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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음산(해발:588m)은 정관면과 일광면 원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기장군의 명산이자 기장 8경 가운데 제1경이다. 달음산에는 예로부터 산삼이 있었다고 전해오는데 달음산 골짜기의 얼음이 녹을 무렵이면 천년 묵은 산삼이 사람으로 화(化)해서 상주(喪主)의 복장을 하고 이 산에서 내려와 좌천장터로 나들이 한다고 한다.

달음산 수리봉에서 본 풍광

달음산은 만장년 산지로 산정은 주상절리로 형성된 두 개의 봉우리인 취봉과 옥녀봉이 있다. 북쪽 산록에서 좌광천, 남쪽에서는 일광천이 발원한다. 옛날에는 달이 뜨는 산이라는 뜻인 월음산(月陰山)이라고도 하였다.

옥정사 입구

『기장현읍지』에서는 취봉산(鷲峰山)이라고 적고 있는데 옛 기장 사람들은 추봉산 또는 축봉산이라고 불렀다. 주봉(主峰)의 이름은 취봉(鷲峰) 또는 수리봉이라고 하고, 그 동북쪽에 있는 봉우리를 옥녀봉(玉女峰) 또는 구슬 아기봉이라고 한다.
달음산 설명에는 주봉(主峰)인 취봉(鷲峰) 또는 수리봉을 달음산이라 하고 북쪽에 있는 봉우리를 옥녀봉(玉女峰) 또는 구슬 아기봉을 월음산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설명이다.

옥정사 일주문

취봉 일대에서 발원한 하천을 취정천(鷲井川), 옥녀봉에서 발원한 계곡을 옥정천(玉井川)이라고도 한다.
달음산 산행코스는 5가지가 있는데 옥정사에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빨리 수리봉 정상에 도착한다. 동해선 전철을 이용하는 경우는 좌천역에서 내려서 광산마을에 까지는 30분정도 걸린다. 차를 가지고 오는 경우는 옥정사 주차장에서 주차하고 출발하면 된다.

달음산 정상인 수리봉 가는 길에 있는 편백나무 숲

옥정사에서 달음산 정상 수리봉까지는 1시간 30부정도 소요된다. 수리봉에서 옥녀봉 방향으로 하산하여 광산마을 초입에 도착하는데 40분 정도 소요된다.

정관

달음산 수리봉(취봉 鷲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일광면 원리 상리마을에서 달음산 기슭을 올라가면 해먹이라는 낙타 등처럼 생긴 능선이 있고, 그 능선 중턱에 골짜기가 있고, 그곳에 장사바우라는 큰 바위가 있다. 장사바위에서 올라가는 곳에 찬물샘이 있고, 그 옆에 집터가 있다. 이곳을 이고(李古) 집터라 하고 있다.

정관

신라 석탈해왕 때 이곳에 이고(李古)라는 늙은 부부가 집을 짓고 살면서 장사바우 앞에서 이들을 점지하여 달라고 기원하였다. 달음산의 신령님이 감응하여 쉰 살이 넘은 외로운 늙은 부부에게 옥동자가 탄생하였다. 늙은 부부는 금지옥엽처럼 키우면서 바우라고 불렀다.

달음산 수리봉의 정상 표지석
수리봉에서 본 정관

바우는 일곱 살이 되자 큰 바위를 번쩍 들고 내던지기도 하고 엄지손가락으로 빙빙 돌리기도 하였다. 바우장사의 소문이 퍼지게 되자 신라에서는 자객을 시켜 암살하려고 하였다. 그 당시 이곳은 신라를 괴롭히던 거칠산국이라는 작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위협을 느낀 바우는 부모 앞에 엎드려 신라국의 첩자가 소자를 죽이려 하니 소자는 성년이 될 때까지 피신을 하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하직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나서 장사바위에 올라서 왼쪽무릎을 꿇고 오른손가락을 짚고 힘껏 뛰어오르자 양 겨드랑이 밑에 비늘나래가 3자나 펴지면서 독수리처럼 날아 달음산 수리봉(鷲峰)에 앉았다.

수리봉에서 본 일광
수리봉에서 아득히 보이는 LCT

수리봉의 날카로운 바위를 평탄하게 다지고 이곳에서 며칠간 머물다가 천마를 타고 북쪽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장사바위에는 이 바우소년 장사가 왼쪽무릎을 꿇었던 자리와 오른손을 짚었던 흔적이 바위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고, 집터와 샘터가 남아 있다.

수리봉에서 옥녀봉 방향으로 하산하는 길
수리봉(취봉 鷲峰)
산불감시 초소
달음산 2개의 봉우리 중 하나인 옥녀봉

그때부터 이 바위를 장사바우라고 하고 애기장사를 바우장사라고 불렀고 집터를 이고 집터라 하고 있다. 그리고 달음산의 수리봉(취봉 鷲峰)은 그 위가 묘하게도 넓이가 20평정도 평탄하고 잔디가 덮여져 있는데, 이 바우소년 장사가 독수리처럼 날라 올라가서 머문 곳이라 하여 수리봉이라 하고, 한문으로 취봉산(鷲峰山)이라 표기하고 이를 속언으로는 추봉산이라 한다.

