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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나 사정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화합하지 못하는 상태를 갈등(葛藤)이라고 하는데 갈등은 칡과 등나무이다. 칡은 줄기를 왼쪽으로,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고 올라가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해결의 실마리가 찾는 것이 어렵다라는 의미가 된다.
현곡면 오류리에 있는 등나무(현곡면 오류리 527번지)는 1962년 12월 7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등나무는 4그루인데, 두 그루씩 모여서 자라고 있다. 가슴높이의 줄기지름이 각각 20·40·40·50cm이며 팽나무를 감고 올라가고 있다. 높이 17m이로 동서쪽으로 20m, 남북쪽으로 50m 정도 퍼져있다.

어떤 일이나 사정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화합하지 못하는 상태를 갈등(葛藤)이라고 하는데 갈등은 칡과 등나무이다.
칡은 줄기를 왼쪽으로,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고 올라가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해결의 실마리가 찾는 것이 어렵다”라는 의미가 된다.

()은 콩과에 속하는 덩굴성 식물로 5월에 연보라색의 꽃이 핀다봄을 알리는 꽃향기로 아카시아나무 꽃향기와 더불어 등나무 꽃 향기는 은은하고 깔끔한 향기가 난다. 또한 여름에는 나그네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여름나무이다.
()이라는 한자는 위로 감고 올라가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문자이다학술적으로 이 나무의 본래 이름은 참등이라고 하는데 흔히 등이라고 하여 산등이나 애기등 같은 등류를 통칭한다.

등(藤)은 콩과에 속하는 덩굴성 식물로 5월에 연보라색의 꽃이 핀다.
등(藤)이라는 한자는 위로 감고 올라가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문자이다.

신라 시대 때, 이곳을 용림(龍林)이라 하여 왕이 수렵을 즐기던 곳이었다여기의 등나무를 용등(龍藤)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등나무 줄기의 꼬임과 그 위엄을 용에 견주어 붙인 명칭이다. 이 등나무 옆에 깊은 샘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고 옆에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여기에 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때 어느 농가에 열아홉 살, 열일곱 살이 된 예쁜 두 딸이 있었는데 둘다 남모르게 이웃집 청년을 사모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청년이 싸움터로 출정하게 되어 떠나게 되고 그 모습을 몰래 보며 눈물을 짓다 두 자매는 같이 그 청년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정한 자매가 서로 양보하기로 결심하고 있을 때 그 청년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얼싸안고 울다가 함께 못에 몸을 던졌다.

자매가 그 청년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얼싸안고 울다가 함께 못에 몸을 던졌던 연못가에는 등나무 두 그루가 자라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 연못가에는 등나무 두 그루가 자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청년이 훌륭한 화랑이 되어 돌아오게 되었고, 이 화랑은 세상을 등진 자매의 애달픈 사연을 듣고서 자신도 연못에 몸을 던졌다. 화랑이 죽은 연못가 자리에서 팽나무가 자라 나왔고 이로부터 등 두 그루는 팽나무를 힘차게 감고 올라가 자라 5월이 되면 탐스러운 꽃송이로 그윽한 향기를 퍼뜨리고 있다. 이에 두 그루 등나무는 팽나무를 감고 자라며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을 달래고 있다고 한다.

화랑이 죽은 연못가 자리에서 팽나무가 자라 나왔고 이로부터 등 두 그루는 팽나무를 힘차게 감고 올라가 자라 5월이 되면 탐스러운 꽃송이로 그윽한 향기를 퍼뜨리고 있다.
두 그루 등나무는 팽나무를 감고 자라며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을 달래고 있다고 한다.

이 애틋한 전설에서 유래되었는지 신혼부부의 금침(베게)에 등꽃을 따서 말린 것을 넣어주면 정이 한층 깊어진다는 말도 전하여지고 있으며, 또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때 등나무의 잎을 달여 마시면 정이 다시 살아난다는 속신도 있다.

신혼부부의 금침(베게)에 등꽃을 따서 말린 것을 넣어주면 정이 한층 깊어진다는 말도 전하여지고 있다.

