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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6대 지마왕릉(祇磨王陵, 경주시 배동 산30번지)은 서남산 포석정 남쪽 200m 지점에 있다. 능은 계단식 지형을 이용하여 조성하였고 원형봉토분으로 직경 12.7m, 높이 3.3m이다. 남쪽아래에는 배동 석조여래삼존불상이 있다. 지마왕릉(祇磨王陵)의 위치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기록에는 없다. 

신라 6대 지마왕릉(祇磨王陵)은 서남산 포석정 남쪽 200m 지점에 있고 계단식 지형을 이용하여 조성하였으며 원형봉토분으로 직경 12.7m, 높이 3.3m이다.

지마이사금(祇磨尼師今)성은 박씨(朴氏)이며 지미(祇味) 또는 지마(祇磨)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이고, 어머니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사성부인(史省夫人)이며, 비는 갈문왕 마제(摩帝)의 딸 애례부인 김씨(愛禮夫人 金氏)이다.

서기 112년에 즉위하였고 치적은 가야와 왜와 말갈의 침입을 격퇴한 것이다. 기록을 보면 즉위 4(115)5(116)에는 친히 병력을 이끌고 황산하(黃山河: 낙동강 하류)를 건너 가야를 공격하였다. 즉위 14(125) 말갈군이 대령책(大嶺柵:대관령)으로 쳐들어 왔으나 물리쳤다. 재위 23년에 아들이 없이 죽었다.

지마왕릉(祇磨王陵)의 묘제 양식은 6세기 중엽부터 통일신라 때의 횡혈식석실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지마왕릉(祇磨王陵)은 조선 영조 6(1730)에 박씨 일족이 주장하였고 능 앞의 표석은 박씨 문중에서 고종 8(1871)에 세웠다박씨 일족이 주장하여 제()를 지내는 신라 박씨 왕릉은 ,지마왕릉, 일성왕릉, 아달라왕릉, 신덕왕릉, 경명왕릉, 경애왕릉 등 모두 6기이다.

혼유석 형태의 상석은 1955년 박응수씨가 설치하였다. 묘제 양식은 6세기 중엽부터 통일신라 때의 횡혈식석실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혼유석 형태의 상석은 1955년 박응수씨가 설치하였고 표석은 박씨 문중에서 고종 8년(1871년)에 세웠다.

능 앞에 있는 상석(床石)의 변천 및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상석(床石)은 제수(祭需)를 진설하는 곳이자 능의 정면을 가리키는 역할을 하는데 신라 왕릉에서 상석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무열왕릉이고 흥덕왕릉 이후에는 설치되지 않았다.

상석의 형태는 여러 개의 장대석을 조립한 초기의 상석(무열왕릉, 신문왕릉)과 두꺼운 큰 판석 6매를 이용한 탁자형 상석(성덕왕릉, 원성왕릉, 경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으로 구분된다. 특히 탁자형 상석에는 전면 또는 후면에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의 왕릉에서는 정자각(丁字閣)이 등장하여 이곳에서 제수(祭需)를 진설하였고, 능의 앞의 상석은 혼유석(魂遊石)이라 하여 영혼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의미와 명칭이 바뀌어졌다. 따라서 신라 왕릉에 설치된 혼유석 형태의 상석은 조선후기 또는 일제 강점기 때 김씨 일족과 박씨 일족, 석씨 일족이 설치한 것이다.

신라 6대 지마이사금(祇磨尼師今, 재위 112~134, 2110개월)

「󰡒어느 날 파사이사금이 태자 지마를 데리고 유찬의 연못으로 사냥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지부에 들렀다. 이때 이찬 허루가 왕 일행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모두들 취했을 무렵 허루의 아내가 한 처자를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다. 그러자 마제의 아내도 자신의 딸을 불렀는데 태자의 마음에 들었다.

이것을 본 허루가 질투를 하자 파사왕이 허루에게 이 곳 땅 이름이 대포(큰 부엌)인데, 공이 이곳에서 훌륭한 음식과 좋은 술을 차려 잔치를 베풀어 즐겁게 하니, 직위를 주다(酒多:술이 많음)라고 하여 이찬 위에 두어야 마땅하겠다.”라고 벼슬을 내려 무마하고, 마제의 딸을 태자의 배필로 삼았다. 주다는 뒤에 각간이라고 불렀다.

