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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음산 편백나무 숲길은 달음산 4부 능선 지점에 조성한 숲길이다. 숲길을 상세히 보면 달음산 기슭과 월음산 기슭 각 2곳에 조성되어 연결되어 있는데 특히 월음산 기슭에 조성된 편백나무가 크고 장대하여 운치가 있다. 월음산 등산로를 따라 심어져 있어 산행의 묘미를 더해준다. 숲길 산책은 옥정사에서 출발하는 것과 광산마을 초입에서 월음산 방향으로 출발하는 것이 있다. 순수 숲길산책의 소요 시간은 1시간 정도이다.

달음산 옥정사 입구

옥정사 방향에서 출발하는 것은 경사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형국이다. 옥정사에서 20~30분정도 올라가면 편백나무 숲길과 달음산 정상가는 길로 갈라지는데 왼쪽으로 빠지는 길로 가면 편백나무 숲길에 해당된다. 편백나무는 옥정사 방향에는 나무가 적고 월음산 기슭에는 많이 조성되어 있다.

옥정사 방향의 편백나무 숲길 초입 안내글자

 

옥정사에서 20~30분정도 올라가면 편백나무 숲길과 달음산 정상가는 길로 갈라지는데 왼쪽으로 빠지는 길로 가면 편백나무 숲길에 해당된다.

달음산(해발588m) 정관면과 일광면 원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기장군의 명산이자 기장 8경 가운데 제1경이다. 달음산에는 예로부터 산삼이 있었다고 전해오는데 달음산 골짜기의 얼음이 녹을 무렵이면 천년 묵은 산삼이 사람으로 화()해서 상주(喪主)의 복장을 하고 이 산에서 내려와 좌천장터로 나들이 한다고 한다.

숲길에서 만나 밤나무 한 그루
멀리 보이는 동해바다

달음산은 만장년 산지로 산정은 주상절리로 형성된 두 개의 봉우리인 취봉과 옥녀봉이 있다. 북쪽 산록에서 좌광천, 남쪽에서는 일광천이 발원한다. 옛날에는 달이 뜨는 산이라는 뜻인 월음산(月陰山)이라고도 하였다. 기장현읍지에서는 취봉산(鷲峰山)이라고 적고 있는데 옛 기장 사람들은 추봉산 또는 축봉산이라고 불렀다. 주봉(主峰)의 이름은 취봉(鷲峰) 또는 수리봉이라고 하고, 그 동북쪽에 있는 봉우리를 옥녀봉(玉女峰) 또는 구슬아기봉이라고 한다. 취봉 일대에서 발원한 하천을 취정천(鷲井川), 옥녀봉에서 발원한 계곡을 옥정천(玉井川)이라고도 한다.

기도원 가는 길과 만난다.
월음산 기슭의 편백나무 숲길 안내글자

달음산 수리봉(취봉 鷲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일광면 원리 상리마을에서 달음산 기슭을 올라가면 해먹이라는 낙타 등처럼 생긴 능선이 있고, 그 능선 중턱에 골짜기가 있고, 그곳에 장사바우라는 큰 바위가 있다. 장사바위에서 올라가는 곳에 찬물샘이 있고, 그 옆에 집터가 있다. 이곳을 이고(李古) 집터라 하고 있다. 신라 석탈해왕 때 이곳에 이고(李古)라는 늙은 부부가 집을 짓고 살면서 장사바우 앞에서 이들을 점지하여 달라고 기원하였다. 달음산의 신령님이 감응하여 쉰 살이 넘은 외로운 늙은 부부에게 옥동자가 탄생하였다.

늙은 부부는 금지옥엽처럼 키우면서 바우라고 불렀다. 바우는 일곱 살이 되자 큰 바위를 번쩍 들고 내던지기도 하고 엄지손가락으로 빙빙 돌리기도 하였다. 바우장사의 소문이 퍼지게 되자 신라에서는 자객을 시켜 암살하려고 하였다. 그 당시 이곳은 신라를 괴롭히던 거칠산국이라는 작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위협을 느낀 바우는 부모 앞에 엎드려 신라국의 첩자가 소자를 죽이려 하니 소자는 성년이 될 때까지 피신을 하겠다고 눈물을 리며 하직인사를 올렸다.

광산마을로 가는 길로 가운데 길로 간다.

그리고 나서 장사바위에 올라서 왼쪽무릎을 꿇고 오른손가락을 짚고 힘껏 뛰어오르자 양 겨드랑이 밑에 비늘나래가 3자나 펴지면서 독수리처럼 날아 달음산 수리봉(鷲峰)에 앉았다. 수리봉의 날카로운 바위를 평탄하게 다지고 이곳에서 며칠간 머물다가 천마를 타고 북쪽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장사바위에는 이 바우소년 장사가 왼쪽무릎을 꿇었던 자리와 오른손을 짚었던 흔적이 바위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고, 집터와 샘터가 남아 있다.

