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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동천동 산 17번지 소금강산 남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능은 높이 4.4m, 지름 15.7m로 신라 4대 탈해왕릉(脫解王陵)으로 전해지고 있다능 앞의 상석은 조선 왕릉 혼유석 형태로 최근에 설치되었다능의 동남쪽에 있는 숭신전(崇信殿)은 조선 철종 때 반월성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1980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탈해왕릉(脫解王陵)19741230일에 도굴을 당했는데 봉분 동북쪽 중간지점에서 너비 85m, 깊이 4.4m로 도굴갱을 만들어서 도굴을 하였다. 이때 묘제가 6세기 이후에 조영된 횡혈식석실분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탈해왕릉(脫解王陵)의 묘제는 신라초기 목관묘 형태이다.

현재 동천동(東川洞)에 있는 능이 탈해왕릉으로 정해진 것은 20세기 초 석씨 일족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장지로 기록 된 성북양정구(城北壤井丘)와 조선시대 지리지 관련 기록을 근거로 정하였다. 석씨 일족은 성북(城北)을 근거로 동천동(東川洞)에 있는 능을 탈해왕릉으로 정하였다.

오늘날 경주지역에는 양정구(壤井丘)라는 지명은 없다. 구전으로 성동동 전랑지(城東洞 殿廊址) 주위를 양정구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인왕동의 선덕여자 중, 고등학교 남쪽 사거리에서 성동동 전랑지에 이르는 대로 이름이 양정로(壤井路)이다.

탈해왕 시기에는 월성이 축조되지 않았으므로 성북(城北)을 금성 북쪽으로 고려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와 동경잡기에는 금성 위치를 경주부 동쪽 4리에 있는 성동동 전랑지와 남고루 일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석씨 일족은 황오동의 남고루와 성동동 전랑지 북쪽의 가까운 지역이 양정구(壤井丘)로 판단되나 주변에 왕릉이라고 추정되는 고분이 없어 부득이 소금강산 남쪽의 이름 없는 고분을 석탈해왕릉으로 정하였다.

신라시대 왕 중 석씨 왕은 모두 8명으로 시조인 탈해왕을 제외하고는 장지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후기 17세기말~18세기 족보 간행과 이에 따른 조상숭배 대상의 확대가 될 당시 석씨 일족은 경주지역 사회에서 세력이 미약하고 그들만의 족보가 미처 완성되지 못하여 현재 경주 일대 왕릉 중 석씨 왕릉은 이곳 석탈해왕이 유일하다.

경주시 양남면 상계(上溪)리에 서왕(西王)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원래 씨 왕릉이 있어 석왕리(昔王里)이나 마을이름에 그 왕명을 칭하는 것은 곤란하다하여 서왕리로 변하였다고 한다. 예전부터 이 마을 북쪽에 석씨 임금의 능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은 나이가 62세에 왕위에 올랐다. 성은 석씨(昔氏). 토해(吐解)라고도 불렀는데 해를 토해낸다는 뜻으로 훗날 토함산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탈해의 아버지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 용성국(龍城國)의 함달파왕(含達婆王), 혹은 완하국(琓夏國)의 함달왕(含達王) 등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어머니는 여국왕(女國王)의 딸 또는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이라고 하는 등 다국적 혈통을 지닌 인물이 탈해이다. 왕비는 남해차차웅의 딸 아효(阿孝阿尼, 또는 남해차차웅의 누이동생 阿老)부인이다.

즉위 248월에 별세하였고 성의 북쪽 양정 언덕(城北壤井丘)에 장사지냈다.

석탈해의 장지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삼국유사 왕력과 기이편내용이 서로 다르다. 삼국유사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재위(在位) 23년 만인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 29)에 죽어서 소천구(疏川丘) 속에 장사지냈다. 그런데 뒤에 신()이 명령하기를, “조심해서 내 뼈를 묻으라고 했다. 그 두골(頭骨)의 둘레는 석 자 두 치, 신골(身骨)의 길이는 아홉 자 일곱 치나 된다. []는 서로 엉기어 하나가 된 듯도 하고 뼈마디는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천하에 짝이 없는 역사(力士)의 골격(骨格)이었다.

이것을 부수고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 두었다. 그랬더니 신()이 또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東岳)에 안치해 두어라했다. 그래서 거기에 봉안케 했던 것이었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탈해脫解가 죽은 뒤 27문호왕文虎王 때 조로調露 2년 경진庚辰(680) 315일 신유辛酉 밤 태종太宗의 꿈에, 몹시 사나운 모습을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내가 탈해脫解이다. 내 뼈를 소천구疏川丘에서 파내다가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吐含山에 안치하도록 하라.” 은 그 말을 좇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제사를 끊이지 않고 지내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내용을 정리하면, 소천구(疏川丘)에 묻힌 석탈해의 뼈를 꺼내어 이것을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 두었다가 문무왕 때 토함산 정상으로 옮겨 사당을 짓고 동악신(東岳神)으로 제사를 지냈다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 까지 석탈해 사당에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제사를 지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폐사되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없다.

신라 4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 재위 57~80)

석탈해는 키가 9척에 이르고 성품이 너그럽고 지혜로웠고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 이름난 신하인 호공(瓠公)의 집터(뒤에 月城이 됨.)가 좋음을 보고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어놓고는 자기의 집이라 우기니 관가에서는 주장하는 근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자신의 조상이 본래 대장장이였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자고 하여,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자 탈해가 승소(勝訴)하여 그 집을 차지하였다.

이 같은 내용의 설화에서, 첫째 탈해 집단이 경주 동해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그가 죽은 뒤 동악신(東岳神)으로 봉사(奉祠)되었음에서도 확인된다. 둘째는 석씨부족이 어로를 주요생활수단으로 하였지만, 이미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철을 다루는 능력이 왕위계승에까지 연결되는 강점의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탈해는 서기 8(남해 차차웅 5)에 유리왕의 사위가 되고, 서기 10년에는 대보(大輔)란 벼슬에 올랐으며, 유리이사금의 즉위시에 이미 왕위계승의 물망에 올랐지만, 유리이사금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된 다음 유리이사금이 죽자 탈해가 왕위에 올랐다.

탈해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해차차웅의 사위이니 결국 박씨 집단(朴氏集團)의 일원이라는 동속개념(同屬槪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 철을 이용한 군사력 및 거기에 따르는 실질적인 정치실력파의 등장으로 박씨족과 석씨족이 연맹하였으며, 이것은 왕실세력의 폭을 넓혔다고 본다.

즉위 2년 정월, 호공(瓠公을 대보(大輔)로 임명하였고 2월에는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33월 왕이 토함산에 올라가니, 우산 모양의 검은 구름이 왕의 머리 위에 피어났다가 한참 후에 흩어졌다. 5월에는 왜국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고 6월에는 천선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58월 마한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710월 백제왕이 국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까지 넓히고 사신을 보내 왕을 만나기를 요청했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

88월 백제가 군사를 보내 와산성을 공격하였다고 10월에는 백제가 다시 구양성을 공격하자 왕은 기병 2천 명을 보내 그들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12월에는 지진이 있었고 눈이 내리지 않았다.

10년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2백 명을 그 곳에 남겨 거주시키며 수비하게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가 이 땅을 다시 빼앗았다.

11년 정월 박씨의 귀척으로 하여금 국내의 주와 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 직위를 각각 주주와 군주라고 불렀다. 2월에는 순정을 이벌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14년 백제가 침범하였고 17년 왜인이 목출도를 침범하였다. 왕이 각간 우오를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우오가 전사하였다188월 백제가 변경을 약탈하므로 군사를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19년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10월에는 백제가 서쪽 변경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209월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여 와산성을 다시 찾았다. 백제에서 와서 살고 있던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218월 아찬 길문이 가야 군사를 상대로 황산진 입구에서 싸워 1천여 명을 죽였다. 길문을 파진찬으로 임명하여 그 전공에 해당하는 상을 주었다23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북쪽에 나타나더니 20일 만에 사라졌다.

244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금성 동문이 저절로 무너졌고 8월에 왕이 별세하였다. 성의 북쪽 양정 언덕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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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릉(五陵)은 경주시 탑동 67-1번지에 있는 다섯 기의 왕릉으로 1대 혁거세왕(赫居世王, 기원전 57~ 서기 4), 알영왕비,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느 능이 누구의 능인지 명시되지 않고 있다.

신라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은 성이 박씨이며, 전한 효선제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 57) 4월 병진(정월 15]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居西干, 또는 거슬감[居瑟邯]) 이다. 이 때 나이는 열 세 살이었으며 나라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었다. 사라(斯羅)사로(斯盧)라고도 했다. 남산(南山)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에 궁실(宮室)을 세웠다.

일설(一說)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는데 닭이 숲속에서 울었다 해서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이라 했다고도 한다. 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新羅)라는 국호로 정했던 것이다.

