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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나 사정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화합하지 못하는 상태를 갈등(葛藤)이라고 하는데 갈등은 칡과 등나무이다. 칡은 줄기를 왼쪽으로,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고 올라가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해결의 실마리가 찾는 것이 어렵다라는 의미가 된다.
현곡면 오류리에 있는 등나무(현곡면 오류리 527번지)는 1962년 12월 7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등나무는 4그루인데, 두 그루씩 모여서 자라고 있다. 가슴높이의 줄기지름이 각각 20·40·40·50cm이며 팽나무를 감고 올라가고 있다. 높이 17m이로 동서쪽으로 20m, 남북쪽으로 50m 정도 퍼져있다.

어떤 일이나 사정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화합하지 못하는 상태를 갈등(葛藤)이라고 하는데 갈등은 칡과 등나무이다.
칡은 줄기를 왼쪽으로,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고 올라가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해결의 실마리가 찾는 것이 어렵다”라는 의미가 된다.

()은 콩과에 속하는 덩굴성 식물로 5월에 연보라색의 꽃이 핀다봄을 알리는 꽃향기로 아카시아나무 꽃향기와 더불어 등나무 꽃 향기는 은은하고 깔끔한 향기가 난다. 또한 여름에는 나그네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여름나무이다.
()이라는 한자는 위로 감고 올라가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문자이다학술적으로 이 나무의 본래 이름은 참등이라고 하는데 흔히 등이라고 하여 산등이나 애기등 같은 등류를 통칭한다.

등(藤)은 콩과에 속하는 덩굴성 식물로 5월에 연보라색의 꽃이 핀다.
등(藤)이라는 한자는 위로 감고 올라가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문자이다.

신라 시대 때, 이곳을 용림(龍林)이라 하여 왕이 수렵을 즐기던 곳이었다여기의 등나무를 용등(龍藤)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등나무 줄기의 꼬임과 그 위엄을 용에 견주어 붙인 명칭이다. 이 등나무 옆에 깊은 샘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고 옆에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여기에 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때 어느 농가에 열아홉 살, 열일곱 살이 된 예쁜 두 딸이 있었는데 둘다 남모르게 이웃집 청년을 사모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청년이 싸움터로 출정하게 되어 떠나게 되고 그 모습을 몰래 보며 눈물을 짓다 두 자매는 같이 그 청년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정한 자매가 서로 양보하기로 결심하고 있을 때 그 청년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얼싸안고 울다가 함께 못에 몸을 던졌다.

자매가 그 청년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얼싸안고 울다가 함께 못에 몸을 던졌던 연못가에는 등나무 두 그루가 자라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 연못가에는 등나무 두 그루가 자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청년이 훌륭한 화랑이 되어 돌아오게 되었고, 이 화랑은 세상을 등진 자매의 애달픈 사연을 듣고서 자신도 연못에 몸을 던졌다. 화랑이 죽은 연못가 자리에서 팽나무가 자라 나왔고 이로부터 등 두 그루는 팽나무를 힘차게 감고 올라가 자라 5월이 되면 탐스러운 꽃송이로 그윽한 향기를 퍼뜨리고 있다. 이에 두 그루 등나무는 팽나무를 감고 자라며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을 달래고 있다고 한다.

화랑이 죽은 연못가 자리에서 팽나무가 자라 나왔고 이로부터 등 두 그루는 팽나무를 힘차게 감고 올라가 자라 5월이 되면 탐스러운 꽃송이로 그윽한 향기를 퍼뜨리고 있다.
두 그루 등나무는 팽나무를 감고 자라며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을 달래고 있다고 한다.

이 애틋한 전설에서 유래되었는지 신혼부부의 금침(베게)에 등꽃을 따서 말린 것을 넣어주면 정이 한층 깊어진다는 말도 전하여지고 있으며, 또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때 등나무의 잎을 달여 마시면 정이 다시 살아난다는 속신도 있다.

신혼부부의 금침(베게)에 등꽃을 따서 말린 것을 넣어주면 정이 한층 깊어진다는 말도 전하여지고 있다.

현곡면(見谷面) 경주시의 서북쪽에 있는 면이다. 남쪽으로 경주시내, 동쪽으로 천북면, 북쪽으로 안강읍, 서쪽으로 건천읍과 영천시 고경면에 접해 있다. 서쪽에서 발원하는 소현천을 중심으로 작은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소현천은 동쪽의 형산강에 합류된다.
‘현실’이라는 순우리말 이름을 한자의 소리와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 ‘현곡(見谷)’이라는 설이 있다. 오류리(五柳里) 이름은 마을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었다 해서 유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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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음산(해발:588m)은 정관면과 일광면 원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기장군의 명산이자 기장 8경 가운데 제1경이다. 달음산에는 예로부터 산삼이 있었다고 전해오는데 달음산 골짜기의 얼음이 녹을 무렵이면 천년 묵은 산삼이 사람으로 화(化)해서 상주(喪主)의 복장을 하고 이 산에서 내려와 좌천장터로 나들이 한다고 한다.

달음산 수리봉에서 본 풍광

달음산은 만장년 산지로 산정은 주상절리로 형성된 두 개의 봉우리인 취봉과 옥녀봉이 있다. 북쪽 산록에서 좌광천, 남쪽에서는 일광천이 발원한다. 옛날에는 달이 뜨는 산이라는 뜻인 월음산(月陰山)이라고도 하였다.