옥녀봉 기슭의 편백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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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음산 편백나무 숲길은 달음산 4부 능선 지점에 조성한 숲길이다. 숲길을 상세히 보면 달음산 기슭과 월음산 기슭 각 2곳에 조성되어 연결되어 있는데 특히 월음산 기슭에 조성된 편백나무가 크고 장대하여 운치가 있다. 월음산 등산로를 따라 심어져 있어 산행의 묘미를 더해준다. 숲길 산책은 옥정사에서 출발하는 것과 광산마을 초입에서 월음산 방향으로 출발하는 것이 있다. 순수 숲길산책의 소요 시간은 1시간 정도이다.

달음산 옥정사 입구

옥정사 방향에서 출발하는 것은 경사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형국이다. 옥정사에서 20~30분정도 올라가면 편백나무 숲길과 달음산 정상가는 길로 갈라지는데 왼쪽으로 빠지는 길로 가면 편백나무 숲길에 해당된다. 편백나무는 옥정사 방향에는 나무가 적고 월음산 기슭에는 많이 조성되어 있다.

옥정사 방향의 편백나무 숲길 초입 안내글자

 

옥정사에서 20~30분정도 올라가면 편백나무 숲길과 달음산 정상가는 길로 갈라지는데 왼쪽으로 빠지는 길로 가면 편백나무 숲길에 해당된다.

달음산(해발588m) 정관면과 일광면 원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기장군의 명산이자 기장 8경 가운데 제1경이다. 달음산에는 예로부터 산삼이 있었다고 전해오는데 달음산 골짜기의 얼음이 녹을 무렵이면 천년 묵은 산삼이 사람으로 화()해서 상주(喪主)의 복장을 하고 이 산에서 내려와 좌천장터로 나들이 한다고 한다.

숲길에서 만나 밤나무 한 그루
멀리 보이는 동해바다

달음산은 만장년 산지로 산정은 주상절리로 형성된 두 개의 봉우리인 취봉과 옥녀봉이 있다. 북쪽 산록에서 좌광천, 남쪽에서는 일광천이 발원한다. 옛날에는 달이 뜨는 산이라는 뜻인 월음산(月陰山)이라고도 하였다. 기장현읍지에서는 취봉산(鷲峰山)이라고 적고 있는데 옛 기장 사람들은 추봉산 또는 축봉산이라고 불렀다. 주봉(主峰)의 이름은 취봉(鷲峰) 또는 수리봉이라고 하고, 그 동북쪽에 있는 봉우리를 옥녀봉(玉女峰) 또는 구슬아기봉이라고 한다. 취봉 일대에서 발원한 하천을 취정천(鷲井川), 옥녀봉에서 발원한 계곡을 옥정천(玉井川)이라고도 한다.

기도원 가는 길과 만난다.
월음산 기슭의 편백나무 숲길 안내글자

달음산 수리봉(취봉 鷲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일광면 원리 상리마을에서 달음산 기슭을 올라가면 해먹이라는 낙타 등처럼 생긴 능선이 있고, 그 능선 중턱에 골짜기가 있고, 그곳에 장사바우라는 큰 바위가 있다. 장사바위에서 올라가는 곳에 찬물샘이 있고, 그 옆에 집터가 있다. 이곳을 이고(李古) 집터라 하고 있다. 신라 석탈해왕 때 이곳에 이고(李古)라는 늙은 부부가 집을 짓고 살면서 장사바우 앞에서 이들을 점지하여 달라고 기원하였다. 달음산의 신령님이 감응하여 쉰 살이 넘은 외로운 늙은 부부에게 옥동자가 탄생하였다.

늙은 부부는 금지옥엽처럼 키우면서 바우라고 불렀다. 바우는 일곱 살이 되자 큰 바위를 번쩍 들고 내던지기도 하고 엄지손가락으로 빙빙 돌리기도 하였다. 바우장사의 소문이 퍼지게 되자 신라에서는 자객을 시켜 암살하려고 하였다. 그 당시 이곳은 신라를 괴롭히던 거칠산국이라는 작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위협을 느낀 바우는 부모 앞에 엎드려 신라국의 첩자가 소자를 죽이려 하니 소자는 성년이 될 때까지 피신을 하겠다고 눈물을 리며 하직인사를 올렸다.

광산마을로 가는 길로 가운데 길로 간다.

그리고 나서 장사바위에 올라서 왼쪽무릎을 꿇고 오른손가락을 짚고 힘껏 뛰어오르자 양 겨드랑이 밑에 비늘나래가 3자나 펴지면서 독수리처럼 날아 달음산 수리봉(鷲峰)에 앉았다. 수리봉의 날카로운 바위를 평탄하게 다지고 이곳에서 며칠간 머물다가 천마를 타고 북쪽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장사바위에는 이 바우소년 장사가 왼쪽무릎을 꿇었던 자리와 오른손을 짚었던 흔적이 바위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고, 집터와 샘터가 남아 있다.