박혁거세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삼국유사에서 전해지고 있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이 되던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후에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리고 왕후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하직하였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합장하여 장사지내려하자 큰 뱀이 나타나 방해를 하므로 머리와 사지를 제각기 장사 지내 오릉(五陵)을 만들고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하였다.

오릉은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기이편에 의거하면, 통일신라 중대 이후부터 사릉(蛇陵사릉원(蛇陵園)이라는 능호(陵號)와 함께 혁거세왕과 알영부인의 능 또는 혁거세왕·남해왕·유리왕·파사왕의 능으로 알려지기 되었다.

능원 에는 조선 세종 11(1429)에 왕명에 따라 건립 된 숭덕전(崇德殿)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 33(1600)에 다시 지었고 숙종 20(1694)에 수리하였다. 경종 3(1723)숭덕전이라는 편액을 걸었고, 영조 11(1735)에 건물을 수리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영조 때 수리한 모양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제사는 처음에는 국가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에 와서 박씨 문중에서 주관하여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숭덕전(崇德殿) 일대
알영부인이 탄생하였다는 우물로 전해지고 있는 알영정(閼英井)
알영정(閼英井) 상부는 담암사(曇巖寺)에서 사용 된 장대석으로 우물을 덮고 있다.

영조 35(1759)에 세운 신도비가 숭성각(崇聖閣)에 있는데, 비석에는 혁거세왕과 숭덕전의 내력이 새겨져 있다. 알영부인이 탄생하였다는 우물로 전해지고 있는 알영정(閼英井)이 있는데 담암사(曇巖寺)에서 사용 된 장대석으로 우물을 덮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세워진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가 있다. 그리고 담암사(曇巖寺) 당간지주(幢竿支柱)의 기둥을 사용하여 세운 홍전문(紅箭門)이 있다.

숭성각(崇聖閣)
숭성각(崇聖閣) 입구
숭성각(崇聖閣)  안에는 영조 35년(1759)에 세운 숭덕비(崇德碑)가 있다.
숭덕비(崇德碑)에는 혁거세왕과 숭덕전의 내력이 새겨져 있다.
담암사(曇巖寺) 당간지주(幢竿支柱)의 기둥을 사용하여 세운 홍전문(紅箭門)

담암사(曇巖寺)는 전불시대의 칠처가람지 중 하나로 절터는 현재 숭덕전 일대로 보고 있다. 당간지주(幢竿支柱)7세기로 추정된다. 담암사(曇巖寺)에 대한 기록은 문무왕 9(679)에 사천왕사 다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칠처가람지 중 가장 늦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 가는 입구

오릉의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능부터 제1호분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제5호분까지 부르고 있다. 1호분은 높이 8.7m, 직경 41.4,m5기 중 가장 크다. 2호분은 표주박형태로 높이는 각각 5.1m, 4.5m 직경은 장변 36.5m, 단변 20m이다. 3호분은 제1호분의 동쪽에 있으며 높이 5.1m, 직경 26.1m 이고 제4호분은 제3호분의 북쪽에 있으며 높이 2.5m, 직경18.2m이다. 5호분은 제3호분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 2.1m, 직경 17.5m이다.

표주박형태의 제2호분은 2기의 원형분이 합쳐져서 하나의 표형분이 된 부부합장묘로 추정되고 오릉 구역에 있는 능의 수는 실제로 6기로 능에 묻힌 피장자도 6명이다. 신라에서 5세기 이전에 존재하는 원형봉토분이 아직 확인된 것은 없다. 혁거세왕릉으로 추정되는 제1호분만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나머지는 작은 능이다. 나머지 능의 왕 재위기간이 1세기와 2세기 초로 당시 묘제 양식은 목관묘(木棺墓)로 고려하면 오릉과는 관련이 없다.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가 있는 건물(閣)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세워진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

신라의 묘제 양식은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살펴보면 기원전 1세기부터 1세기 때는 목관묘이고 2세기부터 4세기 중엽은 목곽묘이다. 이들 묘의 형태는 평면 장방형이거나 타원형으로 높이는 1.5m 내외로 소형분이다.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 목관이나 목곽은 부식 및 침하되어 지표상에서 발견하기가 어렵다. 간혹 도로개설이나 건물신축과정에서 발견되고 있다.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 때는 적석목곽분이고 6세기 중엽이후 부터는 횡혈식석실분이 축조되었다.

오릉의 묘제 대한 고고학적 결론을 보면 능의 축조 시기는 6세기 전반으로 귀족의 묘로 규모가 가장 큰 1호분 적석목곽분을 중심으로 신분적으로 차별성을 가진 혈연집단, 또는 배장묘로 보고 있다.

오릉을 만나기 위해 지나가는 숭의문
오릉 앞 제자 지내는 제각

그럼 문헌 기록을 통해 오릉의 실체를 들여다보자.

삼국유사에 박혁거세의 능을 오릉으로 기록한 것은 신라 불교공인에 따라 구전으로 전승 된 설화로 변재천녀(辨才天女)의 시신을 각각 매장하여 오릉을 조성한 불교설화를 박혁거세의 사변설화(蛇變說話)로 변형하여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오릉의 다섯 능을 박혁거세왕,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을 의도적으로 설정하여 기록하였다. 왕비인 알영부인의 능은 언급 없이 묵시적으로 오릉에 포함시켰다. 이후 17세기 박씨 문중에서 대외적으로 오릉에 알영부인을 포함시켰다.

실제 박혁거세의 능을 포함한 신라 초기 왕들의 능은 어디에 있을까?

박씨 일족의 세력권인 남산 서부 구릉지 또 남산 서북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박혁거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 13년을 현재 창림사지에 거주하였고 즉위 21년 때 축조한 궁궐, 도성 역할을 했던 금성 위치는 현재 경주고 일대 또는 월성 서쪽 끝을 추정하고 있다. 이후 5대 파사왕 즉위 22년 때 금성에서 현재 반월성인 월성으로 궁궐을 옮겼다.

신라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즉위 8(기원전 50)에는 왜인들의 침임이 있었으나 왕이 덕이 있음을 알고 물러갔다고 되어있고 즉위 17(기원전 41)에는 왕과 왕비가 전국을 돌며 민정을 살피면서 농업과 양잠을 독려했다 즉위 19년 봄 정월에는 변한이 항복해 왔고 즉위 21년에는 도성을 지었는데 이를 금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 금성은 신라 최초의 도성인 셈이다.

즉위 30, 낙랑이 쳐들어왔다가 노적가리가 밖에 쌓여있는 것을 보고 도적질 하지 않는 의로운 나라라 하여 물러갔다고 되었다즉위 38년, 봄 2월에 호공을 보내 마한을 예방하였다. 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본래 왜인이었는데,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호공(匏公)이라고 불렀다.

즉위 39, 마한 왕이 별세하였고 곧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즉위 53, 동옥저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쳤다.

즉위 61, 3, 별세하였고 사릉에 장사지냈다.

신라 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재위 서기 4~24)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남해(南解) 차차웅(次次雄)은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알영부인(閼英夫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문(金大問)은 말하기를, “차차웅(次次雄)이란 무당을 이르는 방언(方言)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드디어 존장(尊長)되는 이를 자충(慈充)이라 한다고 했다. 오직 남해왕(南解王)만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 불렀다.

왕비는 운제부인(蕓帝夫人) 또는 아루부인(阿婁夫人)이다. 지금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雲梯山) 성모(聖母)가 있는데 가뭄 때 여기에 기도를 드리면 감응感應이 있다)이다. 삼국사기에 남해 차차웅은 키가 크고 성품이 심화하였으며 지략이 뛰어났다고 되었다. 즉위년에 낙랑국(樂浪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즉위 5년에는 석탈해를 사위로 삼고 즉위 11년에는 왜인이 침략하였고 낙랑이 금성을 공격하였다. 전한(前漢)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甲子; 4)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지 21년 만인 지황(地皇) 4년 갑신(甲申; 24)에 죽었다. 이 왕이 삼황(三皇)의 첫째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사금(尼師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잇금[齒理]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했다. 처음에 남해왕(南解王)이 죽자 그 아들 노례(弩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이에 탈해(脫解)가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성스럽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한다하고 떡을 입으로 물어 시험해 보았다.

고전(古典)에는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했다. 이것을 김대문(金大問)은 해석하기를, “마립간(麻立干)이란 서열을 뜻하는 방언(方言)이다. 서열(序列)은 위()를 따라 정하기 때문에 임금의 서열은 주()가 되고 신하의 서열은 아래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했다.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왕(新羅王)으로서 거서간(居西干)과 차차웅(次次雄)이란 이름을 쓴 이가 각기 하나요, 이사금(尼師金)이라고 한 이가 열여섯이며,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이가 넷이다. 신라 말기의 명유(名儒) 최치원(崔致遠)<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지을 적에는 모두 모왕(某王)이라고만 하고 거서간(居西干) 등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혹시 그 말이 야비해서 부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인가. 그러나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록하는 데 방언(方言)을 모두 그대로 두는 것도 또한 마땅한 일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이들을 갈문왕(葛文王)이라고 불렀는데, 이 일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남해왕(南解王) 때에 낙랑국(樂浪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또 천봉(天鳳) 5년 무인(戊寅; 18)에 고구려(高句麗)의 속국인 일곱 나라가 와서 항복했다.

