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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207-2 평지 일대(129,643)에 위치하고 있는 금척리(金尺里) 고분군(古墳群)은 경주에서 건천읍으로 올라가는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고분이 나뉘어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 조사에서 모두 52기의 봉토분이 확인되었으나 현재는 32기 정도만 확인되고 있다. 이 고분군은 1963121일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고 경주 시내 중심부의 고분군을 제외하면 경주 주변 외곽에서는 대형봉토분들이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고분군이다.

금척리(金尺里) 고분군(古墳群)은 경주에서 건천읍으로 올라가는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고분이 나뉘어져 있다.
건천읍에서 경주 방향으로 가는 국도 4호선

이곳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하늘에서 받은 금으로 만든 자(金尺)를 숨기기 위해서 40여 개의 가짜무덤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지금도 이 무덤들 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 전해지고 마을 이름 또한 금척리라고 명명되었다.

또 다른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신라에 금자를 왕에게 바친 사람이 있었다. 죽은 사람이라도 이 금자로 한번 재면 다시 살아나고 무슨 병이라도 금자로 한번 쓰다듬으면 그 자리에서 낫는다는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왕은 이 금자를 국보로 여겨 매우 깊숙한 곳에 두었다.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동쪽에 있는 고분군에서 본 서쪽 고분군

이런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금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국보에 해당하는 금자를 달라고 하는 무뢰한 사신에게 순순히 금자를 내줄 수가 없었다. 곧 신하에게 명하여 토분을 만들고 그 속에 금자를 파묻었으며 주변에 다른 토분을 만들어 어느 곳에 금자를 묻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나라 사신은 그 많은 토분을 헤치고 금자를 찾아낼 기력이 없었던 듯 물러나고 말았다. 왕의 지략으로 금자를 당나라에게 빼앗기지 않았으나 이후 어느 토분에 금자가 묻혔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고 한다.

국도 4호선을 사이에 서쪽에 있는 고분군
서쪽에 있는 고분군이 동쪽 고분군보다 규모가 큰 고분이 많다.

현재 남아 있는 봉토분들은 대부분 원형분으로 보이나 몇 기의 표형분(瓢形墳)도 확인된다. 또 많은 고분의 봉토 윗부분에서 함몰된 형상을 찾을 수 있어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봉토는 직경 25m 이상의 크기를 가진 것들도 있어 신라의 지방 고총들과 유사한 크기를 가졌다

금척리 고분군은 일제강점기 때 4번국도 건설공사 중 고분의 존재를 확인한 바 있다. 발굴조사는 1952, 1976, 19813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1952년 발굴조사는 도로확장공사로 파괴된 고분(1·2·3) 2기에 대한 발굴조사를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에서 32일부터 8일까지 실시하였다.

맨 오른쪽은  표형분(瓢形墳 )

무덤 내부는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덧널()을 설치한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였다. 조사결과 출토유물에는 1호분에서 금제세환이식·곡옥·호박제 구슬·토기 및 철기편이, 2호분에서는 많은 토기편과 소량의 철기편이 수습되었다. 따라서 1호분은 고분의 주곽부, 2호분은 부곽 가능성이 크다.

1976년 발굴조사는 318일 토사 채취 중 토기편이 발견됨에 따라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적석목곽묘의 고분 4기와 우물 1기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고배·대부장경호 등 모두 토기이다.

1981년 발굴조사는 상수도시설 공사 중 노출된 고분들에 대한 발굴조사를 경주사적관리사무소와 국립경주박물관 합동으로 423일부터 531일까지실시하였다. 수혈식석곽묘 3, 옹관묘 2, 토광묘 2기 등 모두 15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토광묘는 적석목곽묘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곡옥장식목걸이(曲玉附頸飾), 은제허리띠(銀製) 등이 있는데,신라 지방 고총들에서 출토되는 양상과 유사하다.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고분군이 조성된 중심 연대는 5세기6세기중반으로 추정된다.

여기 건천읍에 있는 모량리(牟梁里)의 모량(牟梁)이라는 옛 지명이 남아 있어, 금척리 고분군을 신라의 6부 가운데 하나인 모량부(牟梁部) 귀족들의 무덤들로 보고 있다.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동쪽에 있는 고분군

모량부(牟梁部)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으로 촌장(村長)은 구(; 라고도 씀) 예마(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함)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혹은 涿)),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모량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24대 진흥왕의 왕비인 지소부인(知召夫人) 또는 식도부인 박씨(息道夫人 朴氏)의 출신지로 고분을 평지에 대규모로 조성하여 그 존재감을 강조하였고, 부장유물에 있어서 시내 고분과 크게 차이가 없어 신라의 중앙정계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던 세력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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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문무대왕면 나아리(羅兒里) 월성원자력본부 후문 공원 남서쪽 소나무숲에 신라석씨탈해왕탄강유허비(新羅昔氏脫解王誕降遺墟碑)와 비각(碑閣)이 있다. 1845(헌종 11) 조정에서 하마비와 땅을 하사하자 석씨 문중에서 유허비(遺墟碑)와 비각(碑閣)을 건립하였다.

장사랑(將仕郞) () 장릉참봉(莊陵參奉) 여강(驪江) 이종상(李鍾祥)이 비문을 지었고, 통훈대부 전 행사간원정언문신겸선전관(通訓大夫前行司諫院正言文臣兼宣傳官) 여강(驪江) 이재립(李在立) 글씨를 썼다. 비는 화강암으로 비신 높이는 113, 너비 46, 두께 24로 비문은 해서체다.

내용은 마멸이 진행 중이서 탁본으로 알 수 가 있다.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845년(헌종 11) 조정에서 하사한 하마비

 비각 안에는 1847년 경주부윤 이시우(李時愚)가 지은 신라탈해왕탄강유허비각기(新羅脫解王誕降遺墟碑閣記)와 이능항(李能恒)이 지은 신라탈해왕탄강유허비각중수기(新羅脫解王誕降遺墟碑閣重修記)가 있다.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왕은 본래 파나국(婆那國)의 왕자로 회임된 지 7년만에 큰 알로 태어났다. 왕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버리라고 명하자 왕비가 금궤에 담아 바다에 띄웠는데, 진한(辰韓)의 아진포(阿珍浦)에 정박하게 되었다.

한 노파가 알 속에서 아이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데려다 길렀다. 이 사람이 바로 탈해왕이다. 정박하고 있을 때, 까치가 알렸으므로 작()에서 조()를 떼어내고 성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신라석씨탈해왕탄강유허비(新羅昔氏脫解王誕降遺墟碑)는 장사랑(將仕郞) 전(前) 장릉참봉(莊陵參奉) 여강(驪江) 이종상(李鍾祥)이 비문을 지었고, 통훈대부 전 행사간원정언문신겸선전관(通訓大夫前行司諫院正言文臣兼宣傳官) 여강(驪江) 이재립(李在立) 글씨를 썼다.

왕의 이름은 탈해(脫解)인데, 옛날에는 시호가 없었기 때문에 탈해왕이라고 칭하였다. 당초 진한(辰韓)6(六部)에 군장이 없었는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처음으로 나라를 건국하여 서라(徐羅)라고 칭하였다.

차차웅(次次雄) 때 탈해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딸과 결혼을 시켰는데, 죽음에 임박하여 아들인 유리(儒理)를 두고 탈해에게 선위하였다. 탈해는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유리(儒理)를 왕으로 세우고 보필하여 백성들이 부강을 누리게 되었다.

1847년 경주부윤 이시우(李時愚)가 지은 신라탈해왕탄강유허비각기(新羅脫解王誕降遺墟碑閣記)
이능항(李能恒)이 지은 신라탈해왕탄강유허비각중수기(新羅脫解王誕降遺墟碑閣重修記)

유리가 사망하자 나라 사람들은 선왕의 명이라는 이유로 탈해를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다. 호공(瓠公)을 재상으로 삼고 또 시림(始林 : 계림의 옛 이름)에서 알지(閼智)를 얻었다. 알지는 계림씨(雞林氏 : 金氏)의 조상이다. 탈해는 세상을 떠나면서 유리의 아들 파사(婆娑)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4대 뒤에 탈해의 손자 대휴(伐休)가 또 왕위를 이었으니 계림씨와 번갈아가며 왕위를 물려주게 된 것이다. 석씨는 모두 8명의 왕이 나왔고, 3성이 향유한 서라는 1000년 동안 다스려졌다. 이는 옛 역사에서 말하는 3대에도 없었던 일이다.

