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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자락 남산동에 수백 년 된 배롱나무와 연꽃 그리고 정자가 어울러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서출지(書出池, 경주시 남산117)라고 불리는 신라시대 연못이 있다. 특히 배롱나무 꽃이 만발한 7~ 9월과 연꽃이 피는 7~ 8월에는 장관을 이루어 경주를 찾는 관광객이며 꼭 찾는 곳이다. 서출지에 있는 정자는 이름은 이요당(二樂堂)으로 팔작지붕의 정면 3, 측면2칸의 자형 건물로 조선 현종 5(1664) 풍천 임씨 임적이라는 사람이 지었다. 석조기둥을 사용하여 최대한 연못 가까이 세웠기 때문에 정자가 마치 연못에 떠있는 같이 보인다.

늦가을날 서출지의 이요당

서출지라는 연못의 이름 유래는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 사금갑(射琴匣)과 관련 있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21대 소지왕(炤智王) 또는 비처왕(毗處王) 즉위 10(戊辰, 488) 정월 15일남산 기슭에 있는 천천정(天泉亭)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나타나서 그중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보시오하였다.

이때 왕이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따르게 했다. 기사가 남쪽 피촌(避村; 지금의 남산 동쪽 기슭 壤避寺村) 이 못에 이르러 보니,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다. 이것을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잃어 버려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한 노인이 못 속에서 나와 봉투를 기사(騎士)에게 건네줘 그것을 돌아와 왕에게 올렸다.

왕이 봉투를 살펴보니 겉봉에 이 봉투를 떼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떼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왕은 두 사람을 죽게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떼어 보지 않아 한 사람만 죽게 하는 것이 낫겠다.하여 봉투를 뜯지 않았다. 이때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라 한 것은 서민(庶民)을 말한 것이요, 한 사람이란 바로 왕을 말한 것입니다.하여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떼어 내용을 보니 금갑(琴匣)을 쏘라(射琴匣]) 고 적혀 있었다. 왕은 곧 궁중으로 들어가 거문고 갑()을 쏘았다. 그 거문고 갑 속에는 내전(內殿)에서 분향수도(焚香修道)하고 있던 중이 궁주(宮主)와 은밀히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발각되어 두 사람을 사형(死刑)에 처했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왔다 하여 못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오곡밥을 조금씩 담 위에 놓는데, 까마귀를 위함이다. 그리고 매년 정월 십이지일(十二支日) 중 첫 돼지날(上亥日), 첫 쥐날(上子日), 첫 말날(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고 피하여 함부로 출입하지 않았다. 이언(俚言)에 이것을 달도(怛忉)라고 하였다.

신라의 불교 공인은 법흥왕 때 이루어졌다. 사금갑(射琴匣)을 통하여 불교 공인 이전부터 왕실에서는 불교를 믿고 궁궐 내에 절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화랑세기에 의하면 소지왕(炤智王)에게는 부인이 2명 있는데 정비 선혜부인과 후비 벽화부인이다. 여기에 등장한 궁주는 선혜부인이고 중은 묘심이다. 벽화부인은 당시 신라 사회에서 미모가 출중했으며 소지왕이 5009월 날이군(경북 영주)에 행차했을 때 후비로 맞이했고 그녀의 나이는 열여섯 살 이였다. 2개월 후 11월에 소지왕은 생을 마감했다. 벽화부인은 섬신공 파로와 벽아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남동생은 화랑의 시조인 위화랑이다.

소지왕은 20대 자비왕의 맏아들로 어릴 때부터 효성스러웠고, 겸손함과 타인을 공경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즉위 9(487)에 각 지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관도(官道)를 개척하였다. 또한 즉위 12(490)에는 도읍인 경주에 처음으로 시장을 열어 각 지역의 물자를 유통시킴으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강화, 확립하려했다. 또한 고구려 침입에 대비하여 즉위 15(493)에 백제 동성왕의 결혼요청을 받아들여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힘든 상황은 가뭄, 우박 등 천재지변과 고구려, , 말갈 등의 외침이었다. 말년에는 경국지색의 벽화에 마음이 사로잡힌 것이 그의 치세에 흠결 이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3 소지 마립간에 벽화와의 만남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2년 봄 3, 왜인이 장봉진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여름 4,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났다. 서울 사방에 누런 안개가 끼었다.

