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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와 기장군의 경계에 위치한 구곡산(九谷山, 해발 434m)은 해운대 좌동에 위치한 산으로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산으로, 일명 아홉산 이라고도 부른다. 일반적으로 장산을 등산하면 장산 억새밭과 더불어 구곡산이 등산코스에 포함되는 산이다.

산 정상은 나무에 에워싸여서 풍광과 조망을 볼 수가 없다. 특히 이 산을 해운대 지역에서 보면 골이 깊게 진 모습은 볼 수 없고, 장산 양운폭포 위 애국지사 강근호를 모신 모정원에서 바라보면 구곡산 봉우리가 거북의 머리모양으로 보인다.

구곡산 지명에 대한 유래는 기장군 철마면 안평마을에서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 한 장수가 두 손으로 땅을 짚었는데 그 손가락 사이로 9개의 골이 생겨서 구곡산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해운대에는 부산, 울산, 양산을 방호하는 담당부대가 인근 산자락에 주둔하 고 있어 다양한 등산 코스를 추진함에 있어 제한을 받고 있다. 장산 정상을 비롯하여 구곡산 산행 초입 제한 또한 그러하다.

이에 해운대 좌동은 대부분 군사보호구역에 속해 있었으나 1993년 이후 신시가지가 조성되면서 해제되었다. 좌동(左洞)이라는 지명은 춘천천의 좌측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고 2003년 신시가지 조성이후 좌14동으로 분동되었다.

장산마을에서 본 구곡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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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가장 작은 주인 로드 아일랜드(Rhode Island)에는 19세기 부자들, 뉴욕 은행원이나 사업가들이 여름휴양을 보낸 뉴포트가 있다. 지금도 Belle-vue Ave에는 호화로운 저택과 식민지 풍의 건물이 남아 있고 요트와 음악축제로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대서양을 마주 보고 있는 19세기 뉴포트 호화별장(Mansions)은 뉴포트 컨트리 보존협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브레이커스(Breakers), 로즈 클리프(Rose cliff), 마블하우스(Marble House), 킹 스코트(Kings cote), 일름(Elms), 샤토 쉬르 메르(Chateau-sur-Mer) 등의 별장이 있다.

별장을 구경하려면 우선 Ticket을 구매해야 입장이 되는데 Ticket 종류에는 5개 별장을 구경할 수 있는 통합 Ticket, 브레이커스 별장에다 추가 별장을 볼 수 있는 Ticket, 브레이커스 별장만 보는 Ticket 그리고 다른 별장을 보는 등이 있다. Ticket 값은 좀 비싸다.

뉴포트의 대표 별장은 역시 브레이커스다. 시간 일정 때문에 브레이커스와 로즈클리프만 보기로 했다. 1895년에 지어진 궁전 같은 브레이커스는 70개의 방이 있고 코넬리우스의 밴드빌트2세를 위해 지은 건물이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을 따르고 있다. 로즈 클리프는 뉴포트에서 가장 큰 무도실을 갖추고 있고 베르사유의 그랑 트리아농을 닮았다.

별장관련 클리프 워크(Cliff Walk) 산책로를 걸으면 해안 따라 지어진 뉴포트 별장과 대서양의 푸른 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클리프 워크(Cliff Walk) 산책로 구간은 Memorial Blvd와 베일리스 비치(Bailey’s beach)사이로 구간거리는 3.5마일이다. 뉴포트 별장 위치는 베일리스 비치와 가깝다.

뉴포트 맨션을 출발하여 포트 아담스 주립공원 도착 전 만난 해변

축제 장소로 유명한 포트 애덤스(Fort Adams) 주립공원은 1800년대 중반에 지어진 포트 애덤스 요새를 중심으로 한 공원이다. 공원에서는 재즈, 포크 등 다양한 음악축제가 열리고 소풍 및 일광욕을 즐기는 곳이다. 때 마침 자동차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는데 개인들이 보유하고 있는 차를 전시하고 있었다. 사진에 담으려고 촬영 양해를 구하니 흔쾌히 승낙하였는데 본인 자동차에 대한 프라이드가 대단하였다. 역시 미국은 자동차 나라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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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소리 떠난 송정마을

동네 한바퀴/부산광역시 2020. 1. 5. 18:31 Posted by 추야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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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을 대표하는 해수욕장은 단연 해운대해수욕장이다. 이에 뒤지지 않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송정에 있는 송정해수욕장이다. 송정에는 사시사철 여행객이 찾는 송정해수욕장을 비롯하여 석양과 일몰을 즐기기에 좋은 죽도공원이 있고 구덕포 광어골에는 맛 집과 카페들이 해안선 따라 즐비하게 있으며 야경 또한 아름답다.

