왕이 된다는 것으로 이자겸 자신이 성씨가 李氏 이기에 자신이 왕이 된다는 것을 믿었든 것이다.

이자겸의 난이 실패 후 이자겸과 그의 처는 영광으로 귀양 갔고 아들 셋인 이지미는 협주로, 이공의는 진도로, 이지언은 거제로 각각 유배되었다. 왕비가 되었던 이자겸의 두 딸 역시 모두 폐위되었다. 이자겸은 귀양지인 영광에서 죽었으며 인주 이씨(仁州 李氏)도 몰락하였다.

이자겸은 귀양지인 영광 법성포에서 소금에 절여 토굴에 돌로 눌러 놓았다가 해풍에 말린 조기를 먹어보고 그 맛에 반했었다. 그래서 인종에게 진상하였는데 조기 맛이 일품이라서 진상한 것이지 비굴(卑屈)하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굴비(屈非)’라는 이름을 붙여 보냈다고 한다. 이때부터 말린 조기를 굴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굴비라는 이름을 얻기 전에는 소금에 절인 조기를 엮어 매달면 모양이 구부러지기 때문에 구비(仇非)조기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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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 베르사유와 함께 프랑스 3대 관광지 중 한 곳인 몽생미셸은 프랑스 북부 영국해협을 마주하고 있는 바스노르망디 망슈(Manche) 주의 생미셸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수도원이다. 생미셸 산은 92m 높이의 화강암으로 된 바위산으로 산의 형태에 따라 수도원을 아래에서 조금씩 지어 올렸고 수도원의 구성은 예배당(Chapelle)과 라 메르베유(La Merveille, 불가사의)로 나누어져 있다.

멀리 옥수수밭 위에 떠 있는 몽생미셸

조수간만의 차이가 유럽에서 가장 크고 10 ~ 15m의 수면 차이로 밀물 때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이다. 특히 노을이 질 때 매우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한다.

밀물 때도 상관없이 몰생미셸로 갈수 있는 다리

708년 이곳에서 아브랑슈의 오베르 주교의 꿈에 대천사 미카엘 계시를 3번이나 받고 바위산에 수도원을 짓기 시작했고 유럽인의 성지 순례지로 유명해졌다. 966년 미로처럼 꾸며진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원이 세워졌고 그 아래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14세기에는 마을이 바위산 바로 아래까지 확장되었다.

12세기 수도원 주변에 성벽을 쌓으면서 백년전쟁 때 난공불락의 요새로 사용되어 영국군의 총공세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수도원은 프랑스 대혁명 때 해산되었고 1863년 까지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1874년에 사적기념물로 되면서 대대적인 복원공사가 시작되었다.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등록되었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성 미카엘(Michael) 대천사 숭배

오베르 주교

천사 군단의 수장인 성 미카엘은 중세의 중교적 감수성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 미카엘은 신약성경 요한 묵시록에 악마의 상징인 용과 맞서 싸워 무찌르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내세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던 중세인들에게 성 미카엘은 최후의 심판일에 죽은 자를 인도하고 인간의 영혼을 저울에 다는 인물이다.

708년 아브랑슈의 오베르 주교가 꿈에 대천사 미카엘부터 계시를 받는 모습

성 미카엘에 대한 숭배는 492년 몬테 가르가노(이탈리아)에 최초의 성소가 건립되면서 5세기말에 등장하게 된다. 1,000년 경에는 성 미카엘을 기리는 교회와 예배당이 유럽 전역에 확산되면서 주로 언덕이나 갑()의 상단에 세워졌다. 백년전쟁 후에는 몽생미셸이 영국군에 저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서 성 미카엘에 대한 숭배가 새로운 차원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숭배는 반종교개혁과 함께 새롭게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교회의 입장(구교)에서 볼 때 오직 군대를 이끄는 천사만이 프로테스탄트 이단(신교)에 맞서 싸울 수 있다고 믿었다.

천사 군단의 수장인 성 미카엘

기독교의 도상에서 성 미카엘은 흔히 칼과 저울을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전통과 민간종교는 성 미카엘을 무기와 저울에 관련된 모든 직종의 사람들과 기사들의 수호성인으로 만들었다.

수도원은 프랑스 대혁명 때 감옥으로 1863년 까지 사용되었다.