신라 제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金, 재위 서기 24~57)

남해 차차웅의 태자이며 노례이질금(弩禮尼叱今)으로 삼국유사에서는 기록되었다. ()의 이름은 알 수 없고,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 박씨, 혹은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 혹은 사요왕(辭要王)의 딸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으며, 일지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한다.

이사금이라는 왕호는 이질금(尼叱今), 치질금(齒叱今)이라고도 쓰는데, 󰡐잇금(齒理,또는 나이의 순서)󰡑을 의미하는 신라 방언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사금시대 왕의 성격은 부족연맹장(部族聯盟長)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즉위 5(서기 28)에 민신을 살피다가 얼어 죽어가는 노파를 보고 최극빈층을 돌보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다음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였고, 차사(嗟辭)와 사뇌격(詞腦格)이 있었다. 또 보습과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즉위 9(32)6(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이들에게 이(), (), (), (), (), ()의 성()을 주었으며, 17관등(官等)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때 6부를 정한 기념으로 6부의 여자들을 두 편으로 갈라 길쌈을 짜게 하여 815일에 그 많고 적음을 보아 승부를 결정짓는 가배(嘉俳)놀이를 시켰는데, 이때 부른 노래가 회소곡(會蘇曲)이었다. 가배놀이는 우리 고유의 공동노동양식인 두레나 품앗이로 변천하였고 이것이 후일 여성 집단인 원화(源花), 남성 집단인 화랑(花郞)이 되었다.

즉위 14(서기 37)에는 고구려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하였고 그 낙랑의 피난민 5천여명이 귀순해왔다고 한다. 이 낙랑은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가 나오는 그 낙랑이다.

즉위 18(서기 42)에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 해에 고구려(高句麗) 군사가 침범해 왔다. 유리 이사금은 재위 34년 되던 해에 두 아들을 제치고 재능이 뛰어나다는 이유를 들어 매형인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잇게 하고 죽어, 사릉(蛇陵)에 묻혔다.

신라 5대 파사이사금(婆裟尼師金 재위 서기 80~112)

삼국사기에서는 파사왕의 출생에 대해 두 가지 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 유리이사금의 둘째아들로 태자 일성(逸聖)보다 인품이 뛰어나 즉위하였다고도 하고, 둘째, 유리이사금의 아우인 내로(奈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파사이사금의 어머니는 사요왕(辭要王)의 딸이고 왕비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사성부인(史省夫人, 혹은 史肖夫人)이다.

파사이사금이 유리이사금의 직계라면 탈해이사금 이후 왕위를 계승한 것이 문제가 없으나, 그가 내로(奈老)의 아들일 경우 월성(月城)에 기반을 둔 석씨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즉위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파사이사금은 즉위 2(서기 81) 2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3월에 주군(州郡)을 두루 돌며 위무하고, 창고를 열어 어려운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의 정상을 살펴 두 가지 사형죄[二罪]가 아닌 사람은 모두 풀어 주었다고 되어 있다.

한편, 내우외환에 대비하기 위해 즉위 3(서기 82) 봄 정월에 영()을 내려 말하였다. 지금 창고는 텅 비었고 병기는 무디어져 있다. 만약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있거나 변방에 변고가 있으면 무엇으로써 그것을 막겠는가?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게 하고 병기를 벼리어서 뜻밖의 일에 대비하라고 하였다 한다.

이 시기에 신라는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인들에게도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도 나타나 있다. 즉위 8(서기 87) 가을 7월에 영()을 내려 말하였다. 나는 덕이 없으면서도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여 있고 남쪽은 가야와 연접해 있다. 나의 덕은 능히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은 이웃 나라를 두렵게 하기에 부족하니 마땅히 성루(城壘)를 수리하여 침입에 대비하라.

이 달에 가소성(加召城)과 마두성(馬頭城)의 두 성을 쌓았다. 이 두 성은 신라가 금성을 벗어나 세운 최초의 국경방위시설이었다. 즉위 22(서기 101)에 월성을 쌓아 궁실을 옮겼다. 즉위 33(서기 112)에 죽자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 지냈다고 되어 있다.

오릉 내 조성 된 연못

일부 학계에서는 오릉, 사릉을 쿠데타 즉 반란의 결과로 보고 있다. 반란으로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왕비, 장남 등 직계가족이 처참히 살해되었고 7일이 지나서 시신을 찾을 수 있었으나 시신 훼손이 심하여 식별할 수 가 없었다. 이에 다섯 기의 능을 축조하여 시신을 각각 안치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오릉에서 바라본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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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38대 원성왕릉(785~798)은 토함산 서쪽 자락인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번지에 있다. 원형봉토분으로 높이 7.5m, 봉분직경 22.2m로 봉분아래에는 봉토를 보호하기 위한 면석(돌판)과 탱석(버팀돌)을 각각 연결하여 호석을 마련하였으며 탱석 12개에는 무복(武服)의 십이지신상을 부조하였다. 호석과 가장자리의 석 난간 사이의 바닥에는 박석을 깔아 회랑을 조성하였다. 봉분의 동남쪽에는 상석을 설치하였고 봉분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위치로부터 동서로 약25m 사이를 두고 북쪽으로부터 돌사자(석사자상) 두 쌍, 관검석인상(冠劍石人像) 1쌍, 호인상(胡人像) 1쌍, 화표석(華表石) 1쌍을 차례로 마주보도록 배치하였다.

신라38대 원성왕릉(785~798)은 토함산 서쪽 자락인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번지에 있다.
능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위치로부터 동서로 약25m 사이를 두고 북쪽으로부터 돌사자(석사자상) 두 쌍, 관검석인상(冠劍石人像) 1쌍, 호인상(胡人像) 1쌍, 화표석(華表石) 1쌍을 차례로 마주보도록 배치하였다.
호석과 가장자리의 석 난간 사이의 바닥에는 박석을 깔아 회랑을 조성하였다

이들 중 호인상과 화표석은 원성왕릉에 처음 세운 것으로 특이한 몽둥이를 들고 있는 호인상은 당 능묘에 매납했든 것으로 서역인 또는 불교의 신장상 모습을 하고 있다. 죽은 자와 산자의 경계 표시로 죽은 자의 부활을 염원하고 후손들의 번창을 상징하는 화표석은 인도 아쇼카석주 형식을 중국 남조의 황제릉에서 받아들인 후 당에 이르러 새로운 형태로 완성된 것을 신라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동쪽방향 석조물
서쪽방향 석조물
화표석(華表石)은 죽은 자와 산자의 경계 표시로 죽은 자의 부활을 염원하고 후손들의 번창을 상징한다.
화표석은 인도 아쇼카석주 형식을 중국 남조의 황제릉에서 받아들인 후 당에 이르러 새로운 형태로 완성된 것을 신라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특이한 몽둥이를 들고 있는 호인상(胡人像)은 당 능묘에 매납했던 것으로 서역인의 모습 또는 불교의 신장상 모습을 하고 있다.

관복 위에 갑옷을 걸친 관검석인상은 두 손으로 긴 칼을 세워 쥐고 있으나 관복으로 덮여 있어 칼자루가 보이지 않지만 두 발 사이에서 긴 칼끝을 확인할 수 있다. 갑옷은 뒷모습에서 볼 수 있다. 돌사자는 불교조각의 영향으로 좌상을 하고 있으며 동서남북 방향을 주시하고 능을 수호하고 있다. 반면 성덕대왕릉은 북쪽방향을 수호하는 돌사자는 없다.

관복 위에 갑옷을 걸친 관검석인상(冠劍石人像)은 두 손으로 긴 칼을 세워 쥐고 있으나 관복으로 덮여 있어 칼자루가 보이지 않지만 두 발 사이에서 긴 칼끝을 확인할 수 있다.
갑옷은 뒷모습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동쪽방향 돌사자(석사자상)
서쪽방향 돌사자(석사자상)
4마리의 돌사자는 제각자 동서남북 방향을 주시하면서 능을 수호하고 있다.

상석은 탁자형상석으로 두꺼운 큰 판석 5매를 이용하여 탁자형으로 만든 것이다. 상석 옆면의 앞뒤, 좌우는 4매의 판석을 조립하였고 앞뒤 면에는 안상(眼象) 2개를, 좌우 면에는 안상 1개를 각각 모각하였다. 안상의 형상은 첨정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되게 각각 3개의 호형을 연속적으로 모각하였다. 상석 윗면은 1매의 판석을 조립하였다.

상석은 탁자형상석으로 두꺼운 큰 판석 5매를 이용하여 탁자형으로 만든 것이다. 상석 옆면의 앞뒤, 좌우는 4매의 판석을 조립하였고&amp;nbsp;상석 윗면은 1매의 판석을 조립하였다.
앞뒤 면에는 안상(眼象) 2개를, 좌우 면에는 안상 1개를 각각 모각하였다. 안상의 형상은 첨정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되게 각각 3개의 호형을 연속적으로 모각하였다.