옥정사 입구

『기장현읍지』에서는 취봉산(鷲峰山)이라고 적고 있는데 옛 기장 사람들은 추봉산 또는 축봉산이라고 불렀다. 주봉(主峰)의 이름은 취봉(鷲峰) 또는 수리봉이라고 하고, 그 동북쪽에 있는 봉우리를 옥녀봉(玉女峰) 또는 구슬 아기봉이라고 한다.
달음산 설명에는 주봉(主峰)인 취봉(鷲峰) 또는 수리봉을 달음산이라 하고 북쪽에 있는 봉우리를 옥녀봉(玉女峰) 또는 구슬 아기봉을 월음산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설명이다.

옥정사 일주문

취봉 일대에서 발원한 하천을 취정천(鷲井川), 옥녀봉에서 발원한 계곡을 옥정천(玉井川)이라고도 한다.
달음산 산행코스는 5가지가 있는데 옥정사에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빨리 수리봉 정상에 도착한다. 동해선 전철을 이용하는 경우는 좌천역에서 내려서 광산마을에 까지는 30분정도 걸린다. 차를 가지고 오는 경우는 옥정사 주차장에서 주차하고 출발하면 된다.

달음산 정상인 수리봉 가는 길에 있는 편백나무 숲

옥정사에서 달음산 정상 수리봉까지는 1시간 30부정도 소요된다. 수리봉에서 옥녀봉 방향으로 하산하여 광산마을 초입에 도착하는데 40분 정도 소요된다.

정관

달음산 수리봉(취봉 鷲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일광면 원리 상리마을에서 달음산 기슭을 올라가면 해먹이라는 낙타 등처럼 생긴 능선이 있고, 그 능선 중턱에 골짜기가 있고, 그곳에 장사바우라는 큰 바위가 있다. 장사바위에서 올라가는 곳에 찬물샘이 있고, 그 옆에 집터가 있다. 이곳을 이고(李古) 집터라 하고 있다.

정관

신라 석탈해왕 때 이곳에 이고(李古)라는 늙은 부부가 집을 짓고 살면서 장사바우 앞에서 이들을 점지하여 달라고 기원하였다. 달음산의 신령님이 감응하여 쉰 살이 넘은 외로운 늙은 부부에게 옥동자가 탄생하였다. 늙은 부부는 금지옥엽처럼 키우면서 바우라고 불렀다.

달음산 수리봉의 정상 표지석
수리봉에서 본 정관

바우는 일곱 살이 되자 큰 바위를 번쩍 들고 내던지기도 하고 엄지손가락으로 빙빙 돌리기도 하였다. 바우장사의 소문이 퍼지게 되자 신라에서는 자객을 시켜 암살하려고 하였다. 그 당시 이곳은 신라를 괴롭히던 거칠산국이라는 작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위협을 느낀 바우는 부모 앞에 엎드려 신라국의 첩자가 소자를 죽이려 하니 소자는 성년이 될 때까지 피신을 하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하직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나서 장사바위에 올라서 왼쪽무릎을 꿇고 오른손가락을 짚고 힘껏 뛰어오르자 양 겨드랑이 밑에 비늘나래가 3자나 펴지면서 독수리처럼 날아 달음산 수리봉(鷲峰)에 앉았다.

수리봉에서 본 일광
수리봉에서 아득히 보이는 LCT

수리봉의 날카로운 바위를 평탄하게 다지고 이곳에서 며칠간 머물다가 천마를 타고 북쪽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장사바위에는 이 바우소년 장사가 왼쪽무릎을 꿇었던 자리와 오른손을 짚었던 흔적이 바위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고, 집터와 샘터가 남아 있다.

수리봉에서 옥녀봉 방향으로 하산하는 길
수리봉(취봉 鷲峰)
산불감시 초소
달음산 2개의 봉우리 중 하나인 옥녀봉

그때부터 이 바위를 장사바우라고 하고 애기장사를 바우장사라고 불렀고 집터를 이고 집터라 하고 있다. 그리고 달음산의 수리봉(취봉 鷲峰)은 그 위가 묘하게도 넓이가 20평정도 평탄하고 잔디가 덮여져 있는데, 이 바우소년 장사가 독수리처럼 날라 올라가서 머문 곳이라 하여 수리봉이라 하고, 한문으로 취봉산(鷲峰山)이라 표기하고 이를 속언으로는 추봉산이라 한다.

옥녀봉 기슭의 편백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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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음산 편백나무 숲길은 달음산 4부 능선 지점에 조성한 숲길이다. 숲길을 상세히 보면 달음산 기슭과 월음산 기슭 각 2곳에 조성되어 연결되어 있는데 특히 월음산 기슭에 조성된 편백나무가 크고 장대하여 운치가 있다. 월음산 등산로를 따라 심어져 있어 산행의 묘미를 더해준다. 숲길 산책은 옥정사에서 출발하는 것과 광산마을 초입에서 월음산 방향으로 출발하는 것이 있다. 순수 숲길산책의 소요 시간은 1시간 정도이다.