현재 몽생미셸 수도원 안에는 상업시설이 있어 식당에 들러 나폴레옹도 즐겨 먹은 굴 요리를 먹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또한 노르망디 지방에서 나는 치즈 또한 유명하니 식당에서 주문할 때 참고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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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군청 뒤 해발 60m의 작은 봉우리 남북 주 능선 및 서쪽 가지능선 2km에는 대형고분 37기를 비롯하여 113기의 고분이 능선 위를 수놓고 있다. 이름 하여 말이산 고분군(末伊山 古墳群)으로 가야시대 고분유적으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고분과 더불어 능선 위는 봄, 여름 가을 다양한 야생화와 들풀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또한 고분의 겨울 설경은 제주도 오름의 아기 모습처럼 보여 사시사철 각각의 풍광을 선사한다.

말이산 고분군(末伊山 古墳群)은 함안군 가야읍 말이산 일대에 있는 고분군이다. 행정구역 기준으로 도항리 고분군(사적 제84)과 말산리 고분군(사적 제85)으로 관리하여 오다가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동일한 시대와 성격의 무덤들이 조성되어 있다 하여 2011728일 사적 제515호로 하나의 고분군으로써 통합재 지정되었고 가야시대 고분유적으로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봉토분으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113기이고 봉토가 삭평되어 원형을 잃어버린 것까지 포함하면 1,000기 이상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말이산의 봉토분은 아라가야의 전성기인 5세기 후반~6세기 초에 집중 조영되었으며, 그 분포는 남-북으로 이어진 주능선과 서쪽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가지능선의 정부(頂部)에 대형의 봉토분이, 사면부에 중소형의 고분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말이산의 북쪽 일대에는 아라가야의 전신인 삼한시대 안야국(安邪國)의 목관묘와 목곽묘가 밀집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말이산고분군은 기원 전후부터 아라가야 멸망 때까지 약 550년간의 고분들이 누대로 조영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출토유물은 토기 2,010, 철기 2,479, 장신구 3,381, 기타 91점 등 총 7,961점의 다종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토기는 주로 통모양굽다리접시와 불꽃무늬굽다리접시, 손잡이잔, 문양뚜껑, 각종 항아리와 그릇받침 등으로 4~5세기대 아라가야 양식의 특유의 토기들이다. 철기는 철의 왕국이라 일컬어지는 아라가야답게 수준 높은 철기들이 출토되는데, 둥근고리큰칼을 비롯한 쇠창, 화살촉 등의 무기와 투구와 판갑옷, 비늘갑옷 등의 무구, 말투구와 말갑옷을 비롯한 재갈, 안장 등의 말갖춤, 새모양장식을 붙여 만든 미늘쇠 등이다. 이러한 철기유물을 통해 고대 아라가야의 철() 생산력이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분군 75호분인 대형돌덧널무덤 에서는 5세기 중국 남조의 최고급청자인 연꽃문양 청자가 출토되어 남조와 교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라가야(阿羅伽倻)의 성장, 발전과 멸망

가야는 서기 300년 무렵 변한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된 여러 집단세력으로 가야(加耶), 가라(加羅·加良), 가락(駕洛), 임나(任那) 등으로 기록되어 왔다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가야사가 전개 되었던 무대를 해인사의 가야산에서 남해까지, 낙동강 서쪽 지리산(섬진강)까지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는 낙동강 동쪽의 동래·양산·창녕 및 섬진강 서쪽의 진안·장수·임실·남원 등지에서도 가야문화의 흔적들이 확인되고 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낙동강 유역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가야는 기원후 2세기 무렵에는 12개의 소국으로 발전하였다. 고려 말에 편찬된삼국유사5가야조(五加耶條)에서는 아라가야(阿羅加耶), 고령가야(古寧加耶), 대가야(大加耶), 성산가야(星山加耶), 소가야(小加耶), 금관가야(金官加耶), 비화가야(非火加耶) 등 일곱 가야의 이름을 확인해 볼 수 있다.

3~4세기에는 김해 가락국 중심의 전기 가야연맹이 번성하였으며, 5~6세기에는 함안의 아라가야를 거쳐 고령 대가야국 중심의 후기 가야연맹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전기 가야의 몰락과 후기 가야의 등장은 400년에 이루어진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391~413)의 남정(南征)과 그에 따른 정세변동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아라가야는삼국지(三國志)』「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전하는 변진 안야국(弁辰 安邪國)을 기반으로 함안지역에서 성장, 발전한 나라이다. 광개토왕릉비문일본서기에 안라(安羅), 삼국유사에 아라(阿羅) 혹은 아야가야(阿耶伽倻)로도 불렸으며, 가야 전기부터 멸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남아 있었던 세력이다. 교통의 요지인 함안지역은 가야의 모든 지역들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곳으로, 통치자들의 거대한 무덤을 따로 만들고,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남쪽으로 내려와 전쟁을 할 때 이에 대항하여 싸울 만큼의 힘을 갖추고 있었던 큰 세력이었다.

