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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도(目島)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방도리에 있는 무인도로 모양이 물고기 눈처럼 생겼다고 하여 부르게 되었고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에는 동백도로 표기돼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부터 명칭이 춘도(椿島)로 바뀌었는데 청산해야 할 일제잔재이다. 일본에서는 동백나무를 한자로 춘(椿)자를 쓰는데 갑자기 생기는 불행한 일을 춘사(椿事)라고 한다. 식민사관의 일환으로 경주 양북 동해천(東海川)을 대종천(大鐘川)으로 바꾼 것처럼 목도(目島), 동백도(冬柏島)를 춘도(椿島)로 바꾼 것이다.

목도는 면적은 약 15047, 둘레는 440m으로 동해안 섬 중 유일한 상록수림(常綠樹林)으로 동백나무, 후박나무, 사철나무 등 각종 상록수림으로 절경을 이루어서 1962127일에 천연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옛날에는 대나무가 많아서 대섬(竹島)이라고도 불렀고 신라 때에는 대나무를 길렀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주민들이 대나무 화살을 만들어 나라에 바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나무는 점점 사라지고 동백나무·후박나무 등 각종 상록수림이 그 자리를 메웠다.

1970, 80년대 울산 최고의 동백꽃 관광지로 꽃피는 봄이면 붉은 동백꽃을 보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고 45인승짜리 배 두 척이 운항했다. 그러나 점차 섬 생태계가 훼손되자 1992년부터 안식년제를 도입하면서 현재까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언젠가 생태계가 복원되어 개방되기를 손꼽아 기다릴 뿐이다.

목도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도 있다. 가수 하춘화(河春花)197345에 부른 목도는 내 고향이다. 1970년대 울산이 농어촌에서 산업 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향이 공장부지로 편입되어 고향을 떠나는 이주민들의 망향과 실향의 정서를 노래로 담고 있다.

 17세기 이곳 방도리(方島里)는 울산도호부 청량면 목도리 목도포구로써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1693년과 16962회에 걸쳐 독도로 출발한 포구이다. 이들은 독도를 지키기 위해 독도에서 돗토리현까지 건너가 싸웠다. 안용복은 이곳 목도 세거 광주 안씨 출신이다. 박어둔은 충청도 이산현(논산시 노성면) 소론명가 출신으로 증조부는 가선대부(2) 박잉석, 조부는 통정대부(3) 박국생이며 아버지는 정병 박기산이다. 조부 박국생이 1646(인조 24) 3월 그 지방의 유탁(柳擢)과 한양의 권대용(權大用)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을 하여 고향 이산현에서 살수가 없게 되자 울산으로 이사 왔다.

방도리(方島里)는 사방(四方)의 방()과 목도(目島)의 도()를 합성하여 만든 이름이다. 방도리에서 어부와 인어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동백도설화(冬柏島說話)라 하여 용왕의 딸인 인어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어부에 대한 보은담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에 마음씨 착한 청년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다보니 그물에 인어가 들어 있었다. 다른 어부들은 인어를 팔아 돈을 벌 수 있다고 기대에 부풀었지만 이 어부는 인어가 불쌍해 풀어 주자고 하였다. 이 어부는 다른 어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어를 구해 주고 다른 어부들로부터 매를 맞고 쓰러졌다.

어부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부는 용궁에 있었다. 인어는 용왕의 딸이었다. 인어는 자신을 구해 준 어부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용궁으로 데려 온 것이다. 용궁에서 다시 만난 인어는 용왕에게 어부와 인간 세상에 나가 살겠다고 하였고 용왕은 딸을 위해 울산의 온산에 섬을 만들었다. 육지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하는 소리와 함께 물길이 하늘 높이 치솟으며 바다로부터 섬이 솟아올라와 지금 모양의 목도가 되었다. 이후 섬에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갔다.

 현재 목도는 쌍용정유공장에 둘러싸여 외롭게 홀로 떠 있다. 낚시꾼들이 가끔씩 찾아 와서 외로움을 달래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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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곶(艮絶串) 우리나라 육지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으로 매년 새해 해맞이 축제를 개최하고 서생면 대송(大松)마을에 있는 곶이다. 이곳에서는 영일만의 호미곶 보다 1, 정동진보다도 5분 일찍 해돋이가 시작되고 매년 1231일에서 11일로 넘어가는 날에는 간절곶 해맞이축제가 열린다. 1231일 전야행사부터 시작하여 11일 재야행사까지 이어지며 관광객이 참여하는 레크리에이션, 가요제, 콘서트, 부대행사 등이 열려 특별한 신년맞이를 경험할 수 있다.

신암에서 바라본 간절곶

간절곶이라는 이름은 먼 바다를 항해하는 어부들이 동북방이나 서남방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지형이 뾰족하고 긴 간짓대(대나무 장대)]처럼 바다로 길게 뻗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유래한 지명이다. 한자로는 艮絶이라 표기한다. 간절곶을 조선 초기 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길곶(爾吉串)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가 가지고 있는 뜻은 넓다이며 길()길다라는 뜻으로 역시 길게 튀어나왔다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1918년에 제작된 조선오만분일지형도(朝鮮五方分一地形圖)에는 간절갑(艮絶岬)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기운을 억누르기 위한 것 이었다.

간절곶은 서쪽 봉화산(烽火山) 산줄기가 동쪽으로 완경사를 이루다가 이곳에 이르면 매우 평탄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대부분의 해안가는 바위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곳에서는 해안 절벽이 없다. 봉화산에는 조선 전기에 설치 된 봉수대가 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이곳에는 항로를 인도하는 등대가 있었다.
이 때문에 2차 대전 때는 미군이 등대를 여러 번 폭격해 주위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등대는 광복 후 다시 복원돼 지금까지 운영이 되고 있다.