가을 9, 왕이 날이군에 행차하였다. 이 군에 살고 있는 파로라는 사람에게 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벽화라고 하였다. 나이는 열 여섯 살인데 실로 일국의 미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비단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채색비단을 덮어 왕에게 바쳤다. 왕이 음식을 진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열어 보니 얌전한 어린 소녀였다. 왕은, 이는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여겨 받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대궐에 돌아오자 그녀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왕은 두 세 차례 평복으로 갈아입고 그 집으로 찾아가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 어느 날은 도중에 고타군을 지나다가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다. 왕이 노파에게 물었다.

오늘날 백성들은 국왕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노파가 대답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소. 왜냐 하면, 내가 듣건대 왕은 날이군에 사는 여자와 관계하면서 자주 평복을 입고 다닌다 하오. 무릇 용의 겉모습이 고기와 같이 생겼다면 어부의 손에 잡히는 것이라오. 지금의 왕은 만승의 지위에 있는데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니 이런 사람이 성인이라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소?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하여, 즉시 남모르게 그녀를 맞이하여 별실에 두었다.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다겨울 11, 왕이 별세하였다.

연꽃이 피는 7월 ~ 8월의 서출지와 이요당

서출지라는 연못은 강원도 강릉에도 있다. 강릉 남대천 남쪽 연화봉 아래에 있는 연못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다음과 같다.

신라 진평왕 때 무월랑이라는 풍류남아가 강릉에 고을살이로 왔고, 그때 강릉 땅에 연화라는 젊은 처녀가 있었다. 연화와 무월랑이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무월랑이 경주로 되돌아가서 헤어졌을 때, 연화가 키운 잉어가 대신 편지를 전해주었다고 하여 서출지 또는 양어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을 하여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요당지(二樂堂池)에게 서출지 자리를 빼앗긴 양피제(讓避堤)

삼국유사사금갑에 나오는 피촌(避村), 피리사촌(壤避寺村)은 삼국유사 4권 피은(避隱) 8 염불사(念佛師)에 따르면 양피사지(讓避寺) , 서 삼층석탑 옆에 있는 양피저수지가 바로 서출지(書出池)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이요당이 있는 연못, 이요당지(二樂堂池)가 서출지(書出池)로 바뀌어졌다.

양피사지(讓避寺) 동 삼층석탑과 산수당(山水堂)
산수당과 양피저수지

동경잡기(東京雜記)에도 이요당(二樂堂)서출제(書出堤)에 대하여 지()와 제()로 구분하여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요당(二樂堂) 금오산 동쪽 기슭에 있다. 그 고을 사람 임적(任勣)이 지은 객당(客堂)이다. 앞쪽은 연못을 대하고 있는데 돌을 쌓아 층계를 만들고 인하여 누정(樓亭)을 지었다. 그 위에 올라가 보면 완연히 물 가운데 서있는 것 같다. 연못에 연꽃을 가득 심어 놓았는데 가을이면 무성하게 피어 만 떨기의 붉은 꽃이 찬란히 난간까지 비친다.

서출제(書出堤) 금오산 동쪽 기슭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1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7섬의 볍씨를 뿌린다.

양피저수지이자 서출제

양피저수지 옆에는 풍천 임씨(豊川 任氏) 소유의 산수당(山水堂)이 있다. 산수당은 풍천 임씨(豊川 任氏) 후손들이 1941년에 지어진 것을 2007년에 5칸 팔작지붕으로 증축했다. 3월에는 벚꽃, 7~ 10월에는 연꽃, 배롱나무 꽃이 절경을 이루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풍천 임씨(豊川 任氏) 시조는 임온(任溫)으로 중국 소홍부 자계현 사람이다. 임온의 6세손 임주(任澍)1275년 고려 충렬왕의 왕비이자 원나라 황녀인 제국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귀화하여 대장군을 지내고 풍천(豐川)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풍천은 황해도에 있었던 옛 지명이다. 임적은 풍천 임씨 19세손이다.

산수당과 양피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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