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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문무대왕면 나아리(羅兒里) 월성원자력본부 후문 공원 남서쪽 소나무숲에 신라석씨탈해왕탄강유허비(新羅昔氏脫解王誕降遺墟碑)와 비각(碑閣)이 있다. 1845(헌종 11) 조정에서 하마비와 땅을 하사하자 석씨 문중에서 유허비(遺墟碑)와 비각(碑閣)을 건립하였다.

장사랑(將仕郞) () 장릉참봉(莊陵參奉) 여강(驪江) 이종상(李鍾祥)이 비문을 지었고, 통훈대부 전 행사간원정언문신겸선전관(通訓大夫前行司諫院正言文臣兼宣傳官) 여강(驪江) 이재립(李在立) 글씨를 썼다. 비는 화강암으로 비신 높이는 113, 너비 46, 두께 24로 비문은 해서체다.

내용은 마멸이 진행 중이서 탁본으로 알 수 가 있다.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845년(헌종 11) 조정에서 하사한 하마비

 비각 안에는 1847년 경주부윤 이시우(李時愚)가 지은 신라탈해왕탄강유허비각기(新羅脫解王誕降遺墟碑閣記)와 이능항(李能恒)이 지은 신라탈해왕탄강유허비각중수기(新羅脫解王誕降遺墟碑閣重修記)가 있다.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왕은 본래 파나국(婆那國)의 왕자로 회임된 지 7년만에 큰 알로 태어났다. 왕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버리라고 명하자 왕비가 금궤에 담아 바다에 띄웠는데, 진한(辰韓)의 아진포(阿珍浦)에 정박하게 되었다.

한 노파가 알 속에서 아이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데려다 길렀다. 이 사람이 바로 탈해왕이다. 정박하고 있을 때, 까치가 알렸으므로 작()에서 조()를 떼어내고 성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신라석씨탈해왕탄강유허비(新羅昔氏脫解王誕降遺墟碑)는 장사랑(將仕郞) 전(前) 장릉참봉(莊陵參奉) 여강(驪江) 이종상(李鍾祥)이 비문을 지었고, 통훈대부 전 행사간원정언문신겸선전관(通訓大夫前行司諫院正言文臣兼宣傳官) 여강(驪江) 이재립(李在立) 글씨를 썼다.

왕의 이름은 탈해(脫解)인데, 옛날에는 시호가 없었기 때문에 탈해왕이라고 칭하였다. 당초 진한(辰韓)6(六部)에 군장이 없었는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처음으로 나라를 건국하여 서라(徐羅)라고 칭하였다.

차차웅(次次雄) 때 탈해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딸과 결혼을 시켰는데, 죽음에 임박하여 아들인 유리(儒理)를 두고 탈해에게 선위하였다. 탈해는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유리(儒理)를 왕으로 세우고 보필하여 백성들이 부강을 누리게 되었다.

1847년 경주부윤 이시우(李時愚)가 지은 신라탈해왕탄강유허비각기(新羅脫解王誕降遺墟碑閣記)
이능항(李能恒)이 지은 신라탈해왕탄강유허비각중수기(新羅脫解王誕降遺墟碑閣重修記)

유리가 사망하자 나라 사람들은 선왕의 명이라는 이유로 탈해를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다. 호공(瓠公)을 재상으로 삼고 또 시림(始林 : 계림의 옛 이름)에서 알지(閼智)를 얻었다. 알지는 계림씨(雞林氏 : 金氏)의 조상이다. 탈해는 세상을 떠나면서 유리의 아들 파사(婆娑)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4대 뒤에 탈해의 손자 대휴(伐休)가 또 왕위를 이었으니 계림씨와 번갈아가며 왕위를 물려주게 된 것이다. 석씨는 모두 8명의 왕이 나왔고, 3성이 향유한 서라는 1000년 동안 다스려졌다. 이는 옛 역사에서 말하는 3대에도 없었던 일이다.