능역 내 석물배치는 당의 능묘제도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무열왕릉의 능비 이후 신라인의 뛰어난 조각수법과 창의적인 발상으로 예술적 경지로 완성된 것으로 현존 신라 왕릉 중 가장 화려하고 완벽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십이지신상과 호인상을 호석과 능전에 배치한 것은 신라인의 창조적인 발상이다. 그리고 십이지신상은 왕릉에서의 십이지신상 첫 출현은 33대 성덕왕능이고 여기 원성왕릉의 십이지신상은 무복차림으로 정북은 자()로 시계 반대방향과 정남 오()의 시계방향으로 대칭으로 배치하였고 신라시대에서 가장 우수하고 뛰어난 조각수법이다.

화염문검을 들고 있는 午(말)상
월(도끼)를 들고 있는 未(양)상

 

외날창을 들고 있는 寅(호랑이)상

십이지신(十二支神)은 점성술이 발달한 서아시아의 십이궁(十二宮)印度를 거쳐 中國에 전래된 것으로 ()나라 중기 때 方位時間에 대응시키고 (), (), (), (), (), (), (), (), (), (), (), () 12동물과도 대응시켰다. 후한(後漢) 때 오행상극설 (五行相剋說)에 따라 십이지신을 설명하고 사람의 생년월일(生年月日)을 동물명으로 대신하여 일컬었다. 그리고 나라 때 묘지명판(墓地銘板)의 사면(四面)에 조각하거나 무덤에 넣는 도제용(陶製俑)에도 사용 되었는데 손에 홀()을 들고 문관(文官) 복장(服裝)을 한 인신에 머리만 십이지의 동물로 나타냈다.

불교에서 십이지신(十二支神)은 땅을 지키는 일을 하는 열두 신장으로 약사경(藥師經)을 외우는 불교인을 지키는 신장(神將)으로 12야차대장, 12시왕이라고도 하였다. 약사불의 12대원에 대응하여 약사불을 수호하고 약사의 대원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신장이며 십이신장이 약사여래와 함께 등장하게 된 것은 약사경(藥師經)에 따른 것인데, 석가모니가 약사여래의 본원공덕을 설명할 때 12야차대장이 크게 감명 받아 12대원을 행할 것을 서원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밀본법사(密本法師)약사경을 읽어서 병을 고쳤다는 기록과 김유신(金庾信) 장군도 약사경을 호지(護持)하는 사람과 교분을 가졌다는 기록이 있다. 십이지 신앙 즉 약사신앙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밀교의 영향으로 호국적 성격을 지녔으나, 삼국통일 이후에는 단순한 방위신으로써 그 신격(神格)이 변모되었다.

능의 뒤쪽에는 물이 나오고 있어 축대를 쌓고 물길을 만들어져 있다 .

원성왕릉(元聖王陵)으로 확정되기 전에는 걸 괘()자에 괘릉(掛陵)이라고 불렸고 옛날 이 자리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관을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고 전해 내려왔다. 그래서 능의 뒤쪽에는 물이 나오고 있어 축대를 쌓고 물길을 만들어져 있다. 동경잡기에는 괘릉은 어느 왕의 능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수중에 장사지내고 돌 위에 널을 걸고 흙을 덮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조선후기(17세기말~18세기)부터 1973년 까지 사천왕사터에서 문무대왕비문 발견과 능지탑과의 거리 등 이유로 경주 김씨 문중에서 문무대왕릉이라 주장하였다.

배경에는 조선후기 족보의 간행과 이에 따른 조상숭배 대상의 확대가 됨에 따라 각 문중에서 선조의 행적 재평가(追崇旌閭伸寃追贈), 유적(遺蹟)의 현창(유허비와 신도비 건립, 누정재실정사영당의 건립), 서원(書院) 및 사우(祠宇) 건립, 문중권위의 홍보(선조의 문집간행) 등 앞 다투어 행하였기 때문이다.

원성왕릉 확정 전 신라문무왕릉 표석을 받치고 있던 받침석

1973년에 감은사터와 이견대 등 발굴조사와 경주시 외동읍 말방 숭복사터에서 최치원의 대숭복사 13파편의 비문 발견으로 괘릉의 피장자는 원성왕릉으로 확인되었다. 비문 내용에 따르면 괘릉자리는 신라 귀족(파진찬) 김원랑의 별장터로 곡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원성왕이 죽자 터를 희사하여 장지가 되었고 곡사라는 절은 현재의 말방 숭복사터로 옮기고 연못을 메워 왕릉을 마련했는데 현실에 물이 차서 관을 바닥에 놓지 못하고 벽에 걸어 괘릉이라 불렀다. 곡사는 48대 경문왕 때 원성왕의 원찰로 지정하고 49대 헌강왕 때 절 이름을 대숭복사로 바꾸었다.

김경신은 왕이 되기 전 물과의 관계가 깊다. 첫째가 꿈에 그가 천관사 우물에 들어가는 것이고 둘째는 왕이 되기 위해 북천(알천)에 제사를 지낸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 원성왕이 재위 14년만에 죽으니 유해를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하였다.” 고 되어있고 삼국유사에는 “ 왕의 능()은 토함산(吐含山) 서쪽 동곡사(洞鵠寺; 지금의 崇德寺)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이 있다.”고 되어있다.

38대 원성왕은 내물왕의 12세손으로 성은 김(), 이름은 경신(敬信, 敬愼, 敬則)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인 36대 혜공왕 16(서기780) 2월에 훗날 37대 선덕왕(宣德王)이 되는 김양상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진압하였다. 성덕대왕신종의 주조에 김양상과 김경신이 소임을 맡아 종명(鐘銘)에 이름이 기재되어 있어 두 사람은 긴밀한 관계로 추정된다.

당시 조정은 상대등 양상파와 이찬 지정파로 나누어져 세력을 다투었고 혜공왕은 지정 편을 들었다. 이때 이찬 김지정이 친위혁명 성격의 난을 일으켰고 김양상과 김경신이 난을 진압하면서 혜공왕과 왕비를 살해하였고 김양상을 선덕왕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대한 공로로 김경신은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병으로 죽자 김경신은 태종 무열왕 셋째아들인 김문왕(金文王)5세손인 이찬(伊飡) 김주원(金周元)과의 왕위다툼에서 승리하여 왕이 되었다. 김주원은 777(혜공왕 13) 이찬(伊湌)으로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며, 혜공왕(惠恭王)이 살해되고 선덕왕(宣德王)이 즉위한 780년에 퇴임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주원은 당대의 실력자로서 여러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이 왕위다툼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찬 김주원(金周元)이 처음에 수석 재상으로 있을 때에 김경신은 각간의 지위로 그의 차석 자리에 있었다. 김경신은 꿈에 머리에 썼던 두건을 벗고 흰 갓을 쓰고 손에 12현금(絃琴)을 잡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을 깨어 사람을 시켜서 점을 쳤더니 점쟁이가 말하기를, 두건을 벗는 것은 관직에서 쫓겨날 조짐이요, 12현금을 잡은 것은 칼을 쓸 조짐이요,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들어갈 조짐이외다.라고 하였다. 김경신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걱정하여 문을 잠그고 출입을 하지 않았다. 이때에 아찬 여삼(餘三)이 와서 배알하겠다고 연락하였으나 김경신은 병으로 나가지 못하겠다고 사양하였다. 두 번째 연락하여 말하기를, 꼭 한 번만 뵙기를 바라나이다.󰡑고 하여 이를 승낙하였다.

아찬이 말하기를, 공께서 지금 걱정하는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김경신은 이에 꿈을 점친 사연을 죄다 이야기하였더니 아찬이 일어나서 절을 하고 말하기를, 이 꿈은 아주 길한 꿈이외다. 공께서 왕위에 올라가도 저를 버리시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하여 해몽을 하겠습니다.고 하였다. 김경신은 곧 좌우를 물리치고서 해몽을 청하니 그가 말하기를, 󰡐두건을 벗는 것은 자기 윗자리에 사람이 없다는 뜻이요, 흰 갓을 썼다는 것은 면류관을 쓸 조짐이요, 12현금을 들었다는 것은 12대 손자에게 왕위를 전한다는 조짐이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대궐에 들어갈 조짐이외다. 고 하였다. 이에 김경신이 내 윗자리에는 주원(周元)이 있는데 어떻게 윗자리를 차지할 것인가?하니 아찬이 말하기를, 청컨대 비밀히 북천(北川)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여 그대로 하였다.

얼마 안 가서 선덕왕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주원을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고 그를 대궐로 맞아들이려 하였던 바 그의 집이 개천 북쪽에 있었는데 졸지에 냇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김경신이 먼저 대궐로 들어가 즉위하니 주원의 도당들도 모두 와서 여기에 붙어 새로 등극한 임금에게 배하(拜賀)하였다.