광산마을 신앙석으로 추정 됨
월음산 및 달음산 편백나무 숲길 가는 초입

그때부터 이 바위를 장사바우라고 하고 애기장사를 바우장사라고 불렀고 집터를 이고 집터라 하고 있다. 그리고 달음산의 수리봉(취봉 鷲峰)은 그 위가 묘하게도 넓이가 20평정도 평탄하고 잔디가 덮여져 있는데, 이 바우소년 장사가 독수리처럼 날라 올라가서 머문 곳이라 하여 수리봉이라 하고, 한문으로 취봉산(鷲峰山)이라 표기하고 이를 속언으로는 추봉산이라 한다.

광산마을 마을길
일제강점기 때 광산개발에 만든것으로 추정되는 종

달음산 등산로 초입에 위치하고 있는 옥정사는 조선시대 헌종 원년(1835)에 창건된 옛 절터가 방치되어 있는 것을 찾아 1907년 박긍해 스님이 창건하였다. 이 곳 절에서는 현재 절터가 옛날 원효대사가 관세음보살로부터 표주박으로 마셨던 옥샘(玉泉)의 자리라고 한다. 그리고 근대에 제작한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신중도(神衆圖), 칠성도(七星圖) 등 불화 3점이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또한 배를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포대화상(布袋和尙)이 경내에서 가장 먼저 맞이한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의하면 포대화상은 명주(明州) 봉화현(奉化縣) 출신으로 당나라 말기부터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름은 계차(契此)이며, 항상 커다란 포대자루를 들고 다녔기 때문에 포대화상이라는 별명으로 많이 불렸다. 그 외에 구유, 치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옥정사 입구

원효대사와 옥천(玉泉)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달음산(鷲峰山) 서쪽에 있는 취정사(鷲井寺)에 머물고 계시던 원효대사가 서라벌로 가려고 옥녀봉(玉女峯)을 넘어 동쪽 산기슭에 이르러 동해에서 떠오르는 찬란한 서광을 바라보시다가 문득 갈증을 느꼈다. 그때 마침 옥녀(玉女)같은 처녀가 옹달샘에서 샘물을 물동이에 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대사가 물을 청하자 처녀는 표주박 가득히 샘물을 떠올렸다. 대사는 그 샘물을 마시자 온몸이 시원해지면서 무거운 몸이 홍모처럼 가벼워졌다. 대사는 세 번이나 받아 마시고는 처녀에게 나무관세음보살로 고마운 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그 처녀는 몸이 굳어지면서 돌로 변하면서 관세음보살상이 되었다.

옥정사 지장전
배를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포대화상(布袋和尙)
절에서 조성한 옥천(玉泉)
구유

대사는 그 처녀가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음을 알고 오체투지의 예를 올렸다그런 뒤 대사는 이곳이 관음도량임을 알고 초막을 짓고 잠시 머물면서 동해 용왕에게 이 옥샘(玉泉)을 지켜 주기를 당부하고 서라벌로 떠났다. 그 후 이곳은 동해용왕이 지켜 주는 옥샘이 있고, 관세음보살 돌부처님이 있는 곳에 마을 사람들이 암자를 짓고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대웅전 합각에 새겨진 삼보륜 앞의 무인조각상이 특이하다.
대웅전 추녀
대웅전 치미

조선왕조 때 승유억불 정책 때문에 취정사(鷲井寺)도 퇴락되고 옥천사(玉泉寺)도 퇴락되자 절터들에 있던 큰 절에 돌부처를 모셨는데 그 큰절도 퇴락되자 그 돌부처는 다시 이곳에 은적하였다. 그래서 다시 이곳에 암자를 짓고 옥정사(玉井寺)라 하였다고 한다달음산은 물이 없는 산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취봉산(鷲峰山)에 취정(鷲井)이 있고 옥녀봉산(玉女峯山)에 옥정(玉井)이 있어 유명하다.

칠성각
칠성각에서 본 경내
소림각
소림각 치미

기장 지역에는 달과 관련된 지명유래가 많다. 월음산(月陰山), 월전(月田), 월호(月湖), 월내(月內) 등이 있는데 옛날 장안면 월내천(장안사에서 발원) 옆에 200평가량의 연못이 풀숲에 덮인 채 있었다. 밤이 되어 동천에 뜬 달이 연못에 비치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연못에서 달이 솟아오르는 느낌을 갖게 하여 연못 안에 달이 뜨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월호(月湖)라고 하다가 고종 3(1866)에 월내(月內)라고 하였다.

범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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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은 부산광역시 북동부에 위치한 군으로 태백산맥의 지맥인 대운산맥이 북동~남서방향으로 뻗어내려 형성된 산지가 주를 이루고 있다. 북쪽으로 장안읍(長安邑) 불광산(佛光山), 삼각산(三角山)이 있어 울산광역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쪽으로 정관면(鼎冠面), 철마면(鐵馬面)에 백운산(白雲山), 망월산(望月山), 철마산(鐵馬山) 등 있어 양산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 감단산, 곽걸산이 있어 해운대구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봉대산(峰臺山), 연화봉(連花峰)이 있어 바다에 접하고 있다.

능선에서 바라다 본 연화봉
연화봉 정상주위는 약간의 평지를 이루고 있다.

