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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咸安)은 6가야 중 아라가야의 나라이자 생육신 중 한사람인 조려(趙旅, 1420~1489)가 태어난 곳이다. 그리고 이 지역 토착 세거 성씨 중 함안(파산, 巴山) 趙氏가 있는데 조려는 함안 조씨이고 현재 대부분 어계(漁溪) 조려의 후손들이다. 군복IC에서 나와 국도 79번을 따라서 가다가 지방도로 1004번로 진입하여 원북 마을에 다다르면 도로 우측에는 서산서원, 조열 신도비각, 쌍절각 그리고 도로 좌측 청풍대(淸風臺)라는 언덕 옆에 채미정이 있다.  

군북면 원북 마을에 위치한 채미정(採薇亭)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온 후 조려(趙旅)가 여생을 보낸 곳으로 이곳 유림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1693년에 건립하였다. 6.25 전쟁 때 소실되었는데 1954년에 재건하였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八作)지붕 겹처마로 정면 2칸, 측면2칸의 방이 한가운데 있고 나머지는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연못이 있어 당시 조경 구조를 엿 볼 수 있다. 채미정 현판 오른편에 백세, 외편에 청풍이란 현판이 각각 있다.

어계(漁溪) 조려(趙旅)는 자가 주옹(主翁), 호는 어계은자(漁溪隱者),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단종 때 생육신[김시습(金時習),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중 한사람으로 계유정난 이후 세조의 왕위찬탈에 격분하여 조정을 등지고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당시 조려(趙旅)는 1453년(단종1)에 성균관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채미정( 採薇亭 ) 전경

고향에 온 후 조려(趙旅)는 스스로 어계처사(漁溪處士)라 하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는데 그의 시문(詩文)에 고사리를 뜯어 먹으면서 은둔생활(隱遁生活)을 하겠다는 의미의 구절이 있어 그의 삶을 엿 볼 수 있다. 어계(漁溪)는 함안 방어산에서 발원하여 원북으로 흘러가는 하천으로 원래 이름은 원북계(院北溪)이다. 조려가 계유정란 때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 하천이름을 어계라 칭하였다.

채미정 뒤편 언덕이 청풍대이고 문풍루가 보인다

채미(採薇)는 중국 주나라 무왕 때 상나라에서 주나라로 왕권이 바뀌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비(고사리처럼 생긴 나물)를 채취하여 연명하다가 이거마저 거부하여 아사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조려의 지절과 비견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채미정 앞쪽 멀리 보이는 산이 백이산(伯夷山)이다. 백이산(伯夷山, 369m)은 진주시와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이전 지명은 서산(西山), 쌍안산(雙安山)이었으나 후세 사람들이 백이산이라고 불렀다.

채미정 출입문

 

채미정 현판 오른편에 백세, 왼편에 청풍이란 현판이 있다.
채미정(採薇亭)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八作)지붕 겹처마로 정면 2칸, 측면2칸의 방이 한가운데 있고 나머지는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1699(숙종25)에 단종의 왕위가 복위되자 이조참판을 추증(追贈)하고 1703년 경상도 유생 곽억령(郭抑齡) 등이 상소를 올려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의 예에 따라 생육신인 조려 등도 사당을 세워 제향하도록 조정에 건의하여 1706년 생전에 기거하던 백이산 아래 함안군 원북동에 사당을 세워 김시습 등과 함께 제향하였다. 사당은 1713년(숙종 39)에 사액(賜額)되어 서산 서원(西山書院)으로 이름 지어졌다.

바람의 소리를 듣는 누, 청풍대 문풍루(聞風樓)으로 가는 길

1781(정조 5년)에 그의 정충(精忠)과 고절(高節)에 감격하여 그에게 이조판서란 벼슬과 정절공(靖節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려 그의 충혼(忠魂)과 의백(義魄)을 위로하였다. 저서로는 『어계집(漁溪集)』이 전한다. 서산 서원(西山書院)은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1902년에 어계의 중종과 유림들이 다시 서원을 건립하였다. 1984년에 사촌리에서 이곳 원북리로 이전하였다.

청풍대에 위치하고 있는 문풍루(聞風樓)

 

조려 묘(趙旅墓)는 함안군 법수면 강주리 응암 마을 입구 산기슭에 있다.