김경신이 왕이 된 배경의 꿈 해몽을 한 세력은 김유신계와 가야계인 것으로 추정된다. 김경신은 왕이 된 후 시조대왕(미추왕), 태종대왕(무열왕), 문무대왕, 조부 흥평대왕, 부 명덕대왕 등 5묘를 정하였고 무열왕계 왕조를 대신하여 원성왕계 왕조가 성립된 것 이며 신라 하대의 왕들은 원성왕의 후손이다. 최치원이 지은 숭복사 비문에 원성왕을 열조(烈祖)라고 호칭하고 있는데 이에 상응하게 그의 능은 다른 왕릉에 비해 화려하다. 무열왕계는 36대 혜공왕으로 끝났다.

즉위년(서기785)에 원성왕은 총관(摠管)을 도독(都督)으로 바꾸었으며, 즉위4(서기788)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였다. 이는 유교경전에 능통한 사람을 3품으로 나누어 실력에 따라 관리로 등용한 것으로, 당시 신라사회에 있어서 무보다 문이 더 중시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한다.

 

786년에는 대사(大舍) 무오(武烏)가 병법 15권과 화령도(花鈴圖) 2권을 바쳤고, 왕 자신도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를 지었는데, 그것은 인생 궁원(窮遠)의 변화에 대한 이치를 담은 것이라 하나 전하지 않는다. 즉위7(서기791)에 제공(悌恭)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하였다. 제공은 785년에 시중(侍中)이 된 인물로 그가 일으킨 반란의 성격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785년에 승관(僧官)을 두어 정법전(政法典)이라 하고, 795년에는 봉은사(奉恩寺, 혹은 報恩寺)를 창건하였으며 망덕루(望德樓)를 세웠다. 처음에는 화엄종(華嚴宗)승려인 묘정(妙正)을 편애하여 내전(內殿)에 맞아들여 떠나지 못하게 하였으나 후에는 왕의 신임을 잃은 듯하다. 즉위14(서기798) 12월에 죽으니, 유명(遺命)에 따라 봉덕사(奉德寺)남쪽 토함악(吐含岳) 서쪽 동굴에 화장하였고, 능을 추복(追福)하기 위한 숭복사(崇福寺)가 세워졌다.

한편 김경신과의 왕위 계승전에서 패배한 김주원은 강원도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로 퇴거(退去)하였다. 원성왕은 786(원성왕 2)에 김주원을 명주 군왕(溟州郡王)으로 책봉하고, 명주·익령(翼嶺, 지금의 양양삼척(三陟근을어(斤乙於, 지금의 평해울진(蔚珍) 등을 식읍으로 주었고 강릉김씨(江陵金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명주도독(溟州都督)은 대대로 김주원의 후손에 의해 세습되었는데, 이들은 신라 말까지 반독립적인 지방 호족 세력으로 남았다. 후삼국 시대 명주 지방의 대표적인 호족이었던 김순식(金順式, 뒤에 王順式]이 그의 후손이다. 이들은 굴산사(掘山寺)의 사굴산파(闍掘山派)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김순식 가문은 고려에 귀의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강력한 호족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2 원성대왕(元聖大王)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찬(伊飡) 김주원(金周元)이 맨 처음에 상재(上宰)가 되고 왕은 각간(角干)으로서 상재의 다음 자리에 있었는데, 꿈이 복두(幞頭)를 벗고 흰 갓을 쓰고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 천궁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에서 깨어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더니 복두(幞頭)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입니다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근심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이때 아찬(阿飡) 여삼(餘三; 어떤 책에는 여산餘山이라 함)이 와서 뵙기를 청했으나 왕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다. 아찬이 다시 청하여 한 번 뵙기를 원하므로 왕이 이를 허락하니 아찬이 물었다. “공께서 꺼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왕이 꿈을 점쳤던 일을 자세히 말하니 아찬이 일어나서 절하고 말한다. “이는 좋은 꿈입니다. 공이 만일 왕위에 올라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서 꿈을 풀어 보겠습니다.” 왕이 이에 좌우 사람들을 물리고 아찬에게 해몽(解夢)하기를 청하니 아찬은 말한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앉는 이가 없다는 것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열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손(代孫)이 왕위를 이어받을 징조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이 말한다. “위에 주원(周元)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상위(上位)에 있을 수가 있단 말이오?” 아찬이 비밀히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지내면 좋을 것입니다하니 이에 따랐다.
얼마 안 되어 선덕왕(宣德王)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은 김주원(金周元)을 왕으로 삼아 장차 궁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의 집이 북천(北川)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냇물이 불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왕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자 대신(大臣)들이 모두 와서 따라 새 임금에게 축하를 드리니 이가 원성대왕(元聖大王)이다.

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이요 성()은 김씨(金氏)이니 대개 길몽(吉夢)이 맞은 것이었다. 주원은 명주(溟洲)에 물러가 살았다. 경신이 왕위에 올랐으나 이 때 여산(餘山)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왕에게는 손자가 다섯 있었으니, 혜충태자(惠忠太子)헌평태자(憲平太子)예영잡간(禮英匝干)대룡부인(大龍夫人)소룡부인(小龍夫人) 등이다.
대왕(大王)은 실로 인생의 곤궁하고 영화로운 이치를 알았으므로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 노래는 없어져서 자세치 못하다)를 지을 수가 있었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大角干) 효양(孝讓)이 조종(祖宗)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왕에게 전했다. 왕은 이것을 얻게 되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텁게 입고 그 덕이 멀리까지 빛났던 것이다.

정원(貞元) 2년 병인(丙寅; 786) 1011일에 일본왕 문경(文慶; <일본제기日本帝紀>를 보면 제55대 왕 문덕文德이라고 했는데 아마 이인 듯하다. 그 밖에 문경文慶은 없다. 어떤 책에는 이 왕의 태자太子라고 했다)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물리고 금() 50냥을 사자(使者)에게 주어 보내서 피리를 달라고 청하므로 왕이 사자에게 일렀다. “나는 들으니 상대(上代) 진평왕(眞平王) 때에 그 피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듬해 77일에 다시 사자를 보내어 금 1,000냥을 가지고 와서 청하며 말하기를 내가 그 신비로운 물건을 보기만 하고 그대로 돌려보내겠습니다하였다. 왕은 먼저와 같은 대답으로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은() 3,000냥을 그 사자에게 주고, 보내 온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자가 돌아가자 그 피리를 내황전(內黃殿)에 간수해 두었다.

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乙亥; 795)에 당()나라 사자가 서울에 와서 한 달을 머물러 있다가 돌아갔는데, 하루 뒤에 두 여자가 내정(內廷)에 나와서 아뢴다. “저희들은 동지(東池)청지(靑池; 청지靑池는 곧 동천사東泉寺의 샘이다. 절에 있는 기록을 보면 이 샘은 동해東海의 용이 왕래하면서 불법佛法을 듣던 곳이요 절은 진평왕眞平王이 지은 것으로서 오백五百 성중聖衆과 오층탑五層塔과 전민田民까지 함께 헌납했다고 했다)에 있는 두 용()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당나라 사자가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있는 용까지 모두 세 용의 모습을 바꾸어 작은 고기로 변하게 해서 통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우리 남편들인 나라를 지키는 용을 여기에 머무르게 해 주십시오.” 왕은 하양관(河陽館)까지 쫓아가서 친히 연회를 열고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어찌해서 우리나라의 세 용을 잡아 여기까지 왔느냐. 만일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형(死刑)에 처할 것이다.” 그제야 하서국 사람들이 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치므로 세 곳에 놓아 주자, 각각 물속에서 한 길이나 뛰고 기뻐하면서 가 버렸다. 이에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철(明哲)함에 감복했다.

분황사 우물

어느 날 왕이 황룡사(皇龍寺)의 중 지해(智海)를 대궐 안으로 청하여 화엄경(華嚴經)50일 동안 외게 했다. 사미(沙彌) 묘정(妙正)이 매양 김광정(金光井; 대현법사大賢法師가 이 이름을 지었다) 가에서 바리때를 씻는데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속에서 떴다가는 다시 가라앉곤 하므로 사미는 늘 먹다 남은 밥을 자라에게 주면서 희롱했다. 법석(法席)이 끝나려 할 무렵 사미 묘정은 자라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푼 지가 오랜데 너는 무엇으로 갚으려느냐?” 그런 지 며칠 후에 자라는 조그만 구슬 한 개를 입에서 토하더니 묘정에게 주려는 것같이 하므로 묘정은 그 구슬을 얻어 허리띠 끝에 달았다. 그 후로부터 대왕(大王)은 묘정을 보면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내전(內殿)에 맞아들여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이 때 잡간(匝干) 한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도 묘정을 사랑해서 같이 가기를 청하자 왕은 이를 허락했다. 이들이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니 당나라의 황제(皇帝)도 역시 묘정을 보자 매우 사랑하게 되고 승상(丞相)과 좌우 신하들도 모두 그를 존경하고 신뢰했다. 관상 보는 사람 하나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사미를 살펴보니 하나도 길()한 상()이 없는데 남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으니 틀림없이 이상한 물건을 가졌을 것입니다.” 황제가 사람을 시켜서 몸을 뒤져 보니 허리띠 끝에 조그만 구슬이 매달려 있다.