안야국은 삼한소국들 중에서도 김해의 구야국 등과 더불어 주변 소국들을 이끄는 주도국 중 하나였다. 안야국은 그 형성시기 또한 다른 지역의 소국들보다 빨라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조그마한 나라의 형태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야국(安邪國)에서 안라국(安羅國)으로 발전한 것은 대략 4세기로 추정되고 있다. 안야국은 내부 성장을 거쳐 주변의 소국들을 연합 또는 연맹체로 결합하면서 지역연맹체 단계로 성장해 간다. 안라 지역연맹체의 경우 함안(현 가야면)과 군북(현 군북면)의 정치세력이 연합한 세력으로 인구는 당시 삼한 대국의 수준인 4~5천가로 추정된다.

안라국이 가야제국 중 비교적 강력한 국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포상팔국(浦上八國 : 골포국(骨浦國), 칠포국(柒浦國), 보라국(保羅國), 고자국(古自國), 사물국(史勿國) 8개의 소국)의 일원이었던 칠원의 칠포국(함안군 칠원면) 등을 병합하고, 진동만(현재 창원 마산합포구 진동면에 있는 만)을 통한 해안으로의 진출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국호도 안야국에서 안라국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칠원지역의 장악과 진동만으로의 진출은 안라가 바다를 통해 해외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지역연맹체의 단계에서 고대국가의 성격을 띤 단계 즉 지역 국가로 성장·발전하게 된다.

일명 포상팔국(浦上八國) 전쟁이라 하는 것은 남해안 일대에 있었던 8개의 소국이 가야를 침략하여 일어났던 전쟁으로 포상팔국은 삼국사기2 신라본기의 내해니사금 14년조와 같은 책 권48의 물계자전, 삼국유사5 물계자조에 등장한다. 8국이라 하여 여덟 나라이겠지만 사료 상 보이는 나라는 골포국(骨浦國, 창원시 마산합포·회원구), 칠포국(柒浦國, 함안군 칠원면), 보라국(保羅國, 전남 나주), 고자국(古自國, 고성군 고성읍), 사물국(史勿國, 사천시 사천읍) 등 다섯 나라이다. 이들이 힘을 합하여 가라(加羅) 또는 아라(阿羅)를 침범하니 신라가 도와 팔국의 병사들을 물리친 내용이다. 포상팔국의 분포 범위는 전라남도 해안까지 되고 나머지 3국의 위치는 알 수 없다.

남제서(南齊書)의 동남이열전 (東南夷列傳)에 가라국왕 하지가 남제(南齊, 479~502)에 사신을 파견해 조공하고 보국장군 (輔國將軍) 본국왕(本國王)의 작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대가야를 지칭한 것으로 알려진 있던 가라왕 하지(加羅王 荷知)를 아라가야 왕으로 해석할 수 도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안라국은 520~540년대에 걸쳐 가야 남부제국의 실질적인 리더로 활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서기 529년에 개최된 것으로 기록된 안라고당회의(安羅高堂會議)는 왜, 안라, 백제, 신라가 함께 참석했던 회의로 가야지역을 잠식해오는 백제와 신라를 외교력으로 물리치고자 했던 노력의 일환이었다. 541년과 544년 백제성왕(聖王)이 개최한 사비 회의에 참가도 하였다. 아라가야를 비롯한 가야 제국은 백제에 부용해서 신라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554년 관산성 전투가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벌어졌고, 가야 제국은 백제와 연합하였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성왕이 전사하고 전쟁에 패배함으로써 백제는 가야 지역을 포기하였고, 신라는 가야 지역으로 본격 진출하였다.

삼국사기지리지함안군은 법흥왕이 대군(大軍)으로써 아시량국(阿尸良國)-일설에는 아나가야(阿那加耶)라고 한다-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군으로 삼았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 이를 그대로 쓰고 있다.”라고 하고 있어 신라 법흥왕대에 멸망되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일본서기』 「흠명기(欽明紀)23(562)정월에 신라가 가야 제국을 쳐서 멸망시켰다.[어떤 책에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하였다 한다. 총칭하여 임나이고 개별적으로는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손국(乞飡國), 임례국(稔禮國) 등 모두 10국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아라가야는 대가야가 멸망하기 전 560년에 멸망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신라가 561년에 아라가야의 파사산에 성을 쌓았다는 등의 기록으로 보아 이 시기를 신라가 안라지역으로의 진출시기로 볼 수 있다.