달음산 옥정사 입구

옥정사 방향에서 출발하는 것은 경사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형국이다. 옥정사에서 20~30분정도 올라가면 편백나무 숲길과 달음산 정상가는 길로 갈라지는데 왼쪽으로 빠지는 길로 가면 편백나무 숲길에 해당된다. 편백나무는 옥정사 방향에는 나무가 적고 월음산 기슭에는 많이 조성되어 있다.

옥정사 방향의 편백나무 숲길 초입 안내글자

 

옥정사에서 20~30분정도 올라가면 편백나무 숲길과 달음산 정상가는 길로 갈라지는데 왼쪽으로 빠지는 길로 가면 편백나무 숲길에 해당된다.

달음산(해발588m) 정관면과 일광면 원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기장군의 명산이자 기장 8경 가운데 제1경이다. 달음산에는 예로부터 산삼이 있었다고 전해오는데 달음산 골짜기의 얼음이 녹을 무렵이면 천년 묵은 산삼이 사람으로 화()해서 상주(喪主)의 복장을 하고 이 산에서 내려와 좌천장터로 나들이 한다고 한다.

숲길에서 만나 밤나무 한 그루
멀리 보이는 동해바다

달음산은 만장년 산지로 산정은 주상절리로 형성된 두 개의 봉우리인 취봉과 옥녀봉이 있다. 북쪽 산록에서 좌광천, 남쪽에서는 일광천이 발원한다. 옛날에는 달이 뜨는 산이라는 뜻인 월음산(月陰山)이라고도 하였다. 기장현읍지에서는 취봉산(鷲峰山)이라고 적고 있는데 옛 기장 사람들은 추봉산 또는 축봉산이라고 불렀다. 주봉(主峰)의 이름은 취봉(鷲峰) 또는 수리봉이라고 하고, 그 동북쪽에 있는 봉우리를 옥녀봉(玉女峰) 또는 구슬아기봉이라고 한다. 취봉 일대에서 발원한 하천을 취정천(鷲井川), 옥녀봉에서 발원한 계곡을 옥정천(玉井川)이라고도 한다.

기도원 가는 길과 만난다.
월음산 기슭의 편백나무 숲길 안내글자

달음산 수리봉(취봉 鷲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일광면 원리 상리마을에서 달음산 기슭을 올라가면 해먹이라는 낙타 등처럼 생긴 능선이 있고, 그 능선 중턱에 골짜기가 있고, 그곳에 장사바우라는 큰 바위가 있다. 장사바위에서 올라가는 곳에 찬물샘이 있고, 그 옆에 집터가 있다. 이곳을 이고(李古) 집터라 하고 있다. 신라 석탈해왕 때 이곳에 이고(李古)라는 늙은 부부가 집을 짓고 살면서 장사바우 앞에서 이들을 점지하여 달라고 기원하였다. 달음산의 신령님이 감응하여 쉰 살이 넘은 외로운 늙은 부부에게 옥동자가 탄생하였다.

늙은 부부는 금지옥엽처럼 키우면서 바우라고 불렀다. 바우는 일곱 살이 되자 큰 바위를 번쩍 들고 내던지기도 하고 엄지손가락으로 빙빙 돌리기도 하였다. 바우장사의 소문이 퍼지게 되자 신라에서는 자객을 시켜 암살하려고 하였다. 그 당시 이곳은 신라를 괴롭히던 거칠산국이라는 작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위협을 느낀 바우는 부모 앞에 엎드려 신라국의 첩자가 소자를 죽이려 하니 소자는 성년이 될 때까지 피신을 하겠다고 눈물을 리며 하직인사를 올렸다.

광산마을로 가는 길로 가운데 길로 간다.

그리고 나서 장사바위에 올라서 왼쪽무릎을 꿇고 오른손가락을 짚고 힘껏 뛰어오르자 양 겨드랑이 밑에 비늘나래가 3자나 펴지면서 독수리처럼 날아 달음산 수리봉(鷲峰)에 앉았다. 수리봉의 날카로운 바위를 평탄하게 다지고 이곳에서 며칠간 머물다가 천마를 타고 북쪽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장사바위에는 이 바우소년 장사가 왼쪽무릎을 꿇었던 자리와 오른손을 짚었던 흔적이 바위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고, 집터와 샘터가 남아 있다.

광산마을 신앙석으로 추정 됨
월음산 및 달음산 편백나무 숲길 가는 초입

그때부터 이 바위를 장사바우라고 하고 애기장사를 바우장사라고 불렀고 집터를 이고 집터라 하고 있다. 그리고 달음산의 수리봉(취봉 鷲峰)은 그 위가 묘하게도 넓이가 20평정도 평탄하고 잔디가 덮여져 있는데, 이 바우소년 장사가 독수리처럼 날라 올라가서 머문 곳이라 하여 수리봉이라 하고, 한문으로 취봉산(鷲峰山)이라 표기하고 이를 속언으로는 추봉산이라 한다.