황제는 말한다. “나에게 여의주(如意珠) 네 개가 있던 것을 지난 해에 한 개를 잃었는데 이제 이 구슬을 보니 내가 잃은 그 구슬이다.” 황제가 묘정에게 그 구슬을 가진 연유를 물으니 묘정은 그 사실을 자세히 말했다. 황제가 생각하니 구슬을 잃었던 날짜가 묘정이 구슬을 얻은 날과 똑같다. 황제가 그 구슬을 빼앗아 두고 묘정을 돌려보냈더니 그 뒤로는 아무도 묘정을 사랑하지도 않고 신뢰하지도 않았다.

왕의 능()은 토함산(吐含山) 서쪽 동곡사(洞鵠寺; 지금의 崇德寺)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이 있다. 왕은 또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를 세웠고, 조부(祖父) 훈입잡간(訓入匝干)을 추봉(追封)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이라 하고, 증조(曾祖) 의관잡간(議官匝干)을 신영대왕(神英大王)이라 하고, 고조(高祖) 법선대아간(法宣大阿干)을 현성대왕(玄聖大王)이라 했다. 현성대왕의 아버지는 곧 마질차잡간(摩叱次匝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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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7대 선덕여왕(? ~ 647, 재위기간 632년 정월 ~ 647년 정월 : 15)의 능은 보문동 산79-2번지로 경주 낭산(狼山) 남쪽 봉우리 정상(해발 100m)에 위치하고 있다. 산 정상의 남쪽 부분 일부를 깎아 평지로 만든 후 능을 조성하였다. 능은 원형봉토분으로 높이 6.8m, 직경 23.4m, 둘레 73.3m이다. 묘제는 횡혈식석실분으로 추정된다.

선덕여왕릉 찾아가는 길
신라 27 대 선덕여왕 (? ~ 647 년, 재위기간 632 년 정월 ~ 647 년 정월 : 15 년 ) 의 능

봉분자락에는 괴석을 쌓아 만든 호석이 있는데 2~3단으로 높이는 70cm로 봉분 주위를 둘러쌓았다. 현재 선덕여왕의 능은 원형이 아니라 1949년에 보수한 것으로 당시 호석은 봉분의 흙에 덮여 있는데 이를 제거 후 호석을 다시 축조를 하였다. 즉 괴석 몇 개를 나란히 쌓아 나가다가 중간에 큰 평석을 하나씩 세워서 끼우는 방법으로 호석을 조성하였다. 호석에 쓰인 괴석은 재사용하였고 부족한 것은 주변에 있는 돌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덕여왕의 호석은 괴석 몇 개를 나란히 쌓아 나가다가 중간에 큰 평석을 하나씩 세워서 끼우는 방법으로 조성하였다.

낭산(狼山)은 나지막한 야산이지만 신라시대 신유림(神遊林)하여 신령스러운 산으로 숭앙받았다.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실성왕 12(413) 8월에 구름이 낭산에 일어났는데 구름이 누각같이 보이고 사방에 아름다운 향기가 퍼져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의 신령이 내려와서 노는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생각한 왕은 낭산을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겨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하였다.
()은 이리 낭()’로 이리가 엎드린 형상이라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는 사마천의 <사기>에는 동쪽의 큰 별을 ()’이라 한다.” 고 해서 왕궁(월성)의 동쪽에 있는 산이라 낭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삼국사기> ‘잡지·제사지는 신라에서 가장 큰 제사인 대사(大祀)를 지내는 3(三山)으로 나력(奈歷), 골화(骨火), 혈례(穴禮)’를 꼽았는데 학계에서는 3(三山) 가운데 유일하게 왕경(경주)에 속한 나력’(奈歷)낭산’(狼山)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를 통해 우리민족의 토착신앙인 산악숭배 사상을 엿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천년 신라의 망조가 낭산 주변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삼국유사>경명왕 때(918년 혹은 920) 사천왕사의 소조상이 잡고 있던 활시위가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가 짖었으며,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능(善德女王陵)의 상석

선덕여왕은 26대 진평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사이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은 첫 왕비 마야부인에게서 두 딸이 있었는데 첫째 딸은 천명이고 진지왕의 아들 김용수에게 시집을 갔다. 김용수는 진평왕을 이어 왕에 될 수 있으나 진지왕이 폐위되어서 지지 세력이 없었다. 그리고 마야부인이 죽고 둘째 왕비인 승만부인에게 아들이 태어났으나 얼마 되지 않고 죽었다. 이후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녀를 왕위에 추대하였고, 성조황고(聖祖皇姑), 거룩한 조상을 가진 여왕이란 칭호를 올렸다.
왕위에 오를 즈음 선덕여왕은 40세를 약간 넘긴 나이였고 공주시절에 이미 결혼을 하였으며, 남편은 김용춘이다. 김용춘은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른 후 자식을 낳지 못하여 남편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흠반과 을제(乙祭)가 각 각 남편이 되었으나 자식을 잉태하지 못하였다. 당시 신라에는 삼서제도(三婿制度)가 있어 왕녀가 자식을 가지지 못할 때, 남편 셋을 가질 수 있는 제도였다. 후에 29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이 되는 김승만(金勝曼)과는 사촌자매지간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왕이 될 수 있는 성골(聖骨)이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은 즉위하던 해인 632년에 대신 을제(乙祭)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賑恤)하였으며, 633년에는 주군(州郡)의 조세를 일 년간 면제해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634년에 분황사(芬皇寺),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즉위3(서기634)에 인평(仁平)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중고왕실의 자주성을 견지하려고 했다. 다만 즉위 이래 거의 매년 당나라에 대해 조공사신을 파견함으로써 당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 백제의 신라에 대한 공격이 빈번해짐에 따라 당나라와 연합함으로써 국가를 보존하려는 자구책의 일환이였다.
신라는 642년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본격적으로 받았다. 이해에 신라는 백제의 의자왕의 침공을 받아 서쪽 변경에 있는 40여성을 공취 당하였으며,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지금의 南陽)도 고구려백제의 침공을 받았다. 또한 백제장군 윤충(允忠)의 침공으로 낙동강방면의 거점인 대야성(大耶城:지금의 陜川)이 함락 당하였다. 이와 같은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선덕여왕은 김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지금의 慶山) 군주(軍主)에 임명하여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의 구원요청에 접한 당 태종 이세민은 신라 사신에게 세 가지 계책을 제시 하였다. 첫째는 당이 거란과 말갈을 시켜 요동을 치면 고구려가 함부로 신라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고, 둘째는 신라가 당나라의 옷과 깃발을 사용하면 고구려와 백제가 겁을 먹고 도주할 것이고, 셋째는 여왕을 폐위시키고 그 대신 자기의 친족을 신라의 왕으로 앉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계책은 당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이고 신라 사신을 농락하는 것이라서 사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644년 정월에 다시 사신을 당에 보내 군대를 요청하였고 당 태종은 고구려에 이현장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을 종용했으나 연개소문(淵蓋蘇文)에 의해 거부되고 말았다. 그 무렵 신라의 김유신은 백제를 공격하여 일곱 성을 회복하였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6453월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김유신은 다시 출전하여 2천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뒀다. 그해 5월에는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 공격하자, 선덕여왕은 군대 3만을 동원하여 협공을 하였다. 이 때 틈을 노려 백제가 신라변경을 급습하여 일곱 성을 점령했다. 이 무렵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자장(慈藏)의 건의에 따라 호국불교의 상징인 황룡사9층탑(皇龍寺九層塔)645년에 건립하였다.

그런데 당 태종 이세민이 제시한 계책이 신라 정계에 파문을 일으켜 647년 정월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것을 구실로 명활산성을 장악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비담(毗曇)은 석()씨 계열의 수장으로 645년에 상대등에 임명된 인물로 당시 백성들에게 명망이 높아서 반란에 많은 군대가 참여하였다. 그러나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 알천에 의해 진압되었고 비담 등 진골 귀족들은 9족이 멸족 당했다. 선덕여왕은 이미 병을 앓고 있어 이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병세가 악화되어 64718일에 재위 16년 만에 죽으니 시호(諡號)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선덕(善德)이란 이름은 불교적인 것으로 5세기 초 인도 출신의 학승 담무참(385~433)이 번역한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想經)에 나오는 선덕바라문을 따온 것인데 선덕이란 이름을 사용한 사람 불경에 여러 명 나타난다. 선덕바라문은 석가모니로부터 불법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교화시킨다는 전륜성왕의 운명을 예지 받는 인물이다. 인도에는 아소카왕이 선덕바라문 같은 운명을 갖고 있었다.