일본속의 아라가야(阿羅伽耶) 사람과 문화.

일본서기』 「흠명기(欽明紀)15(554) 12월 기사에는 백제성왕과 안라[아라가야]의 여러 왜신, 임나의 여러 나라 한기들이 신라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왜왕에게 군사를 요청하고 이에 왜가 군사를 파병해 신라에 대항해 연합군이 전쟁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가야와 왜가 특히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 제국이 왜와 가야 멸망 시기까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일본의 지명 전승에 아라가야 사람들이 일본 열도로 이주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기비 지방 등에는 아라가야와 관련된 많은 지명이 보이는데, ‘안나군이나 아나군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교토 동쪽의 거대 호수 비파호(琵琶湖)[673.9] 남단 시가[滋賀] 현에도 아라가야 사람들이 이주해 신앙생활을 하던 아라 신사[安羅神社]가 남아 있다. 구사츠[草津] 역 인근 5이내에는 아라 신사라는 이름을 가진 신사가 무려 3개나 있다. 신사의 대문 격인 도리이[鳥居]에는 안라 신사(安羅神社)’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고, 신관(神官)은 분명히 아라진자라고 되어 있어 아라가야와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심지어 이곳 신사의 유래를 알려 주는 안내판에도 함안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 신사들이 위치한 현재 마을 이름도 아나무라[穴村]’라 하여 아나라는 아라가야를 칭하는 말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 많은 아라가야계 사람들이 살았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일본과 아라가야와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물질적 증거가 토기이다. 그중에서도 아라가야의 대표적 토기 양식인 굽다리에 불꽃무늬 구멍이 뚫려 있는 불꽃무늬 굽다리 접시(화염문 토기)’이다. 나라 현가시하라 시청 소속 발굴단이 신도우 유적에서 파손된 상태로 발견한 토기 조각을 복원하자 아라가야의 대표적 토기인 불꽃무늬 굽다리 접시로 드러났다. 이것은 현재 함안 지역을 중심으로 출토되고 있는 불꽃무늬 굽다리 접시와 전체적인 모양, 색깔, 재질 등이 똑같다. 이로 보아 아라가야에서 제작된 토기가 이곳 나라 현까지 전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당시 나라 현과 아라가야의 교류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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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咸安)은 6가야 중 아라가야의 나라이자 생육신 중 한사람인 조려(趙旅, 1420~1489)가 태어난 곳이다. 그리고 이 지역 토착 세거 성씨 중 함안(파산, 巴山) 趙氏가 있는데 조려는 함안 조씨이고 현재 대부분 어계(漁溪) 조려의 후손들이다. 군복IC에서 나와 국도 79번을 따라서 가다가 지방도로 1004번로 진입하여 원북 마을에 다다르면 도로 우측에는 서산서원, 조열 신도비각, 쌍절각 그리고 도로 좌측 청풍대(淸風臺)라는 언덕 옆에 채미정이 있다.  

군북면 원북 마을에 위치한 채미정(採薇亭)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온 후 조려(趙旅)가 여생을 보낸 곳으로 이곳 유림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1693년에 건립하였다. 6.25 전쟁 때 소실되었는데 1954년에 재건하였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八作)지붕 겹처마로 정면 2칸, 측면2칸의 방이 한가운데 있고 나머지는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연못이 있어 당시 조경 구조를 엿 볼 수 있다. 채미정 현판 오른편에 백세, 외편에 청풍이란 현판이 각각 있다.

어계(漁溪) 조려(趙旅)는 자가 주옹(主翁), 호는 어계은자(漁溪隱者),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단종 때 생육신[김시습(金時習),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중 한사람으로 계유정난 이후 세조의 왕위찬탈에 격분하여 조정을 등지고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당시 조려(趙旅)는 1453년(단종1)에 성균관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채미정( 採薇亭 ) 전경

고향에 온 후 조려(趙旅)는 스스로 어계처사(漁溪處士)라 하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는데 그의 시문(詩文)에 고사리를 뜯어 먹으면서 은둔생활(隱遁生活)을 하겠다는 의미의 구절이 있어 그의 삶을 엿 볼 수 있다. 어계(漁溪)는 함안 방어산에서 발원하여 원북으로 흘러가는 하천으로 원래 이름은 원북계(院北溪)이다. 조려가 계유정란 때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 하천이름을 어계라 칭하였다.

