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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은 파리 에펠탑처럼 보통 1 ~ 2 시간 기다려야 하는데 그 이면에는 인상파 거장의 작품 440여 점을 소장하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유한 미술관이다. 원래는 종착역의 역사였지만 1986년 박물관으로 거듭 태어났다. 초기에는 1848년 ~ 1914년에 만든 장식예술을 전시하였다. 지금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 마네, 드가, 고흐, 르누아르, 로댕 등 인상파와 포스트 인상파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세느 강변에 있는 오르세 미술관

전시관은 3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지하층으로 입장하여 조각상 1층은 조각상, 2층은 조각상과 아르누보 양식 3층 인상파 작품으로 전시 되어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1887년). 고흐는 40점이 되는 자화상을 그렸고 자기 안에 있던 불안, 고독, 예술가로서의 고통을 표현했다.

19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 그루트 준데르트에서 출생하여 불꽃같은 열정으로 세상을 살다가 1890년 7월 27일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자즈에서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렘브란트 이래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서 태양의 화가로 불린다. 고흐의 노란색으로도 불리는 태양의 색으로 800점이 넘는 유화를 남겼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인정을 받지 못한 불행한 화가였다.

빈센트 반 고흐의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1888년). 아를에 있는 론 강을 그린 작품으로 친구 외젠 보흐에게 선물로 보냈다. 반 고흐는 별을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고흐는 목사의 6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나 16세 때 구필화랑의 헤이그, 런던, 파리 지점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그림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영국에서 학교교사를 거쳐 벨기에의 보리나주 탄광에서 전도사로 일하다가 1880년에 화가의 뜻을 두었다. 20대 후반에 미술에 그는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후대 사람들에게 감탄시킨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빈센트 반 고흐의 오베르쉬르우자즈의 교회(1890년). 반 고희가 아를과 프로방스 생레미 정신병원을 나와서 1890년 5월 오베르쉬르우자즈의 여인숙에 정착하였고 그 해 7월 사망할 때까지 70여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때의 작품이다. 지금도 이 교회는 오베르쉬르우자즈에 있다.

1885년까지 주로 부친의 재임지인 누넨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그의 최초 작품이 「감자 먹는 사람들」로 목사였던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완성한 작품이자 그를 진정한 화가의 반열로 오르게 한 작품이다.

클로드 모네의 국화(1878년)

파리 개선문은 나폴레옹1세의 명령으로 체코의 오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의 연맹 군대를 맞아 9시간의 혈전 끝에 승리한 그의 군대를 치하하고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나폴레옹1세의 명령으로 세워진 개선문(1836년 준공)

1806년에 기공식을 시작으로 1836년에 완공했지만 나폴레옹은 유배중이라 완성작을 보지 못하고 훗날 그의 유골이 개선문 아래를 지나 앵발리드의 돔에 안치 되었다. 또한 1차 대전 승전 퍼레이드가 이곳을 지났고 드골 장군이 2차 대전 파리 탈환과 프랑스 해방 선언을 이곳에서 했다.

개선문을 상공에서 보면  12 꼭지의 별을 닮았다고 하여 별의 개선문이라고도 부른다 .

개선문은 건축가 샬그랭의 작품으로 높이 50m, 너비 45m, 폭 22m, 대형아치 29.19m, 소형아치 18.68m로 엄숙하며 장엄하다. 외관은 대형 양각 부조 4개, 액자형 음각 부조 6개로 이루어져 있다. 부조 내용 중 유명한 것이 「라 마르세예즈」라고 부르는 뤼드의 “1792년의 의용병의 출정”이고 의용병을 이끄는 인물이 승리를 상징한다. 샹젤리제에서 개선문을 마주 보았을 때 오른쪽에 있는 부조이다.
아치 내부에 새겨진 이름들은 프랑스 대혁명부터 나폴레옹 1세 섭정기간 중에 일어났던 혁명과 전투 때 사망한 장교의 이름이다. 문 지하에는 1차 대전 참전 무명용사들이 안치되어 있다. 매일 오후 6시 30분에 이들을 기리는 기념의식이 거행된다. 문 아래로 가려고 한다며 지하도를 이용해야한다.

개선문 주변을 에투알 광장 또는 드골광장이라고 부른다.