광산마을 신앙석으로 추정 됨
월음산 및 달음산 편백나무 숲길 가는 초입

그때부터 이 바위를 장사바우라고 하고 애기장사를 바우장사라고 불렀고 집터를 이고 집터라 하고 있다. 그리고 달음산의 수리봉(취봉 鷲峰)은 그 위가 묘하게도 넓이가 20평정도 평탄하고 잔디가 덮여져 있는데, 이 바우소년 장사가 독수리처럼 날라 올라가서 머문 곳이라 하여 수리봉이라 하고, 한문으로 취봉산(鷲峰山)이라 표기하고 이를 속언으로는 추봉산이라 한다.

광산마을 마을길
일제강점기 때 광산개발에 만든것으로 추정되는 종

달음산 등산로 초입에 위치하고 있는 옥정사는 조선시대 헌종 원년(1835)에 창건된 옛 절터가 방치되어 있는 것을 찾아 1907년 박긍해 스님이 창건하였다. 이 곳 절에서는 현재 절터가 옛날 원효대사가 관세음보살로부터 표주박으로 마셨던 옥샘(玉泉)의 자리라고 한다. 그리고 근대에 제작한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신중도(神衆圖), 칠성도(七星圖) 등 불화 3점이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또한 배를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포대화상(布袋和尙)이 경내에서 가장 먼저 맞이한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의하면 포대화상은 명주(明州) 봉화현(奉化縣) 출신으로 당나라 말기부터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름은 계차(契此)이며, 항상 커다란 포대자루를 들고 다녔기 때문에 포대화상이라는 별명으로 많이 불렸다. 그 외에 구유, 치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옥정사 입구

원효대사와 옥천(玉泉)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달음산(鷲峰山) 서쪽에 있는 취정사(鷲井寺)에 머물고 계시던 원효대사가 서라벌로 가려고 옥녀봉(玉女峯)을 넘어 동쪽 산기슭에 이르러 동해에서 떠오르는 찬란한 서광을 바라보시다가 문득 갈증을 느꼈다. 그때 마침 옥녀(玉女)같은 처녀가 옹달샘에서 샘물을 물동이에 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대사가 물을 청하자 처녀는 표주박 가득히 샘물을 떠올렸다. 대사는 그 샘물을 마시자 온몸이 시원해지면서 무거운 몸이 홍모처럼 가벼워졌다. 대사는 세 번이나 받아 마시고는 처녀에게 나무관세음보살로 고마운 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그 처녀는 몸이 굳어지면서 돌로 변하면서 관세음보살상이 되었다.

옥정사 지장전
배를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포대화상(布袋和尙)
절에서 조성한 옥천(玉泉)
구유

대사는 그 처녀가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음을 알고 오체투지의 예를 올렸다그런 뒤 대사는 이곳이 관음도량임을 알고 초막을 짓고 잠시 머물면서 동해 용왕에게 이 옥샘(玉泉)을 지켜 주기를 당부하고 서라벌로 떠났다. 그 후 이곳은 동해용왕이 지켜 주는 옥샘이 있고, 관세음보살 돌부처님이 있는 곳에 마을 사람들이 암자를 짓고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대웅전 합각에 새겨진 삼보륜 앞의 무인조각상이 특이하다.
대웅전 추녀
대웅전 치미

조선왕조 때 승유억불 정책 때문에 취정사(鷲井寺)도 퇴락되고 옥천사(玉泉寺)도 퇴락되자 절터들에 있던 큰 절에 돌부처를 모셨는데 그 큰절도 퇴락되자 그 돌부처는 다시 이곳에 은적하였다. 그래서 다시 이곳에 암자를 짓고 옥정사(玉井寺)라 하였다고 한다달음산은 물이 없는 산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취봉산(鷲峰山)에 취정(鷲井)이 있고 옥녀봉산(玉女峯山)에 옥정(玉井)이 있어 유명하다.

칠성각
칠성각에서 본 경내
소림각
소림각 치미

기장 지역에는 달과 관련된 지명유래가 많다. 월음산(月陰山), 월전(月田), 월호(月湖), 월내(月內) 등이 있는데 옛날 장안면 월내천(장안사에서 발원) 옆에 200평가량의 연못이 풀숲에 덮인 채 있었다. 밤이 되어 동천에 뜬 달이 연못에 비치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연못에서 달이 솟아오르는 느낌을 갖게 하여 연못 안에 달이 뜨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월호(月湖)라고 하다가 고종 3(1866)에 월내(月內)라고 하였다.

범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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