이곳 나아리(羅兒里)는 삼국유사 석탈해 탄생설화에 나오는 아진포(阿珍浦)와 관련 있다. 신라 육부촌 때 금산가리촌은 이곳 문무대왕면 일대를 포함하고 있는데 서촌(瑞村)이라고 불렀고 이곳 중 아진포(阿珍浦)를 아서(阿瑞, 兒瑞)라고 불렀다. 나아(羅兒)도 이와 관련해서 불러지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현재 아진포(阿珍浦)는 월성원자력 건설 때 발전소 부지에 포함되어 볼 수가 없다.

월성원자력 건설 전 아진포 모습

석탈해가 탄 배가 도착한 홈바우는 홈이 패어있는 홈돌이라고도 하는 바위로 장아(長阿) 앞 바닷가에 있었는데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설 때 부지에 포함되어 사라졌다.

나아 바닷가

이 밖에 석탈해 탄생설화와 관련 된 마을 지명이 수아(收兒)장아(長阿)가 있다. 수아(收兒) 석탈해를 거두어들인 곳이라 하여 "수아" 혹은 "수애"라고 불렀다. 장아(長阿) 석탈해가 장성하기까지 자라던 언덕이라 하여 "장아"라 하는데 여기 또한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설 때 부지에 포함되었다.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설 전 나아마을 전경

삼국유사 기이 4대 탈해왕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 토해니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함)은 남해왕(南解王) 때 가락국(駕洛國) 바다 가운데에 배 한 척이 와서 닿았다. 이것을 보고 그 나라 수로왕(首露王)이 백성들과 함께 북을 치고 법석이면서 그들을 맞아 머물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배는 나는 듯이 계림(鷄林)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의 아진포(阿珍浦)로 달아났다(지금도 상서지촌上西知村하서지촌下西知村의 이름이 있다). 이때 마침 포구에 한 늙은 할멈이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고 하였는데 이가 바로 혁거세왕(赫居世王)의 고기잡이 할멈이었다.

그는 이 배를 바라보고 말했다. “이 바다 가운데에는 본래 바위가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까치들이 모여들어서 우는가.”

배를 끌어당겨 찾아보니 까치들이 배 위에 모여들었다. 그 배 안에는 궤 하나가 있었다. 길이는 20()이오. 너비는 13척이나 된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밑에 매어 두었다. 그러나 이것이 흉()한 것인지 길()한 것인지 몰라서 하늘을 향해 고했다.

이윽고 궤를 열어 보니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가 하나 있고 아울러 칠보(七寶)의 노비(奴婢)가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을 7일 동안 잘 대접했더니 사내아이는 그제야 말을 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이오(정명국正明國 혹은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琓夏는 또 화하국花厦國이라고도 하니, 용성龍城은 왜국倭國 동북쪽 1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

우리 나라에는 원래 28 용왕(龍王)이 있어서 그들은 모두 사람의 태()에서 났으며 나이 5, 6세부터 왕위(王位)에 올라 만민(萬民)을 가르쳐 성명(性命)을 바르게 했소. 팔품(八品)의 성골(姓骨)이 있는데 그들은 고르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소. 그때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王女)를 맞아 왕비(王妃)로 삼았소.

오래 되어도 아들이 없자 기도를 드려 아들 낳기를 구하여 7년 만에 커다란 알[] 한 개를 낳았소. 이에 대왕은 모든 신하들을 모아 묻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았으니 고금(古今)에 없는 일이다.

이것은 아마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그 속에 넣고 칠보와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뒤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아무쪼록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한 길을 이루도록 해 주시오했소. 빌기를 마치자 갑자기 붉은 용이 나타나더니 배를 호위해서 지금 여기에 도착한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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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릉에서 언양 쪽으로 가는 사거리에서 포석로를 따라 300m정도 가면 탑정주요소가 보이는데 여기서 옆길로 올라가면 나정이 나온다. 나정은 남산 서북쪽 송림이 울창한 구릉지대에서 위치하고 신라시조(新羅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난 전설을 가지고 있는 우물이다나정(蘿井)의 뜻은 담쟁이 덩굴이 우거진 우물이라는 것이다.

남산 서북쪽 송림이 울창한 구릉지대에서 위치하고 있는 나정(蘿井)

박혁거세(朴赫居世)가 나정에서 태어나서 13년 후 기원전 57년부터 신라 992녀의 장구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나정은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하였다. 발굴 전에는 비각(碑閣)이 있었고 뒤편에 중앙 위치에 판석이 놓여져 있고 주위에는 4개의 돌이 규칙적으로 사방에 둘러져 있었다. 이 판석이 우물을 덮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비각 안에는 1803년(순조 3년) 2월 직제학 남공철(南公轍1760 ~ 1840)이 찬(撰)한 것을 경주부윤 최헌중(崔獻重) 쓰고 숭덕전 참봉 박광검(朴光儉), 도감 박사로(朴師魯) 등 박씨 문중이 세운 시조탄강유허비(始祖誕降遺墟碑)가 있었다.
비문 내용은 직제학 남공철이 43세 때 영남을 유람할 때 이곳 박씨 일족들이 찾아와서 우물을 옛 사람들이 메워버려 쉽게 그 전하는 바를 잃어버렸다고 하면서 혁거세의 탄생을 기념하는 비문을 청하였다고 한다. 이에 비문이 지었고 그 후 세월이 흘러 비문글자가 훼손되어 1929년에 참봉 박희동이 본인 부담으로 비석을 새로이 세웠다.
박씨 일족들의 시조 비문요청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유교의 장자상속제와 17세기 말 성행한 보학(譜學)과 관련이 있다.

1929년에 참봉 박희동이 본인 부담으로 비석을 새로이 세운 시조탄강유허비(始祖誕降遺墟碑)

나정에 대한 4차례의 발굴조사(2002년 ~ 2005년) 결과로 팔각 건물지, 청동기시대 주거지, 기타 유구 등이 확인되었고 1,39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시기별로 1차 시설에서 4차 시설로 구분되는데 1, 3차 시설 유구는 잘 남아있으나 2, 4차 시설은 파괴되었다. 이중 팔각건물지가 돋보이는데 국가제사시설로 보고 있다.
1차 시설에는 수혈유구(竪穴遺構), 주혈군(柱穴群), 구상유구(溝狀遺構), 목책 시설(木柵施設) 등 있고 조성 시기는 초기 철기시대이다. 수혈(竪穴)은 평면 타원형으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이고 주혈군(柱穴群)은 가운데 수혈유구(竪穴遺構) 중심으로 원형으로 배치된 것으로 기둥을 이용한 상부시설물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 차례의 발굴조사 (2002 년~ 2005 년 ) 결과로 발굴된 석재들

구상유구(溝狀遺構)는 수혈유구(竪穴遺構)를 중심으로 사방 외곽으로 변경 약 5m 떨어진 지점에 원형으로 둘러져 있다. 목책시설(木柵施設)은 수혈유구의 외곽을 감싸는 원형으로 설치되었고 직경은 약 28m 내외이다. 목책과 구상유구와 같은 2중의 경계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제의적 성격의 시설로 추정하고 있다.
3차 시설에는 가운데 팔각건물지와 남쪽의 회랑, 담장 등 있다. 팔각건물지의 축조 시기는 의봉 4년 개토(儀鳳四年皆土)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 기와가 출토 되어 문무왕 19년(679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679년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궁궐을 중수하고 동궁을 창건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나정의 3차 시설 역시 이 시기에 2차 시설을 폐기하고 확대, 조성하였다.

팔각건물지의 기단 한 변은 약 8m, 내부 면적은 약 300㎡이다. 팔각건물지 남쪽 중앙부에는 계단시설과 이와 연접하는 보도시설이 있다. 담장은 남쪽 회랑을 제외한 삼면에 만들어 졌다. 회랑은 후대에 축조된 축대와 도로로 인하여 일부 파괴되었으나 남-북 2칸, 동-서 16칸이며 가운데에 출입구가 있다.
발굴조사 결과, 나정의 자연지형은 원래 중앙부가 높은 완만한 등선이었다. 그런데 팔각건물지를 축조하기 위하여 2차 시설을 폐기하고 땅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그럼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난 진짜 나정의 위치는 어디일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알천(閼川)과 동천(東泉), 양산(楊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6부 촌장들이 알천(閼川) 언덕 위에서 남쪽 방향으로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을 보았는데, 알천은 토함산 북쪽 황룡골에서 발원하여 보문단지를 거쳐서 내려와서 동, 서로 흐르는 북천(北川)의 신라시대 이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박혁거세가 목욕한 동천(東泉)은 먼저 동천사의 위치가 중요한데 동천사(東泉寺)는 현재 동천동의 서북일대로 보고 있다. 그래서 동천은 알천 즉 북천의 지류로 낭산 방향으로 남북으로 흐르는 소하천으로 추정된다. 또한 양산(楊山) 알천의 남쪽에 있는 산으로 현재 낭산이 언제부터인가 양산이 개칭되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박혁거세는 낭산에 있는 어는 우물에서 태어났고 동천에서 목욕을 한 것이다.