지마이사금(祇磨尼師今)의 주요 일대기를 보면, 즉위 22,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창영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옥권을 파진찬으로, 신권을 일길찬으로, 순선을 급찬으로 임명하였다.

3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왔고 여름 4월에 홍수가 났다. 죄수들를 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42, 가야가 남쪽 변경을 약탈하였고 7, 왕이 가야를 직접 공격하였다.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 낙동강 하류)를 지나는데 가야인들이 숲 속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기다렸다. 왕은 이를 모르고 곧바로 전진하였는데, 복병이 나와 왕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왕은 군사를 지휘하여 맹렬히 싸워 포위를 뚫고 퇴각하였다.

58, 장수를 보내 가야를 공격하게 하고, 왕은 정병 1만을 거느려 뒤를 이었다. 가야는 성을 닫고 굳게 수비하였다. 그 때 마침 비가 오래 내렸으므로 왕은 되돌아 왔다.

10년 정월, 익종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흔련을 파진찬으로 임명하고, 임권을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2, 대증산성을 쌓았고 4,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11년 서울 사람들이 왜병이 크게 몰려온다는 헛소문을 듣고 앞 다투어 산골짜기로 피난하였다. 왕은 이찬 익종 등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123, 왜국과 강화하였다.

14년 정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크게 공격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가을 7월에 그들은 다시 대령 책을 습격하고 이하를 넘어왔다. 왕은 백제에 글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고, 백제는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돕게 하였다. 적은 이 소식을 듣고 물러갔다.

8, 이찬 창영이 사망하자, 파진찬 옥권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에 참여시켰다. 212, 궁궐 남문이 불탔다. 238, 왕이 별세하였으나 아들이 없었다.

배동 석조여래삼존불상에서 지마왕릉 방향으로 오솔길을 따라 출발하여 만나는 태진지라는 작은 연못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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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산사(甘山寺)는 경주시 내동면(內東面) 신계리(薪溪里)에는 사찰로 신라 성덕왕(聖德王) 18(719)에 중아찬(重阿湌) 김지성(金志誠 또는 金志全, 652720)이 자신의 장전(莊田)을 희사(喜捨)하여 성덕왕과 이찬 김개원(金愷元, 645720년 경)의 복을 빌고 그의 가족 안녕과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630년 경 678년 경) 일길찬(一吉, 7위 관등)과 어머니 관초리 (官肖里, 632698년 경)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다.

김지성(金志誠)6두품 출신으로 집사부 시랑을 역임한 인물이며 67세에 성덕왕 17(718년) 무오년에 벼슬을 버리고 장전(莊田)인 감산장(甘山莊)에 있다가 그 다음 해인 성덕왕 18(719) 기미년에 왕의 특명으로 다시 기용되어 나갈 때, 감산장(甘山莊) 자리에 절을 세우고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석조아미타불입상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 불사를 끝낸 다음 해인 성덕왕 19(720) 경신 422일에 69세로 사망하였다.

김지성(金志誠)의 부모는 아버지 인장(印章) 일길찬은 나이 47세에 돌아가서 화장 후 동해 흔지(欣支, 지금 영일의 옛 이름) 해변에 산골하였고 어머니인 관초리 부인은 나이 66세에 돌아가서 화장 후 또한 동해 흔지 해변에 산골하였다.”
그의 일가는 아우인 김양성(金良誠) 소사(小舍, 13위 관등)와 누님인 고파리(古巴里)와 전처(前妻)인 고로리(古老里), 후처인 아호리(阿好里), 서형(庶兄)인 김급한(金及漢), 일길찬 김총경(金聰敬) 대사(大舍, 12위 관등), 누이동생인 수혜매리(首兮買里)이다.

