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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6.16 동백섬으로부터 시작하는 천년고을, 해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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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관광을 대표하는 랜드 마크 중에는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이 있다. 해운대 해수욕장의 海雲臺지명은 신라 최치원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동백섬에서 시작하는데 예전에는 독립된 섬이었으나 오랜 세월 퇴적작용으로 현재는 해운대 백사장과 연결되어 육지화 되었다.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는 동백섬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섬으로 표시되어 있고 옛날에는 동백섬이 거북이가 많이 서식하여 거북섬이라고도 불려졌다.

본래 동백섬은 장산의 산등성이인 간비오산의 말단에서 떨어져 나간 바위섬이었으나,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전 후빙기의 해수면 상승과 함께 춘천천의 토사공급으로 모래톱이 형성되면서 육지의 일부가 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동백섬은 2005APEC 정상회의를 개최하였고 동백꽃이 된 어부의 아내, 인어공주 황옥 등 다양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하면 해운대는 동래현의 동쪽 18리에 있고 산의 절벽이 바다 속에 빠져 있어, 그 형상이 누에의 머리와 같으며 그 위에는 온통 동백나무와 두충나무 그리고 소나무, 전나무 따위로 덮여 있어 싱싱하고 푸르기가 사철 한결 같고 이른 봄철이면 동백꽃잎이 땅에 쌓여 노는 사람들의 발굽에 채고 밟히는 것이 3, 4()나 되며, 남쪽으로는 대마도가 아주 가깝게 바라보이며 신라 때 최치원이 일찍이 대()를 쌓고 놀았다 하는데, 유적이 아직도 남아있고 전하는 말에는 최치원이 자()를 해운(海雲)이라고 하였다 한다.

동백섬 최치원 관련 유적은 돌에 海雲臺라고 새긴 것으로 동백섬 남단에 자리한 해운대 석각(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45, 1999. 3. 9. 지정)이 있다. 신라 말기의 대유학자 고운 최치원의 친필이라 추정되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문헌이나 기록은 없다. 다만 최치원은 서기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조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때부터 정계를 떠나 전국을 유람하였다고 한다. 기록에는 서기 89911월 신라 최치원이 면직되어 가야산 해인사로 은둔하였다.”라고 남겨져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해운대 석각은 최치원 이 가야산 입산 전에 석각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서기 8942월부터 89911월 사이의 시기로 추정된다. 최치원이 석각한 지 천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사람들은 해운대를 천년고을이라 부른다.

 

동백꽃 사연, 꽃으로 환생한 어부의 아내

옛날 동백섬 마을 사람들은 섬이 다리미 같이 생겼다 해서 다리미산으로 불렀고 간혹 운촌 마을에서는 앞섬이라고도 불리어졌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갑자기 거센 파도가 일어나, 다른 어부들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지만 한 어부만이 돌아오지 못했다. 어부의 아내는 다리미산 꼭대기에 올라 날마다 바다를 보며 남편을 기다리며 울다 지쳐 쓰러져 죽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불쌍한 아내의 무덤을 다리미산 꼭대기에 만들어 주었고, 몇 년 후 아내의 무덤가에 동백나무가 솟아 나와 동백꽃 한 송이가 붉디붉은 꽃을 피웠다. 이 사연을 가수 이미자의 노래 가사에는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 라고 표현하였다. 그 후 이곳에는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게 되어 동백꽃 섬이라 불리어졌고 세월이 흐르면서 동백섬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동백섬 달빛아래 인어공주 황옥의 고향 그리움이 느껴지고

동백섬에는 덴마크 인어공주와 같은 인어공주 동상이 있으며 월트 디즈니사인어공주 이야기와 버금가는 나란다나라 황옥 공주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서려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 구남(龜南, 해운대 이전) 고장에는 무궁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건국 전 이곳에는 나라를 다스릴 왕이 없었지만, 하늘이 특별히 보내준 금 상자 속에서 황금알을 깨고 나온 어린아이가 십여 일만에 성인으로 자라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나라의 이름을 무궁이라고 칭한 왕은 하늘의 은혜로 임금이 되었다고 하여 은혜 왕이라 불렸다. 날이 갈수록 나라는 번창하였으나 왕에게는 마땅한 왕비가 없어, 모든 신하들이 왕비가 될 여인을 찾았으며 왕에게는 결혼할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은혜왕은 신하들의 간곡한 청을 굳이 사양하며 하늘이 보내줄 왕비만을 기다렸다.