광산마을 마을길
일제강점기 때 광산개발에 만든것으로 추정되는 종

달음산 등산로 초입에 위치하고 있는 옥정사는 조선시대 헌종 원년(1835)에 창건된 옛 절터가 방치되어 있는 것을 찾아 1907년 박긍해 스님이 창건하였다. 이 곳 절에서는 현재 절터가 옛날 원효대사가 관세음보살로부터 표주박으로 마셨던 옥샘(玉泉)의 자리라고 한다. 그리고 근대에 제작한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신중도(神衆圖), 칠성도(七星圖) 등 불화 3점이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또한 배를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포대화상(布袋和尙)이 경내에서 가장 먼저 맞이한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의하면 포대화상은 명주(明州) 봉화현(奉化縣) 출신으로 당나라 말기부터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름은 계차(契此)이며, 항상 커다란 포대자루를 들고 다녔기 때문에 포대화상이라는 별명으로 많이 불렸다. 그 외에 구유, 치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옥정사 입구

원효대사와 옥천(玉泉)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달음산(鷲峰山) 서쪽에 있는 취정사(鷲井寺)에 머물고 계시던 원효대사가 서라벌로 가려고 옥녀봉(玉女峯)을 넘어 동쪽 산기슭에 이르러 동해에서 떠오르는 찬란한 서광을 바라보시다가 문득 갈증을 느꼈다. 그때 마침 옥녀(玉女)같은 처녀가 옹달샘에서 샘물을 물동이에 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대사가 물을 청하자 처녀는 표주박 가득히 샘물을 떠올렸다. 대사는 그 샘물을 마시자 온몸이 시원해지면서 무거운 몸이 홍모처럼 가벼워졌다. 대사는 세 번이나 받아 마시고는 처녀에게 나무관세음보살로 고마운 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그 처녀는 몸이 굳어지면서 돌로 변하면서 관세음보살상이 되었다.

옥정사 지장전
배를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포대화상(布袋和尙)
절에서 조성한 옥천(玉泉)
구유

대사는 그 처녀가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음을 알고 오체투지의 예를 올렸다그런 뒤 대사는 이곳이 관음도량임을 알고 초막을 짓고 잠시 머물면서 동해 용왕에게 이 옥샘(玉泉)을 지켜 주기를 당부하고 서라벌로 떠났다. 그 후 이곳은 동해용왕이 지켜 주는 옥샘이 있고, 관세음보살 돌부처님이 있는 곳에 마을 사람들이 암자를 짓고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대웅전 합각에 새겨진 삼보륜 앞의 무인조각상이 특이하다.
대웅전 추녀
대웅전 치미

조선왕조 때 승유억불 정책 때문에 취정사(鷲井寺)도 퇴락되고 옥천사(玉泉寺)도 퇴락되자 절터들에 있던 큰 절에 돌부처를 모셨는데 그 큰절도 퇴락되자 그 돌부처는 다시 이곳에 은적하였다. 그래서 다시 이곳에 암자를 짓고 옥정사(玉井寺)라 하였다고 한다달음산은 물이 없는 산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취봉산(鷲峰山)에 취정(鷲井)이 있고 옥녀봉산(玉女峯山)에 옥정(玉井)이 있어 유명하다.

칠성각
칠성각에서 본 경내
소림각
소림각 치미

기장 지역에는 달과 관련된 지명유래가 많다. 월음산(月陰山), 월전(月田), 월호(月湖), 월내(月內) 등이 있는데 옛날 장안면 월내천(장안사에서 발원) 옆에 200평가량의 연못이 풀숲에 덮인 채 있었다. 밤이 되어 동천에 뜬 달이 연못에 비치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연못에서 달이 솟아오르는 느낌을 갖게 하여 연못 안에 달이 뜨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월호(月湖)라고 하다가 고종 3(1866)에 월내(月內)라고 하였다.

범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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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은 부산광역시 북동부에 위치한 군으로 태백산맥의 지맥인 대운산맥이 북동~남서방향으로 뻗어내려 형성된 산지가 주를 이루고 있다. 북쪽으로 장안읍(長安邑) 불광산(佛光山), 삼각산(三角山)이 있어 울산광역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쪽으로 정관면(鼎冠面), 철마면(鐵馬面)에 백운산(白雲山), 망월산(望月山), 철마산(鐵馬山) 등 있어 양산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 감단산, 곽걸산이 있어 해운대구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봉대산(峰臺山), 연화봉(連花峰)이 있어 바다에 접하고 있다.

능선에서 바라다 본 연화봉
연화봉 정상주위는 약간의 평지를 이루고 있다.

동쪽 해안의 기장읍 대변리, 일광면 이천리, 장안읍 월내리 등에는 소규모의 만이 형성되어 있고 효암천(孝巖川), 장안천(長安川), 좌광천(佐光川), 죽성천(竹城川), 일광천(日光川) 등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연화봉 정상주변

기장읍 동쪽 해안가 연화리(蓮花里)의 마을 뒷산에 연화봉(蓮花峯, 154m)이 위치하고 있다. 연화리와 석산리의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로 모습이 연꽃처럼 생겼다 하여 연화봉(蓮花峯)으로 불리우지고 있다. 옛날 기장고을의 형국을 말할 때 옥녀가 비단을 짜고 있는 옥녀직금(玉女織錦)형이라고 하고, 이러한 형국에서 연화봉은 연꽃무늬의 비단 폭에 해당되는 산봉우리다.

건설부 당시 정상 표지석

일반적으로 풍수지리에서 명당 형국 중 연꽃모양이 있는데 물에 뜬 연꽃 형(蓮花浮水形), 물에 이른 연꽃 형(蓮花到水形) 등 있다. 풍요와 다산의 터 이자 연꽃의 청정함과 순수함처럼 고귀한 인격을 갖춘 인물이 태어나는 터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곳이 물에 뜬 연꽃 형(蓮花浮水形)인 안동 하회마을이다.