간절곶은 해맞이공원으로 조성되어 있고 주목할 만한 조형물이 있다. 바로 카보다호카(Cabo da Roca) 돌탑이다. 이 돌탑은 포르투갈 리스보아주의 관광도시인 신트라에 있는 카보다호카(일명 호카) 십자가 기념비를 모방한 돌탑이다. 신트라는 포르투갈 최서단(유럽대륙 최서단)에 위치하고 이곳의 곶의 이름이 카보다호카다.

돌탑에는 포르투갈 시인 루이스 카몽이스의 말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가 있고 지리적 위치, 신트라의 상징 로고 및 좌표와 고도가 새겨져 있다. 차이점은 돌탑의 상부에는 십자가가 없다.

카보다호카(Cabo da Roca) 돌탑으로 포르투갈 리스보아주의 관광도시인 신트라市에 있는 카보다호카(일명 호카) 십자가 기념비를 모방한 돌탑이다.
돌탑에는 포르투갈 시인 루이스 카몽이스의 말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가 있고 지리적 위치, 신트라의 상징 로고 및 좌표와 고도가 새겨져 있다.

한반도 동해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대송(大松)마을은 앞이 확 트여 수평선을 가장 넓게 볼 수 있고 뒤로는 송림이 우거져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이 마을의 간절곶이 전국 명소가 되면서 마을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간절곶의 낭끝 바위는 가장 돌출 지역으로 이곳에서 해를 보는 것이 가장 빨리 볼 수 있다하여 명소가 되었다그러나 간절곶 앞 바다는 지형적으로 돌출지역이 되어 해류가 급해 옛날에는 이 해역을 지나는 배들이 많이 침몰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우체통인 소망우체통으로 너비가 약 2.4m, 높이가 5m로 사진 명소로도 유명한데 실제로 운영되고 있어 엽서를 넣으면 전국으로 발송이 된다. 느린 우체통은 아니며 남울산 우체국에서 매일 한 차례씩 우편물을 수집해 보내준다.

대송(大松)마을의 이전 명칭은 대륙동(大陸洞)이었는데 대운산 줄기가 바다로 뻗고 있어 이의 대()자와, 육지의 끝(간절곶)이 튀어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후 대륙동의 대()자와 송정동(松亭洞)의 송()자를 따서 대송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이곳에는 항로를 인도하는 등대가 있었다. 이 때문에 2차 대전 때는 미군이 등대를 여러 번 폭격해 주위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등대는 광복 후 다시 복원돼 지금까지 운영이 되고 있다.

개발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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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4월부터 온산산업 기지개발로 정든 고향을 등져야했던 온산면 10개 법정리와 19개 행정마을의 주민 2,804세대 1만 3,000여명 이주민(실향민)을 위해 울주군 온산읍 화산리 화산근린공원(화산리 869 외 3필지) 정상에 온산이주민 망향비를 2010년 8월 31일 세웠다. 화산근린공원 망향비는 높이 8.5m, 폭 2.5m의 망향비와 함께 대리석을 좌대로 한 동판에 19개 마을의 사진과 유래가 새겨진 전시물이 조성됐다. 전시물은 동판으로 새겨진 마을 전경과 관련 설명으로 이물질 등이 묻어 있어 주기적으로 관리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누군가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오면 온산국가산업공단이라 답해야 한다. 차라리 우리들 고향이 북한이라면 언젠가 통일이 되어갈 수라도 있으련만, 차라리 우리들 고향이 수몰되었다면 잠수하여 볼 수라도 있을 것을」 먕향의 노래비의 일부로 이주민들 아픔의 깊이가 배어나는 망향의 노래이다.

울산공업도시로의 서막
울산은 1962년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되어 공업화를 맞이하게 되었고 울산공업단지, 온산공업단지 등의 공업 단지를 조성하고 공업용수 공급을 위한 댐을 만들기 시작했다. 특정공업지구의 사업은 정유, 비료, 화력 발전소, 제철 제강 등이었다. 같은 해 9월에 울산정유공장 기공식 이후 울산시 전역과 대현면 상남동 외 5개 동을 범위로 하는 울산도시계획구역이 지정되었다. 구역은 총 면적 176.04㎢로 주거 지역, 상업 지역, 공업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에 따른 후속으로 5만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집과 삶의 터전을 공장과 댐에게 내어 주었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되어 실향민이 되었다. 그리고 이주민들이 옮겨 갈 택지가 이주 전에 완성되지 않아, 택지 조성이 완료될 때까지 월세 방을 전전해야 하였다. 아울러 택지 분양금조차 제대로 낼 수 없을 정도로 보상금이 적어 결국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이주와 공업 단지 조성 역시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않아서 주민들이 공장과 공장 사이에 끼이거나, 공장들에 포위되어 고립된 채 생활하게 되면서 오랜 기간 불편을 겪어야만 하였다. 게다가 공장으로 인한 각종 공해에 시달리면서 질병에 노출되기도 하였다.

온사이주민 망향비에서 바라본 온산공업단지

울산공업지구 조성은 매끄럽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주민들의 피해는 더욱 커졌다. 석유화학공업단지를 조성하기로 하였으나 석유 화학 계열의 공장 유치가 부진해서 공업 단지의 절반 정도에 지역 원주민이 그대로 거주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 울산공업단지 31.40㎢의 면적 중 44%인 13.97㎢에 6,090가구 2만 7000명의 주민이 이주하지 못하고 그대로 살고 있어 울산공업단지 내 모습이 말 그대로 공장 반, 사람 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장 울타리로 길이 막히고 진동, 소음, 폐수, 분진 등 각종 공해로 생활에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역 주민과 공장은 1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마찰을 빚었다. 결국 정부는 1979년부터 이주 보상비를 지급하는 등 5개년 계획을 통해 울산공업단지 내 지역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발전 그리고 어두운 그림자
울산의 또 다른 대규모 공업 단지인 온산공업단지도 마찬가지였다. 온산공업단지는 1974년에 조성하였다. 구리, 아연, 알루미늄 등 비철 금속 산업을 육성해서 석유 화학 제품의 기초 원료 생산을 위해 울산공업단지와 인접한 온산면[현 온산읍] 일대에 조성하였다. 19개 마을이 공장에 터를 내주고 사라졌으며, 1만 3000여 명의 주민이 이주해야 하였다.