국가제사시설인  팔각건물지로 사뭇 웅장한 느낌을 준다.

박혁거세 출생 관련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즉위년조와 삼국유사 기이제일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박혁거세거서간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꿇어 앉아 울고 있었다. 그가 즉시 가서 보니 말은 갑자기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이것을 쪼개자 그 속에서 어린아이가 나왔다.
그는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의 나이 10여 세가 되자 지각이 들고 영리하며 행동이 조신하였다. 6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다가, 이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한 사람들은 호(匏)를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의 큰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 거서간을 진한에서는 왕이라고 하였다[혹은 귀인을 칭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1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元年) 임자(壬子; 69, 고본古本에는 건호建虎 원년元年이라 했고,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3월 초하루에 상부(上部)의 조상들은 저마다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방자하여 저 하고자 하는 대로 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임금을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에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도록 비치고 있다. 그리고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굻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조사해 보았더니 거기에는 자줏빛 알 한 개(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함)가 있다.

그러나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를 얻으니, 그는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 놀라 이상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췄다.
이내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이에 그 아이를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고 이름하고(이 혁거세赫居世는 필경 향언鄕言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해설하는 자는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을 때의 일이다. 그런 때문에 중국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한 말에, 어진 이를 낳아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있으니 바로 이 까닭이다한다.
또 계룡雞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어찌 서술성모西述聖母의 현신現身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위호(位號)를 거슬감(居瑟邯)이라고 했다(혹은 거居西干이라고도 하니 그가 처음 입을 열 때에 스스로 말하기를, “알영거서간閼英居西干이 한번 일어났다한 그 말로 인해서 일컬은 것이다. 이 뒤부터 모든 왕자王者의 존칭이 거서간居西干으로 되었다).

나정에서 보면 멀리 보이는 창림사지 삼층석탑

육부전(六部殿)과 육부촌(六部村)
육부전(六部殿)은 나정에서 동쪽으로 200m 가면 왼쪽에 자리 잡고 있다. 육부전은 육촌장(六村長)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1970년에 경주개발사업 때 건립되었고 양산재(楊山齋)로 부르다가 2019년에 강당을 새로 증축하고 육부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육부촌의 촌장의 실체는 고조선유민 또는 진인 등으로 추정되고 북방으로부터 각각 시간적 간격을 유지하며 경주지역에 도착 및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돌산고허촌장과 무산대수촌장의 집단은 내륙으로 이동하여 왔으며, 나머지 네 집단은 동해의 해안을 따라 남하하거나, 해로를 이용하여 이동하여 왔다. 특히 명활산에 강림한 금산가리촌장 집단은 해로를 이용하여 현재 동해구가 있는 양북면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육부촌장의 집단은 경주 중심지와 북쪽, 현곡면, 안강읍 남쪽 평야지대를 제외한 지역에 정착한 것이다.

육부촌 관련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즉위년조와 삼국유사 기이제일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내용을 살펴보자.
삼국유사 기이(紀異) 1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한(辰韓) 땅에는 옛날에 여섯 촌()이 있었다.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村長)은 알평(謁平)이니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嵓峰)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노례왕弩禮王 9년에 부를 두어 급량부及梁部라고 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의 동촌東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니, 촌장(村長)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沙梁部; 은 도라고 읽고 혹 탁涿으로도 쓴다. 그러나 역시 도라고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여 구량벌(仇梁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태조高麗太祖 때에 설치한 것이다. 아래도 이와 같다).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다. 촌장(村長)은 구(; 라고도 씀) 예마(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함)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혹은 涿)),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한다. 여기에는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소속된다.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빈지賓之빙지冰之라고도 한다)이다. 촌장(村長)은 지백호(智伯虎)로 처음에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 최씨(本彼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한다. 시파(柴杷)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최치원(崔致遠)은 바로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지금은 황룡사(黃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후(崔侯)의 옛집임이 분명하다.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율사栢栗寺 북쪽 산)이다. 촌장(村長)은 지타(祗沱; 혹은 지타只他)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는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弥村)궐곡(闕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소속되었다.
위의 글을 상고해 보건대, 이 여섯 부()의 조상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윤리왕倫理王) 9(32)에야 비로소 여섯 부()의 명칭을 고치고, 또 그들에게 여섯 성()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는 중흥부(中興部)를 어머니로 삼고, 장복부(長福部)를 아버지, 임천부(臨川部)를 아들, 가덕군(加德郡)을 딸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 실상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박혁거세거서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분산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의 진지촌[혹은 간진촌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의 대수촌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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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복사지(崇福寺址)는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산23-1에 위치하고 있으며 최치원이 비문을 쓴 쌍거북비석받침과 동, 서 삼층석탑이 있다. 이 절은 신라 37대 선덕왕 이전에 원성왕의 어머니 외삼촌이며 왕비 숙정황후(肅貞王后)의 외할아버지인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한 곡사(鵠寺, 고니절) 인데, 원래 곡사(鵠寺) 터는 여기서 2-3Km 가량 떨어진 38대 원성왕릉(괘릉)자리였다. 원성왕이 죽자 풍수상(風水上) 길지(吉地)이던 터를 희사하여 장지가 되었고 곡사를 옮겨 다시 세운 절이 현재의 대숭복사지이다. 곡사는 사원에 고니모양의 바위가 있어 붙인 명칭이다.

현재 조성된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는 2013년 복원하였는데 쌍귀부 비석받침은 국립 경주 박물관에 보관 중인 비석받침을 복제하였고 이수도 고증을 통하여 복원하였다. 비문의 쌍계사의 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의 글씨를 집자하여 비문에 비신에 새겼다.

그러나 그 후 70여 년간 절은 큰 형세를 이루지 못하다가, 48대 경문왕(861~874 재위)의 꿈에 원성왕을 뵙고 이 절을 원성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願刹)로 삼고 크게 확장하였고 49대 헌강왕 885(헌강왕 11)때 절 이름을 대숭복사(大崇福寺)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 가운데 이 절이 국사(國寺)였으며 조선시대까지 존속하였음을 알리는 ´국사대웅´(國寺大雄)´개와대웅´(蓋瓦大雄) 등의 명문(銘文)이 적혀 있는 평기와가 발견되어 조선시대까지 절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추정하고 이다.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의 쌍귀부 비석받침은 금당 터에서 동남쪽 10여M 위치에 세워져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절의 역사는 1930년 대 부터 1978년 국립경주박물관의 현지 지표조사에 이르기까지 파괴된 최치원의 숭복사비의 비편이 모두 13개가 수습되었고 이를 통해 99자가 해독되어 밝히게 되었다. 최치원의 대숭복사비는 진성여왕 10(896)에 만들어졌다. 이전에는 위치가 외동면 말방리인 탓으로 '말방리 사지(末方里寺址)'라고 불리었다. 말방 지명은 옛날 마방(馬房)이 있었으므로 마방-말방이라 불렀다.

대숭복사지는 금당 앞에 탑이  2개 있는  1금당 쌍탑식의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의 사찰이다.

이 절은 평지의 지형, 탑의 배치 형식 등이 불국사와 매우 유사하여 두 절의 건립연대가 큰 차이가 없음으로 추측하고 있다. 금당 앞에 탑이 2개 있는 1금당 쌍탑식의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를 따르고 있으며, 대지를 3단의 석축으로 구분하여 맨 윗 단에 탑()이 자리 잡고 있다. 금당은 정면 5, 측면 3칸이며 금당의 기단은 2중 기단이며 금당 중심에서 북으로 148척 떨어진 위치에서 동, 서로 긴 기단석이 발견되었는데 강당지로 추정하고 있다.