기장 청강주공아파트에서 출발하는 소로

연화봉 북쪽에 남산 봉수대가 있는 봉대산이 있어 등산객에게는 봉대산 마무리 코스로 많이 애용하고 있다. 봉대산을 거친 후 기장 청강주공아파트에서 출발하여 능선을 따라 가면 연화터널 상부를 지나면 연화봉을 맞이할 수 있다. 계속 남쪽으로 가면 아난티힐튼으로 가는 사거리 앞으로 나온다. 그리고 연화터널 상부에서 바닷가 방향인 동쪽으로 소로로 가면 연화리 마을이 나오고 서쪽으로 난 소로로 가면 청강리가 나오는데 연화터널 입구가 보인다.

청강주공아파트에서 출발한 소로
연화터널 상부 연화봉 목전의 갈림길. 바닷가 방향인 왼쪽(동쪽)으로 가면 연화리 마을이 나오고 오른쪽(서쪽)으로 난 소로로 가면 청강리가 나온다.
연화리 방향 소로
죽도가 보이는 연화리
연화리에서 출발하는 소로
청강리 방향 등산길
청강리 연화터널 입구 주변에서 출발하는 길

현재 기장 연화봉은 형상이 많이 훼손 되었으리라 본다. , 서에 골프장이 생겼고 남쪽에는 롯데월드가 지어졌으며 추가 공사도 진행 중이다. 또한 연화터널 생겨서 교통 체증에 도움을 주고 있다. 개발도 중요하고 교통의 편리함도 좋지만 연화봉 훼손이 최소화가 되길 바람이다.

연화봉 남쪽 능선 소로
연화봉 남쪽 끝단 길
연화봉 능선 남쪽 출구길
대게만찬 및 일등가 오리불고기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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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산(日光山)은 일광면 삼성리에 있는 산으로 안산암의 암주(岩柱)로 되어 있고, 일광 신도시를 바라보고 있다. 해발 385m로 그리 높지 않고 비교적 완만하나 정상부 주변부터는 약간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산의 형상은 종을 엎어놓은 듯한 종상형이고 산 정상에서 동해를 바라보면 경관이 뛰어나며 일광 바다가 아늑하게 보인다.

일광산 정상에서 바라보 보면 펼쳐지는 일광 앞 바다

임도와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인근 주민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자주 찾는 산이다. 또한 MTB 동호회가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기장읍지에는 아침 햇살을 가장 먼저 받는 곳이라고 하여 일광산이라고 하며 기장 향교가 기장읍 교리로 옮기기 전에 는 향교의 주산이었다.

남쪽으로 바라도 본 LCT와 해운대 장산

일광산(日光山)에 오르는 방법에는 임도를 이용하는 것과 소로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소로를 이용하는 것이 운치가 나고 산행하는 맛이 난다. 가장 빨리 정상까지 가는 방법은 횡거사까지 차로 와서 주차 한 후 걸어가면 30분이면 도착한다. 그러나 임도의 경사가 심해 운전 할 때 주의를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많이 이용하는 방법은 백두사에서 출발하여 좌측과 우측에 조성 된 임도 또는 소로를 따라 올라간다.

일광면 백두사
백두사 좌측 임도에 있는 안내표지판
백두사 좌측에 조성 된 임도와 소로 입구
소로에서 만난 정3품 비석(증 통정대부 김해김씨지묘)

소로를 따라 산행을 하면 유난히 다양한 바위를 자주 만난다. 아무래도 산행의 묘미는 흙과 바위의 산세를 감상하고 꽃과 나무의 생명력을 느끼는 것일 것이다. 차성가(車城歌) 삭출금부(削出金芙) 일광산은 만장봉(萬丈峯) 높았는데~그 옛날 높고 높은 산봉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정상을 알리는 표지판
일광산 정상 표지석
멀리 보이는 고리원자력발전소
하산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
횡금사 방향을 안내하는 표지판
좌측 임도로 하산 때 만나는 휴게장소
백두사와 예지골못 갈림길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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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해발 469m)은 기장군 장안읍 명례리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이름은 삿갓 모양의 3개의 봉우리가 동서로 나란히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산은 옛날부터 영험한 산이라서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고 그러면 비가 내려 해갈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영험한 산이 명당으로 인식되어 암장(暗葬)을 하기도 했다. 대동여지도에 삼각산은 원적산(양산 천성산)에서 백운산을 거쳐 이어지는 줄기로 바다로 유입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일반적인 삼각산 등산로는 박치골 따라 조성 된 길을 따라서 가다가 좌측으로 빠져 산길을 이용하여 삼각산 능선까지 올라가는데 보통 2곳에서 올라간다. 능선에 도착한 후에는 동쪽 방향으로 해서 삼각산 정상으로 이동한다. 아래의 등산코스로는 소요시간이 3시간 30분정도 걸린다.