동쪽 해안의 기장읍 대변리, 일광면 이천리, 장안읍 월내리 등에는 소규모의 만이 형성되어 있고 효암천(孝巖川), 장안천(長安川), 좌광천(佐光川), 죽성천(竹城川), 일광천(日光川) 등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고 있다.

연화봉 정상주변

기장읍 동쪽 해안가 연화리(蓮花里)의 마을 뒷산에 연화봉(蓮花峯, 154m)이 위치하고 있다. 연화리와 석산리의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로 모습이 연꽃처럼 생겼다 하여 연화봉(蓮花峯)으로 불리우지고 있다. 옛날 기장고을의 형국을 말할 때 옥녀가 비단을 짜고 있는 옥녀직금(玉女織錦)형이라고 하고, 이러한 형국에서 연화봉은 연꽃무늬의 비단 폭에 해당되는 산봉우리다.

건설부 당시 정상 표지석

일반적으로 풍수지리에서 명당 형국 중 연꽃모양이 있는데 물에 뜬 연꽃 형(蓮花浮水形), 물에 이른 연꽃 형(蓮花到水形) 등 있다. 풍요와 다산의 터 이자 연꽃의 청정함과 순수함처럼 고귀한 인격을 갖춘 인물이 태어나는 터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곳이 물에 뜬 연꽃 형(蓮花浮水形)인 안동 하회마을이다.

기장 청강주공아파트에서 출발하는 소로

연화봉 북쪽에 남산 봉수대가 있는 봉대산이 있어 등산객에게는 봉대산 마무리 코스로 많이 애용하고 있다. 봉대산을 거친 후 기장 청강주공아파트에서 출발하여 능선을 따라 가면 연화터널 상부를 지나면 연화봉을 맞이할 수 있다. 계속 남쪽으로 가면 아난티힐튼으로 가는 사거리 앞으로 나온다. 그리고 연화터널 상부에서 바닷가 방향인 동쪽으로 소로로 가면 연화리 마을이 나오고 서쪽으로 난 소로로 가면 청강리가 나오는데 연화터널 입구가 보인다.

청강주공아파트에서 출발한 소로
연화터널 상부 연화봉 목전의 갈림길. 바닷가 방향인 왼쪽(동쪽)으로 가면 연화리 마을이 나오고 오른쪽(서쪽)으로 난 소로로 가면 청강리가 나온다.
연화리 방향 소로
죽도가 보이는 연화리
연화리에서 출발하는 소로
청강리 방향 등산길
청강리 연화터널 입구 주변에서 출발하는 길

현재 기장 연화봉은 형상이 많이 훼손 되었으리라 본다. , 서에 골프장이 생겼고 남쪽에는 롯데월드가 지어졌으며 추가 공사도 진행 중이다. 또한 연화터널 생겨서 교통 체증에 도움을 주고 있다. 개발도 중요하고 교통의 편리함도 좋지만 연화봉 훼손이 최소화가 되길 바람이다.

연화봉 남쪽 능선 소로
연화봉 남쪽 끝단 길
연화봉 능선 남쪽 출구길
대게만찬 및 일등가 오리불고기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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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산(日光山)은 일광면 삼성리에 있는 산으로 안산암의 암주(岩柱)로 되어 있고, 일광 신도시를 바라보고 있다. 해발 385m로 그리 높지 않고 비교적 완만하나 정상부 주변부터는 약간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산의 형상은 종을 엎어놓은 듯한 종상형이고 산 정상에서 동해를 바라보면 경관이 뛰어나며 일광 바다가 아늑하게 보인다.

일광산 정상에서 바라보 보면 펼쳐지는 일광 앞 바다

임도와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인근 주민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자주 찾는 산이다. 또한 MTB 동호회가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기장읍지에는 아침 햇살을 가장 먼저 받는 곳이라고 하여 일광산이라고 하며 기장 향교가 기장읍 교리로 옮기기 전에 는 향교의 주산이었다.

남쪽으로 바라도 본 LCT와 해운대 장산

일광산(日光山)에 오르는 방법에는 임도를 이용하는 것과 소로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소로를 이용하는 것이 운치가 나고 산행하는 맛이 난다. 가장 빨리 정상까지 가는 방법은 횡거사까지 차로 와서 주차 한 후 걸어가면 30분이면 도착한다. 그러나 임도의 경사가 심해 운전 할 때 주의를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많이 이용하는 방법은 백두사에서 출발하여 좌측과 우측에 조성 된 임도 또는 소로를 따라 올라간다.