개선문은 12개의 대로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중 유명한 대로가 샹젤리제다. 개선문을 상공에서 보면 12꼭지의 별을 닮았다고 하여 별의 개선문이라고 부른다. 개선문 주변을 에투알 광장 또는 드골광장이라고 부른다.
루브르박물관과 개선문 사이 일직선상에 있는 콩코르드 광장은 오벨리스크가 있어 유명하다. 오벨리스크는 1836년에 이집트에서 선물 받은 것으로 원래는 1쌍인데 운반문제로 하나만 옮겨왔다. 과거에 루이15세를 축원하기 위한 기마상이 있었고 광장이름도 루이15세 광장이라고 불렀는데 프랑스 혁명 때 기마상이 철거되었다. 이름도 혁명의 광장으로 바꿨다.

콩코르드 광장에 있는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는  1836 년에 이집트에서 선물 받은 것으로 원래는  1 쌍인데 운반문제로 하나만 옮겨왔다 .

프랑스 혁명 때 이곳에 단두대가 설치되어 루이16세를 비롯하여 마리 앙투아네트, 왕가 일족, 혁명가 당통과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었다. 이 외에도 8년 동안에 약 1,343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피비린 나는 혁명의 광장을 콩코르드(화합, 조화) 광장으로 개칭하였다.

콩코르드 광장의 이름은 루이5세 광장에서 혁명의 광장으로 바뀌었고 최종 콩코르드(화합, 조화) 광장으로 개칭되었다.

파리에서 파리의 획이라는 도시계획 명칭이 있는데 루브르 박물관(궁전, 쿠르 카레)-콩코르드 광장-샹젤리제-개선문이 일직선상에 있다. 절대군주 시대에 왕족들이 사냥터인 생제르맹앙레로 가장 빨리 가는 길이다.

콩코르드 광장에서 멀리 보이는 개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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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곧 국가다를 선언한 태양왕 루이14세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베르사유 궁전은 부르봉 왕조가 프랑스를 통치하는 200년 동안 왕가의 공식 거주지였다. 1789년 대혁명의 발발로 왕조가 몰락할 때 까지 이곳에서 16~18세기 프랑스 정치, 문화, 예술이 시작되었다.

베르사유 궁전 입구와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관광객들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13세가 사냥터의 별장으로 사용하기 지은 작은 벽돌 건물을 성인이 된 루이14세가 증축을 하면서 궁전으로써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루이14세에게 있어서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 건립은 절대왕조의 구축을 위한 필수 조건 이였다.

황금색 구조물이 눈에 띈다.

루이 14세의 통치기간인 1660 ~ 1775년에 4번의 대형증축이 있었고 거울의 방, 소의 눈 살롱 등 현재 궁전의 형태를 잡았다. 기초 설계는 건축가 르 보, 조경사 르 노르트 그리고 장식가 르 브룅이 맡았다이들의 참여는 니콜라 푸케 재무대신의 보르비콩트 성에 이은 두 번째 협동 작업이다.

베르사유 궁전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한다. 예약을 하고도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다. 궁전을 제대로 보고자 한다면 최소 2일이 필요한 것 같다. 하루는 궁전 내부, 하루는 야외 정원과 건물을 둘러보는 것이다.

궁전 구조는 1층과 2층으로 되어 있고 1층은 왕실 예배당이고 2층이 왕의 공식 처소, 왕비의 처소, 공식회랑, 왕의 내실로 구성되어 있다. 왕의 공식 처소에는 헤라클레스의 방, 아폴로의 방 등 8개의 방이 있고 왕비의 처소는 왕비의 방, 귀족의 방 등 5개 방, 실이 있다. 공식회랑은 거울의 방, 전쟁의 방, 평화의 방으로 되어 있다. 왕의 내실은 국왕의 침실, 만찬실 등 5개의 실, 방이 있다.

루이 14세
베르사유 궁전의 모형
피에르 파텔의 베르사유 궁전(1668년)

이 중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곳이 거울의 방, 왕비와 방, 국왕의 침실이다거울의 방은 베르사유 조약이 맺어진 방으로 전체길이 73m, 너비 10.4m, 높이 13m로 정원을 향하여 17개의 창문이 있으며, 반대편 벽에는 17개의 거울이 배열되어 있다. 왕족의 결혼식이나 외국 사신의 접견 등을 행하는 의식장이다. 왕비의 침실은 3명의 왕비 침실이며 19명의 왕손이 태어난 곳이다.