장안사 주차장 박치골 임도, 트레킹 로드 석은덤 삼각산 전망바위 장안사 주차장

삼각산 등산로는 박치골 따라 조성 된 길로 매우 잘 되어있다. 길 폭도 넓으며 바닥은 초입부는 포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비포장 길이다.
불광사 약수터는 장안사산장 옆 소로 길을 따라 가면 계곡아래에 있는 약수터를 만날수 있다.
반딧불이 공원 입구
반딧불이 공원에는 방문객을 위한 산책 길을 계곡 따라 일부 구간을 Deck 길로 조성하였다.

삼각산 등산로는 박치골 따라 조성 된 길로 매우 잘 되어있다. 길 폭도 넓으며 바닥은 초입부는 포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비포장 길이다. 특히 높이 뻗은 큰 감나무를 길에서 자주 접하는데 지나가는 객에게는 풍요로움과 아늑함을 느끼게 한다. 장안사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맞이하는 것이 장안사산장 뒤 계곡아래에 있는 불광산 약수터이다. 안내문이 없어 놓치기 쉽다. 약수 한 바가지 들이 키고 나서 길을 재촉하여 가다 보면 반딧불이 공원을 만난다. 반딧불이 공원은 산책을 위해 계곡 따라 일부 구간을 Deck 길을 조성하였다.

조성된 길을 따라 보면 높이 뻗은 큰 감나무를 길에서 자주 접하는데 보는 이에게 풍요로움과 아늑함을 느끼게 한다.

굽이굽이 절경 속에 길을 따라가다 보면 쉽게 석은덤까지 갈 수 있다. 가히 팔기산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하는 길이다. 병산마을 방향으로 가기 전 동쪽방향 능선으로 가는 산길을 이용하여 동쪽으로 이동한다. 산길이 양호하지는 않다. 능선을 따라 가다보면 까마귀 떼도 만나고 길 바닥에는 도토리가 많이 떨어져 있어 자칫 미끄러져 넘어지 지기가 쉽다.

등산로에서 좌측으로 빠져 산길을 이용하여 삼각산 능선까지 올라가는 첫 번째 갈림길 입구이다.
두 번째 갈림길로&nbsp;&nbsp;좌측으로 빠져 산길을 이용하여 삼각산 능선까지 올라갈수있다. 이곳부터 비포장 된 흙길이다.
이곳 갈림길에서 좌측 길로 계속 석은덤까지 올라간다.

삼각산 정상에는 2개의 정상 표지석이 있는데 흰색 바탕의 표지석과 검정색 바탕의 표 지석이 각각 연이서 다른 곳에서 세워져 있다.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다. 잠시 가파른 길을 지나서 완만한 능선 길을 계속 가다 보면 장안사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바위를 만난다. 바로 아래는 천길 절벽이다. 조심하여 전방 절경을 감상해야 할 것 같다. 여기서부터 장안사 화장실 뒤편까지 경사가 80도가 되는 험난하고 위험한 길을 완주해야 한다. 추락사고가 우려되는 곳으로 삼각산 산행의 절정이 여기 하산길이다.

삼각산 정상에는 정상 표지석이 2개가 있는데 흰색 바탕의 표지석과 검정색 바탕의 표 지석이 각각 따로 연이서 다른 곳에서 세워져 있다. 이중 흰색 바탕의 정상 표지석
삼각산 정상에서 본 전경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장안사 원경
장안사 주차자에서 바라 본 전망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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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烽火山)은 해발 132.6m로 온산읍 강양리 산 66번지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이다. 강양마을에서 바라다보면 2개의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북쪽 봉우리 아래는 저수지가 있어 낚시꾼이 가끔씩 찾고 있고 남쪽 봉우리에는  조선 전기에 축조 된 하산 봉수대(下山烽燧臺)가 있다.

특히 봉화산은 19744월부터 구리, 아연, 알루미늄 등 비철 금속 산업 육성을 위해 온산산업 기지개발 조성으로 정든 고향을 등져야했던 우봉마을, 당월마을 등 주민들이 떠나가는 모습과 환경오염에 의해 발생한 소위 한국판 이타이이타이병으로 알려진 공해병(公害病)인 온산병(溫山病)에 걸린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봉화산은 1974년 4월부터 구리, 아연, 알루미늄 등 비철 금속 산업 육성을 위해 온산산업 기지개발 조성으로 정든 고향을 등져야했던 우봉마을, 당월마을 등 주민들이 떠나가는 모습과 환경오염에 의해 발생한 소위 한국판 이타이이타이병으로 알려진 공해병(公害病)인 온산병(溫山病)에 걸린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우봉마을은 223세대 1,433명이 거주하였고 봉화산의 생김새가 소의 형상과 같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복어잡이 어획량이 국내최고로 유명한 어촌마을이며 해안가의 거북바위가 유명하였다. 그리고 당월마을은 335세대 1,975명이 거주하였고 예전에는 당포마을로 불렸으며 상어잡이 유명한 어촌마을이였다.

하산봉수대에서 바라본 화학공업단지로 변한 우봉 및 당월마을
하산봉수대 가는 길에서 바라본 우봉마을 바닷가 모습.&nbsp;우봉마을은 223세대 1,433명이 거주하였고 봉화산의 생김새가 소의 형상과 같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복어잡이 어획량이 국내최고로 유명한 어촌마을이며 해안가의 거북바위가 유명하였다.