그러나 이주 대책에는 문제가 많았다. 무엇보다 이주 단지를 건설해서 주민들을 완전히 이주시킨 뒤 공업 단지를 만들어야 하였지만,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계획 없이 공장부터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즉, 공업 단지에 입주를 희망하는 공장들이 토지를 개별적으로 매입해 아무 때나 공장을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민가와 공장, 농지와 공장이 뒤섞이면서 전체 1만 4000여 명의 주민 중 이주한 사람은 17%인 1,800명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1만 2000명의 주민들은 공장과 공장 사이, 혹은 공장 한 가운데 외딴섬처럼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오염에 노출된 주민들 사이에 온산병(溫山病)이 발병하면서 정부는 공장으로 둘러싸여 있던 16개 마을 주민 1만여 명을 집단 이주시켰다. 온산공업단지 조성으로 인한 두 번째 이주였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주민들이 원한 이주는 아니었지만, 두 번째 이주는 몸과 마음 모두 상처를 남긴 이주가 되었다. 온산 지역 주민들은 공장과 공해에 쫓겨 온산공업단지에서 2㎞ 떨어진 덕신지구로 이주하게 되면서 공해 실향민이 되었다. 생활의 터전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생활, 생계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채 이주가 진행되면서 이들은 또 다른 병인 이주병(移住病)을 앓게 되었다.

울산의 동쪽 해변 마을은 온전히 보존된 곳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서생면, 정자, 방어진, 장생포 해안 일부를 제외하고는 공업 단지가 마을을 밀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화강과 외황강(外煌江) 하구 마을 또한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던 미포만(尾浦灣)과 전하만(田下灣)의 절경은 현대중공업 건설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고, 붉은 동백꽃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아오던 울주군 온산읍 방도리 목도는  드넓은 온산공업단지와 온산항에 둘러싸였다.
공장이 늘어나면서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만큼 대기에 배출된 공해 물질로 인해 환경오염이 심화되면서 이로 인한 피해 또한 점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산업화 초기에는 환경오염으로 입는 피해보다는 성장의 논리가 중시되었다. 경제적 부와 풍요를 얻은 만큼 환경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졌다.

1970년을 넘어서면서 벼의 잎이 노랗게 시들어 가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수확량이 줄기 시작하였고, 공업 단지 인근 해역에서 물고기나 조개, 미역, 전복 등이 폐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농작물의 피해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점차 심해지면서 환경오염의 피해가 사람에게까지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공해로 인한 질병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바로 온산병이다. 온산병의 발생은 환경의 중요성과 오염의 심각성을 울산 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3년부터 온산 주민들은 집단적으로 관절이 아프다거나 신경통 증세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통증을 느끼는 부위는 허리·다리·전신·팔·어깨 등의 순서로 나타났으며, 피부병과 눈병을 동반하기도 하였다. 1985년 온산공업단지 인근의 주민 1,000여 명이 전신 마비 현상을 보이면서 온산병이 한국판 이타이이타이병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온산병이 공해병(公害病)이 아니라고 공식 부인함으로써 논란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마침내 정부가 온산병은 환경 요인의 탓이라고 발표하면서 2,000가구 1만여 명의 피해 주민의 이주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온산병의 구체적인 원인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가 노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층까지 원인 모를 통증과 증세를 보이는 등 공해로 인한 피해를 직접적으로 받게 되면서 울산의 공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온산 지역 주민들은 온산공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이주를 경험한 바 있는데, 온산병으로 인해 다시 이주하게 되어 이주의 고통을 두 번이나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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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대표적인 축제 중 하나가 처용문화제이다. 명성과는 걸맞지 않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처용암과 주변 환경이다. 인근 산업공단 공해영향인지 조용하다 못해 쓸쓸하고 적막하다. 그 옛날 동해용과 일곱 아들이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던 곳이라고는 무색하게 한다. 처용암은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호로 207000규모의 바위섬으로 울산광역시 남구 황성동 세죽마을 해변에서 약 150m 떨어진 외황강 하구에 있다. 현재 황성동 일대는 울산 미포국가산업단지와 인접해 있다처용암 이름은 동해용과 그 아들이 나타난 바위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처용암과 관련되는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2권 기이(紀異)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 수가 있다.

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재위 875-886) 때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가(草家)는 하나도 없었다.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어느 날 대왕(大王)이 개운포(開雲浦)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었다. 왕이 괴상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뢴다. “이것은 동해(東海) ()의 조화이오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그곳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의 용은 기뻐해서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의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가서 왕의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했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처용의 아내를 삼아 머물러 있도록 하고, 또 급간(級干)이라는 관직(官職)까지 주었다. 처용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해서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남몰래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서 자기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자 이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들어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 가랑이 넷일러라.

둘은 내해이고,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할꼬.

그때 역신이 본래의 모양을 나타내어 처용의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이제 잘못을 저질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이제부터는 공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서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왕은 서울로 돌아오자 이내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망해사(望海寺)라 했다. 또는 이 절을 신방사(新房寺)라 했으니 이것은 용을 위해서 세운 것이다.

이후 신라 사람들은 처용의 춤과 노래는 전염병을 옮기는 역신(疫神)을 쫓아내는 힘이 있다고 판단하여 역신을 쫓기 위해 처용의 얼굴을 그려 대문에 붙이고, 특별한 날 처용의 탈을 만들어 쓰고, 처용이 역신을 쫓을 때 추었다는 춤을 추었다. 처용무(處容舞)는 고려시대를 이어 조선시대 국가 행사에서도 재연되었다.