동해남부선 폐구간 트레킹코스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이기도 하다. 기적소리가 멈춘 송정역에는 현재 환경개선 작업이 진행 중이다. 특히 역사건물에는 40년대 건축양식 중 하나인 아르누보 양식을 가진 건축물도 있어 영화촬영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송정(松亭)이란 지명은 본래 갈개 또는 가래포(加來浦), 가을포(加乙浦)라고 불렀다. 갈개는 갈대의 지방 방언으로 갈대가 많이 서식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으로 전하며, 가래포의 가래는 갈대의 사투리이다. 가을포는 가래포의 차음에서 나왔다고 한다.

가을포를 송정으로 부르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곳의 세거 씨족인 광주 노씨(光州盧氏)가 해송림이 울창한 언덕에 정자를 지은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하고, 또 하나는 죽도(竹島) 앞 거북 바위에 서 있는 일송정(一松亭)에서 따왔다고도 한다. 이 나무는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섬의 바위 위에서 수백 년 동안 자라 마을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으나, 6·25 전쟁 당시 주둔한 영국군이 표적 삼아 사격 연습을 하면서 고사하였다고 한다.

송정 마을[송정동]의 명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 기장현의 9포 중 제일 포구인 가을포(加乙浦)로 기록되어 있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기장현읍지(機張縣邑誌)[1831]에 기장현 남면 송정방으로 기록되어 있다.

1880(고종 17) 기장현의 전부와 양산군의 일부가 동래군으로 편입되며 동래군 기장면 송정리로 되었으나 기장군읍지(機張郡邑誌)[1899]에는 다시 기장군 남면 송정리로 나타난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동래군 기장면 송정리 송정 마을이 되었다.

1963년 부산시가 부산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해운대출장소에 편입되어 송정리 송정 마을이 되었고, 1966년 송정리가 송정동으로 개칭되었다. 1970년부터 5개년에 걸쳐 토지구획 정리 사업을 시행한 송정천 일대 늪지 매립으로 대규모 택지가 조성되며 마을의 북쪽이 개발되었다. 1980년 해운대출장소가 해운대구로 승격하였으며, 1995년 부산 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며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송정동 송정 마을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일제 강점기 때 명창 선우일선이 부른 송정의 노래가 다음과 같으며 대한팔경의 노래가사를 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에헤 광어골 열두골은 골마다 기염(氣焰)이요

다리돌(청사포와 구덕포 경계 바다 속의 바위) 바라보니 여름의 나그네라

에헤야 좋구나 좋다. 에헤야 좋구나 좋아

명승의 송정이 자랑이로구나.

에헤 대섬(죽도)에 일본송(一本松)은 못 보면 한이 되고

섬 위에 돋는 달은 볼수록 찬란하네.

에헤야 좋구나 좋다. 에헤야 좋구나 좋아

명승의 송정이 자랑이로구나.

에헤 간진암(오륙도 쪽으로 바다 속에 있는 바위) 열두봉은 봉마다 기암이요

우뚝 선 망덕봉은 평온을 지켜주네

에헤야 좋구나 좋다. 지화자 좋구나 좋아

명승의 송정이 자랑이로구나.」

망덕봉은 해운대 송정동과 기장읍을 경계하고 있는 봉우리다. 고종 때 충신이던 흠재 노영경 대감이 태어날 때 그의 모친이 이 산 정상에 보름달이 뜨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망덕봉이라 하였다 한다. ()은 보름달을 뜻하기도 한다. 이 산은 봉우리가 말의 머리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멍두산, 망아지머리산, 마두봉이라 불리고 있다. 송정과 기장 지역에는 노영경 대감의 후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개발로부터 살아난 송정해수욕장과 송정항

기장군과 경계에 있는 송정해수욕장은 도회적이고 화려한 해운대해수욕장에 비해 아담하고 순수한 아름다운 해수욕장이다. 요즘 서핀을 타는 젊은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현재 송정해수욕장 모습을 가지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1968년 부산직할시는 5개년 사업의 일환으로 송정해수욕장을 어항으로 만들기 위한 3차 공사를 시행하였다. 방파제 기초 조성사업인 석축 공사가 죽도에서 해수욕장 중심부를 향해 약 30%쯤 진행되고 있었을 때, 당시 송정동에 거주하던 모 기관장인 김낙희 라는 분이 이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어항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속적으로 반대한 결과 공사를 중단시키고 어항은 동쪽(죽도공원 뒤편)으로 옮기게 되었고 이에 따라 지금 규모의 아름다운 송정해수욕장 가지게 되었다.