강양(江陽)’은 회야강(回夜江) 어귀에 있는 햇볕이 잘 들어오는 마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한문 표기에서 ()’은 산의 남쪽, 강의 북쪽을 뜻하므로 회야강의 북쪽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조선 전기에 봉화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하산(下山)이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 정조(正祖) 때는 바다에서 볼 때 강()의 입구라서 강구(江口)라고 하였다.

하산 봉수대(下山烽燧臺)를 가기 위해서는 우봉리 바닷가 방향으로 봉화산 기슭에 위치한 금어사를 향하는 가파른 도로 따라 올라가서 도착한다. 그리고 사찰의 좌측 밭을 가로질러 오솔길을 따라 북서쪽으로 5분 정도 올라가면 하산 봉수대에 만날 수 있다. 유의할 것은 자동차를 몰고 오면 사찰 주차장이 마땅치 않아 도로변에 세워야한다.

하산 봉수대(下山烽燧臺)를 가기 위해서는 우봉리 바닷가 방향으로 봉화산 기슭에 위치한 금어사를 향하는 가파른 도로 따라 올라가서 도착한다. 그리고 사찰의 좌측 밭을 가로질러 오솔길을 따라 북서쪽으로 5분 정도 올라가면 하산 봉수대에 만날 수 있다. 유의할 것은 자동차를 몰고 오면 사찰 주차장이 마땅치 않아 도로변에 세워야한다.
봉화산은 낮은 해발에도 불구하고 수목이 아름답다. 하산 봉수대 가는 길은 그지 없이 아름답다.
금어사 주지 스님께서 매년 하산 봉수대(下山烽燧臺) 가는 길을 깔끔히 정리하신다.

 

금어사(金魚寺)는 주지 지월(智月)스님이 3년간 300만배를 수행한 사찰로 유명하다. 자정부터 새벽5시 까지 200배를 표시하는 바둑돌로 절한 숫자를 계산하며 하루 평균 2700배를 수행하였다. 지월스님이 속명은 김상봉으로 경남 진주 출신이다. 1980년 중반 폐결핵을 앓으며 부처님 가호로 물리친 뒤 불교를 만났고 1995년 부산 군수사령부 군무원으로 재직 중 지도법사를 수계, 1996년 구례 화엄사로 출가했으며 만나는 사람에게 세 번의 절을 하는 스님으로 유명했다. 이곳 우봉리에는 2001년 정착하여 금어사를 지었고 당시 미이주 40가구의 어린이 10명에게 수학, 영어 등 가르치는 등 선행을 실천하였다.

하산 봉수대는 부산 간비오 봉수(干飛烏烽燧)에서 시작된 봉화를 서울 목멱산[남산] 봉수로 전달하는 노선에 있는 다섯 번째 연변 봉수(沿邊烽燧)로써 문헌에 나타난 것은 1425년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부터이며, 이후 각종 지지서(地誌書)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 축조되었고, 1895(고종 32) 전국 봉수 제도가 철폐되면서 폐지되었다. 경상도지리지에 울산군 소속의 하산 봉화(下山烽火)는 북쪽으로 가리 봉화(加里烽火)2317보의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어사 주지 스님께서 매년 하산 봉수대(下山烽燧臺) 가는 길과 하산 봉수대 주변을 직접 낮으로 깨끗이 정리 하신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는 울산군 소속의 하산 봉수는 군의 남쪽 50리에 소재하며 서쪽으로 이길곶 봉수(尒吉串烽燧), 동쪽으로 가리산 봉수(加里山烽燧)와 연결된다고 적혀 있다. 즉 남쪽의 울주군 서생면 나사리 이길 봉수(爾吉烽燧)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북쪽의 남구 남화동의 가리 봉수(加里烽燧)로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비교적 평탄한 산정에 남북장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현재 연대(煙臺)와 호() 등의 유구가 남아 있다. 불을 지폈던 연대의 아래는 방형(方形)으로, 위는 원형(圓形)으로 만들었다. 연대는 흙과 돌을 섞어 만들었으며, 남아 있는 높이는 3.5m 정도이다. 북동쪽이 무너져 정확한 둘레는 알기 어렵다. 'U'자형으로 판 방호벽은 북쪽에서만 뚜렷하게 확인되는데 너비가 5m 가량이다.

강양 해안길(강양 - 우봉)에서 바라 본 명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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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산(827m)은 경주시 건천읍(乾川里) 방내리(芳內里)와 내남면(內南面) 비지리(飛只里)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경주에서 가장 높고 단석산 일대는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산세가 뛰어나고 경치가 좋아 등산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며 진달래군락지로 유명하여 인근 조래봉(657m)과 더불어 등산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리고 관광명소로 7세기 전반기의 불상 양식과 김유신을 비롯한 화랑들이 수도했다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 신선사 마애불상군이 있어 고신라 불교미술전공자와 미륵 신앙연구에 관심 있는 분들이 자주 찾는다. 단석산은 신라시대에 화랑들이 심신을 수련하였고 백제군이 지리산을 넘어 함양, 청도로 거쳐 경주로 들어오던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신라에서는 국방의 요충지였다.

 등산일정은 방내리 방내지 인근 천주암 주차장에 차를 주차 후 등산을 시작하여 목적지 단석산 등정 후 입암산 방향으로 하산하여 백석암을 거쳐 백석마을 도착하여 택시를 타서 다시 천주암으로 가는 일정이다. 5시간 30분 소요된다.