이찬 김개원(金愷元)을 거명하고 있는 것은 김개원과 특별한 친족 관계거나 어떤 혈맹(血盟)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김개원은 당시 정치실력자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604661)와 문명부인과사이에 태어 난 61녀의 막내아들로  효소왕(, 687702) 4(695년)에 수상인 상대등에 올랐고 효조왕이 16세에 후사 없이 돌아가자 13세의 효소왕의 동생 성덕왕을 보위에 올려놓은 태종 무열왕계의 수장이다.
김개원의 누나들은 김흠운(金運, 631655)의 처 요석공주(瑤石, 631년 경?)와 김유신(金庾信, 595673)의 처 지소부인(智炤, 640712년 이후)으로 각 가문의 혈손을 결속시켜 통일 신라왕국을 안정으로 이끌어간 인물이다. 그는 김흠운의 막내딸을 신문왕의 계비로 맞아들여 효소왕과 성덕왕 형제를 낳게 하였고 김유신 혈손 중에서 왕비를 맞아들이기 위해 성덕왕 3(704년) 5월에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현재 감산사의 모습은 1300년 전의 감산사가 아니다. 석조 아미타여래입상과 석조 미륵보살입상이 발견 된 당시인 1915년에 감산사는 옛 절터의 대부분이 전답지이고 삼층석탑과 작은 불당2채만 있었다. 이후 지속적인 불사가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조계종 사찰로 비구니 스님이 운영하고 있으며 조경이 아담하고 깨끗하다. 템플 스테이도 운영하고 있다.
국보인 석조 아미타여래입상과 석조 미륵보살입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어 볼 수가 없고 삼층석탑과 석조 비로자나불좌상(石造 毘盧舍那佛坐像)만 볼수 있다.

대적광전. 석조 비로자나불좌상(石造 毘盧舍那佛坐像)은 석조불상으로 대적광전(大寂光殿)에 봉안되어 있다.

석조 비로자나불좌상(石造 毘盧舍那佛坐像)
석조 비로자나불좌상(石造 毘盧舍那佛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은 석조불상으로 대적광전(大寂光殿)에 봉안되어 있는데 머리 부분과 앞면의 훼손이 심하고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도 없어진 것을 보수하였다. 머리에는 나발과 육계를 낮게 표현하였다.
양손은 파손되었던 것을 지권인(智拳印)으로 보수하였다. 그 외 신체부위는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 어깨가 각이 지고 양쪽 다리는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양 무릎이 두텁고 넓어서 전체적으로 당당하고 안정된 모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감산사 창건과 연관지어 8세기 초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우리나라 비로자나불상 중에서는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이 석불(石佛)의 뒷면 왼쪽과 앞면 중앙하부의 띠 매듭과 뚜렷한 옷 주름(衣紋)은 경주 남산 용장사터 삼륜대좌불,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석조 불상의 옷 주름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감산사지 삼층석탑 (甘山寺址 三層石塔, 문화재자료 95)

대적광전에서 삼층석탑으로 가는 다리

감산사지 삼층석탑 (甘山寺址三層石塔)은 대적광전 뒤편에 있으며 무너져 있던 것을 1965년에 세웠으며 현재 높이는 약 3.3m이다. 현재 2층과 3층 몸돌은 없고 1층 지붕돌위에 2층과 3층 지붕돌이 올려 진 삼층석탑이다.
기단은 2층으로 하였는데, 1층 기단은 4개의 돌로 구성되었고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과 안 기둥을 각각 새겼다. 2층 기단의 각 면에도 모서리기둥과 안기둥을 각각 새겼으며 갑석부연과 괴임 2단으로 구성하였다. 1층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1개의 돌로 하였고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에는 4단의 받침을 조각하였고 윗면은 낙수면으로 되어 있다. 현재 2층과 3층 몸돌은 없어지고 지붕돌만 남아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잘 보여 주며, 지붕돌의 추녀가 직선이고 전각(轉角)이 들려 있어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감산사(甘山寺) 석조 아미타여래입상(石造 阿彌陀如來立像, 국보 82)와 석조 미륵보살입상(石造 彌勒菩薩立像, 국보 81)
두 불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1916년 일본인 학자 도변창(渡邊彰)과 말송웅언(末松熊彦)이 경주지방 고적을 조사할 때 내동면(內東面) 신계리(薪溪里) 감산사 터 논바닥에 엎어져 있던 것을 발견하여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 해 3월 조선총독부에서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열었을 때 총독부 안의 특설 미술관에 전시되었다.