이곳 나아리(羅兒里)는 삼국유사 석탈해 탄생설화에 나오는 아진포(阿珍浦)와 관련 있다. 신라 육부촌 때 금산가리촌은 이곳 문무대왕면 일대를 포함하고 있는데 서촌(瑞村)이라고 불렀고 이곳 중 아진포(阿珍浦)를 아서(阿瑞, 兒瑞)라고 불렀다. 나아(羅兒)도 이와 관련해서 불러지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현재 아진포(阿珍浦)는 월성원자력 건설 때 발전소 부지에 포함되어 볼 수가 없다.

월성원자력 건설 전 아진포 모습

석탈해가 탄 배가 도착한 홈바우는 홈이 패어있는 홈돌이라고도 하는 바위로 장아(長阿) 앞 바닷가에 있었는데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설 때 부지에 포함되어 사라졌다.

나아 바닷가

이 밖에 석탈해 탄생설화와 관련 된 마을 지명이 수아(收兒)장아(長阿)가 있다. 수아(收兒) 석탈해를 거두어들인 곳이라 하여 "수아" 혹은 "수애"라고 불렀다. 장아(長阿) 석탈해가 장성하기까지 자라던 언덕이라 하여 "장아"라 하는데 여기 또한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설 때 부지에 포함되었다.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설 전 나아마을 전경

삼국유사 기이 4대 탈해왕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 토해니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함)은 남해왕(南解王) 때 가락국(駕洛國) 바다 가운데에 배 한 척이 와서 닿았다. 이것을 보고 그 나라 수로왕(首露王)이 백성들과 함께 북을 치고 법석이면서 그들을 맞아 머물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배는 나는 듯이 계림(鷄林)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의 아진포(阿珍浦)로 달아났다(지금도 상서지촌上西知村하서지촌下西知村의 이름이 있다). 이때 마침 포구에 한 늙은 할멈이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고 하였는데 이가 바로 혁거세왕(赫居世王)의 고기잡이 할멈이었다.

그는 이 배를 바라보고 말했다. “이 바다 가운데에는 본래 바위가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까치들이 모여들어서 우는가.”

배를 끌어당겨 찾아보니 까치들이 배 위에 모여들었다. 그 배 안에는 궤 하나가 있었다. 길이는 20()이오. 너비는 13척이나 된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밑에 매어 두었다. 그러나 이것이 흉()한 것인지 길()한 것인지 몰라서 하늘을 향해 고했다.

이윽고 궤를 열어 보니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가 하나 있고 아울러 칠보(七寶)의 노비(奴婢)가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을 7일 동안 잘 대접했더니 사내아이는 그제야 말을 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이오(정명국正明國 혹은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琓夏는 또 화하국花厦國이라고도 하니, 용성龍城은 왜국倭國 동북쪽 1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

우리 나라에는 원래 28 용왕(龍王)이 있어서 그들은 모두 사람의 태()에서 났으며 나이 5, 6세부터 왕위(王位)에 올라 만민(萬民)을 가르쳐 성명(性命)을 바르게 했소. 팔품(八品)의 성골(姓骨)이 있는데 그들은 고르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소. 그때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王女)를 맞아 왕비(王妃)로 삼았소.

오래 되어도 아들이 없자 기도를 드려 아들 낳기를 구하여 7년 만에 커다란 알[] 한 개를 낳았소. 이에 대왕은 모든 신하들을 모아 묻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았으니 고금(古今)에 없는 일이다.

이것은 아마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그 속에 넣고 칠보와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뒤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아무쪼록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한 길을 이루도록 해 주시오했소. 빌기를 마치자 갑자기 붉은 용이 나타나더니 배를 호위해서 지금 여기에 도착한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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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옛길은 산성산과 일광산 사이 기장읍 서부리 용소골에 있는 계곡 길이다. 용소골 지명은 옛날 이곳에서 용이 났다고 하여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 골짜기는 청강천 상류계곡에 해당되고 하류에는 둑을 막아 만든 용소골저수지가  있고 주변은 용소웰빙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기장초등학교 자리에는 옛날에 기장 동헌이 있었는데 동헌에서 남으로 큰 길을 만들고, 길의 동쪽은 동부동(東部洞), 서쪽은 서부동(西部洞)이라 하였다. 1914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서부동 일부가 서부리로 되었다,

용소윌빙공원 입구에서 바라본 산성산(성산)
용소웰빙공원 입구. 직진방향으로 저수지와 나란히 조성 된 길을 따라가면 기장 옛길 이정표를 만난다.