금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기단은 2중 기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금당지에 모아 놓은 각종 석조 부재들

, 서 삼층석탑은 경문왕(861-875)때인 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서 탑 두 기가 모두 불완전한 형태의 탑으로 복원되었고 이런 이유로 탑의 예술성은 높이 평가되나 문화재로의 가치가 반감되어 보물로 지정받지 못했다. , 서 석탑 모두 같은 규모와 양식에 조성된 지대석 위에 2중 기단의 삼층석탑이다. 상층 기단 면에 12구씩 팔부중상(八部衆像), 팔부신장상(八部神將像)을 조각하였고 1층 몸돌 각 면에는 문모양(門扉양식)을 새겼다. 지붕돌의 처마받침은 4단으로 통일신라후기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대숭복사지(大崇福寺址)와 동, 서 삼층석탑(三層石塔)

서 삼층 석탑은 2중 기단 하층 기단은 대부분 파손되었고 상층 기단, 1층 몸돌과 지붕돌, 그리고 2층 지붕돌만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지붕돌 추녀에는 풍탁을 단 흔적이 남아있다. 동 삼층 석탑은 서 삼층 석탑 비해 다소나마 석탑을 형태를 갖추고 있다. 2중 기단 하층 기단은 약간 파손되었고 상층 기단, 1층 몸돌과 지붕돌, 그리고 2층 지붕돌, 3층 몸돌과 지붕돌만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대숭복사지 서 삼층석탑
서 삼층 석탑은 2중 기단 中 하층 기단은 대부분 파손되었고 상층 기단, 1층 몸돌과 지붕돌, 그리고 2층 지붕돌만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지붕돌 추녀에는 풍탁을 단 흔적이 남아있다.

팔부중(八部衆) 또는 팔부신장(八部神將) 고대인도 신로 석가모니에게 교화된 뒤 불법을 수호하는 선신이 되었으며 모두 8()의 신으로 무장을 하고 손에는 다양한 지물들을 들고 있다. 사천왕의 직속부하 여덟 분을 일컫는 팔부중(八部衆)과 부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여러 중생을 의미하는 여래팔부중(如來八部衆)으로 구분된다석탑에 조성 된 배경은 첫째가 밀교(密敎)의 영향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은 국난에 처했을 때 국가의 수호, 전쟁의 승리 등으로 발전되었고, 개인에게는 벽사(辟邪)의 기능을 팔부중이 하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화엄경(華嚴經)과 법화경(法華經)의 영향으로 화엄신중신앙(華嚴神衆信仰)의 한 형태로 화엄 불국토 세계와 정토 세계의 구현을 여래팔부중 이미지로 구체화하였기 때문이다.

동 삼층 석탑은 서 삼층 석탑 비해 다소나마 석탑을 형태를 갖추고 있다. 2중 기단 中 하층 기단은 약간 파손되었고 상층 기단, 1층 몸돌과 지붕돌, 그리고 2층 지붕돌, 3층 몸돌과 지붕돌만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특히 팔부중상(八部衆像)은 불법(佛法)을 옹호하고 불경(佛經)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는 사람들을 외호하는 신들로 석탑 석면(石面)에 나타난 위치는 방위에 관계없이 긴나라(緊那羅 : 사람 머리에 새의 몸, 혹은 말머리에 사람 몸의 모습마후라가(摩睺羅伽 : 관위에 뱀을 갖춘 모습), 아수라(阿修羅 : 얼굴은 三面이고, 팔은 여덟이고 손에는 칼 등 각종 持物을 갖춘 모습건달바(乾闥婆 : 음악의 신으로 獅子冠을 쓴 모습), 야차(夜叉 : 사자, 코끼리, 호랑이, 사슴, , , 나귀, 낙타, , 등의 모습(: 얼굴과 몸은 人形이나 뱀의 꼬리, 그리고, 머리 위에 龍形의 모습), (: 대체로 花冠을 지닌 天人像의 모습가루나(迦樓羅 : 人形에 새의 머리 모습) 등 각기 한 쌍씩 배열되어 있다. 상의 자세는 좌상(坐像)입상(立像)으로 구분되어 있고, 좌상의 경우는 운문(雲文) 혹은 연화문(蓮花文) 대좌(臺座)를 갖추었으며, 입상은 모두 암좌(岩座)를 구비하였다.

현재까지 조사된 신라 시대 석탑 팔부중상은 총 19기이다. 그리고 팔부중상의 최초 사례는 남산 창림사지(昌林寺址) 삼층석탑(원성왕 7, 791)이고 가장 우수한 조각의 팔부중상은 석굴암에 있는 팔부중상이다. 석탑에 나타난 문양 가운데 인왕상과 사방불, 십이지상에 이어 가장 늦게 나타난 양식이 팔부중상이다.
일반적으로 신장상(神將像)은 수미산 위에 사는 모든 신들을 통틀어 말하며, 무력으로 적을 항복시키며, 불법(佛法)을 옹호하고 불경(佛經)을 수지 독송(受持讀誦)하는 사람들을 외호하는 신들이다. 신장의 종류는 천부상무인상용왕상 등 3종류이며 천부상에는 제석천범천과 사천왕상 등 있고 무인상에는 금강역사(인왕상), 팔부신장(팔부중상), 십이신장(십이지신상등 있으며 용왕상에는 팔부용왕이 있다.

 우리나라 석탑에 있어서 신장상이 처음으로 등장한 곳은 선덕여왕 3(634)에 건립된 분황사 모전석탑의 금강역사상이다. 통일신라 7세기 후반 감은사지 삼층석탑, 고선사지 삼층석탑에서 門扉양식이, 이후 여러 신인상이 등장하였다.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는 헌강왕 886(헌강왕 12) 때 최치원(崔致遠)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령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은 헌강왕(憲康王)과 정강왕이 연이어 승하하는 바람에 비문을 짓지 못하다가  진성여왕 896(진성여왕 10)에 완성하였다. 비의 모습이나 탁본도 전혀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서산대사의 제자인 해안(海眼)이 최치원(崔致遠)의 문집에서 4개의 비문을 뽑아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불렀는데, 숭복사비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비문은 바로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필사본에 근거한 것이다. 숭복사비문에는 경문왕과 그의 자녀들인 헌강왕, 정강왕, 진성왕으로 이어지는 2() 4()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는 금당 터에서 동남쪽 10M 위치에 세워져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쌍귀부는 지금 국립 경주 박물관 정문 전면에 놓여있다. 쌍귀부 형태를 한 귀부는 가장 이른 애장왕 1(802)에 조성된 것으로 무장사지의 쌍귀부와 이부가 있고 그 다음이 숭복사지의 것이며 포항시 신광면의 법광사지 쌍귀부와 경주 남산 창림사지 쌍귀부는 동일한 형태이나 조성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현재 조성된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2013년 복원하였는데 쌍귀부는 국립 경주 박물관에 보관 중인 것을 복제하였고 이수도 고증을 통하여 복원하였다. 비문의 쌍계사의 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의 글씨를 집자하여 비문에 비신에 새겼다.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은 지리산 쌍계사의 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 만수산 성주사의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光塔碑), 초월산의 숭복사지비(崇福寺址碑), 희양산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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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사지(念佛寺址)는 양피사지에서 칠불암 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약 600m 떨어진 곳으로 통일신라시대 1금당 2탑식의 전형적인 사찰이다. 절의 규모는 경주시 남산동 1130번지 일원(면적 : 2,175)이고 삼국유사권 제5, 피은(避隱) 8 염불사(念佛師)조에 기록된 절이다.

삼국유사 염불사(念佛師)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산(南山)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避里村)이 있고, 그 마을에 절이 있는데 피리사(避里寺)라 했다. 그 절에 이상한 중이 있었는데 성명은 말하지 않았다. 항상 아미타불을 외어 그 소리가 성() 안에까지 들려서 360() 17만호(萬戶)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소리는 높고 낮음이 없이 낭랑하기 한결같았다. 이로써 그를 이상히 여겨 공경치 않는 이가 없었고, 모두 그를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다. 그가 죽은 뒤에 소상(塑像)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 안에 모시고 그가 본래 살던 피리사(避里寺)를 염불사(念佛寺)로 이름을 고쳤다. 이 절 옆에 또 절이 있는데 이름을 양피사(讓避寺)라 했으니 마을 이름을 따서 얻은 이름이다.

여기에 나오는 염불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알려진 내용이 없으나 삼국유사 5권 피은(避隱)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를 보면 정토신앙(淨土信仰)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따라서 염불은 관음신앙과 정토신앙이 관련된 것으로 추정 된다.

창건 시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기록을 살펴보며 당() 천보(天寶) 4(745) 이전으로 추정되므로 최소한 8세기 초에는 창건된 것으로 생각된다. 폐사 시기는 삼국유사<皇龍寺九層塔>조와 고려사(高麗史)<세가(世家)>의 내용을 참조할 때, 고려 고종 25(1238)의 원의 침입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폐사된 이후 조선시대 마을이 들어서면서 삼층석탑을 무너뜨리고 탑 부재를 석재로 이용하였다.