석조 아미타여래입상(국보 82호)
석조 미륵보살입상(국보 81호)
감산사터에서 나온 석재들

이 특설 미술관은 경복궁 전각 일부를 헐어내고 지은 것인데 이때 경복궁을 일반에 공개했다. 조선물산공진회가 끝난 12월에는 특설 미술관을 조선총독부 박물관이란 이름으로 고쳐 일반에 공개함으로써 이 두 불상은 조선총독부 박물관 수장품이 되고 말았다.

일제는 이를 통해 경복궁 탈취를 기정사실화하고 다음 해인 19167월에는 근정문과 광화문을 헐어내고 근정전 앞에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조선 민중의 시선을 교묘하게 따돌려 반발 기회를 주지 않고 경복궁을 빼앗은 것이다.
처음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의도는 조선 민심에 깊이 뿌리내린 풍수설을 이용하여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왕실로부터 탈취함으로써 일본의 통치를 기정사실화하자는 것이 그 첫째 목적이었다. 그리고 물산장려로 민생을 돌보는 것처럼 대내외에 선전하는 것이 그 둘째 목적이었다.

두 불상의 광배 뒷면을 보면 불상을 만든 경위를 자세하게 적은 조상기(造像記; 불보살상을 만든 연유를 밝힌 글)에 따르면, 미륵보살상의 조성 연대는 719(성덕왕 18), 아미타상은 720(성덕왕 19)으로 밝혀져 있다. 그리고 8세기 통일신라의 불교사상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두 불상이 만든 연대를 알 수 있어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변천과정을 연구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조상기에는 당시의 장법(葬法), 개인의 사원 건립과 불상 조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 금석학과 신라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감산사(甘山寺)관련 삼국유사 제2권 탑상(塔像) 4 남월산(南月山, 또는 감산사甘山寺라고도 한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절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0리 가량 되는 곳에 있다. 금당주미륵존상화광(金堂主彌勒尊像火光) 후기(後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개원(開元) 7년 을미(乙未; 719) 215일에 중아찬(重阿飡) 전망성(全忘誠)이 그의 죽은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과 죽은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해서 공손하게 감산사(甘山寺)와 석미륵(石彌勒) 하나를 만들고, 겸하여 개원(愷元) 이찬(伊飡)과 아우 간성(懇誠) 소사(小舍)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前妻) 고로리(古老里), 후처(後妻) 아호리(阿好里), 또 서형(庶兄) 급막(及漠) 일길찬(一吉湌), 일당(一幢) 살찬(薩湌), 총민(聰敏) 대사(大舍)와 누이동생 수힐매(首肹買) 등을 위하여 이러한 착한 일을 했다. 어머니 관초리 부인이 고인(故人)이 되자 동해유우 변산야(東海攸友 邊散也)라 했다.”

극락전
산신각

미타불화광(彌陀佛火光) 후기(後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중아찬(重阿飡) 김지전(金侍全)은 일찍이 상의(尙衣)로서 임금을 모시고 또 집사시랑(執事侍郞)으로 있다가 67세에 벼슬을 도로 바치고 집에서 한가로이 지냈다. 이때 국주(國主) 대왕(大王)과 이찬(伊飡) 개원(愷元), 죽은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죽은 어머니, 죽은 동생, 소사(小舍) 양성(梁誠), 사문(沙門) 현도(玄度), 죽은 아내 고로리(古老里), 죽은 누이동생 고파리(古巴里),
또 아내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해서 감산(甘山)의 장전(莊田)을 내놓아 절을 세웠다. 또 석미타(石彌陀) 하나를 만들어 죽은 아버지 인장 일길간을 위하여 모셨는데, 그가 고인이 되자 동해유우 변산야(東海攸友 邊散也)라 했다.”(제계帝系를 상고해 보면, 김개원金愷元은 태종太宗 김춘추金春秋의 여섯째 아들 개원각간愷元角干이며, 문희文熙가 낳은 이다. 성지전誠志全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의 아들이다. 동해유우東海攸友는 필시 법민왕法敏王을 동해東海에 장사지낸 것을 말한 것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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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동천동 산 17번지 소금강산 남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능은 높이 4.4m, 지름 15.7m로 신라 4대 탈해왕릉(脫解王陵)으로 전해지고 있다능 앞의 상석은 조선 왕릉 혼유석 형태로 최근에 설치되었다능의 동남쪽에 있는 숭신전(崇信殿)은 조선 철종 때 반월성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1980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탈해왕릉(脫解王陵)19741230일에 도굴을 당했는데 봉분 동북쪽 중간지점에서 너비 85m, 깊이 4.4m로 도굴갱을 만들어서 도굴을 하였다. 이때 묘제가 6세기 이후에 조영된 횡혈식석실분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탈해왕릉(脫解王陵)의 묘제는 신라초기 목관묘 형태이다.