현곡면(見谷面) 경주시의 서북쪽에 있는 면이다. 남쪽으로 경주시내, 동쪽으로 천북면, 북쪽으로 안강읍, 서쪽으로 건천읍과 영천시 고경면에 접해 있다. 서쪽에서 발원하는 소현천을 중심으로 작은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소현천은 동쪽의 형산강에 합류된다.
‘현실’이라는 순우리말 이름을 한자의 소리와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 ‘현곡(見谷)’이라는 설이 있다. 오류리(五柳里) 이름은 마을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었다 해서 유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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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207-2 평지 일대(129,643)에 위치하고 있는 금척리(金尺里) 고분군(古墳群)은 경주에서 건천읍으로 올라가는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고분이 나뉘어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 조사에서 모두 52기의 봉토분이 확인되었으나 현재는 32기 정도만 확인되고 있다. 이 고분군은 1963121일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고 경주 시내 중심부의 고분군을 제외하면 경주 주변 외곽에서는 대형봉토분들이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고분군이다.

금척리(金尺里) 고분군(古墳群)은 경주에서 건천읍으로 올라가는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고분이 나뉘어져 있다.
건천읍에서 경주 방향으로 가는 국도 4호선

이곳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하늘에서 받은 금으로 만든 자(金尺)를 숨기기 위해서 40여 개의 가짜무덤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지금도 이 무덤들 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 전해지고 마을 이름 또한 금척리라고 명명되었다.

또 다른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신라에 금자를 왕에게 바친 사람이 있었다. 죽은 사람이라도 이 금자로 한번 재면 다시 살아나고 무슨 병이라도 금자로 한번 쓰다듬으면 그 자리에서 낫는다는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왕은 이 금자를 국보로 여겨 매우 깊숙한 곳에 두었다.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동쪽에 있는 고분군에서 본 서쪽 고분군

이런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금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국보에 해당하는 금자를 달라고 하는 무뢰한 사신에게 순순히 금자를 내줄 수가 없었다. 곧 신하에게 명하여 토분을 만들고 그 속에 금자를 파묻었으며 주변에 다른 토분을 만들어 어느 곳에 금자를 묻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나라 사신은 그 많은 토분을 헤치고 금자를 찾아낼 기력이 없었던 듯 물러나고 말았다. 왕의 지략으로 금자를 당나라에게 빼앗기지 않았으나 이후 어느 토분에 금자가 묻혔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고 한다.

국도 4호선을 사이에 서쪽에 있는 고분군
서쪽에 있는 고분군이 동쪽 고분군보다 규모가 큰 고분이 많다.

현재 남아 있는 봉토분들은 대부분 원형분으로 보이나 몇 기의 표형분(瓢形墳)도 확인된다. 또 많은 고분의 봉토 윗부분에서 함몰된 형상을 찾을 수 있어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봉토는 직경 25m 이상의 크기를 가진 것들도 있어 신라의 지방 고총들과 유사한 크기를 가졌다

금척리 고분군은 일제강점기 때 4번국도 건설공사 중 고분의 존재를 확인한 바 있다. 발굴조사는 1952, 1976, 19813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1952년 발굴조사는 도로확장공사로 파괴된 고분(1·2·3) 2기에 대한 발굴조사를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에서 32일부터 8일까지 실시하였다.

맨 오른쪽은  표형분(瓢形墳 )

무덤 내부는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덧널()을 설치한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였다. 조사결과 출토유물에는 1호분에서 금제세환이식·곡옥·호박제 구슬·토기 및 철기편이, 2호분에서는 많은 토기편과 소량의 철기편이 수습되었다. 따라서 1호분은 고분의 주곽부, 2호분은 부곽 가능성이 크다.

1976년 발굴조사는 318일 토사 채취 중 토기편이 발견됨에 따라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적석목곽묘의 고분 4기와 우물 1기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고배·대부장경호 등 모두 토기이다.