소금배가 지나갔던 송정천(松亭川)

해운대구 송정동과 기장군 기장읍 당사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송정천은 장산 동편 앵림산에서 발원되어 동해바다로 유입되고 있다. 옛날에는 강폭이 넓고 수심도 깊어서(일제 강점기 때 측량된 지적도에는 강폭이 약 200m 이상 되는 것 같다.) 큰 배가 오르내릴 수 있었고, 앞바다에서 소금배가 하구에서 상류까지 짐을 싣고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강 중간 당사리 앞쪽 강변에는 천석바위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옛날 천석의 소금을 가득 싣고 장사꾼들을 태운 큰 배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서 이곳 강으로 대피하였으나 사나운 태풍과 폭우로 끝내 이 천석바위 근처에서 뒤집히고 장사꾼 들은 강물에 빠졌다.

사람들은 격류에 떠내려가던 중 강가에 있는 이 바위에 걸려 구조될 수 있었다. 그 후부터 천석의 소금 배를 구출하였다 하여 이 바위를 천석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대나무가 많아서 지어진 죽도(竹島)와 죽도공원

죽도라는 지명은 현재는 공원 일대에 대나무가 많이 없지만 예전에는 경상 좌수영의 전시용(戰時用) 화살이 제조될 정도로 많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붙여졌다고 한다.

현재 죽도의 모습은 송정천에서 내린 모래로 바다가 메워져 육지와 이어져 있지만 옛날에는 육지와 떨어진 섬 이였다.

죽도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시민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하여 197147일 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일몰 감상하기 좋은 장소로 유명하다.

1940년대 역사 건축양식을 가진 송정역사(驛舍)

송정역은 194012월 건립된 역사(驛舍)로써 70년 역사를 간직한 목조단층 기와지붕 형태의 건물로 전체적으로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건축사적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 철제 창고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아르누보 양식을 띠고 있어 건축사적 가치가 크고 2006124일에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302호로 지정되었다.

바닷가에 위치한 동해남부선 송정역은 지금은 세월의 뒤안길에서 기적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19341216일 역원을 배치하지 않은 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여 194151일 송정역이 준공되자, 동년 61일 보통 역으로 승격되었다. 19767월에는 차급화물 업무가 중지됐다.

또한 송정역은 해운역과 기장역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여름철에는 피서객 이 몰리는 곳이였다.  최근에는 송정역 주변이 각종 영화 촬영 장소로 많이 이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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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4년 영국인 탐험가 존 스미스가 지금의 매사추세츠 주, 로드아일랜드 주, 코네티컷 주, 버몬트 주, 뉴햄프셔 주, 메인 주 등 여섯 주를 뉴잉글랜드라고 명명하였다. 뉴잉글랜드는 지리적으로 서쪽으로는 애팔래치아산맥이 경계를 이루고 동쪽으로는 대서양과 접해 있다.

워싱턴 산을 비롯하여 소나무, 전나무 등 숲이 장관을 이루어 가을이 특히 아름답다. 미국의 철학자, 시인, 수필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1817~1862)의 월든(Walden)의 배경인 월든 호수(Walden Pond)와 오두막(Site Of Thoreau’s Cabin)이 콩코드에 있다.

대서양과 인접하여 바다가재, 조개, 굴 등 해산물이 풍부하고 대합과 감자, 우유로 만든 클램 차우더(Clam Chowder) 등 해산물 음식이 유명하다. 큰 사이즈의 바다가재도 마트에서 비싸지 않는 가격으로 쪄서 팔기 때문에 숙소에서 먹을 수 있다. 옛 생각에 한국 Costco에서 클램 차우더(Clam Chowder) 통조림을 사서 먹었는데 예전 맛이 아니었다.

특히 바다가재는 많이 잡히는 여름에 가장 싸다. 보스턴에 있는 마트에 가면 품질 좋은 소고기와 유제품을 구입할 수 있고 스테이크 용 소고기는 맛이 아주 좋다. 뼈도 저렴하게 구입하여 곰국으로 요리해서 먹으면 또한 좋고 우유와 요구르트 류 또한 맛이 좋다.

1819세기 뉴잉글랜드는 교육, 상업, 의술 등 발달하였고 제조업으로는 조선업, 면방직, , 신발, 기계류를 생산하는 대형 공장이 즐비했다. 또한 고래잡이를 비롯한 어업도 유명했다. 지금은 금융, 보험, 컴퓨터, 소프트웨어, 생물공학, 관광이 주요 산업이다.

전통적으로 뉴잉글랜드 지역 주민은 수줍음이 많고 소박하다. 이런 점은 말수가 적고 검소한 생활에서 비롯되었다. 여행객 입장에서는 신중함과 쌀쌀함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사실은 약간 점잖은 스타일이라 생각하면 된다.