상세 등산코스는 방내리 천주암 기둥바위 전망바위 진달래 능선 전망바위, 전망대 안부 단석산 비지고개 입암산 백석암 화천리 백석마을이다.

천주암 입구. 입구 우측에 있는 소로가 단석산 등산로이다.

천주암을 출발하자마자 소위 깔딱 고개를 만나는데 계단을 따라 기둥바위를 지나 진달래 능선까지 두 차례나 맞이했다. 무척 힘든 코스다. 다행히 전망바위 또는 전망대로 불리는 넓은 바위를 만나 휴식과 더불어 바라본 풍광은 가히 절경이라 등산의 맛을 느끼게 한다. 간단한 간식을 먹은 후 출발하니 금방 도착할 것 같은 단석산 정상은 안부를 지나 드디어 정상에 도착하였다. 정상에는 인증 샷과 정상 파티를 즐기는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보였다.

천주암을 출발하자마자 소위 깔딱 고개를 만나는데 계단을 따라 기둥바위를 지나 진달래 능선까지 두 차례나 맞이했다. 무척 힘든 코스다.
진달래 능선에서 만난 전망바위 또는 전망대로 불리는 넓은 바위에서 휴식과 더불어 바라본 풍광은 가히 절경이라 등산의 맛을 느끼게 한다.
백석마을 갈림길 안내판을 보고 정상이 가까이 있음을 알게된다.
단석산 정상석과 김유신이 칼로 자른 바위가 있다.

 

막걸리로 정상주 한잔과 점심을 해결 한 후 하산하기 위해 화천리 백석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입암산과 백석암 구간은 길이 가파르고 등산길인지 동물들이 지나는 길인지 구분이 안 되는 곳이 많았다. 백석암에 도착하니 그곳 보살님이 암자에 있는 동안 등산객을 보지 못했다고 놀라워했다. 봉지커피를 얻어 마신 후 백석마을 향해 출발했다. 다시 한 번 가파른 길이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가파른 길이 끝나는 곳에 누군가가 백석암에 오르는 분을 위해 지팡이를 만들어 공양을 하였다.

입암산과 백석암 구간은 길이 가파르고 등산길인지 동물들이 지나는 길인지 구분이 안 되는 곳이 많았다.
백석암에 도착하니 그곳 보살님이 암자에 있는 동안 등산객을 보지 못했다고 놀라워했다. 봉지커피를 얻어 마신 후 백석마을 향해 출발했다.
부처님오시는날을 준비하는 백석암
백석암에서 바라본 풍광
다시 한 번 가파른 길이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가파른 길이 끝나는 곳에 누군가가 백석암에 오르는 분을 위해 지팡이를 만들어 공양을 하였다.
산수유 열매
산수유 나무
반가운 평지 길 좌우에 산수유나무가 멋들어지게 있어 지나가는 객의 여독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산수유 나무꽃이 피면 이 길을 걷고 싶다.
백석마을 가까운 곳에는 산딸기가 즐비하였다.
뽕나무의 오디열매

반가운 평지 길 좌우에 산수유나무가 멋들어지게 있어 지나가는 객의 여독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백석마을은 산딸기 재배를 많이 하는 것 같고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 백석(白石)은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이곳을 지나가다 냇가에 꽃이 많다고 하여 꽃내라고 불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하며, 350년 전 밀양박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뒷산에 흰 돌이 많다고 하여 백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백석마을 풍경

다행히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방내리 천주암을 향했다. 가는 도중 택시기사 분에게 이번 산행코스를 물어보니, 이곳 현지인들도 힘든 코스라 많이 이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튼 단석산 산행은 소중한 추억이 돼버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단석산이 처음으로 나오는데,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하며, 경주중심지의 서쪽 23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신라의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神劍)을 얻어 월생산의 석굴 속에 숨어들어가 검술을 수련하려고 칼로 큰 돌들을 베어서 산더미 같이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단석사(斷石寺)라고 하였다.” 는 일화도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진평왕 건복 28년 신미년(611)에 공의 나이 17세에 고구려·백제·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쳐들어온 적을 평정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홀로 중악(中嶽)의 석굴로 들어가 몸을 깨끗이 하고는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중악을 월생산 또는 단석산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석산에 대한 이와 같은 설화는 이후의 경주지리지에 지속적으로 기록된다.

건천리(乾川里)는 마을 옆 건천강변이 배수가 잘되어 물이 고이지 아니하고 항상 건조되어 한발이 심했으므로 건천이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방내리(芳內里)는 단석산에 둘러싸인 품이 마치 방안에 있는 것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방내(房內)'라고 불렀다고 하고 단석산 속에서 꽃다운 화랑들이 수련을 하였다고 하여 '방내(芳內)'가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화천리(花川里)는 지형이 곶으로 되어 곶내, 고내, 고천이라 하였고 다른 이야기로는 골짜기에 꽃이 만발하여 꽃내라 부르다가 뒤에 화천(花川)으로 고쳐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남면(內南面)은 옛날부터 경주부의 남쪽 안에 있다 하여 내남南面)이라 했고 비지리(飛只里)는 마을 앞에 학산이 있는데 이 산이 학이 날아가는 형상이라 해서 날비()자와 다만지()자를 따서 비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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