1981년 발굴조사는 상수도시설 공사 중 노출된 고분들에 대한 발굴조사를 경주사적관리사무소와 국립경주박물관 합동으로 423일부터 531일까지실시하였다. 수혈식석곽묘 3, 옹관묘 2, 토광묘 2기 등 모두 15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토광묘는 적석목곽묘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곡옥장식목걸이(曲玉附頸飾), 은제허리띠(銀製) 등이 있는데,신라 지방 고총들에서 출토되는 양상과 유사하다.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고분군이 조성된 중심 연대는 5세기6세기중반으로 추정된다.

여기 건천읍에 있는 모량리(牟梁里)의 모량(牟梁)이라는 옛 지명이 남아 있어, 금척리 고분군을 신라의 6부 가운데 하나인 모량부(牟梁部) 귀족들의 무덤들로 보고 있다.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동쪽에 있는 고분군

모량부(牟梁部)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으로 촌장(村長)은 구(; 라고도 씀) 예마(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함)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혹은 涿)),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모량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24대 진흥왕의 왕비인 지소부인(知召夫人) 또는 식도부인 박씨(息道夫人 朴氏)의 출신지로 고분을 평지에 대규모로 조성하여 그 존재감을 강조하였고, 부장유물에 있어서 시내 고분과 크게 차이가 없어 신라의 중앙정계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던 세력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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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릉(五陵)은 경주시 탑동 67-1번지에 있는 다섯 기의 왕릉으로 1대 혁거세왕(赫居世王, 기원전 57~ 서기 4), 알영왕비,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느 능이 누구의 능인지 명시되지 않고 있다.

신라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은 성이 박씨이며, 전한 효선제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 57) 4월 병진(정월 15]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居西干, 또는 거슬감[居瑟邯]) 이다. 이 때 나이는 열 세 살이었으며 나라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었다. 사라(斯羅)사로(斯盧)라고도 했다. 남산(南山)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에 궁실(宮室)을 세웠다.

일설(一說)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는데 닭이 숲속에서 울었다 해서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이라 했다고도 한다. 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新羅)라는 국호로 정했던 것이다.

박혁거세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삼국유사에서 전해지고 있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이 되던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후에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리고 왕후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하직하였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합장하여 장사지내려하자 큰 뱀이 나타나 방해를 하므로 머리와 사지를 제각기 장사 지내 오릉(五陵)을 만들고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하였다.

오릉은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기이편에 의거하면, 통일신라 중대 이후부터 사릉(蛇陵사릉원(蛇陵園)이라는 능호(陵號)와 함께 혁거세왕과 알영부인의 능 또는 혁거세왕·남해왕·유리왕·파사왕의 능으로 알려지기 되었다.

능원 에는 조선 세종 11(1429)에 왕명에 따라 건립 된 숭덕전(崇德殿)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 33(1600)에 다시 지었고 숙종 20(1694)에 수리하였다. 경종 3(1723)숭덕전이라는 편액을 걸었고, 영조 11(1735)에 건물을 수리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영조 때 수리한 모양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제사는 처음에는 국가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에 와서 박씨 문중에서 주관하여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숭덕전(崇德殿) 일대
알영부인이 탄생하였다는 우물로 전해지고 있는 알영정(閼英井)
알영정(閼英井) 상부는 담암사(曇巖寺)에서 사용 된 장대석으로 우물을 덮고 있다.

영조 35(1759)에 세운 신도비가 숭성각(崇聖閣)에 있는데, 비석에는 혁거세왕과 숭덕전의 내력이 새겨져 있다. 알영부인이 탄생하였다는 우물로 전해지고 있는 알영정(閼英井)이 있는데 담암사(曇巖寺)에서 사용 된 장대석으로 우물을 덮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세워진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가 있다. 그리고 담암사(曇巖寺) 당간지주(幢竿支柱)의 기둥을 사용하여 세운 홍전문(紅箭門)이 있다.

