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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4월부터 온산산업 기지개발로 정든 고향을 등져야했던 온산면 10개 법정리와 19개 행정마을의 주민 2,804세대 1만 3,000여명 이주민(실향민)을 위해 울주군 온산읍 화산리 화산근린공원(화산리 869 외 3필지) 정상에 온산이주민 망향비를 2010년 8월 31일 세웠다. 화산근린공원 망향비는 높이 8.5m, 폭 2.5m의 망향비와 함께 대리석을 좌대로 한 동판에 19개 마을의 사진과 유래가 새겨진 전시물이 조성됐다. 전시물은 동판으로 새겨진 마을 전경과 관련 설명으로 이물질 등이 묻어 있어 주기적으로 관리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누군가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오면 온산국가산업공단이라 답해야 한다. 차라리 우리들 고향이 북한이라면 언젠가 통일이 되어갈 수라도 있으련만, 차라리 우리들 고향이 수몰되었다면 잠수하여 볼 수라도 있을 것을」 먕향의 노래비의 일부로 이주민들 아픔의 깊이가 배어나는 망향의 노래이다.

울산공업도시로의 서막
울산은 1962년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되어 공업화를 맞이하게 되었고 울산공업단지, 온산공업단지 등의 공업 단지를 조성하고 공업용수 공급을 위한 댐을 만들기 시작했다. 특정공업지구의 사업은 정유, 비료, 화력 발전소, 제철 제강 등이었다. 같은 해 9월에 울산정유공장 기공식 이후 울산시 전역과 대현면 상남동 외 5개 동을 범위로 하는 울산도시계획구역이 지정되었다. 구역은 총 면적 176.04㎢로 주거 지역, 상업 지역, 공업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에 따른 후속으로 5만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집과 삶의 터전을 공장과 댐에게 내어 주었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되어 실향민이 되었다. 그리고 이주민들이 옮겨 갈 택지가 이주 전에 완성되지 않아, 택지 조성이 완료될 때까지 월세 방을 전전해야 하였다. 아울러 택지 분양금조차 제대로 낼 수 없을 정도로 보상금이 적어 결국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이주와 공업 단지 조성 역시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않아서 주민들이 공장과 공장 사이에 끼이거나, 공장들에 포위되어 고립된 채 생활하게 되면서 오랜 기간 불편을 겪어야만 하였다. 게다가 공장으로 인한 각종 공해에 시달리면서 질병에 노출되기도 하였다.

온사이주민 망향비에서 바라본 온산공업단지

울산공업지구 조성은 매끄럽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주민들의 피해는 더욱 커졌다. 석유화학공업단지를 조성하기로 하였으나 석유 화학 계열의 공장 유치가 부진해서 공업 단지의 절반 정도에 지역 원주민이 그대로 거주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 울산공업단지 31.40㎢의 면적 중 44%인 13.97㎢에 6,090가구 2만 7000명의 주민이 이주하지 못하고 그대로 살고 있어 울산공업단지 내 모습이 말 그대로 공장 반, 사람 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장 울타리로 길이 막히고 진동, 소음, 폐수, 분진 등 각종 공해로 생활에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역 주민과 공장은 1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마찰을 빚었다. 결국 정부는 1979년부터 이주 보상비를 지급하는 등 5개년 계획을 통해 울산공업단지 내 지역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발전 그리고 어두운 그림자
울산의 또 다른 대규모 공업 단지인 온산공업단지도 마찬가지였다. 온산공업단지는 1974년에 조성하였다. 구리, 아연, 알루미늄 등 비철 금속 산업을 육성해서 석유 화학 제품의 기초 원료 생산을 위해 울산공업단지와 인접한 온산면[현 온산읍] 일대에 조성하였다. 19개 마을이 공장에 터를 내주고 사라졌으며, 1만 3000여 명의 주민이 이주해야 하였다.

그러나 이주 대책에는 문제가 많았다. 무엇보다 이주 단지를 건설해서 주민들을 완전히 이주시킨 뒤 공업 단지를 만들어야 하였지만,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계획 없이 공장부터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즉, 공업 단지에 입주를 희망하는 공장들이 토지를 개별적으로 매입해 아무 때나 공장을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민가와 공장, 농지와 공장이 뒤섞이면서 전체 1만 4000여 명의 주민 중 이주한 사람은 17%인 1,800명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1만 2000명의 주민들은 공장과 공장 사이, 혹은 공장 한 가운데 외딴섬처럼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오염에 노출된 주민들 사이에 온산병(溫山病)이 발병하면서 정부는 공장으로 둘러싸여 있던 16개 마을 주민 1만여 명을 집단 이주시켰다. 온산공업단지 조성으로 인한 두 번째 이주였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주민들이 원한 이주는 아니었지만, 두 번째 이주는 몸과 마음 모두 상처를 남긴 이주가 되었다. 온산 지역 주민들은 공장과 공해에 쫓겨 온산공업단지에서 2㎞ 떨어진 덕신지구로 이주하게 되면서 공해 실향민이 되었다. 생활의 터전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생활, 생계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채 이주가 진행되면서 이들은 또 다른 병인 이주병(移住病)을 앓게 되었다.

울산의 동쪽 해변 마을은 온전히 보존된 곳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서생면, 정자, 방어진, 장생포 해안 일부를 제외하고는 공업 단지가 마을을 밀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화강과 외황강(外煌江) 하구 마을 또한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던 미포만(尾浦灣)과 전하만(田下灣)의 절경은 현대중공업 건설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고, 붉은 동백꽃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아오던 울주군 온산읍 방도리 목도는  드넓은 온산공업단지와 온산항에 둘러싸였다.
공장이 늘어나면서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만큼 대기에 배출된 공해 물질로 인해 환경오염이 심화되면서 이로 인한 피해 또한 점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산업화 초기에는 환경오염으로 입는 피해보다는 성장의 논리가 중시되었다. 경제적 부와 풍요를 얻은 만큼 환경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졌다.

1970년을 넘어서면서 벼의 잎이 노랗게 시들어 가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수확량이 줄기 시작하였고, 공업 단지 인근 해역에서 물고기나 조개, 미역, 전복 등이 폐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농작물의 피해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점차 심해지면서 환경오염의 피해가 사람에게까지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공해로 인한 질병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바로 온산병이다. 온산병의 발생은 환경의 중요성과 오염의 심각성을 울산 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3년부터 온산 주민들은 집단적으로 관절이 아프다거나 신경통 증세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통증을 느끼는 부위는 허리·다리·전신·팔·어깨 등의 순서로 나타났으며, 피부병과 눈병을 동반하기도 하였다. 1985년 온산공업단지 인근의 주민 1,000여 명이 전신 마비 현상을 보이면서 온산병이 한국판 이타이이타이병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온산병이 공해병(公害病)이 아니라고 공식 부인함으로써 논란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마침내 정부가 온산병은 환경 요인의 탓이라고 발표하면서 2,000가구 1만여 명의 피해 주민의 이주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온산병의 구체적인 원인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가 노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층까지 원인 모를 통증과 증세를 보이는 등 공해로 인한 피해를 직접적으로 받게 되면서 울산의 공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온산 지역 주민들은 온산공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이주를 경험한 바 있는데, 온산병으로 인해 다시 이주하게 되어 이주의 고통을 두 번이나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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