미국의 지명에는 캠브리지, 옥스퍼드, 맨체스터, 리치몬드, 런던, 우스터, 포츠머스 등 유독 영국 지명이 유난히 많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미지의 땅 신대륙에 도착한 식민지 개척자들이 본능적으로 고국의 지명을 붙였고 영국과 비슷한 풍경이나 고국에 대한 그리움에도 영국 지명을 사용했다. 이외에도 제임스타운이나 엘리자베스 빌, 리치몬드처럼 왕, 여왕이나 공작이름을 딴 지명도 있다.

심지어 이름뿐 아니라 특성까지 공유한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영국의 대학 도시 케임브리지와 매사추세츠 주 하버드 대학과 MIT 공대이다.

뉴잉글랜드의 중추이자 역사의 도시 보스턴

보스턴은 뉴잉글랜드 중 인구가 가장 많은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역사의 도시이다. 미국 첫 공립학교인 보스턴 라틴 스쿨이 1635년에 건립되고 1년 후에 하버드 칼리지가 생겼다. 최초 13개 식민지에서 발간한 신문도 1704년 보스턴에서 첫 선을 보였다. 또 보스턴은 독립전쟁 당시 영국 통치에 대항한 중심지였다. 1770년 보스턴 차사건, 1775년 벙커 힐 전투는 자유를 위한 대표적인 투쟁의 사례로 남아있다.

오늘날 보스턴 권역은 미국 교육을 견인해 나가는 곳이다. 전자공학, 생물공학, 의학 그리고 금융은 보스턴의 교육 자원이 배출한 중요 사업이며, 예로부터 보스턴은 미국에서 지식인 사회의 리더 역할을 맡아왔다.

예전에는 서울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직항 비행기가 없어 중간 경유지에서 환승하여만 보스턴에 갈 수 있었다. 그 당시 여행에서는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경유지 중 시카고 오해어 공항에서 환승하여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으로 보스턴에 도착하였다.

보스턴은 렌터카로 운전하기가 무척 힘들다. 좁은 일방통행도로가 많고 주차하기가 힘들며 주차료마저 비싸다. 그래서 시내 여행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좋으며 매사추세츠 항만교통공단(MBTA)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이때 지하철 표시를 T로 나타내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 지하철을 이용하다 보면 항상 느끼는 것이 깔끔하고 깨끗한 우리나라 지하철이 최고라는 것이다. 대다수 국민이 이용하고 필수적인 시설은 민간 기업이 아닌 국가가 관여하는 것이 국민이 생활하기가 좋은 나라이다.

관광차량을 이용하는 방법은 Boston Duck Tours트롤리 투어있다. Boston Duck Tours2차 세계대전 때 쓰이던 수륙양용 차, 일명 오리차를 타고 수로와 육로로 보스턴 관광을 하는 것이 있고 트롤리 투어는 시티 투어 버스처럼 보스턴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이다.

그리고 도보로 여행하는 것도 좋다.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 자유의 길이라고 불리는 여행코스로 식민지 시대와 독립전쟁 시기의 주요 유적지 16곳을 두 줄의 붉은 벽돌 길로 조성한 것으로 벽돌 길을 따라 도보로 미국 건국 역사 여행을 하는 것이다. 보스턴 코먼 공원에서 출발하여 찰스 타운에 있는 USS Constitution 호 까지 여정으로 총 2.5마일(4km)거리다.

보스턴 코먼 공원은 1634년에 조성 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공원내에는 보스턴 학살 기념비와 남북 전쟁 전사자 기념비가 있다USS Constitution 호는 1797년에 건조되어 현재 미 해군이 보유한 군함 중 가장 오래 된 군함이며 Old Iron sides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

보스턴에는 명문 하버드 대학과 메사추세츠 공과 대학(MIT)이 케임브리지에 있다. 하버드 Square 중심으로 약 3만 명의 대학생이 젊음의 도시로 이끌어 가고 주변에는 서점, 카페가 즐비하며 거리 공연도 볼 수 있다. 또한 주변 찰스 강에는 매년 10월 대학 조정 선수들이 경기를 하고 무료 야외 공연도 있어 대학도시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하버드 대학은 1636년에 창립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대학이며 케네디를 비롯한 6명의 대통령과 33명의 노벨상 수상자 등 인물들을 배출해 낸 곳으로 1500의 부지에 400개 이상의 건물이 있다.

MIT1861년에 창립되어 공학, 이학, 건축학, 인문과학분야에서 수많은 공적을 쌓았으며 유능한 과학자를 배출해 낸 세계 제일의 공과대학이다546의 부지에 80개 이상의 건물이 있다.