마리 앙투와네트와 자녀들
샤를 7세
헤라클레스 방의 천장화
「선행이 인간을 제도한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천장화로 헤라클레스를 포함하여 로마신화 주인공 142명이 등장하고 있다.
하나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국왕의 침실
거울의 방
거울의 방은 베르사유 조약이 맺어진 방으로 전체길이 73m, 너비 10.4m, 높이 13m로 정원을 향하여 17개의 창문이 있으며, 반대편 벽에는 17개의 거울이 배열되어 있다. 왕족의 결혼식이나 외국 사신의 접견 등을 행하는 의식장이다.
거울의 방에서 야외 정원 풍경을 볼 수 있다.

베르사유 궁전 야외 또한 거대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압도적인 경관을 연출한다. 화려한 분수와 조각상 그리고 정비되어 절제 된 나무와 광활한 삼림지대는 유럽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우며 웅장하다. 작은 숲을 이루는 14개의 정원이 전체 정원을 이루고 있다. 거울의 방에서 정원 풍관을 볼 수 있다.

주요 건물에는 별궁인 그랑 트리아농은 루이 14세 때 그의 애인인 매트농 부인을 위해 지어진 것이다. 나폴레옹 황제가 베르사유에 오면 묵었던 장소이다. 또 다른 별궁인 프티 트리아농은 루이 15세 때 애첩 마담 드 퐁파두르를 위해 지어진 것으로 마리 앙투아네트 때 자신의 취향에 맞게 정원과 실내장식을 꾸몄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영지 그리고 왕비의 촌락이다.

왕비의 촌락은 작은 시골 촌락 형식의 별궁으로 왕비의 시골생활 체험을 위하여 지어진 것이다.

파리에서 예술가 하면 연상되는 곳이 몽마르트 언덕이다. 이곳은 1860년대까지 파리의 외곽에 지나지 않았으나 성자 드니의 길이라는 전설과 언덕이 있다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종교, 문화적 정체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생활이 궁핍한 예술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피카소, 누아르, 로트레크가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몽마르트는 순교자들의 시체를 쌓아 두었던 언덕을 의미한다.

몽마르트 언덕의 테르트르 광장

특히 몽마르트 화가들의 광장으로 알려진 테르트르 광장은 18세기에 지어진 저택에 둘러싸여 있는데 무명화가와 화가 지망생이 그림을 그리는 곳으로 작품을 전시하거나, 지나가는 관광객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돈을 벌고 있다. 이곳에서는 관광 인파들이 많아서 이를 이용한 소매치기들이 있어 조심해야 한다.

과거 중세시대부터 파리의 석조 건물에 사용된 돌은 파리 지하에서 가져왔다. 파리 지하가 채석장인 것이고 지하에는 평균 깊이20m, 길이가300km인 자연 채석장이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이중 몽마르트 아래가 돌이 가장 풍부했다. 이로 인해 다른 지방에서 돌을 공수 할 필요가 없었다. 현재에도 파리지하에 채석하여 남은 돌이 많이 있다.

몽마르트 언덕 꼭대기에 하얀색의 대성당이 있는데 이름이 사크레퀴르 대성당이다. 정부에서 건립을 주도하였는데 1876년에 착공하여 1919년에 완공하였다. 목적은 프랑스 제3공화국 수립을 축하하고 시민들의 도덕성을 회복하자는데 있다.

몽마르트 언덕 꼭대기에 있는 사크레퀴르 대성당

그리스 십자가 모양에서 착안했는데 비잔틴과 로마양식을 절충해서 지었는데 흰색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맘껏 표현했다. 대성당 중앙 가장 큰 돔의 높이는 83m이고 지름이 55m이다. 시간이 되면 안에 들어가서 반월형 천장 모자이크를 감상해보자. 가톨릭 재단과 프랑스가 찬양하는 예수의 성심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한다.

대성당 앞 계단에서 전방을 바라다보면 파리전경이 파노라마처럼 180도 펼쳐지는데 장관이다. 또한 앞마당 공터에서 날씨가 좋으면 거리공연과 음악회가 열려 여행자의 즐거움을 배가 시켜준다.