왼손에 황옥을 쥐고 있는 인어모습의 황옥공주

한편 바다 건너 멀리(지금의 마도 혹은 인도로 추측) ‘나란다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본래 바다 속에 있는 수정국이라는 나라와 형제 같은 나라였고, 그 나라 사람들의 몸 끝에는 물고기 지느러미가 있어 옷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이 나란다국의 왕과 왕비가 첫 여자아기를 낳으매 선례에 따라 공주의 이름을 부모의 나라인 수정국에 가서 지어 와야 했다. 왕은 특사로 거북(별주부)을 보냈는데, 이 거북이 바로 그 옛날 용왕의 병을 낫게 하려고 토끼를 잡아갔다가 다시 놓치는 수정국에서 쫓겨난 거북이었다. 거북은 수정국의 늙은 왕비에게 황옥이라는 공주의 이름을 얻었으며, 아직도 이 거북은 살아남아 황옥공주를 그리며 동백섬을 맴돈다는 전설이 해운에 전해진다.

모진 비바람에도 바다를 바라보는 황옥공주

한편, 황옥공주가 어느덧 선녀처럼 아름답게 자라나자 나란다국의 임금과 왕비는 공주의 신랑감을 찾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 나타난 신령이 바다 건너 무궁국의 은혜 왕에게 시집을 보내라 말하고 마침내 무궁국의 은혜 왕과 나란다국의 인어공주 황옥이 짝을 맺으니, 황옥왕비가 머문 궁궐이 지금의 동백섬이다. 수정국의 왕비인 외할머니가 일러준 말에 따라, 황옥왕비는 무궁국의 땅인 동백섬에 도착하자 겹겹이 입은 옷 중에서 제일 깊은 속치마를 벗어 산신령 에게 바쳤다. 물들어가는 저녁노을에 반짝이던 속치마가 바람에 나부끼며 높푸른 하늘로 멀리 날아가니 황옥왕비는 갑자기 발이 갖추어진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자 황옥왕비는 외할머니의 나라인 수정국을 매우 그리워하였다. 옆에서 이를 항상 안타까워하던 거북은 외할머니가 선물했던 황옥을 꺼내 달을 비추어 보라고 일렀다. 왕비가 그 말로 황옥을 달에 비추자, 어느새 눈앞에는 꿈속에서도 잊지 못하던 수정국과 나란다국의 아름다운 달밤이 펼쳐져 있었고 황옥왕비 역시 옛날 모습으로 바뀌어 바다 속을 마음으로 헤엄칠 수가 있었다. 이것을 가끔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동백섬 앞바다에는 인어가 있다는 이야기가 오늘날까지도 전해져 오고 있다.

해운대해수욕장 모래축제 작품 중 심슨가족(?)

거북이의 보은이 실현 된 해운대 해수욕장

우리나라 1호 해수욕장은 1913년에 개장한 부산의 송도해수욕장이다. 최초의 해수욕장인 만큼 여름철이면 서울을 비롯한 타 지역에서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지금의 해운대 해수욕장 모습 이였다. 이에 반해 해운대는 조용한 어촌 마을이었다. 일본인에 의한 온천개발에 의해 해운대가 알려지기 시작으로 1920년 초반을 지나서 해수욕장으로써 명성이 알려졌다. 1934715일 동해남부선 개통(부산 해운대)으로 인해 해운대 해수욕장이 송도 해수욕장 명성을 압도했다. 그러나 6.25 전쟁과 이에 따른 피난민 등 많은 인구 유입으로 도심권 중심의 송도해수욕장이 다시 각광을 받았지만 해운대 해수욕장은 미군 수륙양륙선의 원활한 상륙을 위해 주변 해송이 베어졌고 철조망을 처져서 민간인 출입도 금지 시켰다.

1960년대초 해운대해수욕장

1960년에 이르러서 민간인에게 해수욕장이 개방되었고 마침내 1963년에 국가에서 국내외 관광객 유치 목적으로 대규모 개발을 시행하였으며 동백공원도 이때 조성하였다. 이런 와중에 1964526일 새벽 무게 95kg, 200년 묵은 거북이가 파도에 밀려 해운대해수욕장에서 발견되었다. 예로부터 거북이는 영험한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에 528일에 신속하게 거북이를 어선에 실어 바다로 돌려보냈다. 이후 호사가들은 거북이의 보은으로 인해 지금의 대한민국 대표 해수욕장 명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1960년대초 한여름날의 해운대해수욕장 피서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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