일광면 백두사
백두사 좌측 임도에 있는 안내표지판
백두사 좌측에 조성 된 임도와 소로 입구
소로에서 만난 정3품 비석(증 통정대부 김해김씨지묘)

소로를 따라 산행을 하면 유난히 다양한 바위를 자주 만난다. 아무래도 산행의 묘미는 흙과 바위의 산세를 감상하고 꽃과 나무의 생명력을 느끼는 것일 것이다. 차성가(車城歌) 삭출금부(削出金芙) 일광산은 만장봉(萬丈峯) 높았는데~그 옛날 높고 높은 산봉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정상을 알리는 표지판
일광산 정상 표지석
멀리 보이는 고리원자력발전소
하산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
횡금사 방향을 안내하는 표지판
좌측 임도로 하산 때 만나는 휴게장소
백두사와 예지골못 갈림길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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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해발 469m)은 기장군 장안읍 명례리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이름은 삿갓 모양의 3개의 봉우리가 동서로 나란히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산은 옛날부터 영험한 산이라서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고 그러면 비가 내려 해갈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영험한 산이 명당으로 인식되어 암장(暗葬)을 하기도 했다. 대동여지도에 삼각산은 원적산(양산 천성산)에서 백운산을 거쳐 이어지는 줄기로 바다로 유입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일반적인 삼각산 등산로는 박치골 따라 조성 된 길을 따라서 가다가 좌측으로 빠져 산길을 이용하여 삼각산 능선까지 올라가는데 보통 2곳에서 올라간다. 능선에 도착한 후에는 동쪽 방향으로 해서 삼각산 정상으로 이동한다. 아래의 등산코스로는 소요시간이 3시간 30분정도 걸린다.

장안사 주차장 박치골 임도, 트레킹 로드 석은덤 삼각산 전망바위 장안사 주차장

삼각산 등산로는 박치골 따라 조성 된 길로 매우 잘 되어있다. 길 폭도 넓으며 바닥은 초입부는 포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비포장 길이다.
불광사 약수터는 장안사산장 옆 소로 길을 따라 가면 계곡아래에 있는 약수터를 만날수 있다.
반딧불이 공원 입구
반딧불이 공원에는 방문객을 위한 산책 길을 계곡 따라 일부 구간을 Deck 길로 조성하였다.

삼각산 등산로는 박치골 따라 조성 된 길로 매우 잘 되어있다. 길 폭도 넓으며 바닥은 초입부는 포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비포장 길이다. 특히 높이 뻗은 큰 감나무를 길에서 자주 접하는데 지나가는 객에게는 풍요로움과 아늑함을 느끼게 한다. 장안사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맞이하는 것이 장안사산장 뒤 계곡아래에 있는 불광산 약수터이다. 안내문이 없어 놓치기 쉽다. 약수 한 바가지 들이 키고 나서 길을 재촉하여 가다 보면 반딧불이 공원을 만난다. 반딧불이 공원은 산책을 위해 계곡 따라 일부 구간을 Deck 길을 조성하였다.

조성된 길을 따라 보면 높이 뻗은 큰 감나무를 길에서 자주 접하는데 보는 이에게 풍요로움과 아늑함을 느끼게 한다.

굽이굽이 절경 속에 길을 따라가다 보면 쉽게 석은덤까지 갈 수 있다. 가히 팔기산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하는 길이다. 병산마을 방향으로 가기 전 동쪽방향 능선으로 가는 산길을 이용하여 동쪽으로 이동한다. 산길이 양호하지는 않다. 능선을 따라 가다보면 까마귀 떼도 만나고 길 바닥에는 도토리가 많이 떨어져 있어 자칫 미끄러져 넘어지 지기가 쉽다.

등산로에서 좌측으로 빠져 산길을 이용하여 삼각산 능선까지 올라가는 첫 번째 갈림길 입구이다.
두 번째 갈림길로&nbsp;&nbsp;좌측으로 빠져 산길을 이용하여 삼각산 능선까지 올라갈수있다. 이곳부터 비포장 된 흙길이다.
이곳 갈림길에서 좌측 길로 계속 석은덤까지 올라간다.

삼각산 정상에는 2개의 정상 표지석이 있는데 흰색 바탕의 표지석과 검정색 바탕의 표 지석이 각각 연이서 다른 곳에서 세워져 있다.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다. 잠시 가파른 길을 지나서 완만한 능선 길을 계속 가다 보면 장안사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바위를 만난다. 바로 아래는 천길 절벽이다. 조심하여 전방 절경을 감상해야 할 것 같다. 여기서부터 장안사 화장실 뒤편까지 경사가 80도가 되는 험난하고 위험한 길을 완주해야 한다. 추락사고가 우려되는 곳으로 삼각산 산행의 절정이 여기 하산길이다.

삼각산 정상에는 정상 표지석이 2개가 있는데 흰색 바탕의 표지석과 검정색 바탕의 표 지석이 각각 따로 연이서 다른 곳에서 세워져 있다. 이중 흰색 바탕의 정상 표지석
삼각산 정상에서 본 전경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장안사 원경
장안사 주차자에서 바라 본 전망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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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筬山)이며 산성산(山筬山) 정상부의 모습

기장군 기장읍 서부리에 있는 성산(筬山, 368m)은 정상부에 기장산성(機張山城)이 있어 산성산(山筬山)으로 많이 알려져 있고 안내도, 이정표, 정상석에도 산성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성산(筬山)의 이름은 기장의 풍수 형국과 관련 있다. 즉 기장(機張)이 베틀[織機]을 차려[] 놓은 형국이라 하여 붙은 이름으로 풍수상으로 옥녀 직금형(玉女織錦形)[옥녀가 비단을 짜는 모습]으로 성산(筬山)은 베틀 바디[]에 해당하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옥녀는 몸과 마음이 옥처럼 깨끗한 여인이고 절세의 미인인 동시에 풍요와 다산을 나타내는 표상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각지에 옥녀봉이라는 이름의 봉우리들이 적지 않은데 이들은 절세의 미인으로, 마을의 수호신으로, 남녀합궁의 뜻으로 등장한다. 옥녀는 본디 도교에 등장하는 인물로 옥황상제와도 관련이 깊다. 경남 거제의 옥녀봉에 관해 옥항상제의 옥녀가 내조암 약수터에서 내려와 사슴과 더불어 놀다가 목욕하였다는 전설이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옥녀는 선녀와 같은 존재로 보인다.