파리에 오면 호기심으로 먹는 달팽이 요리(에스까르고)

프랑스 3대 요리 중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이 달팽이 요리이다. 「에스카르고」라고 부르며 부르고뉴와 상파뉴 지방의 최고의 요리이고 이 달팽이는 양식하여 키운 것으로 20여 가지의 조리법이 있다. 그리고 거위 또는 오리 간을 포도나 우유에 재웠다가 만든 요리인 「푸아 그라」가 있고 송로버섯 요리인 「트뤼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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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은 루이 14세가 17세기말 베르사유로 궁권을 옮기기 전 까지 사용되었던 궁궐로써 800년 동안 증축공사의 결과가 현재의 모습이다. 1970년대까지 경제부처와 미술관으로 나누어 사용되었는데 1981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에 의해 전체가 박물관으로 변경, 사용되었다. 6만㎡의 전시실은 리슐리외관, 숼리관, 드농관 등 3곳으로 나뉘며 발권장소인 지하층을 포함하여 총 4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는 11개 분야로 방대하여 전부를 감상하려면 일주일 정도가 소요된다.

최초의 루브르는 12세기말 늑대로부터 시가지를 보호하기 위해 필리프 오귀스트가 축조하였다. 이름의 유래는 늑대를 뜻하는 라틴어 Lupus, 즉 프랑스어 Loup에서 유래가 된 것이다. 당시에는 망루를 지키는 문지기 숙소와 감옥에 불과하였는데 14세기부터 궁궐로써 확장을 거쳐 거듭나게 되었다. 궁궐이 베르사유로 옮긴 후부터는 아카데미 회원들의 사무실과 유명 예술가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프랑스 혁명 때 왕족과 귀족들로부터 압수한 재물 660여점을 전시하기 위해 1793년 박물관으로 용도가 변경되어다. 이후 계속된 정비와 확장을 통해 나폴레옹 3세 섭정기간 때인 1880년에 마무리가 되었다.

루브르 박물관 정문에 위치하고 있는 유리 피라미드는 1981년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에 의해 지어졌고 건축가 이오 밍 페이의 작품으로 1989년에 완공되었다. 피라미드의 정사각형 바닥면에서 꼭짓점까지의 높이는 21.64m, 603개의 마름모와 70개의 삼각유리로 95톤의 철근이 지지하고 있다. 유리 피라미드 아래는 박물관 안내소와 유무인 발권장소가 있다.
총 5개의 층과 3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리슐리외(루이 13세 때 재상) 관, 쉴리(앙리 4세 때 재상) 관, 드농(루브르 박물관 초대 관장) 관이다.

 

암사슴과 함께 있는 사랑의 여신 아르테미스. 일명 베르사유의 다이아나
밀로의 비너스

밀로의 비너스는 1820년 한 농부에 의해서 에게 해의 밀로 섬에서 발견되었고 당시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샤를 프랑스와 드 리파르도가 루이 18세에게 바쳤다. 기원전 130 ~ 100년 당티오슈가 제작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날개를 단 사모트라케의 니케(승리의 여신)