절 주위를 살펴보면 동편은 칠불암 진입로가 지나가고 서편에는 산자락이 산길을 사이에 두고 접해 있으며, 남편은 밭과 분묘가 분포하고 있다. 북편의 금당이 위치하는 곳에는 사찰과 민가가 들어서 있다. 2003년과 2008년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20091월에 동·서 삼층석탑은 모두 복원되었다. 2003년 발굴조사 이전의 동 삼층석탑은 북쪽으로 넘어진 상태로 일부 부재만 잔존하고 있었고, 서 삼층석탑은 서쪽으로 넘어진 상태로 각 부재가 남아 있었는데 주변으로 와편과 토기편이 산재하고 있었다.

불국사역 앞 삼층석탑은 염불사지의 동 삼층석탑의 탑재를 사용하여 1962년 복원하였고 1층 옥개석만 이거사지의 탑재를 사용했다. 2009년에 이루어진 복원작업에 따라서 원래 자리인 전 이거사지(傳移車寺址)로 옮겨졌다.

동 삼층석탑

2003년에 이루어진 발굴 조사 당시 옥개석편 3매와 하층기단면석 1매만 남아 있었고, 나머지 부재들은 1962년에 불국사역 앞으로 옮겨져서 1963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복원 당시 1층 지붕돌(옥개석)의 파손 정도가 심하여 부근의 이거사지(移車寺址) 석탑의 부재로 대신하였고, 원래의 1층 옥개석은 이설된 석탑의 뒤에 묻었다. 또한 현재의 노반석은 이설 당시에 새로 만들었다.

염불사지(念佛寺址) 동 삼층석탑
이거사지(移車寺址) 석탑의 지붕돌(옥개석)

동 삼층석탑은 이층기단에 3층의 탑신부(塔身部)를 갖고 있는 석탑으로 상·하층기단면석에 탱주(撑柱) 2, 지붕돌(옥개석)의 옥개받침 5단 등 전형적인 8세기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석탑이다. 하층기단면석은 8매의 돌로 결구되었는데, 탱주 1주는 별석(別石)으로 만들어졌다. 상층기단면석 역시 8매의 돌로 결구되었는데, 그 형식은 하층기단면석과 같다. 그 위의 상층기단갑석에는 각형2단으로 탑신받침이 있다. 몸돌(탑신석)은 양쪽에 우주(隅柱)가 조각되어 있고, 옥개석은 5단의 옥개받침과 2단 괴임이 있는 갑석과 갑석부연이 탑신석을 받치고 있다.

그러나 1층 옥개석 옥개받침의 최하단이 1층 탑신석의 폭보다 훨씬 넓은 것은 1층 옥개석의 부재가 이거사지에서 옮겨온 데 따른 것이다. 또한 상륜부(相輪部)는 노반석(露盤石)만 남아 있는데 노반석이 작은 이유는 복원 당시 잘못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1963년에 불국사 역 앞으로 이전된 동 삼층석탑의 복원된 전체 높이는 588이었지만, 염불사지로 옮겨서 복원된 석탑의 높이는 583.7이었다. 이는 새로 복원하면서 1층 옥개석과 노반석을 원래 형태에 맞춰서 새롭게 교체하면서 높이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여겨진다. 

서 삼층석탑

염불사지(念佛寺址) 서 삼층석탑

서 삼층석탑은 2003년 조사 당시 탑재가 도괴되었으나 하층기단면석 2, 하층기단갑석 1, 상층기단면석 3, 1·2·3층탑신석, 2·3층옥개석이 남아 있었다. 기단면석과 지대석은 1매석으로 처리되었고 각 부재의 크기는 동 삼층석탑과 비슷하여 같은 크기의 쌍탑으로 만들어졌다. 동 삼층석탑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던 사리공을 서 삼층석탑이 3층 탑신석에서 확인 되었는데 방형으로 너비 18, 깊이 10.5이다. 복원된 전체 탑 높이는 545이다.

염불사지 동, 서 삼층석탑은 경주지역 삼층석탑의 시원이었던 감은사지 삼층석탑의 기본구조를 따라 세워진 후대 삼층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복원 공사 후 남은 석탑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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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옛길은 산성산과 일광산 사이 기장읍 서부리 용소골에 있는 계곡 길이다. 용소골 지명은 옛날 이곳에서 용이 났다고 하여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 골짜기는 청강천 상류계곡에 해당되고 하류에는 둑을 막아 만든 용소골저수지가  있고 주변은 용소웰빙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기장초등학교 자리에는 옛날에 기장 동헌이 있었는데 동헌에서 남으로 큰 길을 만들고, 길의 동쪽은 동부동(東部洞), 서쪽은 서부동(西部洞)이라 하였다. 1914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서부동 일부가 서부리로 되었다,

용소윌빙공원 입구에서 바라본 산성산(성산)
용소웰빙공원 입구. 직진방향으로 저수지와 나란히 조성 된 길을 따라가면 기장 옛길 이정표를 만난다.

기장 옛길은 신라 갑화양곡현(505년)에서 비롯하여 이전 선사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이 넘나들던 유서 깊은 길이자 기장의 관문길이다. 옛날 용소 계곡 길의 상류 지역은 험한 바윗길로서 사람이나 우마차의 통행이 어려워 잔도(棧道)를 만들어 이용하였다. 이 옛길은 지역 주민들의 나들이 길이자 양산, 동래, 김해를 비롯하여 멀리 서울을 내왕하던 관리와 백성, 그리고 장꾼, 보부상, 남사당 등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었고 대한제국 말기까지 존속된 길이였다. 이 길은 일제강점기 때인 1932년 동래~기장간의 신작로 개설로 자연히 폐도 되었다. 최근 기장군에서는 이 옛길(약 200m)을 문화유적지 차원에서 보존 및 관리해 왔고 잔도(棧道)도 재현시켰다.

부산포항고속도로 교각 밑에 세워진 기장 옛길 안내 표지판
최근 기장군에서는 이 옛길(약 200m)을 문화유적지 차원에서 복원한 기장 옛길 입구

기장 옛길을 답사하기 위해서는 산성산 또는 성산 북쪽에 위치한 용소웰빙공원에 찾아오면 된다. 용소웰빙공원 입구에서 직진방향으로 저수지와 나란히 조성 된 길을 따라가면 부산포항고속도로 교각 밑을 지나다 되는데 산기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농막과 밭을 만난다. 5분 정도 걸어가면 기장 옛길 표지석을 마주하게 된다. 짧은 구간의 한적한 옛길을 거닐다 보면 조선시대 기장에서 군수 및 현감을 지낸 이해륜(李海崙), 엄신영(嚴信永), 손영희(孫永禧), 손경현(孫慶鉉), 오영석(吳榮錫), 송재우(宋載遇), 이경우(李敬佑) 등 7명이 1751년부터 이임으로 떠날 때 계곡 수 좌측 바위와 길 우측 바위에 이름을 새긴 것을 볼 수 있다. 이들 중 엄신영(嚴信永)과 손경현(孫慶鉉)은 시랑대에도 각석(刻石)을 하였다.

맨 먼저 볼 수 있는 각석은 군수(郡守) 이해륜(李海崙)으로 계곡 수 건너편 바위에 행(行) 군수(郡守) 이해륜(李海崙)을 새겼다.
행(行) 군수(郡守) 이해륜(李海崙)

맨 먼저 볼 수 있는 각석은 군수(郡守) 이해륜(李海崙)으로 계곡 수 건너편 바위에 행(行) 군수(郡守) 이해륜(李海崙)을 새겼다. 1897년 6월에 기장 군수로 부임해 왔고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청덕거사비(淸德去思碑)와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세워져 남아 있다. 여기 군수(郡守)는 기장이 기장현에서 1894년 갑오개혁이 단행되고 1895년(고종32년) 2차 개혁 때 동래도호부가 동래관찰부(東萊觀察府)가 되었고 그 아래 군이 되었을 때다.

다음 바위에는 엄신영(嚴信永)의 행(行) 군수(郡守) 엄신영(嚴信永)이 새겨져 있다.
행(行) 군수(郡守) 엄신영(嚴信永)

다음 바위에는 엄신영(嚴信永)의 행(行) 군수(郡守) 엄신영(嚴信永)이 새겨져 있다. 군수(郡守) 엄신영(嚴信永)은 1905년에 부임하였고 시랑대 바위에 엄신영 제우영(嚴信永 弟宇永)’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1904년 4월에 세워진 청덕거사비(淸德去思碑)와 1904년 10월에 세워진 유애불망비(遺愛不忘碑)가 남아 있다.

손영희(孫永禧)의 행(行) 군수(郡守) 손영희(孫永禧)가 새겨져 있는 바위
행(行) 군수(郡守) 손영희(孫永禧)

연이어 손영희(孫永禧)의 행(行) 군수(郡守) 손영희(孫永禧)가 새겨져 있고 군수(郡守) 손영희(孫永禧)는 1901년 8월에 부임하여 1903년에 이임하였다. 전임은 중추원 의관이었다.