성현의 용재총화 처용희(處容戱) 편을 살펴보면 매년 섣달그믐밤이면 창경궁과 창덕궁에서 처용희를 하였고 창경궁에서는 기악(妓樂), 창덕궁에서는 가동(歌童)을 하였으며 새벽까지 노래와 춤을 하였는데 이는 사귀(邪鬼)를 물리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제현의 시에 조개 같은 이와 붉은 얼굴로 달밤에 노래하는데, 솔개같은 어깨에 붉은 소매가 봄바람에 춤춘다.라고 묘사하였다.

현재 학계에서 처용랑(處容郞)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며 하나씩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아라비아인이라는 견해

  - 경주 괘릉(원성왕릉)의 무인석을 보면 우람한 체격에 높은 코, 파마를 한 듯한 턱수염 등 아라비아인 모습에 가깝고        당시 신라에서 당으로 가 는 바닷길은 울산인근 포구 → 남해안 → 서해안 흑산도 → 당(중국)이다. 그리고 9세기           이슬람 문헌에 「중국의 동쪽에 6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다. 그곳에 간 무슬림들        은 좋은 환경 에 매료되어 영구 정착해버리곤 한다.」라고 기록되어있음

2. 신라말기 지방 호족의 아들이라는 설

  - 중앙의 골품 귀족정권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처용의 상경으로 정략결혼 등 지방에 대한 포섭 견제하려 하였으      나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을 반영한 것이고 당시 서라벌을 도덕성을 상실한 퇴폐적이고 병든 도시로 상징하고        있음

3. 향가연구에서 승려나 용으로 보는 견해

4. 의무주술사(醫巫呪術師)로 보는 견해

5. 귀족문화에 대항하는 지방문학이라는 견해

6. 화랑도로 보는 견해

7. 선신(善神)인 용신(처용)과 악신(惡神)인 역신(疫神)의 설화로 보는 견해

8. 신라 하대 유명한 가면극 배우로써 임금의 총애를 받던 배우이라는 견해

9. 해(日)의 신으로 보는 견해

집단이주로 사라진 세죽(細竹)마을은 70년대 외황강 상류에 석유화학공단이 들어서면서 공해로 말미암아 주민이 살 수 없는 공해지역으로 변해 1990년대부터 다운동으로 집단이주 시작하여 1999년에 완료하였다.

울산공업도시 개발이전 세죽마을은 외황강 하구의 수산물 집산지로 횟집과 상점이 즐비하였다. 수산물 중 아나고(붕장어)와 꼬시래기(망둥어)가 유명했다. 특히 꼬시래기(망둥어)는 일본으로 수출될 정도로 맛이 뛰어났다당시 이곳 바닷가 사람들은 남창장에 해산물을 팔고 생활필수품을 구했다.

지금 세죽나루 선착장은 선박 몇 척만 보이는 작고 낡은 콘크리트 선착장이지만 예전에는 목심장이라 불리던 5일장 열리는 온산읍 방도리와 맞은편 처용리로 오가던 뱃길과 목도(동백섬)로 가는 유람선 뱃길이 있었다. 특히 목도는 동백꽃이 유명하여 동백섬으로 부르며 조선시대에도 명성이 자자하여 지방 수령들이 개운포에서 동백섬으로 뱃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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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면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화정리(禾亭里)는 북으로는 온양과 온산, 동으로는 회야강이 흐르면서 온산과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서생 그리고 서쪽으로는 위양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 들판은 화장들이라 하고 옛날 이 지역에는 서생포 만호 진성과 숙마산성 등이 있어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화정리는 신라 때는 샛내, 조선 예종 때는 술이리라 하였고 정조 때는 수마리(水麻里)라 하였다. 300년 전 김해 김씨(金氏)와 남양(南陽) 홍씨(洪氏)가 입향(入鄕)한 것으로 전해지고 김씨와 홍씨는 처남 매부지간으로 지내오고 있다고 한다. 화정리는 화정마을과 술마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화정마을은 진하리 위에, 술마마을 아래에 위치하고 마을 앞으로 국도 31호선이 지나고 있다. 서생포 만호 진성이 화정터널 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비록 바다가 마을에서 가깝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벼농사보다는 과수와 원예 그리고 채소를 많이 키워 울산으로 팔고 있다. 특히 가을이 되면 국도변에 간이 상점을 만들어 배와 감 등 과일과 무·호박 등 채소를 팔아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술마마을은 화정마을 위에 위치하고 윗술마와 아랫술마로 나누어져 있다. 두 마을 모두 국도31호선에서 안으로 들어간 자리에 있으며 가구수도 윗술마가 7가구, 아랫술마가 16가구로 모두 23가구의 한적하고 조용한 농촌마을이다.

숙마산성은 술마마을의 남서쪽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어 먼저 술마마을을 찾아야 한다. 술마마을에 도착하여 술마길로 마을초입을 지나 안쪽으로 가면 술마마을회관을 만나고 계속 시멘트 외길을 따라 올라간다. 마을을 벗어나 골짜기로 진입하여 좁은 시멘트 길로 가다보면 골짜기 좌측에 농막이 조성된 여러 곳을 보게 된다.

마을을 벗어나 골짜기로 진입하여 좁은 시멘트 길로 가다보면 골짜기 좌측에 농막이 조성된 여러 곳을 보게 된다 .

이들을 지나 얼마 못가서 숙마산성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산성에 도착하여 살펴보면 대부분 무너져 있어서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성내의 시설과 축조 시기, 성격 등을 밝히기 위해서는 추가 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 마성(馬城)으로도 별칭 되는 이 성은 골짜기에서 산정의 능선까지 연결되는 석축성으로 보고 있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길이는 300m 정도이다. 성벽은 먼저 가공된 화강암으로 기단부를 만든 후 그 위에 사람머리 크기보다 조금 큰 돌을 가로쌓기 방법으로 협축 하였으며, 내부는 사람머리 크기의 화강암으로 막채우는 방법으로 마무리하였다. 잔존높이는 50㎝∼110이며 폭은 310정도이다.