산성산 정상에서 보이는 달음산

산은 높지 않으나 해운대 장산과 기장 산성산 구간의 등산 코스는 등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유명하며 소요시간은 약 4시간 30분 ~ 5시간 정도이다. 아늑한 능선과 더불어 반야, 반송, 안평을 바라다 볼 수 있고 철탑 임도를 따라 가는 길은 의외의 키 큰 장대한 참나무와 소나무를 만나는데 정다운 길동무로 손색이 없다.

산성 정상부는 평지로 넓고 대변 바다 풍광을 볼 수 있고 원두막과 벤치가 있어 등산객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북쪽 방향으로는 으로는 안평 저수지 가는 길이고 바로 하산을 하면 대라리 보명사로 내려온다. 대라리 에서 정상까지의 등산길은 경사가 심해서 쉬엄쉬엄 올라가는 것이 좋다. 또는 임도를 활용하는 것도 가파른 경사에 도움이 된다.

산성산 정상에서 바라 본 대변항

옛날 오래전부터 산성산(山筬山) 밑에 참샘(지하에서 솟는 자연수)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목마를 때 이 참샘 물을 마셨다 한다. 그리고 참샘 주변에는 무속인들의 기도처가 있었고 일반인도 용왕제를 올리기도 했다. 아쉽게도 1970년대 저수지공사로 매몰되어 버렸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야철지(治鐵址)가 있어 철 제련소가 있었다고 한다.

산성산 정상에 설치 된 이정표

산성 정상부에는 기장산성(機張山城)으로 알려진 삼국시대에 축조 된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으로 기장군에서 조사된 성곽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산성이다. 현재 성벽 대부분이 허물어져 일부가 남아 있다. 이곳 산성은 왜구에 대한 해안 감시를 위하여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등산로에서 남문지(南門址)으로 알려진 곳에 무너진 성벽을 볼 수 있다. 또한 보명사 방향으로 하산하는 등산로도 성벽을 볼 수 있다. 원두막 옆에는 평면 원형의 집수지가 있는데 남해안지역에서는 최대 규모이다. 직경은 약 14m, 깊이 2~3m 정도로 만수(滿水) 시에는 물이 흘러넘치도록 동서 방향으로 고랑이 나 있다. 정수지에서 약 50m 아래 지점 바위틈에는 샘이 있다. 2012년 발굴조사에 따르면 정상부에는 건물지와 남문지가 확인되었다.

정상부 원두막 옆에는 평면 원형의 집수지가 있는데 남해안지역에서는 최대 규모이다 .직경은 약 14m, 깊이 2~3m정도로 만수 ( 滿水 )시에는 물이 흘러넘치도록 동서 방향으로 고랑이 나 있다

성벽은 북쪽이 가장 높고 서쪽과 동쪽으로 갈수록 낮아진다. 성의 규모는 둘레 약 775m, 성벽의 너비는 5m 내외로, 상부에 증축(增築)된 것으로 보이는 2m 너비의 성벽이 축조되어 있다. 성벽은 안쪽과 바깥쪽 모두를 석축으로 쌓은 협축식(夾築式)으로, 잔존 성벽의 높이는 외벽이 1~3m 정도이고 내벽은 양호한 곳이 약 2.5m 정도로 그 내부는 돌로 채워져 있다. 성벽은 거의 수직에 가까우며 증축(增築)된 성벽은 대체로 20×30㎝에서 40×65㎝의 화강암을 잔돌 끼워 쌓기로 축조하였다. 그러나 하부의 초축(初築) 성벽은 55×23 크기의 석재로 틈이 없이 쌓았으나 대부분 허물어진 상태이다.

 부속 시설로 성문은 개방 형식으로, 좌우 성벽을 안쪽으로 중첩되게 쌓아 외부에서 쉽게 안쪽을 볼 수 없게 하였는데 북서쪽과 동남쪽 계곡에서 각각 한 개씩, 남서쪽에서 한 개, 모두 3곳이 확인되었다. ()는 동벽과 북벽이 이어지는 성벽의 바깥에 증축된 것으로 동벽과 북벽이 만나는 굴곡 지점에 설치되었다. 남쪽 성벽과 동벽과 북벽이 만나는 외곽에 건호(乾濠)[물이 채워지지 않은 마른 해자]가 설치되었는데, 남쪽의 경우 성벽에서 5m 정도 거리를 두고 너비 10m의 완만한 U 자형으로 되어 있고, 북벽이 만나는 지점도 비슷한 규모이다.