숭성각(崇聖閣)
숭성각(崇聖閣) 입구
숭성각(崇聖閣)  안에는 영조 35년(1759)에 세운 숭덕비(崇德碑)가 있다.
숭덕비(崇德碑)에는 혁거세왕과 숭덕전의 내력이 새겨져 있다.
담암사(曇巖寺) 당간지주(幢竿支柱)의 기둥을 사용하여 세운 홍전문(紅箭門)

담암사(曇巖寺)는 전불시대의 칠처가람지 중 하나로 절터는 현재 숭덕전 일대로 보고 있다. 당간지주(幢竿支柱)7세기로 추정된다. 담암사(曇巖寺)에 대한 기록은 문무왕 9(679)에 사천왕사 다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칠처가람지 중 가장 늦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 가는 입구

오릉의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능부터 제1호분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제5호분까지 부르고 있다. 1호분은 높이 8.7m, 직경 41.4,m5기 중 가장 크다. 2호분은 표주박형태로 높이는 각각 5.1m, 4.5m 직경은 장변 36.5m, 단변 20m이다. 3호분은 제1호분의 동쪽에 있으며 높이 5.1m, 직경 26.1m 이고 제4호분은 제3호분의 북쪽에 있으며 높이 2.5m, 직경18.2m이다. 5호분은 제3호분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 2.1m, 직경 17.5m이다.

표주박형태의 제2호분은 2기의 원형분이 합쳐져서 하나의 표형분이 된 부부합장묘로 추정되고 오릉 구역에 있는 능의 수는 실제로 6기로 능에 묻힌 피장자도 6명이다. 신라에서 5세기 이전에 존재하는 원형봉토분이 아직 확인된 것은 없다. 혁거세왕릉으로 추정되는 제1호분만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나머지는 작은 능이다. 나머지 능의 왕 재위기간이 1세기와 2세기 초로 당시 묘제 양식은 목관묘(木棺墓)로 고려하면 오릉과는 관련이 없다.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가 있는 건물(閣)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세워진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

신라의 묘제 양식은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살펴보면 기원전 1세기부터 1세기 때는 목관묘이고 2세기부터 4세기 중엽은 목곽묘이다. 이들 묘의 형태는 평면 장방형이거나 타원형으로 높이는 1.5m 내외로 소형분이다.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 목관이나 목곽은 부식 및 침하되어 지표상에서 발견하기가 어렵다. 간혹 도로개설이나 건물신축과정에서 발견되고 있다.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 때는 적석목곽분이고 6세기 중엽이후 부터는 횡혈식석실분이 축조되었다.

오릉의 묘제 대한 고고학적 결론을 보면 능의 축조 시기는 6세기 전반으로 귀족의 묘로 규모가 가장 큰 1호분 적석목곽분을 중심으로 신분적으로 차별성을 가진 혈연집단, 또는 배장묘로 보고 있다.

오릉을 만나기 위해 지나가는 숭의문
오릉 앞 제자 지내는 제각

그럼 문헌 기록을 통해 오릉의 실체를 들여다보자.

삼국유사에 박혁거세의 능을 오릉으로 기록한 것은 신라 불교공인에 따라 구전으로 전승 된 설화로 변재천녀(辨才天女)의 시신을 각각 매장하여 오릉을 조성한 불교설화를 박혁거세의 사변설화(蛇變說話)로 변형하여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오릉의 다섯 능을 박혁거세왕,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을 의도적으로 설정하여 기록하였다. 왕비인 알영부인의 능은 언급 없이 묵시적으로 오릉에 포함시켰다. 이후 17세기 박씨 문중에서 대외적으로 오릉에 알영부인을 포함시켰다.

실제 박혁거세의 능을 포함한 신라 초기 왕들의 능은 어디에 있을까?

박씨 일족의 세력권인 남산 서부 구릉지 또 남산 서북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박혁거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 13년을 현재 창림사지에 거주하였고 즉위 21년 때 축조한 궁궐, 도성 역할을 했던 금성 위치는 현재 경주고 일대 또는 월성 서쪽 끝을 추정하고 있다. 이후 5대 파사왕 즉위 22년 때 금성에서 현재 반월성인 월성으로 궁궐을 옮겼다.