숙마산성 안내판. 산성을 살펴보면 대부분 무너져 있어서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성내의 시설과 축조 시기, 성격 등을 밝히기 위한 추가 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
마성 ( 馬城 ) 으로도 별칭 되는 이 성은 골짜기에서 산정의 능선까지 연결되는 석축성으로 보고 있지만 ,  현재까지 확인된 길이는  300m  정도이다 .

 

성벽은 먼저 가공된 화강암으로 기단부를 만든 후 그 위에 사람머리 크기보다 조금 큰 돌을 가로쌓기 방법으로 협축 하였으며 ,  내부는 사람머리 크기의 화강암으로 막채우는 방법으로 마무리하였다 .  잔존높이는  50 ㎝∼ 110 ㎝ 이며 폭은  310 ㎝  정도이다 .

숙마산성을 지나 50m 올라가면 용곡산 하늘길을 조우하고 울산전파관리소를 만날 수 있다. 용곡산 하늘길이라고 부르는 이 코스는 용곡산, 용골산, 울산전파관리소 중심으로 출발점은 동서남북으로 다양하다. 주로 발리에서 출발하여 서생포 왜성, 진하해수욕장 또는 송정마을로 도착하는 코스이나 위양리 위곡마을 위곡2, 나사리 봉화산 해맞이로 , 화정리 술마마을 술마길, 용리 덕골재길, 등 원하는 루트를 선택할 수 있다.

숙마산성을 지나  50m  올라가면 용곡산 하늘길을 조우하고 울산전파관리소를 만날 수 있다 .
「 용곡산 하늘길 」 이라고 부르는 이 코스는 용곡산 ,  용골산 ,  울산전파관리소 중심으로 출발점은 동서남북으로 다양하다 .  주로 발리에서 출발하여 서생포 왜성 ,  진하해수욕장 또는 송정마을로 도착하는 코스이나 위양리 위곡마을 위곡 2 길 ,  나사리 봉화산 해맞이로  ,  화정리 술마마을 술마길 ,  용리 덕골재길 ,  등 원하는 루트를 선택할 수 있다 .

숙마산성을 마성이라고 보는 이유는 흥려승람(興麗勝覽)[1934]에 숙마성에 대해 일명 마성이라고 하며 서생에 있는데 언제 쌓았는지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고 울산읍지 고적조[1934]에도 숙마산성을 마성이라고 전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숙마성의 숙마(熟麻)는 말을 기른다는 의미를 지닌 숙마(熟馬)의 잘못된 표기로 판단하고 있고 입지나 축조방식이 울산지역 방어진 목장과 유사하여 일반적인 전투성과는 다른 모습이 보여 조선시대 이길곶 목장으로 보고 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1469],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의하면 울산 지역에 방어진 목장, 방암산 목장, 이길곶 목장 등 모두 3개의 목장이 설치되었으나, 이후 방암산 목장과 이길곶 목장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두 목장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폐지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성(馬城)은 말이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목장 둘레를 돌로 막아 쌓은 담장으로 목장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근세까지 국가에서 말 산업을 관장했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때 국영 말 목장이 174개소나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초기부터 군사, 교통 등 필요에 따라 많은 국영 목장을 설치했고 고려사에도 대표적인 말 목장 8개소가 등장한다. 조선시대에는 강원도를 뺀 제주와 전국7도 관찰사 아래 말 목장 감목관을 뒀다. 감목관은 외관직으로 말 목장을 관리했고 30개월 만기 종6품관으로 전국에 21명이 있었다고 한다. 가장 규모가 큰 목장이 제주목장이고 그 밖에 강화도, 진도, 도련포, 등 유명했다. 조선 초기 말 목장은 59개소에 불과했으나 순종 때는 172개소로 말 목장을 국가 관장사업으로 육성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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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군 서생면의 특산물인 서생 배는 맛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해안 가까이 과수원이 있어 육풍과 해풍의 절묘한 조화로 맛이 좋을까그리고 서생 배와 함께 해안 경관 또한 아름답다서생면 해안은 신암, 신리, 나사항부터 시작하여 나사해수욕장, 간절곶, 송정공원, 솔개공원, 솔개해수욕장, 대바위공원, 진하해수욕장으로 절경이 이어진다.

카페를 찾는 사람, 트레킹을 하는 사람, 낚시를 즐기는 사람 등으로 주말이면 해안이 나들이 인파로 수를 넣는다. 특히 압도하게 수려한 경관, 화려하며 아름다운 분위기, 소박한 카페가 즐비하다. 각각의 분위기 다양하고 경관이 훌륭하여 카페천국이라고 불려도 무방하고 카페답사를 하여도 재미가 솔솔 할 것 같다. 또한 횟집을 비롯한 다양한 맛 집이 있어 여행객에게 입맛을 돋우게 한다.

아담하고 소박한 나사해수욕장과 솔개해수욕장에는 조용한 어촌 정취를 느끼고자 하는 관광객이 주로 찾는다. 또한 해파랑길의 한 구간으로 deck 길이 조성되어 단아한 해안절벽과 바다풍경을 즐길 수 있다. 해파랑길은 동해안의 떠오르는 해와 푸르른 동해바다를 벗 삼아 함께 걷는 길이란 뜻으로 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를 잇는 약 770km의 광역 탐방로이다.

 

비학마을 해변가의 공동묘지

 

만발한 꽃들이 넋을 위로하는것 같다.
바다를 마주보는 한기의 무덤

학이 난다는 비학(飛鶴)마을은 이 마을의 가장 끝자락에 있는 동묘산이 마치 학의 입모습을 닮았다는 데서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고 하고 울주군 최남단으로 부산의 기장군과 경계를 하고 있다. 실제로 이곳에는 학이 많이 서식했고 이곳에서 가까운 온곡 삼거리 마을을 학이 춤을 춘다는 뜻의 무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형적으로 마을을 보면 소백산 줄기의 대운산 자락이 되어 소위 명당이라고 불린다. 이 때문에 옛날에는 전국의 유명한 풍수학자들이 많이 다녀갔다고 한다. 현재 한수원 인재개발원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 옛날 '한림 명산'으로 불리는데 이곳에서 공부를 하던 선비들이 많았다고 한다.