충의공(忠毅公)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와 쌍절각(雙節閣)

문풍루(聞風樓)에서 본 조종도 ( 趙宗道 )의 쌍절각(雙節閣)

조종도(趙宗道)의 쌍절각(雙節閣)은 정면2칸 측면1칸 팔작지붕의 다포집이고 채미정 도로 건너편에 있다. 쌍절각(雙節閣)에는 조종도와 그의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 비가 있는데 빛바랜 단청과 지붕 위의 와솔에서 충의(忠毅)와 열녀(烈女)의 절개가 느껴진다. 조종도(趙宗道, 1537]1597)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남명 조식의 대표적인 제자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쌍절각(雙節閣) 출입문

생육신(生六臣) 어계은자(漁溪隱者) 조려(趙旅)의 오세손으로 1537(중종 32) 함안 원북동(院北洞)에서 출생하여 1597(선조 30) 정유재란 당시 가족까지 이끌고 안의(安義)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인솔한 적군과 싸우다가 음력 818일 전사하였다. 그의 나이 둘째 아들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날 그의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도 자결하였다. 둘째 아들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쌍절각 ( 雙節閣 ) 은 정면 2 칸 측면 1 칸 팔작지붕의 다포집이다.
쌍절각(雙節閣)에는 조종도와 그의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 비가 있는데 빛바랜 단청과 지붕 위의 와솔에서 충의(忠毅)와 열녀(烈女)의 절개가 느껴진다.

1616(광해 8) 조정에서 충신증자헌대부(忠臣贈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충의공(忠毅公) 함양군수지문(咸陽郡守之門)이란 정려(旌閭)를 내렸고 1732(영조8) 그의 부인에게도 열녀충의공(烈女忠毅公) 조종도처(趙宗道妻) 증정부인(贈貞夫人) 전의이씨지문(全義李氏之門)으로 동상정려(仝上旌閭)를 내렸다.

충신조종도려표비
그의 부인 열녀충의공(烈女忠毅公) 비가 파손되어 더욱 애절하다.

조종도의 선비관은 만물 가운데 가장 영적인 존재가 사람이고, 사람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것이 선비이다. 국가에 재난이 있으면 관직의 유무를 막론하고 선비 된 사람은 평소 닦은 바대로 행하여 천 리의 당당함을 지켜야 한다. 세상을 잊고 자신만을 깨끗이 간직하는 것을 능사로 삼아 명예만 추구하려는 사람은 옳은 것이 아니며, 문무를 겸하고서 옳은 일에 몸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 올바른 선비이다.

고려 공조전서(工曹典書) 금은(琴隱) 조열(趙悅) 신도비각(神道碑閣)

금은(琴隱) 조열(趙悅) 신도비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의 다포집으로 후손들이 세운 비각이다. 충의공(忠毅公)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의 쌍절각(雙節閣) 옆에 자리 잡고 있다.

금은(琴隱) 조열(趙悅)선생의 신도비각 출입문
신도비각은 정면  3 칸 ,  측면  1 칸의 팔작지붕의 다포집이다.

조열(趙悅) 본관은 함안(咸安). 호는 금은(琴隱)으로 아버지는 판도판서 조천계(趙天啓)이다. 고려공민왕(恭愍王) 때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면서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등과 교유하였고,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함안으로 낙향하여 거문고와 서화로 소일하였다. 조선 건국 후 출사를 권유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또한 태조3년 한양궁이 준공되어 낙성연(落成宴)을 열면서 팔도에 명하여 금서가무(琴書歌舞)에 능한 조열을 초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조열(趙悅)은 아들 넷을 두었다. 큰아들 조이(趙彛)는 신호위(神虎衛)를 지냈고, 둘째 조녕(趙寧)은 현감을 셋째는 조항(趙恒)이고, 넷째는 조안(趙安)이다. 조안의 아들이 어계(漁溪) 조려(趙旅)이다.

함주지(咸州誌)인물조에서는 처음 함안의 평광(平廣)에 살다가 뒤에 산팔리(山八里) 원북동(院北洞)으로 옮겨 살았다고만 전한다. 조열의 행적은 맹사성(孟思誠)이 지은 만은(晩隱) 홍재(洪載)의 행장이 전해지면서 보다 자세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홍재의 행장에는 어느 날 밤 판서 성만용(成萬庸), 평리사(評理事) 변빈(卞贇), 박사 정몽주(鄭夢周), 전서 김성목(金成牧) 등이 대사성(大司成) 이색(李穡) 등과 함께 술을 마시며 회포를 논하였다. 이색이 말하기를 비간(比干)은 죽었고 미자(微子)는 떠났으며 기자(箕子)는 종이 되었으니, 우리도 각자 뜻을 따라서 처신하자.”고 하여 결의하였다고 한다.

홍재는 귀향하기로 마음먹고 삼가(三嘉) 대평촌(大坪村)으로 우거(寓居)하여 이곳을 두심동(杜尋洞)이라 하였다. 이때 함안에 우거하고 있던 조열과 이오가 이곳을 서로 왕래하면서 시사(時事)를 걱정하였다고 한다. 고려가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세 사람이 모여서 울며 비가(悲歌)를 부르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맥수(麥秀), 채미(採薇)의 비가와 비유하였다. 후인들이 그 의리를 흠모하여 운구 서원(雲衢書院)을 지어 봉향하였다고 한다.