신라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즉위 8(기원전 50)에는 왜인들의 침임이 있었으나 왕이 덕이 있음을 알고 물러갔다고 되어있고 즉위 17(기원전 41)에는 왕과 왕비가 전국을 돌며 민정을 살피면서 농업과 양잠을 독려했다 즉위 19년 봄 정월에는 변한이 항복해 왔고 즉위 21년에는 도성을 지었는데 이를 금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 금성은 신라 최초의 도성인 셈이다.

즉위 30, 낙랑이 쳐들어왔다가 노적가리가 밖에 쌓여있는 것을 보고 도적질 하지 않는 의로운 나라라 하여 물러갔다고 되었다즉위 38년, 봄 2월에 호공을 보내 마한을 예방하였다. 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본래 왜인이었는데,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호공(匏公)이라고 불렀다.

즉위 39, 마한 왕이 별세하였고 곧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즉위 53, 동옥저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쳤다.

즉위 61, 3, 별세하였고 사릉에 장사지냈다.

신라 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재위 서기 4~24)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남해(南解) 차차웅(次次雄)은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알영부인(閼英夫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문(金大問)은 말하기를, “차차웅(次次雄)이란 무당을 이르는 방언(方言)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드디어 존장(尊長)되는 이를 자충(慈充)이라 한다고 했다. 오직 남해왕(南解王)만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 불렀다.

왕비는 운제부인(蕓帝夫人) 또는 아루부인(阿婁夫人)이다. 지금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雲梯山) 성모(聖母)가 있는데 가뭄 때 여기에 기도를 드리면 감응感應이 있다)이다. 삼국사기에 남해 차차웅은 키가 크고 성품이 심화하였으며 지략이 뛰어났다고 되었다. 즉위년에 낙랑국(樂浪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즉위 5년에는 석탈해를 사위로 삼고 즉위 11년에는 왜인이 침략하였고 낙랑이 금성을 공격하였다. 전한(前漢)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甲子; 4)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지 21년 만인 지황(地皇) 4년 갑신(甲申; 24)에 죽었다. 이 왕이 삼황(三皇)의 첫째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사금(尼師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잇금[齒理]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했다. 처음에 남해왕(南解王)이 죽자 그 아들 노례(弩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이에 탈해(脫解)가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성스럽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한다하고 떡을 입으로 물어 시험해 보았다.

고전(古典)에는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했다. 이것을 김대문(金大問)은 해석하기를, “마립간(麻立干)이란 서열을 뜻하는 방언(方言)이다. 서열(序列)은 위()를 따라 정하기 때문에 임금의 서열은 주()가 되고 신하의 서열은 아래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했다.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왕(新羅王)으로서 거서간(居西干)과 차차웅(次次雄)이란 이름을 쓴 이가 각기 하나요, 이사금(尼師金)이라고 한 이가 열여섯이며,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이가 넷이다. 신라 말기의 명유(名儒) 최치원(崔致遠)<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지을 적에는 모두 모왕(某王)이라고만 하고 거서간(居西干) 등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혹시 그 말이 야비해서 부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인가. 그러나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록하는 데 방언(方言)을 모두 그대로 두는 것도 또한 마땅한 일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이들을 갈문왕(葛文王)이라고 불렀는데, 이 일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남해왕(南解王) 때에 낙랑국(樂浪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또 천봉(天鳳) 5년 무인(戊寅; 18)에 고구려(高句麗)의 속국인 일곱 나라가 와서 항복했다.

신라 제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金, 재위 서기 24~57)

남해 차차웅의 태자이며 노례이질금(弩禮尼叱今)으로 삼국유사에서는 기록되었다. ()의 이름은 알 수 없고,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 박씨, 혹은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 혹은 사요왕(辭要王)의 딸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으며, 일지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한다.

