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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구름이 떠도는 곳에 있다 하여 부르는 백운암은 통도사 內 20개 암자 중에서 유일하게 암자까지 차가 들어가지 않는 아담하고 소박한 암자이다. 영축산 팔부능선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수도처로 유명하고 특히 만공스님이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백원암 산신각 앞에서 본 풍광

또한 백원암 금샘에서 나는 금수(金水)는 암벽아래 돌 사이에 솟아나는 석간수인데 물맛이 뛰어나고 일품이다. 금수는 일주문 지나서 1곳, 용왕각 좌측에 1곳 그리고 산신각 입구 1곳 등 3곳에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통도팔경 중 제6경 백운명고(白雲鳴鼓)라 하여 저녁 무렵 흰 구름이 영축산을 휘감는 백운암의 북소리가 매우 아름답고 청명하다고 한다. 사찰의 북은 법고(法鼓)라고 부르는데 인간의 윤회에 의하여 현생한 축생을 위하여 치는 북이다.

극락암에서 출발하여 맞이하는 비로암과 백운암의 갈림길

통도팔경은 영축산의 동쪽 산록을 따라 발달한 통도천 계곡의 자연 경관과 불교 문화 요소의 특성을 잘 표현한 것으로 제1경은 무풍한송(舞風寒松), 제2경은 안양동대(安養東臺), 제3경은 비로폭포(毘盧瀑布), 제4경은 자장동천(慈藏洞天), 제5경은 극락영지(極樂影池), 제6경은 백운명고(白雲鳴鼓), 제7경은 단성낙조(丹城落照), 제8경은 취운모종(翠雲暮鐘) 등으로 되어 있다.

백운암 아래 800m 지점의 주차장으로 매우 협소하니 가능하면 극락암 주차장을 이용하면 좋다.
백운암에 필요한 생활용품을 나르는데 사용하는 모노레일
백운암의 가파른 길에 사용하는 지팡이
오르막길을 따라 나무계단과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백운암 일주문을 맞이할 수 있다.

백운암은 892년(진성여왕 6)에 조일대사(祖日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남아 있는 기록은 없다. 1810년(순조 10)에 침허대사(沈虛大師)가 중건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조성되어 백운암에 봉안된 「백운암 지장탱화」가 당시의 중건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백운암 지장탱화」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87호로 1804년(순조 4)에 조성된 불화이다. 화면의 맨 위쪽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가득 펼쳐져 있고 중앙에 지장보살이 석장(錫杖)과 투명 구슬을 쥐고 가부좌한 채 앉아 있다. 비단에 채색을 하였고 크기는 세로 158㎝, 가로 175㎝로, 조선 후기 불교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살며시 보이는 백운암

1970년대에 극락암에 주석한 경봉스님이 후원하여 사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주요 건물로는 대웅전 기능을 하는 백운암, 용왕각, 산식각, 요사채 등이 있다.
백운암은 통도사에서 약 6㎞ 정도로 떨어져 있는데, 승용차를 가지고 오면 극락암 주차장에 주차하거나, 백운암 아래 800m 지점의 주차장에 주차하면 된다. 백운암 아래 주차장은 협소하여 가능하면 극락암 주차장을 이용하면 좋다. 극락암 주차장에서 걸어서 출발하면 50분정도 이면 백운암에 도착한다. 비로암 방향의 갈림길을 지나서 오르막길을 따라 나무계단과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백운암 일주문을 맞이할 수 있다.

백운암 일주문

만공(滿空, 1871~1946)스님은 19세기 조선의 사라져가는 선풍을 일으킨 선승 경허스님(1849~1912)의 세 제자 중 막내이다. 이른바 삼월(三月)이라 하여 수월(水月), 혜월(慧月), 만공(滿月) 세 명의 스님으로 맏이인 수월스님을 상현달(上弦), 혜월스님을 하현달(下弦), 만공스님을 보름달인 만월(滿月)이라고 부른다.

백원암 금샘에서 나는 금수(金水)는 암벽아래 돌 사이에 솟아나는 석간수가 인데 물맛이 뛰어나고 일품이다. 금수는 일주문 지나서 1곳, 용왕각 좌측에 1곳 그리고 산신각 입구 1곳 등 3곳에 조성되어 있다. 이중 일주문 지나면 맞이하는 금수
일주문 우측에 자리잡고 있는 포대화상
백운암
용왕각과 백운암
용왕각
용왕각 좌측에 있는 금수


만공스님이 백운암에서 보름동안 선 수행을 하였는데 어느 날 새벽, 통도사에서 들려오는 새벽 종소리를 듣는 순간 홀연히 깨우치게 되었다. 이후 스승 경허 스님이 머무르고 있는 범어사를 향해 보은의 큰 절 세 번을 하고 천장사로 돌아갔다. 당시 백운암 생활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고, 홀로 거닐며 자재하였다. 」

나한전

만공스님은 법명은 월면(月面)이고 법호는 만공(滿空)이다. 속성은 宋氏로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어렸을 때 속명은 도암(道岩)이었다. 1871년(고종 8년, 신미년) 3월 7일 전북 태인군 태인읍 상일리(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휘(諱)는 신통(神通)이라 하였고 어머니는 金氏였다.
만공 스님이 13세 되던 1883년(신미년) 겨울, 도인 하나가 집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이 아이는 단명할 상으로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이에 놀란 어머니 金氏가 단명을 면할 방도를 묻자, 도인은 김제 금산사에 가서 올해를 넘기면 운명이 바뀌어 장수를 한다고 하였다.