저서로 문집인 금은 실기(琴隱實記)가 있고 묘는 함안군 군북면 하림1길 에 있다.

어계(漁溪) 조려(趙旅) 생가(生家

어계(漁溪) 생가(生家)는 조려가 태어난 집으로 벼슬을 포기하고 낙향한 뒤 은거했던 곳이다. 채미정(採薇亭)에서 마을길을 따라 15분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어계 생가(漁溪生家) 가는 길은 채미정(採薇亭)에서 마을길을 따라  15 분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
어계(漁溪)는 함안 방어산에서 발원하여 원북으로 흘러가는 하천으로 원래 이름은 원북계(院北溪)이다. 조려가 계유정란 때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 어계라 칭하였다.

어계 생가(漁溪生家)는 대문채, 원북재,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문채는 3칸으로 중앙의 솟을대문에 좌우에 방이 있다. 주 건물인 원북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일자형 평면으로 부엌은 없고 침실, 대청으로 되어 있어 별채이거나 사랑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건물 뒤편 사당에서는 3월 9일(초정일)에 조려와 그의 부인에게 항례를 치르고 있다. 그리고 어계(漁溪) 조려(趙旅)가 사용한 죽장(竹丈)과 동제향로(銅製香爐)가 보관되어 있다.

어계 생가(漁溪生家)의 대문채는 3칸으로 중앙의 솟을대문에 좌우에 방이 있다.

함안 조씨는 조정(趙鼎)을 시조로 하는 함안 지역의 토착 세거 성씨로 파산 조씨(巴山趙氏)' 라고도 한다. 시조 조정(趙鼎) 이후로 함안에 정착하여 대를 이어 살아서 함안 지역 최대의 성족(盛族)으로 발전한 성씨이다. 현재 함안에 세거하고 있는 함안 조씨는 대부분 어계조려의 후손들이다.

어계 생가에 있는 은행나무는 수령 500년, 수고 20m, 나무물레 340cm이다.

조정의 자는 우보(禹寶)이고, 호는 모당(慕唐)이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중국 후당인(後唐人)으로 신라 말에 두 아우 조부(趙釜)와 조당(趙鐺)을 데리고 한반도로 온 후 왕건(王建)을 도와 합천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931(고려 태조 14) 고창성(古昌城 지금의 안동)에서 후백제의 견훤(甄萱) 군사를 대파하여 동경(東京) 관할 하에 있던 주현(州縣)의 항복을 받아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그가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대장군 원윤(元尹)에 오름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함안을 본관으로 하였다.

문헌으로 고증할 수 있는 함안과 관계가 있는 최초 인물은 고려 말의 금은조열이다.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에 있는 함안 조씨의 문중 묘역에서 가장 윗대가 금은 조열이다.

원북(院北)은 본동, 태실[台谷], 새절골[新寺谷]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있고 지명은 어속원(魚束院)의 북쪽에 있다 하여 원북이라 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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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양지(位良池)는 밀양 부북면 위양리 동쪽에 위치한 저수지로 가운데에 5개의 작은 섬과 정자로 구성되어 있고 신라시대 때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된 저수지다. 이 저수지의 물로 아래쪽에 있는 넓은 들판에 물을 대어 위양리 일대에 농사를 지었다. 백성들을 위한다는 의미에서 위양지(位良池)라고도 하고 또는 양양지(陽良地)라고도 부른다.

위양지의 제방(堤防) 둘레는 원래 1.7km에 달하는 저수지였으나 지금은 수리구역(水利區域)의 제방으로 바뀌어 제방 길이가 160m 로 줄어들었다.

위양지 작은 섬에 있는 정자, 완재정(宛在亭)

밀주구지(密州舊誌)"위양동 조(位良洞 條)"에 의하면 인조 12(1634)에 임진왜란으로 훼철(毁撤)된 제방을 부사(府使) 이유달(李惟達)이 수축(修築)한 기록이 남아 있다.

완재정(宛在亭)은 위양지 작은 섬에 있는 정자로 정면 3, 측면 2칸 크기에 팔작지붕 건물로 온돌방과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고 입향조(入鄕祖)인 안동 권씨 위양 종중의  학산(鶴山) 권삼변(權三變, 1577~1645)을 추모하기 위해 1900년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당시 권삼변은 위양지 섬 중에 한곳에 정자를 세우고 싶어 미리 완재(宛在)라는 정자 이름까지 지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250년 지난 후, 안동 권씨 후손들이 섬 위에 정자를 지었고 이름도 완재정(宛在亭)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완재정(宛在亭)에 배로 출입했으나 후대에 다리를 놓아 아무 때나 접근이 가능토록 되었다.