 

신고리3,4호기 원자력발전소 부지에 편입되어 간절곶으로 이주 한 신암리 비학마을 망향비

비학 마을에 원자력 교육원이 처음 들어선 것은 1978년이고 이후 신고리1,23,4호기가 들어섰다. 마을 사람들은 원전이 들어서면서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우선 대부분의 땅이 개발제한 구역으로 묶이는 바람에 개발을 할 수 없어 재래식 농어촌 가옥을 그대로 사용해야 했다. 또 논과 밭 등 각종 부동산이 팔리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이곳 주민들은 전력 생산도 좋고 개발도 좋지만 조상 대대로 살아온 이 땅이 지도상에서 없어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리(新里)마을 지명은 운암(雲岩)마을의 이름을 따서 새운암으로 불려오다가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리(新里)로 바꾸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으며 당시 건립되었던 서생어업조합 사무실과 사택건물 등이 아직 남아 있다. 당시 일본의 수곡수산(守谷水産)이란 회사가 부산과 방어진간의 물류를 운반했는데 이 화물선이 신리항에서 출·입항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의 제일무역회사가 출범, 어부들이 잡아온 붕장어(아나고)를 일본으로 수출하여 동해산 장어수출 기지항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후 1960년대에는 밀복잡이 주항으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카페와 맞집으로 어우러진 신리항
카페 히든 블루에서 본 신암항
카페 히든 블루에서 본 신리항
신암항 전경

면소재지가 있는 신암(新岩)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 유물인 즐문토기(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 곳으로 옛날부터 기후가 따뜻하고 바다와 접하여 먹을 것이 많았던 지역으로 가장 먼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살았던 지역으로 알려졌다. 이 유물은 서울 중앙국립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마을 앞 해변은 주로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때문에 사시사철 낚시꾼들이 모여들어 낚시를 즐기는데 흑돔과 노래미 등이 주로 잡힌다. 마을에는 신선암(神仙岩)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위가 넓고 펀펀한데 45덩이의 큰 바위가 첩첩으로 돼 있고 신선암(神仙岩)이라 불리게 된 것은 봄과 여름, 바다로부터 안개가 일어나 마치 신선이 옷을 입은 것 같아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바위에 오르면 아무리 더운 여름날이라 해도 선선하다고 한다.

 

신암(新岩)마을 이전 이름은 마을 앞에 구름 같이 희고 큰 바위가 보여 그 바위 모양을 따서 구름 '()'자와 바위 '()'자를 따서 운암동(雲岩洞)이라 정하였다고 한다. 마을 한 가운데는 마을의 역사를 증명하는 운암동(雲岩洞)’이란 표지석과 함께 울타리를 쳐서 바위를 보존하고 있다.

조용하고 한적한 신암항의 모래밭
나사해수욕장과 주변 해안

나사(羅士) 해수욕장의 모래사장 길이는 약 800m, 폭은 1020m로 여름이면 부산, 울산 등지에서 피서객이 몰려와 만원을 이룬다. 기후도 해양성 기후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마을 뒤쪽의 봉대산이 북풍을 막아주어 따뜻하다. 나사(羅士)라는 이름은 나사(羅沙)에서 바뀌진 것으로 모래가 계속 쌓여 육지로 변하여 모래가 뻗어나간다하여 '나사(羅沙)'라고 사용하다가 그 후 선비가 많이 배출되기를 원해 '나사(羅士)'로 사용했다.

 

카페 쿠즈베리에서 본 나사 바닷가
카페 나살에서 본 나사바닷가의 모래사장

나사(羅士) 멸치잡이가 유명한데 멸치를 잡는 방법으로 지인망을 사용한다. 지인망은 일명 후리라고 하는데 한쪽 그물 끝을 육지에 두고 다른 한쪽 끝은 어선에서 펼치면서 여러 사람이 양쪽을 끌어당겨 멸치를 잡는 방법을 말한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방법으로 멸치를 많이 잡아 주민 소득이 높았으나 최근 들어서는 어획고가 고갈이 되면서 이런 모습을 찾기가 힘들다. 또 미역을 많이 생산하고 있어 마을 곳곳에서 미역을 말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이 마을 봉대산을 중심으로 금맥이 있다는 얘기가 전해지면서 일본 사람들이 금을 채굴했던 곳이기도 하다. 봉대산 서쪽에는 지금도 구덩이가 많아 당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해방 이후에는 봉대산 금맥이 마을이 있는 해안까지 뻗었다고 해 한때는 마을 사람들도 금을 찾아 나섰으나 성공을 하지 못했다.

카페 AOP
서생 배를 형상화한 크림빵
카페 AOP의 규모는 무척 크다.
카페 AOP에서 본 나사 바닷가
카페 온돌라상에서 본 고양이
나사 바닷가에 위치한 카페 해밀

마들이 넓고 평평하다는 뜻의 평동(平洞)마을은 뒷산이 동서로 가로막고 있고 마을이 남쪽으로 향해 있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1910년 이전에는 마을이름이 새터 라고 불렀다고 한다. 1940년 이전까지 이 마을에는 천주교와 기독교의 예배터가 있었다고 하나 그동안 신자가 줄어들어 예배장소가 경작지로 바뀌었고 예전의 종교적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은 새예루살렘 공동체가 있다.

평동마을 바닷가 횟집거리의 일몰

한반도 동해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대송(大松)마을은 마을 앞이 확 트여 서생면에서는 수평선을 가장 넓게 볼 수 있고 뒤로는 송림이 우거져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이 마을의 간절곶이 전국 명소가 되면서 마을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간절곶의 낭끝 바위는 가장 돌출 지역으로 이곳에서 해를 보는 것이 가장 빨리 볼 수 있다하여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간절곶 앞 바다는 지형적으로 돌출지역이 되어 해류가 급해 옛날에는 이 해역을 지나는 배들이 많이 침몰되었다고 한다.