채미정 뒤편 언덕이 청풍대이고 문풍루가 보인다

채미(採薇)는 중국 주나라 무왕 때 상나라에서 주나라로 왕권이 바뀌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비(고사리처럼 생긴 나물)를 채취하여 연명하다가 이거마저 거부하여 아사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조려의 지절과 비견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채미정 앞쪽 멀리 보이는 산이 백이산(伯夷山)이다. 백이산(伯夷山, 369m)은 진주시와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이전 지명은 서산(西山), 쌍안산(雙安山)이었으나 후세 사람들이 백이산이라고 불렀다.

채미정 출입문

 

채미정 현판 오른편에 백세, 왼편에 청풍이란 현판이 있다.
채미정(採薇亭)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八作)지붕 겹처마로 정면 2칸, 측면2칸의 방이 한가운데 있고 나머지는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1699(숙종25)에 단종의 왕위가 복위되자 이조참판을 추증(追贈)하고 1703년 경상도 유생 곽억령(郭抑齡) 등이 상소를 올려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의 예에 따라 생육신인 조려 등도 사당을 세워 제향하도록 조정에 건의하여 1706년 생전에 기거하던 백이산 아래 함안군 원북동에 사당을 세워 김시습 등과 함께 제향하였다. 사당은 1713년(숙종 39)에 사액(賜額)되어 서산 서원(西山書院)으로 이름 지어졌다.

바람의 소리를 듣는 누, 청풍대 문풍루(聞風樓)으로 가는 길

1781(정조 5년)에 그의 정충(精忠)과 고절(高節)에 감격하여 그에게 이조판서란 벼슬과 정절공(靖節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려 그의 충혼(忠魂)과 의백(義魄)을 위로하였다. 저서로는 『어계집(漁溪集)』이 전한다. 서산 서원(西山書院)은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1902년에 어계의 중종과 유림들이 다시 서원을 건립하였다. 1984년에 사촌리에서 이곳 원북리로 이전하였다.

청풍대에 위치하고 있는 문풍루(聞風樓)

 

조려 묘(趙旅墓)는 함안군 법수면 강주리 응암 마을 입구 산기슭에 있다.

충의공(忠毅公)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와 쌍절각(雙節閣)

문풍루(聞風樓)에서 본 조종도 ( 趙宗道 )의 쌍절각(雙節閣)

조종도(趙宗道)의 쌍절각(雙節閣)은 정면2칸 측면1칸 팔작지붕의 다포집이고 채미정 도로 건너편에 있다. 쌍절각(雙節閣)에는 조종도와 그의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 비가 있는데 빛바랜 단청과 지붕 위의 와솔에서 충의(忠毅)와 열녀(烈女)의 절개가 느껴진다. 조종도(趙宗道, 1537]1597)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남명 조식의 대표적인 제자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쌍절각(雙節閣) 출입문

생육신(生六臣) 어계은자(漁溪隱者) 조려(趙旅)의 오세손으로 1537(중종 32) 함안 원북동(院北洞)에서 출생하여 1597(선조 30) 정유재란 당시 가족까지 이끌고 안의(安義)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인솔한 적군과 싸우다가 음력 818일 전사하였다. 그의 나이 둘째 아들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날 그의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도 자결하였다. 둘째 아들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쌍절각 ( 雙節閣 ) 은 정면 2 칸 측면 1 칸 팔작지붕의 다포집이다.
쌍절각(雙節閣)에는 조종도와 그의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 비가 있는데 빛바랜 단청과 지붕 위의 와솔에서 충의(忠毅)와 열녀(烈女)의 절개가 느껴진다.

1616(광해 8) 조정에서 충신증자헌대부(忠臣贈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충의공(忠毅公) 함양군수지문(咸陽郡守之門)이란 정려(旌閭)를 내렸고 1732(영조8) 그의 부인에게도 열녀충의공(烈女忠毅公) 조종도처(趙宗道妻) 증정부인(贈貞夫人) 전의이씨지문(全義李氏之門)으로 동상정려(仝上旌閭)를 내렸다.

충신조종도려표비
그의 부인 열녀충의공(烈女忠毅公) 비가 파손되어 더욱 애절하다.

조종도의 선비관은 만물 가운데 가장 영적인 존재가 사람이고, 사람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것이 선비이다. 국가에 재난이 있으면 관직의 유무를 막론하고 선비 된 사람은 평소 닦은 바대로 행하여 천 리의 당당함을 지켜야 한다. 세상을 잊고 자신만을 깨끗이 간직하는 것을 능사로 삼아 명예만 추구하려는 사람은 옳은 것이 아니며, 문무를 겸하고서 옳은 일에 몸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 올바른 선비이다.