 매년 5월이면 위양지 제방은 이팝나무 꽃이 만발하여 꽃구름을 만들고 멀리서는 흰 눈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한번 핀 꽃은 20일 이상 은은한 향기를 발산하여 천지를 진동시킨다. 또한 팽나무, 왕버들 나무가 조화롭게 심어져 있어 싱그러운 녹음과 하얀 꽃 세상을 만든다.

이팝나무는 소복이 쌓인 꽃송이가 사발에 얹힌 흰 쌀밥처럼 보여서, 조선시대 왕족이나 양반 李氏들만 먹는다고 이밥나무로 불렷다가 이팝나무으로 변했다. 또는 꽃이 입하 때 핀다하여 입하목(入夏木)으로 불렸다가, 입하가 연음되어 이파, 이팝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고욤나무

이팝나무는 한해의 풍년을 점치는 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꽃이 많이 필 때는 그해는 풍년이고 적게 필 때는 흉년이 든다고 한다.

이팝나무와 관련 전설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열여덟에 시집온 착한 며느리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시부모님께 순종하며 쉴 틈 없이 집안일을 하고 살았지만 시어머니는 끊임없이 트집을 잡고 구박하며 시집살이를 시켰다. 온 동네 사람들은 이 며느리를 칭송하는 한편 동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큰 제사가 있어 며느리는 조상들께 드리는 쌀밥을 짓게 되었다. 항상 잡곡만 짓다가 모처럼 쌀밥을 지으려니 혹 밥을 잘못지어 시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을 것이 겁난 며느리는 밥에 뜸이 잘들었나 밥알 몇 개를 떠서 먹었다. 그러나 공교롭게 그 순간 시어머니가 부엌에 들어왔다가 그 광경을 보고 제사에 쓸 멧밥을 며느리가 먼저 퍼먹는다며 온갖 학대를 하였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며느리는 그 길로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어 죽었고 이듬해 이 며느리가 묻힌 무덤가에서 나무가 자라더니 흰 꽃을 나무 가득 피워냈다. 이밥에 한이 맺힌 며느리가 죽어서 된 나무라 하여 동네 사람들은 이 나무를 이팝나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봄꽃이 만발하는 5월에 위양지 흰꽃구름속의 제방길 산책은 꽃 향기에 취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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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고속도로 군북 IC에서 빠져나와 의령을 향해 출발하면 먼발치에서 맞이하는 것이 의령관문이고 의령교로 건너는 강이 남강(南江)이다. 그리고 가마솥을 닮은 바위 하나가 남강에 있으니 그 이름이 솥 바위(정암 : 鼎巖). 그래서 의령을 찾는 여행객이면 먼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의 승전지인 정암진과 솥 바위를 둘러보는 것이 좋다.

정암 철교와 의령교

정암진은 정암루(鼎巖樓)에서 둘러보는 것과 정암 철교 인도에서 바라보는 것이 각각 즐거움이 다르다. 솥 바위 또한 원거리와 근거리에서 보는 맛이 다르다. 일찍이 남강은 뛰어난 경치로 인해 선비와 가객들이 찾아 시를 읊고 자연을 노래했으리라. 또한 나룻배를 타고 왕래했던 교통의 요충지였던 정암진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왜적을 몰살시킨 승전지로 유명하다.

정암 철교

정암 철교는 경남 의령군과 함안군을 연결하는 교량으로서 1935년에 준공되었다. 6.25전쟁으로 파괴된 후 1958년 남아있던 2개의 경간을 그대로 살려 상부는 철골트러스 형식으로 재건하였다.

정암루(鼎巖樓)

정면 3, 측면 2칸 팔작지붕 겹처마 익공양식의 정암루는 자연암반 위에 장대석 기단을 놓아 지어졌다. 기둥은 원기둥으로, 누하주는 화강석을, 누상주는 목재를 사용하였다. 계단은 전면 중앙 한 곳에 두었고 기둥 상부 공포는 연화로 장식된 이익공을 결구하여 겹처마로 구성하였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계자난간을 둘렸다.

현재 정암루 자리는 조서 중기 대제학을 지낸 용재(容齋) 이행(李荇)이 귀양살이를 하며 지은 취원루(聚遠樓)가 있었던 곳으로 1935년 임진왜란 승첩지를 기리고자 지었다. 그 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정암루가 소실되었으나 1963년에 재건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정암진(鼎巖津, 정암나루) 전투

남강은 함양군 서상면 남덕유산에서 발원하여 진주시를 거쳐 함안군과 의령군의 경계를 따라 흐르다가 낙동강에 합류한다낙동강과 더불어 일찍 뱃길이 열렸던 남강은 임진왜란 때 왜적이 호남으로 진출하는 침략의 길이 되었고 의령의 관문인 정암진은 홍의장군 곽재우의 최대 승첩지 중 하나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장군은 1592(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같은 해 5월 의령 정암진(鼎巖津)에서 왜적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의병 활동 초기에는 의령 정암진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 본부를 두고 의령을 고수하면서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삼으면서 유사시에 대처하였다. 당시 곽재우는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에게 위엄을 보였으며, 의병(疑兵, 적을 혼란스럽게 하는 위장 병사)을 둔 위장 전술과 적을 유인하는 매복 작전, 그리고 유격전 등을 펼쳐 가며 적을 섬멸하였다.