계곡 수 좌측 바위에 새겨진 마지막 각석은 손경현(孫慶鉉)의 현감(縣監) 손경현(孫慶鉉) 영세불망(永世不忘)이다.
현감(縣監) 손경현(孫慶鉉) 영세불망(永世不忘)

계곡 수 좌측 바위에 새겨진 마지막 각석은 손경현(孫慶鉉)의 현감(縣監) 손경현(孫慶鉉) 영세불망(永世不忘)이다. 기장 부임 전 손경현(孫慶鉉)은 홍문관 교리로 1894년 9월에 현감(縣監)에 부임하여 1895년 11월에 이임하였고 이곳 시랑대의 글귀와 절경을 본 후 주변 바위에 세 글자 학사암(學士岩)과 시(詩)를 남겼다. 그리고 『기장현 읍지』 형성조에 의하면 “기장 현감 과 홍문관 교리를 지낸 손경현이 놀러 와서 학사암(學士嵓)이라 부르기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1895년 5월에 세워진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가 남아 있다.

옛길을 거닐다 보면 길가 안내 표지판에는 여근석(女根石)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바위 형상을 따서 여근석이라고 부른데 지형변경으로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신앙(性信仰) 즉 성기숭배신앙(性器崇拜信仰)은 신석기시대 이후 형성된 것으로 개인적인 목적은 기자(祈子)나 기복(祈福)이고 국가나 공동체 집단의 목적은 다산(多産)과 풍년, 풍어, 마을의 평안이다. 그러나 조선시대부터 유교의 영향으로 남호선호사상과 칠거지악에 의해 여인들의 고통과 아픔이 여근석(女根石)에 남아있으리라 생각된다.

옛길 우측에 3명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바위에 있는데 현감(縣監) 오영석(吳榮錫), 현감(縣監) 송재우(宋載遇)와 군수(郡守) 이경우(李敬佑)이다.

옛길 우측에 3명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바위에 있는데 현감(縣監) 오영석(吳榮錫), 현감(縣監) 송재우(宋載遇)와 군수(郡守) 이경우(李敬佑)이다. 현감(縣監) 오영석(吳榮錫)은 1892년 10월에 부임하여 1895년 11월에 이임하였고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1893년에 세워진 생사단(生祀壇)과 애민구해불망비(愛民捄海不忘碑)가 남아있다.

현감(縣監) 오영석(吳榮錫)과 현감(縣監) 송재우(宋載遇)의 각석

현감(縣監) 송재우(宋載遇)는 무관으로 1751년 9월에 부임하여 1753년 6월에 사직하였고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휼민선정 만고불망비(恤民善政 萬古不忘碑)가 남아 있다.

군수(郡守) 이경우(李敬佑) 영세불망(永世不忘)

군수(郡守) 이경우(李敬佑)는 1895년 5월에 부임하여 1896년 9월에 이임하였고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1896년 9월에 세워진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남아 있다.

산성산의 야경
용소웰빙공원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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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산에서 현존하는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보리사(배반동 산 66-2)는 비구니 사찰로 三國史記에 헌강왕릉(憲康王陵)과 정강왕릉(定康王陵)의 위치가 설명되어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이곳에 8세기 불상인 보물 제136호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보리사는 三國史記기록 이전부터 있었으며, 9세기에도 사찰은 존속해 있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보리사는 여러 차례에 걸친 공사로 창건 당시의 가람 형태를 알 수 없다.

보리사 대웅전
보리사 삼성각과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36)

보리사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장소에 위치하고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경주 남산에서 신체, 광배, 대좌 모두를 갖추고 있는 불상으로 통일신라 중기를 대표하고 있다. 불상의 크기는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 대좌 높이 1.22m이다. 석재(石材)는 광배석 1, 신체석 1, 대좌 4(지대석 1, 상대복련좌 1, 간주 1, 하대앙련좌 1)로 총 6매의 별석(別石)으로 되어 있다.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36호)은&nbsp;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 대좌 높이 1.22m이다.

석조여래좌상의 육계(肉髻)는 이중(二重)으로 표현된 나발(螺髮)이 덮여있는데 머리와 얼굴 경계의 윤곽이 매우 뚜렷하다. 적당한 살이 오른 얼굴은 다소곳이 아래를 향한 눈과 미소를 머금은 입 등과 함께 평온하면서도 조화를 이루어 신비로운 표정을 한 부처의 모습이다.  비대하지 않은 단정한 신체는 목에 삼도가 있으며 수인은 항마촉진인을 하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서 옷 주름은 층 단(層 段)을 이루며 신체 각 부위를 감싸고 있.

나룻배 모양의 광배(光背)는 화려하고 아름다운데 이중주형(二重舟形)으로 만들어 졌다. 광배의 내부 문양은 연꽃, 보상화(寶相華) 등 화문(花紋)과 화염문(火焰紋) 그리고 화불(化佛) 등으로 꾸며져 있다. 본존의 신체에 따라 굵은 선이 이중으로 돌려졌는데 선과 함께 큼직한 보상화 등 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선의 외부에는 불꽃 모양의 화염문, 내부에는 6구의 화불과 화문이 장식되었고 광배 상단 끝에도 하나의 화불이 표현되어 있다. 광배의 뒤 모습을 보면 상단이 반파(半破)되었음 알 수 있다. 최근 보존처리하여 복원되었다.

화불(化佛)과 화불사이에는 연꽃과 당초가 새겨져 있고 본존의 신체에 따라 굵은 선이 이중으로 돌려졌는데 선과 함께 큼직한 보상화 등 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대좌는 지대석 위에 복판연화대좌(複辦蓮華臺座)를 놓았고 그 위는 팔각받침을 3단으로 마련한 후 우주(隅柱)가 각출된 팔간 간주(竿住)를 세운 후 앙련(仰蓮)의 상대석(上臺石)을 얹어 놓은 구조이다. 이 상대석 역시 아래에서 간주와 만나는 부분에는 2단의 팔각 받침석을 마련했는데, 앙련(仰蓮)의 연화문은 단판(單瓣)이면서 중층(重層)으로 각출시켜 넉넉하게 마련하였다.

석가여래좌상은 수인을 보면 항마촉지인으로 석가여래로 불 수 있는데 광배 뒷면에 약사여래를 조성하였기 아미타여래로도 볼 수도 있다. 사방불을 조성한 바위를 보면 약사여래 맞은편에 아미타여래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당시 석공만이 알 수 있으리.

마애약사여래좌상(磨崖藥師如來坐像)

마애약사여래좌상은 석조여래좌상의 광배 뒷면에 얕은 돋새김(양각)과 선각으로 조각되어 있는 불상으로 마멸이 심하여 얼굴 등의 세부 모습은 확인하기 어렵다. 불상 높이 1.3m로서 연화문이 이중(二重)으로 된 앙련연화대좌 위에 여래상이 결가부좌하고 있다.

머리에 육계가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늘어뜨려져 있고, 목에는 삼도가 있으며 얼굴은 둥글다. 얇은 법의는 신체를 드러내 보여주며, 수인은 왼손에 둥근 약합(藥盒)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가슴 높이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광배는 석조여래좌상과 거의 동일하게 조각했으나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렵다. 외곽의 화염문은 어렴풋이 보인다.

정리되지 않은 석재가 모퉁이에 쌓여있다.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 유형문화재 제193)

보리사 주차장에 있는 안내표지판
마애불좌상 찾아가는 길.&nbsp;마애불좌상은 보리사에서 남쪽 미륵골 기슭을 따라 50m 가량 오르면 동쪽을 향해 절벽을 이루는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마애불좌상은 보리사에서 남쪽 미륵골 기슭을 따라 50m 가량 오르면 동쪽을 향해 절벽을 이루는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바위는 넓적한 반원형으로 높이와 폭은 약 2.4m이다. 바위를 감실형(龕室形)으로 광배를 움푹하게 파서 부조(浮彫)했는데 신체 높이는 1.2m이며 어깨 너비는 60이다. 바로 앞에는 제단석이 놓여 있다.

보리사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 유형문화재 제193호)
마애불좌상 바로 앞에는 제단석이 놓여 있다.

머리는 낮은 육계로 표현되었고 두 귀는 옷깃에 닿을 듯 내려왔고 삼도가 있는 목은 짧다. 살이 올라 퍼진 얼굴은 사각에 가깝고 궁()눈썹에 가는 눈, 넓적한 코와 꽉 다문 입술 등의 표정 속에는 친근한 표정을 느낄 수 있다. 법의는 통견인데 수인은 옷 주름이 덮고 있어 알 수 없으며 결가부좌한 하체 역시 상체에서 내려온 옷 주름이 덮여 있다. 대좌는 3잎의 중판연화가 앙련(仰蓮)인 상태로 표현되어 있다.