고려 공조전서(工曹典書) 금은(琴隱) 조열(趙悅) 신도비각(神道碑閣)

금은(琴隱) 조열(趙悅) 신도비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의 다포집으로 후손들이 세운 비각이다. 충의공(忠毅公)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의 쌍절각(雙節閣) 옆에 자리 잡고 있다.

금은(琴隱) 조열(趙悅)선생의 신도비각 출입문
신도비각은 정면  3 칸 ,  측면  1 칸의 팔작지붕의 다포집이다.

조열(趙悅) 본관은 함안(咸安). 호는 금은(琴隱)으로 아버지는 판도판서 조천계(趙天啓)이다. 고려공민왕(恭愍王) 때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면서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등과 교유하였고,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함안으로 낙향하여 거문고와 서화로 소일하였다. 조선 건국 후 출사를 권유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또한 태조3년 한양궁이 준공되어 낙성연(落成宴)을 열면서 팔도에 명하여 금서가무(琴書歌舞)에 능한 조열을 초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조열(趙悅)은 아들 넷을 두었다. 큰아들 조이(趙彛)는 신호위(神虎衛)를 지냈고, 둘째 조녕(趙寧)은 현감을 셋째는 조항(趙恒)이고, 넷째는 조안(趙安)이다. 조안의 아들이 어계(漁溪) 조려(趙旅)이다.

함주지(咸州誌)인물조에서는 처음 함안의 평광(平廣)에 살다가 뒤에 산팔리(山八里) 원북동(院北洞)으로 옮겨 살았다고만 전한다. 조열의 행적은 맹사성(孟思誠)이 지은 만은(晩隱) 홍재(洪載)의 행장이 전해지면서 보다 자세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홍재의 행장에는 어느 날 밤 판서 성만용(成萬庸), 평리사(評理事) 변빈(卞贇), 박사 정몽주(鄭夢周), 전서 김성목(金成牧) 등이 대사성(大司成) 이색(李穡) 등과 함께 술을 마시며 회포를 논하였다. 이색이 말하기를 비간(比干)은 죽었고 미자(微子)는 떠났으며 기자(箕子)는 종이 되었으니, 우리도 각자 뜻을 따라서 처신하자.”고 하여 결의하였다고 한다.

홍재는 귀향하기로 마음먹고 삼가(三嘉) 대평촌(大坪村)으로 우거(寓居)하여 이곳을 두심동(杜尋洞)이라 하였다. 이때 함안에 우거하고 있던 조열과 이오가 이곳을 서로 왕래하면서 시사(時事)를 걱정하였다고 한다. 고려가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세 사람이 모여서 울며 비가(悲歌)를 부르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맥수(麥秀), 채미(採薇)의 비가와 비유하였다. 후인들이 그 의리를 흠모하여 운구 서원(雲衢書院)을 지어 봉향하였다고 한다.

저서로 문집인 금은 실기(琴隱實記)가 있고 묘는 함안군 군북면 하림1길 에 있다.

어계(漁溪) 조려(趙旅) 생가(生家

어계(漁溪) 생가(生家)는 조려가 태어난 집으로 벼슬을 포기하고 낙향한 뒤 은거했던 곳이다. 채미정(採薇亭)에서 마을길을 따라 15분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어계 생가(漁溪生家) 가는 길은 채미정(採薇亭)에서 마을길을 따라  15 분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
어계(漁溪)는 함안 방어산에서 발원하여 원북으로 흘러가는 하천으로 원래 이름은 원북계(院北溪)이다. 조려가 계유정란 때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 어계라 칭하였다.

어계 생가(漁溪生家)는 대문채, 원북재,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문채는 3칸으로 중앙의 솟을대문에 좌우에 방이 있다. 주 건물인 원북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일자형 평면으로 부엌은 없고 침실, 대청으로 되어 있어 별채이거나 사랑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건물 뒤편 사당에서는 3월 9일(초정일)에 조려와 그의 부인에게 항례를 치르고 있다. 그리고 어계(漁溪) 조려(趙旅)가 사용한 죽장(竹丈)과 동제향로(銅製香爐)가 보관되어 있다.

어계 생가(漁溪生家)의 대문채는 3칸으로 중앙의 솟을대문에 좌우에 방이 있다.

함안 조씨는 조정(趙鼎)을 시조로 하는 함안 지역의 토착 세거 성씨로 파산 조씨(巴山趙氏)' 라고도 한다. 시조 조정(趙鼎) 이후로 함안에 정착하여 대를 이어 살아서 함안 지역 최대의 성족(盛族)으로 발전한 성씨이다. 현재 함안에 세거하고 있는 함안 조씨는 대부분 어계조려의 후손들이다.