정암 철교에서 바라본 정암루와 솥 바위

의병 활동 초기에는 의령 정암진(鼎巖津)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 본부를 설치하여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삼아 유사시에 대처했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疑兵, 적이 의심하도록 하기 위한 위장 병사)을 구사해 위장 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했다. 그리고 적을 유인해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솥 바위는 임진왜란 당시의 격전지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1592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적을 맞아 2,000인에 이르는 병력을 휘하에 거느리고 대승을 거둠으로써 왜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정암 철교에서 바라본 정암진

정암(鼎巖, 솥바위)

정암(鼎巖)은 가마솥 다리처럼 세 개의 다리를 뻗고 물 위에 드러난 암석이 마치 솥뚜껑처럼 보인다고 해서 생긴 명칭이고 솥바위라고 부른다. 한자로 정()'솥 정'이라 하고, ()'바위 암'이다외형을 살펴보면 약 20ton 가량의 커다란 바위가 아래를 받치고 있고, 그 위로 높이 8m가량의 작은 바위가 탑 층을 이루고 있다조선 말기 한 도사가 이 바위 수면 아래 세 개의 발이 가리키는 주변 20(8)에 큰 부자가 나올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북쪽 의령군 정곡면에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 남쪽 진주 지수면에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 GS그룹 창업주 허만정 회장, 동남쪽 함안 군북면에 효성 창업주 조홍제 회장 등 4명의 재벌 총수가 태어났다. 그래서 창업과 입시를 목전에 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기도를 한다. 의령에는 부와 성공을 상징하는 3대 바위가 있는데  "솥 바위", "탑 바위"와 "코끼리 바위"이다.

여기서 이병철 생가 정곡면 중교리 까지는 9.410여분 정도 소요된다그곳에서 태어난 이병철은 결혼해 분가하기 전까지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 회장도 의령 친할머니 슬하에서 3살까지 자랐다. 1,907(577) 크기의 생가는 남서향으로 크게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된 한옥이다. 대문에서 오른쪽으로는 큰 바위가 있고, 뒤쪽으로 대나무 숲이 있는 구조다. 마당에는 안채 쪽과 대문 쪽에 2개의 우물이 있고 곳곳에 벽오동과 회화나무가 있다.

지수면 승산리 지수초등학교에는 1921년 개교 당시 1회 입학생이던 LG 창업주 구인회 회장, 효성 창업주 조홍제 회장,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함께 심고 가꾼 소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부자 소나무'로 불린다. 지수초등학교는 학생 수 감소로 2009년 인근 송정초교와 통합됐다. 옛 지수초교는 ‘K-기업가정신센터로 변모했다.

창업주 4인의 인연

조홍제 회장은 유년 시절 의령에 있는 이병철 회장의 형 이병각과 교류를 많이 해 자연스레 친구 동생인 이병철 회장도 알게 됐다. 이병각은 진주에서 제분업 사업을, 마산에서 양조장 사업도 했다. 이병각의 장인 하겸진은 진주 수곡면 출신이다. 조홍제 회장의 장인 하세진 역시 진주 수곡면 출신으로 하겸진과는 친척이다. 조홍제 회장은 해방 후 이병철 회장이 서울에서 설립한 삼성물산공사에 투자를 해 동업을 했다.

조홍제 회장과 구인회 회장과의 관계는 동네 대항 축구 시합을 하면서 교류해 이웃한 마을 친구로 지냈다. 서울에 있는 중앙고등학교 2학년까지 함께 보냈다. 그 후 각자 사업을 하면서도 교류는 왕성해 구인회가 플라스틱 연구를 할 때 일본에서 도서를 구입해 주는 등 구씨 집안과 아주 절친한 관계로 지내왔다.

구인회 회장과 이병철 회장은 1922년 지수보통학교 3학년 1학기를 함께 공부했다. 이병철 회장이 생활한 매형 집이 구인회 회장 본가와 옆집이라 일찍 결혼한 구인회 회장이 의령에서 유학 온 이병철 회장을 불러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1957년 구인회 회장의 3남 구자학과 이병철 회장의 차녀가 결혼해 두 사람은 사돈 관계가 되었다. 1960년대 두 사람은 방송사업 동업을 한 인연도 있다.