날개를 단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기원전 331년 ~ 323년에 제작 된 헬레니즘 시기를 대표하는 조각이다. 기울어진 날개의 각도, 왼쪽 다리의 위치, 바람이 불어 여신의 다리를 휘감는 듯한 옷의 표현은 조각을 보는 사람들에게 조각상이 날아오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15세기 작품으로 성모 마리아가 유다 산골의 즈가리아 집에 있는 엘리사벳을 만나는 것을 그린 작품이다. 고령으로 임신한 엘리사벳이 무릎을 꿇고 마리아에게 존경을 표하는데 마리아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엘리사벳의 어깨를 짚으며 그녀의 행동을 만류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뒤에 서 있는 두 여자는 마리아 야코비와 마리아 살로메이고 마리아 야코비는 배가 부풀었고 마리아 살로메는 두 손을 모았다.
화면배경에는 개선문과 항구도시 전경이 보이는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는 개선문은 승리의 문, 항구는 구원의 기항지를 의미하는 메타포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은 1503년에 스푸마토 기법으로 그린 작품으로 피렌체에서 제작한 후기 작품이다. 중앙에 정면을 향해 앉아있는 여인이 마라아의 모친 성 안나이다. 어머니의 무릅에 앉아있는 성모 마리아는 양의 등을 타려는 아기 예수를 양과 떼어놓으려고 하고 있다. 양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희생양의 상징으로서, 마리아의 행위는 아들을 험난한 운명으로부터 막고 싶은 모정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성 안나의 머리를 정점으로 하여 삼각형의 오른편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어린 양으로 구성 된 피라미드 구도다.
스푸마토 기법은 윤곽선을 뚜렷하게 그리지 않고 희미하고 뿌옇게 그리는 기법으로서, 인물이 살아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주는 효과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밀라노 귀족 부인의 초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밀라노 귀족 부인의 초상”은 15세기에 밀라노에서 그린 작품이다. 검은 배경을 바탕으로 도발적인 눈, 꽉 다문 입, 밖에서 들어온 반사 된 빛까지 고스란히 담은 정교한 눈동자의 이 여인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밀라노에서 초상화를 그릴 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요소다. 이 작품에는 손이 그려져 있지 않고 손 부분이 파라페토라고 불리는 난간으로 가려져 있는데 당시 이탈리아 화가들이 인물에 현실감과 공간감을 불어넣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요소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바위산의 성모"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바위산의 성모”는 스푸마토 기법으로 그린 작품으로 1483년 밀라노의 산 프란체스코 수도회 성당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1485년에 완성한 것으로 밀라노에서 제작한 첫 작품이다. 성 가족이 이집트로 피난을 하던 중 세례자 요한을 만났다는 전설을 그린 것으로 동굴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순간을 묘사한 작품이다.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 그리고 천사와 예수가 피라미드 구도로 화면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1503년 비단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가 그녀의 초상화를 다빈치에게 부탁해서 그린 작품이다. 모나는 이탈리어로 부인을 뜻하고 리자는 이름이다. 프란체스코가 작품료를 지불하지 않아 다빈치가 1519년 사망하기까지 그가 가지고 있었고 사망 후 그의 제자에게 남겼다.
피라미드 구도 속에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의 여인이 팔걸이의자에 몸에 살짝 의자에 앉아 있다. 모나리자의 원본은 관리차원에서 지하 아틀리에에 보관되어 있고 전시관에 걸린 작품은 최첨단 기법으로 그려낸 복제품이다.

로렌조 로토의 "간통한 여인과 예수"

로렌조 로토의 “간통한 여인과 예수”는 16세기 작품으로 이소케팔리아 원칙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소케팔리아 원칙은 다수의 등장인물로 짜이는 역사화의 구성에서 사람들의 머리 높이를 균등하게 맞추는 방식이다. 간음한 여인과 손바닥을 펴서 군중의 공격에 대한 저지, 만류, 반대하는 예수와 노란 옷을 입은 늙은 율법학자를 전면 중앙에 하나로 묶고, 손가락을 치켜들고 모세의 율법을 들먹인 남자, 병장기류를 든 군인 등 여인의 처벌을 요구하거나 예수의 반응을 떠보는 주변 무리를 묶어서 두 그룹 사이에 긴장감 넘치는 대치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는 1814년 나폴레옹의 여동생 캐롤린 뮈라의 의뢰를 받아 그린 작품이다. 오달리스크는 터키어 오달릭(odalik)에서 유래한 말로, 규방의 여인을 뜻한다. 여인의 나체를 극도로 미화한 작품으로 나폴레옹 제국의 멸망으로 인해 주문자로부터 값을 치르지 못해 화가의 손에 남겨졌다. 앵그르의 스승은 자크 루이 다비드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와 조세핀 황후의 대관식"
대관식 당시 조세핀은 마흔이 넘었는데 우아한 여인으로 묘사되었다.
전통적인 대관식에는 교황이 황관을 씌워주는데 나폴레옹은 본인 스스로 황관을 쓰는 쪽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교황 피우스 7세는 나폴레옹 뒤쪽에 앉아 단지 축복하는 손짓만 하고 있다.
황관을 받는 인물은 그의 처남이자 나폴리 국왕인 뮈리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와 조세핀 황후의 대관식” 은 나폴레옹의 대관식 3개월 전인 1804년 9월 황제로부터 직접 청탁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2년의 제작 과정을 거쳐 완성하였다. 1804년 7월 국민투표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12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나폴레옹이 아내 조세핀에게 직접 황관을 씌워 준 후 본인은 스스로 양손으로 황관을 썼다. 전통적인 대관식에는 교황이 황관을 씌워주는데 나폴레옹은 본인 스스로 황관을 쓰는 쪽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교황 피우스 7세는 나폴레옹 뒤쪽에 앉아 단지 축복하는 손짓만 하고 있다. 대관식 당시 조세핀은 마흔이 넘어 는데 우아한 여인으로 묘사되었다.
황관을 받는 인물은 그의 처남이자 나폴리 국왕인 뮈리이고 조세핀의 두 시녀 뒤의 선 다섯 여인들은 나폴레옹의 여형제들로 첫 번째 여인이 데리고 선 사내아이는 나폴레옹과 전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 나폴레옹 샤를이다. 황관을 받는 인물 뒤의 그림 중앙에 앉아 있는 여인은 나폴레옹의 어머니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