기장 옛길은 신라 갑화양곡현(505년)에서 비롯하여 이전 선사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이 넘나들던 유서 깊은 길이자 기장의 관문길이다. 옛날 용소 계곡 길의 상류 지역은 험한 바윗길로서 사람이나 우마차의 통행이 어려워 잔도(棧道)를 만들어 이용하였다. 이 옛길은 지역 주민들의 나들이 길이자 양산, 동래, 김해를 비롯하여 멀리 서울을 내왕하던 관리와 백성, 그리고 장꾼, 보부상, 남사당 등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었고 대한제국 말기까지 존속된 길이였다. 이 길은 일제강점기 때인 1932년 동래~기장간의 신작로 개설로 자연히 폐도 되었다. 최근 기장군에서는 이 옛길(약 200m)을 문화유적지 차원에서 보존 및 관리해 왔고 잔도(棧道)도 재현시켰다.

부산포항고속도로 교각 밑에 세워진 기장 옛길 안내 표지판
최근 기장군에서는 이 옛길(약 200m)을 문화유적지 차원에서 복원한 기장 옛길 입구

기장 옛길을 답사하기 위해서는 산성산 또는 성산 북쪽에 위치한 용소웰빙공원에 찾아오면 된다. 용소웰빙공원 입구에서 직진방향으로 저수지와 나란히 조성 된 길을 따라가면 부산포항고속도로 교각 밑을 지나다 되는데 산기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농막과 밭을 만난다. 5분 정도 걸어가면 기장 옛길 표지석을 마주하게 된다. 짧은 구간의 한적한 옛길을 거닐다 보면 조선시대 기장에서 군수 및 현감을 지낸 이해륜(李海崙), 엄신영(嚴信永), 손영희(孫永禧), 손경현(孫慶鉉), 오영석(吳榮錫), 송재우(宋載遇), 이경우(李敬佑) 등 7명이 1751년부터 이임으로 떠날 때 계곡 수 좌측 바위와 길 우측 바위에 이름을 새긴 것을 볼 수 있다. 이들 중 엄신영(嚴信永)과 손경현(孫慶鉉)은 시랑대에도 각석(刻石)을 하였다.

맨 먼저 볼 수 있는 각석은 군수(郡守) 이해륜(李海崙)으로 계곡 수 건너편 바위에 행(行) 군수(郡守) 이해륜(李海崙)을 새겼다.
행(行) 군수(郡守) 이해륜(李海崙)

맨 먼저 볼 수 있는 각석은 군수(郡守) 이해륜(李海崙)으로 계곡 수 건너편 바위에 행(行) 군수(郡守) 이해륜(李海崙)을 새겼다. 1897년 6월에 기장 군수로 부임해 왔고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청덕거사비(淸德去思碑)와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세워져 남아 있다. 여기 군수(郡守)는 기장이 기장현에서 1894년 갑오개혁이 단행되고 1895년(고종32년) 2차 개혁 때 동래도호부가 동래관찰부(東萊觀察府)가 되었고 그 아래 군이 되었을 때다.

다음 바위에는 엄신영(嚴信永)의 행(行) 군수(郡守) 엄신영(嚴信永)이 새겨져 있다.
행(行) 군수(郡守) 엄신영(嚴信永)

다음 바위에는 엄신영(嚴信永)의 행(行) 군수(郡守) 엄신영(嚴信永)이 새겨져 있다. 군수(郡守) 엄신영(嚴信永)은 1905년에 부임하였고 시랑대 바위에 엄신영 제우영(嚴信永 弟宇永)’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1904년 4월에 세워진 청덕거사비(淸德去思碑)와 1904년 10월에 세워진 유애불망비(遺愛不忘碑)가 남아 있다.

손영희(孫永禧)의 행(行) 군수(郡守) 손영희(孫永禧)가 새겨져 있는 바위
행(行) 군수(郡守) 손영희(孫永禧)

연이어 손영희(孫永禧)의 행(行) 군수(郡守) 손영희(孫永禧)가 새겨져 있고 군수(郡守) 손영희(孫永禧)는 1901년 8월에 부임하여 1903년에 이임하였다. 전임은 중추원 의관이었다.