허만정 회장은 194512, 부산에서 무역업을 하던 구인회 회장을 찾아가 사돈이 하는 사업에 자금을 투자하겠소, 그리고 내 셋째 아들 준구를 맡기겠소.” “준구야, 경영은 구씨 집안이 잘한다. 나서지 말거라하는 가르침을 남겼다이것이 구씨와 허씨의 첫 공동사업의 진행이고 LGGS로 분리하기까지 50년 넘게 불협화음이 없었다.

허만정 회장은 이병철 회장이 부산에서 제일제당을 경영할 때 장남 허정구를 보내면서 삼성에도 자본을 투자했다. 이병철 회장의 매형 허순구가 이웃한 집 허만정 회장과 친척이라 자연스레 이병철 회장과 허만정 회장이 연결된 것으로 보여 진다. 조홍제 회장의 처남 하영진은 허만정 회장의 유고집에 조카관계로 기록되어 있다. 조홍제 회장과 허만정 회장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의령 여씨(宜寧 余氏) 시조제단비(始祖祭壇碑)와 향제시도록(享祭時到錄)

의령 여씨 시조 제단비는 정암루 동쪽 절벽 아래 솥바위 가는 길에 위치하며 의령 여씨 시조 여선재에게 제사를 지내 던 제단에 세워진 비석이다. 1807년에 세워진 비석에는 여선재를 우음곡에 모셨다는 족보의 내용 바탕으로 묘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끝내 찾지못 하였고 우음곡과 뜻이 비슷한 지금의 위치에 제단 비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글은 대사간을 지낸 의성인 김한동(金翰東)이 짓고, 글씨는 단성에 거주하던 선비 합천인 이의선(李宜璿)이 쓴 것이다.

향제시도록의 표제는 시도기(時到記)로 되어 있고 책등에는 향제시도록이라 적혀 있으며, 필사본이다. 여중묵(余重默)의 친필로 보이는 비단일록서(碑壇日錄序)2면이 권두에 실려 있으며, 1면에 178행씩 적혀 있다그 뒤 정서(淨書)되어 있는 본문은 1면당 총 10(평균적으로 120자씩 기록)으로 총 461면이다. 책의 내용은 비단일록 및 시도기의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체 461면 가운데, 비단일록은 4-19면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시도기에 해당하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비단일록은 여중묵이 안동을 출발하는 때인 1807226일로부터 의령 정암에 비석을 세우는 일자인 동년 124일까지 일의 진행 과정 및 관련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다. 1807년으로부터 1943년까지 총 136년간의 기록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 제향과 관련한 지역별 종회의 참여율, 소요된 경비 및 출자 금액 등의 경제 상황, 의령 여씨 가문의 봉선(奉先) 의식 등을 사적인 흐름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써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82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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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은 의병의 고장으로 곽재우 장군이 태어났고 장군을 기리는 유적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충익사(忠翼祀)와 현고수(懸鼓樹), 정암나루 그리고 생가이다. 충익사는 곽재우 장군과 7장령의 위패를 모신 곳이고 현고수는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큰북을 매달아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義兵)을 모았다는 느티나무이다. 그리고 정암나루는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대승을 거둔 곳이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장군과 17장령의 위패를 모신 충익사(忠翼祀)

남해 고속도로 군북 IC에서 내려 10분 가량 달리면 남강을 만난다. 이 남강을 건너면 의령군 하리이고 정암나루와 의령관문을 통과하여 의령천을 따라가면 맞이하는 것이 충익사다. 먼저 의령천 둔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의병교를 건너면 양쪽 기둥을 세워 둥근 고리로 층층이 쌓은 의병탑이 푸른 숲을 뚫고 그 위용을 자랑한다. 매년 의병제 개최 시 의병교와 의병탑을 화려한 오색불꽃으로 장식한다.

양쪽 기둥을 세워 둥근 고리로 층층이 쌓은 의병탑. 매년 의병제 개최 시 의병교와 의병탑을 화려한 오색불꽃으로 장식한다.

충익사는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던 망우당 곽재우 홍의장군과 17장령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충익사는 19781222일에 준공하였고 충익(忠翼)은 숙종이 곽재우 장군에게 내린 시호로서, 은 나라에 충절을 다하고 은 생각이 깊고 멀다는 뜻이다.

충익사 충의문

충익사 충의각(忠義閣,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2)곽재우 장군과 장군 17의 이름, 본관, , 벼슬 등이 적힌 명판을 보관한 곳이다. 원래 이 건물은 1910년도 합천 이씨 문중에서 의령읍 동동리의 관찰사를 지낸 이중하를 기리는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을 1972년 재부산향우회에서 이를 매입하여 이곳으로 옮겨왔다. 앞면 2칸 옆면 1칸 다포양식의 팔작지붕으로 공포의 높이가 매우 높고 화려하며 지붕면적도 넓다. 극락세계에 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상여모양을 본떠 지은 건물이다. 충의각은 어느 한 곳에도 쇠못을 치지 않은 우리나라 전통 목조건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충의각(忠義閣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522 호)은 극락세계에 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상여모양을 본떠 지은 건물이다 .
충의각은  곽재우 장군과 장군  17 의 이름 ,  본관 ,  호 ,  벼슬 등이 적힌 명판을 보관한 곳이다

모과나무(경상남도 기념물 제83) 높이 12m, 밑둘레 4m, 가슴높이 둘레 3.1m로 수령은 약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이는 지금까지 조사된 모과나무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모과나무는 원래 가례면 수성마을을 지켜주고 보호하던 당산나무로 토속신앙의 대상이었으나 1978년에 충익사로 옮겨졌다.