현재 동천동(東川洞)에 있는 능이 탈해왕릉으로 정해진 것은 20세기 초 석씨 일족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장지로 기록 된 성북양정구(城北壤井丘)와 조선시대 지리지 관련 기록을 근거로 정하였다. 석씨 일족은 성북(城北)을 근거로 동천동(東川洞)에 있는 능을 탈해왕릉으로 정하였다.

오늘날 경주지역에는 양정구(壤井丘)라는 지명은 없다. 구전으로 성동동 전랑지(城東洞 殿廊址) 주위를 양정구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인왕동의 선덕여자 중, 고등학교 남쪽 사거리에서 성동동 전랑지에 이르는 대로 이름이 양정로(壤井路)이다.

탈해왕 시기에는 월성이 축조되지 않았으므로 성북(城北)을 금성 북쪽으로 고려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와 동경잡기에는 금성 위치를 경주부 동쪽 4리에 있는 성동동 전랑지와 남고루 일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석씨 일족은 황오동의 남고루와 성동동 전랑지 북쪽의 가까운 지역이 양정구(壤井丘)로 판단되나 주변에 왕릉이라고 추정되는 고분이 없어 부득이 소금강산 남쪽의 이름 없는 고분을 석탈해왕릉으로 정하였다.

신라시대 왕 중 석씨 왕은 모두 8명으로 시조인 탈해왕을 제외하고는 장지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후기 17세기말~18세기 족보 간행과 이에 따른 조상숭배 대상의 확대가 될 당시 석씨 일족은 경주지역 사회에서 세력이 미약하고 그들만의 족보가 미처 완성되지 못하여 현재 경주 일대 왕릉 중 석씨 왕릉은 이곳 석탈해왕이 유일하다.

경주시 양남면 상계(上溪)리에 서왕(西王)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원래 씨 왕릉이 있어 석왕리(昔王里)이나 마을이름에 그 왕명을 칭하는 것은 곤란하다하여 서왕리로 변하였다고 한다. 예전부터 이 마을 북쪽에 석씨 임금의 능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은 나이가 62세에 왕위에 올랐다. 성은 석씨(昔氏). 토해(吐解)라고도 불렀는데 해를 토해낸다는 뜻으로 훗날 토함산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탈해의 아버지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 용성국(龍城國)의 함달파왕(含達婆王), 혹은 완하국(琓夏國)의 함달왕(含達王) 등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어머니는 여국왕(女國王)의 딸 또는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이라고 하는 등 다국적 혈통을 지닌 인물이 탈해이다. 왕비는 남해차차웅의 딸 아효(阿孝阿尼, 또는 남해차차웅의 누이동생 阿老)부인이다.

즉위 248월에 별세하였고 성의 북쪽 양정 언덕(城北壤井丘)에 장사지냈다.

석탈해의 장지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삼국유사 왕력과 기이편내용이 서로 다르다. 삼국유사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재위(在位) 23년 만인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 29)에 죽어서 소천구(疏川丘) 속에 장사지냈다. 그런데 뒤에 신()이 명령하기를, “조심해서 내 뼈를 묻으라고 했다. 그 두골(頭骨)의 둘레는 석 자 두 치, 신골(身骨)의 길이는 아홉 자 일곱 치나 된다. []는 서로 엉기어 하나가 된 듯도 하고 뼈마디는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천하에 짝이 없는 역사(力士)의 골격(骨格)이었다.