오늘날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대부분의 대학은 본래 각 종파의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립되었으며 하버드대학(1636)은 퓨리턴 성직자, 프린스턴 대학(1701)은 장로교 성직자, 월리엄 메리 대학(1747)은 영국 국교도 성직자 육성을 위해 각각 설립되었다.

보스턴 미술관은 세계 4대 미술관 중 하나이다. 사실 미국에 있는 미술관이지만 미국 관련하여 볼 것은 빈약하며 주로 그리스·로마 미술, 인상파 미술 등 유럽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고대 이집트 문명이 흥미롭고 재미가 있었다. 일반인용 입장권을 구입하면 30일 이내에 2번사용 가능하다.

매사추세츠 주 의사당은 마치 이슬람 사원을 연상케 하는 금빛 돔형의 건물로 1789년에 지어졌다. 의사당 내에는 독립전쟁에 관한 물건들과 플리머스 식민지사 등의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다.

여행객과 예술가들의 메카 프로빈스타운(Provincetown)

반도인 Cape Cod는 보스턴에서 가장 가까운 휴양지이고 반도 길이가 65마일이다. 가장 오래 된 마을 샌드위치(Sandwich), 유서 깊은 건물이 많은 두 번째 큰 마을인 팰머스(Falmouth)와 우즈홀(Woods Hole)이 있고 해안선, 연못, 습지 등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래서 채덤(Chatham)에서 프로빈스타운(Provincetown)까지 국립해안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프로빈스타운은 Cape Cod의 끝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미술로 유명한 마을이다. 모래 위 산책과 해변 숲을 자전거 타기에 좋다. 1620년 필그림이 신대륙 땅에 맨 처음 발을 내딛은 곳이 바로 또한 이곳이다. 여기서 그들은 5주 동안 머문 곳으로 알려져 있다.

Commercial St에서 여장남자와 동성애자들의 화려한 축제가 있고 게이들의 활동도 많다. 여행 당시, 게이 둘이 2인용 자전거를 화려하게 꾸며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마치 신혼여행 하는 모습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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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신라 천년의 수도로써 시자체가 왕릉을 비롯하여 문화유산으로 묻혀 있어 마치 노천 박물관과 다름없다. 안압지, 계림, 황룡사지 주변에는 계절에 따라 청보리, 유채 등의 아름다운 색채가 고즈넉한 문화유산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또한 형형색색 맛 집과 카페 등으로 구성 된 황리단길은 젊은이들에게 경주를 찾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추령 터널을 통해 동해안을 향해 국도로 이동하면 푸른 평야와 감은사지, 동해구에서의 문무대왕암을 지나 남쪽 울산방향으로 가면 조그만 어촌항인 읍천항을 찾는다. 이곳은 바위가 해변에 너무 많아 항구역할이 힘 드는 지형에도 불구하고 1종 항구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으며 어민들은 미역, 전복으로 소득을 증대시키고 있다.

이곳에서 주상절리를 감상하려면 파도소리 길을 이용하는데 이 길은 산책길로 읍천항에서 하서4리 진리항까지 1.7km구간이 되는 해안 길로 몽돌길, 야생화길, 등대길, 데크길 등 해안 환경을 고려한 테마로 구성되어 있고 제주도, 울릉도 못지 않는 주상절리 절경을 만날 수 있다. 예전에는 해안가에 철책선이 있어 주상절리를 볼 수가 없었는데 경주시가 이를 2012925일 천연기념물 제536호로 지정하였고 관광 상품화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 발전시켰다.

주상절리(柱狀節理)의 한자는 기둥 , 모양 , 마디 , 다스릴 로 기둥모양으로 쪼개진 돌을 형상화한 것으로 주로 화산지형에서 볼 수 있다. 양남의 주상절리는 신생대 제3기의 에오세(5400만 년 전)에서 마이오세(460만 년 전) 사이에 경주와 울산 해안지역 일대의 활발했던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10m가 넘는 정교한 돌기둥들이 1.7에 걸쳐 분포해 있으며, 주름치마, 꽃봉오리, 부채꼴 모양의 특이 주상절리를 비롯한 수평 방향의 주상절리가 대규모로 발달되어 있다.

지하의 기반암이 녹아 형성된 마그마는 지표로 나오면서 빠르게 식는다. 반 액체 상태인 마그마는 고체가 되는 과정에서 부피가 수축한다. 이때 수축면의 중심에서 각 꼭짓점의 거리가 동일한 육각형 모양의 절리가 만들어 지는데, 이것이 지표에 노출되어 기둥처럼 떨어져 나가면 비로소 주상절리가 탄생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상절리의 발달에는 마그마의 급격한 냉각이 필수라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하에서 1,000도 가열된 마그마가 지표 밖으로 분출되어야 하므로 결국 주상절리의 발달은 분출암의 대표주자인 화산암과 관련 깊다.