어계 생가에 있는 은행나무는 수령 500년, 수고 20m, 나무물레 340cm이다.

조정의 자는 우보(禹寶)이고, 호는 모당(慕唐)이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중국 후당인(後唐人)으로 신라 말에 두 아우 조부(趙釜)와 조당(趙鐺)을 데리고 한반도로 온 후 왕건(王建)을 도와 합천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931(고려 태조 14) 고창성(古昌城 지금의 안동)에서 후백제의 견훤(甄萱) 군사를 대파하여 동경(東京) 관할 하에 있던 주현(州縣)의 항복을 받아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그가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대장군 원윤(元尹)에 오름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함안을 본관으로 하였다.

문헌으로 고증할 수 있는 함안과 관계가 있는 최초 인물은 고려 말의 금은조열이다.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에 있는 함안 조씨의 문중 묘역에서 가장 윗대가 금은 조열이다.

원북(院北)은 본동, 태실[台谷], 새절골[新寺谷]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있고 지명은 어속원(魚束院)의 북쪽에 있다 하여 원북이라 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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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양지(位良池)는 밀양 부북면 위양리 동쪽에 위치한 저수지로 가운데에 5개의 작은 섬과 정자로 구성되어 있고 신라시대 때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된 저수지다. 이 저수지의 물로 아래쪽에 있는 넓은 들판에 물을 대어 위양리 일대에 농사를 지었다. 백성들을 위한다는 의미에서 위양지(位良池)라고도 하고 또는 양양지(陽良地)라고도 부른다.

위양지의 제방(堤防) 둘레는 원래 1.7km에 달하는 저수지였으나 지금은 수리구역(水利區域)의 제방으로 바뀌어 제방 길이가 160m 로 줄어들었다.

위양지 작은 섬에 있는 정자, 완재정(宛在亭)

밀주구지(密州舊誌)"위양동 조(位良洞 條)"에 의하면 인조 12(1634)에 임진왜란으로 훼철(毁撤)된 제방을 부사(府使) 이유달(李惟達)이 수축(修築)한 기록이 남아 있다.

완재정(宛在亭)은 위양지 작은 섬에 있는 정자로 정면 3, 측면 2칸 크기에 팔작지붕 건물로 온돌방과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고 입향조(入鄕祖)인 안동 권씨 위양 종중의  학산(鶴山) 권삼변(權三變, 1577~1645)을 추모하기 위해 1900년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당시 권삼변은 위양지 섬 중에 한곳에 정자를 세우고 싶어 미리 완재(宛在)라는 정자 이름까지 지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250년 지난 후, 안동 권씨 후손들이 섬 위에 정자를 지었고 이름도 완재정(宛在亭)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완재정(宛在亭)에 배로 출입했으나 후대에 다리를 놓아 아무 때나 접근이 가능토록 되었다.

 매년 5월이면 위양지 제방은 이팝나무 꽃이 만발하여 꽃구름을 만들고 멀리서는 흰 눈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한번 핀 꽃은 20일 이상 은은한 향기를 발산하여 천지를 진동시킨다. 또한 팽나무, 왕버들 나무가 조화롭게 심어져 있어 싱그러운 녹음과 하얀 꽃 세상을 만든다.

이팝나무는 소복이 쌓인 꽃송이가 사발에 얹힌 흰 쌀밥처럼 보여서, 조선시대 왕족이나 양반 李氏들만 먹는다고 이밥나무로 불렷다가 이팝나무으로 변했다. 또는 꽃이 입하 때 핀다하여 입하목(入夏木)으로 불렸다가, 입하가 연음되어 이파, 이팝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고욤나무

이팝나무는 한해의 풍년을 점치는 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꽃이 많이 필 때는 그해는 풍년이고 적게 필 때는 흉년이 든다고 한다.