계곡 수 좌측 바위에 새겨진 마지막 각석은 손경현(孫慶鉉)의 현감(縣監) 손경현(孫慶鉉) 영세불망(永世不忘)이다.
현감(縣監) 손경현(孫慶鉉) 영세불망(永世不忘)

계곡 수 좌측 바위에 새겨진 마지막 각석은 손경현(孫慶鉉)의 현감(縣監) 손경현(孫慶鉉) 영세불망(永世不忘)이다. 기장 부임 전 손경현(孫慶鉉)은 홍문관 교리로 1894년 9월에 현감(縣監)에 부임하여 1895년 11월에 이임하였고 이곳 시랑대의 글귀와 절경을 본 후 주변 바위에 세 글자 학사암(學士岩)과 시(詩)를 남겼다. 그리고 『기장현 읍지』 형성조에 의하면 “기장 현감 과 홍문관 교리를 지낸 손경현이 놀러 와서 학사암(學士嵓)이라 부르기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1895년 5월에 세워진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가 남아 있다.

옛길을 거닐다 보면 길가 안내 표지판에는 여근석(女根石)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바위 형상을 따서 여근석이라고 부른데 지형변경으로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신앙(性信仰) 즉 성기숭배신앙(性器崇拜信仰)은 신석기시대 이후 형성된 것으로 개인적인 목적은 기자(祈子)나 기복(祈福)이고 국가나 공동체 집단의 목적은 다산(多産)과 풍년, 풍어, 마을의 평안이다. 그러나 조선시대부터 유교의 영향으로 남호선호사상과 칠거지악에 의해 여인들의 고통과 아픔이 여근석(女根石)에 남아있으리라 생각된다.

옛길 우측에 3명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바위에 있는데 현감(縣監) 오영석(吳榮錫), 현감(縣監) 송재우(宋載遇)와 군수(郡守) 이경우(李敬佑)이다.

옛길 우측에 3명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바위에 있는데 현감(縣監) 오영석(吳榮錫), 현감(縣監) 송재우(宋載遇)와 군수(郡守) 이경우(李敬佑)이다. 현감(縣監) 오영석(吳榮錫)은 1892년 10월에 부임하여 1895년 11월에 이임하였고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1893년에 세워진 생사단(生祀壇)과 애민구해불망비(愛民捄海不忘碑)가 남아있다.

현감(縣監) 오영석(吳榮錫)과 현감(縣監) 송재우(宋載遇)의 각석

현감(縣監) 송재우(宋載遇)는 무관으로 1751년 9월에 부임하여 1753년 6월에 사직하였고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휼민선정 만고불망비(恤民善政 萬古不忘碑)가 남아 있다.

군수(郡守) 이경우(李敬佑) 영세불망(永世不忘)

군수(郡守) 이경우(李敬佑)는 1895년 5월에 부임하여 1896년 9월에 이임하였고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1896년 9월에 세워진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남아 있다.

산성산의 야경
용소웰빙공원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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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에서 필요한 산림자원을 보호 및 육성하기 위해 봉산(封山) 또는 금산(禁山)으로 지정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금표(禁標)나 봉표(封標) 등 표석을 설치하였다. 산림은 주로 소나무 숲을 의미하는데 특히 황장목(黃腸木, 또는 금강송)은 소나무 중에서도 몸통 속 부분이 누런색을 띠고, 재질이 단단하고 좋은 나무로서, 주로 왕실의 관을 만들 때 사용되었던 나무이다.

산림청 국립수목원에서 2008년도부터 조선왕조실록, 속대전, 만기요람 등 문헌에 나와 있는 황장금표 및 봉산표석에 대해 전국 일제조사를 시작하여 2009년도에 22개소를 발굴하였다.

경주시 동경주(양남면, 양북면, 감포읍)에는 봉표가 3개소에 있으며 양북면에 2개소로 불령봉표, 시령봉표, 양남면에 1개소로 수렴포봉표가 있다. 봉표내용은 연경묘(延慶墓)의 제사에 사용 될 향불을 피우는 데 쓰는 숯을 만들기 위해 봉산을 지정하고 봉표를 설치했다는 내용이다.