양남면(陽南面)은 경주 동남쪽 동해변에 위치한 면으로 북쪽으로는 양북면, 서쪽으로는 외동읍, 남쪽으로는 울산광역시의 북구, 동쪽으로는 동해에 접해 있다. 신라시대에는 신라6부의 하나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에 속하며 영역으로 상서지(웃섯골), 하서지(아랫섯골), 내아가 기록되어 있다. 하서지는 현재의 양남면 하서리 일대를, 내아는 나아리 일대를 가리킨다. 『동경잡기』에는 현재의 양남면과 양북면 및 감포읍 지역이 동해변(東海邊)이라는 1방으로 기록되어있다.

진리항은 진리마을에 있는 항구로 신라시대에는 밤나무가 많은 포구라 하여 율포(栗浦)라 불렸다고 하고 신라 눌지왕 때 충신 박제상이 왕명으로 왕자를 구하러 왜로 떠날 때 여기서 출범했다고 한다. 그 후 마을로 통하는 길이 없어 나룻배로 길을 건넜다고 나루 진(), 마을 리()를 합하여 진리(津里)라 이름 붙여졌다.

율포는 박제상이 왜로 출발한 항구로 그 위치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1989년 석굴암 연구회에서 울산 정자항을 율포라 여기고 유포석보 주변에 박제상 발선처비를 세웠다. 삼국유사 권제1 2 기이(紀異) 내물왕과 김제상에는 율포 바닷가로만 명시되어 있어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

진리항을 포함하고 있는 하서리(下西里)는 동해해변가의 온화한 기온에 옥토를 가진 농어업 겸업의 환경 좋은 마을이다. 신라 초기 육촌 중 배씨 세력지역으로 한기부(漢祇部)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에 해당되며 시조는 기타(祇陀)로 이곳을 입주, 개척한 후 하서지(下西知)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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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에서 필요한 산림자원을 보호 및 육성하기 위해 봉산(封山) 또는 금산(禁山)으로 지정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금표(禁標)나 봉표(封標) 등 표석을 설치하였다. 산림은 주로 소나무 숲을 의미하는데 특히 황장목(黃腸木, 또는 금강송)은 소나무 중에서도 몸통 속 부분이 누런색을 띠고, 재질이 단단하고 좋은 나무로서, 주로 왕실의 관을 만들 때 사용되었던 나무이다.

산림청 국립수목원에서 2008년도부터 조선왕조실록, 속대전, 만기요람 등 문헌에 나와 있는 황장금표 및 봉산표석에 대해 전국 일제조사를 시작하여 2009년도에 22개소를 발굴하였다.

경주시 동경주(양남면, 양북면, 감포읍)에는 봉표가 3개소에 있으며 양북면에 2개소로 불령봉표, 시령봉표, 양남면에 1개소로 수렴포봉표가 있다. 봉표내용은 연경묘(延慶墓)의 제사에 사용 될 향불을 피우는 데 쓰는 숯을 만들기 위해 봉산을 지정하고 봉표를 설치했다는 내용이다.

延慶墓香 炭山因 啓下 佛嶺, 柿嶺, 水念浦 封標

연경묘 제사에 사용하는 향불을 피우는 데 쓰는 숯을 만들기 위한 산이므로 임금의 명에 의해 불령, 시령, 수렴포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연경묘(延慶墓)는 제23대 순조의 큰아들 효명세자(1809 1830)의 묘호이다. 1809년에 태어났으며 순조 123세에 왕세자에 책봉돼 효명세자로 불렸는데, 그의 나이 18세 되던 해부터 왕위 계승을 위한 대리청정을 하던 중 갑작스럽게 승하해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대리청정 33개월 만이고 순조는 4년 후 세상을 떴다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즉위 후 추존왕(追尊王) 익종()으로 추대되었고 연경묘에서 수릉(綏陵)으로, () 형식에서 능() 형식으로 바뀌었다. 이후 고종 때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됐고 지금의 봉표는 헌종이 익종으로 추대 전에 설치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릉)은 현재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에 있고 부인 신정황후와 같이 합장되어 있다.

효명세자는 당시 안동 김씨 세도정치 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아버지 순조를 도와 왕권을 강화하던 중이었다. 외가인 안동 김씨 세력을 배척하고 인재를 널리 등용했으며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역대 세자 중 예술문화 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고 특별히 춤사위를 즐겼다 한다. 궁과 종묘에 쓸 연향 등을 새로 만들고 발굴했으며 대규모 연회를 열기도 해 조선 궁중 향연의 절정기를 이루게 했다. 일종의 왕권 강화를 위한 국가적 시위로 해석된다.