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는 1783년 루이16세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신고전주의의 첫 작품으로 출장 전 호라티우스 형제를 묘사한 작품이다. 기원전 669년경에 로마와 알바(Albains)의 전쟁에서 싸웠던 사돈관계의 두 가문의 아들들, 즉 로마 호라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와 알바의 큐라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에 관한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이다.
그림의 왼쪽은 호라티우스 형제의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세 자루의 칼을 주면서 제국을 위한 죽음이나 전쟁의 승리를 맹세하게 있고 오른쪽은 고통스러워하는 큐라티우스로 시집 갈 누이 카밀라, 큐라티우스에서 시집온 아내 사비나 그리고 어린 손자를 감싸 안고 있는 어머니가 그려져 있다.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은 1819년 작품으로 1816년 7월 2일 영국에서 프랑스로 반환된 세네갈의 생루이 섬에 정착하기 위해 약 400명을 태운 군함 메두사호가 좌초되어 13일 동안 표류하였고 15명만 구조된 비극적인 사건을 그렸다.
작품은 생존자들이 13일간의 표류 뒤 수평선 멀리 구조선을 발견하는 순간을 묘사하였다. 먼 곳에서 지나가는 배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흔드는 인물들과 무릎에 놓인 죽은 아들을 애도하는 아버지, 뗏목 가장자리에 곧 파도에 떠내려갈 듯한 시체들 등 피라미드 구도다.

역사화가 폴 들라로슈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역사화가 폴 들라로슈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1850년도 유화 작품으로 1800년 봄 이탈리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을 기습 공격하기 위하여 제2차 이탈리아 원정 때 나폴레옹 보나파트트의 모습이다. 말 대신 노새를 타고 알프스 설산 그랑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하는 모습으로 추위를 막기 위하여 회색 코트를 입었으며 차갑고 힘겨워하는 분위기로 실제 모습에 가깝도록 표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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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위대한 작가 빅토르 위고의 작품이자 앤소니 퀀 주연의 영화 노트르담의 곱추의 배경이 된 노트르담 대성당은 중세 고딕의 대표 양식으로 시테섬에 위치하고 있다. 독일의 쾰른 대성당, 이탈리아 밀라노 대성당과 함께 중세 고딕 양식의 3대 성당에 포함되는 노트르담 대성당은 1,302년 필리프 4세 때 삼부회가 개최되었고 1,455년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이 열렸다. 또한 1,804년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고 드골이 프랑스 해방을 축원하며 국가를 불렸고 프랑스 전 대통령 미테랑의 장례식도 치러졌다. 그리고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길이 127m, 너비 48m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원안에 꽃을 그려 넣은 로자스(rosace)를 중심부로 상단에는 양쪽으로 우뚝 솟아오른 사각기둥의 탑과 하단에는 3개의 출입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2019415일 오후 650분경 대성당 지붕에서 발생한 화재(火災)로 탑과 그 주변의 지붕이 붕괴되었고 화재는 약 10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프랑스 국민에게 노트르담 대성당의 상징성은 매우 커서 화재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현재 재건 및 복구 중이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024년까지 복구를 완료 하겠다고 한다. 2017년 파리 여행 때 노트르담 대성당 추억을 돌이켜 본다.

하단의 출입문 3개 중 왼쪽 문으로 성모 마리아가 조각되어 있다.