산신각 입구에 있는 금수

만공스님의 부모님은 아들이 집안의 장자이기에 바로 금산사로 아이를 데려가서 그 해를 보냈다. 그리고 금산사에서 1년을 보내자 부모님 생각과는 달리 만공스님은 출가를 결심 하였다. 만공스님의 단명할 상이 출가를 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1886년에 충청남도 공주 동학사에서 출가하여 행자 생활을 하다가, 같은 해 충남 서산 천장암(天藏庵)에서 태허(泰虛)를 은사로 모시고, 경허(鏡虛, 1849~1912)를 계사(戒師)로 하여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았다. 이때 월면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이후 10년간 천장암(天藏庵)에서 공양주를 보았다. 1893년 11월 천장암을 떠나 충청남도 아산 봉곡사에서 수행 중 1895년 7월 (24세)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홀로 참선에 열중하다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산신각

1898년 스승 경허를 따라 동래 범어사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홀로 통도사 백운암에 들렀다. 이때 장마를 만나 보름을 지냈는데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1901년 7월 경허가 있는 서산 천장암으로 돌아왔다.
덕숭산 수덕사(修德寺)와 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을 거쳐 금강산 유점사(揄占寺)에서 3년을 지냈다. 1904년(광무 7년, 33세)에 경허로부터 만공이라는 법호(法號)와 함께 전법게(傳法偈, 득도한 큰스님이 수행 과정을 점검하여 깨달음을 인정하는 것)를 받은 후 덕숭산 수덕사 부근의 금선대에서 설법을 열었고 선풍을 진작시키며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1914년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의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하였고 예산 덕숭산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 등의 중창에 관여하고 승려들을 길러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에는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의식을 가졌다.
1920년초 선학원(禪學院) 설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선승들의 결사(結社)이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契) 모임인 선우공제회운동(禪友共濟會運動)에 참여하였다
1927년 현양매구(懸羊買拘)라는 글을 지었는데, 임제 32대 사문 만공이라 하여 임제종풍(臨濟宗風)의 계승자임을 선언하였다.
1934년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朝鮮佛敎禪理參究院)이 설립될 때 이사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바로 이사장 선출에서 이사장은 송만공(宋滿空), 부이사장은 방한암(方漢岩)이 선임되었다.
1935년부터 3년간 마곡사 주지를 지내면서 대처(帶妻), 음주, 식육을 하는 일본 불교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할 것을 주장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조선 31본산(本山) 주지회의가 열렸는데 총독부가 조선불교의 일본 불교화를 주장하자 이에 호통을 치며 공박하였다.
1940년 5월의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수행과 참선에만 정진하였다. 1941년 3월 10일 선학원에서 개최한 전국고승법회에서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禪)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바른 맥을 이어갈 것을 강조하였다.
당시 조선 말살 정책을 펼친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총독의 회유도 거절하는 등 식민지배의 만행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800m 아래 주차장에서 올라온 생활용품을 내리는 곳

주로 예산 덕숭산에 ‘전월사(轉月舍)’란 띠집을 짓고 머물며 선불교의 진흥을 위해 힘쓰다가 1946년 10월 20일 거울을 보며 "이 사람 만공, 70년 동안 나와 동고동락하느라 고생했지. 그동안 수고 많았네."라는 유언을 남긴 뒤 세수 75세, 법랍 62세로 입적했다. 사후에 <만공어록 滿空語錄>이라는 책이 편찬되었다.

덕숭산에서 다비하여 유골은 덕숭산 금선대 근처에 부도 만공탑을 세웠다. 진영(眞影)은 경허의 진영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되었다.
"부처님 사리로 모든 것은 넉넉하고 거기에 다 뜻이 포함 되어 있으니, 사리를 수습하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사리를 수습하지 않았으며, 이후 덕숭산의 다비식에서는 어떤 스님이든지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것이 문도들이 지켜야 할 전통이자 불문율로 자리 잡았다.

제자로는 춘성, 일엽(여류시인인 김일엽의 법명), 고봉, 혜암, 혜천, 원담 등이 있다.
만해 한용운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만해는 내 애인이야."라고 말했는가 하면, "지금 온 조선 땅에 사람이 하나 하고도 반 있는데 그 하나가 바로 만해"라고 말하기도 했다.

만공스님은 이론과 사변을 철저히 배제하고 무념과 무심(無心)의 태도로 화두를 스스로 참구(參究)하는 간화선법(看話禪法)을 채택하여 제자들에게는 항상 조주(趙州)의 무자 화두를 참구할 것을 강조하였다.
간화선(看話禪)을 바탕으로 나를 찾을 것을 강조하였다. ‘나’라는 개체의 나가 아니라 일체만법을 포함하는 만유의 나로, 이는 곧 일심과 통한다고 설법하였다.

참선을 위해서는 행자의 자세도 중요하지만 보조적 요건도 필수적으로 구비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또한 환경과 배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견해를 처음으로 설파하였다. 참선의 보조 여건으로는 선지식(善知識)과 수도(修道)에 적절한 도량, 함께 수도하는 좋은 도반(道伴)의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좋은 스승을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보았다. 속세에서도 역시 배경과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였다. 개인의 노력이 중요하지만 그에 걸맞은 배경과 환경적 요인도 사람을 만든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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