선덕왕(善德王) 지기삼사(知幾三事)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에 나타난 지기삼사(知幾三事) 내용은 다음과 같다.
27대 덕만(德曼; 은 만으로도 씀)의 시호(諡號)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 ()은 김씨(金氏),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 632)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나라 태종(太宗)이 붉은빛자줏빛흰빛의 세 가지 빛으로 그린 모란[牧丹]과 그 씨 서 되[]를 보내 온 일이 있었다. 왕은 그림의 꽃을 보더니 말하기를, “이 꽃은 필경 향기가 없을 것이다하고 씨를 뜰에 심도록 했다. 거기에서 꽃이 피어 떨어질 때까지 과연 왕의 말과 같았다.
둘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 4일 동안 울어 댄 일이 있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상히 여겨 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 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精兵) 2,000명을 뽑아 가지고 속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찾아 가면 반드시 적병(賊兵)이 있을 것이니 엄습해서 모두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서교(西郊)에 가 보니 부산(富山) 아래 과연 여근곡(女根谷)이 있고 백제(百濟) 군사 500명이 와서 거기에 숨어 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백제의 장군(將軍) 우소(亏召)란 자가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으므로 포위하고 활을 쏘아 죽였다. 또 뒤에 군사 1,200명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모두 쳐서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셋째는, 왕이 아무 병도 없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이 그게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니라.” 그 날이 이르니 왕은 과연 죽었고, 여러 신하들은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호대왕(文虎()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는데 불경(佛經)에 말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忉利天)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대왕(大王)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

왕이 죽기 전에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어떻게 해서 모란꽃에 향기가 없고, 개구리 우는 것으로 변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왕이 대답했다.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
또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병사(兵士)의 형상이요. 옥문(玉門)이란 곧 여자의 음부(陰部)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빛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근(男根)은 여근(女根)이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탄복했다.
꽃은 세 빛으로 그려 보낸 것은 대개 신라에는 세 여왕(女王)이 있을 것을 알고 한 일이었던가. 세 여왕이란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이니 당나라 임금도 짐작하여 아는 밝은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선덕왕(善德王)이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별기(別記)>에 말하기를, “이 임금 때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했다.

여왕을 사랑한 지귀(志鬼)의 이야기, 심화요탑설화(心火繞塔說話)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은 조선 선조 때 권문해가 편찬한 백과서로 여기에 선덕여왕을 사모하다가 죽어서 화귀(火鬼)가 된 자귀의 사랑을 그린 설화, 심화요탑설화(心火繞塔說話)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덕여왕이 영묘사(靈妙寺)란 절에 나들이를 갔다. 그 절에서 활리역의 역리(驛吏) 지귀(志鬼)라는 총각이 여왕을 한 번 본 후 그만 깊은 짝사랑에 빠졌다.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여왕을 사랑한 지귀 총각은 심한 열병을 앓았다. 그러던 중 여왕이 다시 영묘사에 온다는 소식을 접한 지귀는 여왕이 지나칠 목탑 밑에 쭈그리고 앉아 기다렸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지친 지귀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목탑을 베고 잠이 들어버렸다. 그 사이 여왕이 목탑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잠든 지귀를 발견하고는 그 연유를 물었다. 연유를 알고 난 여왕은 불공을 올리고 그 목탑 밑에 자고 있는 지귀의 품속에 자신의 팔찌를 빼내 묻어주고 왕궁으로 떠났다. 얼마 뒤 잠에서 깨어난 지귀는 자신의 품안에 놓인 팔찌를 발견하고는 여왕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자 그녀에 대한 열정이 불로 타올라 그의 몸을 태우고 곁에 있던 목탑까지 태워버렸다. 영묘사의 목탑은 이렇게 연모의 불길로 소실되고 말았다.

선덕여왕이 이 소식을 듣자 주문을 짓게 하여 화귀(火鬼)를 달래도록 하였다. 이후 민가에서는 이 주문을 문 벽에 붙여 화재를 방지하는 부적으로 삼았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귀의 마음 속 울화가
몸을 태우고 화신으로 변했구나.
부디 창해 밖으로 떠나다오
만나지 못하여 친할 수 없음을 어찌하리.“

 자귀의 심화(心火)로 인하여 영묘사는 전소 될 것이었는데 혜공스님의 신통력으로 그 일부는 화재를 면할 수가 있었다. 혜공스님은 원효대사와도 친분이 두터운 이름난 스님이었다. 그는 원효가 여러 불경의 소(疏)를 찬술할 때 서로 질문하고 토론한 상대이기도 하였다.
그는 작은 절에 살면서 언제나 미친 사람처럼 크게 취해서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을 춘 까닭에 사람들은 그를 부궤화상이라 불렀으며 그가 있는 절을 부개사(婦蓋寺)라고 했는데 '부개'는 '부궤'에서 온 말이다
그는 또 절의 우물 속에서 살기도 했는데 한 번 우물에 들어가면 몇 달이나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우물에서 나올 때는 먼저 푸른 옷을 입은 신동이 솟아 나왔으므로 그것을 보고 혜공이 우물에서 나오는 시각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우물 속에서 나와도 옷이 젖지 않았다.
이러한 신통력을 가진 혜공이 하루는 풀로 새끼를 꼬아 가지고서 영묘사를 찾아 왔다. 그는 새끼줄로 금당과 경루와 남문의 낭무를 둘러 묶고는 절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일렀다.
"이 새끼는 3일 후에 풀어야 하느니라."
절을 관리하는 사람은 이상하게 여겼으나 신통력을 갖고 있는 혜공스님의 말이라 그대로 따랐다. 과연 그 3일 되던 날에 선덕여왕의 행차가 있었고, 지귀의 심화로 불이 난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혜공이 풀 새끼로 매어 둔 곳만은 화재를 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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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정월 대보름날이면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대왕바위 앞 해안가에는 전국에서 온 불교 신도들이 용왕제 행사의 일환으로 물고기 방생을 하면서 소원을 비는 곳이다. 또한 무당들도 와서 굿을 올리는데 이곳이 영험하여 최영장군처럼 투구 쓰고 갑옷 입은 문무대왕 형상이 나타난다고 한다여기 대왕바위는 해변에서 약 200m 거리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 자연바위로 신라 최초 화장을 하여 동해용 된 사적 제158호인 문무대왕 수중릉(水中陵)이다. 동해용이 된 문무대왕에게 많은 불교신도들이 소원을 빌었고 무당들은 영험한 기를 받으려고 여기를 찾았다.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대왕바위 앞 해안가에는 유달리 갈매기가 많다.

68171일 지략가이자 삼한통일을 이룩한 신라 제30대 왕인 문무대왕(재위기간 : 6616~ 6817, 201개월)이 승하하였다. 문무대왕의 이름은 법민이며,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 이였다. 어머니는 문명 왕후이며, 김유신 장군의 누이였다. 법민은 외모가 영특하고,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태종 원년(654)에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이 되었다가 곧 태자로 책봉되었다. 태자 때부터 삼한통일 전쟁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660년 백제 정벌 전쟁 때는 태종 무열왕을 대신하여 신라군을 직접 지휘하였다. 661년 태종 무열왕이 죽자 신라 제30대 왕이 되었고 676년 대동강 이남 땅을 장악하여 삼한 통일의 과업을 성취하였다.

 주목할 것은 문무대왕의 능으로 신라 최초 불교식 화장을 하였고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수중릉이다. 이후 화장을 한 신라왕은 34대 효성왕, 37대 선덕왕, 51대 진성여왕이며 진성여왕은 화장 후 동해바다에 산골(散骨)하여 능이 없다. 그리고 38대 원성왕은 화장 후 매장을 했기 때문에 괘릉이라는 능이 있다. 문무대왕은 말년에 병환으로 세상 떠나기 전 불교 법식으로 화장하고 장례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별세 후 10일 지나 고문외정(庫門外庭)에서 화장을 하였고(이화소장 : 以火燒葬) 다음 해 5월 이곳 봉길 바닷가 바위섬에서 장골(藏骨)하여 10개월간의 장례 여정을 마쳤다.

신라 최초 화장을 하여 동해용 된 사적 제158호인 문무대왕 수중릉(水中陵)

문무대왕의 수중릉 여부는 과거 학계에서 문무왕의 장례가 산골이냐, 장골이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논란의 한가운데 있었다. 이에 71년대 신라오악조사단과 KBS 역사스페셜에서 문무대왕릉의 진위여부를 조사하였고 그 결과를 보면, 문무대왕릉은 큰 네 개의 암초에 십자가 모양의 물길(3.5m)이 동, , , 북으로 형성되어 있고 십자가 모양의 중앙에는 웅덩이 모양이 형성되어 있고 거북이 등 모양의 바위(길이 3m, 2.2m)가 한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물길은 동쪽에서 물이 들어와서 서쪽으로 물이 나가는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KBS 역사스페셜 조사 때 동쪽 입구를 막고 양수기로 배수를 한 후 상세 조사를 해보니, 거북이 등 모양 바위는 암반 위에 평평하게 자리 잡아 둘 사이에 공간 없고 부장품 또한 없었다. 웅덩이의 수심은 1.5m이고 네 개의 암초는 하나의 암반 위에 형성되었고 거북이 등 모양 바위 또한 이 암반에서 떨어져 나온 바위였다. 여기서 인위적으로 작업을 한 흔적은 거북이 등 모양 바위 주위 사면은 정으로 다듬었고, 서쪽으로 빠지는 출구도 낮게 깎았고 거북이 등 모양 바위는 이동하여 남북방향으로 자리 잡아 눕히었다. 즉 화장 후 문무대왕의 유골을 장골하기 위해 동해 바위섬 일부를 인위적으로 조성하였다. 문무대왕릉의 위치 근거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2 만파식적(萬波息笛)과 문무대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본 이견대(利見臺) 위치를 통해 알 수 있다.