1160년 파리의 부주교였던 쉴 리가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기 위해 짓기 시작하여 200년이라는 공사 기간을 거쳐 1363년에 완공되었다. 노트르담의 뜻은 우리들의 귀부인이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를 가리킨다. 길이 127m, 너비 48m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원안에 꽃을 그려 넣은 로자스(rosace)를 중심부로 상단에는 양쪽으로 우뚝 솟아오른 사각기둥의 탑과 하단에는 3개의 출입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의 로자스 바로 앞 3명의 조각상은 가운데가 성모 마리아이고 좌우에는 아담과 이브인데 성당 정면의 모든 조각과 장식들이 이 조각상에 경의를 표하는 구도로 설계되었다. 성모 마리아, 아담과 이브의 조각상아래에는 28명으로 이루어진 제왕들이 떠받치고 있다. 가고일(gargoyle)을 비롯하여 성당 처마에 달려 있는 다양한 낙수받이 조각상 또한 보는 이의 흥미를 자극시킨다.

하단의 출입문 3개 중 가운데 문은 최후 심판의 문, 왼쪽 문은 성모 마리아, 오른쪽은 성녀 안나 각각 조각되어 있다. 성당내부는 성경 내용을 주제로 조각되었고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이 특히 뛰어나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뒤쪽은 예쁜 화초로 정원이 가꾸어져 있어 여행으로 지친 몸을 조용히 다독거리기에 좋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또 다른 볼거리는 푸앵 제로(Point Zero)이다. 노트르담 정문에서 앞으로 약 50m 떨어진 바닥에 있는 표지판으로 파리와 유럽 각 도시간의 고속도로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이다. 예를 들어 여기서 디종까지 거리는 310km이다. 푸앵 제로의 기원은 중세 시대 죄수들이 대주교관의 문 앞에서 공개 참회를 했던 장소가 현재 푸앵 제로의 위치다.

푸앵 제로(Point Zero)는 바닥에 있는 표지판으로 파리와 유럽 각 도시간의 고속도로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이다. 기원은 중세 시대 죄수들이 대주교관의 문 앞에서 공개 참회를 했던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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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혁명 100돌 기념하기 위해 공학자 귀스타브 에펠에 의해 파리 만국 박람회 때 만들어졌다. 현재 프랑스의 유료 관광 명소 1위이다.
에펠탑은 1930년대 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로 324m. 무게 10,000톤으로 1964년에 프랑스 국가유산, 199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에펠탑을 만들 당시에는 문학가 모파상을 비롯한 보수 지식인들은 파리의 품격과 격조를 떨어뜨린다고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탑이 완공되고 관광객에게 개장했을 때, 유럽 각 국의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5개월 만에 2천만 명이나 이르렀고 반대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승강기를 이용하여 에펠탑 전망대에서 파리를 조망하고자 한다면, 1~2개월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현장에서 1~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에펠탑에는 전당대가 1층 전망대(57m), 2층 전망대(116m), 꼭대기 전망대(276m) 등 3곳이 있다. 2층 전망대에는 기념품 Shop, 레스토랑 등 있는데 여기 레스토랑을 이용하려면 3~4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당연히 꼭대기 전망대에서 보아야만 파리의 모습이 그려진다.

꼭대기 전망대(276m)에서 바라 본 파리시내와 세느강

승강기를 이용하여 에펠탑 전망대에서 파리를 조망하고자 한다면, 1~2개월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현장에서 1~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계단을 이용하면 바로 올라 갈수 있는데 “Stair Only”라고 표기 된 계단을 이용하면 된다.
무엇보다도 에펠탑의 진면목은 밤에 있다. 낮에는 경쾌한 모습이지만 밤에는 아름답지 못해 화려하다. 마치 밤을 깨우는 전령사 같다. 3만개가 넘는 전구와 스포트라이트 조명은 새벽 1시까지 탑을 밝히는데 저녁 7시부터는 정시마다 5분간 플래시 조명이 별처럼 반짝인다.

밤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에펠탑

특히 파리 야경을 감상하고자 한다면 세느강 유람선을 타면 더욱 기억에 남는 파리가 될 것 같다. 대표적인 유람선이 바토무슈 크루즈다. 유람선 코스는 앵발리드와 앵발리드 다리, 알렉상드로 3세 다리, 팔레 부르봉 왕궁과 콩코르드 다리 등 시작으로  오르세 미술관, 시테 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끝으로 시테 섬을 돌아서 콩시에르주리 왕궁 등 지나서 바토무슈 크루즈 선창장에 도착한다. 다양한 다리도 많이 볼 수 있어 파리 야경을 만끽할 수 있다.