산성산 정상에서 하산하는 길은 보명사 방향과 서부리 용소웰빙공원 방향이 있다. 보명사와 용소웰빙공원과의 도보 소요 시간은 20분 정도다. 하산함에 있어 여유가 있으면 용소월비공원으로 내려와서 공원을 살펴보는 것도 좋다.

산성산 안내에 따른 두 갈래길로 소로와 임도
용소웰빙공원 산책로에서 산성산 출발길
보명사 앞에서 산성산으로 가는 초입길
용소웰빙공원 부산포항고속도로 고가대교 아래에서 출발하는 곳
산성산 안내도
공원 내 산책로
공원 내 용소골저수지
용소골저수지 둑과 전망대
출렁다리에서 본 용소골저수지
상부의 고가도로는 부산포항고속도로
용소웰빙공원입구에서 바라 본 산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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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대산 정상에서 본 죽성리 바닷가 전경

봉대산(228m)은 기장읍 죽성리 산 50번지에 있는 산으로 주변 청강리, 신천리, 대변리와 인접하고 있고 이곳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북쪽으로 흐르면서 덕발 저수지, 죽곡 저수지, 신천 저수지를 이루며 죽성천에 유입한다. 산은 크게 높지 않아 정상까지 1시간 이내에 도달 할 수 있으며 주로 청강리 우신네오빌 아파트와 신천리 선비촌 식당 방향에서 출발한다. 높이에 비해 정상에서의 풍광은 매우 뛰어나다. 정상부에는 연변(해안) 봉수대 중 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초기 연변봉수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남산 봉수대(烽燧臺)가 있다. 또한 이곳은 고산 윤선도와 인연이 있다.

신천리 선비촌 식당 방향에서 출발하여 맞이한 초입 오솔길

고산 윤선도는 1616(광해군 8) 12월 전횡을 일삼던 예조판서 이이첨을 벌할 것과 유희분, 박승종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화가 되어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을 갔다. 그런데 국경지대의 귀양지는 중국인과 내통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1618(광해군 8)에 죄인들을 남쪽으로 옮겼는데 이때 윤선도도 기장으로 이배(移配)되었다.

기장은 한양에서 1,000리나 떨어진 변방에 위치하여 많은 선비들이 이곳 기장으로 유배생활을 했으며 조선시대 14번째 순위에 드는 유배지였다고산 윤선도는 이곳에서 7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 봉대산에서 자주 약초를 캐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여 마을사람들에게는 의원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갈림길에서의 안내 표지판

한 번은 어린 하인이 산에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 갔다가 신선같이 보이는 한 노인이 암석 이에 앉아서 시 한수를 써 주며, 돌아가서 네 어른(윤선도)에게 드리라고 하였고 이 어린 하인은 이를 받았는데 잠깐사이에 그 노인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봉래산 한 골짜기 남쪽 땅에 떨어지니 그 절경 천하에 드문 곳임을 알게 되었네. 산은 비단 병풍을 두른 듯 북쪽으로 비스듬히 따랐고, 개울물은 옥대를 두른 듯 동쪽을 돌아 흐르네. 나무 틈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빛은 언덕을 비추고, 안개 속에 내리는 저녁 비는 들녘에 자욱하네. 성긴 숲을 마주 앉아 한 마디 말과 솔솔 부는 바람에 푸른 담쟁이 넝쿨이 흔들리네.

정상부를 향한 마지막 오솔길 구간

고려 및 조선시대의 연변(해안) 봉수, 남산(南山) 봉수대(烽燧臺)

산불감시초소 너머 보이는 동해 바다전경
멀리 보이는 기장 아난티코브와 힐튼호텔

남산 봉수대는 봉대산의 정상 능선부 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연대(煙臺)는 원형을 상실한 채 흔적만 남아 있다. 봉대산의 정상에 있는 까닭에 연대 자리를 평평하게 하여 지적 측량의 원점으로 삼고 있다. 연대 아래에는 헬기장이 있고, 연대와 헬기장 사이에는 산불 감시 초소가 설치되어 있다. 19951215일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남산봉수대의 건립 시기는 고려 초기인 고려 성종 4(985)으로 추정되며, 특히 13세기 이후 왜구들이 자주 해안에 출몰하면서 연변 봉수의 기능이 중요해진 것으로 여겨졌다. 조선 시대에도 이미 1461(세조 7) 이전에 기장 남산봉수대가 존재하였으며, 이는 고려 시대에 있었던 봉수대가 계승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종 31(1894) 갑오경장(甲午更張) 때에 폐지되었다.