 조성연대는 석가여래좌상 보다 후대로 보고 있으며 통일신라후기 불상으로 추정된다.

마애불좌상을 조성한 바위뒤 끝부분에는 홈이 파여져 있는데 조성 당시 추가 공사를 하다가 중단된 것 같다.
마애불좌상에서 바라 본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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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 탑골 신인사지(神印寺址, 배반동 산69번지)에는 보물 제201호로 지정된 마애조상군이 있다. 또는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이라고도 부른다. 바로 옆에는 옥룡암(玉龍庵)이 위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학자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가 이 부근에서 神印寺라 새겨져 있는 기와명문을 발견했다고 하여 신인사지로 전해지고 있다. 마애조상군 남면에서 많은 기와조각과 무늬막새가 발견되어 이곳에 목조건축물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옥룡암 앞 안내표지판. 탑골은 길이가 약 2km로서 동남산에서는 두번째로 긴 계곡이다. 탑골마을에서 개울을 거슬러 약 40m쯤 들어가면 옥룡암이라는 절이 있고 절 뒤에 부처바위와 삼층석탑이 서 있다.
옥룡암 입구.&nbsp; 옥룡암은 1924년 박일정 스님에 의해서 창건됐다고 한다. 옥룡암이라고 불린 것은 옛날 이곳에 푸른색 옥이 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은 암자의 명칭이 불무사(佛無寺)로 변경됐지만 옥룡암으로 더 알려져 있다.

신인종의 창시자인 명랑법사가 당나라 수군을 물리치기 위해 사천왕사에서 오색비단을 이용하여 절 모양을 만들고 풀로써 동, , , , 중앙의 오방신장을 만들어 신인비법인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한 것처럼 사천왕사지를 바라보고 있는 이곳 신인사에서도 바위에 사방불(四方佛) 즉 마애조상군을 조성하고 창건하여 삼한통일을 위해 문두루비법을 또한 하였으리라 추정된다. 또한 바위에 새겨진 조각수법을 보아 제작연대도 7세기중엽으로 판단된다.

마애조상군, 부처바위와 삼층석탑

마애조상군은 바위의 동, , , 북 사방(四方)에 여래(부처)를 새겨 조성하였기 때문에 사방불암(四方佛巖)이라고 하고 이곳 마을에서는 부처바위라고 부른다. 신라시대 사방불암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내용도 다양하다. 1988년 마애불상군에 대한 탁본 및 실측조사를 하여 여래상, 보살상, 비천상, 탑상 등 35구가 새겨져 있음이 확인되었고 2006109월에 바위 동면에 비천상과 스님상이 추가로 발견되어 총 37구가 새겨져 있다. 만다라(蔓茶羅)적인 조각이 회화적으로 묘사 된 한 폭의 불화를 보는 느낌인데 밀교의 불경 내용을 요약한 삽도그림 변상도(變相圖)인 것 같다.

부처바위에 새겨진 상()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옷자락이 손을 가리고 있는 것, 연꽃잎이 넓게 표현된 것, 신라시대 불교 초기의 모습인 천진난만하고 친근감 있는 모습, 아미타여래의 눈이 하현달 모양으로 새겨져 화사한 웃음을 나타낸 것, 상현좌를 한 것, 금강역사가 금강저를 들고 무장한 것 등 이다.

사방불암(四方佛巖), 부처바위의 북면

부처바위 북측 입면도

부처바위 중 가장 높은 높이 9m, 6m의 북면 바위에는 여래 1, 2, 비천(飛天) 2, 사자 2구 등 7구가 새겨져 있다가장 눈에 띤 것은 탑으로 9층탑과 7층탑의 목탑이다. 9층탑은 기단부(基壇部)가 이중기단으로 높이 2m, 너비 2.m이고 탑신부(塔身部)의 1층 탑신에는 출입문이, 2층부터는 창문이 2개씩 있다. 옥신(지붕)의 층이 올라갈수록 추녀의 넓이와 옥신의 높이는  조금씩 축소되어 3m 높이에서 삼각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옥신의 추녀 끝마다 풍경이 달려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높이가 2m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등 있다.

부처바위 북면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7층탑도 층수만 다를 뿐 모양이나 조각수법은 동탑과 유사하다. 신라 때 새겨진 이 탑들을 통하여 몽고군의 침입 때 불타 없어진 황룡사 9층 목탑(645)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9층탑과 7층탑 사이 위쪽 중앙에는 연화대좌 위에 좌상을 하고 있는 석가여래가 있다. 두 손은 무릎 위에 선정인을 표시한 듯 옷자락에 두 손이 가려져 있기 때문에 정확한 수인은 알 수 없다. 둥근 두광은 햇살 같은 연꽃을 새겨서 밝고 생기가 넘치는 것 같다. 연화대좌는 꽃잎이 네 개로 되어있는데 두 개의 꽃잎은 날개처럼 뻗어 있어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느낌을 준다.

9층목탑과 석가여래
9층목탑의 풍경
석가여래와 천개
7층목탑과 훔사자

여래 머리 위에는 부처의 권위를 표현코자 햇빛을 가려주는 천개가 있는데 보통 절 법당 안에서 볼 수 있다. 마름모를 한 줄로 투각한 넓은 천개 위에 두 겹으로 연꽃잎을 장식하였고, 밑으로는 헝겊으로 접은 수실을 늘인 다음 포장을 늘여 놓았다. 이 또한 바위를 통해 신라시대 천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9층 목탑과 7층 목탑 앞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있는데 불국정토를 지키는 성스러운 짐승이다. 9층탑 앞 사자는 입을 벌리고 오른쪽 발은 힘차게 땅을 딛고 왼발은 들어 올렸으며, 꼬리는 깃발처럼 세 갈래로 나뉘어 날리고 있다. 목에 털이 없어 암사자로 보인다. 7층탑 앞 사자는 입을 다물고 오른발을 들고 있으며, 꼬리가 아주 복잡하다. 목에 긴 털이 많아 숫사자로 보인다. 입을 벌린 사자는 아사자라 하고 입을 다문 사자는 훔사자라 하는데, 닫힌 세계와 열린 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음과 양을 합친 모든 세계를 부처님이 다스린다는 뜻이다.

9층목탑 아래 아사자
7층목탑 아래 훔사자

천개 위로 비천(飛天) 두 구가 날고 있는데 아름다운 천녀들이 하늘을 날면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꽃을 뿌리는 모습이다. 마멸이 심하여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렵다.

천개 위로 비천(飛天) 두 구가 날고 있는데 마멸이 심하여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렵다

사방불암(四方佛巖), 부처바위 서면

부처바위 서측 입면도

높이 6m, 6m의 서면 바위에는 여래 1, 비천 2, 수목 2구 등 5구가 새겨져 있다. 연화대좌 위에 약사여래가 앉아 있고 오른쪽에 神樹가 늘어져 있고 왼쪽에는 대나무로 추정되는 나무가 있다. 약사여래는 네모에 가까운 갸름한 머리에 자그마한 육계가 솟아 있고, 귀는 어깨에 닿아 있으며, 가는 눈은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길고 입을 꼭 다물고 있는데 근엄한 표정이다머리에 비해서 조금 작은 몸체는 반듯하고 두 무릎은 연화대좌 위에 평행으로 놓여 있고 두 손은 선정인 같은데 옷자락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다두광은 연주문으로 둥글게 연꽃을 새기고 그 가장자리에 구슬을 늘어뜨려 있고 두광 주위에는 화연문모양으로 불길이 새겨져 있어 화려하다.

약사여래

여래 위에 있는 비천상은 피리를 불면서 날아가고 있고 여래 왼쪽의 비천상은 마멸이 심하여 식별이 어렵다.

약사여래 위의 비천상으로 마멸이 심하다.
약사여래 왼쪽의 비천상으로 식별이 안된다.