延慶墓香 炭山因 啓下 佛嶺, 柿嶺, 水念浦 封標

연경묘 제사에 사용하는 향불을 피우는 데 쓰는 숯을 만들기 위한 산이므로 임금의 명에 의해 불령, 시령, 수렴포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연경묘(延慶墓)는 제23대 순조의 큰아들 효명세자(1809 1830)의 묘호이다. 1809년에 태어났으며 순조 123세에 왕세자에 책봉돼 효명세자로 불렸는데, 그의 나이 18세 되던 해부터 왕위 계승을 위한 대리청정을 하던 중 갑작스럽게 승하해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대리청정 33개월 만이고 순조는 4년 후 세상을 떴다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즉위 후 추존왕(追尊王) 익종()으로 추대되었고 연경묘에서 수릉(綏陵)으로, () 형식에서 능() 형식으로 바뀌었다. 이후 고종 때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됐고 지금의 봉표는 헌종이 익종으로 추대 전에 설치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릉)은 현재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에 있고 부인 신정황후와 같이 합장되어 있다.

효명세자는 당시 안동 김씨 세도정치 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아버지 순조를 도와 왕권을 강화하던 중이었다. 외가인 안동 김씨 세력을 배척하고 인재를 널리 등용했으며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역대 세자 중 예술문화 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고 특별히 춤사위를 즐겼다 한다. 궁과 종묘에 쓸 연향 등을 새로 만들고 발굴했으며 대규모 연회를 열기도 해 조선 궁중 향연의 절정기를 이루게 했다. 일종의 왕권 강화를 위한 국가적 시위로 해석된다.

효명세자의 부인 신정황후 조씨는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로 12세에 효명세자의 비로 책봉돼 세자빈이 됐으며 효부라 칭찬을 받았다. 효명세자 승하 3년 전에 유일한 자식인 헌종을 낳고 왕실생활 11년 되던 해 남편 효명세자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자 23세에 홀로 돼 82세까지 장수했다.

그러나 장수는 했지만 그것이 나라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신정황후는 시어머니 순원황후의 안동 김씨 세력과 자신의 친정 세력인 풍양 조씨 사이에서 세력 다툼의 주역이 됐고 조선 왕실을 손아귀에 넣고 군림했던 그녀는 조선 왕실을 패망하게 한 원인을 제공했다.

조선후기 세도정치에 의한 무분별한 봉표 시행으로 백성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하여 원성이 너무나 컸었다. 백성들은 산에서 땔감을 구하고,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 필요한 나무를 벌목하는데 이를 금지하니 가렴주구 하는 고을 탐관오리에 의해 가뜩이나 힘든 삶에 백성들은 한층 도탄에 빠졌었다. 이에 경주부윤 노영경이 이 폐단을 한때 철폐하여 많은 백성으로 부터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경주보문단지에서 동해구 방향에 있는 문무대왕암이나 감은사지로 가려면 동대봉산 또는 추령터널을 지나가야 한다. 동대봉산 또한 봉산으로 지정 된 산으로 수군의 조선용 목재를 사용하기 위함으로 이 또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구전민요를 살펴보면 백성들의 가슴 태우는 원한을 노래 가락을 통해 풀고자 함을 알 수가 있다.

불 붙었네 불 붙었네 동대봉산 불 붙었네.

동대봉산 붙은 불은 동해 불로 끄련마는

요내 가슴 붙은 불은 어느 님이 꺼줄는고.

왕의 길에서 만난 불령봉표

양북면 호암리 불령이라는 고개에 있는 봉표는 인근 봉표 중 글자가 가장 선명하다. 예전에는 절터가 있었으며 절 이름은 알 수 없고 이곳 에서 발견 된 목 없는 석불은 현재 기림사 성보박물관 입구에 있다. 또한 기림사와 불국사 스님들이 불령을 통해 서로 왕래하였다.

왕의 길(반월성추원모차골서낭당 고개세수방불령재용연기림사대왕암)은 신라 문무대왕의 장례길이며 그의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의 제를 지내기 위해 감은사와 문무대왕암까지 수레를 타고 지나가는 길이였다.