이사금이라는 왕호는 이질금(尼叱今), 치질금(齒叱今)이라고도 쓰는데, 󰡐잇금(齒理,또는 나이의 순서)󰡑을 의미하는 신라 방언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사금시대 왕의 성격은 부족연맹장(部族聯盟長)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즉위 5(서기 28)에 민신을 살피다가 얼어 죽어가는 노파를 보고 최극빈층을 돌보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다음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였고, 차사(嗟辭)와 사뇌격(詞腦格)이 있었다. 또 보습과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즉위 9(32)6(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이들에게 이(), (), (), (), (), ()의 성()을 주었으며, 17관등(官等)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때 6부를 정한 기념으로 6부의 여자들을 두 편으로 갈라 길쌈을 짜게 하여 815일에 그 많고 적음을 보아 승부를 결정짓는 가배(嘉俳)놀이를 시켰는데, 이때 부른 노래가 회소곡(會蘇曲)이었다. 가배놀이는 우리 고유의 공동노동양식인 두레나 품앗이로 변천하였고 이것이 후일 여성 집단인 원화(源花), 남성 집단인 화랑(花郞)이 되었다.

즉위 14(서기 37)에는 고구려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하였고 그 낙랑의 피난민 5천여명이 귀순해왔다고 한다. 이 낙랑은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가 나오는 그 낙랑이다.

즉위 18(서기 42)에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 해에 고구려(高句麗) 군사가 침범해 왔다. 유리 이사금은 재위 34년 되던 해에 두 아들을 제치고 재능이 뛰어나다는 이유를 들어 매형인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잇게 하고 죽어, 사릉(蛇陵)에 묻혔다.

신라 5대 파사이사금(婆裟尼師金 재위 서기 80~112)

삼국사기에서는 파사왕의 출생에 대해 두 가지 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 유리이사금의 둘째아들로 태자 일성(逸聖)보다 인품이 뛰어나 즉위하였다고도 하고, 둘째, 유리이사금의 아우인 내로(奈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파사이사금의 어머니는 사요왕(辭要王)의 딸이고 왕비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사성부인(史省夫人, 혹은 史肖夫人)이다.

파사이사금이 유리이사금의 직계라면 탈해이사금 이후 왕위를 계승한 것이 문제가 없으나, 그가 내로(奈老)의 아들일 경우 월성(月城)에 기반을 둔 석씨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즉위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파사이사금은 즉위 2(서기 81) 2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3월에 주군(州郡)을 두루 돌며 위무하고, 창고를 열어 어려운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의 정상을 살펴 두 가지 사형죄[二罪]가 아닌 사람은 모두 풀어 주었다고 되어 있다.

한편, 내우외환에 대비하기 위해 즉위 3(서기 82) 봄 정월에 영()을 내려 말하였다. 지금 창고는 텅 비었고 병기는 무디어져 있다. 만약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있거나 변방에 변고가 있으면 무엇으로써 그것을 막겠는가?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게 하고 병기를 벼리어서 뜻밖의 일에 대비하라고 하였다 한다.

이 시기에 신라는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인들에게도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도 나타나 있다. 즉위 8(서기 87) 가을 7월에 영()을 내려 말하였다. 나는 덕이 없으면서도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여 있고 남쪽은 가야와 연접해 있다. 나의 덕은 능히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은 이웃 나라를 두렵게 하기에 부족하니 마땅히 성루(城壘)를 수리하여 침입에 대비하라.

이 달에 가소성(加召城)과 마두성(馬頭城)의 두 성을 쌓았다. 이 두 성은 신라가 금성을 벗어나 세운 최초의 국경방위시설이었다. 즉위 22(서기 101)에 월성을 쌓아 궁실을 옮겼다. 즉위 33(서기 112)에 죽자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 지냈다고 되어 있다.

오릉 내 조성 된 연못

일부 학계에서는 오릉, 사릉을 쿠데타 즉 반란의 결과로 보고 있다. 반란으로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왕비, 장남 등 직계가족이 처참히 살해되었고 7일이 지나서 시신을 찾을 수 있었으나 시신 훼손이 심하여 식별할 수 가 없었다. 이에 다섯 기의 능을 축조하여 시신을 각각 안치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오릉에서 바라본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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