형태로써 남나산봉수대는 담장이나 호가 확인되지 않고, 연대만 갖춘 표준 형식의 연안 봉수이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암반 위에 연대를 돌로 쌓았는데, 지름 2.4m, 둘레 9m이다. 그 중앙에 높이 1.5m, 너비 1.5m, 지름 30~40의 화로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연대 ( 煙臺 ) 는 원형을 상실한 채 흔적만 남아 있다 .  봉대산의 정상에 있는 까닭에 연대 자리를 평평하게 하여 지적 측량의 원점으로 삼고 있다
연대 아래에는 헬기장이 있고 ,  연대와 헬기장 사이에는 산불 감시 초소가 설치되어 있다 .
남산 봉수대 주변 모습

 봉수에는 경봉수(京烽燧), 내지봉수(內地烽燧), 연변봉수(沿邊烽燧)가 있는데, 기장 남산봉수대는 전형적인 연변 봉수이고 동래에서 영남 내륙·호서 내륙· 경기도를 거쳐 광주 천천령으로 연결되는 제2로 봉수로에 속하는 간봉(間烽) 중의 하나이다. 경상도에는 90여 개의 간봉(間烽)이 있는데, 남산 봉수대는 간선 봉화로 제8봉에 해당하며, 남쪽으로는 간비오산 봉수대, 북쪽으로는 기장군 장안읍 아이 봉수대, 울주군 서생면 이길 봉수대, 온산읍 하산봉수대로 차례로 연결된다. 남산봉수대는 연변 봉수 중에서 고려 시대부터 존재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연변 봉수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초기 연변봉수의 원형을 갖추고 있다.

흔히 봉수는 적이 나타나면 연기나 불을 피워 위급 상황을 알리는데, 간봉의 경우는 연기나 불을 피우는 연소실이 하나밖에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형태의 봉수를 특별히 봉대 혹은 연대라고 하며, 그 때문에 주로 연안 봉수가 위치한 산은 봉대산 혹은 연대산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간봉은 평소에는 연해에 아무 일도 없다는 뜻으로 저녁에 해가 지고 나면 불을 피워 차례대로 봉화를 올려 한양의 남산봉수대에 도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수평선에 소속을 알 수 없는 배가 나타나면 가까운 수군진에 직접 달려가 알리며, 수군진의 초탐선이 나가서 수상한 배를 조사한다. 이처럼 5개의 연대를 갖춘 직봉(直烽)1개의 연대만 갖춘 간봉은 서로 그 역할이 달랐다.

고산 윤선도에게 시를 전한 신선의 인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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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본 송정해수욕장

송정 옛길은 장산 자락의 신곡산을 가로지르는 해운대와 송정을 잇는 1km 고갯길이다. 신곡산은 해발 230m로 장산자락의 야트막한 산으로 새롭게 정비한 옛길 초입에 진입하면 송정으로 가는 방향과 청사포로 가는 방향으로 나누어진다. 송정으로 가는 길은 능선을 넘으면 경사가 가파르고 흙길과 포장길이 교차로 이어지니 다소 아쉽고 청사포 가는 길은 흙길이고 울창한 나무와 더불어 산책하기가 매우 좋다.

송정터널과 부산환경공단 해운대 사업소 사이에 있는 송정옛길 입구

송정터널과 부산환경공단 해운대 사업소 사이에 있는 송정옛길 입구에는 메타스퀘어가 좌우로 장대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가지고 있어 가족단위, 연인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특히 가을에는 풍경이 뛰어나서 웨딩촬영 등 사진애호가들이 좋아하는 곳이다. 최근 부산환경공단에서 공사 중 발생하는 먼지를 차단하기 한쪽 방향을 파란색 차단막이 설치되어 있어 아름다움이 감소되어 안타깝다.

신곡산은 오랫동안 군사지역으로 민간인 출입이 통제 되었던 이유로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고 등산로 내지 산책로 또한 잘 정비되어 있어 이용하기가 아주 좋다. 군데군데 옛 흔적도 느끼면서 삼림욕과 함께 호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폐탄약사를 보수하여 새롭게 단장된 쉼터

부산은 전쟁이 발생하면 마지막 후방지역이라서 여타 지역처럼 군사보호시설이 많다. 신곡산 또한 한국전쟁 이후 1952년에 총탄, 포탄, 로켓탄 등 탄약을 보관하는 육군군수사령부 산하 병기탄약사가 신곡산 일대에 지어졌고 전시와 훈련에 탄약을 보급하였다.

철거되고 흔적으로 남은 철조망

1952616일 탄약을 적재하던 노무자라가 탄약 야적장에 담뱃불을 던진 것이 원인이 되어 탄약고 폭발 사고가 발생하여 주민 5~6명이 폭사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당시 폭발 모습은 버섯 모양의 불꽃과 거대한 낙하산과 같은 불꽃, 수천만 개의 붉은 꽃송이가 일어났고 폭발 위력은 대단하여 사고 발생지 3km 떨어진 곳 까지 파편이 날아갔다.

철거 되어 쓸쓸한 모습의 군사시설
철거 된 중대 주둔지 막사 입구

병기탄약사는 해운대 신시가지 개발로 인하여 1998년 대전으로 옮기면서 폐쇄되었다. 초입에 위치한 송정옛길 기억쉼터는 이후 폐탄약사로 2008년 송정 일대 군부대 지역이 민간인에게 개방되었고 2020년 보수작업을 거치면서 지금은 쉼터의 모습으로 갖추었다.

송정 방향의 등산로

 

송정 방향으로 가는 길에 만난 쉼터
송정 방향으로 가는 길에서 본 전경
송정 방향으로 가는 포장 된 길
폐쇄 된 군 헬기장은 등산객의 쉼터로 사용하고 있다.

 

청사포 방향의 신작로
멀리 보이는 신곡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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