효명세자의 부인 신정황후 조씨는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로 12세에 효명세자의 비로 책봉돼 세자빈이 됐으며 효부라 칭찬을 받았다. 효명세자 승하 3년 전에 유일한 자식인 헌종을 낳고 왕실생활 11년 되던 해 남편 효명세자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자 23세에 홀로 돼 82세까지 장수했다.

그러나 장수는 했지만 그것이 나라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신정황후는 시어머니 순원황후의 안동 김씨 세력과 자신의 친정 세력인 풍양 조씨 사이에서 세력 다툼의 주역이 됐고 조선 왕실을 손아귀에 넣고 군림했던 그녀는 조선 왕실을 패망하게 한 원인을 제공했다.

조선후기 세도정치에 의한 무분별한 봉표 시행으로 백성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하여 원성이 너무나 컸었다. 백성들은 산에서 땔감을 구하고,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 필요한 나무를 벌목하는데 이를 금지하니 가렴주구 하는 고을 탐관오리에 의해 가뜩이나 힘든 삶에 백성들은 한층 도탄에 빠졌었다. 이에 경주부윤 노영경이 이 폐단을 한때 철폐하여 많은 백성으로 부터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경주보문단지에서 동해구 방향에 있는 문무대왕암이나 감은사지로 가려면 동대봉산 또는 추령터널을 지나가야 한다. 동대봉산 또한 봉산으로 지정 된 산으로 수군의 조선용 목재를 사용하기 위함으로 이 또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구전민요를 살펴보면 백성들의 가슴 태우는 원한을 노래 가락을 통해 풀고자 함을 알 수가 있다.

불 붙었네 불 붙었네 동대봉산 불 붙었네.

동대봉산 붙은 불은 동해 불로 끄련마는

요내 가슴 붙은 불은 어느 님이 꺼줄는고.

왕의 길에서 만난 불령봉표

양북면 호암리 불령이라는 고개에 있는 봉표는 인근 봉표 중 글자가 가장 선명하다. 예전에는 절터가 있었으며 절 이름은 알 수 없고 이곳 에서 발견 된 목 없는 석불은 현재 기림사 성보박물관 입구에 있다. 또한 기림사와 불국사 스님들이 불령을 통해 서로 왕래하였다.

왕의 길(반월성추원모차골서낭당 고개세수방불령재용연기림사대왕암)은 신라 문무대왕의 장례길이며 그의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의 제를 지내기 위해 감은사와 문무대왕암까지 수레를 타고 지나가는 길이였다.

지금은 트레킹코스로 유명하다. 호암마을 앞산에는 마치 입을 벌린 범처럼 생긴 기이한 바위가 있어 그 바위의 이름을 범바위라 부르고 마을 이름도 "호암" 혹은 범바우라 불렀다고 한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너머 가는 옛길에서의 시령봉표

양북면 용동1리 감골에는 옛날 포항 장기로 넘어가는 길이 있어 이곳 마을사람들이 이용하였으나 지금은 교통발달로 다니는 이는 없다. 용동이라는 지명은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龍洞이라 불렀다. 마을에서 계곡 천을 따라 30 ~ 40분 정도 올라가면 볼 수 있는데 원래 위치는 알 수 없고 물가에 위치하고 있어 인근 봉표 중 마모가 가장 심하여 글자를 식별하기가 어렵다.

 

별을 보기 좋은 어촌마을에서의 수렴포봉표

양남면 수렴1리 국도31번 해안도로와 인접한 곳에 있다. 조그만 텃밭에 묻혀 있어 전체 글자를 볼 수 없고 주변 봉산으로 지정 될 만한 큰 산이 없어 실효성이 궁금하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병의 병영을 가졌던 곳이라 하여 수영포리라 하였는데 1914년에 행정리명을 수렴리라 하였다. 옛날 왜적의 침입이 많은 곳이라 마을 사람들의 기질이 강하고성공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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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은 동양에서 용, 기린, 봉황과 함께 4()의 하나로 길상과 장수를 상징하고 벽사의 역할을 한다. 특히 십장생의 하나로 우리의 문학이나 전통미술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 가운데 하나다.

 

주변을 살펴보면 문창살, 사찰단청, 귀뉴라 하여 도장의 손잡이에 길상과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을 볼 수 있고 거북빗장은 벽사와 길상을 상징하고 있다. 집을 지울 때 상량고사를 지내는데 이때 상량문 좌우 양 끝에 자와 자를 서로 마주 대하게 하여 쓰는데 이는 화재예방을 위한 염원이고 해남 미황사 대웅전 주춧돌과 부도에 거북이가 조각 되어 있어 이는 어로의 안전을 기원하는 것이다.