모과나무 ( 경상남도 기념물 제 83 호 )
주목나무로 박정히 전 대통령이 기념식수(1978.12.22)한 나무다.

유곡면 세간리 현고수(懸鼓樹, 천연기념물 제493)

세간리 현고수는 유곡면 세간마을 앞에 위치하고 있는 느티나무로, 나이는 55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15m, 둘레는 7m이다. 이 느티나무가 현고수(懸鼓樹)라고 불리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연유가 있다.

조선(朝鮮) 선조(宣祖) 25(1592) 413일 왜적이 부산포로 침입하자 당시 41세의 유생이었던 곽재우가 422일 이곳 유곡면 세간리 이 느티나무에 큰 북을 매달아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義兵)을 모아 훈련을 시켰다고 하여 이때부터 현고수로 불렸다고 한다.

세간리 현고수(懸鼓樹, 천연기념물 제493호)

망우당 곽재우 생가와 세간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2)

곽재우 생가와 세간리 은행나무

망우당 곽재우 생가는 2005년에 복원한 것으로 조선 초기 건축양식으로 안채, 사랑채, 별당, 큰 곳간, 작은 곳간, 대문, 문간채등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양반가의 집이다. 1592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9일째 되는 날 이곳 곽재우 생가가 있는 마을에서 곽재우장군을 비롯한 17장령들과 함께 책과 붓을 던지고 가재를 던지고 의병을 일으켰다.

망우당 곽재우 생가는  조선초기 건축양식으로 2005 년에 복원함

곽재우(郭再祐)[1552~1617]는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다. 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낸 곽월(郭越), 어머니는 목사(牧使)를 지낸 강응두(姜應斗)의 딸 진주 강씨(晉州姜氏)와 참봉(參奉)을 지낸 허경(許瓊)의 딸 김해 허씨(金海許氏)인데, 곽재우는 진주 강씨의 소생이다. 곽재우의 부인은 만호(萬戶)를 지낸 김행(金行)의 딸 정부인 상산 김씨(商山金氏)이다.

곽재우(郭再祐)1552(명종 7) 경상도 의령현(宜寧縣) 세간리(世干里)에서 출생하였는데 세간리는 곽재우의 외가가 있는 곳으로, 원래 곽재우의 선대는 경상도 현풍현 솔례리(率禮里,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리)에 세거해 왔다. 곽재우는 어려서부터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독서를 즐겼다고 한다. 1569(명종 22) 의령현 세간리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는데, 공부를 하다 여가가 생기면 활쏘기와 말타기를 하거나 병서(兵書)를 익혔다. 1574(선조 7)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부임한 아버지 곽월을 따라 2년 간 배행하였으며, 1578(선조 11)에는 동지사(冬至使)로 임명된 아버지와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관상 보는 사람이 곽재우를 보고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칠 것이라 하였다.

사랑채

1586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묘소가 위치한 신당동(新堂洞,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에서 여묘 살이를 하였다. 1589년 상사(喪事)가 끝난 뒤에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의령현의 기강(岐江) 돈지(遯池)[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마산리]에 정자를 짓고 한평생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안채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즉시 사재를 털어 장사들을 모집한 뒤 의병을 일으켰다. 곽재우는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이름 짓고 위엄을 보이었다. 곽재우는 우선 의령현의 신번현(新繁縣)[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일대]을 왜적으로부터 지켰으며, 이후 연전연승하였다. 곽재우는 처음 의병을 일으켰을 때 군사가 적었으므로, 매복전을 통해 왜적을 물리치니, 이들이 곽재우를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렀다. 특히 곽재우는 1592년에 정암진(鼎巖津) 전투와 제1차 진주성(晉州城) 전투에서 승리하여, 전라도를 수호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617년 세상을 떠났는데, 묘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에 있다.