사방불암(四方佛巖), 부처바위의 동면

부처바위 동측 입면도
2006년 10월 9월에 바위 동면에 비천상과 스님상이 추가로 발견된 위치

북쪽으로부터 첫 번째 바위 면에는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아미타여래가 있다. 머리 위에 나지막한 육계가 솟아있고, 눈은 하현달 모양으로 새겨져 화사한 웃음을 나타내고 있다. 둥근 두광에는 연꽃이 이중으로 새겨져 있고 두광의 외곽은 연주문(連珠紋)으로 둘러져 있다. 두 팔은 경사를 이루면서 연결되어 삼각형에 가까운 몸체를 이루고 있다. 풍성한 두 무릎은 연화대좌 위에 편안하게 놓여 있다. 여래 왼쪽에는 관세음보살로 추정되는 보살이 연꽃에 앉아 있는데 양 어깨에는 천의가 덮여져 있고 두 손을 들어 가슴 앞에 합장하고 얼굴은 여래를 향하고 있다. 또한 둥근 두광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첫번째 바위의 삼존불과 가릉빈가, 비천
아미타여래와 관세음보살

보살 아래에는 네모난 방석에 앉은 스님이 향로를 받들고 여래를 향하여 염불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여래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로 추정되나 마멸이 심하여 그 모습을 전혀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삼존불인 경우 중앙의 주불 중심으로 좌우 협시보살이나 또는 주불에 따라 좌우에 여래를 배치한다. 여기서는 왼쪽에 관세음보살로 추정되는 보살이 배치됨에 따라 오른쪽은 대세지보살로 여겨진다.

여래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로 추정되나 마멸이 심하여 그 모습을 전혀 알 수 없다.
네모난 방석에 앉은 스님이 향로를 받들고 여래를 향하여 염불하는 모습

이 외에 여래 둘레와 위에는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하고 있다는 상상의 새 가릉빈가 1,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천상 6구가 새겨져 있는데 꽃을 뿌리며 혹은 꽃 접시를 들고 혹은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찬미하는 모습들이다. 비천들의 옷자락은 춤을 추며 나부끼니 같이 생동감이 있다.

아미타여래 오른쪽 위의 가릉빈가와 비천
관세음보살 위쪽의 비천 3구
왼쪽 끝부분의 비천

두 번째 바위 면에는 보리수와 사라수로 보이는 두 그루의 나무아래 결가부좌로 앉아 명상에 잠겨 앉아있는 스님이 있고, 왼쪽에도 스님이 있는데 육안으로는 식별이 안 된다. 그리고 맨 위쪽에도 비천상이 있는데 이 또한 육안으로는 식별이 안 된다.

보리수와 사라수로 보이는 두 그루의 나무아래 결가부좌로 앉아 명상에 잠겨 앉아있는 스님
2006년 10월 9월에 발견 된 스님상이나 식별이 안된다.

세 번째 바위 면은 높이 4m 가량 되는 기둥바위인데 동쪽을 바라보며 삼지창을 든 신장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금강역사상으로 추정되나 마멸이 심하여 식별이 안 된다. 초기에는 맞은편에도 돌기둥이 있어 금강역사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초기 옛날에는 이곳이 절의 입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지창을 든&nbsp; 금강역사이나 식별이 안된다.

사방불암(四方佛巖), 부처바위 남면

부처바위 남측 입면도
마애조상군, 부처바위 남면에서 기와조각과 무늬막새가 발견되어 이곳에 목조건축물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높이 2.72m, 6.06m의 남면 바위는 가운데가 갈라져서 두 개의 벽면으로 병풍처럼 놓여 있는데 여래 1, 보살 2, 스님 2, 수목 2구 등 7구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 바위 앞에는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왼쪽 바위에는 큰 연화대좌 위에 여래가 결가부좌 하여 앉아 있고 좌우에 협시보살이 앉아 있다. 옷자락이 무릎 아래로 내려와 대좌를 덮고 있는 상현좌를 하고 있다. 얼굴은 마멸이 심하여 알 수가 없다. 둥근 두광에는 햇살처럼 연꽃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과 수목인 보리수나무
보리수나무

좌우 협시 보살들은 연꽃송이에 앉아 두 손을 마주 합장하고 있다. 오른쪽 보살과 달리 왼쪽 보살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깨가 여래 쪽으로 기울여진 자세다. 두 보살의 얼굴은 마멸이 심하여 그 방향을 알 수 없는데 보살들의 두광이 갸름하게 타원형으로 되어 있어 얼굴을 여래 쪽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존불 왼쪽에는 보리수나무가 있다.

오른쪽 바위 중앙 아랫부분에 얕은 감실을 파고 그 안에 좌상이 새겨져 있는 스님이 있는데 선정에 든 것 같다. 얼굴은 갸름하고 몸체는 작은 편이며 무릎은 넓어 편안해 보인다.

좌상을 하여 선정에 든 스님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오른쪽 바위에 새겨져 있는 스님 상을 가리고 1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한눈에 허리가 매우 잘록함을 느낄 수 있고 마애상과는 시대적 차이가 뚜렷하다. 대석(臺石)과 신체석(身體石) 2개로 이루어졌는데 전체 길이는 2m, 방형 대석의 높이 25, 길이 1.3m이다. 대석에는 발만 새기고 발목 이상은 한 돌로 신체석에 조각하였다. 제작연대는 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석조여래입상

얼굴은 윤곽이 거의 안보일 정도로 파손되었고 광배 상단 역시 유실되었으나, 신체는 거의 완전하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수인은 좌상에만 나타나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데 왼손은 배 위에 오른손은 허벅지 앞에 가지런히 놓아두게 표현하였다. 어깨는 넓고 가슴은 풍성하고 허리는 가늘다. 가는 허리에서 곡선을 그리며 풍성한 엉덩이를 이룩하고 기둥 같은 두 다리로 선은 이어진다. 두 팔에 새겨진 옷주름들도 근육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데 얼굴, 가슴, 엉덩이, 허리는 여성적이고 팔은 남성적이다.

통견인 법의는 볼륨감 있는 신체의 특성을 그대로 살려줄 정도로 얇은 주름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지역 마을에서는 여래의 왼손이 배에 대고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안산불(安産佛)로 신앙되어 왔고 여기서 기도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하여 많은 여인들이 찾았다고 한다.

석조여래입상에서 정면으로 12m 밖에 석등(石燈)을 세웠던 흔적이 자연바위 위에 남아있다. 크기는 230, 너비 185, 높이 60, 간공 지름 15, 간공 깊이 12이다. 석등 바로 동남쪽에 삼층석탑이 서있고 삼층석탑과 삼존불 사이에 큰 바위들이 가로로 놓여 있는데, 그 중간 바위벽면에 명상에 잠겨 있는 스님이 남쪽으로 앉아 합장하고 있다.

자연바위 위에 석등(石燈)을 세웠던 흔적
명상에 잠겨 있는 스님

삼층석탑은 단층기단 위에 서 있는 석탑인데, 옥개받침이 3단으로 되어 있고 새긴 솜씨도 둔박하여 통일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한다. 낙수면 모서리에 추녀마루가 새겨져있고 그 끝머리에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여기에 풍경을 달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높이가 4.5m밖에 안 되는 작은 탑이나 높은 언덕 위에 솟아 있으므로 멀리서도 보인다. 이에 이곳 동네사람들은 이 계곡을 탑골이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옥룡암(玉龍庵)과 민족 저항시인 이육사

이육사 문학관(경북 안동) 자료에 의하면 이육사가 1936(32)1942(38)에 경주 옥룡암에 찾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옥룡암은 1924년 박일정 스님에 의해서 창건됐다고 한다. 옥룡암이라고 불린 것은 옛날 이곳에 푸른색 옥이 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은 암자의 명칭이 불무사(佛無寺)로 변경됐지만 옥룡암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육사는 1936년에 8월에 오랜 감옥 생활로 쇠약해진 몸을 옥룡암에서 잠시 휴양하였고 이때 84일에 신석초에게 엽서를 썼는데 720일 서울을 떠나 대구를 거쳐 29일 포항에 도착하여 머물다가 8월에 옥룡암으로 온 것이다. 이육사에게 옥룡암을 소개 한 이는 고암 박곤복(경주 건천읍 화천리 출신)으로 당시 욕룡암 주지 스님과 잘 아는 사이였다. 고암 박곤복은 육사보다 8살이나 많았지만 육사를 각별하게 대했다. 19427월에 폐질환으로 이육사는 다시 옥룡암을 찾아 요양을 하였다. 그는 옥룡암에 3개월 정도 머물 예정이었으나 백형 이원기의 타계로 서둘러 귀향하였다. 

20047월에 옥룡암에서 옥룡암에서 신석초에게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육사의 미발표 시조 2편이 발견되었다. 이육사와 신석초는 형제처럼 가까이 지낸 이로 알려져 있다.

옥룡암에서 신석초에게

뵈올가 바란 마음 그 마음 지난 바램

하로가 열흘같이 기약도 아득해라

바라다 지친 이 넋을 잠재올가 하노라

잠조차 없는 밤에 []태워 안 젓으니

리별에 []든 몸이 나을 길 없오매라

저달 상기 보고 가오니 때로 볼가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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