옛 석비는 귀부, 비신, 이수로 구성되어 있고 받침돌이 귀부(龜趺)인데 물명고(物名考)에 의하면 고개를 든 거북을 사()라하고 고개를 숙인 거북을 영()이라 한다. 또 역동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튼 것도 있는데 여주의 민유중 신도비와 원주의 김제남 신도비의 귀부가 그런 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거북류는 바다거북과(바다거북), 장수거북과(장수거북), 남생이과(남생이, 붉은귀거북), 자라과(자라)이고 주로 바다 고깃배 거물에 잡히는 거북은 바다거북이며 장수거북은 깊은 심해에 살기 때문에 보기가 어렵다. 남생이와 자라는 민물에 살고 남생이는 환경부에서 법적으로 보호야생동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옛 사람들은 거북을 구()라하고 자라를 별()이라고 구분하였다. 특히 자라는 한번 물면 떨어지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고 손가락을 끊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이빨이 있어 이를 경험한 사람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생겼다

옛날 해운대 일대 즉 지금의 중1동은 갈대밭이고 거북이가 많이 서식하여 옛 이름은 구남(龜南)이라 하였고 동백섬도 거북섬으로 불렸다. 또한 황옥공주에 나오는 거북을 고려하면 그 당시 거북은 바다거북과로 추정된다.

또한 해운대는 거북관련 행사들이 있으며 그 중 거북 방생과 용왕굿을 한다. 매년 정월 보름날에는 동백섬 갯바위나 백사장에서 수산업(어업)에 종사하는 많은 분들이 바다에서의 무사편안, 사업 번창을 기원하기 위하여 용왕제를 올리고 있다. 최근 거북 방생과 관련하여 붉은귀거북이를 방생하고 있는데 이 종은 외래종으로 미국 미시시피 계곡이 원산지로 현재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국내에는 천적이 없는 관계로 우리나라 고유어류와 수서곤충 등을 마구 잡아먹고 있어 생태계 먹이사슬을 교란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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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의 호랑이

동네 한바퀴/부산광역시 2019. 7. 24. 16:51 Posted by 추야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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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부터 우리나라에 호랑이가 많이 살고 있어 속담, 민담, 민화를 비롯하여 문학작품까지 등장하여 중국에서는 우리나라를 호담지국(虎談之國)라 불렀고 중국 문헌 후한서 동이전에도 호랑이를 신으로 받들어 제사지내는 나라라고 소개하고 있다.

호랑이는 박지원의 호질, 사신(청룡, 백호, 주작, 현무) 중 하나이며 산신각에는 산신을 시자(侍者)하는 신령한 동물로써 그 용맹스러움으로 권선징악과 벽사의 주재자로 신격화되어 있는 영물이다.

또한 호랑이의 민속적인 유형으로는 인간에 감화되어 인간을 돕는 보은형, 토끼 등 작은 동물에게 조롱받는 우화형, 여우처럼 둔갑하는 다중 인격적 변신형, 담배를 피우거나 까치와 놀고 있는 길상형,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호식형 등으로 다양하게 나누어진다.

호랑이는 범속에 속하며, 우리나라와 만주, 시베리아에는 백두산 호랑이로 분류되는 특산종으로 영명으로는 Amur Tiger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무분별한 포획으로 1918년 강원도 춘성군 가리산에서 수컷 1마리, 1922년 경주 대덕산에서 수컷 1마리, 평안북도 초산에서 1마리 사살된 것이 백두산 호랑이의 마지막 기록이다.

장산에서 호랑이 관련 이야기는 반여동 장산 산록에 굴이 있는데 중리마을 주민들은 범이 살았다 하여 범굴이라 부른다. 지금은 무속인들의 기도처로 변하였다. 재송동 새마을 당산 옆 계곡을 범전골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옛날 달밤에 범이  밭에 내려와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장산 양운폭포에도 숲이 우거져 호랑이가 내려왔다고 하고, 송정 지역에는 호랑이 새끼를 구해준 최씨의 부인이 범굴에서 해산을 했다는 보은(報恩)의 호랑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금정구 서동의 부녀자들이 해방 전 장산에 나물 캐러 갔다가 바위 밑에서 호랑이 새끼를 발견하여 귀여워 그 새끼에게 다가가자 바위 위에서 어미 호랑이가 어흥하며 소리를   내어, 부녀자들이 놀라 신발이며 나물 캔 바구니를 두고 마을로 도망쳐 내려왔는데 다음 날 아침 마당에 신발과 나물   바구니가 고스란히 놓여있더라는 얘기도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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