지금은 트레킹코스로 유명하다. 호암마을 앞산에는 마치 입을 벌린 범처럼 생긴 기이한 바위가 있어 그 바위의 이름을 범바위라 부르고 마을 이름도 "호암" 혹은 범바우라 불렀다고 한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너머 가는 옛길에서의 시령봉표

양북면 용동1리 감골에는 옛날 포항 장기로 넘어가는 길이 있어 이곳 마을사람들이 이용하였으나 지금은 교통발달로 다니는 이는 없다. 용동이라는 지명은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龍洞이라 불렀다. 마을에서 계곡 천을 따라 30 ~ 40분 정도 올라가면 볼 수 있는데 원래 위치는 알 수 없고 물가에 위치하고 있어 인근 봉표 중 마모가 가장 심하여 글자를 식별하기가 어렵다.

 

별을 보기 좋은 어촌마을에서의 수렴포봉표

양남면 수렴1리 국도31번 해안도로와 인접한 곳에 있다. 조그만 텃밭에 묻혀 있어 전체 글자를 볼 수 없고 주변 봉산으로 지정 될 만한 큰 산이 없어 실효성이 궁금하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병의 병영을 가졌던 곳이라 하여 수영포리라 하였는데 1914년에 행정리명을 수렴리라 하였다. 옛날 왜적의 침입이 많은 곳이라 마을 사람들의 기질이 강하고성공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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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의 이산표석

옛 향기를 찾아서/금석문 2019. 7. 22. 18:01 Posted by 추야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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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무단정치 때 조선의 임야수탈목적으로 1918년 조선임야조사사업을 시행하여 1924년에 완료하였고 이때   개인의 재산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은 임야는 조선총독부의 재산으로 몰수하여 일본 자본가에게 헐값으로 매각하였다.

그때 창덕궁(왕실 사무 총괄)은 장산이 조선 왕실(창덕궁) 소유지라는 표석을 장산에 세운 후 사유지 신고 및 사유지 이의서를 제출하였고 1924년에 창덕궁으로 소유권이 이전 되었다. 이산(李山)李王山의 준말로 장산 외에 아홉산, 가야산(남연군묘) 등에 있고 장산 표석의 수량은 10개이다. 표석의 재질은 유문암으로 높이 30cm, 가로 및 세로 13cm 직사각형 앞면에 음각으로 새겼다.

구곡산 가는 등산로 중 민묘 상부 숲에 위치하고 있는 이산표석
첫 번째 이산표석에서 120 ~ 130m 올라가면 두 번째 이산표석을 만날 수 있다.
이산표석 좌측 5m 옆에는 일제강점기 때(소화 12년 : 1937년) 일본 육군이 설치한 표석이 남아있다.
예전에는 조선총독부 표석을 볼수 있었는데 군사표석을 보니 장산이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모양이다.
소화 12년 : 1937년

장산은 조선시대 중엽부터 봉산(封山)으로 지정하여 나라에서 육림, 벌채하였고 봉산은 소나무의 경제적 가치를 고려한 목재자원 공급지로서 채벌을 금지한 산이다. 동래부의 봉산은 장산을 비롯하여 운수산, 몰운대, 두송산 등 4곳이고 기장현의 봉산은 남산, 장안산, 거문산, 앵림산, 백운산 등 5곳이다.

소나무란 이름은 우리말 ''에서 유래되었으며, 솔은 으뜸이라는 뜻의 '수리'라는 말이 변한 것으로 나무 중에 최고 나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줄기가 붉은 나무라 해서 '적송', 줄기가 여인의 몸매 같아 '여송' '미인송', 육지에 많이 자란다고 '육송'이라고도 부른다.

소나무류를 통틀어 부르는 한자는 '()'이며, 중국의 진시황제가 비를 피하게 해준 나무에게 공작(公爵)이라는 벼슬을 내려 벼슬 있는 나무라는 뜻의 송()이 되었다고 한다. 목재로는 궁궐, 사찰 등 건축재와, 병선제작 에도 사용된다.

53사단 공병대대(신해운대역) 주변 산길에 위치하고 이산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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