곳간채

세간리 은행나무는 수령 6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높이 24.5m, 둘레 9.1m이다. 마을의 동편 의병장 곽재우 생가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을 지켜주는 신성한 나무로 믿어지고 있다. 특히 남쪽가지에서 자란 두 개의 짧은 가지(돌기)가 여인의 젖꼭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젖이 나오지 않는 산모들이 찾아와 정성들여 빌면 효력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세간리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제 302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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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기수원지는 양산시 동면 법기리 340번지에 위치한 수원지로 일제 강점기 때인 1927년에 착공하여 1932년에 준공한 흙댐으로 건립한 수원지다수원지의 최고 수위는 197.23m, 수심 14.7m, 높이 21m, 길이 260m, 둘레 6m이다. 총저수량 157만 톤으로 현재 수원지의 물은 범어사 정수장으로 보내어 정수된 뒤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노포동, 청룡동, 남산동 일대 약 7,000여 세대에 공급하고 있다.

법기 수원지는 건립 이후 일반인에게 출입이 금지 되었으나 20117월 수원지 전체 68중에서 둑 주변과 수림지” 2만여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개방 이후 많은 관광객이 찾아와서 수목의 아름다움을 만끽 느끼고 간다. 이곳의 동식물 보호를 위해 음식물 반입을 금지하고 있다. 처음 왔을 때는 다람쥐 무리를 자주 보았는데 두 번째 왔을 때는 다람쥐는 보이지 않고 청설모가 보였다.

히말라시다(개잎갈나무)는 수령 98년으로 원산지가 히말라야 산맥으로 주로 히말라야 산맥 서부와 아프가니스탄 동부에 분포하고 있다. 평균 높이는 30m로 관상수로 이용되고 있다.

법기 수원지 안으로 들어서면 거대하고 장대한 히말라시다(개잎갈나무)에 압도되어 감탄사를 연발케 한다. 수령 98년으로 원산지가 히말라야 산맥으로 주로 히말라야 산맥 서부와 아프가니스탄 동부에 분포하고 있다. 평균 높이는 30m로 관상수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 수원지 수림지에는 히말라시다 59그루, 편백 413그루, 가래(추자)나무 25그루, 반송 14그루, 벚나무 131그루, 은행나무 3그루, 감나무 1그루 등 총 7644그루가 자라고 있다.

인간에게 유익한 피톤치드로 유명한 편백나무도 높이 30m로 수령 98년이다. 그리고 가래나무는 높이 20m로 수령 또한 98년이다. 댐 마루에 있는 7그루의 반송은 수령이 88년에서 138년으로 칠형제반송이라 부르고 있다.

당시 법기수원지 관사를 화장실로 개조하여 사용 중
반송나무
댐 마루 칠형제반송을 향하는 하늘계단(123개의 계단). 댐 마루에 있는 7그루의 반송은 수령이 88년에서 138년으로 칠형제반송이라 부르고 있다.
법기 수원지의 최고 수위는  197.23m,  수심  14.7m,  높이  21m,  길이  260m,  둘레  6m 이다 .  총저수량  157 만 톤으로 현재 수원지의 물은 범어사 정수장으로 보내어 정수된 뒤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  노포동 ,  청룡동 ,  남산동 일대 약  7,000 여 세대에 공급하고 있다 .
멀리 보이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취수탑
댐 마루 칠형제반송 중 한그루

수목의 수려한 모습과 수원지의 조화로 절경을 이루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과거 부산 군수 사령관 때인 19606월에 이곳에 와서 낚시를 하며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취수터널 상부에는 일제강점기 2차례(3, 5)의 조선 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트가 준공식(1932) 때 석각한 글로 원정윤군생(源淨潤群生)이 있다. 의미는 깨끗한 물은 많은 생명체를 윤택하게 한다.”이다. 사이토 마코트는 3대 조선 총독으로 있을 때 문화정치로 민족말살 정책의 장본인으로 독립운동가 강우규 의사의 폭탄투척에 살아남은 자이다.

사이토 마코트가 3대 조선 총독로 191992일 취임할 때 남대문 역에서 사이토 마코트의 마차에 강우규 의사가 폭탄투척을 하였으나 수행원, 일본경찰 등 37명의 사상자만 나왔다. 당시 강우규 의사의 나이는 65세였다 거사 15일 뒤 일본순사에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사이토 마코트는 1936년 일본군부의 급진파 청년장교에 의해 친영미파로 지목되어 암살되었다.

취수터널 입구이며 석축상부에는 일제강점기 2차례(제3대, 5대)의 조선 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트가 준공식(1932년) 때 석각한 글로 원정윤군생(源淨潤群生)이 있다. 의미는 “깨끗한 물은 많은 생명체를 윤택하게 한다.”이다.
인간에게 유익한 피톤치드로 유명한 편백나무도 높이 30m로 수령 98년이다.
가래나무는 높이 20m로 수령 또한 98년이다
가래나무와 반송이 하늘을 덮고 있다.

동면(東面)의 유래는 양산읍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법기는 1897년 본법과 창기 마을이 합쳐져 만들어졌고 본법마을은 그 이전에 본의곡이라 불렀으며 1872년에 본의리, 그 후 본법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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