대송(大松)마을의 이전 명칭은 대륙동(大陸洞)이었는데 대운산 줄기가 바다로 뻗고 있어 이의 대()자와, 육지의 끝(간절곶)이 튀어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후 대륙동의 대()자와 송정동(松亭洞)의 송()자를 따서 대송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이곳에는 항로를 인도하는 등대가 있었다. 이 때문에 2차 대전 때는 미군이 등대를 여러 번 폭격해 주위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등대는 광복 후 다시 복원돼 지금까지 운영이 되고 있다.

산 정상부에 위치한 카페 헤이메르에서 본 바닷가 절경
송정공원

송정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들판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서생, 용리, 나사, 대송 등 다른 마을로 나아가 농사를 지었다마을이름이 송정으로 불린 것은 옛날부터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고 지금도 국도 위쪽으로는 아름드리 해송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다. 이 때문에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마을 사람들이 소나무 송진을 일본에 공출하기 위해 부역에 시달려야 했다.

 

송정공원 앞 바닷가

이 마을 사람들은 송정이라는 이름보다 1914년 이전부터 사용 된 '잿골'이라는 이름이 더 친근하다. 옛날부터 잿골이라고 불린 것은 기와를 구웠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잿골에서 구워진 기와는 서생첨사 관청을 건립할 때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송정공원과 솔개공원 구간의 해파랑길
송정공원과 송정항 구간의 해파랑길
송정항의 바다낚시터
배들의 피항

송정항은 주변에 어항이 개설되기 전에는 간절곶을 항해하던 어선이나 상선들이 계절풍을 만나면 간절곶을 넘기 힘들어 바람이 잘 때까지 정박하여 식수나 식량을 공급받는 피항지 구실을 해왔다.

솔개공원
솔개공원에서 본 진하해수욕장
솔개공원 해파랑길에서 본 솔개해수욕장
솔개해수욕장 주변 경관
대바위공원 입구

대바위공원 곳곳에 해송이 군집을 이루고 있어 경치 또한 좋은 곳이다. 대바위는 진하해수욕장과 솔개해수욕장 사이에 있는 거대한 바위이고 진하 8경 중 '대암초가(臺岩樵歌)' 라고 있는데 대바위에서 나무하는 초동들이 불렀던 노래 소리를 말한다. 대암(臺巖)은 여러 개의 큰 바위가 첩촉(疊矗)해 큰 대()를 이뤘다고 해 한자로 대암(臺巖)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갯방풍과 해당화가 많이 자랐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기가 힘들다. 이중 특히 갯방풍은 중풍의 예방에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꺾어가는 바람에 지금은 보기가 힘들다.

대바위공원에서 본 진하해수욕장
대바위공원과 솔개해수욕장 구간의 해파랑길
해파랑길에서 본 솔개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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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면 진하리에 위치한 진하해수욕장은 울주군, 울산광역시에서 가장 큰 해수욕장으로 길고 완만한 백사장과 시원한 바다바람으로 여름이면 많은 해수욕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특히 파도와 바람이 좋아 서핑과 카이트 서핑 명소로 유명하다. 예전에는 세계 여자비치발리볼대회, 세계 원드서핑대회를 개최 했었다. 그리고 지자체 주관으로 매년 해양스포츠제전, 서머 페스티벌 등 다양한 여름행사를 개최한다. 또한 캠핑장이 조성되어 사계절 가족, 친구단위로 즐길 수 있다.

울주군에서 운영하는 울주해양스포츠센터캠핑장의 송림

 진하해수욕장 앞바다에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섬이 있다. 바로 명선도(名仙島)이다. 신선이 내려와 놀았던 섬으로 과거에는 매미가 많이 울어다 하여 명선도(鳴蟬島)라고 불렀다. 한때는 동백이 자란다하여 동백도(동백도)라고도 불렀다. 섬의 둘레는 330m, 면적은 6,744으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시원한 바다바람과 해안 풍광을 즐기고 느끼기에 좋다.

진하해수욕장 앞바다에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섬이 있다. 바로 명선도(名仙島)이다. 신선이 내려와 놀았던 섬으로 과거에는 매미가 많이 울어다 하여 명선도(鳴蟬島)라고 불렀다. 한때는 동백이 자란다하여 동백도(동백도)라고도 불렀다.
섬의 둘레는 330m, 면적은 6,744㎡으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시원한 바다바람과 해안 풍광을 즐기고 느끼기에 좋다.

옛 풍경에 명선도 부근으로 고기잡이배가 들어오는 것이 절경이라 하여 선도귀범(仙島歸帆)이라 불렸다. 영남읍지(울산)에는 명선도(鳴蟬島)는 서생포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울산서생진지도에는 명산도(明山島), 청구도에는 명산(鳴山), 조선지형도(장생포)에는 명선도(名仙島)로 각각 묘사하고 있다.

명선도에서 본 명선교
회야강 하류에 엘리베이터를 갖춘 최신식 다리인 명선교가 놓아 져서 진하마을과 강양마을 사이를 주민들이 편하게 이동하고 있다. 또한 야경이 아름다워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명선교에서 본 명선도
명선교에서 본 강양마을
명선교에서 본 강양마을 해안선

 서생면과 온산읍 사이를 가르며 유유히 동해로 흐르는 강이 있다. 이 강은 양산시 원효산 원효샘 동쪽계곡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강으로 이름이 회야강(回夜江)이다. 회야(回夜)는 배미를 돌아서 흐르는 강이라는 의미이다. ‘돈다는 말이 ()’, ‘논배미와 같은 말에서 흔히 쓰이는 배미바미(밤이)’로 보아 ()’로 한자화하면서 회야(回夜)로 변한 것이다.