이것을 부수고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 두었다. 그랬더니 신()이 또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東岳)에 안치해 두어라했다. 그래서 거기에 봉안케 했던 것이었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탈해脫解가 죽은 뒤 27문호왕文虎王 때 조로調露 2년 경진庚辰(680) 315일 신유辛酉 밤 태종太宗의 꿈에, 몹시 사나운 모습을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내가 탈해脫解이다. 내 뼈를 소천구疏川丘에서 파내다가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吐含山에 안치하도록 하라.” 은 그 말을 좇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제사를 끊이지 않고 지내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내용을 정리하면, 소천구(疏川丘)에 묻힌 석탈해의 뼈를 꺼내어 이것을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 두었다가 문무왕 때 토함산 정상으로 옮겨 사당을 짓고 동악신(東岳神)으로 제사를 지냈다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 까지 석탈해 사당에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제사를 지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폐사되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없다.

신라 4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 재위 57~80)

석탈해는 키가 9척에 이르고 성품이 너그럽고 지혜로웠고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 이름난 신하인 호공(瓠公)의 집터(뒤에 月城이 됨.)가 좋음을 보고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어놓고는 자기의 집이라 우기니 관가에서는 주장하는 근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자신의 조상이 본래 대장장이였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자고 하여,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자 탈해가 승소(勝訴)하여 그 집을 차지하였다.

이 같은 내용의 설화에서, 첫째 탈해 집단이 경주 동해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그가 죽은 뒤 동악신(東岳神)으로 봉사(奉祠)되었음에서도 확인된다. 둘째는 석씨부족이 어로를 주요생활수단으로 하였지만, 이미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철을 다루는 능력이 왕위계승에까지 연결되는 강점의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탈해는 서기 8(남해 차차웅 5)에 유리왕의 사위가 되고, 서기 10년에는 대보(大輔)란 벼슬에 올랐으며, 유리이사금의 즉위시에 이미 왕위계승의 물망에 올랐지만, 유리이사금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된 다음 유리이사금이 죽자 탈해가 왕위에 올랐다.

탈해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해차차웅의 사위이니 결국 박씨 집단(朴氏集團)의 일원이라는 동속개념(同屬槪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 철을 이용한 군사력 및 거기에 따르는 실질적인 정치실력파의 등장으로 박씨족과 석씨족이 연맹하였으며, 이것은 왕실세력의 폭을 넓혔다고 본다.

즉위 2년 정월, 호공(瓠公을 대보(大輔)로 임명하였고 2월에는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33월 왕이 토함산에 올라가니, 우산 모양의 검은 구름이 왕의 머리 위에 피어났다가 한참 후에 흩어졌다. 5월에는 왜국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고 6월에는 천선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58월 마한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710월 백제왕이 국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까지 넓히고 사신을 보내 왕을 만나기를 요청했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

88월 백제가 군사를 보내 와산성을 공격하였다고 10월에는 백제가 다시 구양성을 공격하자 왕은 기병 2천 명을 보내 그들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12월에는 지진이 있었고 눈이 내리지 않았다.

10년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2백 명을 그 곳에 남겨 거주시키며 수비하게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가 이 땅을 다시 빼앗았다.

11년 정월 박씨의 귀척으로 하여금 국내의 주와 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 직위를 각각 주주와 군주라고 불렀다. 2월에는 순정을 이벌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14년 백제가 침범하였고 17년 왜인이 목출도를 침범하였다. 왕이 각간 우오를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우오가 전사하였다188월 백제가 변경을 약탈하므로 군사를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19년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10월에는 백제가 서쪽 변경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209월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여 와산성을 다시 찾았다. 백제에서 와서 살고 있던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218월 아찬 길문이 가야 군사를 상대로 황산진 입구에서 싸워 1천여 명을 죽였다. 길문을 파진찬으로 임명하여 그 전공에 해당하는 상을 주었다23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북쪽에 나타나더니 20일 만에 사라졌다.

244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금성 동문이 저절로 무너졌고 8월에 왕이 별세하였다. 성의 북쪽 양정 언덕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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