이팝나무와 관련 전설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열여덟에 시집온 착한 며느리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시부모님께 순종하며 쉴 틈 없이 집안일을 하고 살았지만 시어머니는 끊임없이 트집을 잡고 구박하며 시집살이를 시켰다. 온 동네 사람들은 이 며느리를 칭송하는 한편 동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큰 제사가 있어 며느리는 조상들께 드리는 쌀밥을 짓게 되었다. 항상 잡곡만 짓다가 모처럼 쌀밥을 지으려니 혹 밥을 잘못지어 시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을 것이 겁난 며느리는 밥에 뜸이 잘들었나 밥알 몇 개를 떠서 먹었다. 그러나 공교롭게 그 순간 시어머니가 부엌에 들어왔다가 그 광경을 보고 제사에 쓸 멧밥을 며느리가 먼저 퍼먹는다며 온갖 학대를 하였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며느리는 그 길로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어 죽었고 이듬해 이 며느리가 묻힌 무덤가에서 나무가 자라더니 흰 꽃을 나무 가득 피워냈다. 이밥에 한이 맺힌 며느리가 죽어서 된 나무라 하여 동네 사람들은 이 나무를 이팝나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봄꽃이 만발하는 5월에 위양지 흰꽃구름속의 제방길 산책은 꽃 향기에 취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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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면 해운산에 위치하고 있는 인성암(引聖庵)은 신라 무열왕(654~660)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고 북쪽 성인산(聖人山)이 있어 성자를 이끌어 들인다고 하여 유래가 된 이름이다. 서생팔경(西生八景) 중 성암모종(聖庵暮鍾)이라 하여 인성암의 저녁 무렵 종소리는 매우 아름다웠다고 알려졌다.

인성암 입구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서생포 왜성에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여러 번에 걸쳐 담판을 하면서 이 사찰에 머물렀다고도 전해진다. 그럼 성자는 원효대사와 사명대사일까?

인성암 전각으로는 대웅전, 칠성각, 독성각, 산령각, 종각 등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일본인들로 구성된 울산군교육회가 일본어로 펴낸 울산군향토지(蔚山郡鄕土誌)’에 조선인 불교 사찰은 9곳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백양사와 옥천암, 신흥사, 동축사, 월봉사, 인성암, 내원암, 문수암, 석남사 등이 당시에 존재했다. 건물 자체를 보면 근대에 지어진 것이다.

대웅전
칠성각
독성각과 산령각
종각

수령 400~500년 된 팽나무 한 그루가 있어 사찰의 긴 역사를 증명하듯 노거수의 장엄함이 보인다. 팽나무는 성암모종(聖庵暮鍾)의 저녁 종소리를 들었으리라. 지금은 사찰 방문객에게 귀속 말로 그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는 듯하다.

수령 400~500년 된 팽나무 한 그루가 있어 사찰의 긴 역사를 증명하듯 노거수의 장엄함이 보인다.

대웅전에 있는 청동금고의 새겨진 명문을 살펴보면 일제 강점기 때인 1927년에 대대적인 불사가 있었고 당시 주지스님은 법명은 재선이고 호는 벽허였다. 그때 서생면 진하에 살고 있는 근대 울산 최고의 갑부 이규현이 청동금고를 비롯하여 칠성도, 독성도, 산신도 조성에도 시주를 하였다.

1970년대 이규현의 아들 이근수(李根守)가 그의 고택 만석정의 행랑채를 헐어 대웅전을 짓는데 대들보 등 에 도움을 주었다. 2대를 거쳐 인성암 불사에 큰 보탬을 주었던 父子이다.

문화재로는 유형문화재 17신중도(神衆圖)’와 문화재자료 18석조보살좌상(石造菩薩坐像)’이 있었으나 도난을 우려해 범어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특히 석조보살좌상은 경주 불석으로 알려진 흰색의 석재로 제작되었다.

 암자에서 나와 길을 따라 가면 무일당(無一堂) 선용대선사(善用大禪師)의 부도와 비를 만날 수 있다. 무일당 선용대선사는 192539일 평안남도 용강군 대산면 해산리167번지에서 부친 김곽도와 모친 곽희운 사이에서 9대독자로 출생하여 신의주와 만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무일당(無一堂) 선용대선사(善用大禪師)의 부도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

6.25전쟁 때 켈로부대원으로 안강전투와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여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고 국가유공자가 되었으나 참혹한 전투를 통한 인생무상을 절감하여 1960년경 금정산 범어사에서 하동산대종사 문하로 출가 득도하였다. 이후 보제루 보수, 종각 보수, 진입로 공사 등 범어사의 발전과 가람 수호를 위해 헌신한 공을 인정받아 1968년 종정 표창을 받기도 했다. 1988년에 인성암 주지로 부임한 이후 청풍가풍과 무소유적인 삶으로 정진하였고 형편이 딱한 학생들의 소식을 접하고는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세납 83세 법랍 47세에 원적하였다. 현대의학 발전을 위해 법구를 생전유언에 따라 동국대학교 의과대학병원에 기증하였고 유골은 대전국립현충사에 안장되었다.

무일당(無一堂) 선용대선사(善用大禪師)의 부도와 비
인성암 가는 길에 만나는 서생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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