바트무슈 유람선 선착장
유람선에서 바라 본 에펠탑
알렉상드로 3세 다리. 세느 강에 있는 다리 중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다. 1892년 프랑스와 러시아가 동맹을 체결 할 때 당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 3세 이름의 따서 1900년 프랑스 만국박람회 기념으로 만들어 졌다.
팔레 부르봉 왕궁과 콩코르드 다리. 팔레 부르봉 왕궁은 루이14세 때 지어진 궁전으로 지금은 프랑스 하원 회의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르세 미술관
노트르담 대성당
콩시에르주리 왕궁은 프랑스 초기 왕들의 왕궁으로 프랑스 혁명 때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퐁뇌프 다리.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앙리3세 때 짓기 시작하여 앙리4세 때 완공되었다. 영화 "퐁 뇌프의 연인들"의 배경이 된 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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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 베르사유와 함께 프랑스 3대 관광지 중 한 곳인 몽생미셸은 프랑스 북부 영국해협을 마주하고 있는 바스노르망디 망슈(Manche) 주의 생미셸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수도원이다. 생미셸 산은 92m 높이의 화강암으로 된 바위산으로 산의 형태에 따라 수도원을 아래에서 조금씩 지어 올렸고 수도원의 구성은 예배당(Chapelle)과 라 메르베유(La Merveille, 불가사의)로 나누어져 있다.

멀리 옥수수밭 위에 떠 있는 몽생미셸

조수간만의 차이가 유럽에서 가장 크고 10 ~ 15m의 수면 차이로 밀물 때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이다. 특히 노을이 질 때 매우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한다.

밀물 때도 상관없이 몰생미셸로 갈수 있는 다리

708년 이곳에서 아브랑슈의 오베르 주교의 꿈에 대천사 미카엘 계시를 3번이나 받고 바위산에 수도원을 짓기 시작했고 유럽인의 성지 순례지로 유명해졌다. 966년 미로처럼 꾸며진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원이 세워졌고 그 아래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14세기에는 마을이 바위산 바로 아래까지 확장되었다.

12세기 수도원 주변에 성벽을 쌓으면서 백년전쟁 때 난공불락의 요새로 사용되어 영국군의 총공세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수도원은 프랑스 대혁명 때 해산되었고 1863년 까지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1874년에 사적기념물로 되면서 대대적인 복원공사가 시작되었다.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등록되었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성 미카엘(Michael) 대천사 숭배

오베르 주교

천사 군단의 수장인 성 미카엘은 중세의 중교적 감수성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 미카엘은 신약성경 요한 묵시록에 악마의 상징인 용과 맞서 싸워 무찌르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내세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던 중세인들에게 성 미카엘은 최후의 심판일에 죽은 자를 인도하고 인간의 영혼을 저울에 다는 인물이다.

708년 아브랑슈의 오베르 주교가 꿈에 대천사 미카엘부터 계시를 받는 모습

성 미카엘에 대한 숭배는 492년 몬테 가르가노(이탈리아)에 최초의 성소가 건립되면서 5세기말에 등장하게 된다. 1,000년 경에는 성 미카엘을 기리는 교회와 예배당이 유럽 전역에 확산되면서 주로 언덕이나 갑()의 상단에 세워졌다. 백년전쟁 후에는 몽생미셸이 영국군에 저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서 성 미카엘에 대한 숭배가 새로운 차원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숭배는 반종교개혁과 함께 새롭게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교회의 입장(구교)에서 볼 때 오직 군대를 이끄는 천사만이 프로테스탄트 이단(신교)에 맞서 싸울 수 있다고 믿었다.

천사 군단의 수장인 성 미카엘

기독교의 도상에서 성 미카엘은 흔히 칼과 저울을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전통과 민간종교는 성 미카엘을 무기와 저울에 관련된 모든 직종의 사람들과 기사들의 수호성인으로 만들었다.

수도원은 프랑스 대혁명 때 감옥으로 1863년 까지 사용되었다.

현재 몽생미셸 수도원 안에는 상업시설이 있어 식당에 들러 나폴레옹도 즐겨 먹은 굴 요리를 먹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또한 노르망디 지방에서 나는 치즈 또한 유명하니 식당에서 주문할 때 참고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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