문무대왕 별세 후 10일 지나 고문외정(庫門外庭)에서 화장을 하였고(이화소장 : 以火燒葬) 다음 해 5월 이곳 봉길 바닷가 바위섬에서 장골(藏骨)하여 10개월간의 장례 여정을 마쳤다.
문무대왕릉의 평면도와 실측도 : 바닷물의 출입과 중앙에 있는 거북이 등 모양의 바위를 실측적으로 보여준다. 화장 후 문무대왕의 유골을 장골하기 위해 동해 바위섬 일부를 인위적으로 조성하였다.

그럼 문무대왕의 화장터는 어디 일까?

일제강점기 1930년대말 조선고적연구회 명의의 보고서에 낭산 배반동 능지탑터를 화장지 유적 가능성을 언급하였고 1969년부터 197911년간 삼산오악학술조사단의 능지탑(陵旨塔) 발굴 조사 때 유구 중심부 지하에서 땅이 까맣고 불에 탄 흔적 발견하여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추정하였다. 통일신라 당시 신문왕 때 부왕의 화장터를 기념, 보존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배치한 능지탑이 세워진 것으로 판단되었다. 또한 배반동은 옛 부터 대문(大門)터라고 불러서 삼국사기에 나오는 화장장소인 고문외정(庫門外庭)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현재 능지탑은 197810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19791125일에 공사 완료한 모습이다. 능지탑의 다른 이름으로 연화탑(蓮華塔)이라고 불렀는데 상부 옥개부분에 복련의 연꽃 조각한 돌 장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낭산 경주 배반동 낭산에 위치하고 있는 능지탑(陵旨塔)
1969년부터 1979년 11년간 삼산오악학술조사단의 능지탑(陵旨塔) 발굴 조사 때 유구 중심부 지하에서 땅이 까맣고 불에 탄 흔적 발견하여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추정하였다.
통일신라 당시 신문왕 때 부왕의 화장터를 기념, 보존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배치한 능지탑이 세워진 것으로 판단되고 배반동은 옛 부터 대문(大門)터라고 불러서 삼국사기에 나오는 화장장소인 고문외정(庫門外庭)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능지탑의 다른 이름으로 연화탑(蓮華塔)이라고 불렀는데 상부 옥개부분에 복련의 연꽃 조각한 돌 장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낭산(狼山)은 신라시대부터 신이 내려와 거닐던 숲이라 하여 신유림(神遊林)이라 하여 신령스러운 산으로 숭앙받았다. 그리고 낭산을 위에서 보며 형상이 이리처럼 생겼다하여 이리 狼字에 낭산(狼山)이라고 불렀다. 낭산 주변에는 선덕여왕릉, 문무대왕이 호국사찰로 건립한 사천왕사터, 왕실 원복 사찰인 황복사터, 신문왕릉 등이 있다.

사천왕사터 당간지주 옆 벌판에 있는 동귀부와 서귀부
사천왕사터 서귀부(도로변)
마치 살아있는 거북을 연상케한다.

경주국립박물관에 있는 문무대왕비가 사천왕사터의 서귀부에 있는 비임을 확인되었고 서귀부 방향은 능지탑을 바라보는 북쪽방향 인데 일제강점기 때 철도공사에 따라 남향으로 바뀌어졌다문무대왕비에는 앞면에 신라에 대한 찬미, 신라 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의 사적, 문무왕의 사적 및 백제평정에 관한 내용이, 뒷면에는 문무왕의 유언과 장례에 관한 내용 및 비문의 명이 새겨있다.

선상에서 본 문무대왕릉

문무대왕은 왜 화장을 하여 용이 되려고 하였을까?

그것은 통일신라초기 왕권강화이다. 성골에서 진골 金氏 무열왕권의 정당화와 통일신라시대 전제왕권 확립이다. 이전 성골 시대를 살펴보면 신라왕실의 권위와 호국을 상징하는 보물인 신라삼보(新羅三寶)가 있었다. 황룡사 장육상(皇龍寺 丈六像), 천사옥대(天賜玉帶), 황룡사 구층목탑으로 모후의 수렴청정에서 벗어난 진흥왕이 조성한 황룡사 장육상,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왕이 된 진평왕 이 천사(天使)에게 받은 옥대, 신라 최초 여왕인 선덕여왕이 나라 위기 때 완공한 황룡사 구층목탑이다. 즉 문무대왕은 왕즉룡, 사후에 통일신라 진골왕권의 수호용이 된 것이고 더불어 만파식적을 아들 신문왕에게 전달하여 왕권안정을 도모한 것이다.

신라시대에 왜의 침입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초기에 침입이 33회로 주로 3, 4, 5월이며 문무왕대에 없었고 문무왕 이후 왜는 신라에 조공을 바치고 우호적 이였다. 왜는 삼국통일 전개 과정에서 백강전투에서 백제의 지원군이 출현하였고 패배 이후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었다.

삼국사기 권 제6 신라본기 제 6 문무왕 ()

문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법민이며, 태종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 왕후이며, 소판 서현의 막내딸이고, 유신의 누이였다. 유신의 맏누이가 꿈에 서형산 꼭대기에 올라 앉아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흘러 나라 안에 두루 펴졌다. 그녀는 꿈을 깨고난 후에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다. 동생은 장난삼아 내가 언니의 꿈을 사고 싶다라고 말하고, 꿈 값으로 비단 치마를 주었다. 며칠 뒤에 유신이 춘추공과 공을 차다가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이 우리 집이 마침 가까운 곳에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답시다라고 말하고, 춘추와 함께 집으로 왔다. 그는 주연을 베풀고 조용히 보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옷을 꿰매도록 하였다.

그러나 맏누이 보희는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동생이 앞에 나와 옷고름을 달았다. 그녀의 수수한 화장과 경쾌한 의복, 그리고 어여쁜 얼굴은 눈이 부시는듯하였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곧 혼인을 청하여 혼인식을 올렸다. 그녀는 바로 임신하여 남자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를 법민이라 하였다. 왕비는 자의왕후이니 파진찬 선품의 딸이다. 법민은 외모가 영특하고,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영휘 초에 당 나라에 갔을 때, 고종이 대부경 벼슬을 주었다. 태종 원년에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이 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태자로 책봉되었다. 현경 5년에 태종이 당 나라 장수 소정방과 백제를 평정할 때, 법민이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고, 이때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 제7 신라본기 제 7 문무왕 ()

가을 71,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문무라 하고 여러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 동해 어구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 속설에 전하기를 왕이 용으로 변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그 바위를 대왕석이라고 불렀다. 왕은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과인은 어지러운 때에 태어난 운명이어서 자주 전쟁을 만났다. 서쪽을 치고 북쪽을 정벌하여 강토를 평정하였으며, 반란자를 토벌하고 화해를 원하는 자와 손을 잡아, 마침내 원근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선조의 유훈을 받들고 아래로는 부자의 원수를 갚았으며, 전쟁 중에 죽은 자와 산 자에게 공평하게 상을 주었고, 안팎으로 고르게 관작을 주었다.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천수를 다하도록 하였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하여, 백성들은 자기의 집을 편하게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사라지게 하였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 가히 선조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백성들에게도 짐진 것이 없었다고 할 만하였다.

내가 풍상을 겪어 드디어 병이 생겼고, 정사에 힘이 들어 더욱 병이 중하게 되었다. 운명이 다하면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에 동일하니, 홀연 죽음의 어두운 길로 되돌아가는 데에 무슨 여한이 있으랴! 태자는 일찍부터 현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동궁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를 보내는 의리를 어기지 말고, 산 자를 섬기는 예를 잊지 말라. 종묘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어서는 안 될 것이니, 태자는 나의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오 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겠는가? 위 왕의 서릉에는 동작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

옛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나의 혼백을 구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 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둔 열흘 후, 바깥 뜰 창고 앞에서 나의 시체를 불교의 법식으로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은 본래의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 변경의 성과 요새 및 주와 군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은 잘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요, 법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고, 원근에 포고하여, 백성들이 그 뜻을 알게 하라. 다음 왕이 이를 시행하라!”

봉길 지명 유래는 慶州 崔氏가 이 마을을 개척할 때 마을이 마치 봉황이 알을 품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鳳吉"이라 부르다가 조선 말기부터 奉吉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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