  서생면과 온산읍 사이를 가르며 유유히 동해로 흐르는 강이 있다. 이 강은 양산시 원효산 원효샘 동쪽계곡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강으로 이름이 회야강(回夜江)이다

특히 화정리 앞을 흐르는 회야강을 일승강(一勝江)이라고 부르는데,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조명연합군이 왜군을 무찔러 승리한데서 유래한다지금은 회야강을 따라 자전거 길과 인도가 조성되어 자전거 타는 사람과 트레킹 하는 사람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그리고 예전에는 화정리에서 강 건너 강양리로 가기위해 통시다리로 건너는데 이 다리는 강 속에 자연적으로 있던 돌 중간 중간에 다시 돌을 놓고 둥글게 무더기로 쌓아올리고 그 위로 나무를 놓은 다리다. 돌에 굴(石花)이 많이 붙어 자라기 때문에 다리 이름을 '꿀다리'로 불렸다. ''은 굴의 방언이다.

회야강을 따라 자전거 길과 인도가 조성되어 자전거 타는 사람과 해파랑길로 트레킹 하는 사람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그리고 예전에는 화정리에서 강 건너 강양리로 가기위해 통시다리로 건너는데 이 다리는 강 속에 자연적으로 있던 돌 중간 중간에 다시 돌을 놓고 둥글게 무더기로 쌓아올리고 그 위로 나무를 놓은 다리다. 돌에 굴(石花)이 많이 붙어 자라기 때문에 다리 이름을 '꿀다리'로 불렸다. ''은 굴의 방언이다

 지금은 서생교가 생겨나서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으나 돌들은 세월에 의해 많이 유실되어 다리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회야강 하류에 엘리베이터를 갖춘 최신식 다리인 명선교가 놓아 져서 진하마을과 강양마을 사이를 주민들이 편하게 이동하고 있다. 또한 야경이 아름다워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강양마을에서 본 서생교
서생교 다리 밑 바닷돌에 붙은 굴(石花)

 진하(鎭下)라는 이름은 서생포 진성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현재는 모두 육지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부는 육지, 일부는 기수 지역이었으나 그동안 해안의 융기 현상으로 지면이 높아졌고 이후 마을이 생겨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서생포 왜성의 동문에 배가 접안 할 수 있는 선착장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유유히 동해로 흘러가는 회야강

임진왜란 전승 기념비문 편장군 승첩동(片將軍 勝捷洞)마애비(磨崖碑)

편장군 승첩동은 진하해수욕장에서 남창방향의 군도31호선 도로변 왼쪽 암벽(서생면 서생리 450-2번지)에 새겨진 마애비(磨崖碑)이다편장군은 명나라 신종 때 어양총절사로써 이름은 편갈송(片碣頌)이고 중국 절강성(浙江省) 출신이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 장군 휘하에서 유격장군으로써 평양전투, 마귀(麻貴) 장군 휘하에서는 종군도독으로써 울산왜성(도산성)전투, 서생포왜성 탈환전투 등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후 본국으로 귀국하려 했으나 명나라 조사관 정응태의 모함으로 귀국을 단념하고 조선에 귀화하여 경주 금오산에 은거했다. 이후 편풍세(片豊世), 편풍원(片豊源), 편산보(片山甫) 등 세 아들 또한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와서 아버지 편갈성과 함께 금오산에 살았다편갈성이 세상을 떠나자 금오산에서 삼년상을 치른 후 편풍세, 편풍원은 전라남도 나주(羅州), 편산보는 만경(萬頃)에 각각 정착하여 살았으며 우리나라 절강 편씨(片氏)의 시조가 되었다.

내용을 살펴보면 편장군 승첩동여섯 글자가 새겨진 암벽 면의 크기는 높이 110cm, 70cm로 의미는 편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곳이라는 뜻으로 당시 편갈송 장군의 직책이 종군도독이라서 이곳을 도독동이라 불렸다. 이암벽에 누가, 언제 새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이후 새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옆에는 十一代孫 轉運郞 永基 下馬 壬辰 閏六月日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11대손 전운랑(轉運郞) 편영기(片永基)1892년 임진년(고종29) 찾아와 참배를 하였다는 내용이다. 전운랑은 세곡을 관리하고 운반하는 직책이며 1598년 임진왜란 끝나고 294년 지나서 후손이 찾아 온 것이다1987년 후손들이 편갈송 장군 기적비 유명어양총절사동원도독중군(有明漁陽摠節使東援都督中軍) 유격장모헌편공길송기적비(遊擊將慕軒片公碣頌紀跡碑)를 서생포왜성 동문입구에 세웠다.

「十一代孫 轉運郞 永基 下馬 壬辰 閏六月日」 이라는 명문은 11대손 전운랑(轉運郞) 편영기(片永基)가 1892년 임진년(고종29) 찾아와 참배를 하였다는 내용이다.

성현의 용재총화10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전 우리나라(조선)로 귀화한 인물은 원 말기에 온 설장수(偰長壽)와 명나라 태조 주원장 때 명옥진(明玉珍)의 아들 명승(明昇)과 진우량(陳友諒)의 아들 진리(陳理)이다설장수는 시문에 능해 근사재집과 예재집을 지었고 과거에 급제하여 2품 벼슬을 하였고 그의 아들 미수(眉壽)와 경수(敬壽)도 과거에 급제했다.

명옥진은 원 말기 수주(隨州)사람으로 촉()을 차지한 후 스스로 황제라 일컬었다. 나라이름은 대하(大夏), 연호는 천통(天統)이라고 했다. 그가 5년만에 죽은 후 그의 아들 명승이 우리나라로 귀화했다. 정치적 망명을 한 것이다. 이때 명 태조는 조선에게 그들에게 벼슬주지 말고 백성으로 삼지도 말라고 요구하여 나라에서는 초가집에 노비만 주었으나 여생은 편안하게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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